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北方外交 막후 秘話 - 얼어붙은 舊소련의 문을 열기까지

이강기 2015. 10. 4. 11:17
北方外交 막후 秘話 - 얼어붙은 舊소련의 문을 열기까지
 
내가 다리를 놓은 金泳三의 訪蘇… 모스크바로 날아온 許錟의 권유『金총재님, 지금 바로 평양으로 갑시다』
 
對소련 外交의 門을 열면서 金泳三 민자당 최고위원은 단 한 번도 借款지원 문제를 언급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北方外交와 對北교섭에 「지원」이 필수적 요소가 되어 버렸다. 이는 우리의 北方外交 및 對北정책을 왜곡시키는 중대한 실책이다. 그 원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나가야 할 것이다

鄭 在 文 한나라당 국제위원회 위원장
1936년 부산 출생. 경기高. 美 버클리大 정경학부 졸업. 석유협회회장, 대한상의 감사, 12·13·14·15·16代 국회의원(부산진 甲), 한나라당 중앙위의장 역임.

『이웃 나라와 잘 지내고 싶어 찾아왔다』

 

 

 

 1989년 3월18일, 나는 소련 항공사의 일류신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의 세레메티에보 제2공항에 도착했다. 냉전의 드리운 커튼이 아직도 지구를 덮고 있던 시절, 공산 종주국 소련이라는 나라는 죽어서 간다는 염라국보다 더 멀게 느껴지던 무렵이었다. 한국에서 바로 가는 항공 노선은 물론이고 비자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IPU(국제의원연맹) 회의에 참석한 길에 얼어붙은 소련의 뒷문을 비집고 들어간 것이었다.
 
  3월 하순의 모스크바는 아직도 추운 겨울의 끝자락에 묻혀 있었다. 공항 주변은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고, 사흘 동안 머문 벨그라드 호텔 주변의 거리에도 눈과 얼음이 남아 있었다. 化石化(화석화)한 공산주의 사상 위에 냉전의 얼음이 채 풀리지 않은 모습으로 남아 있는 지구촌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도착 다음날 오전 나는 IMEMO(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를 찾아갔다. 모스크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레닌 언덕 위에서 모스크바대학을 지나 얼마 더 가자 IMEMO가 나왔다. IMEMO는 소련과학원 산하 최대의 대외정책 연구기관으로 세계 경제 및 국제관계를 연구하는 곳이다. 소련內에 있는 극동문제연구소나 미국·캐나다문제연구소, 또는 동방학연구소처럼 어느 특정 지역이나 특정 분야를 다루는 연구소들과는 달리 全세계를 대상으로 국제관계와 경제분야를 연구하는 직원이 1000명에 이르는 방대한 기관이었다. 문자 그대로 소련의 두뇌였다.
 
  1960년대 당시 西獨의 야당인 사민당 당수였던 빌리 브란트를 초청하여 東·西獨 간의 관계 정상화와 東西 긴장완화의 계기를 마련하는 데 측면 지원을 한 곳도 바로 이 연구소였다. 빌리 브란트를 초청했듯이 金泳三 총재(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를 초청케 하여 지구상에서 마지막 남은 냉전의 빙벽을 허물고 한민족 통일의 초석을 놓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찾아간 것이었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버클리대학의 은사인 스칼라피노 교수가 IMEMO 소장인 에브게니 프리마코프 박사에게 소개장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프리마코프 소장은 공산당 중앙위원일 뿐만 아니라 고르바초프의 외교특보로서 이른바 「新사고 외교노선」을 수행하는 오른팔이었다. 그러나 첫 방문에서는 아쉽게도 프리마코프 소장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수석 副소장 브라드 마르티노프와 알렉산드로 키슬로프 副소장, 키리첸코 행정실장, 게오르그 쿠나제 일본·태평양 담당 부장(韓蘇 국교정상화 후 제3대 駐韓 러시아 대사로 부임)의 환대를 받았다. 그들은 한국의 국회 외무위원이자 야당 지도자인 金泳三 총재의 대리인 자격으로, 공인으로서는 제정 러시아 말기 閔泳煥(민영환) 특사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소련)를 방문한 나를 무척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전 내내 환담을 나누다가 마침내 그들 중 한 사람이 물었다.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웃 나라와 잘 지내고 싶어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상호방문을 제의합니다』
 
  『우리도 韓蘇 관계 개선의 필요성에 인식을 같이합니다. 상호방문에 동의합니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흔쾌하게 동의해 주었다. 내가 정부 여당의 인사가 아니라 야당인 통일민주당 金泳三 총재를 모시고 있는 국회의원이라고 신분을 거듭 확인해 주자 그들은 개의치 않는 것은 물론 오히려 더 반갑다는 표정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金泳三 총재가 이곳 소련에 올 수 있을까요?』
 
  『양국 간에 국교가 없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물론 가능할 것입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성사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습니다. 金총재가 6월쯤 우리를 방문해 주시기를 제의합니다. 초청장을 곧 보내드리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들은 마치 내가 방문해 주기를 기다렸던 것 같았다. 내가 소련을 방문하기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어려운 길을 우회해 오는 동안 그들 역시 한반도의 평화가 그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평양 정권의 어깨 너머로 한국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총재님, 중국으로 갑시다』
  
  야당 국회의원인 내가 국교가 없는 「적성국」 소련을 방문하기까지에는 많은 곡절과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지금은 소련은 물론이고 북한을 오가는 것마저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이 되었지만,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있어 소련은 금단의 땅이었다. 그쪽으로 가서도 안 되고 그쪽에서 오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국민들의 의식 속에 크레믈린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괴물들의 소굴이자 모든 현실적 惡의 근원이었다. 그런 곳에 단신으로 뛰어드는 데는 국제정치적인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려는 의지도 있어야 했지만, 무엇보다 개인적인 용기도 필요했다. 내게 그런 용기를 준 사람은 金泳三 총재였다.
 
  1987년 12월16일, 제13代 대통령 선거에서 盧泰愚 후보가 당선되고, 아쉽게 패배를 맛본 金泳三 총재는 해가 바뀐 1988년 연초에도 그 충격을 삭이지 못하고 부산 해운대호텔에 칩거하고 있었다. 知人들의 신년 인사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 정계은퇴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신년이라 부산의 선거구에 내려가 있던 나는 총재의 비서들과 저녁이나 함께 하기 위해 호텔에 들렀다. 그러자 뜻밖에도 金총재가 나를 방으로 불렀다.
 
