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누가 騎馬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가 -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을 보고

이강기 2015. 10. 4. 11:11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을 보고


누가 騎馬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가

 
隋唐과 결전한 고구려는 漢族의 마음 밭에 방파제를 쌓음으로써 민족을 위해 殉死했고, 신라는 對唐결전으로써 민족의 자주성을 수호했다
 
許 文 道
1940년 경남 고성 출생. 서울大 농대 졸업. 日 도쿄大 박사과정 수료. 朝鮮日報 도쿄특파원ㆍ외신부 차장, 駐日 대사관 공보관, 문화공보부 차관, 대통령 정무1수석비서관, 통일원 장관 역임.
許文道 前 통일원 장관 (asadalmd@hanmail.net

라이샤워의 감탄

 

 오늘날 미국에 맞서 글로벌 파워를 향해 일어서고 있는 중국이 우리 고구려史에 탐을 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 미국의 駐日대사도 지낸 세계적 일본학 연구가인 하버드 대학의 고(故) 라이샤워 교수의 말이다.
 
  그는 현장법사의 「大唐西域記(대당서역기)」, 마르코폴로의 「東方見聞錄(동방견문록)」과 함께 세계 3大 기행문이라 일컬어지는, 9세기 일본의 천태종 승려 엔닌(円仁)의 중국 기행문 「入唐求法巡禮行紀(입당구법순례행기)」를 20년 걸려 순 한문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번역과 동시에 출간했던 연구서인 「엔닌의 唐代(당대) 중국여행」 속에, 라이샤워 교수는 세계사를 두루 훑어본 안목으로 한국과 신라에 대한 巨視的(거시적) 인상을 적어 놓고 있다. 라이샤워는 「신라국」이라는 제목 밑에 『당시의 한국은 지리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적으로도 이미 오늘과 같은 나라였다』고 했다.
 
  우리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이 사실이 라이샤워에게는 기록할 사항으로 여겨진 것에 우선 주목한다. 라이샤워는 신라 이래 한국이라는 나라 권역의 역사적 안정성을 놀라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한국보다도 언어, 민족 및 국경을 가지고 더 오래 지속되고 있는 국가는 (全세계에서) 중국뿐이다. 한국에 필적할 만한 소수의 국가群 속에 일본은 들어간다』고 했고, 이에 앞서 『열한 세기나 경과한 현재와 마찬가지로 이 세 민족들은 당시에도 세계의 그 부분을 점하는 주요한 국가群을 형성하고 있었다』고도 했다.
 
  라이샤워는 역사권역 혹은 문화권역으로서의 東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천년이 넘는 長期에 걸쳐 안정적인 것을 특기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 지역이나 중근동 지역의 역사적 추이를 짚어 볼 때, 지난 200년간 유럽의 강국인 독일의 국경이 어떻게 요동쳤던가를 생각하면 그 이유를 수긍하고도 남을 것이다.
 
  라이샤워 교수가 주목하는 나라는 신라이다. 출발점에 신라가 있었다. 대륙과 반도와 열도에 걸쳐 중국민족, 한국민족, 일본민족이 역사적 정체성에 큰 동요가 없이 천년이 넘게 버텨 낸 東아시아 틀의 출발점에 신라의 반도 통일이 있었던 것이다.
 
  
  신라 통일과정은 한민족의 출생과정
  
  그 통일은 신라가 중국 역사상 최강이었던 세계제국 唐이 그 극성기에 全반도를 중국의 군현으로 만들려던 의지를 좌절시키고서 달성해 냈다는 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일반 국민들이 갖게 되는 역사인식은 초등학교나 대학이 아니라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서술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저술하고 교육부가 간행(1998)한 고등학교 국사(상)는 『신라가 唐의 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한 사실은 삼국 통일의 자주적 성격』이라고 평가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외세의 협조를 얻었다는 점에서 한계성이 있다』고 해 놓았다.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의 학생들을 혼란에 빠뜨릴 評言이다. 반도 東南에 치우쳐 있어, 선진문명과 격해 있고 3國 중에서는 제일 후진국인 신라가 어떻게 백제·고구려에 이기고, 마지막에는 절정기에 있던 중국사상 최강의 제국인 唐의 의지를 실력으로 꺾을 수 있었던지에 대한 설명은 눈에 띄지 않는다.
 
  민족사상 최대 最重의 사건을 역사로 배우면서 오늘을 살아 낼 지혜를 얻을 수 없다면 역사를 왜 공부한다는 말인가.
 
