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隋唐시대 7세기 東아시아 정세와 한반도

이강기 2015. 10. 4. 11:36
隋唐시대 7세기 東아시아 정세와 한반도
 
新羅의「앙큼한」同盟외교가 高句麗의 뻣뻣한 외교를 눌렀다
 
新羅는 격동의 7세기 東아시아의 도도한 흐름을 역류시킬 만한 힘은 없었지만, 시대의 潮流를 自國에 유리하게 이용하여 분열된 민족의 힘을 하나의 깃발 아래 결속시키고, 나아가 長期 화평시대를 누리게 한 功業을 이룩했다. 다음은 지난 3월12일 동국大 경주캠퍼스 주최 심포지엄(주제: 7세기 東아시아 국제정세와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에서 발표된 李基東 교수의 주제논문(隋·唐의 帝國主義와 新羅 外交의 妙諦―고구려는 왜 멸망했는가)의 발췌이다〔편집자 注〕

李 基 東 동국大 교수
1943년 서울 출생. 서울大 사학과 졸업. 경북大 사학과 전임강사·조교수. 동국大 부교수·교수·박물관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저서: 「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비극의 군인들」, 「광개토왕릉비의 탐구(역)」, 「일본인의 한국관」, 「현대한국사학과 사관(공)」, 「백제사연구」, 「신라사회사연구」, 「전환기의 한국사학」.

激動의 7세기 東아시아―최고 수혜자는 新羅
 東아시아 역사를 전체적으로 槪觀할 때 7세기는 바로 激動의 세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특히 韓國史의 전개와 관련해서 본다면 이 未曾有의 動亂의 세기는 그 뒤 韓民族의 역사에 영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신라는 高句麗와 百濟 양국을 통합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 뒤 한국이 單一 민족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7세기 東아시아 세계를 뒤흔든 근원적인 힘은 300년 가까이 南北朝의 양대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던 중국이 隋(수)·唐(당)에 의해서 다시금 통일되어 空前의 강력한 세계제국이 출현한 데 있었다. 이 隋·唐제국은 秦(진)·漢(한)제국 멸망 이후 장기간 상실했던 東아시아 세계에서의 강대한 規制力을 행사하려고 했다. 즉 중국은 萬里長城 이북 몽골高原의 遊牧민족국가들과 서쪽의 티베트高原지대에서 투르키스탄 지역에 이르는 內陸 아시아 여러 민족국가들에 대해 본격적인 침략 전쟁에 나서 이를 승리로 장식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중국의 지배질서에 맞서 蕃臣(번신)의 禮를 끝내 거부하는 고구려에 대해 줄곧 침략 전쟁을 벌였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3國 간의 전쟁이 前例없이 복잡한 양상을 띠고 한층 더 격화되었으며, 이와 連動하여 內政面에서는 국왕의 권력 집중을 목표로 한 중앙집권적 정치개혁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이같은 對內外的인 위기상황 속에서 3國 모두 내란 혹은 쿠데타와 같은 政變을 경험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결과를 놓고 보면 이같은 7세기 東아시아 역사의 격동 속에서 최대의 受惠者는 다름 아닌 신라였다. 신라는 唐제국의 힘을 이용하여 고구려와 백제 양국의 장기간에 걸친 군사적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두 나라를 倂合함으로써 한반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최초 신라가 唐제국에 접근했을 때 豫期한 것보다 더 큰 收穫(수확)이었을지도 모른다. 과연 신라는 당시 東아시아 세계에 모처럼 造成된 복잡다기한 국제환경 속에서 어떻게 통일의 계기를 포착, 이를 自國에 유리하게 活用해 비록 「작은 규모」로나마 삼국통일의 偉業을 달성할 수 있었는가?
 
  이는 逆으로 軍事大國 고구려에 의한 보다 「큰 규모」의 한민족 통일이 挫折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한 究明작업이 되기도 할 것이다. 요컨대 7세기 東아시아 세계에서 삼국이 전개한 외교 공작과 전쟁의 眞相에 대한 理解는 우리 역사학계에 부과된 실로 중대한 연구과제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된다.
  
  
  唐太宗이 만든 空前의 대제국
 
  隋에 대신하여 618년 등장한 唐은 그 胎生의 淵源으로 볼 때 이른바 胡漢이 혼합된 제국이었다.
 