  『비서진과 저녁을 하기 위해 왔는데 함께 드시지 않겠습니까』
 
  『너희들만 다녀오너라. 난 여기 있겠다』
 
  그 모습이 너무 처량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있던 말들을 쏟아 냈다.
 
  『왜 혼자 계십니까. 그리고 정계은퇴 언급은 왜 하셨습니까. 100만 명이 넘는 군중을 향해 당당하게 민주화에 대해 연설하시던 분께서 이렇게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어서 불쑥 내 입에서 지난 1년 동안 혼자 구상해 왔던 對공산권 수교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총재님, 中國에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니, 그거 무슨 말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두문불출하실 것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중국과 만나 한반도의 평화 문제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해 봅시다. 홍콩을 통해 쉽게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고도 합니다』
 
  『그건 니나 할 일이지, 내가 할 일이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가시면 환영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초청장 없어도 한 번 가 봅시다』
 
  『초청장 없이 어찌 갈 수 있겠나. 홍콩 통해 들어가는 그런 방법말고 초청장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는 게 어떻겠나』
 
  처음에는 나 혼자 구상해 오던 북방외교의 모색이 金총재와의 대화를 통하여 구체화됐다. 초청장 없이 홍콩을 통해 竹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는 우회로가 아닌, 정식 초청장을 받아 정면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게 된 것이었다. 
  
  
  스칼라피노 교수의 도움
 
  중국의 초청장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길이 있을까. 문득 미국의 대학들이 중국으로 교환학생들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그럼 제가 나온 버클리대학을 통해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金총재는 쇠뿔도 단김에 빼려는 듯 서둘렀다.
 
  『니, 내일 당장 미국 좀 가 봐라』
 
  나는 그로부터 1주일 후에야 미국行 비행기에 올랐다. 버클리대학의 은사이자 한국·일본·중국 등 東아시아 문제의 세계적인 전문가인 스칼라피노 교수를 찾아갔더니 반가운 인사 끝에 교수가 넘겨짚었다.
 
  『미스터 鄭은 나의 사랑하는 제자인데…. 무슨 불행한 일이라도 있는가』
 
  『아닙니다. 선생님. 좋은 일입니다』
 
  한국과 중국·소련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겠다는 나의 구상을 이야기하자 스칼라피노 교수는 웃으면서 찬동했다.
 
  『北京대학? 총장을 알지. 그러나 모스크바의 IMEMO가 어떨까. 소장인 프리마코프가 내 친구야. 어쨌든 미스터 鄭의 뜻을 알았으니 다각도로 생각해 보자구』
 
  나는 희망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金泳三 총재는 심기일전하여 그 해 4월에 실시된 총선에 출마해 부산에서 당선,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6월30일 열린 제140회 임시국회의 야당 대표 연설에서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모스크바든 北京이든 평양이든 어느 곳에라도 찾아갈 용의가 있다』고 선언했다.
 
  연설 직후에 열린 만찬에서 盧泰愚 대통령은 金총재에게 『아까 연설처럼 한번 다녀오시지요. 그쪽을 한번 개척해 봅시다』고 힘을 실어 주었다. 이날 盧대통령은 과거 서독이 사용했던 「북방외교」라는 용어를 써 가며 공산권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통령이든, 야당 총재이든,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는 북방의 빙벽을 깨고 얼어붙은 문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나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셈이다. 다만 그 길을 어떻게 개척할 것인가. 용기와 신념의 차이였을 뿐이었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만 「새로운 세계」의 지도를 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변화는 소련에서 먼저 일어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新思考
  
  1985년 정권을 잡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집권과 동시에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천명하고 실천에 옮겨 가기 시작했다. 그의 이른바 「新思考(신사고)」는 소련이 종전의 기본 국가이념을 포기하는 것으로서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던 세계, 즉 Pax Americana-Sovietica의 지각 변동을 예고하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여기에는 한반도 운명의 변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1986년 7월30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반도에서 위험한 긴장은 청산되어야 하며, 한국과도 관계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했고, 서울올림픽 하루 전인 1988년 9월16일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가진 연설에서는 『(러시아는) 남조선과 경제적 관계를 조절할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한발 더 나아간 발언을 했다.
 
  그에 앞서 1988년 8월 일본 사회당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한 金泳三 총재는 東京의 외신기자 클럽의 연설에서 동북아시아의 평화 정착을 위해 남북한과 미국·소련·일본·중국 등이 참여하는 「6개국 의원협의체」 구성을 제안했다. 회견장에 나와 있던 소련의 시사주간지 「노보에 브레먀」(영어로는 「뉴 타임스」)의 블라디미르 옵샤니코프 기자가 金총재에게 단독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공개되어 있는 한국과 舊소련 정치적 접촉의 단초로 알려져 있다.
 
  金총재의 숙소인 뉴오타니호텔에서 열린 회견의 질문은 주로 「6개국 의원협의체」에 대해서였다. 그러나 옵샤니코프 기자는 『한국과 소련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는 것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기여할 것인가』 그리고 『소련 지도자들에게 전달할 메시지가 뭔가』를 물었다. 이날 인터뷰 과정은 그대로 「노보에 브레먀」의 비탈리 이그나텐코 편집장에게 전달됐고, 인터뷰 기사가 나가자 소련 사회에 金총재의 이름이 각인됐다.
 
  東京에서 옵샤니코프 기자의 회견이 있은 지 한 달 만인 1988년 9월 이번에는 「노보에 브레먀」의 편집장인 이그나텐코가 올림픽 취재를 명분으로 서울에 왔다. 이그나텐코는 명색은 시사주간지 편집장이었으나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언론관계와 국제관계를 지도하는 상임위원이면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쿠바와 런던, 그리고 北京을 방문했을 때 선발대장으로 파견되었던 핵심 참모였다. 한때 고르바초프의 공보수석 비서관과 「프라우다」 부사장, 「타스」 통신 사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9월9일, 金총재와 이그나텐코는 서울 여의도 63빌딩 양식집에서 회동하고 이후에도 워커힐호텔 등에서 여러 차례 만났다. 그리고 金총재에 대한 인터뷰 기사는 10월 첫 주 「노보에 브레먀」 6면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이어서 이그나텐코가 서울에 머물고 있던 시각에 한반도에 관한 소련의 정책 변화를 더욱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시사하는 고르바초프의 두 번째 선언인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이 나왔다.
 
