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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洋支配를 향한 쿠빌라이汗의
野望, 江華 해협 1km를 넘지 못했다
국왕의 굴복노선에
叛旗를 든 三別抄의 리더 裵仲孫의 선언
『몽골이 백성을
살육하니 나라를 돕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모여라』
草原의 北風을 등지고
來襲한 몽골의 騎馬軍團은 유라시아 대륙 東端의 나라 高麗 전토를 초토화했다. 凶猛한 몽골軍은 『저항하는 者, 죽여라 죽여라 또 죽여라』는 軍號를
외치며 굴욕을 강요했으나 임시수도 江華島의 군사적 점령에는 끝내 실패했다.
1km짜리 江華海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개한
39년간의 끈질긴 抗爭, 그러나 本土 백성들의 일방적인 出血로 가능했던 것이라면 과연 그것이 盡善盡美한 것일까. 결국 고려 국왕 元宗은
和平路線을 선택, 出陸을 단행했다. 반면 三別抄는 국왕의 굴복노선에 叛旗를 들고 南下, 珍島를 근거지로 삼아 최후의 1인까지 高麗武人의 자존심을
지켰다.
對몽골 强溫 兩論 중 어디에 國家利益이 있었는지는 論者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高麗 정부는 민족적 生存을 이어갔고,
三別抄는 海洋帝國까지 건설하려 했던 쿠빌라이 大汗의 野望을 파탄시키는 역할을 감당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60%를 席捲했던 몽골軍도 끝내 극복할
수 없었던 海洋공포증, 그것은 高麗人들의 저항 때문에 형성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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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對蒙항쟁의 세계사적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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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시 통진면 문수산성 北門 위쪽에서 바라본 對岸의 江華島. 그
가운데가 강화해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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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병이 대거 來到(내도)하여
인민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毬庭(구정: 격구장)에 모여라』 위의 인용문은 高麗史(고려사) 열전
권43에 기록된 三別抄(삼별초)의 지도자 裵仲孫(배중손)의 말이다. 이 짧은 煽動(선동) 연설이야말로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팍스 몽골리카(몽골에
의한 세계 지배체제)에 이어 海洋帝國(해양제국)까지 건설하려 했던 몽골의 야심을 꺾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裵仲孫의 선동연설은 三別抄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 삼별초는 전라남도 珍島(진도)에 新정부를 세우고
3년 동안 海上(해상)게릴라 활동을 전개하면서 몽골 주둔군을 기습하고 戰船(전선)을 불태우는 등 日本 원정을 방해했다.
역사에서 「만약 …」은 禁句(금구)이긴 하지만, 만약 삼별초의 항쟁이 없었더라면 몽골군의 제1차 일본 원정은 적어도 3년 전에 결행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1차 일본 원정이 1271년 어느 날에 결행되었다면 그때도 과연 1274년 10월처럼 태풍 때문에 麗蒙(여몽)연합군의 함대가
대거 침몰하여 전투력을 상실했을 것인가?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만, 태풍이 부는 계절은 거의 일정하고, 시도 때도 없이 태풍이 부는 건 아닌 만큼
그럴 확률은 낮을 것 같다. 어떻든 그때 일본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태풍을 일본사람들은 「가미가제(神風)」라고 불렀다.
가미가제는 「日本 不敗」(일본 불패)라는 「신화」를 낳더니만, 드디어 軍國主義 일본에 의해 악용되어 태평양전쟁 말기엔 「가미가제 특공대」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삼별초의 게릴라戰에 의한 원정 지연―.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이다. 태풍을 만나 함대가 결딴나지
않았더라면 麗蒙연합군은 일본 상륙에 성공했을 터이다. 그러했다면 하카다(博多)는 물론 규슈(九州)의 전역이 몽골에 점령되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사무라이 정권인 가마쿠라(鎌倉)막부가 무너지고, 경우에 따라선 日本 전토가 몽골의 식민지가 되었을지 모른다. 1281년에
감행된 麗蒙연합군의 제2차 日本 원정도 윤 7월의 태풍 때문에 역시 실패했다. 태풍이 불지 않았거나 설사 불었더라도 그 규모가 적었더라면 그
결과는 어찌되었을까? 삼별초에 복무했거나 협조적이었던 남해안 일대의 造船(조선)과 항해기술자·노동자들은 몽골군에게 끌려가
남해안 일대에서 兵船 건조에 동원되었고, 日本 원정 때는 梢工(초공: 뱃사공)·水手로 종군했다. 몽골군에게 非협조적이었던 그들은 태업을 했다.
만약 그들이 태업을 하지 않았더라면 몽골함대의 출항날짜가 앞당겨졌을 터이고, 그러했다면 연합군은 순풍을 타고 상륙, 일본 전토를 유린했을지
모른다.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서 모두 실패한 몽골군은 그 후의 참파(지금의 베트남 남부를 지배하던 왕국) 원정,
자바(지금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가 소재한 섬) 원정 등 海路를 통한 침략전쟁에서 모두 실패했다. 만약 몽골이 일본 원정에 성공했다면 그 후
世界史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海洋 포비아(공포증)를 극복하고 세계의 바다를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世祖 쿠빌라이의 소원은 육지와 바다를
아우르는 世界帝國 건설이었다. 그러했다면 세계사는 전혀 다르게 쓰였을 터이다. 당시 세계 판도의 60%를 석권하고 있었던
몽골도 바다의 지배자가 되는 데는 무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한 쿠빌라이의 실패는 裵仲孫의 선동 연설과 삼별초의 거센 저항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對蒙항쟁 39년간의 본거지 江華島 삼별초란 崔씨 무인정권 때
생긴 특수조직의 군대 명칭이다. 이 특수부대는 이후 權臣들의 손발이 되어 정권투쟁의 무력으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외적에 대항하는 방어군으로서도
활약했다. 삼별초가 무엇이며, 그 지도자 裵仲孫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상술할 것이다. 삼별초의 활약에 대한
설명에 앞서 高麗정부가 江華島(강화도)로 遷都(천도)하여 39년간 몽골군에게 저항했던 역사적 사실을 먼저 짚어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려면
강화도라는 존재가 두드러진다. 유라시아 대륙의 60%를 석권했던 몽골군도 군사적으로는 끝내 강화도를 침범하지 못했다.
강화도는 한강과 임진강의 하구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 큰 섬으로 新羅(신라)시대에는 海口(해구)로 불렸는데, 고려 초기에
강화도란 이름을 얻었다. 지금은 길이 800m의 강화대교로 육지(경기도 김포시)와 이어져 있다. 필자는 학창시절이던
1966년 봄 처음으로 강화도를 답사한 바 있다. 그때는 김포군 통진나루와 對岸(대안)의 강화도 나루 사이에는 軍用 LST(상륙함)를 개조한
연락선이 운항했다. 당시 필자가 탄 버스는 통째로 LST에 실려 해협을 건넜다. 해협의 너비는 1km도 되지 않았지만, 물살은 거셌다. 평균
시속 10노트의 조류가 시시각각으로 돌변하여 작은 목선 같은 것은 건너가기가 어려웠다. 현재는 그 후의 간척사업으로 兩岸(양안) 사이의 폭이
더욱 좁아져 600m 에 불과한 곳도 있다. 10월30일 오전, 李五峰 사진부장과 함께 김포시의 서북단에 있는
文殊山城(문수산성)에 올랐다. 이곳에 오르기만 하면 강화도가 一目瞭然(일목요연)하다. 開京(개경: 지금의 개성)으로부터 강화도로 遷都한
고려왕조를 공략하려 했던 몽골군은 여기서 막혀 버렸다. 해안에 바짝 다가선 문수산성의 北門(북문)에서 산 위로 뻗어 있는
성벽을 타고 200m만 올라도 對岸의 강화도가 그림처럼 빤히 내려다보인다. 심지어 강화읍내의 자동차·행인들까지 눈에 들어온다.
육지와 강화도 사이의 해협은 이곳 주민들의 표현을 빌면 『장대뛰기만 해도 뛰어넘을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 만큼 좁다. 大軍을
거느리고 침입한 蒙將(몽장)들도 이렇게 관측이 양호한 곳을 결코 놓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올라 강화도를 굽어본 蒙將들의 심사는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쥐가 숨어든 구멍 앞에서 하릴없이 「야옹」거리는 고양이의 꼴이 되지 않았겠는가.
3重의 성벽으로 방어진을 친 요새 강화도 답사는 강화역사관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빠져나와 48번 국도 아래 굴다리를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바로 강화역사관이다. 여기엔 抗蒙
관련 유적 등 우리 역사상의 국방과 관련된 사료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4개의 전시실을 다 돌고 나오면 일단 강화도 역사에 관한 브리핑을 받은
셈이 된다. 강화역사관 바로 앞 해안에 있는 갑곶돈대(강화읍 갑곶리)로 갔다. 돈대는 소대 규모의 수비병이 지키는 요새다.
강화도 해안에는 이런 돈대가 50여 개에 달했다고 한다. 고려·조선 시대 1000여 년간 강화도는 수도권으로 진입하는 漕運船(조운선)의
길목이었다. 여기가 막히면 수도권은 경제공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육지와 제일 가까운 갑곶돈대는 抗蒙전쟁 기간
중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지금의 갑곶돈대는 조선왕조 때의 모습이다.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다가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 함대의 포격으로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대포 1문도 전시되어 있다. 갑곶돈대 바로 뒤로 펼쳐진 해안도로변에는 抗蒙전쟁
당시에 쌓은 강화 외성(土城)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당시 강화도는 외성·내성·궁성으로 3중의 방어벽을 친 金城湯池(금성탕지)였다.
강화읍 중심부인 관청리엔 高麗宮址(고려궁지)가 남아 있다. 강화군청 앞길을 조금 지나 우회전해서 약간 비탈진 길을 500m쯤 오르면
된다. 이곳은 강화 遷都 이후 몽골에 줄기차게 항전했던 고려왕조의 궁궐이 39년간 들어서 있던 자리다. 「昇平門(승평문)」이라는 대문을 지나면
궁터가 나온다. 원래는 넓은 터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몽골의 강요로 궁궐과 궁성의 대부분을 파괴하여 지금은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고려의 王京이었던 개성 일대를 관찰하려면 강화산성 북문에 오르면 좋다. 북문엔 「鎭松樓(진송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북문 밖으로 나가 五泣(오읍)약수터 쪽으로 50m쯤 걷다 보면 북한 지역인 개풍군의 산과 들이 바로 눈앞에 전개된다. 7년
전 답사 때는 개성의 鎭山인 송악산까지 또렷하게 보였지만, 이번 답사에서는 날씨가 쾌청하지 않아 흐릿한 모습이었다.
강화산성은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遷都(천도) 2년 후인 1234년부터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한 土城(토성)이다. 강화산성 역시
1270년 개경 환도 직후 몽골의 강요로 헐려 버렸다. 조선왕조 전기에 규모를 축소하여 다시 축성했으나 병자호란 때(1636) 淸軍(청군)에게
함락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1677년 강화유수 허질이 고려시대의 內城(내성) 규모로 전면을 돌로, 후면을 흙으로 개축하여 길이가 7122m에
이르게 되었다. 高麗-몽골의 초기 외교관계 고려 제20代 임금
神宗(신종) 때, 오랜 세월 동안 遼(요)와 金(금)나라에 예속되어 살아왔던 몽골족 중에 테무진(鐵木眞)이란 영걸이 초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근방에 있던 여러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고려 熙宗 2년(1206)에 이르러 그는 大칸의 지위에 올라 사방을 침략했으니 그가 바로
칭기즈칸(成吉思汗)이다. 고려는 칭기즈칸 시대에 이미 몽골과 외교적 교섭을 하고 있었다. 당시 東아시아의 정세는 파란의
연속이었다. 몽골이 여진족의 정복왕조 金을 침략하여 黃河(황하) 이북의 中原땅을 차지하니 金의 세력은 급격히 기울었다. 이런 틈을 타 金에
복속되어 있던 거란족(契丹族)이 大遼收國(대요수국)을 세워 자립하려다 몽골군에 쫓겨 동쪽으로 이동했다. 고려 高宗(고종)
4년(1217) 거란족 가운데 독립지향적인 세력(黑契丹)이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난입했다. 그들은 고려의 북부지역을 약탈하면서 수도
開京(개경)을 위협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참지정사 鄭叔瞻(정숙첨)을 行營中軍 원수로 삼아 토벌에 나섰으나 결정적인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군이 거란족 군단을 추격해 왔다. 마침 큰눈이 내려 수송로가 막히자 몽골군은 西北面 원수 趙沖(조충)에게
군량 지원을 요청했다. 趙沖은 정병 1000명과 쌀 1000석을 몽골군에 보내고, 이듬해 1월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서 몽골군과 연합작전으로
거란군단이 농성하던 江東城(강동성)을 탈환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양국 관계는 겉으론 좋았다. 물론 고려로서는 사납기 만한
몽골과의 교섭이 달가울 리 없었지만, 군사역량상의 차이로 和好가 불가피했다. 문제는 그 후 그들이 요구하는 공물의 규모가 해가 갈수록 증가하는
데 있었다. 종래 고려는 遼와 金에 대해 朝貢(조공)을 했지만, 상대국으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물품을 받았던 만큼 경제적
손실은 없었다. 이른바 朝貢貿易(조공무역)인데, 이것은 상호 간의 필요에 의해 진행된 당시 국제무역의 한 형태였다. 그러나
「초원의 깡패국가」 몽골은 주는 것 없이 일방적인 수탈만을 강행했다. 몽골 사신들의 횡포도 극심했다. 공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려국왕의
면전에서 그것을 냅다 집어던지기도 했다. 바로 그 장본인인 제구유(著古與)라는 이름의 蒙使(몽사)가 1225년 귀국 중 압록강변에서 살해되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몽골 측은 그 책임을 고려정부에 물었다. 몽골은 이 사건을 구실로 삼아 고려에 대해 무력침범을
감행했다. 몽골의 제2代 大칸인 太宗 오고데이(칭기즈칸의 3子)의 즉위 3년째 (1231)의 일이었다. 29년간 6차례에 걸친 침략 이후로부터 1259년까지
29년간 6차례에 걸친 몽골군의 침략에 의해 도서지역을 제외한 고려 全土는 철저히 유린되었다. 당시 고려국왕은 高宗이었다.
高宗 18년(1231)에 시작된 제1차 고려 침략에서 몽골군의 지휘관은 사르타이(撒禮塔)였다. 사르타이는 몽골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수도
開京을 포위하고, 다시 남하하여 廣州·忠州·淸州를 공격했다. 고려는 몽골에 막대한 공물을 바친 다음에야 강화를 맺을 수 있었다. 몽골 측은 고려
서북부에 다루가치 72명을 상주시켜 놓고 1232년 1월에 철군했다. 다루가치는 몽골의 점령지에 설치되었던 民政(민정)의 감독관이다.
이어 都旦(도단)이라는 자가 다루가치의 최고책임자로서 개경에 부임하여 고려정부에 대해 수달피 1000領과 王公貴人의 童男·童女 각
500명 및 각종 工匠(공장)의 차출을 요구했다. 고려정부는 이에 불응하면서 太宗 오고데이에게 진정서를 휴대한 使者를 보냈는데, 이 使者는 고려
국경을 누르고 있던 사르타이에 의해 구금되었다. 진정서 件에 화가 난 都旦은 고려의 관련 관리를 매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
이때 고려왕조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인물은 崔氏 무인정권의 2代 집권자인 崔瑀(최우)였다. 崔瑀는 몽골과 단교하고 강화도로의 遷都를 강행하면서
다루가치들은 모두 베어 버렸다. 遷都와 더불어 崔瑀는 지방 주민들에 대해 山城·海島로 대피하도록 명했다. 고려가 항전의
태도를 선명하게 드러내자 太宗 오고데이는 사르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을 고려 북부에 침입시키고, 使者를 강화도에 보내어 出陸(출륙: 수도를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다시 옮김)을 요구했다. 몽골의 제2차 침략이었다. 그러나 崔씨 무인정권은 出陸을 거부했다. 사르타이는
남하하여 漢陽산성을 함락시키고 處仁(처인: 경기도 용인)에 육박했다. 당시 處仁은 賤民들이 거주하는 部曲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곳 백성들이
處仁城에 들어가 용감하게 농성하면서 몽골군의 남진을 막아섰다. 사르타이는 처인성을 공격하다가 승려 金允侯(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은 철수했다. 이런 전공으로 그는 監門衛(감문위) 상장군으로 올랐다. 1234년, 전성기엔 中原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정복국가 金이 몽골에 패망했다. 몽골군은 南宋 공략과 병행하여 고려에 침입했다. 몽골군은 강화도 공격은 포기한 채 이후 약
5년간 고려 全土를 유린하면서 약탈전을 전개했다. 강화도로 들어간 武人들은 몽골군과 직접 교전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본토에 남아 있던 백성들만
魚肉(어육)이 되었다. 「야만인들」에게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민족적 프라이드는 나무랄 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백성을 「야만인들」이 유린하는 「지옥」에 남겨 놓고 「안전지대」 강화도에 들어간 고려 武人정권의 행태를 상찬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崔氏 武人정권의 몰락
보다못한 高宗은 太宗
오고데이에게 使者를 보내 撤兵(철병)을 간청했다. 오고데이는 出陸과 高宗 자신의 入朝를 요구했다. 이 요구는 고려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崔沆(최항: 崔瑀의 아들)이 반대했다. 이런 맥락에서 高宗과 崔沆의 이해관계는 상반될 수밖에 없었다. 高宗은 몽골의 위력을
빌려 무인정권을 누르고 싶을 터이고, 崔沆은 몽골과 국교를 회복할 경우 武人정권의 立地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高宗의 화해노선에 동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高宗은 자기 대신 왕족 新安公 佺(전)을 몽골에 입조시키는 미봉책으로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바로 이 무렵,
몽골에서는 太宗 오고데이가 急死(급사)하여 후계문제가 현안이 되고 있었다. 그런 정황에서 몽골 지도부는 高麗문제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몽골 측은 고려 측의 국내 사정 등에 대한 충분한 理解(이해) 없이 일방적으로 和議부터 성립시켰다. 몽골 측이 고려 측에 종래 제시한 和議
조건은 ①高宗이 강화도로부터 出陸할 것 ②왕족을 인질로 보낼 것 ③反蒙(반몽)행위를 한 자들을 모두 처벌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조건은 對몽골 강경노선을 견지해 온 고려의 무인정권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로써 定宗 구유그가 大칸을 계승한 이듬해인
1247년부터 몽골군의 제4차 침략이 시작되었다. 몽골군은 평안도와 항해도에 침입했지만 다음해 또다시 스스로 물러갔다. 이번에는 定宗 구유그가
술과 여자를 너무 밝힌 끝에 在位 2년도 못 돼 急死하여 칸位 계승문제가 재연했기 때문이다. 몽골의 후계 칸은 칭기즈칸의
末子 투루이의 長男 멩게로 결정되었다. 憲宗 멩게는 使者를 고려에 파견하여 高宗의 入朝와 무인정권의 出陸을 거듭 요구했다. 고려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몽골의 제5차 침략은 1253년 7월부터 약 6개월간에 걸쳐 감행되었다. 이때도 몽골군은 도서지역을 제외한
고려의 전토를 휩쓸었다. 高宗은 스스로 강화도 對岸의 昇天府로 나가 몽장을 만나 고려왕조의 出陸을 약속하면서 왕자 安慶公 滄(안경공 창)을
몽골에 보냈다. 이로써 몽골군은 1254년 1월 철수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6개월 후 몽골은 문책의 使者를 보내 『국왕이
出陸하여 몽골 使者를 맞았던 것은 可하나 실권을 잡은 崔沆 이하 대신들은 출륙하지 않았고, 또한 몽골에 항복한 고려인들이 처형된 것은
부당하다』고 질책했다. 이어 자라르타이(車羅大)가 이끄는 몽골군이 고려 전토를 유린했다. 이때 무려 20만 명의 백성들이 납치되어 北으로
끌려갔다. 이것이 몽골의 제6차 침략이었다. 이에 견디다 못한 高宗은 대사성 柳璥(유경)·장군 朴松庇(박송비) 등에게
密旨(밀지)를 내려 崔氏 무인정권을 타도할 것을 가만히 사주했다. 그때 무인정권의 실권자는 崔沆의 지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최의였다.
1258년, 드디어 쿠데타가 성공하여 최의 일당이 타도되었다. 高宗 45년(1256)의 일이었다. 崔沆-최의 父子는 그들의 先代인 최충헌-최우에
비해 정권을 움켜쥘 만한 능력 또는 奸智(간지)가 부족했다. 이로써 崔氏 정권의 시대는 4代 60년 만에 끝났지만, 아직
武人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최의를 誅殺(주살)한 무인 金仁俊(김인준)이 고려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金仁俊은 柳璥 등 文臣들을 누르고
의연히 對蒙항쟁 노선을 견지했다. 따라서 몽골과의 화평 교섭이 진전되지 않았다. 자라르타이가 공격을 재개하자 高宗은
무인들을 설득, 몽골에 使者를 파견하여 『이제까지 우리나라는 權臣 최의의 전횡에 의해 帝命(제명)을 따르지 않았지만, 그가 주살된 만큼 앞으로는
태도를 고치겠다』는 뜻을 전했다. 자라르타이는 다음해(1259) 3월 使者를 강화도에 보내 국왕의 개경 遷都와 태자 전(전)의 入朝를 확약시킨
다음 撤軍(철군)했다. 이 약속에 따라서 태자 전이 몽골을 향해 길을 떠난 것은 1259년 4월이었데, 그의 여행 중
천하의 정세가 급변했다. 우선 父王 高宗이 6월 말에 사거했고, 몽골의 憲宗 멩게도 南宋 親征(친정)에 나섰다가 四川省 六盤山(육반산) 진중에서
급사했다. 또다시 고질적인 후계 大칸 문제가 터져 나왔다. 5대 大칸의 位를 놓고 憲宗 멩게의 첫째 동생 쿠빌라이(忽必烈)와 막내 동생
아리쿠브가(阿里不哥)가 정면 충돌했다. 육반산을 향해 여행 중이던 고려태자 전은 憲宗 멩게의 訃音(부음)을 접하고 실로
난감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누가 몽골의 大權을 거머쥘 것인가? 누구를 교섭상대로 삼아야 고려의 국가이익이 담보될 수 있는 것인가―이것이야말로
중대한 선택의 기로였다. 태자 전과 쿠빌라이의 만남 태자 전으로선 행운이었다.
나중에 몽골의 제5대 칸으로 등극하는 쿠빌라이를 여행길에서 만났기 때문이었다. 쿠빌라이는 南宋 최대의 요충지 襄陽城(양양성)을 공략하다가 憲宗
멩게의 부음을 접하고 급히 北上하던 길에서 고려 태자와 조우했던 것이다. 쿠빌라이의 기쁨은 컸다. 적어도 그때까지
쿠빌라이는 후계경쟁에서 동생 아리쿠브가에게 밀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려 태자가 제 발로 찾아왔다는 것은 대내외적 홍보효과가 상당했던
것이다. 태자 전을 접견한 쿠빌라이는 이렇게 말했다. 『高麗는 萬里 밖의 遠國(원국). 옛날 唐太宗이 수차 친정을 해도
굴복하지 않았다. 지금 太子가 스스로 찾아와서 나에게 귀순한 것은 天意이다』 쿠빌라이는 태자 전에 대한 대우를 크게
격상시켰고, 호위병까지 붙여 귀국하도록 했다. 귀국 후 태자 전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元宗이다. 아직 몽골의 主權者는
미정이었다. 아리쿠브가는 몽골 本土에서 개최된 쿠릴타이(新羅의 和白과 유사한 騎馬民族의 會議體)에서 제5대 칸으로 선출되었던 만큼 명분을
先占했다. 반면 쿠빌라이는 中原의 인력과 물자를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유리했다. 쿠빌라이는 1261년, 내전상태에서 또 하나의 쿠릴타이를
열어 大칸의 位에 올랐으며, 1264년 무력대결을 통해 아리쿠브가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世祖 쿠빌라이는 이때까지 역대
몽골의 大칸들과 달리 고려에 대해 회유책을 구사했다. 고려왕실을 도와 국내 親蒙세력을 증대시키려는 것이었다. 한편 元宗은 先代 왕들을 괴롭혔던
무인들의 횡포를 제압하고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世祖 쿠빌라이의 힘을 이용하려고 했다. 이것은 바로 世祖 쿠빌라이가 바라는
바였다. 元宗 즉위 직후 世祖 쿠빌라이로부터 전해진 詔書(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종래의 강경노선과는 전혀 달랐다.
