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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호놀룰루市의 릴리하 거리에
위치한 韓人기독교회 뜰에 서 있는 李承晩 박사 동상. 李承晩 박사는 하와이를 거점으로 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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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월13일 오전 10시. 태평양의 한복판 하와이에서는 美洲 韓人 이민 100주년 기념식 행사가 열렸다. 행사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안내방송은 100년 전인 1903년 1월13일 102명의 韓人 이민자를 태우고 호놀룰루 항구로 입항하는 증기선 갤릭호의 뱃고동
소리처럼 길게 메아리쳤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韓美 양국의 각계 인사 2500여 명이 초청된 가운데 열린 기념식을 시발로
미국 전역에서는 오케스트라 연주, 무용공연, 태권도 대회, 이민 100주년 기념탑 제막식 등 각종 기념식과 전시회, 음악회가 열렸다.
호놀룰루에는 이민 100주년 행사를 참관하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렸다. 기자는 와이키키 해변에서 5분 정도 떨어진 호텔에
묵었는데, 호텔에서 해변으로 나가는 길목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전투에서 미군이 노획한 일본제 전차와 장갑차, 대포 등을 전시한 기념관이 있었다.
9·11 테러 여파 때문인지 군복에 철모를 쓴 군인들이 차량을 타고 기념관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흰색 바탕에 붉은 줄이
쳐진 제국주의 시절 일본군 깃발을 단 舊式(구식) 일본 전차와 장갑차 앞에서 일본 여성 관광객들이 까르르 웃으며 기념촬영을 한다.
한반도에는 겨울이 한창이지만 하와이에서는 해수욕과 서핑을 즐기는 인파들이 붐볐다. 열대 야자수가 늘어선 호놀룰루 시가에 어둠이 내리면
고급 레스토랑 앞에는 가스 횃불이 점화되어 관광객을 들뜨게 한다. 관광 외에 이렇다 할 산업이 없는 하와이는 9·11 테러사건 여파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기면서 경제에 주름살이 깊게 패였으나 韓人 이민 100주년 기념식에 참여하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숨통이 트였다고 한다.
웨인 패터슨의 저서 「아메리카로 가는 길」에 의하면 185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하와이에는 33개국에서 40만 명
이상의 이민 노동자들이 태평양을 건너왔다고 한다. 하와이에 이처럼 많은 외국 노동력이 유입된 이유는 1777년 1월 제임스
쿡 선장과 함께 하와이 제도에 나타난 선원들 때문이다. 선원들에게서 옮겨온 각종 전염병으로 인해 면역력이 없는 하와이 원주민들은 60~70%
정도가 떼죽음을 당했다. 원주민 인구가 급격히 감소한 상황에서 美 서부지역에 골드러시가 일자 하와이 사탕수수 수요가
폭증했고, 하와이 농장주들은 부족한 노동력을 외국에서 공급하기 시작했다. 美洲 韓人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장인 李德姬(이덕희) 여사의 설명에
의하면 1852년 중국 광동성 지역 인력들이 하와이에 유입된 이래 노르웨이, 독일, 포르투갈에 이어 1885년부터는 일본인들이 하와이 노동자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외국 노동인력 중에서도 主流(주류)를 이룬 것은 중국계와 일본계 등 동양인들이었다. 특히
일본계 이민들이 다수를 차지하면서 골치 아픈 일들이 자주 발생했다. 「아메리카로 가는 길」이란 책에는 1890년에서
1997년 사이에 하와이 농장의 主流를 이루던 일본계 노동자들이 29회나 파업을 선동했고, 농장 이탈률도 6%나 됐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농장주들은 일본계 노동력의 견제 차원에서 한반도로 눈길을 돌렸다. 金昌源(미국명 도널드 김) 美洲 韓人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총회장은 경기高, 서울大 공대 졸업 후 하와이로 유학을 와서 학업을 마치고 현지에 정착했다. 그는 하와이 굴지의 엔지니어링 회사인
RM토월을 운영하여 「성공한 韓人」 중의 한 사람이 됐는데, 이번 기념사업을 위해 사장직도 내놓고 기념사업에 헌신해 왔다. 재미교포 최초로
하와이 주립大 이사장과 총동창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金회장은 韓人으로서는 최초의 이민선인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한 이민
1세대로서 후에 다시 한국으로 귀국한 故 金裕鎬(김유호)씨의 막내아들이다. 1905년 4월 말까지 7843명 이민 金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부친 金裕鎬씨가
하와이行 이민선에 몸을 실은 것은 1902년 겨울이었다. 첫 이민선 승선자들은 인천, 경기, 강화, 황해도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그 중에서도 인천 내리교회 교인이 5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金회장의 설명. 『첫 이민자들은 1902년
12월22일 제물포항(現 인천항)에서 일본 나가사키行 겐카이호를 타고 나가사키로 간 다음 1903년 1월1일 나가사키에서 하와이로 가는 미국
상선 갤릭호로 갈아탔습니다. 2주에 걸친 항해 끝에 호놀룰루에 도착한 韓人은 부친을 포함하여 성인 남자 56명(통역 2명 포함), 여자 21명,
미성년자(14세 미만의 소년 소녀) 25명이었다고 합니다』 갤릭호는 1903년 1월12일 화요일 밤 12시 호놀룰루 외항에
입항하여 다음날 새벽 3시까지 대기하고 있다가 검역부두에 도착했다. 첫 이민자들은 오아후섬 북단의 와이알루아 농장에서 첫 밤을 보냈다.