  나는 이런 사태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이제는 우리가 나서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있던 무렵에 나는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열린 IPU 회의에 참석했다. 나로서는 생애 최초의 공산권 방문이었다. 소피아 방문을 계기로 공산권의 실체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소련을 방문하여 새로운 역사의 물꼬를 터야겠다는 결심도 한층 더 굳혔다. 서울에 돌아온 나는 프랑스에서 소련 경제를 전공한 이기영 박사에게 1주일에 두 번 4주간에 걸쳐 소련에 관한 강습을 받았다. 소련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관해 조금씩 알아갈수록 IMEMO의 존재가 중요한 가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굳어졌다.
 
 
  大河長江도 작은 개울물에서 시작
 
  내 나름으로 준비를 하고 있는 중에 1988년 10월 스칼라피노 교수가 한국을 방문했다. 교수는 중국이나 소련을 방문하여 새로운 외교의 지평을 열겠다는 나의 뜻이 여전한지 확인한 후 『내가 미국에 돌아가면 프리마코프 IMEMO 소장에게 편지를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비자 얻기가 힘들면 미국으로 오게. 워싱턴의 소련 대사관을 잘 알고 있으니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했다. 소련으로 가는 구체적인 길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듬해인 1989년 3월, 역시 공산권인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IPU 총회가 열리고 나는 국회 외무위원으로서 이 회의에 참석하는 길에 소련을 방문하기로 했다.
 
  IPU 총회에 참석한 소련 대표단을 찾아가 IMEMO에 나의 방문 의향을 전화로 전달해 주도록 요청하고 소련 국영관광공사인 인투리스트를 몇 번이나 오가면서 입국 절차를 밟았다. 국교가 없는 대한민국의 여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자도 여권 아닌 별도의 용지에 스탬프를 찍어 사흘간의 체류 조건으로 간신히 모스크바行 비행기에 올랐다. 북방을 향한 나의 첫 구상은 중국이었으나 소련을 먼저 방문하게 되었다.
 
  소련 방문 비자는 정확하게 72시간이었으나 실제로 머문 시간은 48시간이었다. 그 동안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란 IMEMO를 방문하여 소련 측 對韓정책의 방향과 金총재의 訪蘇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大河長江(대하장강)도 작은 개울물에서 시작하듯 나의 첫 소련 방문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형성되는 도도한 난류의 발원이 되었다.
 
  돌아와 金총재에게 소련 방문 사실을 보고하자 총재는 깜짝 놀랐다. 성사 여부를 알 수 없어 미리 보고하지 않고 갔다 왔기 때문이었다. 
  
  
  駐日 소련 대사관 통해 초청장 도착
  
  당내에서는 金총재의 모스크바 방문을 놓고 반신반의, 구구한 의견들이 많았다.
 
  『鄭위원장이 그렇게 중요한 일을 혼자서 해낼 수 있었겠느냐』는 의구심의 표현도 있었고, 『총재께서 소련을 방문한다면 고르바초프 정도는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고 미리부터 격식을 따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5월 초, IMEMO로부터 金총재를 소련으로 초청하는 서한이 駐日 소련 대사관을 통해 서울에 도착했다. 나는 총재에게 소련 측과 방문 일정, 의제 등을 논의하기 위한 선발대의 책임자로 黃秉泰(황병태) 당 정책委 의장을 천거했다. 그러나 총재는 날더러 직접 가서 협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총재의 비서인 허용상 비서를 동행케 해 달라고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굳이 총재의 비서 중 한 사람과 동행한 것은 첫 소련 방문은 나 혼자만의 결단으로 이루어졌지만 이후부터는 스스로 총재의 시선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행동하기 위함이었다.
 
  5월25일, 허용상 비서와 함께 두 번째 모스크바行 비행기를 탔다. 첫 번째 소련으로 단독 입국했을 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세레메티에보 공항에선 IMEMO의 키슬로프 副소장이 영접해 주었다. 나는 도착 다음날 모스크바의 미국 대사관에 우리 일행의 도착을 알렸다.
 
  IMEMO 측과 金총재 訪蘇 일정에 대한 협의에 들어가자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돌출했다. 金총재 일행이 묵을 호텔이 어디냐고 물으니 『우리가 다 알아서 한다』는 대답이었다. 金총재의 타슈켄트 방문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니 『거긴 왜 가야 되느냐』고 부정적이었다.
 
  구체적인 일정이 나와야 할 것 아니냐고 재촉하면 웃으면서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겨우 합의를 본 것이라고는 레닌그라드 방문 정도였다. 식료품 가게 앞에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데 이력이 나 있는 모스크바 주민들을 보면서 「이것이 러시아식 낙관주의일지도 모른다」는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불안하고 미덥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허용상 비서는 『이런 상태로는 총재님의 소련 방문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나는 이그나텐코 편집장과 인투리스트 간부들, 그리고 고려인인 유학구 박사와 통역(고려인) 등 백방으로 부탁하여 이 난관(?)을 극복하려고 애를 썼다. 
  
  
  『북한 주요인사와 金총재를 만나게 해 달라』
 
  5월29일 오전, IMEMO 회의실에서 일정을 협의하던 중에 키슬로프 박사가 물었다.
 
  『북한 대사관과 접촉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만약 평양 사람들이 접촉해 오면 만날 의사가 있습니까』
 
  순간 나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모스크바는 저들의 무대가 아닌가. 있을 수 있는 일, 있기를 기대했던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피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북한 대사관에서 만나자고 하면 만나지요』
 
  그날 오후 숙소에 돌아와 있으니 키슬로프 박사가 전화를 해 왔다. 북한 대사 권희경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면서 權대사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한 시간쯤 후 전화를 하니 權대사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鄭위원장님, 반갑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얼마나 고생이 되십니까?』
 
  『아닙니다. 제가 먼저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기회가 되면 인사드리겠습니다』
 
  첫날 전화는 이 정도로 끝났다. 다음날인 5월30일 오전 회의 중에 IMEMO 副소장 마르티노프가 다시 『북한 대사를 만나 보겠느냐』고 물었다.
 