  그러던 626년 고조의 차남 李世民(뒤의 太宗)이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로 즉위하면서 唐은 종전의 守勢에서 攻勢로 대전환을 맞게 된다. 630년 태종이 東돌궐제국을 무너뜨린 뒤로부터 40년간 唐의 國勢는 바로 해가 中天에 떠 있던 시기로, 武力은 極盛에 달했고 版圖는 空前의 최대를 자랑했다.
 
  唐軍은 635년 깊숙이 靑海 河源지구에 들어가 토욕혼 왕국을 철저히 정복했고, 646년에는 돌궐 기병의 협력을 얻어 설연타 왕국을 정복함과 동시에 漠北 諸部의 항복을 받았다. 이 설연타는 태종이 직접 지휘한 唐의 대군이 安市城전투에서 교착되어 있을 무렵 고구려의 공작에 의해서 唐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唐은 燕然都護府를 설치하여 이들을 다스렸다. 한편 唐軍은 640년 8월 서쪽으로 7000여 里 떨어진 서역 투르판 분지의 高昌國을 멸망시키고 그곳을 기반으로 하여 安西都護府를 설치했다.
 
  唐은 空前의 세계제국을 자랑할 만큼 수많은 이민족을 상대로 하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때 「부르주아 역사학의 대표자」라고 박해를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은 陳寅恪이 일찍이 강조한 것처럼 唐代에는 돌궐·토번·回紇·南詔 등 주변의 여러 민족이 교대로 强盛해져서 唐제국을 위협하는 이른바 連環性을 나타냈다. 唐의 팽창 추세에 일대 쐐기를 박은 티베트 계통의 토번만 해도 唐의 대군이 고구려 침략전쟁에 열중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토욕혼의 옛 땅을 취하면서 급속히 세력을 키웠다.
 
  한편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된 후 바야흐로 신라와 唐 사이에 戰端이 열렸을 때 唐이 신라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全力을 기울이지 못한 채 676년 끝내 철군하면서 평양에 있던 安東都護府를 만주의 遼東城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던 까닭도 이 토번의 침략 위협이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678년 唐의 18만 대군은 670년의 참패 때 포기한 安西4鎭을 회복하려고 다시금 토번에 출격했으나 靑海 부근에서 역시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唐 조정은 토번 대책을 논의하는 회의에서 부득이 守勢를 취하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는데, 이 廷議에서 고종이 獨白처럼 『고구려는 遼水를 건널 수 없었고, 백제는 감히 滄波(황해)를 초월할 수 없었는데도 지난날 빈번하게 해마다 군대를 보내면서 널리 나라(의 물자)를 허비했다. 비록 지난 일이지만 나는 이를 후회한다』고 한 것은 這間의 속사정을 암시하고 있다. 
  
  
  3국의 對唐 교섭 경과
 
  여기서 우리는 신라가 唐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終局에는 血盟관계였던 唐을 상대로 하여 乾坤一擲의 대전을 벌이게 되기까지의 삼국 관계의 추이와 이에 병행하여 이들 나라가 추진했던 對唐 교섭의 경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 신라는 주로 그 立地 조건으로 말미암아 삼국 중에서 영토국가의 형성이 가장 늦었다. 더욱이 신라는 중앙집권국가를 향해 발전해 가는 道程에서 고구려의 군사적 도움을 받았고, 뒤에는 백제와 結盟하여 고구려의 남침에 공동으로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6세기에 들어와 신라는 국가의 지배체제를 크게 정비하는 한편 영토확장전쟁에 착수하여 洛東江 유역의 加耶 여러나라를 병합했고, 漢江 상류에서 하류로 진출하여 한반도 중부지방을 차지하는 등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이처럼 신라는 560년대에 이르러 백제를 제치고 고구려에 대항하는 등 삼국항쟁의 대열에서 단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이로써 복수심에 불타는 백제·고구려 양국을 상대로 국가 保衛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다행히 6세기 후반은 백제나 고구려 모두 국내문제로 분망했으므로 이렇다 할 큰 침략전쟁은 없었다.
 
