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4년
2월6일, 일본 함대들이 황해를 향해 해군기지 사세보港을 출항했다. 한반도 서쪽 남단 지점에서 본대로부터 분리된 제4함대는 2월8일 오후
제물포(仁川)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키고 한반도에 상륙하여 陸路로 북진했다. 일본 함대는 러시아 극동함대사령부가 있는 여순港으로
직진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이것이 러·일전쟁의 시작이다. 한반도를 거쳐 북상하던 일본 지상군은 압록강 전투에서 승리하여
만주로의 진입로를 뚫었다. 일본이 군사 강대국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관측했던 서방 세계는 일본의 연전연승에 깜짝 놀랐다.
일본의 對러시아 승전 비결은 치밀한 준비의 결과였다. 일본은 1895년부터 열강의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軍備 증강에 착수했다. 일본의 의도는 하야시 남작이 1895년 여름, 일본 時事신문에 기고한 글에 나타나 있다.
「일본은 상공업을 촉진시키고 세금을 많이 거두어들여 육군과 해군의 戰力을 강화하는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현재 일본이 해야 할 일은 국력의
토대를 굳건히 하면서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게 조용하게 지내는 것이다. 우리는 극동지역에 언젠가는 분명히 다가올 그 기회를 노리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 일본의 軍備 증강 10개년 계획은 1895년 말에 수립되었다. 광범하게 진행된 이 계획에 따라 租稅 기반이
안정되고 상공업이 촉진되었다. 국방 예산은 매년 엄청나게 늘어났다. 1903년 국방 예산이 1893년보다 세 배 이상 많았다.
軍備 증강 10개년 계획이 종료되었을 시점에 일본은 지상전을 위한 정규군 18만 명과 1, 2단계의 예비군 20만 명씩 등 총 85만
명의 병력을 확보했다. 해군은 戰艦 7척(1등급 6척, 2등급 1척), 순양함 31척(1등급 6척, 2등급 12척, 3등급 13척)을 보유하게
되었다. 일본 해군은 당시 러시아 함대보다 더 최신 장비를 보유했다. 1903년 일본과 러시아는 한국과 만주에 대한
통치권을 놓고 수차례 외교 협상을 가졌으나, 원만한 타결책을 찾지 못했다. 이로 인해 1903년 가을부터 극동에는 戰雲이 감돌기 시작했다. 영국
보험회사 로이드社는 전쟁 발발 가능성이 높은 극동 지역으로 항해하는 선박의 보험료를 두 배로 인상하는 조치를 취했다.
러시아의 자만 일본이 10년 동안 치밀하게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러시아는 전쟁 준비가 철저하지 않았다. 극동함대는 물론이고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일본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과 같은 작은 나라가 거대한 러시아에 타격을 입힐 만큼 힘이 없다고 믿었다. 당시 러시아는 극동군의 戰力을
강화하려 해도 몇 가지 제약 요인을 안고 있었다. 첫째, 극동함대의 타격 능력을 향상시켜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예산이 들 뿐 아니라 개선을 위한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극동함대의 가장 중요한 기지인 여순港은 자체 도킹시설이 부족했고, 전쟁
발발時 군함을 수리할 수 있는 설비조차 되어 있지 않아 인근의 대련港을 이용해야 할 상황이었다. 둘째, 여순港과
블라디보스토크는 1500km 가량 떨어져 있고, 유사시 발틱함대나 흑해함대가 지원을 한다 해도 일본이 영국과 동맹관계이기 때문에 군함과 병력을
극동에까지 신속하게 배치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셋째, 극동에서 현지인들을 군인으로 채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신속하고
풍부한 군수조달에서 곤란을 겪고 있었다. 군수물자는 선박이나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는데 陸路 운송이든 해상 운송이든 원거리 이동과 시간이
문제였다. 철로 운송의 경우, 모스크바에서 여순港까지의 거리는 7500km였다. 일본과의 전쟁을 수행하기에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측은 상황의 긴박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러·일전쟁 발발 당시 극동지역에 배치된 러시아軍은
총 9만9000명이었다. 만주 요양 주변에 집중된 철로를 따라 배치된 병력이 4만5000명, 여순港과 그 주변에 1만9000명, 만주의 남단
해안과 한반도의 국경에 1만9000명,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 1만600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극동함대 戰力은
戰艦 7척(1등급 전함 6척, 2등급 1척), 순양함 11척(1등급 9척, 2등급 2척) 등 총 68척이었다. 이 함대들은 거의 여순港에 정박해
있었고, 블라디보스토크에 1등급 순양함 4척, 인천 제물포에 1등급 순양함 1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전쟁에는 돈이
필요하다. 러·일전쟁 발발 당시 일본이 사용한 戰費는 17억3000만 엔으로 집계되었다. 청·일전쟁보다 8.5배가 많으며, 1903년 일본
국민총생산액 2억6000만 엔보다 6.6배가 더 많은 규모였다. 서방 금융계의 對일본 戰費 지원 일본 정부는 전쟁자금을 국내와