  『어제 이미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직접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마르티노프 副소장이 귀띔했다.
 
  『아마도 평양으로부터 중요 인사가 金총재를 만나러 오는 것 같습니다』
 
  호텔에 돌아오니 북한 대사관 윤택영 참사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에게 인사를 하러 오겠다고 했다. 『6시 후면 좋겠다』고 해놓고 서울에 보고를 했다. 서울로부터 『북한 대사관과 접촉을 하라』는 지시가 있었으므로 호텔 2층 식당에서 尹참사관을 만났다. 尹참사관은 내가 권희경 대사를 즉시 만나줄 것, 그리고 평양으로부터 주요 인사가 모스크바로 올 것인데 그가 金총재를 만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다.
 
  『주요 인사가 누굽니까』
 
  『아주 중요한 비서 동지가 오십니다』
 
  『金총재를 만나서 무슨 논의를 하고자 하는 것인지』
 
  『물론 통일에 관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노동당과 통일민주당에 관련된 사항일 것입니다』
 
  다시 서울에 전화를 했다. 서울의 정찬수 보좌관이 전화를 받았다.
 
  『NK 지사 알지? NK 지사에서 자꾸 만나자고 하네』 하자, 처음에는 『NK 지사요』 하고 의아해하던 정보좌관이 금방 알아차리고 金총재에게 전달했다. 『북한에서 모스크바로 총재님을 만나기 위해 중요한 손님이 올 것 같다』고 하자 총재는 『추진해도 좋다』고 했다.
 
  金총재가 공산 종주국인 소련의 문을 열어젖히려고 하자 이를 간파한 평양의 몸짓이 예사롭지 않았다.
 
  1989년 6월1일 오후 4시45분, 金泳三 총재와 孫命順 여사 내외, 金相賢 부총재, 黃秉泰 정책심의회의장, 朴寬用 국회통일특委 위원장, 徐淸源 총재비서실장, 金光一 기획조정실장, 李仁濟 대변인, 李幸九 의원, 李源宗 총재공보특별보좌역, 金基洙 총재보좌관 등 일행 13명이 舊한말 이후 100년 만에 정치·외교적인 목적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해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 발을 디뎠다. 일행은 하루 전날 일본으로 가서 비자를 받은 후 모스크바行 비행기를 탔기 때문에 이틀에 걸친 긴 여행 끝에 모스크바에 닿은 것이었다. 
  
  
  프리마코프, 국회의장으로 영전
  
  그런데 金총재를 초청한 당사자로 당연히 영접을 나와야 할 프리마코프 소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마르티노프 수석 副소장이 金총재를 영접했다. 「혹시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한 기운이 일행 가운데 감돌았다. 그토록 속을 태우던 일정조차도 일행이 도착하기 하루 전에야 겨우 확정되었다고 통보해 주는 식이었기 때문에 소련 측의 행동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예측 불능이 불안과 의구심을 낳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오른팔인 프리마코프 소장의 신변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지니고 있었다.
 
  나의 예측대로 프리마코프 소장은 그날 밤 金총재 일행의 숙소인 프리에모프 영빈관에서 마르티노프 副소장 주최로 열린 환영만찬회가 끝나갈 즈음 은밀하게 영빈관을 찾아와 유학구 선생의 통역으로 金총재와 단독으로 요담했다. 이 자리에서 프리마코프는 공항에 출영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자신이 다음날인 6월3일 연방 최고인민회의(국회) 의장으로 선출될 것이라는 사실을 金총재에게 알려 주었다.
 
  두 사람의 요담은 보드카를 마셔 가면서 새벽 1시까지 계속되었다. 韓蘇 수교는 사실상 이 자리에서 결정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프리마코프는 이그나텐코를 통해 통일민주당과 金泳三 총재에 대해 비교적 소상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서독과 소련의 관계처럼 한국과 소련의 관계도 시급하게 정상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번 金총재의 소련 방문이야말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며 『내년에 다시 오시면 수교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한편 金총재는 프리마코프와의 첫 만남의 자리에서는 물론이고 訪蘇(방소)기간 내내 한국의 「정경분리 불가」 입장을 분명하게 천명함으로써 소련 측의 「先경제교류, 後관계정상화 추진」이라는 당초의 입장을 再考하도록 만들었다.
 
  6월3일과 4일, 일행은 러시아제국의 수도였던 레닌그라드를 시찰하고 6월5일에는 소련 측 초청기관인 IMEMO를 방문했다. 蘇연방상공회의소를 방문하자 말케비치 소장은 즉석에서 「韓蘇 간의 경제교류 확대, 부산과 보스토치니港과의 직항로 개설」 등 진취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金총재는 『그러한 제의에 동감하나 다만 경제와 정치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兩 분야가 동시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북방의 얼어붙은 빙벽을 깨려는 의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원칙과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당당한 자세를 보여 준 것이었다. 
  
  
  북한 조평통위원장 許錟의 심야방문
  
  金총재의 소련 방문 일정은 바쁘고도 충실하게 짜여 있었다. 6월6일 오전 국제친선협회 테레스코바 회장을 방문하여 양국 간 문화 교류를 논의하고, 오후에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부부장 브루텐츠 박사와 오찬을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金총재는 사할린 교포의 영구 귀국문제가 인도적 차원에서 양국 간에 직접 협의로 해결되기를 희망한다고 요청했으나 브루텐츠 박사는 『金총재의 귀국 전에 통보하겠다』고 즉답을 피했다. 그러나 金총재 일행이 귀국길에 미국 워싱턴을 방문 중 우리 측의 요청을 받아들인다는 소련의 메시지가 전달됐다. 방문길에 거둔 가시적인 성과 중의 하나였다.
 
  6일 새벽 4시, 북한 조국평화통일(조평통) 副위원장 전금철이 영빈관으로 혼자 나를 찾아왔다. 평양에서 조평통 위원장 許錟이 金총재를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왔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金총재와 許錟의 회담 장소를 북한 대사관으로 제의했으나 『만나러 왔으면 이쪽으로 찾아와야지 북한 대사관으로 오라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고 내가 거절하자 그러면 영빈관과 북한 대사관의 중간쯤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것도 거절하자 결국 영빈관으로 許錟 일행이 찾아오기로 했다. 시간은 밤 10시, 기자들에게는 회담 사실을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모스크바의 밤 10시는 白夜(백야)현상으로 대낮처럼 환했다. 영빈관 4층 407호실에서 남북한 지도자들이 정식으로 대면하는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우리 쪽에서는 金총재를 비롯하여 金相賢, 황병태, 朴寬用,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 배석했고, 북측에서는 전금철 조평통 부위원장, 안병수 조평통 서기국장 등 2인이 許錟을 배석했다.
 