  우리 사회에는 「왼쪽으로 기운」 지식인 일수록 위에 든 교과서에 한술 더 떠서 신라가 3國을 통일한 것이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으로 언동하는 경향이 진하게 있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에게 더욱, 영국의 뛰어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민족이 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민족을 만드는 것이다』란 갈파를 곱씹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신라가 통일했을 때 그 경역 속에 있은 사람들이 韓族(한족)뿐이었겠는가. 2세기 말 「황건적의 난」에서 시작하여, 북방의 유목민들이 만리장성을 넘어와, 대륙은 400년에 걸친 혼란과 분열 속에 잠겼고 이를 수습한 隋唐(수당)제국의 통일 다음에 반도의 통일은 있었다.
 
  數多(수다)한 流移民(유이민)이 대륙으로부터 반도로 밀려 왔다. 통일신라의 경역 속에는 漢族말고도 요동이 고구려 땅이었으니 선비족, 돌궐족, 오환족, 말갈족, 유연족, 거란족 오리진의 인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통일신라라는 국가의 하나의 법제 울타리 속에서 한 200년 비벼 대어 공통의 언어, 공통의 풍습문화, 혈연적으로는 균질한 유전 모집단으로 성형되어, 하나의 민족으로 오늘에 이어지는 아이덴티티의 단초는 열린 것이다.
 
  신라의 통일 과정은 오늘 우리 민족의 출생과정 그 자체이고, 민족 창세기 바로 그것이다. 자기 얼굴이 못생겼다 싶어 낳은 부모에 한계가 있다 하는 것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무의미하고 무지하고 못난 앙탈일 것인가. 신라통일의 한계 운운하는 것은 이와 다르지 않다.
 
  그보다는 반도에서의 漢族 아이덴티티를 송두리째 부정하려 든 강대한 세계 제국의 의지를 小國 신라가 꺾어 낸 기적 같은 일이 어떻게 현실에서 가능했던가를 알아보는 것이, 오늘 다시 민족통일의 과제를 코앞에 두고 있는 우리가 밤잠을 안 자더라도 해야 할 일이 아닐 것인가.
  
  
  북한 학자 金錫亨의 신라통일 예찬
 
  이미 여기저기에 답이 보이지만, 좀더 넓은 설득력을 위해 북한 역사학의 泰斗(태두)라는 金錫亨(김석형)의 소론에서 끌어내 본다. 그의 신라의 통일전쟁에 관한 분석은 조선조 5대 문종 때 편찬된 우리나라 고려 때까지의 戰史(전사)인 「東國兵鑑(동국병감)」을 번역하면서 붙인 해설 논문 속에 보인다(「東國兵鑑」, 金錫亨 역주, 여강출판사). 金錫亨은 뻔히 역사를 계급사관으로 풀이하는 입장일 터이지만, 전쟁을 이데올로기로 왜곡하는 구석은 없고, 객관적이고 냉엄한 통찰력이 엿보여 들어볼 만하다.
 
  그는 통일전쟁에서 3國 중 어느 한 나라에 우열과 好惡의 편차를 두지 않는다.
 
  『5세기 중엽 이후 조선반도內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 3國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 정복전쟁을 계속하지 않고서는 그 국가적 계급적 체제를 유지하기 곤란하였던 정치적·경제적·군사적 형편은 3國 중 어느 한 나라가 조선을 통일하게 할 역사적 운명에 처하게 하였다. … 언어 풍습이 또한 3國은 동일하였다』
 
  金錫亨은 신라에 대해 편견이 없다.
 
  『삼국이 모두 겨누고 있었던 영예로운 역사적 사명을 수행한 것은 신라이었다』
 
  金錫亨은 신라가 통일하게 된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신라는 다른 두 나라가 흥망성쇠의 하강기에 접어든 데 비해 國運의 앙양 상승기에 대륙의 정세변화에 이어진 통일전쟁을 맞이하게 된 것.
 
  둘째는 신라는 국내체제가 잘 다져 있어서, 정치·군사 면에서 부정적 요소가 고개를 내밀지 못한 점.
 
  셋째는 신라의 탁월한 외교·국가전략의 승리이다.
 