  그러나 隋가 중국을 통일하고 곧이어 598년 고구려에 대한 침략전쟁을 벌인 뒤부터 삼국 간의 항쟁은 매우 격화되어 갔다. 서기 600년 5월 즉위한 백제의 武王(600∼641)은 영특한 風貌에 志氣가 뛰어난 인물로, 602년부터 地異山 일대의 신라군 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의 오랜 재위기간을 통해서 끊임없이 계속되었는데, 한편으로 그는 隋와의 외교교섭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무왕은 隋양제가 장차 고구려를 칠 낌새를 눈치채고 607년 隋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원정을 요청했다.
 
  이에 隋양제는 만족하여 무왕에게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도록 격려했다. 무왕은 611년 隋의 고구려 침략이 임박한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금 사신을 보내어 軍期를 청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 정작 隋軍이 요하를 건너자 무왕은 隋를 돕는다고 聲言하면서도 실제로는 신라 공격에 열을 올렸을 뿐이다.
 
  이처럼 利害관계의 형평을 깊이 파악하지 못한 채 국가 간의 信義에도 충실치 못한 무왕의 二重的인 외교자세는 唐이 건국된 뒤에도 되풀이 되었고, 그의 후계자인 義慈王(641∼660) 또한 변함이 없었다.
 
  그 결과 백제는 삼국 중 最劣勢인 상황에서 끝내 唐의 不信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고구려와도 관계를 개선할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다. 당시 한반도 서남부 一隅에서 어렵게 국가경영을 꾀하고 있던 백제의 처지로 볼 때 주변국들과의 和解 내지 동맹관계 구축이 절실히 필요했으나, 백제는 오로지 바다 건너 倭國과의 전통적인 우호관계의 유지에 만족했을 따름이었다. 
  
  
  고구려의 抗禮를 가만 놔두면…
 
  唐이 건국된 618년 고구려에서는 영양왕이 죽고 異母弟인 榮留王이 즉위했다. 고구려는 지난번 隋와의 전쟁으로 지쳐 있었던 탓인지 唐과 친선관계를 꾀했다. 고구려는 619년 이래 사신을 보내어 朝貢했고, 622년 唐高祖가 중국內의 고구려군 포로를 송환해 주는 조건으로 고구려 內의 중국인 포로를 돌려보내라고 요청했을 때는 이에 응하기도 했다.
 
  그 뒤 唐에서 道士가 고구려에 와서 道德經을 講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고구려에서는 唐에 유학생을 보내 불교와 도교를 배우는 등 문화교류도 행해졌다. 특히 630년 唐태종이 東돌궐을 정복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고구려는 唐에 사신을 보내어 이를 致賀했고 겸하여 自國의 封域圖를 바치는 호의를 보였다.
 
  그런데, 631년 唐의 사신이 와서 지난번 隋양제의 고구려 침략전쟁 때 죽은 중국 병사들의 유해를 파묻어 제사 지내는 한편 고구려가 戰勝을 기념하여 만든 京觀을 헐어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써 양국 간의 蜜月期는 갑자기 끝났다. 고구려는 즉각 장차의 전쟁에 대비하여 요동반도 南端의 비사성으로부터 동북쪽으로 扶餘城(農安)에 이르는 1000여 里에 달하는 장성 축조에 착수했다. 이 공사는 16년만에 완료되었다.
 
  실은 표면상의 밀월기간 중에도 唐의 조정 내부에서는 고구려에 대해 강경책을 써야 한다는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625년 3월 고구려에서 사신이 왔을 때 唐고조는 신하들에게 고구려는 지난번 隋에 稱臣하면서도 끝내 양제에게 항거하지 않았는가 하고 의구심을 나타낸 일이 있다.
 
  그러자 侍中직에 있던 裵矩는 『만약 고구려가 (당에) 抗禮한다면 四夷는 반드시 漢(중국)을 가볍게 여길 것』이라고 답변했다. 隋양제의 寵臣으로 그의 對外 정복욕을 부추긴 바 있던 배구는 隋·唐 교체기에 운좋게 살아남아서 다시금 고구려에 대한 경계심을 피력한 것이다. 
  
  
  唐太宗의 비참한 末路
 
  다만 그 이듬해 태종이 즉위하면서 隋의 멸망을 교훈으로 삼아 결코 그 前轍을 밟지 않겠다는 自戒 의식이 조정의 분위기를 지배한 결과 고구려 침략전쟁이 한 동안 지연되었을 뿐이다.
 