  서로 반가워하는 인사가 끝나자 金총재가 서두를 꺼냈다.
 
  『이렇게 오셨으니 許錟 선생이 먼저 말씀을 하시죠』
 
  許錟은 엉뚱한 말을 했다.
 
  『金총재께서 먼저 말씀하시죠. 우리를 왜 초청하셨습니까』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金총재는 許錟의 기선 잡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하실 말씀이 있으니까 평양에서 모스크바까지 이리 오셨을 거 아닙니까. 許선생이 먼저 말씀하셔야죠』
 
  이렇게 하여 회담이 시작됐다.
 
  許錟은 金日成의 사촌 여동생과 결혼한 정치국원이었고, 外相을 지낸 바 있는 북한 권력층의 실세 중 실세였다. 무엇보다 북한內에서는 남북문제의 제1인자였다. 한때 서울을 방문한 적도 있는 인물이었다. 전금철과 안병수도 통일 문제 전문가들이었다.
 
  이날 회담 내용은 金泳三 前 대통령의 회고록에 자세하게 기록돼 있어 여기서는 全文을 옮기는 대신 간단하게 요지만 밝히기로 한다. 
  
  
  『평양을 방문해 주시지요』
 
  허담 예, 공동관심사야 통일 문제지요. 우리가 金총재님을 초청한 바도 있고, 또한 金日成 주석께서 모스크바에 가서 金총재님을 뵙고 인사를 전하고 평양 초청 문제가 아직 유효함을 말씀 드리고, 모시는 문제를 토의하고 통일 문제를 논의해 보라는 말씀이 계셔서 왔습니다.(…) 일부에서는 통일을 원하지 않고 있지요. 미국과 일본은 두 개의 조선을 고착시키고 그들의 목적을 달성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외세에 의존하지 말고 우리끼리 협상합시다. 우리는 7·4 공동성명의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좋은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상과 제도를 초월해서 이 원칙에 따라 통일해야 하며 방식은 연방제가 좋습니다.(…) 화해·대화하자면서 군사연습하면 되겠습니까. 文목사 사건도 그렇습니다. 金총재께서 통일안이 있을 것이고 와서 마주앉아 납득할 수 있는 출로를 찾자고 金日成 주석께서 말씀이 있었습니다. 또 金총재께서도 평양을 방문하겠다고 여러 차례 말씀이 계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평양에 오실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용단을 내려 오십시오. 환영하겠습니다.
 
  金총재: 우리 민족이라면 어느 누구 한 사람 통일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만 대화는 인내를 가지고 해야지 너무 서둘거나 조급히 생각하면 오히려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국회 회담 같은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 국회에는 4개 정당이 있고 각기 국민을 대표하고 여론을 수렴,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들 국민대표기구의 회담을 왜 중단시키고 있습니까.
 
  그리고 스포츠 회담을 통해 北京 아시안게임에 단일팀을 구성해야 합니다. 적십자회담도 마찬가지입니다. 1000만 이산가족의 아픔을 왜 모릅니까.(…) 통일의 문제는 원칙도 중요하지만 그 추진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제일 효과적인 접촉과 대화는 양쪽의 頂上들이 만나는 일입니다. 盧泰愚 대통령과 金日成 주석이 직접 만나서 민족의 장래를 의논해야 합니다. 이보다 더 실질적인 회담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의 평양 방문은 이미 1979년에 통일을 위해서 金日成 주석을 만나보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고 그 후에도 여러 번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분위기와 시기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허담 북쪽에 2000만 명의 사회주의자가 있는데 북쪽과 만나지 않고 다른 사회주의 국가를 다니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까. 頂上회담을 하자는 것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文목사 사건이라든지 대화는 공산주의자와 하는 것인데 聯共(연공), 容共(용공)하면 처벌하고 있으니 이런 것들이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金총재 외국군 말씀을 하셨는데 이 세상에 어느 국민이 자기 나라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미국군의 주둔은 전쟁 억지를 위한 목적이고 방어를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무엇보다 남북이 서로 평화에 대해 신뢰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文목사 사건도 그렇습니다. 北이 남한을 잘못 판단하고 있습니다. 남쪽 국민의 사상을 변화시키거나 공산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국민들은 文목사가 왜 공개적으로 정부와 이야기 한 마디 없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통일 문제는 떳떳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학생 1000명 보낼 테니 북한 학생도 1000명 보내라』
 
  허담 학생들이 북한에 오겠다고 하는데 다 보내지 왜 반대합니까.
 
  金총재 좋습니다. 학생 교류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학생 1000명 보낼 테니 북쪽 학생 1000명 보내십시오. 상호교류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우리 학생들을 오라고 하는 것은 혼란을 조성하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고, 이는 통일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안병수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작가회의니 범민족회의니 하는 것은 전부 남쪽에서 제의해 온 것을 우리 측이 받은 것입니다. 총재께서 평양 방문을 이 자리에서 결심하셔서 말씀해 주십시오.
 
  박관용 金총재님 평양 방문에 대해서는 아까 분명히 어렵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허담 총재님과 단둘이서 2~3분만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金총재 우리 이야기 충분히 하지 않았습니까. 은밀히 다시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회담은 여기서 끝났다. 안병수가 미리 만들어 온 공동발표문을 가방에서 꺼내 박관용 의원에게 내밀었다. 읽어 본 朴의원은 『내용도 사실과 다르고, 공동발표문을 작성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했다. 결국 이 회담의 결과는 각자가 별도로 발표하기로 했다. 시기는 金총재의 서울 도착 후로 합의했다.
 