해외에서의 國債 발행과 租稅로 충당했다. 국내 借用 7억3000만 엔, 해외借用 6억9000만 엔, 租稅 수입이 2억5000만 엔인데 戰費의 약
40%가 해외 借用이었다. 당시 열강 대열에 끼지 못한 일본이 어떻게 국제 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릴 수 있었을까. 러·일전쟁
기간 중 해외 자금 조달 임무는 일본중앙은행이 맡았다. 책임자는 다카하시 부총재였다. 그는 러·일전쟁이 발발한 지 두 달 후인 1904년 4월
말, 국제 금융기관들의 일본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고 外資도입의 기회를 모색하라는 정부의 밀명을 띠고 국제금융의 중심지 영국 런던으로 갔다.
영국은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우방국이었다. 런던에서 國債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 경험이 있는 다카하시 부총재는
런던 금융가에 知己가 많았다. 다카하시 부총재가 만난 영국 금융계의 친구들은 러시아와 전쟁에 돌입한 일본에 대한 지지가 대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 정부가 계획한 자금 조달 계획에는 흔쾌히 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전쟁이라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리스크를
떠안으려 하지 않았다. 이들은 다카하시 부총재에게 『미국계 은행을 끌어 들여라』 , 『少額의 재무부 短期 채권 발행으로 시작해 보라』 등의
대안을 제시했다. 다카하시는 런던의 한 금융기관을 찾아가 일본 정부가 지시한 1000만 파운드 國債 발행에 대한 자금
조달을 협의했다. 영국 금융기관은 1000만 파운드 가운데 500만 파운드는 즉시 발행하고, 나머지 500만 파운드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는
조건을 제시했다. 한꺼번에 1000만 파운드의 國債 발행을 원하고 있던 일본 정부는 순차적 발행 조건을 선뜻 수용하지 못했다.
이 무렵 다카하시 부총재는 런던의 친구가 초대한 만찬장에서 우연히 미국 금융인 제이콥 시프와 나란히 앉았다. 다카하시와 제이콥 시프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제이콥 시프는 미국의 투자금융기관인 쿤-로엡社의 최고경영자었다. 그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대규모 철도공사가
시작될 때 필요한 자금 조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유태인 및 非유태인을 위한 자선사업가로서 크게 활동 중인 사람이었다.
유태인과의 운명적 만남
제이콥 시프는 일본이 시작한 러·일전쟁에 큰 관심을 가졌다. 다카하시 부총재는 그에게 전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자신의 영국 방문
목적과 國債 발행의 어려움을 토로했다고 한다. 다음날, 다카하시는 런던 금융기관으로부터 일본 정부가 희망하는 國債
1000만 파운드 중 절반을 미국 금융기관에서 인수할 의사를 밝혔다는 연락을 받았다. 전날 만찬장에서 만난 제이콥 시프가 즉각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제이콥 시프의 일본 國債 인수는 커다란 모험이었다 당시 일본과 러시아는 압록강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어느 쪽이 승리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던 때었다. 다카하시는 國債 발행에 도움을 준 제이콥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하지만 제이콥의
회사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본국에 바로 보고하지는 않았다. 일본의 1차 전쟁 國債
1000만 파운드는 1904년 5월11일, 일본 정부와 영국 금융기관 그리고 미국의 쿤-로엡社의 합의 아래 런던과 뉴욕에서 같은 날 동시에
발행되었다. 금리는 年 6%였다. 미국과 영국에서의 성공적인 國債 발행을 통해 일본은 外資를 도입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방국의 물질적인 지원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러시아와의 전쟁 중인 일본 군대와 일본 국민들의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다카하시 부총재는
그의 회고록에서 밝혔다. 일본군이 러시아를 상대로 압록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일본 정부는 두 번째 國債 발행에
나섰다. 총 규모는 1200만 파운드. 압록강 전투 승리 직후인데도 불구하고 국제 금융계는 일본의 2차 國債 발행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일본 해군이 러시아 극동함대의 주력기지인 여순港을 신속하게 점령하지 못함에 따라 일본의 勝戰 전망이 불투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카하시의
영국 친구들과 제이콥 시프는 시간을 두고 기다려 보자고 했다. 제이콥 시프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러시아 王政
전복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일본을 최대한 지원한다는 입장이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일본이 2차 國債 발행을
추진하고 있던 시기에, 그가 다카하시에게 보낸 電文의 한 문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이번에도 日本 정부를