『余(여: 나)는 一視同仁(일시동인)의 태도로서 貴國(高麗)에 臨(임)하고, 出陸의 件에 대해서는 農桑(농상)을 권하여 백성들을
구하는 방침으로써 처리한다. 또 이제껏 귀국을 침략했던 몽골의 人馬는 모두 철수해서 고통을 제거하고, 귀국의 포로 및 도망자는 귀국에 송환한다』
뒤를 이어 도래한 쿠빌라이의 조서 중 핵심 내용은 이러했다. ①고려의 衣冠은 본국(고려)의 풍속에
따르고, 上下 모두 바꿀 필요가 없다. ②使人은 몽골조정에서 파견하는 자에 限(한)하고, 그 외 일체를 금지한다. ③수도를 舊京(구경:
개경)으로 옮기는 件은 국력을 회복한 다음 실행해도 좋다. ④고려에 주둔하고 있는 몽골군은 가을까지 철퇴한다. ⑤다루가치(점령지에 둔 民政
감독관)는 철수시킨다. 이는 매우 관대한 조치였다. 몽골의 征服史(정복사)에서는 유례가 없이 40여 년에 걸쳐 끈질기게
항전한 고려에 대해 「대접」을 해주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몽골군은 항복을 거부하고 농성하다가 陷城(함성)하면 성내 주민의 씨를 말릴 만큼
무자비한 전술을 구사하긴 했으나 勇者(용자)를 존중하는 초원의 법칙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려에서 산출되는
好銅(호동: 眞鍮), 糧餉(양향: 식량), 海東靑(해동청: 매) 등을 歲貢(세공)으로서 사정없이 거둬들였다. 元宗은 전란을 통한 국토의 황폐를
이유로 그것을 모면하려 했지만, 쿠빌라이는 엄하게 질책했다. 즉 고려에 대해 恩威(은위)를 병행하는 교활한 양면책을 구사했던 것이다.
三別抄는 武人정권의 군사적
支柱 元宗이 삼별초를 파하려 하자 開京정부에 대항하여 삼별초가 叛旗(반기)를 들었던 사실은 앞에서 썼다.
삼별초는 원래 崔氏정권의 2代 집권자 崔瑀가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夜別抄(야별초)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병력수가 많아짐에 따라
左別抄(좌별초)·右別抄(우별초)로 나뉘었는데, 몽골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던 歸還兵(귀환병)들이 神義軍(신의군)으로 조직됨으로써 이 세 부대를
합쳐 삼별초라 부르게 되었다. 삼별초는 六番都房(육번도방)과 함께 崔氏정권의 군사적 支柱(지주) 역할을 함으로써 私兵집단의 성격이 강했다.
삼별초는 강화도 遷都 이후 武人정권의 주력이 되었다. 崔氏정권이 쿠데타에 의해 붕괴되고 난 후에도
金仁俊·林衍(임연)-林惟茂(임유무) 父子로 계속된 무인정권을 뒷받침한 무력이었다. 따라서 고려왕조에서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삼별초를 지휘하에
두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崔沆이 1258년 崔氏 정권을 타도하고, 林衍이 1268년 元宗의 밀명을 받아 崔沆과 그 일족을 주살한 것도 모두
삼별초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가능했다. 삼별초를 장악한 林衍은 조정 신하들을 협박하여 親蒙노선을 추진하고 있는
元宗을 폐위시키려고 작심했다. 元宗 10년(1269) 6월18일, 林衍은 삼별초와 六番都房을 毬庭(구정)에 모아 위력을 보이며 조정 중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협박했다. 『나는 왕실을 위해 權臣을 제거하였는데, 왕은 金鏡(김경) 등과 꾀하여 나를 죽이려 하였으니 나는
앉아서 죽음을 감수할 수 없는 터이다. 나는 큰일을 하고자 王을 海島에 귀양 보내고자 하노니 어떻게 하랴』 사흘 뒤인
6월21일, 드디어 林衍은 삼별초와 육번도방을 동원한 가운데 元宗을 폐립하고 安慶公 滄(안경공 창)을 新王으로 옹립했다. 「신왕」 王滄은
林衍으로 敎定別監(교정별감)을 삼아 집권체제를 갖추게 하고 元宗을 上王으로 밀어냈다. 고려왕조의 수난은 거듭되었다.
이번에는 西北面兵馬使 營基官(서북면병마사 영기관) 崔坦(최단)이 元宗을 폐위한 林衍을 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켜 고려 서북부 일대의 땅을
점령하여 몽골에 붙었다. 쿠빌라이는 반역자 최단을 東寧府(동녕부)의 장관으로 임명하고 그 탈취한 땅을 몽골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것은 쿠빌라이가 구사한 이민족 지배의 상투수단이었다. 이런 점에서 林衍은 元宗과는 달리 쿠빌라이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어떻든 林衍의 元宗 폐립은 몽골의 간섭을 불러들이게 되었다. 林衍은 당시 몽골에서 귀국하는 태자 諶(심)을
중도에서 붙들기 위해 야별초 20명을 義州(의주)에 매복시켰다. 이 같은 사실을 눈치챈 태자는 九連城(구련성: 압록강 북안)까지 왔다가
燕京(연경: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고려 태자의 北還(북환)으로 元宗의 폐위사실을 알게 된 世祖 쿠빌라이는 이 기회를 이용, 고려 內政에
철저하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즉, 명분론을 앞세워 태자를 끼고 林衍에게 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쿠빌라이의 협박 태자는
쿠빌라이에게 『군사를 빌려 본국에 귀국할 것』을 청했다. 쿠빌라이는 태자에게 特進上柱國을 제수하고 率兵(솔병) 귀국하여 국난에 대처하라고
지원했다. 태자의 귀국에 앞서 쿠빌라이는 고려에 使者를 보내 『신하로서 폐립을 단행하였으니 自古로 이러한 사리가 어디 있느냐…감히 국왕 및
세자와 그 족속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살해된 자가 있으면 용서치 않겠다』면서 林衍의 쿠데타 정권을 위협했다. 이에 林衍은
추밀원부사 金方慶(김방경) 등에게 陪臣表(배신표: 제후국의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글)를 휴대케 하여 몽골에 보냈다. 陪臣表에서 林衍은
『국왕(元宗)이 병으로 王弟(안경공 滄)에게 양위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쿠빌라이는 대군을 東京(동경: 심양)에 대기시켜
놓고 병부시랑 黑的(흑적) 등을 강화도에 보냈다. 黑的이 휴대한 特詔(특조)에서 쿠빌라이는 『林衍의 말을 믿지 못하겠으니 12월10일까지
국왕·안경공·林衍 등이 함께 闕下(궐하)에 와서 情實을 面陳(면진)하면 朕(짐)은 그 시비를 듣고 區處(구처)함이 있을 것』이라 하고 『만일
기한이 넘어도 이르지 아니하면 進兵하여 剿戮(소륙)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때 이미 몽골의 대군은 국경을 누르고 있었다.
당황한 林衍은 할 수 없이 11월23일 안경공을 폐하고 元宗을 복위시켰다. 그러나 林衍과 안경공은 쿠빌라이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元宗만
12월19일 출국, 연경에서 쿠빌라이를 만나 몽골의 힘을 빌려 權臣을 제거하고 개경으로 환도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元宗은 연경에 머물면서 몽골의 中書省에 세자 諶(심)과 몽골 공주와 혼인을 정식으로 요청하고, 쿠빌라이에게는 『助兵 약간을 주면 거느리고
본국으로 돌아가 林衍을 제거하고 出陸遷都(출륙천도)를 실행하겠다』고 상주했다. 쿠빌라이는 세자 諶의 혼인문제는 뒷날로
미루기로 하고, 당시 대기 중이던 東京行省 장관 頭輦哥(두련가)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국왕을 伴行(반행)케 했다.
한편 林衍은 指喩(지유) 智甫大에게 군사를 이끌고 黃州에 둔치게 하고, 神義軍을 추도(황해도 송화군)에 주둔시켜 몽골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또
야별초를 諸道에 보내어 백성들을 독려하여 海島에 入保(입보: 피난)케 했다. 그러나 林衍은 강력한 몽골의 압력에 고심하던 끝에 등창이 도져
1270년 2월25일 죽었다. 林衍의 차남 惟茂(유무)가 敎定別監의 지위를 세습했다. 귀국도상에 있던 元宗은 중도에서
上將軍 정자여 등을 앞질러 보내 신료들에게 환도를 告諭(고유)하면서 『사직의 安危(안위)가 이 일거에 달려 있다』고 했다.
그러나 林惟茂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衆意(중의)를 물리치고 入海전략을 계속 유지하려 했다. 이에 元宗은 가만히
사람을 보내어 林惟茂의 자형인 어사중승(종4품) 洪文系를 勤王(근왕)의 명분론으로 설복시켰다. 홍문계는 直門下省事(직문하성사) 宋松禮(송송례)와
모의, 삼별초를 동원하여 林惟茂와 그 일당을 주살했다. 三別抄의 봉기 林惟茂 討滅(토멸)의 소식은
元宗이 龍泉驛(용천역: 황해도 서흥)에 이르렀을 때 전해졌다. 元宗은 개경에 도착하기 4일 전인 1270년 5월23일 구경으로 환도할 기일을
확정 발표했다. 이때 삼별초의 주력은 元宗의 환도계획에 저항하면서 국가의 창고를 터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軍亂(군란)의
서막이었다. 이에 元宗은 上將軍 정자여를 강화에 보내어 무마책을 구사했으나 삼별초는 여전히 국왕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개경에 돌아온 元宗은 장군 김지저를 강화에 보내어 삼별초를 혁파하고 그 명부를 압수케 했다. 사학자 金庠基(김상기) 선생은
그의 「신편 고려시대사」에서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게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고려사 열전
권43 裵仲孫 열전에는 …삼별초가 그의 명부가 몽골에 알려져 몽골의 박해를 받을까 염려하여 난을 일으킨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삼별초가
叛心(반심)을 품은 것은 이미 還都 기일을 榜示(방시)하던 때로부터의 일이었던 것이니 그때 삼별초는 국가의 府庫(부고)까지 擅發(천발)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삼별초 난의 基因은 還都반대에 있었던 것이며, 還都반대는 말할 것도 없이 몽골에의 저항을 의미하는 것이다>
金庠基 선생은 『삼별초는 權臣의 私兵이 아니오, 쇠퇴한 府衛兵을 보강한 군단』이라고 강조했다. 삼별초의 원래 성격이 야 어떻든 강화
遷都 이후 對蒙항전의 주력은 삼별초였다. 그런 삼별초의 對몽골 적개심과 위기감에 불을 지른 것은 裵仲孫이었다. 裵仲孫이 야별초지유
盧永禧(노영희) 등과 더불어 반란의 깃발을 들면서 선동연설로 軍心을 움직였음은 이 글의 첫머리에서 이미 썼다. 그러면
裵仲孫은 누구인가. 그의 역할에 비해 역사기록은 소홀한 편이다. 거사 당시의 나이도 알 수 없다. 그는 「삼별초 난」 때에 비로소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그의 출신배경도 불분명하다. 益齋亂藁(익재난고)와 元史 고려전 등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林衍의 黨」이었던 것 같다.
삼별초는 강화도에 와 있던 蒙使와 반란에 반대하는 정부의 고관 및 장군들을 베고 기세를 올렸다. 도망가다가 붙들린 文武 관원들도
血祭(혈제)의 희생물이 되었다. 裵仲孫·盧永禧 등이 옹립한 新王은 元宗의 6촌 동생인 承化侯 溫(승화후 온)이었다.
三別抄가 抗蒙 근거지를 진도로 옮긴
까닭 1270년 6월3일
삼별초는 1000여 척의 선단을 끌고 전남 진도를 향해 서서히 南下(남하)했다. 강화도는 개경과 가까워 고려정부군을 지배下에 넣은 몽골군이 그
軍船을 동원하여 강화도 상륙작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때 삼별초는 강화도에 있던 公私(공사)의 재화와
정부의 관리들이 섬에 남겨두었던 처자들을 인질로 삼아 배에 실었다. 처자들의 통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고 高麗史는 전하고 있다.
삼별초가 진도에 들어간 것은 동년 8월19일이었다. 서서히 남하하면서 서해 일대의 도서를 경략했기 때문이다. 元宗은 정부군에 명하여
삼별초를 추격했다. 추격군에는 몽골군 1000여 명도 가세했다. 그럼에도 정부군은 삼별초를 두려워하여 접근하지 못했다.
진도는 강화도처럼 육지와 가까우면서도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어 삼별초로선 절묘한 섬이었다. 당시 삼별초의 진도 점거에 대해 개경 측은 비명을
올렸다. 고려정부의 다급함은 그 무렵 元宗이 몽골에 보낸 國書에서 잘 나타나 있다. 『경상·전라의 貢賦(공부)는 모두
육지로 수송하지 못하고 반드시 水運으로 하는데, 지금 역적(삼별초)이 진도에 웅거한지라, 이곳은 水路의 咽喉(인후: 목구멍)로서 왕래해야 할
선박을 지나가지 못하게 한다』 삼별초는 진도에 들어간 뒤 龍藏城(용장성)을 쌓고 궁궐을 크게 조영하여 都城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진도를 수도로 한 삼별초의 활동은 매우 왕성했다. 이후 창선·거제·제주 등을 비롯하여 30여 개의 섬을 점령하여 해양왕국의 위세를
높였다. 삼별초의 활동은 육지에서도 맹위를 떨쳤다. 먼저 육지의 백성과 재화를 도서에 옮겨 항전력을 강화하는 한편 長興을
비롯하여 合浦(馬山)·金州(金海)는 물론 羅州·全州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남부 지방의 일부 수령방백들은 도망을 쳤고, 그들 중엔 溫王을 찾아와
충성을 맹세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民心은 어디로 움직였는가 1270년 9월, 元宗은
金方慶(김방경)을 全羅道追討使(전라도추토사)로 삼아 전라도를 탈환했다. 이 작전엔 蒙將 아하이(阿海)도 가세했다. 그러나 삼별초의 세력은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전라도를 탈환했다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몽골 및 고려정부의 수탈에 당해 온 백성들은 삼별초의 난에 힘을 얻어 곳곳에서
반항하거나 반란을 일으켰다. 몽골은 처음부터 삼별초 난의 진압에 적극적이었다. 모처럼 元宗을 회유하여 고려를 그의
外藩(외번)으로 삼았던 정책에 차질을 빚을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世祖 쿠빌라이의 숙원인 일본 정벌 일정에 차질이 생겼던 것이다.
삼별초가 해상에서 항전을 계속하는 한 일본 정벌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동년 윤 11월 元宗은 金方慶에게 上將軍으로 기용,
삼별초 토벌을 명했다. 金方慶은 동년 12월 진도 근해로 쳐들어가자 삼별초도 전선에 기치를 휘날리며 응전하니 蒙將 아하이가 겁을 내 물러나려
했다. 金方慶의 고려군 戰船들만 진공했는데, 삼별초 戰船들의 역습을 받아 모두 도망쳤다. 金方慶만 홀로 적선들 가운데로 돌입했다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삼별초와의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경험한 연합군 측, 특히 몽골에서는 삼별초에 대한 회유공작을 거듭
전개했다. 이에 대한 삼별초의 지도부의 반응도 매우 전략적이었다. 예컨대 元宗 11년 12월, 蒙使 杜員外(두원외)와 함께 員外郞 박천주가
진도에 건너갔는데, 삼별초 지도부는 元宗의 諭旨(유지)에 대해서는 「惟命是從」(유명시종: 오로지 명에 따르겠다)이라는 화답을 했던 반면 몽사는
상대도 하지 않고 억류해 버렸다. 이것은 몽골과 고려정부의 사이를 벌려놓으려는 교묘한 이간책의 구사라고 할 수 있다.
元宗(1271) 12년 4월, 쿠빌라이는 전투에서 비겁 무능했던 阿海를 대신하여 屯田經略使(둔전경략사) 炘都(흔도)를 삼별초 토벌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증원군을 급파했다. 炘都가 지휘한 둔전군은 원래 일본 원정을 위한 부대였지만, 진도 공략을 위해 전용했던 것이다. 증원부대의 지휘관은
洪茶丘(홍다구)였다. 洪茶丘는 麟州(인주)의 鎭將 洪福原(홍복원)의 아들로 그의 아비와 함께 조국을 배반하고 쿠빌라이에게 붙어 몽골의 장군이
되었던 인물이다. 5월15일, 炘都와 洪茶丘가 이끈 몽골군은 金方慶이 지휘하는 고려군과 연합하여 진도를 공략하여 용장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옹립된 王溫은 洪茶丘에 붙들려 참수되었다. 珍島로 가는 길 필자는 진도를 답사하기 위해
지난 10월31일 오전 9시30분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 가보니 하루 1편만 있는 진도 직행 버스는 오후 3시35분 출발이었다. 모로 가도 진도에
가기만 하면 될 것 아니겠는가. 오전 9시35분 출발 광주행 버스에 탔다. 배낭 하나를 달랑 메고 혼자 떠나는 여행은 이처럼 홀가분해서 좋다.
오후 1시30분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하차하니 15분 뒤에 출발하는 진도行 직행버스와 바로 연결되었다. 해남군과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 아래가 바로 1597년 9월, 13척의 함대로 일본 함대 133척을 무찌른 명량대첩의 현장인 울돌목(명량해협)이다. 명량해협은 폭
1km 정도이지만, 간만의 격차가 10m이며 조류의 시속이 11.21노트에 달해 범선시대엔 진도로의 도항이 至難(지난)했을 것이다.
진도고등학교의 교사와 진도신문 발행인을 지낸 박명석씨와 만났다. 그가 모는 지프를 타고 龍藏山城(용장산성)과 南桃石城(남도석성)의
답사에 나섰다. 진도는 동-서와 남-북이 100리에 이르러 국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용장산성은 진도의 북단에 위치해
있다. 진도읍내 중심가에서 18번 국도를 타고 20리쯤 북상하다가 챙재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801번 지방도로로 좇蛔든다. 여기서 2.5km쯤
더 가면 용장산성이 나타난다. 둘레가 약 13km에 이르며 산성 안 왕궁터에는 계단 형상의 석축이 남아 있다. 여기까지
와서 碧波津(벽파진)에 가지 않을 수 없다. 벽파진은 연육교인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진도와 육지를 잇는 나루터였고, 삼별초를 공격했던
麗蒙 연합군도 이곳을 상륙지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명량전투 직전에 3도수군통제사 李舜臣의 함대가 本營을 설치했던 곳도 벽파진이었다.
용장산성에서 벽파진까지는 801번 지방도로를 따라 북진하면 10리도 되지 않는 거리다. 1271년 5월15일 麗蒙연합군은
左·右·中 3軍으로 나누어 세 방면으로 진공했다. 삼별초의 방어력을 분산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고려의 上將軍 金方慶과 蒙將 炘都가 中軍이었다.
삼별초는 그동안 연합군과 싸워 자주 이긴 결과로 輕敵(경적)하는 마음이 생겨 방비를 소홀히 한데다 몽골 측의 회유책에 걸려들어 방심하고 있었다.
그 틈을 타 연합군이 갑자기 쳐들어오니 삼별초는 연합군 측의 주력인 中軍을 막으려고 벽파진 부근으로 집결했다. 이때 左軍인
洪茶丘 부대가 급히 측면(獐項=노루목)을 공격하여 火攻을 가했다. 이에 놀란 삼별초의 방어진이 무너졌다. 金方慶·炘都의 주력부대도 벽파진에
상륙하여 용장성을 포위했다. 당시 몽골군은 각종 攻城(공성)무기와 최신병기, 특히 火槍(화창)·火砲(화포)를 사용했다.
용장산성이 함락된 직후 삼별초의 지도자 裵仲孫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진도의 남단까지 퇴각,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金方慶은 패주하는 삼별초를 추격하여 남녀 1만여 명과 전함 수십 척, 糧米 4000석과 많은 財寶(재보)·器仗(기장)을 거두어
개경으로 이송했다. 몽골군은 많은 士女와 백성 및 珍寶(진보)를 포획했다. 裵仲孫의 최후 용장산성과 벽파진에서 물러나
읍내로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진도의 동쪽과 남쪽에 있는 抗蒙유적지를 답사할 차례다. 박명석 선생이 모는 지프를 타고 읍내 중심가를 벗어나자 곧
「논수골」이라는 마을이 보였다. 朴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삼별초의 왕(王溫)을 사로잡은 洪茶丘 등 蒙將들이 斬首(참수)할 것인지 여부에 대한
論難(논란)을 벌였다고 해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논수골 바로 동쪽에 「王무덤」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洪茶丘에게 참수된 王溫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 여기서 조금 동진하면 바닷가에 이르는데, 이곳에 금갑항이 있다. 금갑항은 金通精이 이끈 삼별초 패잔병이 제주도로 가기 위해 배를 탔던
곳이라고 한다. 금갑항은 진도에서 제주도와 가장 가까운 거리의 항구로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제주도行 뱃머리가 있었다고 한다. 요즘 제주도行
뱃머리는 금갑과 연육교로 이어진 接島(접도)로 옮겨졌다. 수심이 낮은 금갑항에는 대형선이 입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18번
국도로 진도의 남단(임회면 남동리)에 이르면 南桃城(남도성)이 버티고 있다. 이곳에서 裵仲孫이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 자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남도성 인근 굴포리 바닷가에는 裵仲孫 사당이 있다. 이 사당 안에는 裵仲孫과 삼별초 병사 및 지방 의병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朴선생에게 抗蒙전쟁 당시 진도
인구가 얼마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강화도에서 1000여 척의 배를 타고 왔다고 하니까 한 척의 승선인원을 10명으로만 잡아도
1만여 명, 여기에다 진도의 원주민과 삼별초 정부에 귀순해 온 사람 등을 더하면 3만 명은 되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삼별초의 패망 후 진도는
초토화했다. 그러면 그때 진도 사람은 다 어디로 갔을까. 朴선생은 『高麗史의 기록에 1만여 명이 고려정부군에 붙잡혔고 또
몽골군도 많은 백성을 포획했다고 되어 있다. 그들 중 적어도 1만여 명은 合浦(합포: 지금의 馬山) 등지에서 日本 원정용 兵船을 짓거나 전국
각지에 산재한 몽골군의 屯田(둔전)에서 兵糧(병량)을 생산하는 노동에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고려 말기에도
진도현은 왜구의 침탈이 극심해 空島化(공도화)했다가 조선왕조 世宗 때 復縣(복현)되었다. 현재 진도군의 인구는 약 4만 명이다.