  『신라에 있어서의 이러한 역사적 대성공은 그가 고구려·唐 간의 대립을 꾸준히 이용하여 자기 목적에 교묘하게 적용시킨 데에 그 주요 원인의 하나가 있다. 고구려·隋나라, 고구려·唐나라 간의 전쟁에서 얻은 경험을 총화하여 主攻방향을 일단 백제로 돌렸다가 고구려 공격은 그 다음으로 돌려야 한다는 새 전략도 실로 신라 측에서 唐에 제의한 것이었다』
 
  金錫亨은 645년 고구려·唐 1차전쟁에 원병을 보내는 데서부터 676년 唐나라 군대를 이 땅에서 쫓아낼 때까지 30년 전쟁을 지도하여, 반도 위에 민족항존의 집을 지어 낸 역사적 대업을 이룩한 세 지도자 金春秋(태종무열왕), 金庾信, 金法敏(문무왕) 콤비의 전략적 주동성, 민족적 자주성, 그리고 국가전략의 원대한 실행력을 찬양해 보이고 있다.
 
  『唐과의 연합으로 백제를 타도하고, 다음으로 고구려를 복멸하고, 그러고 나서는 唐軍을 반도內에서 구축함으로써 신라의 통일적 지배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러한 것은 역사 기록에 명문이 없다 하더라도, 벌써 처음부터 신라 당시의 왕정 지도자들이었던 김춘추, 김유신, 김법민 등의 方寸(방촌·마음속)에는 깊이 간직되었던 정책이었던 것은 일후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실들이 증명하고 있다』 
  
  
  세계제국의 全力을 동원한 고구려 원정
  
  7세기는 우리 민족에게 위기의 세기였다. 騎馬(기마), 農耕(농경), 東夷(동이) 아이덴티티의 우리 민족이 반도 위에서 생존할 수 있느냐를 묻는 한 세기였다. 400년의 분열시대 끝에 강대한 통일제국을 이룩한 대륙의 漢族이 7세기가 시작되는 2년 전부터 676년까지 70년간 반도의 우리 민족에게 정복전쟁을 걸어 왔던 것이다.
 
  後漢(후한·AD 25~220)이 기울면서 황건적의 난(184)이 일어나자 中原은 혼란에 빠져들었는데, 유목·기마의 北族(북족)들이 장성을 넘어 대거, 중국 안에서도 선진 문명지역인 화북으로 밀고 내려왔다. 漢族은 개발이 덜 된 양자강 남쪽으로 밀렸다. 흉노, 선비, ♥族(저족) 등의 5胡(호)의 나라가 중원과 요동에 연달아 계기하는 5胡16國 시대(304~439)라는 大분열시대는 北魏(북위·439~534)가 화북을 통일하여 제국으로 문을 열면서 끝이 났다.
 
  대륙은 남조와 북조로 분립되었다가, 581년에 깃발을 올린 隋文帝(수문제) 楊堅(양견)이 남쪽에 남아 있던 陳(진)을 토멸하고 천하를 통일한 것은 589년이었다. 400년간의 분열시대의 의미를 史家들은 북방의 胡風(호풍)문화와 중원의 漢風(한풍)문화가 용융, 하이브리드(hybrid)되어 새로운 국가, 새로운 문명이 탄생되고 한자·유교·불교·율령을 공통항으로 하는 東아시아 문명권이 형성되어 나오는 과정이라 하고 있다.
 
  中原에 등장한 통일국가는 처음부터 세계제국을 지향했다.
 
  隋(수)는 제국으로 문을 열자마자, 북방 스텝지대에 大세력을 구축했던 돌궐에 손을 써 東西로 분열시키고(583), 東돌궐을 협조관계 속으로 끌어 들였다. 605년 煬帝는 東南亞로 손을 뻗쳐, 林邑(임읍)이라 불린 南베트남까지 정벌하기도 하고 동남쪽 해상에 있는 섬나라들에 사절을 보내는 등 조공국으로 만들었다. 609년에는 서쪽으로 서역 실크로드를 막고 있던 청해 지방의 티베트계 유목국가 吐谷渾(토욕혼)을 정벌하고, 東西 무역로를 장악했다.
 
  통일중국의 동서남북에서 「天子」의 의지 앞에 납작 엎드리지 않는 나라는 고구려 등 3韓 국가밖에 없었다. 그들은 조공의 형식은 갖추었으되 이용하려는 입장이었다. 창업을 한 隋文帝는 진작 30만 대군을 일으켜 요동으로 고구려를 쳤으나(598), 고구려 측의 견고한 대비와 그들 스스로의 軍需 등의 준비 부족으로 실패했다.
 