지원하고자 합니다. 그 길이 이번 전쟁을 조기 종식시키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이콥 시프는 러시아의 차르 體制가
러시아內 유태인들을 핍박하는 데 대해 굉장히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러시아 차르 體制는 부정부패한 王政을 전복하려는 혁명세력을 무마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 19세기 말부터 유태인들에 대한 억압을 의도적으로 강화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유태인 학살 1882년에는 유태인들의
거주지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여 북부 발트海와 남부 흑해 사이의 땅 안에서만 살도록 했다. 정부의 反유태인 억압 조치는 일반 국민들에게
反유태주의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매년 부활절마다 유태인들이 기독교인 소년을 잡아가서 그들의 종교의식을 위해 살해했다는 식의 소문이 퍼지면서
유태인들에 대한 러시아 정교인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는 곳곳에서 대학살을 유발시켰다. 대표적인 학살이
1903년 4월6일, 현재 몰도바의 수도인 키시네프에서 발생했다. 러시아 정교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인 부활절 휴일 동안 발생한 대학살로 유태인
49명이 사망하고, 424명이 부상했으며, 700가구의 유태인 가정과 600여 개 상점이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王政과 치안당국은 현지인들의 對유태인 학살과 방화, 파괴를 관망하거나 미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로 말미암아 폭력 사태가 더욱
확산되었다는 점에 유태인들은 분노했다. 미국 유태인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제이콥 시프는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러시아
유태인들을 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890년대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난 1917년까지 동족 유태인을 핍박한 러시아
차르와 전쟁을 벌였다. 그는 러시아 유태인들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富와 정치적 역량을 활용했다. 그의 네트워크는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형제에서부터 런던의 금융업 친구들, 그리고 러시아 정보원에서부터 영국·프랑스·독일內 유태인 조직의 근무자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었다. 이 같은 국제적인 협력 채널을 동원하여 제이콥 시프는 러시아 유태인들의 사정에 관한 모든 뉴스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상화에 따라 어떤 때는 로비스트로서, 또 어떤 때는 외교관 혹은 기부자로서 활동하며 東유럽 유태인들을 해방시킨 戰士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대학살의 희생자들을 지원하고, 全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태인들을 돕기 위한 미국
유태인위원회(AJC)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제이콥 시프의 주도 아래 미국 유태인위원회는 1906년에 창설되었다.
이 위원회는 미국內 뿐만 아니라 全세계 유태인들이 핍박의 고통에서 벗어나 시민권을 인정받고, 종교활동의 권리를 갖는 데 노력했다. 미국
유태인위원회는 東유럽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 올 수 있도록 문호 개방 조치를 취했다. 이어 미국 유태인들의 러시아 입국
비자 발급 거부를 문제삼아 미국과 러시아 간의 통상조약 폐기를 촉구했다. 유태인들의 로비 활동 덕분으로 80년간 지속되어 온 미국과 러시아의
통상조약은 1913년 1월1일자로 폐기되었다. 제이콥 시프가 다카하시를 처음 만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제이콥 시프의 쿤-로엡社와 그의 협력 금융기관들은 1차 일본 國債 발행 때와 마찬가지로 영국 금융기관들과 협력했다. 이들은 일본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1904년 11월14일, 年 6%의 금리로 1200만 파운드의 일본 國債를 뉴욕과 런던에서 동시 발행했다.
만주 戰線은 시간이 갈수록 일본에 유리했다. 1905년 1월, 일본 해군은 러시아 극동함대 본부 여순港을 점령했다. 일본 육군 역시
만주 곳곳의 전투장에서 우세를 보였다. 일본의 연전연승을 全세계는 경이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본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3차
國債 발행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되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발행한 두 차례의 國債에서 金利가 높다는 점이
다소 불만이었다. 일본 정부는 다카하시 부총재에게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고 신규 國債 발행時 금리를 현실화하도록 지시했다.