90명으로 구성된 두 번째 이민단은 1903년 2월 기소호를 타고 인천을 떠나 나가사키에서 콥틱호로 갈아타고 3월2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金昌源 총회장의 부친 金裕鎬씨는 하와이로 떠나기 전 인천 내리교회 선교사들에게 약간의 영어를 배운 덕에 농장 상점의
회계업무를 맡아보게 됐고, 그 덕에 일찍 경제적 자립에 성공하여 韓人 이민자 중 가장 먼저 승용차를 소유한 사람이 됐다고 한다. 金裕鎬씨는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李承晩 박사와도 친하게 지내며 독립운동 자금도 많이 기부했다고 한다. 美洲 韓人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李德姬 여사는 1963년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유학을 떠나 美 버클리大, 남가주大에서 도시계획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하와이로 거처를 옮겨 하와이 도시계획국에 근무했다. 李여사는 공무원 생활 중 하와이州 정부에 보관되어 있는
韓人 이민사회 관련 자료를 다수 접하면서 韓人 이민사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자타가 공인하는 이 분야 전문가가 되어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물론, 독립기념관이나 한국의 정부기록보존소 공무원들도 자료협조 요청을 해 올 정도다. 李여사는 하와이
韓人 商議 회장, 하와이大 후원회 재단 이사, 「가장 영향력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 500인」에 선정되었으며 하와이 적십자 국제봉사상을 수상했다.
현재 미주 韓人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李德姬 여사의 설명에 의하면 첫 이민선이 도착한
1903년 1월13일 이후 1905년 4월 말까지 한반도에서는 총 7843명의 이민자가 태평양을 건너왔고, 1905년 이후엔 이민 발길이
끊겼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韓人들의 하와이 이민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다음은
李德姬 여사의 설명. 『하와이로 건너 온 이민자 중 700여 명은 고향을 찾아 돌아가거나 美 본토로 이주했고, 또 일부는
멕시코와 쿠바 등지로 삶터를 옮겼습니다. 김원용(미국명 워렌 김)씨가 1959년에 발간한 「在美 韓人 50년사」에 의하면 1903년부터
1905년까지 韓人들은 하와이에 7226명, 멕시코에 1031명이 각각 이민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하와이로 이민 온 사람 중 2011명이 미국
본토로 옮겨갔고, 멕시코 카리브 연안에 위치한 메리다의 애니깽 농장에서 일하던 韓人 노동자 388명이 쿠바로 이주했습니다』
「최고의 노동자」로 평가된 韓人들
韓人 노동력의 하와이 유입에 대한 하와이 농장주들의 평가는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웨인 패터슨의 「아메리카로 가는 길」에는 하와이
농장주들이 韓人 노동자들을 칭찬하는 대목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다음은 그 사례 중의 한 대목. <한국인은 노동자로서
동양인 가운데 최고의 선택이다. 나는 지난 7년 동안 중국인, 일본인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일을 시켜보았다. 따라서 나는 한국인이 결정적으로
최고의 노동자라고 말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韓人들의 하와이 이주를 도왔던 舊韓末 주한 미국 외교관 겸
선교사 앨런도 자신의 일기장에 「한국인들이 훌륭한 노동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아주 인기가 높다. 그들은 일과 주위 환경을 좋아하는 듯하다」고 써
놓았다. 하와이 주립大의 한국학 연구소장인 에드워드 슐츠 교수는 『노동자로 유입된 한국인들 중 기독교인들이 상당수였기
때문에 백인 기득권층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면서 『기독교 영향으로 미국식 사고방식과 미국 문화를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보다 더 빨리 정착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하와이는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에서 독특한 이방지대로 남아 있는 섬이다.
우리 땅에서는 이미 잊혀진 존재가 된 국민회라든가 동지회, 李承晩 박사와 朴容萬 장군이 그곳에서는 「살아 있는 현대사」로 꿈틀거리고 있다.