  이를 지켜본 隋煬帝(수양제)는 즉위와 동시에 기존의 수로를 정비하고, 다음해인 605년에는 황하와 淮水(회수)와 양자강을 잇는 길이 1500km, 폭 60m의 대운하를 건설하고, 608년에는 요동 침공의 전선사령부가 두어지는 탁군(北京 지역)을 황하와 연결하는 추가 운하를 파게 하여 609년 끝냈다. 「세계의 제왕」을 지향하는 隋煬帝는 갓 완성된 이 대운하를 통해 중국사상 처음으로 통일제국의 全생산력과 군사력을 고구려를 치기 위한 전선기지에 집결시켰던 것이다.
 
  612년 隋煬帝는 113만 대군-軍需인원을 합치면 300만 명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쳤으나 실패했다. 고구려人들의 영웅적 항쟁과 을지문덕의 뛰어난 전략·전술과 중국 측의 참담한 결과를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漢族의 통일제국이 반도에 본부를 둔 고구려 등 3韓을 복속시키고자, 얼마나 거대한 의지와 집념을 불태웠고, 고구려는 거기에 맞섰던가에 주목하고 있다.
 
  隋煬帝는 두 번, 세 번 오기를 부렸다. 그 무리 속에 내부가 헝클어지고, 煬帝는 측근에게 목숨을 잃고 隋제국은 멸망했다.
 
  唐은 隋왕조를 거꾸러뜨리고 들어섰지만, 唐의 사실상의 창업자인 태종 李世民은 隋煬帝의 「고구려를 꺾어야 세계 제왕의 완결을 보겠다」는 확집을 그대로 계승했다. 
  
  
  唐太宗 홧병으로 죽다
  
  唐太宗은 먼저 북방의 만만찮은 상대인 東돌궐을 630년에 쳐 항복을 받고, 그들로부터 天可汗(천가한)이란 칭호를 받아냈다. 唐太宗은 유목 민족의 최고 제왕임도 확인하면서 세계 제왕에 더욱 한걸음 다가간 것이다. 640년엔 수만 리 떨어진 서역 투르판의 고창국왕이 먼 거리를 믿고 조공을 빠뜨리자 군대를 보내 토멸해 버렸다. 唐은 고구려에 이 사실을 넌지시 알리기도 한다.
 
  唐太宗은 통일전쟁에서 군사적 천재성을 드러내기도 했고, 名君의 조건이라는 신하의 간언을 수용하는 기량의 크기, 史書 편찬의 지휘 가담이나, 기타의 문치 등으로 중국사상 절세의 제왕이란 말을 듣는다.
 
  民力의 회복을 기다려 645년 唐太宗은 고구려 정벌에 직접 나섰다. 고구려·백제 연합군에 침공당하고 있는 신라의 唐에 대한 구원 요청에 응하는 것도 있고, 왕을 죽이고 쿠데타로 권력을 독차지한 연개소문을 징치하겠다는 명분도 되풀이해서 강조되었지만, 名君 태종을 둘러싼 名臣들은 대개 태종의 고구려 親征을 말렸다.
 
  명분론 뒤에 본심을 곧잘 감추는 唐太宗도 645년 3월 출정길에 한번 드러낸 적도 있다.
 
  『요동은 본래 중국 땅이다. 隋는 네 번이나 출정하였으되 찾지 못했다. 짐이 이제 東征(동정)하는 것은 중국을 위하여는 그 자제의 원수를 갚고자 함이요, 고구려를 위하여는 君父(군부)의 치욕을 씻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국토를 거의 평정하였으나 오직 이곳만 평정하지 못하였으니…』
 
  고구려 침공의 진정한 이유는 唐太宗이 隋煬帝에게서 물려받은 세계 제왕의 자존심 속에 있어 보인다.
 
  隋煬帝 때와는 달리 요동성은 함락했으나, 60여 일이 걸려도 요하에서 멀지 않은 안시성을 뺏지 못했다. 大唐제국의 국력을 쏟아 부은 攻城기계와 정예 무용과 지략과 영웅 이세민의 의지 앞에서도 안시성은 그대로였다. 요동벌에 겨울이 일찍 찾아왔다. 군량이 바닥났다. 세계 제왕 唐太宗이 허무하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제왕인 자기를 곧잘 말렸던 일찍 죽은 諫言(간언) 대부 위징을 생각하면서, 바람이 차가운 요하의 200리 수렁길에 발이 빠져 가며 唐太宗은 돌아갔다.
 