다카하시는 런던으로 가는 길에 먼저 뉴욕에 들렀다. 1905년 3월7일이었다. 그는 제이콥 시프를 만났다. 일본의 승리에
크게 고무된 제이콥 시프는 일본 정부가 희망하는 國債 발행액과 金利 현실화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가 직접 영국 금융기관들과 협의를
하겠다고 했다. 영국인들도 일본의 전쟁 승리에 고무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3차 國債 발행은 거액이었지만 金利는 4분의
1이 인하된 수준이었다. 제이콥 시프의 원격 지원과 영국 금융인들의 우호적인 태도에 힘입어 다카하시가 런던에 도착한 지
닷새째 되는 1905년 3월28일, 3000만 파운드의 일본 國債가 金利 4.5%로 발행되었다. 종전대로 절반은 영국 금융기관이, 나머지 절반은
미국 금융기관에서 인수했다. 당시 화폐 가치 기준으로 볼 때, 3000만 파운드는 러시아 극동함대의 모든 자산 가치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같은 일본의 대규모 國債 발행으로 국제 금융시장의 與信 사정이 크게 경색되기도 했다고 한다.
戰費가 바닥난다
1905년 6월경,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러·일전쟁을 종식시킬 평화협상을 중재하고 나섰다. 이 무렵 일본 정부는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다카하시에게 또다시 대규모 國債를 조달할 것을 지시했다. 네 번째 國債 발행이었다. 미국에서 제이콥 시프를 만난 다카하시는 런던 금융계에 협조를
요청하는 電文을 보냈다. 그러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영국 금융기관이 꺼리는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3000만 파운드의
國債가 발행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좋지 않다는 것, 둘째 이미 발행된 國債 중 영국 금융기관에 갚아야 할 돈이 완전히 상환되지
않았다는 것, 셋째 러시아가 비록 전투에서는 매번 패배했지만 그들의 武力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으며 일본과 끝까지 전쟁을 치르겠다는 러시아
중앙 정치세력의 목소리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러시아는 전쟁을 계속 끌면 일본의 금고가 바닥나서 결국 일본이 손을 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전쟁 자금 조달은 일본이나 러시아 모두에게 국가적 현안이었다. 일본으로서는 국제 금융시장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확보해야만 러시아가 일본의 자금력을 얕보지 않고 조기 終戰(종전)에 응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략에서 추진하는 네 번째 대규모 해외 國債가 성공적으로 발행되고 러·일전쟁이 평화협정으로 終戰될 경우, 차입 外資를 戰後 경제복구에
활용하겠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계산이었다. 이 같은 일본 정부의 계획을 들은 제이콥 시프는 다카하시에게 미국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확약을 주었다. 그는 참여를 기피하는 영국 금융기관을 대신하여 독일 금융기관을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제이콥 시프의 사위는 독일인이었다. 사위 집안은 독일 함부르크 소재 바르부르그 은행의 소유주였다. 제이콥 시프는 이 은행을 主간사로 하여 미국
금융기관이 참여하는 방식의 國債 발행 추진 계획을 세웠다. 이 案에 대해 다카하시는 처음엔 망설였다고 한다. 오랫동안 영국
금융기관들과 일해 왔는데, 네 번째 國債 발행에서 동맹국인 영국을 배제한다는 것이 맘에 걸렸다는 것이다. 다카하시는 1905년 7월2일 런던으로
건너가서 國債 발행 금융기관 대표자들을 초청하여 일본 정부의 계획을 설명했다. 결국 런던 금융인들도 참여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1905년 7월11일, 年 4.5%의 金利로 미국·영국·독일이 각각 1000만 파운드를 인수하는 형식으로 총
3000만 파운드의 4차 國債를 성공적으로 발행했다. 일본이 강대국 러시아를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연전연승하는 가운데 국제
금융시장으로부터 계속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의 外資를 도입한 반면, 러시아는 국제 금융시장은 물론, 국내에서도 國債 발행이 불가능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1년 반의 전쟁을 치르면서 러시아의 國庫는 이미 바닥난 상태였고, 자금 조달을 위한 현실적인 방법은 지폐를 계속
찍어내는 길밖에 없었다. 전쟁을 장기화할 경우, 일본이 財政 파탄으로 평화협상을 제의해야 할 것이라는 러시아 측의 기대는 일본의 4차에 걸친