하와이 主流사회로 진출한 韓人들 한국 사회에서는 「建國의 아버지」에서 「몰락한
독재자」로 폄하되고 있는 李承晩 초대 대통령의 동상이 서 있고, 광복 직후인 1945~48년까지 실시된 美 軍政에서 미국 측 실무자로 남한에
파견되어 근무했던 한국계 교포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 李承晩 대통령이 4·19 의거로 하야한 후 하와이에 체류할 당시 중풍 증세로 요양 중이던
老대통령을 돌보았던 당시의 청년 학생이 지금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되어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오늘날 우리가 美洲 韓人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은 단순한 이민사 차원을 넘어 하와이와 美洲 지역에서 전개됐던 抗日운동사를
再정립하는 기회라는 의미도 동시에 가지는 것이다. 해변에는 혹한을 피해 휴양을 온 백인들이 많이 보이지만 하와이 사람들이
모여 사는 다운타운에 가면 백인들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하와이 인구는 총 17개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한국계는 3%로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韓人 교포들이 하와이를 움직이는 主流사회에 진출한 비율을 보면 인구 구성비를 훨씬 능가한다고 한다.
金昌源 총회장에게 韓人 이민자의 후예 중 미국 主流 사회로 진출한 인사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자 가장 먼저 아시아인 최초로 全 미국 연방정부
순회법원 판사에 임명된 허버트 최氏를 꼽았다. 중국은 美洲 이민 역사가 200여 년, 일본은 130여 년으로 우리보다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연방정부 순회법원 판사를 배출하지 못했다고 한다. 현역 2選 의원이자 州의회 부의장이었던 실비아 장 루크 하원의원은
2002년 11월에 열린 미국 중간선거에서 하와이州 26지구에 출마, 61.5%의 지지를 얻어 3選에 성공했다. 그녀는 이민 1.5세로서
서울에서 태어나 1977년 아홉 살의 나이로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3選 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 묻자 『하와이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중국계, 일본계 등 동양계 출신의 지원 덕분』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와이는 동앙계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오히려 백인들이 소수인종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와이는 미국內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적은 지역이기 때문에 미국 본토와는 달리
한국계도 主流사회에 쉽게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간혹 하와이에서 태어난 동양계 미국인이 미국 본토의 대학에 유학가서 인종차별을
경험하고는 충격을 받곤 하죠』 실비아 장 루크 의원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한국어를 기억 속에서 건져 올리느라 애를
썼다. 그녀는 이민을 온 韓人 부모들이 힘든 생활에도 불구하고 자녀 교육에 엄청난 투자와 희생을 아끼지 않은 덕분에 그 자녀들이 대학교수나
법률계, 의사 등 고소득층에 많이 진출했다고 한다. 하와이에서 한국계가 1인당 소득 1위 金昌源 총회장은 『1970년 인구조사
결과 하와이 거주 종족 중 한국계가 수입과 학력이 가장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말했다. 당시 조사에 의하면 한국계가 연평균 1인당 소득
1만2500달러로 1위, 2위는 중국계로 1만10000달러, 3위는 하와이와 백인 혼혈족이 9000달러 순이었다고 한다. 李德姬 여사는 『하와이
韓人들의 생활수준이 다른 민족에 비해서 높은 이유는 이민 초기부터 자녀교육에 정열을 쏟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李여사가
발굴한 하와이 교육국 통계자료에 의하면 1906년 공립학교에 재학 중인 韓人학생이 161명, 1908년에는 145명의 공립학교 재학생과 80명의
사립학교 재학생, 1910년에는 164명의 공립학교 재학생과 106명의 사립학교 재학생이 조사되었다. 이는 인구비례로 볼 때 중국계, 일본계에
비해 현저히 높은 수치라고 한다. 뿐만이 아니라 韓人 이민자들은 2000달러라는, 당시로서는 거금을 모금하여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와 교섭하여 「韓人소년기숙학교」라는 6년제 초등 사립학교를 설립했다. 李여사는 『아시아계 3大 이민국으로 꼽히는 중국, 일본, 한국계 중
6년제 정규학교를 세운 것은 韓人들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 학교는 후에 李承晩 박사가 운영한 韓人여자기숙학교(1915~18),
韓人기독학교(1918~28)의 설립 기반이 된다. 하와이 주립大 한국학 연구소장인 에드워드 슐츠 교수는 韓人들이 하와이
유입 초기부터 교육에 전념한 것은 기독교의 영향 때문으로 분석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舊韓末 한반도에서 활동했던 외국 선교사들은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하기 위해 문맹퇴치 교육을 강화하면서 「기독교=교육기관」이라는 등식이 성립됐다고 한다. 이러한 영향이 하와이 韓人사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학교 설립, 자녀교육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하와이의 韓人 교포들이 법조계나 학계, 의료계
등 主流사회에 다수가 진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財界 쪽으로의 진출은 엔지니어링 사업으로 성공한 金昌源 총회장 등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광복 후 美 군정요원으로 남한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정남영 박사(동물병원 의사)는 『하와이에서 가장 성공한 인종은
중국인』이라고 말했다. 중국인들은 투자에 대한 모험심이 강한 반면 한국인들은 안전 위주의 사업을 추구했다고 한다.
