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발굴] | ||
프랑스 기자가 기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 “소오시(壯士)들이 왕비를 마구 때린 뒤 일본도로 쳐 숨지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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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희 < 전 건국대학교 교수 > | ||
이
글은 프랑스 사람인 빌따알 드 라게리가 1898년 파리에서 출간한 ‘한국. 독립이냐, 러시아 또는 일본의 손에 넘어갈 것이냐’의 제4부 ‘현재
한국의 실정’ 중 제5절 ‘한국 왕비의 암살’ 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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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대가 일으킨 소란 | ||
한가위 행사 때, 훈련대와 서울 경찰대 사이에 여러 번 난투극이 벌어졌다. 10월6일 뜻하지
않은 작은 전투는 경찰대가 경무청과 순검소를 버리고 폭도들이 서울의 지배자가 되도록 내버려둘 만큼 경찰대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쓰라린 경험을 한
전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런 사태를 걱정하지 않았다. 일본 장교들이 징집하고 교육한 1000여 명의 군인이 기다릴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사람들이 서로 멸시했기 때문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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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의 재편성 | ||
왕비는 이런 오합지졸을 신궁 시위대에서 쫓아냈다. 왕비는 일본인에게 추천받아 신복들을 모은
시위대장 안경수(安壽)가 1894년 7월 왕궁의 안보를 일본인들에게 일임한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왕비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해 경계를
한층 강화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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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대신들에 대한 반감 | ||
유길준(兪吉濬). 내무협판이며 위험한 음모자인 그는 민씨 일문에 반대하여 미우라 고로 자작을
도왔는데, 그는 압록강변의 의주관찰사로 전출되었다. 안경수· 군부대신인 그도 가면이 벗겨지면서 파면됐다. 그는 승진 후 반역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김가진(金嘉鎭). 농상공무대신이던 그도 같은 이유로 같은 운명에 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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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의 무장해제 | ||
1895년 10월1일부터 6일까지 시위대의 여러 분견대가 김홍집의 명에 따라 궁 밖으로
이동했다. 나머지 병졸들은 군복을 벗어 무기와 같이 반환해야 했다. 10월7일 반항한 훈련대가 서울의 지배자가 됐을 때, 강녕전과 교태전으로
지나는 큰길을 지키는 초소에는 사람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모든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온종일 사람들은 폭도들이 모든 방향에서 왕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어둠이 깔리자마자 그들은 왕궁을 에워쌌다. 폭 100m의 큰길 양쪽의 관청에는 일본군 1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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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의 습격 : 10월8일 새벽 4시 | ||
10월8일 새벽 4시 보초병들이 경보를 알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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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오시’의 민왕비 암살 | ||
왕비의 거처에서 문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두 번의 총소리가 들렸다.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절대적인 진실을 가려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입구 하나를 재빨리 찾아낸 파렴치한 일본 무법자들이 왕비를
찾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왕비의 피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궁녀들의 머리채를 쥐고 질질 끌고 다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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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음모 참여 | ||
한강변에 위치한 대원군의 집. 대원군의 문지기들은 방문객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그들은 방문객을 마당으로 안내했다. 뒤이어 창문 하나가 부서지고 일본 무뢰한들이 겁에 질린 문지기들을 헤치고 뛰어내렸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문을 부수고 대원군의 방으로 들어갔고 곧 대원군은 수하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일본 무뢰한들은 문지기들의 제복을 벗긴 뒤 다시 그것을 걸치게 하고
도성으로 향했다. 그들이 왕궁에 도착하자 일본군 호위대가, 마치 의장병처럼 그들을
호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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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독재 | ||
대원군은 즉각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이런 사실을 전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두 종류의
포고문을 작성해 공공장소에 게시했다. 큰길은 약 1만명의 조선인으로 북적였다. 일본군이 지키는 왕궁의 대문을 통해 내시와 궁녀로 가득 찬 궁궐의
안마당이 엿보였다. 그들 중 부상한 두 사람이 빠져 나왔다. 오전 7시, 시위병을 쫓아낸 훈련대는 궁으로 들어온 일본인들과 교대했다. 오전
9시, 큰길에는 아직도 4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궁궐의 중앙문과 서쪽 문은 닫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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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문의 태도 | ||
‘고꾸민신문 (國民新聞)’은 10월17일부터 이 사건을 보도했다. 이 신문은 “왕비가 훈련대를
믿지 않았다. 비밀리에 왕궁 시위대가 훈련대를 무장해제하고 해산시키려고 시도했다. 이런 계획이 노출됐고 훈련대와 대원군이 밀접한 동맹을 맺고
있다 하더라도 협상이 갑자기 이뤄졌는지 혹은 오래 전에 이뤄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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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폐위 칙령 | ||
비록 국왕이 서명을 거부하고 서명 대신 손을 자르겠다고 언명했지만 왕비를 규탄하는 칙령이
10월11일 관보로 발표됐다. 12일에는 왕세자가 아버지인 왕에게 헌신하는 것이 입증되어 고인을 정일품 빈으로 받든다는 또 다른 칙령이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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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의 조치 | ||
이 비극이 일본에 전해지자 천황 정부는 음모에 대한 모든 인지와 그 집행에 관한 어떠한 참여도
부인했다. 일본정부는 외무성 정무국장인 고무라와 다른 고급관리 한 사람을 특별위원으로 임명해 한국에 파견, 미우라 고로 자작과 함께 범죄에 대한
조사를 수행하게 했다. 두 명의 특별위원은 10월15일 밤 서울에 도착했다. 일본 영사 당국은 이미 15명의 일본인 무뢰한을 체포했다. 사건을
의심할 만한 위치에 있는 외국인들은 범죄자들이 한국을 떠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자문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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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왕의 칙령 | ||
10월18일, 일본제국 공보는 다음과 같은 칙령을 공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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