  6월7일 오전, 金총재는 IMEMO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가졌다. 회견 후 「이즈베스치야」, 「프라우다」, 그리고 「노보에 브레먀」와 별도 회견을 가졌다. 오후에는 이제는 연방회의 의장이 된 프리마코프 소장과 金총재의 2차회담이 열렸다. 그런 다음 타슈켄트로 날아가 우리 혈족들을 만나고 돌아온 후 6월9일 이번 방문의 성과를 공식으로 확인하는 통일민주당-IMEMO의 공동성명문을 작성, 교환했다. 이 공동성명문 작성은 우리의 제안에 따른 것으로 IMEMO 측에서는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으나 곧 우리 측의 요구에 응하였다. 국교가 없던 한국과 소련 간에 공식적 성격으로 작성한 최초의 문서였다. 이 공동성명은 그 후 韓蘇 수교의 기본 틀이 되었다. 성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제협력과 국교정상화는 동시에 가야 한다』
 
  ▲金총재는 한국 정치 지도자로서 최초로 소련을 방문하였다. 이 방문은 韓蘇 양국 간의 새로운 관계의 도래를 상징하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며, 공동이해 증진에 의미 있고 성공적인 협력이 경주되었다.
 
  ▲金총재는 소련의 여러 정부기관 및 공공기구와의 회담에서 모든 문제를 폭넓게 포괄적으로 협의하였다. 이것은 소련의 여러 언론기관과의 회견과 더불어 외교관계가 없는 나라로부터 온 정치 지도자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앞으로 양국 간에 경제·사회·문화적 교류가 가속화될 것이며, 냉전 이데올로기 대결에 의한 양국 간의 非정상적인 관계는 가까운 장래에 개선될 것이다.
 
  ▲사할린 거주 한인들 문제 해결은 소련 측 입장에서 볼 때 양국 간 「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중대한 정치적 돌파구」가 될 것이다.
 
  ▲양국 간의 관계 정상화를 강조하는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다. 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평화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기초작업이 닦였다는 사실이 주시되었으며, 이는 또한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블라디보스토크와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행한 연설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金총재의 訪蘇는 양국 간 이해관계 증진에 성공적이고 의미 깊었던 것이었으며, 이 방문을 계기로 적극적 협조가 계속될 것이다.
 
  ▲마르티노프 IMEMO 소장은 연내에 서울을 방문해 달라는 金총재의 제의를 기꺼이 수락하였다. 金총재와 마르티노프 소장은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에서 21세기를 맞는 새로운 질서에 한국과 소련이 중대한 역할을 다하는 데 대하여 서로를 축하하였다.
 
 
  IMEMO는 「한국과」를 별도로 설치해 두고 한국에 관한 연구를 체계적으로 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가난한 나라 한국이 어떻게 하여 외화보유 100억 달러의 경제강국으로 성장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했으며, 관심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우선 경제교류부터 트고 정치는 뒷일로 미루려는 소련의 입장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에 대해 金총재는 경제와 정치는 분리될 수 없다는 원칙을 소련 사람들에게 강하게 심어 놓는 데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한국과 소련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기본 틀은 이처럼 「정상적인」 궤도에서 출발했다 이것이 나중에 어떻게 하여 소련 측 주장대로 이끌려 가서 마침내 「30억 달러 지원」으로 왜곡되었는지, 안타까운 일이다.
 
  金泳三 총재가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온지 4개월 후인 1989년 10월22일부터 29일까지 프리마코프의 후임으로 IMEMO 소장이 된 마르티노프를 단장으로 알렉산드로 키슬로프 소련 평화문제연구소장, 알렉세이 아르바토프, 발레리 차이체프, 게오르그 쿠나제 등 IMEMO 간부들과 비타리 이그나텐코 「노보에 브레먀」 편집장 부부, 미하일 티타렌코 극동문제연구소 소장, 동방학연구소 수석연구관 및 한인학자인 유학구씨 등 소련의 정치·경제·언론, 학계의 극동문제 전문가들 12명으로 이루어진 대표단이 金총재의 소련 방문에 대한 답례차 한국을 방문했다.
 
  이들은 訪韓 기간에 국무총리, 외무장관 등 정부·정당지도자·경제단체장·기업인·학계·언론계 대표들과 공식·非공식으로 폭넓은 접촉을 가졌고, 전국 주요도시의 산업시설을 시찰하고 강연, 기자회견, 세미나 참석 등 우리의 소련 방문 때보다 훨씬 알찬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갔다. 그 결과는 통일민주당과 IMEMO 간의 2차 공동성명서로 구체화됐다.
 
  이로써 소련과의 국교 정상화가 결코 먼 앞날의 얘기가 아니라는 희망을 갖게 됐다. 빌리 브란트 前 서독 수상의 IMEMO 방문 이후 소련과 서독의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진 사실에 비추어 金총재의 소련 방문이 한국과 소련 사이의 한 세기에 걸친 단절의 벽을 허물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넘쳐 흘렀다. 
  
  
  3黨합당의 진짜 이유
 
  소련 방문단이 다녀간 지 3개월 만인 1990년 2월16일 나는 다시 한 번 모스크바를 방문할 일이 생겼다. 3黨합당으로 공동성명의 당사자인 통일민주당이 없어졌고, 金泳三 총재는 여당의 대표최고위원으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내 정세의 변화를 소련 측에 알리고 1차 訪蘇 때 약속해 둔 金총재의 2차 訪蘇 문제를 비롯하여 앞으로의 관계를 협의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3黨합당에 관한 일반적인 평가에 대해서다. 일부에서는 金泳三 총재가 3黨합당을 한 사실을 두고 「대통령病」이라고도 하고, 「野合」이라고도 하여 그 동기에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많은 편인데, 이는 잘못된 지레짐작에 지나지 않는다.
 
  야당 총재의 자격으로 소련을 방문한 자리에서 金총재는 한반도를 둘러싼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피부로 느끼면서 소모적 정쟁에 함몰되어 있는 국내 정치를 돌아보고 진심으로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지도자로서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3黨합당을 발표하면서 「구국의 결단」이라고 했던 말은 金총재의 진심을 그대로 표현한 말이었다.
 