  적방을 피폐시키는 전략도 겸한다 했지만, 唐太宗은 隋煬帝처럼 647년과 648년 두 번 세 번 오기를 부렸다. 다음해 649년 唐太宗은 세상을 떠났다. 53세였다. 그때라 해도 장수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해가 되면서 太宗은 가끔 설사로 괴로워했다 한다. 4월이 되자 終南山(종남산)의 이궁에서 정양을 시작했지만, 5월에는 설사가 더욱 심해져서 24일에 위독 상태에 빠지고, 26일에 눈을 감았다. 유언으로 요동 침공을 중지시켰다.
 
  현대의학은 太宗의 병상을 두고, 직장암이 아니었던가 하는 모양이다. 고구려가 세계 제왕의 자존심에 안긴 처리할 길 없는 좌절감과 회환이 암을 불러왔을지 모른다.
 
  중국이 세계 제국으로 막강했을 때 초A급의 두 제왕이 그들이 東夷(동이)라 했던 고구려 침공에 실패하여 목숨을 잃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 서두의 라이샤워 교수의 얘기로 되돌아간다. 신라가 주동성을 발휘하여 형성된 東아시아 문명권의 국제질서 틀은 어찌하여 천년을 두고 역사와 함께 안정적인가? 무엇보다도 신라 통일 이후 대륙의 漢族국가는 한 번도 반도의 韓族국가를 침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있다. 이를 東아시아 국제 틀 안정의 최대 요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상대를 없앨 수 있고 이길 수 있다 해도, 그 게임에서 심각한 代價를 치르는 것이 피하기 어렵다는 인식이나 기억이 있으면 손은 나가지 못하는 법이다.
 
 
  漢族의 마음에 鐵의 방벽 쌓은 고구려
 
  중원의 漢族으로 하여금 통일신라 이후 천년이 넘도록 반도를 건드리지 못하게 아픈 기억을 남긴 것은 고구려이다. 대륙 하나의 통일왕조와 걸출했던 두 제왕의 생명을 요구했던 고구려의 70년 항쟁이, 고구려는 갔지만 漢族의 마음 밭에 반도의 東夷는 건드릴 수 없다는 철의 방벽을 쌓은 것이 아닐가.
 
  羅唐(나당) 연합군이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나, 唐은 都護府(도호부)를 설치하여 고구려 땅에 깔고 앉았다. 고구려 유민들의 강렬한 對唐 레지스탕스가 일어났다. 레지스탕스에 신라가 가세했다. 그리고 신라는 그 싸움을 자기들의 싸움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통일신라는 고구려가 漢族의 마음 밭에 세운 철의 방벽의 제일 첫 향수자일 수 있었고, 계승자가 된 것이다. 史料에서 고구려의 70년간 항쟁이 漢人들에게 남긴 의미를 챙기는 것이 지금 필요할 것이다.
 
  중국이 통일되어 고구려를 치려 들던 처음부터 중신 중에서는 정벌의 불가함을 주장하는 소리가 있었다.
 
  隋나라 때 經學(경학)의 大家였던 劉炫(유현 549~617) 열전(隋書 권75)에 『開皇(개황·文帝) 말에 국가가 융성하여 조야에서 모두 마음을 두었으나 劉炫만은 정벌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撫夷論(무이론)」을 지어 이를 비판하였으나 당시에 그 뜻을 이해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대업(大業·煬帝) 말에 세 번의 정벌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해 결국 劉炫의 말이 증명되었다』고 쓰여 있다. 「무이론」의 내용을 알 길이 없지만, 史筆(사필)을 든 사람들은 시비곡직을 후세에 전하려는 입장일 터이므로 『劉炫의 말이 증명되었다』는 고구려와의 전쟁이 중국 사람들에게 교훈을 남겼음을 인정하는 말이다.
 
  중국의 고구려 침공을 말리는 가장 확실하고 절절한 의견 개진은 「貞觀(정관)의 治(치)」의 태종의 명재상 房玄齡(방현령·578~648)의 상소 속에 있다. 房玄齡은 이세민이 황태자인 형과 동생을 격살하고 제위에 오르게 되는 玄武門(현무문)의 변에 가담한 모신이다. 太宗의 신임이 두터워 15년간이나 재상 자리에 있었고, 史書 편찬을 주도했다.
 