막대한 外貨 조달로 물거품이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은 결국 終戰을 위한 평화협상 테이블에 나왔다.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은 여유로운 外貨 보유와 外貨 조달을 지원해 준 서방국가들의 외교적 지지를 등에 업고 유리한 입장에서 러시아와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제이콥 시프는 독일 태생 미국 금융인 제이콥 시프는 1847년
7월10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일반학교 교육을 받은 후 제이콥은 14세의 나이에 회사 수습사원으로 일했다. 4년이 지난
1865년, 그는 미국으로 이민 가 뉴욕에서 중계업을 시작했다. 1867년에는 미국 금융인 버치와 합작으로 버치-시프社를 세웠고, 1870년
미국 시민으로 귀화했다. 제이콥은 1872년에 회사를 해체하고 독일로 되돌아가, 함부르크에서 잠시 일한 뒤 부친의 사망과
함께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했다. 1874년 뉴욕 투자회사 쿤-로엡社의 수석 파트너 에이브러햄 쿤이 그를 자기 회사에 입사하도록 초청했다. 이를
수락한 제이콥은 1875년부터 미국의 증권들을 유럽 시장에 처분하는 임무를 맡았다. 1875년 5월, 제이콥은 쿤-로엡社의 최고 책임자인 솔로몬
로엡의 딸과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딸 프리에다와 아들 모르타이머를 두었는데, 이 딸이 후에 함부르크 금융 가문인 펠릭스
바르부르그와 혼인했다. 사위 펠릭스는 처남 모르타이머와 함께 쿤-로엡社에서 일했다. 1885년 솔로몬 로엡의 사망과 함께
제이콥 시프가 쿤-로엡社의 경영을 맡게 되었다. 그는 미국 동부의 철도, 특히 펜실베이니아 철도와 루이스빌과 내슈빌線에 대한 투자에 큰 관심을
두었고, 그 후 그의 관심은 극동으로 옮겨갔다. 1800년대 마지막 4반세기 동안 서방 열강들은 일본과 중국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淸日전쟁(1894~ 1895)에서 승리한 이후 극동의 열강으로 부상했다. 미국은 극동의 경제적 이권에 개입하기
위해 개방정책을 표방하는 한편, 극동에서의 미국 존재를 강화시키기 위한 방책의 일환으로 自國 은행들의 현지 투자를 장려했다.
제이콥 시프의 쿤-로엡社는 미국 정부의 제국주의 정책과 무관하게 러·일전쟁 기간 중 일본에 엄청난 금액의 자금을 지원하는 매우
야심적이고 공세적인 해외투자에 착수했다. 그는 러시아의 反유태주의 정책에 반대하여 일본 편을 들게 되었지만, 일본 國債 인수는 자신의 금융
수익을 약속해 주는 비즈니스이기도 했다. 제이콥을 비롯한 미국 금융인들이 러·일전쟁 기간 중 총 4회, 그리고 終戰 후 한
차례 등 모두 5회에 걸쳐 일본에 지원한 자금은 총 1억9600만 달러였다. 쿤-로엡社의 對일본 자금 지원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 한
요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제이콥 본인에게도 중요한 승리였다. 국제 금융시장에서의 그의 활약은 그가 경영을 맡고 있는 쿤-로엡社로 하여금 당시
미국 최대 금융기관인 JP 모건社보다도 더 큰 위력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제이콥 시프의 對일본 지원은 일본인들에게 오랫동안 우호적으로 기억되기도
했지만 일본인들에게 反유태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계기도 되었다. 러·일전쟁 이후에도 제이콥은 자신의 비즈니스와 反러시아 감정으로 인하여 계속 일본을
지원했다. 제이콥 시프의 일본 방문 1906년 2월22일, 제이콥
시프는 아내와 조카 에른스트, 친구 3명의 부부와 함께 승전국 일본을 방문하기 위해 뉴욕을 출발했다. 그는 기차를 타고 필라델피아를 거쳐
솔트레이크로 간 다음, 태평양 횡단 여객선을 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의 일행은 집을 떠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3월25일 일본
요코하마港에 내렸다. 그는 한 달 가량 일본에 머물렀다. 제이콥 시프는 일본 체류기간 중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환대를 그의
일기장에 자세하게 기록했다. 미국 유태인 신문에서는 그의 일본 방문을 「개선장군」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3월27일 오후
제이콥 시프는 東京에서 일본 정부 인사들을 공식 예방했다.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총리 대신을 비롯, 황실내관 다나카, 재무대신 사카타니,
前 총리대신 가츠라, 前 재무장관 소네, 일본중앙은행 총재 마츠우와 부총재 다카하시 등이었다. 3월28일, 제이콥 시프는
日王의 초청을 받고 황궁을 방문했다. 日王은 그를 보자마자 악수를 청하면서 일본 방문을 환영했다고 한다. 日王은 제이콥에게 『일본의 국가 운명이
걸려 있던 러시아와의 전쟁 기간 중 일본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직접 만나 감사를 표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日王은 그에게 일본이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을 수여하고, 주요 대신들과 함께 오찬을 했다.