일본 원정의 전진기지 濟州道
진도에서 패전한 삼별초의
잔당은 해상으로 도피하여 耽羅(탐라: 제주도)에 들어갔다. 탐라는 1270년 11월 이후 삼별초의 판도였다. 그들은 현지 농민들의 협력을 얻어
제주도 북서부에 內·外城을 축조하고 북부의 해안을 따라 보루를 쌓아 麗蒙연합군의 내습에 대비했다. 제주도에 있는
抗蒙유적지는 최근 10년 사이에 두 번 방문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 답사에서 생략하기로 했다. 이곳을 방문해 보면 해안으로부터 약 3km쯤
들어간 북제주군 애월면 고성리에 抗蒙유적지가 있는데, 주위 6km에 축조된 土城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곳에 들어간 삼별초
병사들은 金通精을 리더로 받들고 해상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전라남도·경상남도의 여러 항구를 습격하고, 일본 원정용으로 건조된 軍船들을
잇달아 불태워 고려정부를 공포에 빠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世祖 쿠빌라이의 골머리를 아프게 했다. 이에 쿠빌라이는 1273년
4월 몽장 炘都·洪茶丘와 고려의 金方慶에게 명하여 탐라를 공략토록 했다. 麗蒙연합군은 潘南縣(반남현: 지금의 나주시 반남면)에서 출항했는데,
항해 중 큰 바람이 불어 軍船이 침몰하는 등 패닉상황이 발생했다. 炘都 등은 즉각 보충 兵船을 조달하고 병력 1만 명을 증강하여 4월 하순에
애월읍을 공격했다. 삼별초는 古城里의 내·외성에 들어가 항전했지만,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敗勢(패세)에 몰렸다. 그들은
격렬한 전투 끝에 전멸했다.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후 쿠빌라이는 이곳을 몽골(元)의 직할 영토로 편입하고, 탐라국
招討司(초토사)를 설치했다. 招討使라는 장관 밑에 병사 1700명이 주둔했다. 쿠빌라이는 삼별초의 항쟁이 시작되기 한 해
전인 1269년에 이미 탐라의 전략적 위치에 주목, 使者를 파견해 지리를 조사시킨 바 있었다. 이 조사에서 한라산 기슭에 牛馬의 방목에 적합한
초원이 있다는 사실이 파악되었다. 또 한라산의 산림은 일본 원정을 위한 兵船 건조의 船材로 적합한 것도 알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제주도를 일본 원정의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후 耽羅摠管府(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직할영토로 편입시켜 우선 몽골의
말을 들여와 방목시켰다. 또 한라산의 삼림은 고려의 造船所(조선소)뿐만 아니라 멀리 양자강 하구 닝포(寧波)까지 운반되어 造船材로 사용되었다.
탐라가 1290년 고려에 귀속된 후에도 元나라는 몽골인 牧子(목자)를 파견하여 잠정적으로 목장을 직영하기도 했다. 후세에까지 제주도가 우리나라
말의 主목장이 된 것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麗蒙연합군의 출항지 合浦 11월3일 오전 8시40분
木浦(목포)발 馬山(마산)行 직행버스를 탔다. 마산은 몽골이 일본 정벌을 위해 征東行營(정동행영)을 설치했던 곳으로 당시엔 合浦(합포)라고
불렸다. 몽골의 世祖 쿠빌라이는 고려에서 삼별초의 항쟁이 평정되자 일본 정벌을 서둘렀다. 合浦는 삼별초와도 관계가 깊은
곳이었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삼별초는 합포에 세 번 출몰했다. 첫 번째는 元宗 12년(1271) 2월 삼별초가 합포를 침공하여 監務(감무)를
생포해 갔다. 두 번째는 元宗 13년(1272) 11월 삼별초가 다시 합포를 습격하여 함선 22척을 불사르고 몽골의 烽卒(봉졸) 4명을 사로잡아
갔다. 세 번째는 元宗 14년(1273) 1월 또다시 합포를 공략한 삼별초는 함선 32척을 불사르고 몽골 병사 10여 명을 잡아 죽였다.
몽골은 1271년(고려 元宗 12년) 국호를 「大元」으로 바꾸었다. 쿠빌라이는 그의 딸을 元宗의 요청에 따라 세자
諶(심)과 결혼시켜 양국관계를 굳게 했다. 오후 3시 무렵 마산 종합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늦가을의 해는 짧다. 서둘러
택시를 타고 마산시청 문화관광과로 찾아가 학예사 구수익씨를 만나 자료를 얻었다. 구수익씨는 마산시립박물관 송성안 박사가 마산의 몽골유적에 관해
전문가라고 귀띔해 주었다. 마산시청을 나와 택시를 타고 자산동 고지대에 있는 마산시립박물관으로 찾아갔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전국 박물관이 모두 휴관하는 월요일이었다. 宋박사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에게 『征東行營이 있었던 자리가 어디냐』고 물으니 『바로 박물관
뒷산』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다시 『麗蒙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위해 출항했던 뱃머리가 어느 지점이냐』고 질문했더니 『박물관 정원 분수대에서
내려다보면 대우백화점이 보이는데, 그 왼쪽 일대』라고 대답했다. 우선, 분수대로 가서 제1차·제2차 麗蒙연합군 함대의
출항지였던 合浦洞(합포동) 일대를 촬영했다. 합포동이라면 「마산의 자갈치」인 오동동과 馬山灣의 맨 안쪽인 산호동 사이의 동네다. 그 옆으로는
마산수출자유단지가 펼쳐 있다. 「합포동」이란 洞名에서 드러나듯 이곳은 마산항의 「어미땅」이다. 그 일대는 매립과 도시화로 인해 麗蒙연합군의 자취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征東行營의 소재지였던 마산시립박물관 뒷산 주변은 현재 추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역시
당시의 유적이나 遺構(유구)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산시립박물관을 빠져나와 자산동 18번지에 있는 蒙古井(몽고정)으로 찾아갔다.
산중턱에 위치한 박물관의 아랫동네(자산동 18번지) 큰길가에 있다. 바로 그 앞에는 1960년 4·19 혁명을 촉발한 馬山시위를 기념하는
「3·15 기념탑」이 서 있다. 몽고정은 몽골의 둔진군에게 用水를 공급했던 우물로 추정되고 있다. 향토사학자 이학렬
선생에게 전화로 물으니 『몽골군이 판 우물은 모두 6개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론 그것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삼별초의 항쟁이 평정되고 고려와의 관계가 안정되자 이제 쿠빌라이는 日本정복에 나선다. 육상과 해양을 아우르는 大帝國 건설―이것이
쿠빌라이의 野望이었다. 몽골연합군의 제1차·제2차 일본 원정의 전투상황과 숨가쁘게 전개된 당시 東아시아의 정세 등은 日本과 中國 현지 답사 등을
통해 다음 호에 쓸 계획이다.● |
金方慶의 전략대로 계속 攻勢를 걸었다면 오늘의 日本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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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장수
金方慶:『육상에서 宿營하고 계속 攻略해야 한다』 몽골장수 흔도:『피곤한
군사를 몰아 깊이 들어갈 수는 없다』
日本 도서지역에서 우는 아이를 달랠
때:『무쿠리(몽골), 고쿠리(高麗)가 왔다』
운명의 날―1274년
10월20일의 작전회의에서 麗蒙연합군의 두 장수의 견해는 팽팽히 맞섰다. 결국, 몽골장수 ?都(흔도)의 계책대로 歸艦한 연합군은 그날 심야와
다음날 새벽에 걸쳐 몰아친 大暴風雨에 의한 艦隊의 難破로 궤멸적 타격을 입고 말았다. 만약 金方慶의 전략에 따라 陸上 橋頭堡를 확보하고 武器와
兵站물자를 양육해 두었다면 그후 전투상황은 日本軍에 絶對不利했다. 日本 騎馬武士의 個人戰法에 대한 麗蒙연합군의 集團戰法, 그리고 당시의
일본인으로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鐵砲의 위력―이에 압도당한 日本軍은 규슈의 최고사령부 大宰府까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大宰府가 무너졌다면
가마쿠라 幕府도 붕괴되었을 터이고, 그러했다면 日本의 운명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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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濤險阻― K포인트에서 回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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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년 10월 麗蒙연합군의 함대가 집결했던 對馬島의 아소우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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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26일 오전 10시20분,
記者는 釜山港을 출항하는 大亞고속해운 소속 200t급 여객선 「씨플라워」에 승선했다. 지금으로부터 730년 전(1274년 음력 10월)
麗蒙연합군이 馬山港에서 출항하여 쓰시마(對馬島)-이키시마(壹岐島)를 거쳐 하카타(博多)港에 상륙했는데, 기자도 그 바닷길을 따라가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마산항에서 출항하든 부산항에서 출발하든 거제도 해역 이후엔 어차피 같은 海路(해로)를 타는 셈이다. 구름이 낮게
끼어 視界(시계)는 불량했지만 포근한 날씨였다. 부산에서 對馬島까지는 참으로 가깝다. 50km도 되지 않는 49.5km다. 쾌청한 날이면 影島
태종대나 海雲臺 달맞이고개 위에만 올라도 육안으로 그 실루엣을 볼 수 있는 섬이다. 씨플라워號는 파도를 하얗게 가르며 잘도
달렸다. 指南鐵(지남철)에라도 끌리듯 자꾸 對馬島로 다가서고 있다고 느꼈다. 구름만 끼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때아닌 船內 방송이 흘러나왔다. 『船體(선체)가 심하게 흔들리니 승객들은 船內에서의 이동을 삼가해 주십시오』
船窓(선창)을 통해 넘어다본 바다는 파고가 좀 높기는 했다. 원래, 부산과 對馬島 사이의 大韓海峽(대한해협)은 거칠기로 호가 좀 나
있다. 출항한 지 30분쯤 되었을까. 다시 船內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부산항으로 回航(회항)하게
되었으니, 이 점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승객의 안전」을 위해 선장이 「K포인트」에서 回航을 결심했다는 데 대해
승객으로선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불평을 늘어놓을 수야 없는 것 아닌가. 출항 1시간 만에 釜山국제여객선터미널으로 되돌아왔다. 부산과 對馬島 사이를
오가는 유일한 여객선 씨플라워號는 이틀 후인 10월28일에 출항한다고 했다. 갑자기 「風濤險阻」(풍도험조: 바람과 파도가
험하여 막힘)라는 네 글자가 머리에 떠올랐다. 바로, 高麗의 재상 李藏用(이장용)이 몽골(元)의 황제 쿠빌라이에게 보낸 書狀(서장)에서 구사했던
문자다. 高麗 조정은 日本 정벌을 향한 쿠빌라이의 野望을 「기술적으로」 누르기 위해 「風濤險阻」라는 핑계를 내세웠던 것이다. 쿠빌라이가 고려
국왕 元宗에게 보낸 詔書(조서)에도 역시 「風濤險阻」라는 용어가 들어 있다. 對馬島 근해에서 停船해 버린 코비號 이 날 굳이 對馬島로 가려면
방법은 있었다. 오후 1시에 부산에서 후쿠오카(福岡)로 직행하는 배편이 있다고 했다. 후쿠오카에 가기만 하면 對馬島로 가는 여객선뿐만 아니라
여객기까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씨플라워號. 부산에서 후쿠오카로 가는 다른 여객선(항해거리 137km)은 뜨는데,
항해거리가 50km에 불과한 대마도行 여객선이 뜰 수 없다면 「그건 너, 씨플라워 때문」이 아니겠는가. 大亞고속해운 측은 『船種(선종)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취재 약속시간을 고치는 등의 번거로움은 있었지만, 부산에서 이틀을 묵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순서대로
답사해야 나중에 글쓰기에도 편리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씨플라워號는 이틀 후인 11월28일에도 뜨지 않았다. 출항 취소의
이유는 역시 「기상악화」였다. 기자는 같은 날 오전 9시15분에 출항하는 未來제트 소속 하카타(博多)港 직행 여객선 코비號에 승선(요금
8만5000원)했다. 꾸물거리다간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까지 놓쳐 버릴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코비號도 對馬島 近海에서
큰 파도를 만났다. 바다 한 가운데서 230t 급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船內 방송이 흘러나왔다. 『추진기에
異物質(이물질)이 유입되어 이물질 제거 후에 운항하겠으니 좌석에서 움직이지 말아 주십시오』 船窓 밖으로 내다보니 형무소 담
높이 만 한 파도의 연속행렬이 230t짜리 코비號를 꽤 심하게 우롱하고 있었다. 좀 불안했다. 코비號는 10분 만에 시속
80km의 정상운항에 들어갔다. 對馬島 북단을 지나 對馬해협으로 들어서니 거칠던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했다. 예정보다 25분 늦은 오후
1시20분 코비號는 하카타港 국제터미널에 입항했다. 기자로선 하카타港에의 첫 상륙이었다. 「역사의 도시」 하카타는 현재
후쿠오카市의 하카타區로 편입되어 있다. 과거의 大都護府(대도호부) 소재지였던 東萊가 釜山市의 東萊區로 편입된 것과 마찬가지의
逆轉(역전)현상이다. 하카타 지하철역에서 5분 거리의 「하카타 그린호텔」을 숙소로 삼았다. 우선 하카타 일원의 답사부터 시작했지만, 이 글은
730년 전 麗蒙연합군의 行路(행로)에 따라 기술될 것이다. 80騎로 3만大軍을 막으러 나선 對馬島主 12월1일 오전 8시30분,
記者는 쓰시마空港에 내렸다. 후쿠오카空港에서 日本航空 여객기 141편(요금 1만1950엔)을 타고 출발한 지 꼭 30분 만이었다. 공항에서 바로
택시를 잡아 타고 코모다(小茂田)로 달렸다. 나가사키(長崎)縣에 속하는 對馬島는 우리나라 울릉도처럼 길이 좁고 험난하다. 평지는 드물고 온통
산이어서 대중교통수단은 별로 없다. 면적은 709km2, 우리나라의 濟州道보다는 작지만, 巨濟島보다는 크다. 인구 약 4만3000명으로
2004년 3월1일자로 市로 승격된다. 麗蒙연합함대는 출항 이틀 후인 1274년 10월5일(이하 麗蒙연합군의 日本정벌 관련
날짜는 모두 음력) 오후 4시경, 對馬島 아랫섬의 사스우라(佐須浦)에 상륙했다. 사스우라가 바로 지금의 코모다이다. 對馬島의 중심지인
이즈하라(嚴原)와는 아랫섬의 「中央山地」를 가운데 둔 반대측 북서해안에 위치해 있다. 「八幡愚童記」(팔번우동기)라는 일본
측 사료에 따르면 앞바다를 뒤덮은 異國船(이국선)의 출현에 놀란 사스우라의 촌민들은 급히 달려가 이즈하라의 國府館(국부관)에 외적의 침입을
고했다. 당시 對馬島主는 소오 스케쿠니(宗助國)라는 68세의 武士였다. 그는 즉각 一族郎黨 80여 騎를 이끌고 그날 밤중에 사스우라로 진발했다.
뒤따랐던 一族郎黨 중에는 助國의 아들 宗右馬次郞이라는 소년무사로부터 宗甲斐六郞이라는 칠순의 노인도 섞여 있었다. 이 80여 騎는 이즈하라 주둔
武士團의 총력이었다고 한다. 다음날인 10월6일 오전 2시경, 코모다에 도착한 助國은 오전 6시 眞繼男이라고 하는 통역을
넣어 해안에 상륙해 있던 몽골군 지휘관에게 그 來意를 물었지만, 몽골군은 雜談(잡담) 제하고 화살부터 메뚜기떼처럼 날렸다.
「宗氏家譜」에 따르면 助國은 부하들을 독전하며 300명의 상륙부대를 일단 바다로 물러나게 했지만, 麗蒙軍은 다시 전함 7, 8척으로부터 약
1000명의 軍勢를 상륙시켜 맹공을 가했다. 전투는 오전 6시부터 오전 8시까지 계속되었는데, 2시간 만에 對馬島軍은 전멸했다.
助國은 戰死 직전에 郎黨의 小太郞과 兵衛次郞을 불러 「전장으로부터 탈출하여, 危急을 다자이후(大宰府)에 고하라」고 명했다고 한다.
당시 大宰府는 규슈(九州)를 통괄지휘하는 鎭西奉行(大宰)의 政廳(정청) 소재지였다. 鎭西奉行은 히젠(肥前)國의 守護(수호: 가마쿠라 幕府 시대의
지방장관)인 쇼니 츠네쓰케(小貳經資)였다. 武士의 悲壯美 助國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진두에서 용전했지만, 그것은 螳螂拒轍(당랑거철: 사마귀가 수레 앞을 막아 섬)이었다. 敗할줄 뻔히 알고도 회피하지 않고 출진한 것이라면 그건
책임감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는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武士의 역할」을 완수했다. 「對馬島史」에는 연합군의 主力은 對馬
중앙부 아소우(淺茅)灣에 집결, 그 일부가 코모다에 내습했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코모다 이외에 對馬의 주요 거점들인 히타카츠(比田勝),
미네우라(三根浦), 카시우라(加志浦) 등지에도 상륙, 거기서도 在地武士들과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몽골군은
이후 열흘 가까이 對馬島에 머물며 약탈을 감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투의 끝머리란 으레 그러한 것― 더구나 勝者가 악명 높은 몽골軍임에랴….
살아남은 주민들은 모두 깊은 산 속으로 피난했을 터이었다. 지금의 코모다는 필자가 이제껏 방문했던 일본의 浦口들 가운데
가장 쓸쓸하고 가난한 곳이란 느낌을 받았다. 「對馬島의 젖줄」이었던 한반도와 가까운 코모다―帆船(범선)시대엔 휘영하게 번영했을 것이다. 코모다
해변의 古戰場을 걸었다. 해변에는 宗助國을 모시는 「코모다하마 神社」가 쇠락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필자는 자기 나라를 지키려다 전몰한 宗助國의
石碑(석비) 앞에서 敬意를 표했다. 神社로부터 약 200m 정도 남방의 해안에는 宗助國의 부하인 사이토
스케사다(齊藤資定)라는 勇士가 분전하다가 최후엔 스스로 자기 머리를 바위에 쳐박아 죽었다는 현장도 표시되어 있다. 勇士의 최후란 이처럼
東西古今과 彼我(피아)를 막론하고 悲壯美(비장미)가 있다. 이곳 사스가와(佐須川)를 따라 내륙부로 들어가면 「카시네」라는
작은 마을 있다. 이곳 法淸寺에는 助國의 「胴塚」(동총)이 있다. 목 없는 몸만 묻었던 무덤이다. 이즈하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카미자카(上見坂) 전망대에 올랐다. 여기서 내려다본 아소우(淺茅)灣은 일본 최고의 절경으로 손꼽힌다. 육지의 침강에 의해 생성된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으로 그 돌출부들이 문어발처럼 얽히고설켜 일대 장관을 이룬다. 이곳에 麗蒙연합군의 大함대가 정박했다. 아소우만을 경계로 對馬島는
윗섬과 아랫섬으로 나눠진다. 對馬島까지 와서
百濟人(백제인)들이 만든 일본 最古의 성터인 카네타노키(金田城)를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현지에서 「朝鮮式山城」으로도 불리고 있는 이 城은
663년 백제부흥군-倭軍의 연합군이 白村江(지금의 금강) 전투에서 羅唐연합군에게 패전한 후 일본으로 망명한 百濟 유민들과 왜인들이 羅唐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667년에 축조한 것이다. 성벽은 높이 2∼5m, 길이 5.4km. 이후 金田城은 大陸의 동향을 살피는 日本의 최전선 기지로
활용되었다. 카네타山城은 對馬공항에서 코모다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필자는 코모다에 들어서기 전에 택시를 잠시
세워놓고 카네타山城의 성돌이 빤히 보이는 지점까지 올랐다가 갈 길이 바빠 下山했다. 대마공항-카네타城-이즈하라 중심가 코스를 일주한 후 필자가
지불한 택시요금은 1만5080엔이었다. 對馬島를 정복한 연합군은 이즈하라港 등지에서 약 열흘간 휴식을 취한 후 다음
공격목표인 이키시마(壹岐島)로 진발한다. 여기서 잠깐,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바로, 몽골(大元)의 황제
쿠빌라이는 왜 日本원정을 감행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咸安 사람 趙彛의 獻策 「元史」 日本傳에 『至元
2년(1265), 고려사람인 趙彛(조이) 등이 일본국과 通해야 한다고 아룀으로써 使臣을 뽑았다』는 구절이 있다. 바로 이것이 世祖 쿠빌라이가
일본침공을 결의하는 동기였다고 한다. 즉, 쿠빌라이가 南宋의 정복에 한창 분망할 때 趙彛가 『高麗의 동방 해상에 日本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南宋과 교역하는 밀접한 관계인 만큼 (南宋을 고립시키려면) 일본을 招諭(초유)하여 (몽골 편으로) 끌어들이면 좋다』는 계책을 내
놓았다는 것이다. 趙彛는 경남 咸安 출신으로서 그곳이 일본에의 門戶(문호)인 合浦 및 金海에 가까워 일본사정에 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몽골군의 고려 침입 때 몽골군에 붙어 몽골로 들어가 관료가 되었는데, 進士試에 합격할 정도의 수재였는 데다 여러 나라 말을
구사했으며 행정수완도 제법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곧 두각을 나타내어 쿠빌라이의 知遇(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런 그가 쿠빌라이로부터
『어떻게 南宋을 제압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위와 같이 답변했다는 것이다. 趙彛의 獻策(헌책)에 따라 世祖 쿠빌라이는
日本에 「정중한」 國書를 보내 通交를 요구했다. 그 國書가 비록 정중한 형식을 취했다고는 하지만, 그 골자는 물론 일본에 대해 服屬(복속)을
촉구하는 것으로서, 만약 그것을 거부하면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점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었다. 이같은 通交 요구가
무력행사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은 일본이 끝내 服屬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고려 정부는 처음부터 몽골의 일본원정을 저지하려고 부심하고
있었다. 일본원정을 강행할 경우 인적·물적으로 피해가 가장 큰 나라는 高麗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몽골의 일본
招諭(초유)와 그 원정을 저지하려고 비상하게 노력했던 인물은 당시 고려의 재상 李藏用(이장용)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蒙使(몽사)의 일본行부터
막으려고 했다. 高麗 재상 李藏用의「演劇」 趙彛의 진언이 있었던 다음해인 1266년
11월, 쿠빌라이는 병부시랑(국방차관) 黑的과 예부시랑(문교차관) 殷弘을 日本招諭使(일본초유사)로서 고려에 파견했는데, 그들이 고려국왕 元宗에게
전달한 詔書(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 그대 나라 사람 趙彛가 와서 일본은 그대 나라와 가깝다고 말했다.
(中略) 漢·唐 이래 일본은 중국과 (사신을) 통했다. 故로 지금 黑的 등을 일본에 보내 통교하려 한다. 卿(경: 고려 국왕 元宗)은 사신이 갈
수 있도록 길을 열도록 하라. (中略) 風濤險阻(풍도험조)를 이유로 사양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 초유사는 일본에
보내는 쿠빌라이의 國書도 휴대했는데, 그 國書의 말미에 『서로 通好하지 않는 것을 어찌 一家의 이치라 하겠는가. 兵을 사용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것 누구에게 좋으랴. 王은 그것을 깊이 생각하라』고 쓰여 있었다. 李藏用은 이 國書의 내용을 알고 쿠빌라이의 욕망이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을 내다보았다. 有史 이래 한 번도 외침을 받지 않았다는 프라이드―더구나 유화적인 京都(교토)의 天皇조정을 힘으로 찍어누르고
실질적으로 日本을 지배하는 가마쿠라(鎌倉) 막부가 그같은 위협적인 언사에 굴복해서 招諭에 응할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난처해지는 것은 高麗다. 결국 몽골이 일본원정을 감행할 것이고, 그럴 경우 高麗가 그 선봉을 강요당해 상당한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李藏用은 蒙使의 일본行을 저지하기 위해 하나의 연극을 연출했다. 黑的 등 蒙使에게 『일본 招諭가 有害無益(유해무익)하고,
도중의 바다는 험난하기 때문에 결코 일본에 건너가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서한을 보냈던 것이다. 黑的과 殷弘은 출발 직전
李藏用의 편지를 읽었다. 바다에 약한 그들은 겁을 집어먹었던 것 같다. 일단 蒙使 일행은 고려의 樞密院副使 宋君斐(송군비)의 안내로 合浦를
경유하여 巨濟島에까지 내려갔지만, 거기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蒙使 일행은 『風濤險阻 때문에 귀국하게 되었다』고 쿠빌라이에게 보고했다. 물론
李藏用이 연출한 「연극」이 일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때 李藏用도 쿠빌라이에게 다음 내용의 辨明書를 보냈다.