  太宗이 세 번째 고구려 정벌(648)에 집념을 불태우자, 죽음의 병상에 있던 房玄齡은 들것에 실려 궁중으로 가서 상소를 했다(新唐書 96권 列傳 21 방현령). 좀 길지만 중요한 대목을 그대로 옮겨 보겠다.
 
  상소는 먼저 太宗의 세계 제왕 의식에 문제의 근원을 보고 그를 누그러뜨리고자 하고 있다.
 
  『역대 왕조 누구도 신하로 삼아 보지 못했던 자들을 폐하는 모두 신하로 삼았고, 제압하지 못했던 자들을 폐하께서는 모두 제압하였습니다. 중국의 우환거리로서 돌궐 같은 곳이 없는데 크고 작은 그곳 왕들이 차례대로 항복하여 머리를 풀고 금위군에서 지키고 있으며, 延陀(연타 : 돌궐의 고지를 점한 투르크의 한 부족), 철륵(투르크)엔 州(주)와 縣(현)을 설치하고 고창과 토욕혼은 작은 군사로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만큼은 명을 어겼는데도 역대로 끝까지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폐하는 … 몸소 六軍을 거느리고 거친 땅을 가로질러 열흘이 채 안 되어 요동성을 뺏고, 수십만의 포로를 붙잡았습니다. 그 잔당과 임금이 감히 숨을 쉬지 못하고 움츠리고 있으니 그 공업이 前代보다 갑절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房은 물러갈 줄 아는 게 성인이라고 설유한다.
 
  『易(역)에 진퇴와 존망을 바로 알아 응대하는 자는 성인이 아닐 것인가 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아감에는 물러남의 뜻이 들어 있고, 생존에는 쇠망의 氣(기)가 들어 있으며 얻음에는 잃음의 이치가 들어 있으니, 폐하를 위해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전해 오는 말에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폐하의 위엄과 명성, 세운 攻은 이미 족하다 할 수 있으며, 새로 열게 된 강토도 그만하면 되었습니다』
 
  房玄齡은 太宗의 자존심을 충족시키려 애쓰고 있다. 동시에 새떼나 물고기쯤으로 치부하면서 중국과는 문화가 다른 것을 강조하고 그를 통해 고구려의 강인한 무력과 저항력을 기분 상하지 않게 강조하고 있다.
 
  『변방의 오랑캐 하찮은 민족에게는 仁義(인의)로 대할 것도 일상의 예법을 강요할 것도 없으니, 옛날에는 새와 물고기쯤으로 대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기필코 결딴내려고 한다면, 짐승이 궁지에 몰리면 되받아치듯이 죽음을 걸고 살아남으려 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라·고구려가 민족을 지켰다
 
  이어서 전쟁이 인간 생명에 가하는 참혹함을 강조한다.
 
  『…혼자된 부인과 가엾은 어머니가 관을 실은 수레를 보고 말라 버린 뼈들을 부여안고서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있으니 이는 음양의 질서가 바뀌고, 천지의 조화로운 기운을 해치는 것으로, 실로 천하에 고통을 안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고구려가 머리만 숙이면 됐지 꼭 짓밟아야 하느냐고 세계 제왕의 허영이 갖는 부당성을 정면에서 지적한다.
 
  『원래 兵(병)은 흉기, 전쟁은 위험한 짓입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에만 하는 것입니다. 고구려가 唐에 대한 臣節(신절)에 違背(위배)하여 적대하면, 토벌해서 당연합니다. 중국에 침입하여 인민을 약탈했다면, 폐하는 이를 멸망시키는 게 당연합니다. 반 영구적으로 중국에게 외환이 될 것은 폐하가 이를 쳐서 항복을 받아도 괜찮을 것입니다.
 
  이상의 어느 것 중에 하나에 해당한다면, 하루에 사상자가 1만 명이 나와도 부끄러운 짓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상 3개조의 어느 것에도 해당치 않기에, 이유 없이 안으로 중국을 괴롭히고, 밖으로 前王(전왕)의 원한을 씻고, 신라를 침략한 원수를 갚아 준다는 것이, 얻는 것은 적고 손실은 너무나도 큰 것 아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취해야 할 시책을 제시한다.
 