제이콥은 자신의 일이 과대 평가되고 있다고 말하고, 자신과 국제 금융계 친구들이 일본을 지원한 것은 일본이 올바르다는 것을 믿었기
대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日王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훈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日王이 그를 직접 접견해 준 데 대해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日王과의 독대에 이어 시작된 오찬에는 황궁 대신들과 재무대신, 일본중앙은행 총재와 부총재
등이 참석했다. 제이콥의 일기에 따르면 메뉴는 양식이었고, 日王은 왕성한 식욕과 함께 유머 감각을 보였다고 한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日王은
자신의 통치 초기에 있었던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오찬이 끝날 무렵, 제이콥은 日王의 만수무강과 그의 가족
및 그를 사랑하는 백성들 그리고 그를 존경하는 이 세상 모두의 행복을 기원하면서 참석자들에게 건배를 제의했다. 日王은 답례에서 제이콥의 일본
체류가 유쾌해지기를 희망하면서 자신의 백성들이 잘 대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오찬장에 참석했던 인사들은 日王이 제이콥에게
베푼 환대를 축하하고, 예상치 못했던 그의 건배 제의가 아주 좋았다고 칭찬했다. 일본 재무대신의 감사말 다음은
제이콥 시프의 일기장에 기록된 일본 재무대신 사카다니의 만찬사다. 이 만찬은 1906년 3월28일에 있었다. <우리는
제이콥 시프씨와 비록 어제 저녁에서야 첫 대면의 기회를 가졌지만, 우리의 우정은 전쟁 발발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1904년 봄, 전쟁에 사용할
外資 도입의 필요성을 인식한 우리 정부는 일본중앙은행 부총재 다카하시氏를 런던으로 보내 외국 자본가들과 貸付문제를 협의케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향방이 모든 사람들의 눈에는 막연하고 암담했습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시점에 대규모 外資 도입은 큰 어려움에
직면했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 금융 에이전트가 미국 최대 금융가 중의 한 명인 훌륭한 친구를 발견했고, 그의 세계적인 커넥션이 영국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그와 함께 우리의 전쟁 國債 발행을 수행토록 해주었습니다. 바로 그분이 오늘 저녁 만찬의 주빈입니다.
시프씨가 다카하시와의 짧은 대화에서 우리가 필요했던 금액의 절반을 지원해 줌으로써 첫 번째 國債 발행액 1000만 파운드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호의는 2차와 3차, 그리고 특히 전쟁이냐 평화협상이냐 하는 갈림길에 놓여 있던 시기의 4차 국채 발행時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최근에는 지난 겨울 5차 國債 발행을 위해 그가 물심양면으로 적극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제1차에서부터
5차에 이르기까지 시프씨가 우리의 國債를 인수한 금액은 모두 3925만 파운드에 달합니다> 다음은
다음날(3월29일)에 있었던 일본중앙은행 부총재의 만찬사다. <1904년에는 1905년의 전쟁은 우리나라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였고, 현재와 같은 終戰의 행복을 가져오는 데에 있어서 자금 공급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생각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전쟁 기간 중의 일본의 金보유고는 탄탄했습니다. 이는 계속되는 外資 도입 덕분이었습니다. 미국 국민들이 준 금융지원은
우리 국민들에 대한 그들의 따뜻한 우위를 물질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제이콥 시프의 한국 방문 일본에서 한 달 이상을 보낸 제이콥 시프
일행은 1906년 5월 초에 한국을 방문했다. 그가 맨 처음 밟았던 한국 땅은 일본이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인천항이었다. 그는 일기에서 한국
도착 첫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가 탄 증기선이 인천항에 들어서자 승객과 화물을 운반하려고 몰려드는 한국의 돛배들이 배
주위에 가득 찼다. 배가 부두에 도착하자마자 일본인 시장이 갑판으로 올라와 우리를 맞이했다.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기 전 한 시간 동안 시가지를
구경했다. 제물포 시가지는 근대화되어 있지 않았다. 한국인 외에 중국인과 일본인도 많이 살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보는
한국인들은 긴 흰 코트를 입고, 케이크 접시 같은 형태로 머리 꼭대기에 얹어 놓은 괴상한 모자들을 쓰고 있어서 이상하게 보였다. 여자들은 흰색