<巨濟島에 이르러 멀리 對馬島를 바라보니 大洋萬里, 風濤가 하늘을 치고 (中略) 어찌 上國의 사신을 받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가볍게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설사 對馬島에 이를지라도 그 풍속이 완고하고 추악해서 예의가 없습니다. 만약 不軌(불궤)가 있으면 장차 이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이러하여 모두 두려워함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본래 小邦(소방: 고려)과 通好(통호)하지 않고, 다만 對馬島人이 때때로
무역의 일로 金州(金海)를 왕래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야망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1266년의 제1차 일본
초유에 이어 1267년 제2차 초유, 1268년의 제3차 초유, 1269년의 제4차 초유를 거듭 시도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전혀 응답을 보이지
않았다. 『이리처럼 용맹하여 죽이기를 좋아하고…』 1270년 제5차의 사신
趙良弼(조양필)은 일본이 朝貢(조공)하지 않으면 출병한다는 쿠빌라이의 의도를 통고했다. 趙良弼은 陜西路宣撫使(섬서로선무사)를 역임한
女眞人이었는데, 고령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일 본초유사를 자원했던 거물급이다. 그는 이전의 4차에 걸친 초유사와는 달리 교토(京都)行을 주장했다.
가마쿠라 幕府와 京都 조정을 은근히 갈라놓으려는 책략을 구사하려고 했을 것이다. 西部 일본의 통괄기관이었던 大宰府가 그의
수십 회에 걸친 요청을 거부하자 그는 國書의 寫本(사본)을 만들어 가마쿠라 幕府에 보냈다. 이때 가마쿠라 幕府의 최고권력자인 「執權」(집권)은
나이 불과 18세의 청년 호조 토키무네(北條時宗·1251~1284)이었다. 時宗은 단호하게 朝貢(조공)을 거부하고 京都 조정의 타협적인 태도를
억누르는 다음, 西國의 守護·地頭(지두: 우리나라의 현감 정도의 벼슬)들에게 방위 준비를 下命했다. 쿠빌라이는 제5차
초유의 실패 이후 일본이 위협만으론 결코 굽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쿠빌라이는 高麗에 대해 兵船 900척의 건조와 병사의 징발을
명했다. 答書도 받지 못한 趙良弼은 1272년 1월 고려의 수도 開京을 경유하여 燕京으로 되돌아갔다. 그때 그는 大宰府의
동의를 얻어 일본인 12명을 동행시켜 그 체면치레를 하려고 했지만, 쿠빌라이는 그 접견을 허락하지 않고 즉각 일본으로 되돌려 보내라고 명했다.
이리하여 1272년 4월, 일본인 12명의 송환을 겸하여 파견된 제6차의 초유사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의 正使도
趙良弼이었다. 그는 이후 약 1년간 大宰府에 머물면서 日本의 國政·官制 및 州郡의 명칭 혹은 지리·풍속·산물 등을 견문한 보고서를 작성해
쿠빌라이에게 올렸다. 이때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의 장애로 되고 있던 고려의 三別抄(삼별초)를 토벌하고 일본에의 출병을
결의하면서 趙良弼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러나 趙良弼은 쿠빌라이의 뜻에 영합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그 무모함을 諫言(간언)했다.
<臣, 일본에 머문 지 歲餘, 그 民俗을 보니 狼勇(낭용: 이리처럼 용맹함)하여 죽이기를 좋아하고 君臣·父子·上下의 禮를 알지
못합니다. 그 땅은 山水가 많아, 耕桑(경상)의 利도 없습니다, 그 사람들을 얻어도 도움이 되지 않고, 그 땅을 얻어도 富가 더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舟師(주사)가 바다를 건너는 일은 海風으로 기약할 수 없고, 禍害도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有用의 民力을 가지고
無窮(무궁)의 巨壑(거학: 큰 구덩이)을 메우는 것과 같습니다. 臣 생각건대, (일본을) 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高麗 백성들의 무거운 짐
1273년 5월, 최후의 일본 초유사 趙良弼이 귀국함으로써 쿠빌라이는 일본의 의사를 거듭 확인했다. 쿠빌라이는 제주도의 三別抄를
평정한 뒤 開京으로 개선한 장수들을 元(몽골)의 大都(北京)에 소집, 회의를 열고 일본 정벌을 명했다. 원정군의 지휘부는
♥都(흔도)·洪茶丘(홍다구)·劉復亨(유복형) 및 고려의 장수 金方慶의 4인으로 구성되었다. 총사령관은 ♥都. 홍다구와 유복형은 右副元帥와
左副元帥였다. 고려군을 이끄는 金方慶에게는 丞相(승상) 다음의 지위인 開府儀同三司(개부의동삼사)라는 작위가 수여되었다. 개부의동삼사라면 일찍이
신라·백제·고구려 임금들이 隋·唐의 황제로부터 받은 작위이다. 金方慶은 황제로부터 『拔群(발군)의 戰功을 바란다』는 격려와
金製 안장과 綵服(채복: 비단옷)을 받고 귀국했지만, 그 마음을 결코 밝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고려에 대해 병사 8000명, 뱃사공·水夫
1만5000명을 차출하도록 명했기 때문이다. 40여 년에 걸친 몽골군의 침략, 3년에 걸친 삼별초의 반란으로 고려는
황폐화해 있었다. 고려 백성들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 국왕 元宗은 쿠빌라이에게 간청하여, 동원병력을 병사
6000명, 뱃사공·水夫 6700명으로 하향조정했다. 이러한 일본 원정의 전략을 세운 쿠빌라이는 2만 명의 自國兵을
동원했다. 그중 5000명은 高麗에 주둔하던 屯田兵(둔전병)이었고, 나머지는 신규로 징발한 몽골족·여진족·漢族의 장병들이었다. 이밖에 수천 명의
뱃사공·水夫도 따로 징발되었다. 여기에 고려군과 합치면 4만 명에 가까운 병력이었다. 그들은 1274년 5월부터 잇달아 고려의 合浦에 도착, 그
일대에 집결했다. 드디어 洪茶丘가 高麗의 工匠(공장)·役夫(역부) 3만여 명을 무자비하게 닥달해서 건조한 군함 900척도
合浦에 집결했다. 출정의 시기가 7월로 정해졌다. 그런데 그 출정을 앞둔 6월 중순에 高麗 국왕 元宗이 재위 15년에
타개했다. 元의 大都에서 세자 諶(심)과 황녀 쿠츠르가이미시(쿠빌라이의 딸인 齊國大長公主)의 결혼식이 거행된 직후의 일이었다. 그래서 세자
諶(忠烈王)의 즉위식전과 元宗의 服喪(복상)이 잇달아 거행되는 바람에 출정의 시기가 연기되었다. 원정군이 合浦를 출항한 것은 元宗의 유해가 開京
교외 소릉에 안장된 9월12일의 다음 달, 즉 1274년 10월3일이었다. 제1차 정벌군의 병력과 장비 제1차 원정군의 병력은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高麗史」에는 몽골군은 2만5000명이고, 고려군은 장병 8000명과 梢工·引海(바다길 안내자)·水手 6700명 등
1만4700명이다. 이를 모두 합치면 연합군의 軍勢는 3만9700명이다. 고려군의 지휘부는 三翼軍 中軍都督使 金方慶, 副使는 左軍이 김선,
右軍이 金文庇(김문비)로 구성되었다. 몽골군은 원정군의 배후에서 督戰隊(독전대)의 역할을 하고, 선봉의 역할은 고려군이
감당해야 했다. 원정군의 편성은 千戶制(천호제)를 취해 그 아래로 百戶, 十戶로 세분, 제각기 지휘자를 두었다. 이것이 유목민족국가의 전통적
시스템이다. 合浦를 출항한 병선 900척은 100∼300t급의 千料舟(천료주)가 300척, 상륙용 주정인
拔都魯輕疾舟(발도로경질주)가 300척, 음료수를 싣는 吸水舟(흡수주)가 300척이었다. 이 중 장병과 軍糧, 말과 기타 군수품을 적재한 것은
천료주로서 이것이 주력함이었다. 상륙정 앞에 붙은 「拔都魯」(바토르)라는 말은 「용맹하다」는 뜻의 몽골어이다. 따라서 전함 1척이 제각기
상륙정과 흡수주를 거느리고 있는 셈인 만큼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기동부대라고 할 수 있다. 몽골의 병사들은 日本兵과 달리
가능한 한 輕裝(경장)으로서 머리에 얇은 철제의 투구를 쓰고, 가죽製의 갑옷과 장화로 온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무기는 손에 短弓(단궁) 혹은
長槍(장창)을 들고 허리에는 曲刀(곡도) 혹은 도끼를 찼다. 短弓은 길이 1.5m의 활로서 탄력이 있고, 사정거리가
200m에 달했는데, 그것을 지닌 병사들은 제각기 화살통을 여러 개 보유하고 있었다. 기타 무기로서는 투척용 石彈과
爆裂彈(폭열탄)이 있었다. 이것은 鐵 혹은 도자기로 만든 둥근 容器(용기)에 화약을 집어넣은 것으로서 점화하여 투척하면 공중에서 작열하여 엄청난
굉음을 냈다. 연합군은 진지를 구축하면 거적이나 대나무로 만든 방벽으로 주위를 굳히고, 공격할 때는 鼓笛(고적)을 울려
사기를 북돋게 했다. 전투방식의 優劣 기자는 12월1일 오후
이즈하라 읍내의 대마역사민속자료관·향토자료관·崔益鉉기념비 등지를 답사했다. 음식점 「시마모토」에 들러 따끈한 청주를 반주로 삼아 저녁을 먹었다.
뜻밖에 기모노 차림의 안주인이 다가와 첫잔을 채우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날 밤은 이즈하라여객선터미널과 멀지 않은 언덕 위의
한국인 경영의 호텔 「닛폰다야」(日本大亞)에서 묵었다. 朝食 포함 하루 숙박료 7000엔. 이날밤 닛폰다야 호텔의 투숙객은 필자 혼자인
듯했는데, 12월2일 朝食 때는 푸짐한 김치 한 사발까지 무료로 서비스했다. 12월2일 8시에 출항하는 이키시마(壹岐島)의
아시베(芦♥)港으로 가는 쾌속선 「비너스」에 승선(요금 4540엔)했다. 아시베港은 麗蒙연합군 함대가 규슈 공략을 앞두고 집결했던 곳이다.
쾌속으로 운항한 비너스는 바닷길 68km를 출항 1시간만에 주파, 오전 9시 정각 이키시마의 동쪽 항구 아시베港에 기항했다.
帆船시대의 이키시마라면 對馬島와 더불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갈 때 반드시 거쳤던 「징검다리」이다. 麗蒙연합군 원정 때도 주요
공략목표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이후 도쿠가와(德川) 막부 시절의 260년 동안 12회에 걸쳐 訪日한 朝鮮通信使들도 모두 이곳을
거쳐갔다. 아시베港에 상륙한 필자는 곧장 전화로 택시를 호출하여 타고 이키시마의 북쪽 항구인 가쓰모토(勝本)를 향해 달렸다. 對馬島를 초토화하고 출항한
麗蒙연합군의 함대가 이키시마 북부 해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274년 10월14일 오후 4시경이었다. 大船 2척으로부터 약 400명의 몽골군이
상륙하자 가쓰모토의 村人들은 이를 세도우라(지금의 아시베港)의 후나카쿠죠(船匿城)에 급보했다. 城主는 이키의 守護代인 다이라노
케이류우(平景隆)였다. 가쓰모토에 상륙한 麗蒙연합군은 하카타(博多)港 공격에 편리한 세도우라를 점령하려고 동쪽으로 진격해 갔다.
세도우라에서 平景隆은 일족의 郎黨(낭당: 武家의 家臣) 100기를 이끌고 서쪽의 가쓰모토를 향해 출진했지만, 中途의 히츠메城(勝本町
新城) 앞에 이르면 연합군의 대부대와 조우하게 된다. 景隆은 古來의 戰場儀式(전장의식)에 따라 휘하의 1騎에 명해 鳴鏑(명적: 소리 내며 나는
화살)을 쏘아 開戰의 신호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몽골군은 古代의 開戰 의식 따위는 아예 무시했다. 그리고는 鍾과 징을 요란하게 치면서 자신의
家系와 이름·戰績 등을 길다랗게 외치며 뛰어나오는 이 日本 무사를 에워싸고 개 패듯 때려 죽여버렸다. 「이건 無法
아닌가」라고 생각할 사이도 없이 400여 명의 몽골군은 短弓에 毒화살을 매겨 난사하고 창을 휘두르며 육박해 갔다. 이키軍도 응전, 격전이
벌어졌다. 드디어 해가 지고 연합군은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퇴각하기 시작했지만, 창과 毒화살로 상처를 입은 일본군의
피해는 컸다. 景隆은 부하의 거의 80%를 잃었다. 남은 병력은 겨우 20여 騎에 불과했다. 그는 히츠메城에 들어가 하룻밤을 밝혔다. 당시의
히츠메城은 急造(급조)의 방어시설이었기 때문에 大軍의 공격에는 버티기 어려웠다. 壹岐島를 결딴낸 몽골군의 잔학상
다음날인 10월15일, 연합군은 이른 아침부터 히츠메城을 포위, 맹공을 가했다. 景隆은 부하를 독려하여 분전하다 최후의 순간, 郎黨인 宗三郞을
불러 大宰府에 급함을 고하도록 명하고 할복자결했다. 宗三郞은 적의 포위망을 돌파, 세도우라의 船匿城(후나가쿠시)로 달려가 敗戰을 먼저 고한 후
하카타港을 향해 쪽배를 저어갔다. 船匿城에서는 城主인 景隆의 妻가 아이들을 먼저 찌르고 난 다음에 그녀 역시 老母와 함께 자결했다.
가쓰모토로 가는 도중에 들른 히츠메城 유적에는 新城神社가 들어서 있다. 경내에는 「元寇(원구)기념비」 및 平景隆의 묘가 있다.
일본인들은 麗蒙연합군의 일본 침략을 「元寇」라고 부른다. 城跡(성적)으로부터 50m 떨어진 동쪽에 히츠메橋가 있고, 이 다리를 건너면
千人塚(천인총)이 있다. 지금은 「文永의 役 新城古戰場」이라고 하는 큰 충혼탑이 천인총 위에 세워져 있다. 일본에서는
麗蒙연합군의 제1차 정벌(1274)을 「文永의 役」(분에이노에키)이라고 한다. 7년 후의 제2차 정벌(1281)은 「弘安의
役」(코안노에키)이라고 한다. 이키島엔 「弘安의 役」 관련 현장도 많은데, 그 얘기는 다음 호에 쓸 것이다. 이키島에는
「元寇」와 관련한 무덤이 숱하게 산재하고 있어 당시의 비참함을 전하고 있다. 다음은 「文永의 役 古戰場」에 관한 「勝本町通史」의 기록이다.
『이키에 상륙한 몽골군은 섬사람들을 보는 대로 죽였다. 남녀와 아이의 구별없이 극도로 잔인한 방법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살육은 곳곳에서 확대되었다. 예컨대 乳兒(유아)의 가랭이를 찢는다든지, 남자를 붙잡으면 귀·코를 자른다든지 했다. 또 여성을 잡아 한데 모아
손바닥에 구멍을 뚫어 철사로 엮어서 끌고 다니고, 드디어는 軍船의 뱃전에 매달아 익사시켰다』 이러한 잔학행위를 되풀이한
몽골軍의 통과 후에는 섬사람들의 시체가 겹쳐 쌓였는데, 이것을 매장했던 것이 千人塚이다. 新城 천인총 이외에 浦海·本宮·立石·射場原 등지에도
유사한 무덤들이 현존한다고 한다. 당시 이키島 사람들의 다수는 산으로 도피했지만, 對馬島와는 달리 숲이 깊지 않아서 곧
발견되었다. 「산으로 도망쳤어도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의해 발각되어 모두 학살되었다」는 傳承(전승)도 있다. 이 때문에
「무고이」(잔혹하다)라는 일본말은 이 「무쿠리」(몽골), 「고쿠리」(고려)로부터 유래되었다는 傳承을 이키島 등 도서·연안지역에 남기고 있다.
떼를 쓰며 우는 아이에 대해 『무쿠리, 고쿠리가 왔다』고 겁을 주어 달랜다고 한다. 몽골군은 野戰 능력에 있어 世界戰史上
冠絶(관절)했지만, 그 잔혹함에 있어서도 유례가 없었다. 원래, 그들은 落城(낙성) 때까지 항전한 城民들에 대해선 入城 후에 모조리 학살해
버렸다. 몽골군의 西征史를 보면 이런 몽골군의 흉폭함에 관한 소문이 一波萬波(일파만파)로 번져 싸워보지도 않고 開城해 버리는 城市가 적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위력적인 心理戰(심리전)이긴 했다. 상호 親緣性 깊은 韓民族·몽골족·倭人 그러나 이키島의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 숨은 것만 아니라는 사실은 몽골 측의 기록 「心中大義」에 『倭人(왜인), 이리(狼)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는 것에 의해
실증되고 있다. 일본인의 용맹성에 대한 驚異(경이)로움이 아니었겠는가. 그야 어떻든 韓·蒙·日의 3국은 모두 알타이系
언어를 구사하는 등 민족간 親緣性(친연성) 차원에서 보면 서로 「4촌쯤」 된다. 이 세 나라 사람의 조상은 원래 알타이산맥 일대
스텝(草原)지대에서 살던 유목민족이다. 좀 거칠게 말하면 몽골인은 동쪽으로 조금 이동했고, 한국인은 훨씬 남쪽으로 내려왔고, 일본인의 主流는
한반도에서 다시 일본열도로 건너갔던 先祖의 후예인 것이다. 이런 세 나라 사람의 DNA 속에는 好戰性(호전성)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몽골인은 워낙 騎射(기사)에 뛰어난 데다가 野戰性이 강했고, 일본인도 칼싸움과 용맹성에 관한 한 세계 제1의 자리를 결코
양보하지 않던 민족이었다. 대륙과 陸接(육접)해 있어 끊임없는 異民族의 침략을 받아왔으면서 民族의 正體性(정체성)을 지켜 오늘에 이른 것을 보면
한국인의 끈질김도 他의 追從(추종)을 不許한다. 이런 상념에 젖어 있던 중 불현듯 이번 답사에 앞서 잠시 통화한 江原大
사학과 周采赫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일본 무슨 절엔가 보존된 사료에는 「몽골이 침략해 왔다」고 하지 않고 「무쿠리가
왔다」고 쓰여 있다고 합디다. 그렇다면 「Mogol」의 原音이 貊高麗(맥고려)·貊槁離(맥고리)일 수 있습니다. 「Mogol」을 아프가니스탄에선
「모골」, 印度에서는 「무갈」이라 했고, 시베리아 쿠르테킨의 돌궐碑文(비문)에는 「Bo¨kli」(뵈크리)라고 했는데, Bo¨kli는 학자들의
논문에서는 대체로 貊高麗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가쓰모토港에 들러 우선 관광안내소를 방문했다. 관광안내소의 56세 여성
계장은 한국에서 찾아온 기자를 珍客(진객)으로 대접했다. 기자로부터 몇 가지 질문을 받은 그녀는 『대답을 못한 부분에 대해 보충설명해 줄
「元寇」 전문가가 있다』면서 전화를 걸어 마을의 교육위원까지 불러왔지만 갈길이 바빠 곧 일어섰다. 기자는 다시 아소베港으로
되돌아가 오전 11시15분에 출항하는 하카타行 페리호에 맨 꼴찌 승객으로 승선했다. 출항 2시간30분 만에 하카타港에 상륙한 기자는 다시 인근
뱃머리로 옮겨 오후 3시 시카노시마(志賀島)行 연락선을 탔다. 시카노시마는 하카타港을 바깥바다(玄界灘)로부터 보호하는 방파제 구실을 하는
섬이다. 출항 30분 만에 연락선은 시카노시마 부두에 닿았다. 이 뱃머리에서 남쪽 해안도로를 따라 2.4km를 西進하면
조그마한 구릉 하나가 나온다. 이곳은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의 전쟁 때 쟁탈의 요지였다. 가파른 계단을 걸어 구릉 위에 오르니
하카타港의 모습이 정면으로 다가온다. 지휘관이라면 누구나 탐을 낼 만한 절묘한 관측고지다. 이곳에는 몽골군의 寃魂(원혼)을
위로하는 供養塔(공양탑)이 後世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건립되어 있다. 이 공양탑은 1274년의 제1차 정벌 때 大폭풍우로 인해 본대와 떨어져 이
섬에 표착했다가 일본군의 토벌로 섬멸당한 몽골兵 220명의 유해를 묻은 무덤 위에 세워진 것이다. 倭寇의 본거지 伊萬里灣과 鷹島 이키島를 초토화시킨
麗蒙연합군은 이어 肥前(히젠: 지금의 나가사키縣) 마쓰우라(松浦)郡의 다카시마(鷹島)를 습격했다. 일본 측 기록인 「日蓮註畵讚」(일련주화찬)에는
『肥前國 松浦黨 수백인이 戰死했다. 이 섬의 백성과 남녀가 당했던 참사는 對馬와 같다』고 했다. 마쓰우라(松浦)는 다카시마
對岸의 지역이다. 그런데 왜 유별나게 그 지역의 部隊名에만 「黨」(도우)字를 붙인 것일까? 바로 이 점을 필자는 평소 궁금하게 생각해 왔다.
「松浦黨」에 대한 필자의 의문은 다카시마에 가서야 비로소 풀리게 된다. 松浦黨은 「海商집단」을 자처했으나 실은 한반도
연안에 출몰하여 갖은 약탈행위를 일삼던 倭寇(왜구)의 중심세력이었다. 다카시마역사민속자료관에서 「松浦黨硏究」라는 논문집을 잠시 읽어 보니 그들은
자신들이 「松浦黨」이라고 불리는 것을 몹시 꺼려했다고 한다. 松浦黨이라면 바로 악명 높은 倭寇가 聯想(연상)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史書(高麗史)에서 「倭寇」라는 존재가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高宗 10년(1223)이었다. 倭寇는 대개 일본 사회의 변동으로
몰락한 무사들이 주동이 되었다. 이들의 노략질은 갈수록 격화되어 고려 말기에는 우리나라 동·남 연안뿐만 아니라 江華·喬洞·禮成江口로 출몰하여
수도권까지 위협하게 된다. 다카시마는 倭寇의 본거지 이마리(伊萬里)灣과 松浦港의 입구에 위치, 外海의 풍랑을 막아 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11월29일 오전 8시에 필자는 다카시마를 향해 숙소인 하카타 그린호텔을 나섰다. 하카타驛에서 메이노하마까지는
지하철, 메이노하마에서 가라쓰(唐津)까지는 철도, 가라쓰에서 다카시마行 연락선의 부두가 있는 호시노(星賀)港까지는 택시(요금 4500엔),
호시노港에서 다카시마의 히비(日比)港까지는 연락선(선임 200엔)을 탔다. 히비港에 상륙한 후엔 택시를 호출하여 타고 다카시마역사민속자료관으로
달렸다. 다카시마는 麗蒙연합군의 제1차·제2차 원정 때 모두 對馬島-이키島에 이어 세 번째로 점령을 당한 섬이다. 지도를
펴놓고 보면 馬山-對馬島-이키島-다카시마가 일직선상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카타港에 상륙해 大宰府를 함락시키려 했던 麗蒙연합군으로선
다카시마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戰列(전열)을 가다듬는 집결지로서 필요한 입지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섬이었기 때문이다.