상해 臨政 재정의 3분의 2를 하와이 교민들이
부담 士農工商의 신분제도를 하와이에 와서까지도 고집한 탓에 상공업보다 글 읽는 직업을 선호한 탓이
아닐까 하는 의견에 대해 현지의 韓人 교포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하와이 韓人 이민자들은 『하와이 韓人사회에서 巨商이나 기업가, 자본가가 배출되지
않은 이유는 워낙 어려운 살림에 독립운동자금을 너무 많이 조달하는 바람에 자본축적의 기회를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李德姬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하와이 韓人들은 이민 초기부터 교민 단체나 1909년 2월1일 설립된 국민회에 세금이나 비슷한 의무금을 내야만 국민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上海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된 李承晩 박사는 미주 지역에 거주하는 韓人 교포들이 임시정부 재원 조달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 결과 하와이 교민사회가 上海 임시정부 재정의 3분의 2를, 그리고 美 본토의 교민사회가 3분의 1을 조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와이 교민사회에서 上海 임시정부나 만주에서 활약하던 무장 독립군에게 얼마 정도의 독립운동자금이 건너갔는지를 확인해 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하와이에서 설립된 대한부인 구제회가 1921년 7월25일 만주에서 활동 중이던 대한독립군(대표 白純)에게 500달러를 보낸
영수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김원용씨의 「在美 韓人 50년사」에 의하면 하와이 노동자들은 매일 10시간씩 일하고 장정은
일급 65센트, 여성과 아동은 50센트(월급으로 환산하면 매월 평균 25일 일할 경우 15달러)였으며, 하와이 교민들이 한두 푼씩 모아
독립운동을 위해 헌납한 액수는 약 200만 달러 정도였다고 한다. 이 돈은 오늘날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2억 달러 정도로 추산된다. 李德姬
여사는 『하와이 韓人들은 하루 일당 60~70센트 중 20센트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아 上海 임정과 만주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한 사실은 누구도
알아 주지 않는 잊혀진 근대사가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다른 나라 이민자들에 비해 문자 해독률 높아 李德姬 여사는 『하와이 韓人
이민자들이 자신을 희생해 가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유는 이민자들이 안목이 깨인 선각자가 主流를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30년대에
韓人 이민자들을 인터뷰한 버니스 김氏의 기록에 의하면 韓人 이민자들 중 과반수는 한국에서 가장 도시화한 서울, 수원, 인천의 직장인 출신이고
나머지는 기타 다른 도시 출신이었으며 농민 출신은 극소수였다고 한다. 버니스 김氏의 당시 조사에 의하면 전체 韓人 중 농부
출신은 전체의 7분의 1 이하였고 나머지는 전직 군인, 지방 공무원, 정치 망명객, 학생, 경찰관(포졸), 광부, 벌목공, 승려 등으로서 다른
나라 이민자들에 비해 문자 해독률과 향학열도 높았다고 한다. 다음은 웨인 패터슨의 「하와이로 가는 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호놀룰루에 있는 한국인 성인교육을 위한 야간학교의 한 관리자가 보고하기를 『지금까지 우리에게 온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상류계층으로 향학열이 매우 높아 보였다』고 말하고 있다. 2차적인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한국인 이민들의 40%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한국 사회의 가장 높은 계층에 속하는 몇몇 양반도 韓人 이민 속에 끼어 있었다> 韓人 이민자 중
주목해야 할 점은 해산된 군인 출신이 500여 명 정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교민들은 이들을 光武軍(광무군)이라 불렀는데 광무군 출신들은
자기들끼리 모임을 계속 가지면서 韓人사회에 행사가 있으면 시가행진도 했다고 한다. 하와이 교민들의 모국 사랑 열정은 광복
후와 6·25 때는 구호사업으로 이어졌고, 戰後 복구기에는 교육기관 설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다음은 李德姬 여사의 설명.
『하와이 교민들은 광복 직전까지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주었고, 조국 광복 후에는 주로 학교 설립 등 사회복지사업에 전력했으며,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생필품, 戰場고아 구제기금, 고아원 기금으로 주로 사용됐습니다. 하와이 여성 교민 단체인 대한부인구제회는 3·1운동 당시
死傷을 당한 고국의 애국지사 가족들을 위해 1500달러의 구제금을 보냈고, 고국에 가뭄이나 홍수 등 재난을 입었을 때면 어김없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을 통해 기금을 보낸 기록이 남아 있어요. 또 任永信 여사를 통해 중앙보육학교(중앙대학교의 前身) 설립 자금을 모금해 주는 등 고국의
교육기관 설립을 돕기도 했습니다』 하와이의 李承晩 동상 하와이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建國의 아버지」 李承晩 대통령이다. 舊韓末 선각자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반석에 올려 놓은 지도자가 한국
사회에서는 독재자, 친일파 등용으로 민족정기를 흐린 인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통일조국의 꿈을 깨뜨린 분단의 원흉으로 격하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러나 하와이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李承晩은 살아 있는 현대사로 존재하고 있고, 곳곳에서 李承晩의 숨결과
흔적을 만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상징물이 호놀룰루市의 릴리하 거리에 위치한 韓人기독교회 뜰에 서 있는 李承晩 박사 동상이다.