또는 초록색 치마를 입고 있었고, 머리 위와 얼굴을 가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좀처럼 알아볼 수 없게 하고 다녔다. 여성들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매우 가정적인 사람들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제물포로부터 서울까지 깔린 27마일의 경인선을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미국 총영사, 일본 외무성의 미국인 고문, 한국 정부의 일본인 재정고문, 그리고 이토 통감의 대리인이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는 호텔에 짐을 풀고 시내를 산보했는데, 거리의 풍경이 무척 이색적이었다. 그러나 시가지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웠다〉
시프씨의 한국 도착은 당시 황성신문에도 보도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이렇다. 〈미국 부호
시후(시프)씨가 5월3일 인천에 도착하여 서울로 향했다. 4일 밤에는 통감 관저에서 공식 만찬에 참가하고, 5일에는 우리 황실의 창덕궁 만찬에
참가하며 6일에는 미국 총영사의 오찬에 참석한 후 7일경 여순으로 떠난다〉 한국 방문을 끝낸 제이콥 시프 일행은 다시
東京으로 가서 일본 정부 주최의 공식 이별 만찬을 가진 후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이 방문을 통해 제이콥은 일본이 한국과 만주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중국을 지배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음을 파악했다. 그는 일본이 날로 공격적인 국가가 되어 가고 있음을 실감했다고
한다. 그는 팽창주의자 일본을 이용, 중국 비즈니스를 도모하려 했다. 그는 중국을 또 다른 투자 유망지역으로 보고 있었다.
중국에 대한 일본의 점령이 필요하다면 그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 당시 그는 만주 남부철도의 부분적 관할권을 확보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에 대한 그의 우호적인 태도는 1910년 일본이 러시아와 동맹관계를 맺을 때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제이콥 시프는 1920년 9월25일 뉴욕에서 사망했다. 後記: 제이콥 시프 추적 작업 국제 금융시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유태 금융인들의 행적을 추적하던 중, 20세기 초 뉴욕에 근거를 두고 있던 제이콥 시프가 러·일전쟁 때 일본에 자금 지원을 했다는 구절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이 궁금하여 기회가 닿는 대로 자료를 찾아보았다. 2001년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교
도서관에서 그가 1906년 일본과 한국을 방문한 후 발간한 기행문을 발견했다. 그가 직접 서명하여 컬럼비아 대학에 기증한 原本이었다. 시프가
한국을 방문했다기에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황성신문의 필름을 확인하여 관련기사도 발견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러·일전쟁 당시 상황과 포그롬(대학살)에 관한 자료를 추가로 입수하여 미국 유태인 금융가가 러·일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유태인과 관련된 러·일 전쟁은 흥미로운 역사적 가정을 낳게 해주었다. 즉, 1903년
러시아 키시네프에서 유태인들이 현지인들에게 학살과 테러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제이콥 시프가 높은 리스크를 안고 국제 금융시장에서 일본에 대한
자금 조달을 주선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지역에서의 인종차별 사태가 결과적으로 러·일전쟁의 향방에 영향을 미친 셈이다. 러·일전쟁은
한반도와 우리 민족의 운명에도 영향을 끼친 큰 사건이었다. 제이콥 시프의 사례를 통해 일본인들은 국제 금융시장에서
유태인들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유태인들이 세계 금융과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일본은 올 1월 내지 2월경 이라크에 자위대를 파병할 예정이라고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일본 戰艦들이 러시아 극동함대를
격파하기 위해 사세보港을 출항했던 그때로부터 정확하게 100년 뒤다. 러·일전쟁 준비 때, 일본은 아무도 모르게 軍備를 확충해야 한다고 했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한국, 중국 등 주변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새해 첫날, 태평양전쟁 A급 戰犯들의 위패가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기습 참배했다. 100년 전과 지금의 상황을 돌이켜보면서 필자는 일본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 시기에 묘하게 신경이 곤두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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