  『폐하께서는 皇祖(황조)인 老子(노자)의 止足(지족)의 誡(계)를 받들어, 만세에 걸쳐 위대한 명예를 보지하시고, 내리는 비처럼 광대한 은혜를 베푸셔서, 관대한 詔(조)를 내리시고, 陽春(양춘)과 같은 德澤(덕택)을 펴시어, 용서하시여 고구려로 하여금 스스로 새로워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다의 큰 배를 불태우고, 응모한 병사들을 되돌리시면, 자연히 중화와 오랑캐가 모두 크게 힘을 얻어, 멀리는 숙연해질 것이고, 가까이는 평안해질 것입니다』
 
  마지막은 끝맺는 말이다.
 
  『臣은 노병에 걸린 정승으로서, 이제 곧 땅에 묻힐 것입니다만…』으로 비장하다.
 
  表文(표문)을 읽은 太宗은 『이 사람 위독하기가 이 지경에 왔는가. 아직 잘도 우리 국가를 걱정하는구나. 진정한 충신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兵을 되돌리지는 않았다.
 
  다음해 太宗도 죽음에 임하여, 遺詔(유조)로 철군을 명한다. 太宗이 生의 마지막 순간에 房玄齡의 상소가 옳았음을 인정한 것일까.
 
  天下의 유일 의지임을 확인하고픈 고집이 세계 제왕 의식일 것이다. 房玄齡은 대제국의 창업과 긴 시간 그 경영에 참획해 본 통찰력으로 세계 제왕 의식의 허망함과 무모성을 겁날 것 없는 죽음의 문턱에서 세계 제왕 앞에 개진했던 것이다.
 
  세계 제왕 의식의 공간적 확장이 중화의식일 것이다. 남의 역사 같은 것을 탐내는 것은 중화의식이다. 세계 제왕 의식의 허망함과 불모성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가 오랑캐나 새와 물고기쯤으로 밀어 놓았던 사람들의 역사가 땅을 차지했다고 자기들 역사가 되는가. 역사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사람이지 땅은 아니다.
 
  우리 민족의 반도 서바이벌이 물어진 위기의 7세기는 고구려와 신라에 의해 극복되었다.
 
  7세기도 말엽이 되면서 大唐제국의 성세가 빛 바래기 시작했다.
 
  신라로부터 반도에서 쫓겨났던 唐은 그들의 羈♥(기미: 고삐를 맴) 통치의 수단인 都濩府(도호부)를 676년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겨 버렸다. 반도를 포기한 것이다. 682년, 東돌궐의 유민들이 唐으로부터 독립하여 몽골 고원 중심으로 제2차 東돌궐을 재흥시켰다. 그전 西돌궐령의 중앙아시아에서도 툴기슈(突騎施) 등이 독자의 나라를 세웠다.
 
  사방으로 날개를 폈으니, 먼 변방에 평화時에도 주둔군을 유지해야 했고, 출비가 무거워졌다. 폴 케네디의 「大國의 흥망」의 논리적 귀결이 大唐 제국 위에 덮쳐 와 있었다. 이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狄仁傑(적인걸·630~700), 중국사상 유례가 없는 강대한 권력자 女帝 측천무후 시절의 名재상으로 청렴·강직하고, 식견이 높았다. 狄仁傑이 東아시아 大亂의 7세기 마지막 해인 699년에 올린 상소가 있다. 
  
  
  東夷를 두려워하라!
 
  東西의 먼 이역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데 대해 백성들의 원성이 높자 올린 상소이다(新唐書 115권 列傳 40 적인걸). 세계 제국을 지향했던 7세기 大唐제국의 국가전략의 총괄적 반성과 교훈이 들어 있다.
 
  「하늘이 四夷(사이)를 내심에 모두 선왕이 책봉한 지역 밖에 있어서 동쪽으로는 滄海(창해)와 잇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流沙(유사)에 막혀 있으며, 북쪽으로는 大漠(대막)이 가로 놓여 있고, 남쪽으로는 五嶺(오령)이 막혀 있으니 하늘이 중국과 外域(외역)을 나누어 놓은 경계인 것입니다. … 지금 거친 변방에 병사를 동원하여 요원한 지역까지 성과를 거두려 하고 國庫의 곡식을 쏟아 가며 불모지들을 앞다퉈 차지하려 하는데, 그 백성들을 얻는다 해도 세금은 더 걷히지 않고, 토지를 차지한다 해도 밭 갈고 베 짤 수가 없습니다.
 