기자가 릴리하 거리의 韓人기독교회 문을 들어서자 짧은 소나기가 스치듯 지나갔다. 이 교회의 원래 건물은 1918년 李承晩 박사가 서울
광화문을 모방하여 건립했다고 하는데 증축을 위해 철거됐고, 그 옆의 임시 건물을 예배 장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임시 교회 건물을 지나 뜰로
나서자 「우남 리승만 박사 像」이라 새겨진 동상이 서 있었다. 동상에는 「한평생을 오로지 한국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바치신 리승만
대통령을 기리는 조국 동포와 하와이 교포들은 정성을 모아 이 동상을 여기에 세운다」라고 새겨 있었다. 李承晩 박사의 흔적은
호놀룰루 외곽지역에 위치한 韓人기독학원 자리에서도 발견된다. 李박사는 하와이 도착 직후 韓人기숙학교 학장을 맡았으며 후에 韓人여자학원(후에
韓人기독학원으로 개편)을 맡아 청소년 교육에 전력했다고 한다. 기자는 하와이 주립大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공부 중인
신민우氏의 안내로 릴리하 거리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정도 떨어진 칼리히 초등학교를 찾아갔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칼리히 초등학교는 1913년
하와이에 도착한 李承晩 박사가 학장을 맡았던 韓人기독학원이 위치했던 곳이다. 과거의 韓人기독학원 건물은 헐리고 그 자리에
깔끔한 흰색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운동장에 서자 주택가와 태평양의 넘실대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신민우氏는 『후에 韓人기독학원 부지를
팔았는데 그 매각대금은 고국으로 송금되어 인하공대(現 인하大) 설립자금으로 사용됐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李承晩 박사는
6·25 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52년 12월 「戰後 복구를 위해서는 기술자 양성이 필요하다」면서 하와이에 연락하여 韓人기독학원 건물과
부지를 매각하여 그 돈을 송금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와이 교민들은 이 건물 매각대금 과 성금을 모금하여(1차 19만 달러, 2차 9만5000
달러) 본국에 보냈는데, 이 자금이 인하공대 설립의 종자돈으로 사용됐어요. 1954년 개교한 인하공대란 교명은 인천과 하와이의 머릿글자를 따서
지은 것입니다』 인하공대 설립을 위해 팔려나간 건물은 韓人기독학원뿐만이 아니다. 李承晩 박사가 설립한 동지회의 사무실
건물인 「동지회관」도 매각되어 절반은 인하공대 설립자금으로, 나머지는 동지회 자녀들의 장학금으로 활용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놀룰루市 킹
스트리트에 위치한 동지회관을 찾아가 보았다. 동지회관은 2층으로 된 일자형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남의 손에 넘어가 싸구려 제품들을 파는 허름한
상가로 변해 있었다. 인재가 없어 신탁통치 결정 동지회는 李承晩 박사가 1921년 설립한 단체로서,
李박사는 이 단체를 중심으로 독립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비롯한 애국단체 지원사업을 전개했다. 李박사의 동지회 출범으로 하와이 교민사회는
李承晩 지지파인 동지회와 기존 교민단체인 국민회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교민사회의 반목이 심화되면서 한동안 국민회 사람과 동지회 사람 간에는 자녀
혼인을 시키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李承晩 박사는 초기 韓人 이민자들이 고령화되면서 은퇴할 나이가 되자 이들을 위한
거주마을(동지촌) 건설과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하와이섬 오올라 지역의 삼림지역 9900에이커를 매입하여 동지식산회사를 설립했다. 이
지역에서 벌목과 토지개간을 통해 야채 농사를 짓고 숯을 구워 팔아 자금을 마련하려 했으나 숯의 품질에 문제가 생겨 납품이 거절되면서 1929년
파산했다. 지금도 빅 아일랜드에는 李박사가 설립했던 숯공장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호놀룰루에서 동물병원 의사로 활동하다
은퇴한 정남영 박사는 1945년 9월 美 군정 요원으로 남한에 파견되어 美 군정 농무부에서 일본인 재산 파악 업무를 담당했다. 정박사는 『광복
직후 서울에 가보니 미군을 반겨 주는 한국 사람들이 많았는데,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가슴이 아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美 군정은 남한 사회에 지도자가 없고 교육받은 인재가 너무 부족하여 당분간 신탁통치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했는데, 이것이 反美운동의 기폭제가 되어 큰 곤욕을 치렀습니다. 美 군정은 초기엔 徐載弼(서재필) 박사를 남한 지도자로 내세우려 했으나 그가
미국 여성과 결혼을 했고, 한국 땅에선 잊혀진 존재였어요. 다음으로 주목한 것이 金奎植(김규식) 박사였는데, 그는 지도자로서는 너무
고령이었습니다. 金九(김구)와 呂運亨(여운형)은 누구도 그들이 믿을 만한 사람이란 것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 李承晩이었어요. 美 군정은 李承晩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중국의 지도자 蔣介石(장개석)이 그를 적극 지지했고, 또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였기 때문에 李承晩이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요양병원에서 만난 李承晩 하와이에서 老後생활을 보내고 있는 朴晩相 박사는