  소련 측 사람들은 통일민주당이 여당으로 거듭난 사실을 내심 반가워했다. 韓蘇 수교를 정부 차원으로 발전시킬 호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金泳三 총재의 2차 소련 방문은 어려운 문제가 많아 쉽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첫째가 대표단의 규모였다. 黨에서는 공식대표 20여 명에다 수행비서와 기자단을 합쳐 30여 명, 총 50여 명의 대규모 대표단을 구성한다는 복안이었다. 3黨합당으로 대표단에 포함시켜야 할 인원이 늘었고 언론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소련 측에서는 『왜 그리 많아야 하느냐』고 난색이었다. 1차 방문단과 같은 규모를 요구했다. 나는 3黨합당의 과정과 의미를 설명하고 최종적으로 의원급 대표단을 20명 이내로 한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YS와 朴哲彦의 갈등에 더 관심
 
  그러나 의원 대표단 중에 행정부의 장관 한 사람이 포함된다고 하자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의원외교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일에 정부 관료가 포함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우리의 제도상 국회의원이 행정부의 장관직을 겸임한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고 국방부 장관은 절대로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양해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정무장관이던 朴哲彦(박철언) 의원이 대표단에 포함되었다. 朴哲彦 장관은 이른바 북방외교 차원에서 헝가리와의 국교 수립을 추진하는 등 외교활동을 잘하고 있는데다 盧泰愚 대통령이 소련방문단에 朴의원을 포함해 줄 것을 바라고 있었으므로 소련 측의 양해를 얻어 이를 관철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공식대표단의 명단이 발표되었을 때 朴장관은 『나는 수행원이 아니고 金泳三 최고위원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언론도 소련 방문의 국가적 차원의 의미보다는 金泳三 최고위원과 朴哲彦 장관의 「파워 게임」에 이상할 정도의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이러한 비뚤어진 관심은 訪蘇 중에도 개운치 않은 뒷이야기들을 남겼다. 朴장관으로서는 국내에서 떠돌고 있었던 「황태자」라는 닉네임이 마음에 작용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그것을 알 까닭이 없는 소련 사람들은 「황태자」에 어울리는 관심을 전혀 보여 주지 않았다.
 
  訪蘇 일정 교섭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려웠던 문제는 고르바초프 대통령과의 면담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아무런 합의도 보지 못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으나 나는 왠지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예감을 지니고 돌아왔다.
 
  IMEMO의 초청에 의한 金泳三 최고위원의 2차 소련 방문은 1990년 3월20일부터 27일까지 8일간의 일정으로 시작됐다. 1차 방문 때는 통일민주당이라는 이름이었으나 2차 방문 때는 민주자유당이었고, 방문단의 구성도 金守漢·朴憘太·황병태·朴哲彦 등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金相夏 대한상의 회장, 具平會 럭키금성그룹 회장, 그리고 연예인 朴圭彩씨도 포함된 19명이었다.
 
  나는 대표단에 앞서 선발대로 金최고위원의 자제인 김현철 중앙조사연구소소장, 김기섭 특보, 허용상 비서 등과 함께 3월13일 소련에 들어갔다. 서울을 떠나기 전날 IMEMO로부터 우리 대표단 일행의 서열에 대한 문의가 있었다. 아마 회의석상에서의 좌석 배치와 영빈관의 방 배치에 참고하기 위함인 듯했다. 나는 金최고위원의 지시에 따라 金최고위원 다음으로 박철언 의원, 정재문 의원, 김용채 의원, 황병태 의원, 박희태 의원의 순서로 통고했다. 소련에 가서 공산당 제2인자로 알려진 야코블레프와 면담할 때 대표단 중 6명만이 배석이 허락되었는데 이 서열이 적용됐다.
 
 
  YS-고르바초프
 
  마침내 3월20일 金泳三 대표 일행이 세레메티에브 제2공항에 도착, 두 번째의 訪蘇일정이 시작됐다. 대표단의 모스크바 도착 전부터 국내 언론의 주요 관심은 「이번 訪蘇기간에 소련의 고위층 중 누구를 만나느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우리의 대답은 『공산당 제2인자인 야코블레프를 만나게 될 것이다』는 말은 자신 있게 할 수 있었으나 그 다음 일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도착 다음날인 3월21일 모스크바 중심가의 소련 공산당 중앙당사에서 金泳三 최고위원과 야코블레프 국제담당 정치국원과의 역사적인 회담이 열렸다. 예정시간은 한 시간이었으나 두 사람의 회담은 두 시간이 걸렸고, 40분간 단독회담을 할 정도로 진지했다.
 
  야코블레프는 『소련은 한국과의 경제관계를 진전시킬 것을 바라고 있지만 한국측의 열의가 식고 있는 것 같다』고 했고, 이어서 『시베리아와 극동 개발에는 한국을 비롯하여 미국·서독 등을 끌어들이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있다』고 하여 한국과의 경제협력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야코블레프와의 면담이 있었던 날 오후 8시에 영빈관 12층의 大홀에서 부르텐스 국제위원장이 주최하는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공식 일정이 끝난 오후 5시부터 나는 방에 돌아와 피로한 몸을 잠시 쉬고 있었다. 金대표는 그 시간 유학구 박사의 통역으로 이즈베스치야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오후 6시경 許비서로부터 『金대표께서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대표가 머물고 있는 스위트룸으로 가 보니 許비서는 『金대표께서 鄭위원장을 기다리시다가 방문한 소련 인사와 함께 급히 나가셨다』고 했다. 김현철씨와 許비서, 그리고 나 세 사람은 직감으로 金대표가 크레믈린宮으로 간 것 같다고 느꼈다.
 
  나는 즉시 박철언 의원의 방으로 전화를 했다.
 
  『朴의원, 지금 대표최고위원께서 크레믈린궁으로 가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고르바초프를 만나시는 것 같습니다』
 
  『뭐요』
 
  朴의원은 놀라고 실망하는 목소리였다.
 
  『盧대통령의 친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데, 왜 미리 연락을 주지 않은 거요』
 
  朴의원은 화를 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함께 간 우리들도 몰랐으니 소련 사람들이 그가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있는지 알 까닭이 없었다.
 