  唐은 640년 高昌國을 멸망시킴으로써 고구려를 제외한 모든 적대세력을 정복했다. 唐의 다음 공격목표가 고구려인 것은 명백해 보였다. 그 이듬해 태종이 보낸 陳大德은 고구려에 와서 山水景觀을 보고 싶다는 구실로 고구려 측의 안내를 받아 곳곳을 시찰했다. 이때 그가 고구려 內情을 염탐하여 復命한 기록이 「奉使高麗記」였다. 태종은 그의 보고를 듣는 자리에서 고구려 원정계획을 내비치면서, 다만 水軍이 출동할 山東지방이 피폐상태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것이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던 중 642년 10월 장성 축조공사를 책임지고 있던 淵蓋蘇文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정적 다수를 죽인 다음 軍國의 대권을 장악한 사건이 발생했다. 태종은 이로써 고구려를 침략할 絶好의 구실을 포착한 셈이었으나, 隋양제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중신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듬해 고구려의 新王을 冊封하는 한편 고구려의 요청을 받아들여 道士 8명을 보내 주기까지 했다.
 
  다만 그 직후 새로운 사태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태종은 마침내 침략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그것은 643년 9월 신라 사신이 와서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신라의 入貢路를 막는다고 호소한 데서 발단되었다. 그러자 唐은 고구려 왕에게 國書를 보내어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할 것과 만약 다시 신라를 친다면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때 신라 전선에서 돌아온 연개소문은 唐의 사신을 만나 『지난날 隋가 침공했을 때 신라가 빼앗아 간 고구려 땅 500里를 돌려주지 않는 한 신라 공격을 중지할 수 없다』고 태종의 제의를 거부했다. 그 뒤 다른 사신이 평양에 와서 연개소문을 설득하려 하자 그는 사신을 토굴 속에 연금하기까지 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唐태종은 신하들의 諫言을 물리치고 全軍에 동원 준비 명령을 내렸다. 直諫으로 유명한 魏徵은 이미 643년 정월에 죽었다. 半年 이상의 준비 끝에 645년 4월 요하를 건넌 唐의 대군이 安市城전투에서 교착되고 마침 冬期가 다가오자 唐태종이 참담한 모습으로 본국에 귀환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태종은 그 뒤 持久전략으로 전환하여 647년과 648년에 군대를 보내 고구려를 쳤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649년 5월 보다 큰 규모의 침략군을 준비하다가 죽었다. 이처럼 거듭된 고구려 침략전쟁의 실패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唐태종의 이른바 「貞觀의 治(627∼649)」라는 空前의 盛業이 有終의 미를 거두지 못한 채 파탄을 보인 끝에 종말을 고한 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고구려는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戰士국가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채 20년이 못 되어 고구려는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新羅 同盟外交의 승리
 
  신라는 7세기 벽두부터 백제와 고구려 양국으로부터 쉴 새 없이 침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倭國과의 관계도 악화되어 있었다. 倭國은 신라를 치려고 602년 2만5000명의 대군을 편성하여 九州 北端의 筑紫(축자: 츠쿠시)에 집결, 渡航준비에 들어갔다. 이 신라 침공계획은 이듬해 2월 倭國 군사령관이 병사하면서 취소되었다.
 
  603년 8월 고구려軍이 현 서울 북방에 쳐들어왔을 때는 眞平王(579∼632)이 친히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出征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적대세력으로 완전히 포위된 신라가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중국 대륙세력과 동맹을 맺는 길 외에는 달리 없었다.
 
  신라는 백제·고구려와 마찬가지로 隋에 사신을 보내 修交했다. 그런데 신라는 당시 西學熱에 불타 중국을 다녀온 留學僧을 통해서 매우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圓光法師는 隋가 중국을 통일한 589년 봄에 남조인 陳에 유학갔다가 10여 년간 대륙의 정세변동을 현지에서 목격한 뒤 600년 본국 사신을 따라 귀국했다. 그가 국가 保衛전쟁시대의 젊은이를 위한 處世訓으로 世俗5戒를 제시한 것은 유명한 사실인데, 한편 그는 608년 진평왕의 명에 의해서 隋양제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요청하는 國書를 쓰기도 했다.
 