麗蒙연합군의 하카타港 습격
1274년 10월17일,
麗蒙연합군은 다카시마(鷹島)로 침입, 이 섬의 阿翁과 船黨津의 해안으로부터 상륙했다. 한편 松浦黨의 무사들도 다카시마의 殿浦에 상륙, 남방의
곶(岬)에 日本山城을 구축하여 내습하는 麗蒙연합군에 항전했지만,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전황은 갈수록 일본군에게 불리했다. 松浦黨 무사를 비롯한 규슈의 御家人(고케닌: 가마쿠라 막부의 직속 무사)들은 크게 분전했지만, 日本
騎馬무사의 개인전법에 대한 연합군의 집단전법, 그리고 당시 일본인으로선 상상하지도 못한 鐵砲(몽골語로 「데츠하우」라고 발음함)의 위력에
압도당했던 것이다. 특히 다카시마 해역은 제2차 원정 때의 主戰場이었다. 지금도 다카시마 해역에선 麗蒙연합군의 유품이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다. 다카시마역사민속박물관과 倂設(병설)된 매장문화재센터에선 현재 엄청난 수의 발굴유물을 보존처리·분류·연구하고 있다.
그곳은 水中고고학의 「천국」이었다. 발굴유물에 관해서는 이 기사의 순서 때문에 다음 2월호에 소개할 것이다. 麗蒙연합군은
이어 大宰府 공략을 위해 하카타灣으로 진격한다. 연합군 함대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玄界島(겐카이도)의 西水道를 거쳐, 하카타灣에 그대로 침입했다.
6차례의 蒙使 파견, 특히 두 번에 걸친 趙良弼의 장기체재에 의해 규슈의 지리·풍속 등을 사전에 탐지해 두었기 때문인 것 같다.
10월19일, 우선 일부 병력은 하카타灣의 서부 해안 이마쓰(今津)에 拔都魯輕疾舟를 대고 상륙하여 외곽에 거점을 확보했다. 다음날인
10월20일, 여명과 함께 하카타灣의 중앙부인 早良川(사와라가와) 河口인 모모치바라(百道原), 이키노하마(지금의 오키노하마),
하코자키(箱崎)해안 등 3개 방면에서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전개된다. 大宰府의 총사령관 츠네쓰케(少貳經資)는 對馬島의 전령
小太郞 및 兵衛次郞, 그리고 이키島로부터 달려온 宗三郞의 보고에 의해 麗蒙연합군의 내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 가마쿠라(鎌倉)막부와
교토(京都)의 로쿠하라단타이(六波羅探題)에 急使(급사)를 날렸다. 로쿠하라단타이는 가마쿠라 幕府의 京都 조정에 대한 감시기관이다.
츠네쓰케는 또 규슈 管內의 슈코(守護: 지방장관)·지토우(地頭: 고을원)를 비롯한 고케닌(御家人: 막부 직속 무사)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원래부터 御家人(막부의 직할 무사)들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만큼 즉각 하카타灣으로 집결, 미리 정해진 대로 각 부서에
착임했다. 하카타 지구에는 前線사령관이며 츠네쓰케의 동생인 쇼니 케이쓰케(少貳景資)가 지휘하는 주력부대가 배속되었다.
그 병력은 守護인 少貳·오토모(大友)·시마즈(島津)씨의 각 隊가 500騎씩이었고, 각 地頭·御家人의 평균병력이 125騎,
그 地頭·御家人의 수는 31家였기 때문에 합계 3875騎. 여기에 守護 3家의 1500騎를 더하면 총계 5375騎였다. 이는 일본 측 사료
「元寇紀略」(원구기략)에 기록된 숫자이다. 다음은 역시 일본 측 사료 「本土防衛戰史」에 기록된 하카타 방어전의 모습이다.
10월19일 이마쓰(今津) 해안에 상륙한 몽골군 支隊는 이마쓰의 監視隊를 밀어내고 포진, 그 일부가 다음날 하카타灣
중앙부인 모모치(百道) 해변에 상륙할 主力軍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을 따라 東進하여, 모모치하마의 남방 소하라(祖原)山을 점거했다. 그때
祖原지구의 방어를 책임진 것은 하라다(原田) 一族과 마쓰우라(松浦)黨이었는데, 몽골군의 集團戰法과 新兵器의 위력 앞에 무참히 패퇴했다. 지금은
공원화한 소하라山에는 「元寇戰跡」碑가 세워져 있다. 여기에 麗蒙연합군의 本陣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10월20일, 드디어
金方慶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메이노하마(姪浜) 앞 小戶海峽을 항행하여, 여명과 더불어 사와라가와(早良川) 河口인 모모치바라(百道原)에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早良川의 지금 이름은 무로미가와(室見川)이다. 고려軍이 상륙한 지점에는 현재 초현대식 건물 「후쿠오카(福岡)
타워」(높이 123m에 전망대가 있음)가 들어서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일본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그 바로 남쪽에는 후쿠오카 박물관,
동쪽엔 일본 프로야구단의 하나인 「다이에 호크스」의 홈그라운드인 「후쿠오카 돔」이 이웃해 있다. 필자는 후쿠오카 취재
첫날인 11월28일 오후, 맨 먼저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후쿠오카 타워」의 전망대로 올라갔다(입장료 800엔). 여기에 오르기만 하면
후쿠오카 全지역이 一目瞭然(일목요연)할 뿐만 아니라 730년 前 하카타 상륙작전의 모습이 파마노라마처럼 연상된다. 하카타
地區 前線사령관인 카게쓰케(景資)는 고려軍의 상륙작전을 보고 아카자카(赤坂)지구를 맡고 있던 菊池武房에 출격을 명했다. 그럴 때
소하라(祖原)山을 점거하고 있던 몽골軍 부대가 고려軍의 상륙부대를 엄호하는 가운데 격전이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서 고려軍은
白道原을 완전히 확보하고 東進하여 현재 후쿠오카의 중심부인 鳥飼·別府·赤坂를 강습했다. 하카타의 이키노하마 앞바다로 침입한 몽골軍의 主力도
이키노하마와 하코자키(箱崎)에 상륙하여 少貳·大友·島津의 부대를 패퇴시켰다. 이로써 일본군 측의 하카타灣 해안방위선 30km가 모두 붕괴되었다.
그때까지의 전황에 대해 高麗史에는 다음과 기록되어 있다. <壹岐島에 이르러 1000여 명을
죽이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니 倭人이 퇴각 도주하였는데, 죽어 넘어진 시체가 삼대 쓰러진 것처럼 많았으며, 날이 저물 무렵에 포위를
해제하였다> 幕府와 京都朝廷의 대처 烽火(봉화)체제 및
驛馬(역마)제도가 미숙했던 탓이었겠지만, 교토(京都)와 가마쿠라(鎌倉)에서는 初戰 패전의 상황을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야 파악할 수 있었다.
大宰府로부터 교토의 六波羅로 파발마가 달려가 麗蒙연합軍의 對馬 내습을 보고했던 날짜가 10월17일이었다. 10월19일과 20일에 하카타灣에서
合戰이 있었다는 것은 물론 이키島가 점령당했다는 것조차도 10월28일이 되어서야 보고가 들어갔다. 따라서 幕府가
추고쿠(中國) 以西의 守護大名에게 『몽골軍이 공격해 오면 御家人뿐만 아니라 朝廷 公卿 관할하의 非어가인도 소집해서 방어전을 하라』고 하명한 것은
이미 전투가 끝나고 열흘이나 지난 11월1일이었다. 朝廷에 대한 보고는 더욱 뒤늦어 그 다음날 11월2일에 가메야마(龜山) 上皇이 외적 격퇴를
기원하는 친필을 역대 御陵(어릉)에 봉헌하고 있다. 가마쿠라 幕府는 몽골황제 쿠빌라이의 국서를 처음 받았던 1268년부터
西國守護들에게 몽골 습래에 대비해 경계를 엄중히 하도록 지령했다. 그 후에도 거듭된 사절의 來日에 위협을 느낀 막부는
異國警固番役(이국경고번역)의 제도를 정했다. 이것은 치쿠젠(筑前)·肥前(히젠), 兩國 연안의 요충을 규슈 諸國의 地頭·御家人에게 윤번으로 수비케
하는 것이었지만, 1271년에 이르면 규슈에 所領을 가진 關東 거주의 御家人들에게도 규슈로 내려와서 定住하도록 명했다.
다시 1272년이 되면 幕府는 諸國의 守護들에게 영내의 地頭·御家人의 所領뿐만 아니라 社寺領·公領에 대해서도 그 地名, 전답의 넓이와 領主
이름을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명했다. 이것은 닥쳐올 국난에 대비하여 總動員令을 발하기 위한 긴급조치였다. 그러나 1274년에 對馬·壹岐·鷹島가
차례로 침공되었을 때까지 하카타의 방위태세는 충분하지 않았다. 막부가 西國의 守護에게 그 領內의 本所一圓地의 非御家人에
대해서도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은 對馬·壹岐 침공의 소식이 幕府에 도착한 후였다. 本所一圓地라는 것은 莊園領主(장원영주) 등이
배타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所領을 말하는 것인데, 그 영내의 武士는 非어가인이라고 했다. 따라서 이때부터 非어가인들도
가마쿠라 幕府가 임명하는 守護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北條(호조)씨 得宗(득종: 호조씨의 嫡統)에 의한 전제지배체제는 이러한 거국일치의
비상조치 속에서 전국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近世的 군대와 中世的 군대의 合戰 對馬島와 壹岐島로부터 몽골군
내습의 급보가 大宰府에 도착했을 때 하카타와 大宰府의 주변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은 異國警固番役(이국경고번역)의 책임을 진 가문인 쇼니(少貳)씨와
그 지배하의 하라다(原田) 일족, 그리고 시마즈(島津)씨와 그 一族 및 오토모(大友)씨와 그 일족이었다. 총사령관인 鎭西奉行으로서 규슈 所在
9개 國과 2島를 통괄 지휘한 인물은 少貳經資였다. 9개국의 守護 밑에는 地頭·고케닌(御家人)이 있어서 제각기
이에노코(家子: 武家의 子弟), 로우도우(郎黨: 武家의 家臣), 잡병인 所從들을 지휘했다. 일본군은 麗蒙연합군처럼 통일적으로 편성된 부대가
아니라 本家·分家라고 하는 血族(혈족)을 단위로 하여 끌어모은 조직이었기 때문에 병력수가 명확하지는 않다.
「元寇紀略」(원구기략)에 기록된 각 씨족의 騎兵병력을 합계하면 5300騎가 된다. 그것에 從士 1騎당 從者 1인으로 가산해서 少貳經資 휘하의
일본군은 대략 1만600명이었다는 것이 「육상자위대 후쿠오카修親會」의 견해이다. 다음으로 장비에 대해서 말하면 일본군은
各人이 비교적 무거운 갑옷과 투구를 착용했고, 무기는 일본도와 長弓 및 長刀를 들고 다녔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白兵戰을 중시했다. 백병전이
벌어지면 일본도와 長刀가 주종이었지만, 몽골군이 短弓을 주요무기로 삼았기 때문에 화살戰의 귀추가 승패를 결정했다. 史書에 의하면 이 短弓의
사정거리는 2丁, 즉 약 200m였다. 일본군이 보유한 長弓의 화살은 몽골의 短矢(단시)보다 크긴 했지만, 그 사정거리는 100m에 불과했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몽골軍의 화살촉에는 毒이 묻어 있었다. 맞기만 하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短弓인
까닭에 速射(속사)가 가능하여 일본군이 長弓으로 화살을 한 번 날리는 사이에 몽골군은 3회의 화살을 쏘았다고 한다. 일본군은 장비면에서도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일본군은 戰鬪作法(전투작법)은 아직도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1인의 무사가 앞으로 나서 敵陣에 鳴鏑(명적: 우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신호용 화살) 한 발을 쏘아 開戰의 신호로
삼았다. 전투가 개시되면 피아 1騎씩 나서 『나로 말하면…』이라고 운을 떼면서 자기의 家門 및 이름·벼슬·戰績 등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1대1
대결을 통해 서로의 勇力을 뽐내었다. 그런 절차를 거친 후에야 弓矢(궁시)의 合戰이 벌어졌고, 최후로 돌격을 감행,
백병전으로 승패를 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고전적 방식은 조직적인 集團密集隊形(집단밀집대형)으로써 징과 太鼓(태고)를 치면서 돌격해 오는
몽골군과의 戰法에 비해 현격하게 후진적인 것이어서 처음부터 승패가 뻔했다. 그것은 近世的 군대와 中世的 군대의 合戰이었다.
몽골군의 新戰法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20일의 하카타의 하코자키 지구 전투에서는 상륙한 麗蒙연합군을 島津久經의 부대가 용감하게 맞싸웠고, 하카타의 이키노하마의 전투에서도
少貳景資(經資의 동생으로 前線사령관)의 부대는 노도와 같이 몰려오는 몽골군에게 밀리면서도 힘껏 항전했다. 그는 스스로 長弓을 쏘아 몽골군의
副元帥(부원수)를 馬上으로부터 추락시켰다. 다음은 「八幡愚童記」 관련 기록이다. <少貳景資는 부하들과 함께 力戰했으나
불리하여 퇴각하고 있던 바, 키 7척, 수염을 배꼽 부근까지 늘어뜨린 푸른 갑옷의 대장이 葦毛(위모: 갈대처럼 생긴 털)의 말에 올라 14,
15騎와 80人의 잡병을 이끌고 추격해 왔다. 景資는 馬術의 명수였기 때문에 퇴각하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長弓에 화살을 먹여 쏘았는데, 그 화살은
선두로 달려오는 대장의 胸板(흉판)에 꽂혀 대장이 낙마했다. (中略) 주인을 떨어뜨린 葦毛의 말은 金覆輪(금복륜)의 안장만 붙어 있는 상태로
(戰場에서) 돌아다녔는데, 후에 그 말의 주인의 이름을 물었더니 그것은 征東左副元首(정동좌부원수) 劉復亨이었다>
「八幡愚童記」는 국난 극복의 상황을 愚童(어리석은 아이)도 알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저술한 古書인 만큼 일본 무사들의 滅私奉公(멸사봉공)과
「神國日本」에 대한 神佛의 加護(가호)를 유별나게 강조하여 신빙성이 좀 떨어지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전투장면과 彼我의 力量관계 등을 놀랄
만큼 리얼하게 서술하고 있어 後世 연구자들에게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하카타灣岸에 있어서 양군의 主力戰은 10월20일
새벽부터 일몰까지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 있어서 일본군은 그 편성·장비·전투법의 어느 면에 있어서도 연합군보다 열등했다. 다음은 「八幡愚童記」의
기록이다. <몽골은 太鼓와 징을 두들겨 신호했는데, 그 소리가 엄청났다. 일본 말들은 모두 이에 놀라 미쳐
날뛰었는데, 그렇게 허둥대는 바람에 적의 화살을 맞았다. 몽골의 화살은 짧았지만, 화살촉에 毒을 발라 맞으면 중상을 당했다. 몽골군은 수백인이
矢先(시선)을 정렬하여 화살을 비오듯 쏘는 데다 창이 길고, 갑옷도 빈틈이 없었다. 전투대형을 갖추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 오면 중앙을 열어
몰아넣은 다음에 兩端(양단)으로 포위하여 무찔렀다. 갑옷은 가볍고 말도 잘 탄다. 힘도 강하다. (中略) 豪勢勇猛自在(호세용맹자재)하기 짝이
없고, 임기응변의 진퇴에 능하다. 대장은 高地에 올라 (형세를 관망하고) 太鼓를 쳐서 부대를 생각대로 진퇴시킨다. 특히
물러날 때는 (적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鐵砲(철포)의 鐵丸(철환)을 발사한다. 명중하면 사방에 화염과 연기가 치솟아 주위를 덮어 버린다. 또
그 소리, 우레와 같아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이런 전술 때문에 일본군의 장병들은 魂魄(혼백)이 빠져 방향감각조차
잃어 버리고 말았다. 소바라로부터 赤坂에 이르는 戰場에서는 鳥飼瀉 부근이 습지대였던 것이 일본군에겐 다행스러워 한동안 연합군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카타 지구에서는 少貳·島津 부대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일거에 동남방이 뚫렸다. 몽골군은 奉行所를 습격, 하카타町의 민가와
氏神을 모신 쿠시다(櫛田: 즐전)神社를 불태웠다. 특히 大友賴泰가 수비하고 있던 하코자키(箱崎)지구가 뚫리자 鎭西軍 전체가
大宰府의 최종 防衛라인인 미즈키(水城: 수성)로 퇴각했다. 이 때문에 가마쿠라 막부의 무사들이 최고로 숭배하던 武神을 모신 신사 ♥崎宮(거기궁:
하코자키구우)이 兵火로 소실되었다. 神社 편액에 쓰인 네 글자 「敵國降伏」 필자는 11월29일 오후
하코자키 神社를 찾아갔다. 후쿠오카市營 지하철의 하코자키쿠우마에에키(箱崎宮前驛)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오면 걸어서 3분 거리다. 도리이(鳥居:
신사의 입구에 세운 기둥문) 세 개를 지나면 웅장한 本殿과 마주한다. 1086년에 건립되었고, 몽골병에 의해 불탄 지 1년 만인 1275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본전 1층과 2층 지붕 사이에 커다란 扁額(편액)이 걸려 있다. 편액에는 「敵國降伏」(적국항복)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다. 敵國이라면 元은 물론 高麗까지 포함된다. 「元寇」 당시의 上皇 가메야마(龜山)가 紺紙(감지:보랏빛 종이)에 金泥(금니:
금가루를 괜 물)로 적은 것을 옮긴 것이다. 본전인 고센구우(御遷宮) 안을 들여다보니 참으로 可觀(가관)이다. 건물 내부를
온통 검붉은색으로 칠한데다 장지문을 단 방 안에선 샛노란 불빛이 요상하게 흘러나오고 있고, 방문 앞에는 鬼面(귀면)의 탈과 兵仗器(병장기)가
배치되어 있다. 거기엔 安東 하회탈처럼 諧謔(해학)도 없다. 엄숙하다기보다 너무나 으스스하다. 아! 이것이야말로
신토(神道)의 성격, 아니 본질을 적나라하게 밝혀 주는 현장이 아닌가? 이곳을 참배하는 日本人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는 한 韓國을 아직도
「降伏해야 할 敵國」이라고 보는 일부 日本人의 생각, 韓國人에 대한 우월감 같은 것이 지워지지 않을 것 아닌 것인가?
하코자키 神社를 둘러본 만큼 후쿠오카 縣廳 앞에 있는 히가시(東)공원을 찾지 않을 수 없다. 택시 기본요금 정도로 갈 수 있는 거리다.
히가시 공원에는 몽골군의 침략을 예언했던 日蓮宗의 開祖인 니치련(日蓮)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天地異變(천지이변)과
異敵襲來(이적습래)의 원인은 邪宗(사종)의 유행에 있다면서 다른 종파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立正安國論」을 주장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했다.
麗蒙연합군의 日本 침략 이후 그는 大예언자로 존숭받게 된다. 높이 23m에 이르는 「日蓮聖人의 동상」의 座臺엔 「立正安國」의 네 글자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히가시공원에는 가메야마(龜山) 上皇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그 동상의 座臺에도 하코자키 神社와
마찬가지로 「敵國降伏」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 아닌가. 공원 입구로 돌아나와 「元寇史料館」에 들렀다. 관장인
요시오카 간스케(吉岡完佑)씨를 찾아갔다. 그와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가 한글로 쓴 高麗청자 관련 논문은 읽은 기억이 있다. 한국대학에 유학하여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그와 「元寇와 神道」를 주제로 삼아 대화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수개월 전에 이미 사직해 버려
만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여성직원이 자료를 꼼꼼히 챙겨 주었다. 일본군, 大宰府로 퇴각 소바라 및 아카자카(赤坂) 지구에 있어서
일본군의 善戰에도 불구하고 하코자키(箱崎) 지구에서 劣勢(열세)에 처한 大友·島津 부대의 패퇴에 의해 일본군은 하카타灣으로부터 50여 리 밖
大宰府의 서쪽 방벽인 미즈키(水城: 수성)로 일제히 철퇴했다. 후쿠오카 일대는 방어전을 전개할 만한 요새지가 별로 없는 평야지대이기 때문이었다.
「本土防衛史― 元寇」의 제2장 「文永의 役」 제4절의 「군사적 고찰」에서는 하코자키 지구에서 일본군이 먼저 철퇴했던 것은 병력의 열세였던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즉, 소바라·赤坂지구에서 양측의 병력비가 1.72 대 1, 하카타 지구가 1.77 대 1인 것에
비하여 하코자키 지역에서는 2.67 대 1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바다를 건넌 麗蒙연합군과는 달리 언제든 충원이 가능했던 것 아닌가.
이 오토모(大友)·시마즈(島津), 양군의 철퇴에 따라 하코자키팔번궁의 宮司는 御神體를 받들어 宇美(粕屋郡 宇美町)의 極樂寺로
피란했다. 그 직후 일본 3大 社殿의 하나인 하코자키神社는 몽골군에 의해 불탔다. 몽골군은 하카타灣에 상륙하면 곧장
大宰府로 진격해서 이를 점령할 계획이었다. 몽골군이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은 것은 일몰인 데다 地理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10월20일의 전투에서 主力병기인 短弓의 화살이 다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일본군은 왜 미즈키(水城)로 퇴각했던 것인가.
麗蒙연합군의 공략목표가 大宰府에 있었는데, 그 主방위진지가 이 水城이었기 때문이다. 이 방어진지가 돌파되어 大宰府가
연합군에 점령되어야 비로소 일본군이 完敗를 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1월29일, 필자는 다자이후(大宰府)와 水城을 차례로 답사했다.
다자이후 政廳(정청) 유적을 찾아가려면 현재의 太宰府市를 관통하는 西鐵의 도후사쿠라마에(都府櫻前)驛에서 내려 동쪽으로
15분 쯤 걸으면 된다. 다자이후는 백제부흥군-일본군 연합군이 663년 白村江(지금의 금강) 전투에서 羅-唐연합군에게 패한 이후 日本조정이
설치한 西部 일본 지역의 최상급 사령부인 동시에 대외교섭의 창구였다. 지금도 다자이후의 位相과 규모를 말해 주는 礎石(초석) 등이 남아 있다.
다자이후 政廳 유적을 둘러본 후 미즈키(水城)로 찾아갔다. 水城은 도후사쿠라마에역에서 西鐵을 타고 후쿠오카 쪽으로 두
정거장째인 下大利역에서 내려 25분쯤 걸으면 된다. 그 규모는 길이 1.2km, 基底部(기저부)의 폭 80cm이다. 이 土城 역시 羅唐연합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것이다. 水城이란 이름은 하카타 쪽을 향해 폭 60m, 깊이 4m의 호를 파서 물을 저장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日本書紀에는 『츠쿠시(筑紫)에 大堤(대제: 큰 둑)를 쌓고, 물을 저장했는데, 이름하여 水城이라고 한다』고 되어 있다.