  이날 金대표의 크레믈린宮 방문은 프리마코프 의장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金대표가 크레믈린宮에 도착하자 고르바초프 서기장 경호실장이 안내를 맡았다. 안내된 곳은 대통령 집무실이었다. 거기서 프리마코프와 잠시 환담을 하고 있는데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들어왔다. 한국의 여당 대표와 소련 최고지도자의 역사적인 회담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金대표는 『조속한 韓蘇 국교정상화 및 양국 頂上회담을 희망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고르바초프는 『양국 정상화 문제에 아무런 장애요인은 없다. 우리는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양국이 생동력 있게 추진해 나가자. 다 잘 될 것으로 안다』고 말하고 이어 프리마코프 연방의장을 가리키며 『당신 친구인 프리마코프 의장을 더욱 중요한 나의 참모로 쓰겠다』고 했다. 그 말대로 얼마 후 프리마코프는 신설된 「17인 집행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발탁되어 정치적 비중이 더욱 무거워졌다.
 
  
  韓蘇 수교 회담 급물살
 
  6월23일 대표단은 소련대외경제위원회 의장 겸 경제담당 부총리 시타리안을 만나 양국 간 국교 수립을 공식적으로 촉구했다. 『韓蘇 양국 간의 경제협력을 위해서는 투자보장협정 등 각종 정부 간 협정 체결이 필수적』이라고 전제하고 『이를 위해 양국 간 수교를 위한 정부 간 협상을 즉각 개시하자』고 주장했다. 金대표는 『韓蘇 수교는 이 시점에서 꼭 이루어야 할 역사적 과제』임을 강조했다.
 
  우리는 또 『양국 간의 수교가 즉각적으로 하기 어렵다면 그 前단계로서 양측의 각료를 단장으로 하고 외교·경제부처의 실무자들을 위원으로 하는 협력기구를 만들어 수교협상과 경제협력 문제에 대해 논의를 동시에 병행 추진하자』는 제의를 덧붙였다. 이와는 별개로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韓蘇 경제협력합동위원회」를 설치하여 양국 간에 진행되고 있는 합작투자개발사업에 대한 논의를 더욱 구체적으로 추진토록 하자는 제안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시타리안 부총리는 『당분간 韓蘇 경제협력위원회 등 기존의 경제협력기구를 이용해도 좋을 것』이라 하여 한국 측의 즉각적인 수교 촉구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경제협력기구의 확대 개편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원칙적으로 찬성했다.
 
  그날 오후 金대표는 모스크바대학을 방문하여 교수·학생·在소련고려인협회 관계자 등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두 시간에 걸쳐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韓蘇관계」라는 제목의 연설을 한 후 즉석에서 질문에 답변했다.
 
  6월26일에는 IMEMO 회의장에서 訪蘇단과 소련 측 관계자들이 합동으로 참여하는 세미나가 있었다. 세미나에는 소련 측 정부와 연구소 외에도 기업 관계자들이 다수 참여하여 韓蘇 간 경제협력에 대한 소련 측의 관심도를 입증했다. 그리고 민자당 대표단과 IMEMO는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과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韓蘇 간의 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공동인식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민자당과 IMEMO의 공동성명」은 이전에 작성된 두 차례의 공동성명보다 한층 격식을 갖춘 것으로서 양국 관계가 한층 격상·심화되었음을 입증하는 문서였다.
 
  訪蘇단의 활동에 대한 한국과 소련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다. 일본의 신문 방송도 취재에 열을 올리며 이 「세기적 해빙」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누구보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은 북한측 관계자들이었다. 그들은 매일 金泳三 대표의 비서실로 전화를 걸어 일정을 문의했고 동정을 체크했다.
 
  金泳三 대표최고위원의 두 번째 訪蘇 이후 韓蘇관계는 급물살을 탔다. 1990년 6월4일 盧泰愚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頂上회담을 열고 같은 해 9월 정식 수교를 맺게 되었다. 수교를 맺기 전에 소련 측은 우리 정부에 「先경협 後수교」를 주장했는데 결과적으로 우리 정부는 30억 달러를 지원하여 두고두고 문제로 남았다.
 
  하루는 軍 장성 몇 분이 함께 식사를 하자며 나를 불렀다.
 
  『鄭위원장,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金泳三 대표최고위원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30억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말이 나온 겁니까?』
 
  『1차 訪蘇 때 공동성명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통상교류는 강조했으나 차관 공여는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차 訪蘇 때는 박철언 장관도 갔었는데 그런 발언이 나올 만한 회의를 한 일이 없습니다. 金최고위원께서는 계속해서 수교와 경제협력의 문제가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에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사실이었다. 金대표는 단 한 번도 차관 지원문제를 언급한 일이 없었다. 그랬는데 언제부터인가 이른바 북방외교 또는 對北교섭에 「지원」이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 버렸다. 이는 우리 북방외교 및 對北정책을 왜곡시키는 중대한 실책이다. 그 원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나가야 할 것이다.
 
  韓 蘇관계가 진전되면서 나는 북한 땅을 밟을 기회도 가졌다. 1991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IPU 총회에 참석차 평양을 방문했다. 사실은 이 총회가 평양에서 개최될 수 있도록 내가 많은 노력을 했던 것인데 그 보상(?)으로 평양 방문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회의 도중 북한 측이 우리 측 의원들에게 금강산 여행을 시켜 주었으나 나는 회의 중이라는 이유로 그토록 보고싶었던 금강산 여행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런 충고를 해주었다.
 
  『아예 금강산을 개방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설악산 쪽에서 길만 열면 남쪽 사람들이 많이 구경 올 것입니다. 1년에 몇만 명 이상씩 방문할 텐데 한 사람당 100달러씩만 받아도 경제적으로도 큰 이득이 아닙니까』
 
  그들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10년이 지나지 않아 나의 이 제의는 현실이 되었다. 
  
  
  許錟과 金日成이 金대통령을 만났다면…』
 
  역사에는 假定(가정)이 필요 없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의 올바른 방향 설정을 위한 비판적 방법으로 때로는 假定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볼 수도 있다. 내가 말하는 가정이란 「許錟이 살아 있었다면, 그리고 金日成이 좀더 생존했더라면」 하는 것이다. 許錟은 모스크바에 金총재를 만나러 왔던 그 다음해 命을 달리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金日成도 갔다. 두 사람 모두 金泳三 총재, 金泳三 대통령의 訪北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던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金泳三 대통령이 만났더라면 남북관계는 지금보다 훨씬 부드럽게 진전되었을 것이고, 통일의 길도 빨라졌을 것이다. 무엇보다 「만남」 그 자체를 개인적 정치 목표나 이익 추구의 방편으로 이용하여 남북 간 교섭을 왜곡시키고 국민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월간조선 2003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