李承晩 대통령이 4·19로 하야한 다음 하와이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요양병원에서 李박사를 돌봤던 사람이다. 서울大 사범대 생물학과 출신으로
1960년 하와이大로 유학을 왔고, 미국서 면역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朴박사는 인간 두뇌에 대한 연구에 매달려 「한국인의 두뇌개발」이란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가 李박사를 만난 것은 하와이大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1962년 여름이었다.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오아후섬의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아르바이트 신청을 했다. 朴박사는 이 병원에 李박사가 입원해 있는 사실을 몰랐는데 병원 담당자가
『당신이 돌보게 될 환자는 닥터 승만 리』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朴晩相 박사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 李박사는
군사혁명 정부의 주선으로 고국에 돌아갈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서울로부터 귀국해도 좋다는 연락이 와서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까지
나갔는데, 출발 직전 귀국이 취소됐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李박사는 가벼운 中風(중풍) 증세가 와서 하반신을 잘
못 썼고, 언어중추에 이상이 생겼는지 영어를 거의 못하고 한국어로만 대화를 했다고 한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도 한국어 의사소통이 안 돼
병원에서는 한국어를 통역할 사람을 급히 찾았는데, 이 와중에 朴박사가 그 병원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다음은 朴晩相 박사의
설명. 『처음 병실에 들어가면서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니까 「나 잘 있네. 자네 어디서 왔는가」 하고
물으시더군요. 서울서 왔다고 하니까 「명륜동이 종로구에 있지? 요즘 한국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궁금하군. 젊은 사람들(군사정권 지도자들을
지칭)이 잘 하겠지?」 하고 혼잣말을 하시더군요. 두 달여 그 분과 대화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李박사 부부의 검소함에 감동했습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옷이 몇 벌 없어 거의 같은 옷을 계속 입었고, 방에는 李박사의 헌 구두 두 켤레와 다 떨어진 옷 서너 벌이 전부였어요』
당시 프란체스카 여사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극도로 경계했다고 한다. 또 병원에서 약을 주면 반드시 자신이 먼저 먹어본 후
李박사에게 주는 등 매사에 자기 주관을 앞세우는 바람에 병원 간호사나 의사들과 마찰이 잦았다고 한다. 다시 朴박사의 설명.
『나는 메일 에이드(남자 助手)로 李박사의 목욕하는 것, 병원 측과의 의사소통을 맡았습니다. 목욕을 시키면서 보니 李박사의 근육에 탄력이 거의
없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눈이 훨씬 작았습니다. 침대 난간을 붙잡은 오른팔이 심히 떨리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어요.
몸을 씻을 때 보니까 오른쪽 볼기에 네모난 도장 형태의 흉터가 두 개 있더군요. 영화에서 죄인이나 노예들에게 찍는 火印(화인) 같았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3년여 동안 하와이에서 힘든 투병생활을 계속하다가 90세가 되던
1965년 7월19일 망명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朴晩相 박사는 『李박사가 독재를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는 선견지명이 있는 인물이었다』면서
『광복 후 인민공화국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국가를 세운 것은 李박사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朴容萬과 국민군단 李承晩과 더불어 하와이 교민사회를 이끌던 큰 기둥은
朴容萬씨였다. 1904년 미국으로 건너와 1906년 헤이스팅스大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하고 네브래스카大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朴容萬씨는 하와이
교민들의 초청을 받고 1912년 12월 李承晩 박사보다 몇 개월 먼저 하와이에 도착했다. 李德姬 여사는 『朴容萬씨가
하와이에 도착하기 전인 1909년 2월1일 기존의 재미 韓人단체들이 합쳐져 국민회가 발족되었다』면서 『국민회는 외교권이 박탈된 대한제국 정부를
대신하여 교민 보호운동에 앞장서고, 교민사회의 단합을 위해 국민보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고 말했다. 국민회 지도부는 조직 강화와
독립운동을 위한 외교, 교육활동을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해서는 인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朴容萬씨를 초청한 것이라고 한다.
하와이에 도착한 朴容萬씨는 1913년 8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하와이 韓人사회 여론형성의 주요 매체였던 「국민보」 편집인을 지냈다. 1914년
6월10일에는 광무군 출신 등 젊은 청년들을 모아 武力으로 조국 독립을 실현하자는 뜻에서 군사단체인 「대조선 국민군단」을 창설했다.