  이역 오랑캐들에게 굳이 중국의 문물을 강권하면서도(苟求冠帶遠夷), 근본을 굳건히 하지 않고 백성을 편치 못하게 한 것이 바로 진시황과 한무제가 했던 짓입니다. … 臣은 해마다 군사가 동원되어 운용의 비용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오른쪽으로는 四鎭(4진 - 서역 安西)에 수비군을 파견하고, 왼쪽으로는 安東(요동지역)에 주둔군을 보내는 등으로 인해 베틀의 북은 텅 비었는데 보내야 할 군수물자는 끊임이 없고, 軍役의 기간이 오래되어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이렇게까지 되는 것은 모두 이역에만 관심을 갖고 中國을 소모시키기 때문입니다. … 四鎭의 비용을 줄여서 中國을 살찌우고 安東의 군사를 거두어 들여 遼西(요서)에 집중시켜 먼 곳의 군비를 줄이면 … (요긴한) 지역의 수비가 넉넉해질 것입니다」
 
  요동지역의 安東에 있는 군대를 요하를 건너와서 요서지역에 두라는 주장은 인상적이다. 東夷들과의 70년 전쟁의 교훈이 들어 있을 것이다. 狄仁傑은 秦漢제국 이래의 이역에 대한 침략이 자기 국민을 괴롭히기만 했다는 것을 직시하면서, 문화와 가치관이 다른 이웃 민족을 지배해 봤자 중국에 이익될 것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7세기 東아시아 大亂의 교훈이 될 만하다고 여겼기에, 史官들은 채택되지 않은 이 상소문을 기록에 남겼을 것이다.
 
  앞에서 7세기 東아시아 大亂의 원천에 중국의 두 제왕의 세계 제왕 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보았지만, 東夷를 두고는 그 세계 제왕 의식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두 제왕이 가졌던 역사의식이었던 것을 알게 된다.
 
  隋煬帝가 고구려를 치기 다섯 해 전(607) 북방으로 위세를 과시하여 돌궐의 왕 啓民(계민) 可汗(가한)의 장막에 들렀다가, 마침 그곳에 와있던 고구려 사신과 맞닥뜨렸다. 수행했던 중신 裵矩(배구)가 고구려를 칠 것을 煬帝에게 부추기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구려는 본디 孤竹國(고죽국)인데 周나라 때는 箕子(기자)에게 책봉하고, 漢나라 때는 3郡으로 나누었는데, 晋나라가 요동과 통합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臣從(신종)치 않고, 이역이 되어 先帝가 미워하여 정벌하려 했으나 … 못 했습니다. 폐하의 시대를 맞아 어찌 이에 관심을 두지 않아, 문명의 경역인 이곳이 오랑캐의 나라인 채로 놔둘 수 있겠습니까…』(隋書 권67 배구 列傳)
 
  이 말에 열을 받은 煬帝는 고구려 사신에게 王으로 하여금 빨리 조회에 오도록 일렀고, 실행되지 않자 예고대로 침공했던 것이다. 
  
  
  騎馬의 추억을 왜 불러일으키는가
 
  唐太宗이 고구려를 치기 4년 전인 641년 고구려 국내를 샅샅이 탐색하고 돌아 온 사신 陳大德(진대덕)의 보고를 듣는 자리에서, 太宗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三國史記·영류왕 24년).
 
  『고구려는 본시 4郡의 땅이다. 내가 군사 수만을 내어 요동을 친다면 그들은 반드시 나라를 가울여 이를 구원할 것이다. 그럴 때 水軍을 따로 보내어 東來(산동반도)에서 해로로 평양에 가서 수륙 양군이 합세하면 취하기 어렵지 않다』
 
  隋煬帝나 唐太宗이나 그들이 세계 제왕을 지향하여 대군을 끌고 요하를 건넜던 말 잔등을 걸터앉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던 원천에 『고구려 땅은 漢4군 땅이었다』는 역사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漢四郡은 漢武帝(한무제)가 BC 108년 고조선의 경역을 침공하여 설치한 군현 아니던가.
 
  7세기 東亞의 大亂의 원천에 두 세계 제왕의 오도된 역사의식이 있었다.
 
  지금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가 그들 역사의 일부라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오도된 역사의식이다. 西勢로부터의 오랜 수모와 굴욕을 털고 일어서고 있는 중국이 지금 왜 東夷의 후예들에게 만주벌의 향수를 자극하는가? 요동벌에 말을 달린 騎馬(기마)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가!!●
월간조선 2004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