지금도 내측과 외측의 호를 연결하는 木♥(목통)의 흔적이 남아 있어 文字 그대로 水城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大宰府는
北의 오노(大野)城, 南의 사이城이라는 山城에 의해 방위되고, 西方 하카타灣을 향한 正面에는 이 水城이 막아서 있었다. 하카타灣에서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할 수 없었던 일본의 鎭西軍은 어쩔 수 없이 水城까지 철퇴했던 것이다. 결국 이것이 鎭西軍의 최후 저지선이었던 것이다.
몽골군이 돌연 하카타灣으로부터 사라진
까닭 10월20일 밤, 연합군은 勝勢에도 불구하고 陸上 교두보에서 野營하지 않고 상륙정 拔都魯輕疾舟를
타고 하카타灣에 떠 있던 군함 千料舟로 물러났다. 육지에서 宿營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군이 장기로 삼는 夜襲(야습)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귀함 후 연합군 수뇌부는 전투를 계속할 것인가의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作戰會議(작전회의)를 열었다.
「東國通鑑(동국통감)」과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는 이 논의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忽敦(홀돈=흔도)가 말하기를 『우리 軍勢는 전투엔 習熟(습숙)하고 있지만, 종일 싸워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무기를
거두었다. 내일도 또 전투를 할 것인가』라고 했다. 金方慶이 말하기를, 『우리 兵들이 이미 敵陣에 침입해서 잘 싸우고 있어
「지금부터 一步」라는 상황에 있다. 옛날 秦(진)의 명장 孟明(맹명)은 (상륙 후에) 스스로 (타고 온) 배를 불태웠고, 漢의 淮陰侯
韓信(회음후 한신)은 背水陣(배수진)으로 싸워 승리를 쟁취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이 故事에 따라 決戰을 해야 할 것 아닌가』라고 했다.
이에 忽敦이 말하기를, 疲兵(피병: 피로한 병사)을 가지고 大敵과 싸우더라도 完勝을 얻지 못할 것이니 물러서는 것이
좋다』고 했다 > 高麗의 사령관 金方慶은 하카타 교두보에서 野營한 뒤 다음날 일본군과 決戰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총사령관 ♥都와 右副元首(우부원수) 洪茶丘는 이 이상 싸워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지지 않을 것이니 만큼 철병해야 할 것이라고 거부했던
것이다. 일본 측 사료들을 보더라도 그때까지 일본군이 부대 단위의 전투에서 이긴 사례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일본무사의 개인적인 용맹이 드러나는 대목만 더러 보일 뿐이다. 그런데도 東征都元帥(동정도원수) ♥都로 하여금 철수 쪽으로 결심을 굳혀 가게 했던
요인은 무엇일까. 사실, 연합군에게도 상당한 약점이 있었다. 몽골의 강요로 출전한 고려군이 士氣를 떨칠 리 없었고,
洪茶丘가 다그쳐 불과 6개월 만에 急造한 900척의 戰船들도 대체로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자기 땅에서 싸우는 일본군에 비해 연합군은
병력충원과 병참부분에서 弱勢일 수밖에 없었다. 少貳景資의 화살을 맞아 부상한 左부원수 劉復亨도 이미 戰意를 잃고 있었다.
더욱이 일본 무사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용맹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의외로 강경했고, 병력도 만만치 않았다.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굴복하지 않는
敵은 원래 무서운 법이다. 가마쿠라 武士들의 一所懸命 一所懸命(잇쇼켄메이: 한 곳을 목숨을
걸고 지킴)은 가마쿠라 武士들에 있어선 최고의 德目이었다. 전장에서 비겁했던 무사는 幕府에 의해 領地가 삭감되든지 몰수당해 가난을 代물림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일본 사회의 시스템이었다. 그렇다면 一家를 위해서는 자기 한 목숨이 오히려 가벼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데서 연유한 一所懸命이 현대에 와서는 一生懸命(잇쇼켄메이: 평생 목숨을 걸고 일함)으로 바뀌었다. 一生懸命은 세계적 經濟大國을
이룩한 현대 日本의 밑천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元寇」는 일본의 국민의식 형성에 깊게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지휘부의 견해가 엇갈린 상황에서 歸艦(귀함)한 麗蒙연합군은 10월20일 심야로부터 21일 새벽에 이르는 사이에 하카타灣으로
몰아닥친 大폭풍우로 궤멸적 타격을 입고 말았다. 高麗史에는 『때마침 밤중에 폭풍우가 일어나서 戰艦들이 바위와 언덕에 부딪쳐
많이 파손·침몰하였고, 金銑(김선)은 물에 빠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람에 날려 바다로 떨어져 익사한 金銑은 고려군의 左軍副使였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하룻밤 사이에 900여 척의 연합군 함대 중 200여 척이 침몰했다. 연합군은 서둘러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0월21일 아침, 戰禍로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하카타灣에는 연합군의 전함은 한 척도 없었다. 이것은 일본의 神들이 진노해 神風을
일으켰던 것도, 龍神의 逆鱗(역린)을 건드려서 파도를 일으킨 것도 아니라 최고지휘관의 판단 잘못으로 自招(자초)한 결과였다. 만약, 연합군이
10월20일 중에 하카타 해안에 교두보를 설치, 이후 공격에 대비한 병력·물자를 상륙시켜 놓고 宿營(숙영)했더라면 그후 전개된 역사의 向方은
사뭇 달라졌을 터이다. 결국, 일본군의 승리였다. 비록 그들이 10월20일의 전투에서 패배했다고는 하지만, 연합군에게
가마쿠라 무사의 용맹성을 과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들에겐 조국방위전쟁이었던 만큼 사기도 높았다. 「元史」 日本傳에서도 『겨울 10월
其國(일본)에 들어가 패했다. 官軍도 정비되지 못했고, 화살도 다했다』고 敗戰을 인정하고 있다. 高麗史에는 『이번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의 총수가 무려 1만3500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머지 병력은 꼭 한 달 후인 11월20일 合浦로 귀항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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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년 두 번째 원정에서
麗蒙연합군은 준비가 잘 된 日本軍의 저항에 苦戰하다가 颱風으로 결정타를 맞았다. 大風은 최선을 다한 日本 무사들을 도운 것이지 기적일 수는
없다. 그것은 奇襲당한 1274년의 첫 번째 전쟁을 교훈삼아 두 번 失手를 되풀이하지 않은 日本 武士정권의
승리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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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의 일본 再征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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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노마쓰바라에 축조된 防壘. 麗蒙연합군의 再侵을 막기 위해
하카타灣岸 20km에 이 같은 石築地를 만들어 요새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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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황제 世祖 쿠빌라이가 제2차 日本
원정을 결의했던 것은 제1차 원정 직후였다. 1차 원정의 총사령관 都(흔도)와 부사령관 洪茶丘 및 劉復亨은 몽골(大元)의
수도 大都(대도: 北京)로 돌아가 쿠빌라이에게 敗戰의 원인을 폭풍우에 의한 함대의 難破(난파) 때문인 것으로 보고했다. 이에 쿠빌라이는 즉각
再征을 결의하고 高麗에 대해 다시 출정을 준비하도록 명했다. 가마쿠라 幕府에 대한 외교적 압력도 병행되었다.
예부시랑(외무차관) 杜世忠(두세충)과 병부시랑(국방차관) 何文著(하문저)가 日本宣諭使(일본선유사)의 정사와 부사로 임명된 것은 1275년
2월9일이었다. 쿠빌라이는 1차 원정에서 귀환했던 부대를 그대로 合浦(합포: 馬山)에 머물게 하고, 다시 蠻子軍(만자군)
1400명을 高麗로 보내 海州·鹽州(염주)·白州에 주둔시켰다. 蠻子軍은 南宋의 투항병으로 편성된 부대이다. 高麗는 40여
년에 걸쳐 거듭된 戰亂에 의해 국토와 民生이 황폐화해 있었다. 忠烈王은 丈人이기도 한 쿠빌라이에게 金方慶을 使者로 파견, 일본 再征을 위한
전함의 건조 및 兵糧(병량)의 제공 등은 高麗의 형편에선 무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 再征을 결심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忠烈王이 일본 再征時期의 변경을 알게 된 것은 다음해인 1276년 1월이었다. 이것은 쿠빌라이가 高麗의 어려움을
감안해서가 아니라 南宋 공략에 全力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1273년에 南宋 최대의 방어기지 襄陽城(양양성), 이어 1275년에는
建康(건강: 南京)을 함락시켜 이제 南宋의 수도 臨安(임안: 杭州)의 함락도 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되던 무렵이었다. 쿠빌라이로선 南宋을
멸망시킨 후에 日本에 원정하더라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몽골 使者를 斬首했던 까닭
쿠빌라이가 파견한 宣諭使 杜世忠 일행은 1275년 4월, 高麗로부터 바다를 건너 혼슈(本州)의 나가도(長門)에 도착했다. 종래의 蒙使(몽사)는
규슈(九州)의 다자이후(大宰府)를 목적지로 하여 하카타(博多)에 상륙했는데, 이때만 굳이 나가도로 入港한 까닭은 무엇일까.
제1차 원정 때 高麗·몽골 연합군이 불바다로 만든 하카타에 상륙하여 그곳 주민들과 대면하는 것이 아무래도 껄끄러운 일이었을 터이다. 또한,
國書를 휴대하고 大宰府로 가더라도 大宰府가 그것을 京都 조정이나 가마쿠라 幕府에 보내지 않고 유치시켜 버린 前例(전례)를 피해 보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도 있다. 군사적으로는 이제까지 未조사 지역이었던 나가도 연안의 지형과 방비상황을 정찰하려는 속셈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떻든 蒙使 일행을 접수한 長門의 守護(슈코: 지방장관)는 즉각 이것을 가마쿠라 幕府에 통고했고, 幕府는 蒙使 일행을
가마쿠라로 불렀다. 이어 長門 등 4개국에 경비지령을 내렸다. 杜世忠 등 5명의 蒙使는 長門을 출발, 가마쿠라로 올라갔다.
이때 이미 일본은 臨戰體制(임전체제)로 들어가 蒙使 일행을 엄중하게 감시했다. 使者들의 上行路는 京都를 거치지 않고 우회하는 길이었다. 京都에
들르면 유화적인 公卿(공경)들과 만나 국론을 분열시키는 공작을 벌일지 모른다는 경계심 때문이었다. 일행이 가마쿠라에 도착한 것은 1275년
8월이었다. 執權 토키무네(北條時宗)는 즉각 蒙使 5명을 인견, 그 來意를 물었다. 杜世忠은 世祖 쿠빌라이의 國書를
증정하고, 황제의 박애와 인자를 예찬, 修交가 양국의 이익이 된다고 역설했다. 토키무네는 듣기만 하고 일행을
問注所(몬츄우죠: 막부의 正法기관)로부터 퇴거시킨 다음 아다치 야쓰모리(安達泰盛)·다이라노 요리츠카(平賴綱) 등 심복들과 대책을 협의했다. 이어
그 자신이 南宋으로부터 초빙했던 승려 無學祖元의 견해를 듣고, 며칠 후 平定衆(효조슈우)을 소집했다. 平定衆은 호조氏를 비롯, 대표적
御家人(고케닌: 幕府 직속무사) 11∼16명으로 구성된 가마쿠라 막부의 최고 의결기관이었다. 토키무네는 다음과 같은 단안을 내렸다.
『지난 文永 10년(1273)에 趙良弼이 使者로 來朝했을 때, 바로 처형해야 했지만, 우리나라의 결의를 몽골황제에 알리기 위해
살려보냈다. 그때, 앞으로 使者를 보내면 容赦(용사) 없이 처형하겠다고 알렸지만, 이번에 또 이를 무시하고 使者를 보낸 것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따라서 이미 예고한 대로 이 使者를 처형, 우리나라의 결의가 不動임을 내외에 제시할 필요가 있다』 杜世忠 등 蒙使
5명은 9월4일 모두 斬首(참수)되었다. 이후 蒙使는 오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동생 아리쿠브가와의 후계다툼에 이어 하이두의 반란 등 몽골
내부문제로 머리를 썩히고 있었는데다 南宋 정벌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던 만큼 日本에 대해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南宋 멸망과 降將 范文虎
1276년 몽골의 장군
바얀(伯顔)은 南宋의 수도 臨安(임안: 지금의 杭州)을 함락시키고, 황제 恭帝·度宗황후·理宗황후를 연행, 大都로 개선했다. 南宋의 주전파들은
황족인 趙昰(조하)·趙昺(조병) 등을 옹립하여 망명정권을 세워 저항했으나 몽골군의 격렬한 공격을 받고 3년 만인 1279년에 패망하고 말았다.
주전파의 重臣 陸秀夫(육수부)는 아홉 살짜리 마지막 황제 趙昺의 허리에 옥쇄를 묶고 황제를 등에 업은 채 厓山島(애산도: 지금의 마카오 서쪽)
앞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南宋 멸망의 해인 1279년 南宋의 降將 范文虎(범문호)가 周福 등을 使者로 일본에
파견했다. 일행은 6월 對馬島에 도착하여 范文虎의 牒狀(첩장)을 제출했다. 그 골자는 『南宋은 大元에 멸망당했는데, 日本도 위험하다. 즉각
大元(몽골)의 命에 따라 通好하는 것이 得策(득책)으로, 만약 내년 4월까지 회답하지 않으면 우리들도 大元의 一翼(일익)을 맡아 日本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周福 일행은 對馬島로부터 하카타로 건너왔지만, 大宰府에서는 范文虎와 같은 亡國의 신하가 불손하게도
日本國에 직접 牒狀을 보낸다는 것은 無禮(무례)하다면서 使者를 가마쿠라에 보내지도 않고 하카타에서 참수해 버렸다. 范文虎는 南宋을 멸망에 이르게
한 매국적인 재상 賈似道(가사도)의 사위로서, 그 자신도 大軍을 이끌고 몽골군에게 포위된 南宋 최대의 요충지 襄陽城(양양성)을 구원하러 갔다가
一戰도 벌이지 않고 항복해 버린 장수였다. 가마쿠라 幕府의 高麗 出擊계획 高麗史에선 간과했지만, 가마쿠라
幕府가 高麗에 대해 반격전을 감행하려는 계획을 세운 史實이 있다. 가마쿠라 幕府는 1276년 3월경에 高麗 공격을 위해 선박과 뱃사공·노꾼에
대한 징용제도의 정비를 명하고, 그 비용의 부과·징수를 鎭西奉行 쇼니 츠네쓰케(少貳經資)에게 지령했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異國出擊計劃(이국출격계획)이라 한다. 원정군의 本營은 하카타에 설치되었고, 총사령관에는 츠네쓰케가 임명되었다. 출격에
필요한 선박과 무사들은 규슈 管內에서 조달하지만, 부족분은 中國(츄고쿠)과 四國(시고쿠)의 諸國에서 보충한다는 것이었다.
이 실시계획에 따라 幕府는 같은 해 12월8일, 安藝國의 守護 다케다 노부토키(武田信時)에게 『安藝國의 해변에 所領을 가지고 있는 자는
地頭·御家人을 불문하고 뱃사공·노꾼을 소집하여 두고 츠네쓰케로부터 연락을 받으면 즉시 이들을 하카타에 보내도록 하라」고 지령했다.
御家人들도 老少를 불문하고 所領의 현상을 보고하고 가마쿠라 막부의 동원령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이 異國出擊計劃은 실현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중지되었던 것일까? 당시 日本의 실력으로는 전혀 無謀(무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異國」인
高麗의 현황이 그들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文永 8년(1271)의 高麗牒狀」조차 그 핵심내용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 三別抄(삼별초)의
협력 및 구원 요청에도 가마쿠라 막부는 전혀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국제정세에 어두웠다는 얘기다. 3년간에 걸친
三別抄의 對蒙항쟁이 일본의 국가적 위기를 막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들 가마쿠라 막부는 어떤 형식이든 삼별초에 대한 지원을 감행했을 터이다.
「文永 8년의 高麗牒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436쪽 박스기사에서 설명할 것이다. 그야 어떻든 만약 異國出擊計劃이 실행에
옮겨졌더라면 그 결과는 참담한 敗戰일 수밖에 없었다. 가마쿠라 幕府下의 日本이 高麗를 공격하려면 우선 병력과 군수물자를 수송할 大船團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造船수준은 아직도 準構造船(준구조선)을 건조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 準구조선으로도 치고
빠지는 倭寇 수준의 약탈은 가능하겠지만, 海戰은 물론 兵站線(병참선) 유지가 불가능했다. 설사 육상부대를 高麗에 상륙시켰더라도 그것의 전멸은
시간문제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로부터 300여 년 후의 壬辰倭亂(임진왜란)에서도 입증된 史實이다. 일본 해군은 수적으로 優勢함대를
보유했으나 李舜臣 함대에 번번이 깨졌던 것이다. 朝鮮의 主力船인 板屋船(판옥선)이 日本의 주력선인 安宅船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가마쿠라 시대는 농업을 주체로 한 農本國家이고 농업 이외의 상업·금융·운수 등의 산업 및 海民은 철저히 탄압·소외되었다. 이 때문에
軍船은 거의 없었고, 海民은 海賊으로 단속되었다. 일본 함선의 劣等性은 「蒙古襲來繪詞」(몽고습래회사)를 보아도 대번에 알
수 있다. 예컨대 하카타灣에서 싸우고 있는 일본 측 배는 農船(농선)을 방패로 가린 것인데, 노잡이 등 船員에 대해서는 전혀 무방비상태다.
그것은 高麗에서 제작한 연합군 측의 대형 構造船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결국, 異國出擊計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함을
가마쿠라 막부가 스스로 깨달아 중지되었던 것이다. 하카타灣에 축조된 防壘 가마쿠라 막부는 異國出擊計劃과
병행해서 규슈의 무사들에게 하카타 灣岸에 防壘(방루: 石築地)를 축조하도록 명했다. 防壘의 축조는 1276년 3월에 개시되었다. 그런데
異國出擊計劃이 포기되면 그 인력과 물자도 防壘 축조에 돌려졌다. 공사는 急피치로 진행되어 이해 8월에는 거의 外形을 갖추었다.
防壘 축조 임무는 규슈 전역의 領主들에게 할당되었다. 동원령은 가마쿠라 막부의 지배下에 있는 御家人은 물론, 종래 막부의 지배가
미치지 않았던 公領 및 社寺領의 무사(이들을 非御家人이라 부름)들에게도 떨어졌다. 그러나 그 무사들의 밑에서 실제로 돌을 나르고 돌담을 쌓았던
것은 농민들이었고, 領主들의 賦課를 실제로 부담한 것 또한 농민들이었다. 防壘 축조는 파도가 밀려오는 하카타 灣岸에 밑면의
폭 3.1m, 前面 높이 2.6m의 돌담을 쌓은 다음, 그 안에 작은 돌 또는 역토(자갈이 많이 섞인 흙)를 다져 넣고, 上面의 폭을 2.6m로
하는 공사로서 江口 등 石築(석축)이 불가능한 곳에는 장애물로서 말뚝을 박았다. 石築地의 공사에서는 규슈의 9개國마다
분담구역이 정해져 서쪽의 今津(이마즈)로부터 동쪽의 香椎(카시이)까지 다음과 같이 할당되었다. ○今津지구=日向·大隅
○今宿지구=豊前 ○이키노마쓰바라地區=備後 ○메이노하마地區=肥前 ○博多地區=筑前·筑後 ○箱崎지구=薩摩○香椎지구=豊後. 하카타
연안의 방루는 그 前面(바다쪽)이 石築인 것은 공통적이지만, 後面의 素材와 구조 등은 地區에 따라 다르다. 今津지구의 방루는 前·後 兩面 모두
석축이고 내부에 石材를 다져 넣은 구조인데, 이키노마쓰바라地區의 방루 등은 後面이 土築이다. 후쿠오카市
早良川(사와라가와)區 西新6丁目 소재 西南學院大學 「1호관」에는 「元寇防壘」가 原狀으로 복원되어 있다. 이것은 이 대학의 체육관 남쪽 등에
보존되어 있는 西新지구 방루처럼 높이 2.4m의 本體 양면을 石積으로 견고하게 쌓은 모습이다. 대학 관계자는 제1호관 개축 때 방루의
遺構(유구)가 검출되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石積은 基底部가 조금 남아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石壘의 남쪽에 약 1m의 간격을 두고서 폭 1.5m, 높이 1.3m 정도의 粘土와 모래를 교대로 겹쳐 쌓은 土壘도 검출했습니다. 결국 이 부근의
元寇防壘는 石壘와 土壘의 二列構造였다고 하는 새로운 사실이 판명되었던 것입니다. 2열구조의 의미는 금후 조사를 기대하고 있지만, 元寇防壘 연구에
새로운 視點을 제공하는 큰 성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金方慶과 洪茶丘 고려 忠烈王은 제2차
日本원정에 있어서 적극 참전의 의사를 표명했다. 高宗 10년(1223) 이래 韓半島 연안지역에 침입하여 약탈을 감행했던 倭寇에 대한 응징의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에 붙은 민족반역자 洪茶丘의 방자한 행동을 예방하기 위한 苦肉之策(고육지책)이기도 했다.
洪茶丘(1244∼1291)의 家系는 우리 역사상 最惡의 민족반역자이다. 그의 조부 大純과 그의 아비 福源은 1231년 몽골군이 고려에 침입해
오자 싸우지도 않고 城을 들어 몽골군에 항복했다. 특히 福源은 그 후 西京 郎將으로 복무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정부군의 토벌을 받고 몽골로
도망, 東京(동경: 瀋陽)總管이라는 고위직에 올라 몽골이 고려를 칠 때마다 앞잡이가 되어 갖은 횡포를 다 부렸다. 그러던 그는 몽골에 인질로 가
있던 고려의 왕족 安慶公 왕창을 모함하다가 憲宗 몽게汗이 보낸 군사들에게 맞아 죽었다. 왕창의 부인이 몽골의 皇族으로서 그녀가 몽게汗에게 福源의
흉계를 직소했던 것이다. 그러나 몽게汗이 죽고 쿠빌라이汗의 세상이 되자 洪茶丘는 재빠르게 쿠빌라이에게 「억울함」을 호소,
아비의 직책을 계승했다. 「주인(高麗)을 무는 개(犬)」로서의 역할 때문에 쿠빌라이의 신임을 받은 그는
管領歸附高麗軍民總管(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鳳州(봉주: 봉산)에 들어와 屯田總管府(둔전총관부)를 세웠다. 1271년 고려의
장수 金方慶과 더불어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고, 1274년 監督造船官軍民總管이 되어 백성을 괴롭혔으며, 제1차 일본원정 때 右副都元帥로 출전했다.