1919년에는 대조선 독립단 설립,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등을 역임했으나 1928년 중국 北京에서 암살됐다. 朴容萬과
李承晩은 韓人사회가 배출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선각자였지만 생각과 사고방식에 있어 뚜렷한 견해차를 보인 인물이었다. 朴容萬은 한국이
독립하려면 무장투쟁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며 군사력 양성 노선을 주장한 반면 李承晩은 서구 열강, 특히 미국 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방식을 주장했다. 두 사람이 분열하는 첫 단초는 韓人사회의 여론을 이끌어가는 국민보에 대항해 李承晩 박사가 1913년
9월 「태평양잡지」(1930년 「태평양 주보」로 명칭 변경)를 발간함으로써 촉발됐다. 1921년에는 李承晩 박사가 국민회와는 별도로 동지회를
설립함으로써 교민 사회 분열이 더욱 심화되었다. 기자는 신민우씨의 안내로 국민군단 훈련장이 있던 아후이마누 지역을 찾아가
보았다. 호놀룰루市에서 아후이마누로 가려면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 지금부터 70~80년 전 韓人 교민들은 아후이마누 지역에 많이
거주했는데 이 고개를 기준으로 호놀룰루 지역을 「성문 안」으로, 고개를 넘으면 「성문 밖」으로 불렀다고 한다. 자동차가
고개를 넘자 아열대의 절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신민우씨는 『이 지역은 호놀룰루와 비교할 때 날씨가 변덕스러운 지역으로서 하루에 한 번씩
비가 온다』고 말했다. 고개를 넘어 30여 분을 달리자 아후이마누가 나타났다. 그러나 과거의 국민군단 병영은 간데없고 낯선
주택가들이 줄지어 널려 있었다. 과거 이 지역은 파인애플 농장이었는데, 韓人 교민들이 농장주로부터 도급받아 운영하다가 朴容萬씨에게 기부한
것이다. 朴容萬씨는 이 농장에 거주하며 농사도 짓고, 군대 막사를 지어 젊은 韓人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李德姬 여사는
『기록에 의하면 朴容萬 선생이 조직한 국민군단은 무기소지를 금지한 하와이州 법률 때문에 목총을 가지고 훈련했다』면서 『국민군단은 국민회
창립기념일이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시가행진을 벌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호놀룰루 팔리 계곡의 록 애비뉴에는 국민회
건물(정식 명칭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국민회는 설립 후부터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1946년 하와이 교민들이
성금을 모아 팔리 계곡에 위치한 현재의 건물을 매입하여 옮겨 왔다. 이 건물은 포르투갈 귀족 출신이 1927년에 지은 지중해 양식의 저택으로
흰색 벽에 붉은 기와를 얹었다. 총 면적은 33만9340여 평으로 회의실, 강당 등으로 구성되었고, 옆의 부속건물은 국민보를 발간하던 국민보사
건물로 이용되었다. 건물 뒤편에는 야외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교민들을 상대로 연극이나 집회가 열렸다고 하는데,
시멘트 바닥에는 설립 당시 참여자들의 이름이 여기저기 적혀 있었다. 하와이 독립운동사의 현장인 국민회 건물도 하마터면
주인이 바뀔 뻔했다. 얼마 전까지는 건물 일부를 일반인에게 임대해 주택으로 사용했으나 20만~30만 달러에 달하는 보수비용 마련이 어려워 매각을
추진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학교법인 경민학원(경기도 의정부 소재)의 洪禹俊 학장이 이 건물을 매입하여 독립문화원으로 개칭한 다음 2003년
1월14일 정식 개관했다. 건물 앞뜰에는 독립문화원 개원을 축하하는 기념비와 높이 5m짜리 무명 애국지사 추모비가 서
있었다. 이 추모비는 韓人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이다. 추모비 건립에는 1억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는데, 건립 예산은
하와이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여창동 사장(하와이 이민 100주년 관광분과위원)이 중심이 되어 모금을 했다. 여창동 사장은
『하와이 韓人 교포들이 독립투사들을 뒷바라지하느라 큰 희생을 치른 역사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를 건립한 것』이라면서 『조국이 하와이
교민들의 헌신적인 지원을 인정해 주지도, 기억해 주지도 않는 것 같아 섭섭하다』고 말했다. 독립운동이란 차원에서 우리는 하와이 韓人 이민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 아닐까. 1·2차 세계대전에 美軍으로 참전, 전쟁영웅 칭호받기도 하와이 韓人 교포들은
1·2차 세계대전에 미국군으로 참전하여 미국 시민권을 얻거나 전쟁 영웅이 되기도 했다. 李德姬 여사가 발굴한 자료에 의하면 1차 세계대전 당시
160여 명의 韓人 청년(이민 1.5세)들이 참전했으며, 2차 세계대전에는 800여 명(장교 200명)이 참전했다.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김영옥 예비역 대령은 일본계 하와이 2세들이 주축이 된 美 육군 442연대 100대대의 일선 소대장으로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로마 함락 등 숱한 전투에 참전했고 한국전에도 참전하여 미군 최고 훈장인 은성 무공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이다. 그의
활약상은 「잊혀진 용맹」이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미국인들에게 소개된 바 있다. 442연대 100대대는 1941년 12월7일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공격 직후 탄생된 부대였다. 당시 하와이 인구의 37%를 차지하던 일본계 하와이 주민들이 敵國인 일본과 내통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일본계 청년 1400여 명을 육군에 징집하여 미국 본토로 보냈다. 이 부대는 1943년 9월 이탈리아 살레르노에 상륙하여 용맹을 떨쳤고,
이탈리아戰이 끝난 후에는 南프랑스 전투에 투입되어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美 육군 戰史에 의하면 442연대 100대대
예하의 한 중대는 193명의 중대원 중 단지 15명만 살아남는 등 평균 사상률이 다른 미군부대의 세 배를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442연대
100대대에는 일본계 2세 외에 하와이 거주 韓人 교민들도 소속되어 유럽 전선에서 숱한 전투를 치렀다. 사진 결혼 호놀룰루市의 노인 아파트에서
노후생활을 즐기고 있는 李東振(이동진) 목사는 하와이 이민사의 산 증인이다. 그는 1938년 신학공부를 위해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당시 현제명,
홍난파씨 등 음악인과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 다음은 李목사의 증언. 『1938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에 기착했습니다. 하와이에 韓人 교민이 많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도착해 보니 7000명 정도가 살고 있더군요.