제1차 원정 때 洪茶丘는 도원수 都(흔도)와 함께 『육지에서 宿營하고 바로 大宰府를 치자』는 고려의 장수 金方慶의 계책을
물리치고 歸艦(귀함)했다가 大폭풍우를 만나 敗戰하게 되었음은 이미 月刊朝鮮 지난호에서 상술했다. 그런 作戰 실수를 범한 흔도와 洪茶丘는 金方慶에
대해 오히려 惡감정을 품고 있었다. 몽골인의 高麗人에 대한 時角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도와 洪茶丘는
金方慶을 무시하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1276년 2월, 金方慶이 世祖 쿠빌라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燕京에 갔다가 쿠빌라이부터
虎頭金牌(호두금패)를 받았기 때문이다. 虎頭金牌를 차면 어떤 대우를 받게 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모반죄를 범하지 않는 한 체포되지 않는 따위의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쿠빌라이는 또한 金方慶을 멸망한 南宋의 宰相들보다 上席에 앉히면서 『高麗는 의리를 아는
나라요, 宋은 반항하다가 힘이 부쳐 항복한 나라이니 어찌 똑같이 취급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쿠빌라이의 교묘한 用人術(용인술)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귀국하는 金方慶을 흔도가 開京의 성 밖까지 나가 맞았다. 다음은 두 사람의 對面 장면에 관한 高麗史 金方慶 傳의
기록이다. <흔도가 金方慶에게 말하기를, 『황제께서는 나로 하여금 몽골군을 관할하게 하고, 그대로 하여금 고려군을
관할하도록 하였는데, 그대는 매양 일이 있을 때마다 국왕에게 미루고 국왕은 또 그대에게 밀어 버리니 과연 누가 고려군의 관할을 맡아야 할
것이오?』 金方慶이 대답하기를, 『출정시에는 장군이 관할하는 것이고, 평화시에는 국왕의 관할을 받는 것이니, 본래 법이
그렇지 않소?!』라고 하였다. 이 말이 끝나자 새 새끼가 그들이 앉은 집 뜨락에 와 있었는데, 흔도는 사람을 시켜서 그것을
잡으라고 하여 얼마 동안 가지고 희롱하다가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金方慶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소?』라고 물었다.
金方慶이 말하기를, 『농부들이 힘써 농사를 지어 두면 이것들이 와락 달려들어 곡물을 다 쪼아 먹어 버리니 당신이 그것을 죽인 것은 역시 백성들을
가긍히 여기는 뜻에서 출발한 것이오』라고 하였다. 흔도가 말하기를, 『내가 보건대 高麗 사람들은 모두 글도 알고 불교를
믿는 것이 漢族들과 유사한데, 매양 우리들을 멸시하면서 「몽골 사람들은 그저 살육하는 것을 일삼으니 하늘이 반드시 그들을 미워할 것이다」라고들
하오. 그러나 하늘이 우리에게 살육하는 풍속을 준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뜻에 따라 그렇게 하는 데 불과하니 하늘은 그것을 죄로 삼지 않는
것이오.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몽골 사람들에게 굴복하게 된 까닭이오』라고 하였다> 서로 칼날을 세운 매우 의미심장한
문답이다. 문맥을 살펴보면 蒙將 흔도는 金方慶에게는 일종의 열등의식을 느끼면서도 고려인에게는 경멸감을 갖고 시비를 걸고 있으며, 金方慶은
은근슬쩍 흔도의 銳鋒(예봉)을 비켜 가고 있다. 쿠빌라이의 用人術 이런 가운데
金方慶에 대한 무고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다루가치에게 익명의 투서가 날아들었는데, 「金方慶 등 43명이 반역을 음모하고 다시 강화도로 들어가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재상 柳璥(유경)이 힘써 구원하여 金方慶은 일단 위기에서 벗어났다. 두 번째 위기가 곧 닥쳐 왔다.
金方慶에게 원한을 품은 前 대장군 韋得儒(위득유)·중랑장 盧進義(노진의) 등이 金方慶을 「모반음모죄」로 당시 鹽州(염주)에 주둔하고 있던
흔도에게 무고했던 것이다. 金方慶은 제1차 일본원정 당시 副使 김선이 익사할 때 위득유가 上官인 김선을 구하지 않았다 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그를
파면시킨 일이 있었다. 노진의는 삼별초 정벌을 위해 珍島에 갔을 때 힘써 싸우지 않고 남의 재산만 약탈했다는 이유로 金方慶의 上奏(상주)에 의해
그의 재산이 국가에 몰수당한 바 있었다. 그들의 고발장에는 「金方慶이 그의 아들 金, 사위 趙변… 등과 함께 왕,
공주(왕비: 쿠빌라이의 딸 쿠르츠가이미시) 및 다루가치를 없애 버리고 강화도에 들어가서 반역하려고 음모하고 있다. 또 일본 정벌 이후 軍기자재를
모두 나라에 반납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金方慶은 무기를 자기 집에다 감추어 두었으며…」라고 되어 있었다. 흔도가
300명의 騎兵을 인솔하고 충렬왕에게 달려와 金方慶을 신문하도록 요구했다. 충렬왕과 흔도가 임석한 신문에서 金方慶은 또다시 유경의 변호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홍다구가 끼어들었다. 홍다구는 몽골의 中書省에다 자기를 高麗에 보내 문초하도록 요청했다. 다음은 高麗史 열전의 관련 기록이다.
<홍다구는 쇠줄로 김방경의 목을 둘러 죄고 못이라도 박을 듯이 하였고, 또 刑杖(형장)을 가진 자를 꾸짖어 그의
머리를 치게 했으며, 종일토록 알몸뚱이로 세워놓았다. 날씨는 극히 추워서 그의 피부는 얼어 먹을 뿌려 놓은 듯했다>
金方慶은 홍다구에게 『나를 죽이려면 죽여라! 부당한 일을 가지고 굴복하지는 않겠다』고 맞섰다. 홍다구는 2차에 걸친 혹독한 고문을 행한 끝에
金方慶 父子를 대청도와 백령도로 귀양 보냈다. 죄목은 「兵仗器(병장기) 은닉」이었다. 홍다구는 사람을 보내어 쿠빌라이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金方慶은 양곡을 저축하고 선박을 건조하였으며, 많은 병기와 갑옷을 감추어 두고 불칙한 짓을 꾀하였습니다. 따라서
開京 이남의 지리상 중요 지대를 골라 방수군을 두고, 여러 州郡에도 다루가치를 두며, 金方慶과 그 아들·사위·일가권속들을 大都에 압송하여 노예로
만들고, 그 소유지는 몰수하여 거기서 나오는 수입을 軍糧(군량)에 충당하기 바랍니다> 충렬왕은 金方慶의 귀양을
보고하기 위해 쿠빌라이에게 使臣을 보냈다. 쿠빌라이가 사신 印候(인후)에게 물었다. 『金方慶이 갑옷을 얼마나 감추어
두었던가?』 『46벌뿐입니다』 『金方慶이 그래 그것을 믿고 반역하려고 음모했단 말인가. 고려에서는
州縣의 조세를 모두 王京으로 운반하고 있는데, 배를 만들고 양곡을 저축했다는 말을 무엇 때문에 의심하는 것인가. 또 金方慶이 자기 집을 王京에
새로 지었다는데, 그가 반역을 음모했다면 하필 집은 왜 지었겠는가. 빨리 홍다구를 돌려보내고, 국왕은 풀이 자라나는 때를 기다려 와서 보고하도록
하라!』 그렇다고 大都로 돌아간 홍다구가 처벌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쿠빌라이로선 고려의 支柱인 金方慶을 제거하고 이
사건을 구실로 高麗의 남부를 몽골에 직속시키려고 했던 홍다구의 「충성」은 또 그것대로 평가했던 것이다. 쿠빌라이는 金方慶도 大都로 불러
다독거림을 잊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大明殿에서 신년축하 연회를 열면서 金方慶을 끌어올려 승상 다음의 자리에 앉게 하고는
흰밥과 생선국을 주면서 『고려사람은 이런 거 좋아하지』라며 자상하게 위로했다. 귀국 때 金方慶에게는 활·화살·검·白羽甲을 내렸으며, 日本再征에
나서는 장령들 몫으로 활 1000개, 갑옷 100벌, 솜옷 200벌을 따로 주었다. 쿠빌라이는 이렇게 노회했다.
제2차 원정군의 편성 1280년
쿠빌라이는 몽골의 직할령이던 耽羅(탐라: 제주도)와 中國 남해연안에 조선소를 설치, 약 3500척의 함선을 건조케 했다. 이 3500척이
완공되자 쿠빌라이는 慶元(경원: 지금의 寧波)에 回送시켰다. 이해 8월, 쿠빌라이는 그 전년에 창설했던 征日本行省(정일본행성)의 도원수에
范文虎와 都 및 洪茶丘를 임명했다. 이어 1280년 12월, 고려 忠烈王을 左丞相, 金方慶을 도원수로 보임했다. 원래 최고사령관은 征日本行省의
우승상인 아치한(阿刺罕)이었다. 원정군은 合浦로부터 출진하는 東路軍(동로군)과 양자강 하구의 慶元으로부터 출진하는
江南軍(강남군)으로 구성되었다. 東路軍은 1차 원정 때와 같이 都·洪茶丘·金方慶에게 지휘시켰고, 江南軍은 범문호에 의해 통솔되었다. 그 병력은
麗·蒙·漢 장병으로 구성하는 東路軍이 4만 명, 패망한 南宋의 장병들로 편성된 江南軍이 10만 명. 출진의 시기는 1281년 5, 6월경으로
잡혔다. 일본에서의 兩路軍의 집결장소는 이키島 앞바다였다. 제2차 원정군의 편성과 장비는 다음과 같다. ◎東路軍
○사령관= 征日本都元帥 都 ○蒙·漢軍 지휘관= 征日本都元帥 洪茶丘 *병력 1만5000명
○高麗軍 지휘관= 征日本都元帥 金方慶 *병력 1만 명 *뱃사공·水手
1만7000명 *東路軍 총병력 4만2000명 *함선 900척 *兵糧
12만3000碩(1碩은 60kg에 상당) ◎江南軍 ○사령관=征日本都元帥 范文虎
*총병력 10만 명 *함선 3500척 *병량 40만 碩 원정군의 장비·병참물자
등에 대해서는 제1차 원정 때처럼 함선의 주력은 100t급의 千料舟(천료주). 여기에 拔都魯輕疾舟(발도로경질주: 상륙정) 및 吸水舟(흡수주:
음료수 적재선)가 뒤따르게 했다. 江南軍의 전함에는 다수의 괭이·쟁기·삽 등의 農具와 씨앗 등이 실렸다. 이것은 江南軍의 장병이 屯田軍으로
되어서 점령下의 日本땅에서 兵糧을 자체조달하기 위한 준비였다. 이런 의미에서 江南軍은 병력수만 많았을 뿐이지 사실상의
이민집단이며, 제2차 원정군의 主力은 東路軍이라 할 수 있다. 東路軍의 몽골·漢族 부대는 大都로부터 2개월에 걸쳐 행군,
4월 중순에 고려의 合浦에 도착, 고려군과 합류했다. 여기서 말하는 漢族은 거란족·여진족, 그리고 이들이 세운 왕조 遼와 金의 治下에 있었던
華北 일대의 胡漢混血人(호한혼혈인) 등이다. 한편 南宋의 투항병들로 구성된 江南軍도 중국 江南의 4省과 고려의 耽羅에서 건조된 戰船들이 慶元港
일대에 집결, 출항날을 기다렸다. 忠烈王은 그의 희망대로 再征 직전에 征日本行省의 左丞相을 겸직하게 되었다. 金方慶도
都·洪茶丘와 同格인 征일본도원수에 임명되었다. 忠烈王은 東路軍이 모두 合浦(합포: 마산)에 집결하자 都·洪茶丘·金方慶이 나란히 뒤따르게 하여
全軍을 閱兵(열병)했다. 이것은 제1차 원정 때보다 고려군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려군 병사들의 士氣는
그리 높지 않았던 것 같다. 고려의 백성들은 몽골의 수탈에 의해 궁핍에 허덕였고, 특히 두 번에 걸친 전함 1800척의 건조로 골수까지
착취당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피폐로 인해 고려 軍民의 건강·영양 상태가 극도로 악화, 1279년 말에 전염병이 발생하고, 그것이 1281년부터
크게 번지게 된다. 이키 懶戶浦의 合戰 東路軍이 합포를 출발한 날은
1281년 5월3일이었다. 東路軍과 江南軍이 이키島에서 합류하기로 한 것은 6월15일이었기 때문에 아직 40여 일이 남아 있던 시점이었다.
東路軍이 對馬島 앞바다에 나타난 날은 5월21일. 일부 병력이 世界村 大明浦에 상륙, 對馬島 수비대를 격멸했다. 大明浦는
지금의 佐賀村이라는 것이 通說이다. 佐賀村은 대마도 東岸의 要津으로서 예로부터 외국선의 정박지로 알려져 있다. 對馬島에
상륙하여 점령한 東路軍은 이어 이키島로 진발했다. 도중 大風을 만나 장병 130명, 梢工(초공) 36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이키의
아시베(芦邊)만에 집결한 것은 1281년 5월26일이었다. 이때 이키의 守護代는 少貳資時(쇼니 쓰케토키)였다. 쓰케토키는
鎭西奉行 츠네쓰케(少貳經資)의 아들이다. 이키의 守護代는 원래 平씨였지만, 1274년 몽골군의 내습에 의해 族滅(족멸)되어 그대로
缺員(궐원)되어 있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이키島를 처음부터 對馬島와 함께 放棄(방기)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제2차
원정이 임박하자 鎭西奉行 츠네쓰케는 이키를 그대로 놔둘 수도 없다고 판단, 자기 아들 쓰케토키를 守護代로 삼아 이키에 파견했던 것이다. 이때
쓰케토키의 나이 19세였다. 그가 100여 기를 거느리고 이키島에 도착한 것은 東路軍이 침공하기 수개월 전이었다.
쓰케토키는 황폐한 船匿城(선익성: 후나카쿠시)을 보수해서 새로운 방벽을 구축했다. 아시베灣에 집결한 東路軍은 船匿城에 鐵砲와 短弓을 쏘면서
상륙을 개시했다. 이키軍은 상륙하는 東路軍에게 바위를 굴리고 長弓을 쏘면서 항전하다가 玉碎(옥쇄)했다. 쓰케토키는 7년
전, 불과 12세 나이로 初陣을 경험한 용사였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孤立無援(고립무원)의 포위 속에서 온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현재, 아시베(芦邊)町의 이키神社에서는 이 젊은 무사를 祭神으로 받들고 있으며, 아시베港 뱃머리에도 그의 騎馬像이 세워져 있다.
자신의 아들 쓰케토키를 死地에 투입한 총사령관 츠네쓰케의 결단에서 가마쿠라 武士의 眞面目(진면목)이 엿보인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이키軍이 전멸한 후 몽골軍은 주민들을 붙잡아 포악한 짓을 다했다. 그들은 임신부의 배를 갈라 그 안의 태아를 끄집어 내고,
부녀자들을 폭행했다. 반항하는 부녀자는 손에 구멍을 내어 묶은 다음 땅으로 끌고 다니는가 하면 뱃전에 붙들어 매기도 했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韓半島에 침입했던 倭寇도 이때의 몽골兵과 유사한 만행을 자행했다. 하카타灣의 防壘
이키島를 점령한 東路軍은 10일간 휴식하고 소부대만 잔류시킨 뒤 6월6일 하카타灣으로 침입했다. 그런데 상륙정 拔都魯輕疾舟(발도로경질주)를 타고
하카타 灣岸으로 접근하던 東路軍은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동쪽 카시이(香椎)로부터 서쪽 이마즈(今津)까지의 해안선에 연 20km에 걸쳐
防壘(방루)가 축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높이 2m 전후의 방루에는 무수한 깃발이 펄럭이는 가운데 일본병들이 빈틈없이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東路軍은 즉각 작전을 변경, 防壘가 없고 수비가 엷다고 판단되던 시카노시마(志賀島)에 상륙, 그곳으로부터 「海의 中道」를
통해 내륙부로 진입하려고 했다. 시카노시마에서는 100여m에 불과한 「海의 中道」만 건너면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나온 하카타 동북쪽 半島에
상륙할 수 있었다(지금 시카노시마는 연육교로 하카타 동북부와 연결되어 있음). 東路軍은 300척의 함대를 동북쪽
나가도(長門)로 파견, 간몬(關門)해협을 차단함으로써 혼슈(本州)로부터의 증원군을 저지하려고도 했다. 이런 작전은 일본軍
측도 예상하고 있었다. 우선, 시카노시마에 상륙한 東路軍에 대해 오토모 요리야쓰(大友賴泰)의 부대가 공세를 걸었다. 그것을 아키다(秋田城次郞)가
이끄는 關東軍이 측면으로부터 엄호하여 東路軍을 해상으로 내몰았다. 시카노시마 쟁탈전은 6월6일 밤부터 8일간 계속되어 東路軍이 하카타灣으로부터
퇴각한 것은 6월13일이었다. 당시의 전황에 대해 「高麗史節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金方慶은 6월8일 일본군과 力戰하여 참수 300여 급을 얻었지만, 洪茶丘는 일본군에 돌파되어 패주했다. 王萬戶가 이끄는 弓弩(궁노)부대의
구원에 의해 洪茶丘는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다음날 6월9일에도 패전을 거듭했다. 게다가 陣中에 疫病(역병)이 나돌았기 때문에 죽은
자가 3000명에 달했다> 일본 측 기록인 「八幡愚童記」에 의하면 이때의 주야에 걸친 계속 合戰으로 전사한 몽골병은
1000여 명에 달했다. 시카노시마에서 용맹을 떨친 일본軍의 무사는 이요(伊豫)의 水軍을 거느린 고노 미치아리(河野通有)였다.
미치아리는 그의 祖父가 조정(天皇 편)과 幕府의 싸움에서 조정에 가담함으로써 몰락했던 家名을 어떻게 하든 만회하기로 결심, 발군의
무공을 올리겠다고 벼르던 인물이었다. 그런 미치아리가 시카노시마 海戰에 아들 미치타다(通忠), 백부인 미치토키(通時) 등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兵船 3척에 분승, 몽골군 함대로 육박했다. 몽골의 군함은 대형 構造船이었지만, 일본선은 兵船이라는 이름만 붙은 無방비의 準구조선이었다.
미치아리는 곧 몽골군의 화살을 맞아 부상했고, 伯父 미치토키 등 다수의 전사자도 발생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그는 兵船을
몽골 戰船의 舷側(현측)에 붙인 다음 돛대를 쓰러뜨려 이것을 사다리로 삼아 몽골 戰船으로 기어올라 횃불을 집어 던지고 몽골 지휘관 한 명을 잡아
퇴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국부적 戰果는 예외적이며 요행수에 불과했다. 사실, 일본군의 연합군 함대 공격은 연합군이 발사한
石弓에 의해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石弓은 石彈(석탄)을 두레박式 容器에 담아 날리는 投石機(투석기)로서 그 크기가 사람 머리통만 했기 때문에
일본의 兵船들은 맞기만 하면 단 일격에 격침되었던 것이다. 한편 300척의 함대를 구성, 나가도(長門)로 향했던 東路軍의
一枝軍은 다시 2隊로 나뉘어 角島(츠노시마)와 蓋井島(후다오이지마)를 점거했다. 나아가 나가도國 豊浦郡의 도이가하마와 黑井村의 야츠가하마에
상륙을 개시했던 것은 6월8일부터 9일에 걸친 양일 간이었다. 이때 도이가하마의 경비를 맡고 있었던 것은 나가도의 수비군과
가마쿠라 막부 직속의 무사 正上左京亮의 부대였는데, 3500명 규모의 몽골軍에 패해 田耕村의 고센가하라까지 퇴각했다. 그러나 위급함을 들은
나가도의 守護軍은 關東으로부터 내려온 아다치 모리무네(安達盛宗) 부대 등의 증원을 얻어 6월15일 고센가하라 전투에서 몽골군을 패퇴시켰다.
야츠가하마에서는 그곳 城主 아오야마(淸山玄蕃丞)가 일족을 이끌고 나가도 守護가 파견한 부대와 함께 약 2000명의 몽골
상륙군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城主가 전사한 가운데 일본군은 厚母(아쓰모)까지 퇴각했다. 이 방면의 몽골군도 6월13일 厚母분지에서 패퇴하고
말았지만, 그때까지의 전반적인 전황은 결코 東路軍에게 불리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江南軍과 연합하여 전략적 요충 하카타를 再공략하기로 했던
것이다. 연합군 함대의 鷹島 근해 집결 江南軍은 사전
약정된 이키島가 아닌 平戶島에, 그것도 근 보름이나 늦게 도착했다. 江南軍은 平戶島 앞바다에 도착한 후 하카타灣岸의 방위가 견고한 것을 알고
松浦에 상륙하려고 했지만, 이곳도 松浦黨(마쓰라도우)의 격렬한 저항을 받고 물러났다. 설사, 松浦를 점령하여 大宰府로
진격하려고 하더라도 在地武士들의 맹반격이 예상되는데다 지형상의 어려움도 있어서 단념했다. 松浦와 大宰府 사이엔 표고 1000m가 넘는
세후리(脊振)·텐잔(天山) 산지가 가로놓여 있다. 鷹島를 마주보는 松浦市 星鹿町의 해안에는 지금도 「니게노우라노
石壘(元寇防壘)」가 보존되어 있다. 당시 이 防壘는 1km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300m 쯤 남아 있다. 바다 쪽의 높이는 약 2m, 육지
쪽은 약 1m, 폭 50cm. 東路軍은 이키島로부터 平戶島 앞바다로 항행, 7월 상순에야 江南軍과 합류할 수 있었다. 이런
작전상의 불협화음이 바로 연합군이 지닌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東路軍과 江南軍을 총괄한 최고사령관은 蒙將
아타하이(阿塔海)였다. 그는 도원수들을 소집해서 일본 본토 공략을 위한 작전회의를 열었다. 공략 목표는 역시 일본 鎭西軍의 본거지인 大宰府였다.
아타하이는 일본군의 반격과 전염병 창궐로 탈락자를 낸 東路軍을 재편성하고, 하카타灣의 공격부서를 정했다.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平戶島로부터
동쪽으로 逐次(축차) 이동, 이마리(伊萬里)灣 입구인 다카시마(鷹島) 근해에 집결했던 것은 7월27일(양력 8월19일)이었다. 연합군은 먼저
응도를 포위, 즉각 점령했다. 연합군의 대선단이 鷹島 앞바다에 집결, 이 섬을 점령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鎭西사령부는 즉시
하카타灣 일대의 軍船을 鷹島 근해로 출동시켰다. 그러나 일본 水軍으로서는 艦隊戰을 감행할 수 없었다. 수천 척에 달하는 연합군의 大함대가 鷹島
근해에 집결해 있었던 것이다. 日本 水軍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전술은 연합군이 放心하는 틈을 타 夜襲(야습)을 감행하는 것뿐이었다.
『7월27일, 軍을 이동하여 鷹島에 이르니 곧 일본군의 軍船이 습격해 왔다. 이에 張百戶 장군은 즉각 대비, 부하들과 함께 주야로
응전했다. 일본군은 다음날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 江南軍으로 참전했던 張百戶라는 장군의 墓碑(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颱風―운명의 날 東路軍과 江南軍이 합류함으로써 戰列을 再정비한
연합군은 하카타灣을 향해 진격하려 했던 직전에 뜻밖의 사태에 직면했다. 7월30일 밤부터 강력한 西北風이 몰아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입춘
후 210일을 전후하여 일본 일대에 불어오는 颱風(태풍)이었다. 날이 바뀌어 閏 7월1일, 현행 양력으로는
8월23일이었다. 연합군 장병들은 크게 요동치는 함내에서 배멀미로 곤죽이 되었다. 태풍은 점점 거세어져 집채만 한 파도가 함대를 습격했다.
西北風이었기 때문에 鷹島 남단과 松浦 사이의 伊萬里灣에 정박하고 있던 연합군의 함대는 정면으로 강풍을 받았다. 연합군의
함대는 거친 파도와 바람에 휩쓸려 서로 충돌하거나 육지의 바위에 부딪혀 대부분 바닷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鷹島 주민들이 목격한
것은 해안에 떠밀려 온 숱한 선박의 잔해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의 사체들이었다. 일본 측 기록인 「八幡愚童記」에는
「7월30일 夜半부터 乾風(건풍)이 크게 불었다. 閏 7월1일, 敵船이 모두 飄蕩(표탕: 정처없이 떠돌아다님)해서 바다에 가라앉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乾風은 西北風을 말한다. 연합군 함대는 東路軍 900척과 江南軍 3500척, 합계 4400척. 서북풍이
불기 시작했을 때 응도 남단의 바다로 피난을 개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응도 남단 해역뿐만 아니라 응도의 북쪽 해역, 黑島 및 伊萬里灣 안쪽과
灣內의 御廚沖 방면의 해역과 玄界灘 등지에도 散開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풍의 계절이었던 만큼 바다가 거칠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런 시기에 海國 일본을 공략한다는 것은 무모했다. 태풍으로 큰 타격을 받은 연합군 중 일부는 간신히 鷹島의 船唐津으로부터
床浪·殿浦(토노노우라)에 이르는 南海岸에 漂着, 거기서 伐木하여 新造한 배를 타고 탈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전원 전사했다.
鷹島에는 태풍의 피해를 받은 다수의 몽골군 장병이 도주해왔는데, 일본軍이 그들을 초토하기 위해 龍面庵이라는 곳에 진지를 설치했다. 사령관은
少貳景資로서 이 구릉지에 「御館」이라고 쓰인 標石이 남아 있다. 鷹島의 船唐津과 中川原은 일본군과 몽골군이 격렬하게 교전했던 곳으로서, 승리한
일본군은 몽골의 패잔병을 다수 참수하여 현재도 「首除(쿠비노키)」라고 하는 地名이 남아 있다. 그 전적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元寇史蹟 中川激戰地―前方 일대를 船原·中川原이라 칭하고, 이곳을 首除(쿠비노키)라고 부른다. 1281년 여름 弘安
4년의 役에 상륙했던 元軍을 迎擊 潰滅시켰던 최대의 격전지라고 한다. 首除는 적의 목을 겹쳐 쌓은 곳이고, 동쪽의 中川은 血刀(혈도)를 씻었던
곳으로 전해 온다> 14만 명 중 3만 명만 歸還 일본 측 사료인
「八幡愚童記(팔번우동기)」는 태풍 이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鷹島에 표착한 異賊 수천인, 이 가운데
깨어진 7, 8척의 배를 수리하여 몽골·고려인 약간이 타고 도주했다. 이것을 본 鎭西軍이 少貳景資의 지휘로 수백 척이 鷹島로 몰려갔다. 배가
없어 도주하지 못한 異國人 1000여 명이 항복을 구걸했지만 모두 붙들어 中河 하구에서 목을 쳤다> 위에 나오는
「中河(나카가와)」는 지금도 鷹島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작은 하천에 지나지 않지만, 이른바 「蒙古襲來遺蹟」으로서는 빠트릴 수 없는 현장이다.
궁지에 몰린 패잔병들도 최후의 항전을 감행, 日本 軍兵들도 다수 전사했다고 한다. 鷹島로부터 배후의 이마리灣 연안 지역
또는 灣內 御廚沖 방면에 산개해 있던 연합군 함대도 태풍에 의해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뉴스가 전해지면 하카타灣 방면에 포진했던 鎭西軍도
잔적토벌에 나섰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이 초토전은 閏 7월7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아타하이·都·洪茶丘·金方慶·范文虎 등
사령관들은 간신히 침몰하지 않은 군선들을 타고 고려로 돌아갔다. 「元史」 범문호 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도원수 范文虎는 平戶島 근해에서 그의 배가 침몰했는데 표류한 지 1晝夜에 이르렀다. 다행히 破船의 船板에 매달려서 목숨을 건져 잔존했던
堅船을 골라 거기에 옮겨 탔고, 휘하의 사졸 10여 만인을 五龍山 밑에 버리고 귀국했다> 范文虎의 부하 사졸들의
행방에 대해 「元史」 日本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범문호가 도주한 후 잔존 士卒들은 張百戶를
主帥(주수)로서 張總管이라 부르고, 벌목하여 배를 新造, 그것을 타고 귀환하려고 기도했지만, 7일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모두 敗死하고 잔존
2만~3만 명은 포로로 연행되었다. 9일에 八角島에서 몽골인, 고려인, 漢人은 모두 살해되고, 新附의 唐人(南宋人)은 노예로 되었다. 그러나
노예로 된 于진·莫靑·吳萬五의 3인은 도망, 겨우 본국으로 돌아왔다> 승전한 일본군이 몽골인·고려인·漢人 포로들은
모두 참수하고 南宋 출신 포로들만 노예로 삼았다는 대목도 주목된다. 가마쿠라 막부는 南宋 출신 포로들을 일본 東北지방의 新田개발사업 등에
동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병력 손실에 대해 「元史」의 아타하이 傳에 「師(사: 장병)를 잃은 것, 10 중 7, 8人」,
同書 「世祖本紀」에 「10 중 1, 2만 남았다」고 했고, 「東國通鑑(동국통감)」에는 「몽골군의 돌아오지 못한 자 무려 10만, 고려군의
돌아오지 못한 자 또한 7000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2차 원정군의 총병력 14만 명 중 귀환자는 겨우 3만여 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유물의 보전 처리 현재, 鷹島의
남해안 床浪에서는 水中考古學에 의한 해저유적조사가 시행되어 인양된 다수의 침몰선박 및 해저유물이 鷹島町 新崎免의 町立 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鷹島 해저유물은 床浪지구뿐만 아니라고 남해안 전역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鷹島의 南岸 床浪(토코나미)灣은 연합군
함대의 피해가 가장 컸던 장소였다. 이 해역의 실크層(두께 3m)의 모래층을 흡입기로 빨아 올리면, 아직도 700여 년 전의 遺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鷹島의 역사민속자료관에는 鷹島 해역에서 인양된 생활용품과 船具·무기가 다수 전시되어 있다. 鷹島
역사민속자료관의 50代 여성직원이 기자를 병설 매장문화재센터로 안내했다. 보존처리장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오랜 기간 해저에 매장되어 있었던 유물은 인양 즉시 공개·전시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부식하거나 염분의 結晶化에 의해 변질, 급속한 건조에
의해 변형을 일으키고 맙니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脫鹽·보존처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가마쿠라 武士, 그 力鬪의
眞相
「蒙固襲來繪詞(몽고습래회사)」는 두 차례(1274년과 1281년)에 걸친 麗蒙연합군 對 일본군의 전투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 놓은 두루마리
그림이다. 이 두루마리 그림을 통해 당시 양측 將兵의 武器·戰服, 그리고 戰艦·防壘 등을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는 肥後國의 御家人인
竹崎季長(다케자키 스에나가)의 활약상이 담겨 있다. 스에나가는 1274년의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몽골軍 진영에 뛰어들어
분전하다가 중상을 입었음에도 막부로부터 「恩賞」을 받지 못하자, 가마쿠라까지 올라가서 막부의 御恩奉行(어은봉행: 恩賞 수여 결정권자)에게 그
억울함을 直訴(직소)하여 기어이 「恩賞」을 받아 낸 인물이다. 이에 고무된 그는 1281년의 전투에도 몽골군의 戰艦에 뛰어들어 蒙兵의 목 두
개를 치는 戰功을 세웠다. 「蒙古襲來繪詞」의 주인공, 스에나가의 활약으로 실증될 수 있는 것이지만, 하카타 灣岸의 방위전에
출진했던 무사들은 생명을 걸고 싸웠다. 가마쿠라 武士들은 武藝 제일주의였고, 一家의 단결을 제일의 강령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가마쿠라 武士들은
모두 滅私奉公(멸사봉공), 忠君愛國(충군애국)의 마음으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恩賞, 즉
領地를 받는다―이것이 일본 무사들의 최대의 목표였다. 농촌의 領地야 말로 무사들의 유일한 생활 터전이었다. 무사들은 그 領地의 이름을 자신들의
姓으로 삼고 목숨을 걸고 지켰다. 따라서 그 戰功이 守護, 나아가 幕府에 의해 인정되지 않는 때에는 스에나가처럼 私財를
털어서 먼길을 달려 가마쿠라까지 올라가 막부에 호소했던 것이다. 스에나가는 참전하기 전에 이미 경제적으로 몰락한 御家人이었기 때문에 戰功을
인정받지 못하면 가난을 代물림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 만큼 그의 恩賞 요구는 가히 필사적이었다. 가마쿠라 무사의 분투가
滅私奉公이 아님은 「蒙古襲來繪詞」의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우선, 어디에 가더라도 일본 무사들은 一族의 家紋(가문)을
새겨 넣은 깃발을 세워 그 所在를 알렸다. 友軍의 누군가가 없는 곳에서는 스스로 적을 향해 나아가 싸움을 걸지 않았다. 奮戰(분전)의 장면을
목격해 주는 證人이 있어야 비로소 적과 싸웠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守護 및 上司의 뜻에 배치된다 할지라도 功名을 올리기 위해 적진으로
돌입했다. 즉 「弓矢의 용기」 및 「忠義」가 자기 일족에의 恩賞이 목적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所領을 상속받아 이미
「배 부른 무사들」은 恩賞이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던 만큼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았다. 「文永의 役」 이듬해, 즉 1275년 執權 토키무네가 守護
大羽賴泰 앞으로 보낸 훈계장은 그런 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異賊의 작년 來襲 때 戰場에 임해서 싸우지 않고, 혹은
자기 領地를 지킨다고 칭하면서 달려오지 않은 무리가 많았다. (中略) 향후 만약 忠節을 다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엄중히 罪科를 치르게 할
것이다』 가마쿠라 幕府 멸망의 이유 두 차례에 걸친 몽골제국의
침공이 실패했다는 것은 이후 日本史의 전개에 있어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몽골의 정벌전이 성공했더라면 식민지화했을 일본이 절체절명의 민족적
위기를 모면하게 된 것이다. 사실, 연합군의 침공에 대해 京都 조정도 가마쿠라 幕府도 확실한 대비책을 세우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가메야마(龜山)上皇은 이세신궁(伊勢神宮)에 나가 『내 목숨을 국난과 바꾸고 싶다』고 빌었다. 執權 토키무네 역시 血書(혈서)로
불경을 베껴 나라가 무사하기만을 기원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두 번의 위기 모두 태풍과 大폭풍우로 극복할 수 있었다.
승전의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의 朝野에 神과 부처에 대한 신앙이 한층 심화되었다. 그 결과, 『大日本은 神의 나라이다』라는 사상이 번지게 되었다.
後世 日本제국주의의 바이블이 된 「神皇正統記」의 序頭(서두)에도 그렇게 기술되었다. 1274년과 1281년 전쟁 때
불어닥친 바람은 이른바 「神風(가미가제)」도 아닐 뿐더러 神佛의 加護(가호) 또한 아니었다. 연합군이 패전한 이유는 계절적 특성을 무시한 원정의
시기, 그리고 바다에 약한 몽골군 지휘부의 전략적 실수 때문이었다. 물론 가마쿠라 幕府 측에서 전략적 요충지에 石築을 쌓고 人海戰術에 대비한
훈련을 철저히 했던 점도 승패에 영향을 주기는 했다. 전쟁의 결과는 일본의 국내 정세에 중대한 변화를 가했다. 일단
정치적으로 執權 호조씨의 권위가 강력해졌다. 幕府의 힘이 미치지 못했던 莊園이나 公領의 무사에 대해서도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규슈지방에 호조氏 일족을 守護로 배치하고 두 차례 전쟁에 출전한 무사들을 포상하기 위해 하카타에 鎭西談義所를 설치했다. 이 기관이 후일
鎭西探題(진서탐제)로서 군사권까지 장악하게 된다. 이로써 일본 전역이 거의 막부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는 경제적으로는 중대한 난관에 봉착했다. 교전 당사국이 몽골과 고려로서 승전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땅도 새로 얻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自費를 들여 출전했던 무사들에게 포상을 베풀 방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御家人들은 막대한 戰費 부담으로
인해 궁핍해졌고, 이를 구제하지 못한 가마쿠라 막부는 차츰 존립의 기반을 잃게 되었다. 더욱이 2차에 걸친 방어전에 성공한 이후에도 막부는
연합군의 제3차 정벌에 대비해 규슈 일대를 경비했던 나머지 재정적으로 몰락했다. 가마쿠라 막부는 「弘安의 役」 이후 반세기도 견디지 못하고
1333년 5월 고다이고 天皇의 왕정복구를 지지하는 군대에 의해 토멸되었다.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野望
몽골황제 쿠빌라이는 1281년의 원정 실패에도 불구하고 별로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피해가 江南軍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썼지만
江南軍은 해외이민의 성격이 짙었다. 그들을 몽골에 점령된 南宋 지역에 그대로 두어 사회불안 요인의 하나가 되게 하는 것보다 해외로 배출하는 것이
통치기술상 유리했을 터이다. 좀 야박한 얘기지만, 쿠빌라이의 입장에서는 海外棄民(해외기민)인 南宋軍이 일본을 점령하면 더욱 좋고, 설사
실패하더라도 크게 밑질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南宋에 대한 戰後처리를 마무리한 쿠빌라이는 어느덧 국가위신을
걸고 세 번째 일본정벌을 중앙정부 주도로 기획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본에겐 치명적인 불행이 도래할 뻔했지만, 역사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1283년 1월 쿠빌라이는 제3차 일본원정을 위한 征東行省을 재건했다. 아타하이를 승상으로 임명하고 출정의 시기를
8월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때 고려의 충렬왕도 左승상에 임명되었고, 軍船 150척의 建造를 맡았다. 그러나 이 계획은
징병에 반발한 江南의 중국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일시 중지되었다. 쿠빌라이의 「棄民정책」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원정을 단념하지 않았던
쿠빌라이는 또다시 징병·造船 재개를 명해 고려를 경유하여 일본에 출정시킬 新附軍을 편성했다. 그러던 1283년 9월과
10월에 광동·복건에 대반란이 일어났다. 쿠빌라이는 일본원정을 위해 편성했던 新附軍을 이 반란 진압을 위해 轉用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은 그
후에도 광동·광서·호남·강서로 파급되었고, 南베트남의 참파(占城)왕국 및 北베트남의 安南왕국에서도 대규모의 항전사태가 일어났다. 쿠빌라이는
1284년 2월, 일본원정군의 승상으로 임명되어 있던 아타하이를 참파 정복전에 돌렸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284년
4월, 쿠빌라이는 그동안 建造했던 兵船들을 江淮지구로 회항시켜 전투훈련을 재개했다. 이때 고려에서도 탐라에서 건조한 병선 100척을 동원하여
전투훈련에 참가했다. 제3차 원정이 실행되면 고려는 군선 650척, 병사 1만 명, 군량 10만 석을 부담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불발로 그쳤다. 베트남의 참파와 交趾에서 새로운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란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뒤이어 몽골
내부에서 왕족의 반란이 터졌다. 쿠빌라이 정권 성립의 최대 지원자였던 東方 3王家가 타카차르의 손자 나얀을 우두머리로 하여 쿠빌라이에게 도전했던
것이다. 쿠빌라이 정권은 위기를 맞았고, 東北亞 전역이 전쟁터가 되었다. 제3차 일본원정을 위해 대기 중이던 부대도 이
내란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5년간에 걸친 내전이 평정된 후 1년 남짓 만인 1294년 1월 쿠빌라이가 80세를 일기로 타개했다. 쿠빌라이의
죽음으로 일본원정 계획은 중지되었다. 가마쿠라 武士정권은 두 번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첫 번째(1274년) 전쟁에서
기습당했던 교훈에 따른 철저한 대비태세에 의해 두 번째(1281년) 전쟁에서는 거의 대등하게 싸웠다. 大風은 최선을 다한 日本 무사들을 도운
것이지 결코 기적이 아니었다. 朝鮮왕조의 兩班정권이 壬辰倭亂으로 당한 지 40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丁卯·丙子胡亂을 당한 것과는 대비되지 않을
수 없다. 「日本不敗」의 神話 고이즈미(小泉純一) 일본총리가 새해 첫날에 日本
전통 의상 차림으로 태평양전쟁 戰犯들의 位牌(위패)가 봉안된 야스쿠니神社를 참배했다. 이를 지난 1월3일자 朝鮮日報는 「軍國의 추억」이라는
제목을 붙여 보도했다. 보도사진에서 나타난 고이즈미 총리는 日本刀만 들었다면 그야말로 日本武士의 모습, 그대로였다.
軍國日本은 「神의 나라」로 무장하여 태평양전쟁을 도발, 「가미가제(神風) 특공대」까지 동원했지만 「元寇」 이래 「日本不敗의 神話」는 깨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日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진짜 惡者는 帝國主義 선진국」이라는 논리가 得勢하고 있다. 다음은 일본의 대표적
사학자 중 1인인 미와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의 견해(「아시아史槪說」 중에서)다. <…명백하게 日·獨·伊 3國은
민족적 興隆期(흥륭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 興隆을 두려워하여 그 활동을 봉쇄하려고 했던 것이 英·佛·米의 이른바 先進國으로서 온갖 수단을
구사하여 旣得權을 옹호하려고 했던 것이야말로 제2차 세계대전의 진정한 원인이 아닌 것인가> 日本的 군사문화, 즉
武士지배체제는 가마쿠라 幕府시대로부터 확립되었다.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元寇」에 대한 가마쿠라 幕府의 戰勝은 日本的 내셔널리즘의
子宮이며 「日本不敗」 신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1894년 淸日戰爭과 1905년 러일전쟁은 「神國日本 不敗」의 신앙을 더욱 확산시켰다.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의 現代日本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元寇」를 극복한 가마쿠라 幕府시대에 대한 애정이 유별나게 높다.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들은 武藝(무예) 제일주의였다. 武藝가 약하면 짓밟히는 세상이었다. 그때 건립된 일본의 神社 등에는 「敵國降服」의 편액이 여전히 걸려
있다. 이런 맥락에서 「神風」 「神社」 「神國」 「天皇」은 아직도 韓日關係史 이해에 있어 키워드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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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東아시아 情勢를 집약한 수수께끼의 古文書
「高麗牒狀不審條條」
지금부터 700여 년 전에 쓰인 한 통의
文書가 착잡했던 당시의 東아시아 정세를 집약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文永 8년(1271)의 高麗牒狀不審條條(고려첩장불심조조)」라는 수수께끼의
文書이다. 「文永」이란 당시 日本天皇 가메야마(龜山)의 年號(연호)이며, 「不審條條」는 「文永 8년의 高麗牒狀」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異常한
부분을 항목별로 정리해 둔 메모이다.
「文永 8년 高麗牒狀」의 原文은 失傳(실전)되었지만, 최근 日本학계에서는 「不審條條」의
문맥으로 미루어 당시 珍島에 수립되었던 三別抄(삼별초) 정권이 日本에 보낸 國書로서 對蒙 연합전선을 요청한 내용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종래 高麗조정에서 보낸 國書와 정반대였기 때문에 京都의 귀족들은 그 취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高麗牒狀不審條條(고려첩장불심조조)」라고
하는 一枚의 古文書는 현재 東京대학 史料편찬소에 소장되어 있다.
그 무렵, 일본 조정이나 가마쿠라 막부는 대륙의 정세에 대해
無知했던 것으로 보인다. 몽골황제 쿠빌라이는 日本원정에 앞서 通交를 요구하는 國書를 잇달아 日本에 보냈다. 고려 元宗도 몽골의 國書에 첨부하여
쿠빌라이의 의향을 따르도록 권유하는 國書를 日本 조정에 보냈다.
만약 日本이 通交를 거부하여 쿠빌라이가 원정군을 파견하게 되면
高麗는 軍船의 건조 및 병사의 징발 등으로 큰 희생을 강요당할 것이니만큼 그런 사태를 未然에 방지하기 위한
苦肉之策(고육지책)이었다.
元宗이 보낸 書狀은 일본에선 「文永 5년(1268) 高麗牒狀」이라고 한다. 書狀의 末尾(말미)에는 「至元
4월9일」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至元」이라는 것은 쿠빌라이 정권의 年號인 만큼 高麗 국왕이 몽골에 臣從(신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國書에서는 쿠빌라이 황제의 德을 예찬하고 있다.
그런데 元宗의 國書보다 3년 뒤에 전달된 「文永 8년 高麗牒狀」은 「至元」이라는
年號를 사용하기는 커녕 「韋♥(위취: 몽골)는 遠慮(원려: 걱정)할 것 없다」고 卑下(비하)하고 있다. 「위취」라면 털가죽用으로나 쓰이는
禽獸(금수)로서 몽골을 사람으로 대할 생각조차 없다는 지독한 혐오감의 발로이다.
이것은 「文永 8년의 高麗牒狀」의 작성자가
反蒙的(반몽적) 인물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三別抄가 珍島에 신정권을 수립한 것이 바로 1271년이기 때문에 문제의 牒狀은 삼별초 정권의
書狀으로 추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文永 8년 高麗牒狀」의 내용은 「高麗牒狀不審條條」를 통해 그 내용은 파악할 수 있다. 이 古文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高麗牒狀不審條條
1. 以前狀(文永 5년) 몽골의 德을 예찬했는데, 今番狀(文永 8년)엔 韋♥ 云云한 것은
如何.
2. 文永 5년狀은 年號를 썼는데, 이번엔 年號를 쓰지 않은 일.
3. 以前狀에선 몽골의 德에 歸依(귀의)하여
君臣之禮(군신지례) 운운했는데, 今狀에선 江華遷都(강화천도) 近 40년, 被髮左♥(피발좌임: 머리털을 풀어 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으로
미개한 상태를 의미함)은 聖賢所惡(성현소악: 성현이 미워하는 바), 마침내 또 천도하여 珍島로 칭하는 일. (후략)
이 古文書의
수수께끼를 解讀(해독)한 학자가 日本 中央대학 문학부에서 古代·中世 東아시아국제관계사를 연구하고 있는 石井正敏씨다. 石井씨는 「文永 8년
高麗牒狀」의 작성자를 당시 反蒙 항전의 중심적 존재였던 삼별초로 지목했다. 다음은 그의 견해이다.
<이것은 13세기 日本의
관리 누군가가 文永 8년에 高麗로부터 보내온 외교문서인 「高麗牒狀」의 내용에 대해서 그 3년 전인 文永 5년에 보내온 것과 비교 검토해서 異常한
점을 몇 개조로 서술한, 이른바 外交메모이다. 「文永 8년 高麗牒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당시 京都의 朝廷에 벼슬하던 귀족 吉田經長(요시다
쓰네나가)의 일기 「吉續記」의 記述에 약간 등장하는 것뿐으로서, 그 내용은 완전히 수수께끼였던 것이다. 文永 8년이라고 하면 제1차 몽골來襲의
3년 전인 1271년이다. 아시아 전토를 석권한 몽골帝國이 일으킨 침략의 바람이 거셌던 가운데 쓰인 「高麗牒狀不審條條」는 日本역사뿐만 아니라
韓半島의 역사 및 東아시아국제관계사의 한 側面을 밝히는 新史料이다>
그렇다면 만약 三別抄의 亂이 없었더라면 일본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日本 마이니치 신문에 소설 「蒙古襲來」를 3년간 연재한 작가 山田智彦(야마다 토모히코)씨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에서 「만약」은 禁句(금구)이지만, 만약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몽골襲來」는 제1차인 「文永의
役」이 3년 빨랐을 것이다. 오랜 세월, 神風이라고 생각되어 온 颱風이 불었을지, 어떠했을지 알 수는 없다. 아마 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카타는 물론 규슈의 상당한 부분이 점령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럴 경우 일본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분히, 제2차 襲來인 「弘安의 役」은
없었을 것 아닌가. 더욱 일찍 2차, 3차, 화살처럼 빠르게 襲來하여 日本영토가 점령되어 간다―이런 惡夢이 확대되어 온다> 월간조선
2003년 12월호 - 200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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