초기 이민자들은 대다수가 20세 전후의 청년들이 독신으로 하와이 땅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이 나이가 들면서 가정을 꾸려야 할 형편이 됐어요.
그래서 1915년 무렵부터 농장주들의 주선으로 사진결혼이란 것이 생겨났습니다』 사진결혼이란 신랑감의 사진을 고국으로 보내면
이 사진을 보고 신부감들이 하와이로 건너와 결혼을 하는 것이다. 신랑 될 사람들은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냈고, 고국의 신부들은 사진만 보고
태평양을 건너왔는데, 도착해서 만난 신랑은 너무 나이가 들어 실망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러나 韓人 사회는 사진결혼으로 가정을
이루면서 차츰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李목사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후 미국인들은 韓人 교민을
일본 사람으로 오해하여 습격하곤 했는데, 이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韓人들은 태극기와 성조기가 새겨진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녔다』고 말했다.
하와이에는 韓人 이민 3~4대가 배출되는 등 각계에서 韓人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인연 때문인지 하와이에는
한국 음식이 보편화됐고, 하와이 주립大 교정에는 경복궁을 모방한 한옥 건물이 서 있다. 이것은 하와이주립大 한국학 연구소 건물인데, 이 건물은
국제교류재단 기금 200만 달러와 기타 인사들의 모금으로 건립되었다. 한국학 연구소장인 에드워드 슐츠 교수는 유창한 한국어로 『기부금을 기탁한
분들을 기리기 위해 각 연구실마다 기부금 출연자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면서 명패들을 소개했다. 서강大에서 고려시대
무신정권을 연구한 슐츠 교수는 『한국학 연구소도 美洲 韓人 10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이민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제작(1편은 2002년
11월 완성, 2편은 2003년 5월 완성 예정), 100주년 기념 사진전, 「호랑이의 세기」라는 제목의 韓美문학전 개최 등 행사에 발 벗고
나섰다』고 설명한다. 역사의 무게 하와이 주립大 교정에는 동양인, 서양인 등 다양한 인종들이 거닐고
있었다. 일본은 20여 년 전에 이민 100주년 행사를 치렀고, 중국의 美洲 이민 역사는 200년이 넘는 데 비해 韓人들은 이제야 이민
100주년을 맞았다. 세월이 흐르면 누구나 맞이하는 100년이지만 美洲의 韓人 이민 100주년은 단순한 이민사가 아니라
역사의 무게가 얹힌 중량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이유는 하와이가 韓人 이민자들의 단순한 삶터가 아니라 독립운동과 한민족 개화운동의 뜨거운
현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舊韓末 102명의 사탕수수밭 노동자 취업으로 시작된 美洲 이민사는 하와이를 「抗日(항일)
독립운동의 진원지」로 만들었고, 오늘날 미국 전역에 200만 명의 한국인들의 뿌리 내림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망각하고 있는
동안 북한은 보천보 전투니 抗日 무장투쟁이니 하며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쥐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와이 韓人 이민 100주년 행사를 계기로 우리
정부와 유관기관이 독립운동사 차원에서 하와이 교민들의 치열했던 삶을 再조명함으로써 抗日운동사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와이 韓人 이민자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고달픈 농장 노동을 통해 번 달러를 쪼개서 독립운동 자금에 보탰고, 인재
육성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자금으로, 6·25 전쟁 중에는 구호자금으로 고국 동포들을 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보답도,
그들의 노고를 진심으로 감사해하는 마음가짐도 없었다. 우리는 美洲 이민자들에 대한 깊은 존경과 감사를 실천으로 되갚아야 할 때가 왔다는 사실을
이민 100주년 기념행사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