  신라는 3년 뒤 隋양제에게 이 「乞師表」를 보내 그의 결단을 촉구했다. 隋나라 군대가 고구려 1차 침략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이듬해인 613년 隋에서 사신이 왔을 때 원광은 皇龍寺에서 베풀어진 百高座에 나아가 講經하기도 했다.
 
  唐이 건국한 뒤 621년부터 신라는 唐에 사신을 보내어 修交했다. 신라는 625년 唐에 대해 고구려가 唐으로 가는 서해안 항로를 막는 한편 자주 국경을 침입한다고 호소했다. 이른바 貢道의 차단은 唐의 冊封질서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다. 신라는 위기상황에 봉착할 때마다 唐에 대해 이 貢道 차단을 호소함으로써 唐의 居中調整 내지 고구려·백제에 대한 군사적 介入을 유도했다.
 
  진평왕의 뒤를 이은 善德女王(632∼647) 때 신라의 대외적인 위기는 한층 고조되어 갔다. 특히 642년 8월 백제군에 의해 서부의 요충인 大耶城(합천)이 함락됨으로써 신라의 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金春秋는 姨母인 여왕의 허락을 받고 고구려의 힘을 빌려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해 敵地인 평양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고구려 寶藏王이 竹嶺 서북의 땅을 돌려 주지 않는 한 援兵을 보낼 수 없다고 고집하여 모처럼의 비밀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신라는 643년 9월 唐에 사신을 보내어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黨項城으로 대규모로 침공할 듯하다고 하면서 구원병을 요청했다. 645년 5월 唐태종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고구려 영내로 쳐들어오자 신라는 이에 호응해서 3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후방으로 쳐들어 갔다. 하지만 唐軍이 9월 안시성 전투에서 敗退하여 고구려의 승리로 종결되자 신라의 위기는 다시금 고조되었다. 고구려의 대대적인 反擊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백제는 신라군이 출동한 틈을 타서 신라의 서부 국경지대로 쳐들어와 7개 城을 탈취했다.
 
  이 해 11월 여왕 반대파의 수령 毗曇(비담)이 귀족회의 의장인 上大等에 취임했는데, 그는 14개월 뒤인 647년 정월 여왕이 정치를 잘 하지 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어쩌면 그는 和白회의에서 폐위를 주장하다가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군대를 일으켰던 듯하다. 金庾信이 지휘하는 관군은 王京 안에서 반란군과 대치하다가 1월8일 여왕이 죽은 지 10일 뒤인 17일 반란군을 진압하고 비담을 처형했다. 
  
  
  唐태종과 金春秋의 비밀약정
 
  내란 중에 즉위한 眞德여왕(647∼654)때는 김춘추와 김유신이 정계를 주도하여 親唐策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 신라는 648년 세 차례나 唐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때 김춘추는 唐태종과 단독 회견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태종에게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까지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唐이 나선다면 이에 신라가 기꺼이 협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唐태종은 김춘추의 제안에 동의를 표했다.
 
  이렇게 하여 이윽고 양국 간의 비밀협상이 체결되었다. 이때까지 김춘추의 외교적 노력은 고구려·백제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켜야 하겠다는 것뿐이었으나, 이 唐과의 군사동맹을 계기로 하여 삼국통일의 전망을 갖게 되었다. 羅·唐동맹의 원칙은 649년 6월 唐의 高宗이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에 한때 약화되는 듯했으나, 결코 폐기되지 않았다. 고종은 654년 일본의 遣唐大使를 접견했을 때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을 받아 어려움에 빠진 신라를 돕기 위해 出兵을 명하는 내용의 璽書를 孝德천황에게 전달하게 했다. 특히 654년 3월 김춘추(太宗武烈王)가 즉위하면서 동맹을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655년 정월 고구려는 말갈 기병부대를 앞세워 신라의 북쪽 경계로 쳐들어와 33개의 성을 함락했는데, 이에 무열왕은 강력히 唐에 援兵을 요청했다. 이로써 唐은 648년 이후 중단했던 고구려 침공을 재개했다.
 
  그러던 659년 4월 백제가 신라 국경지대로 침범해 온 것을 계기로 무열왕은 唐에 사신을 보내어 백제에 대한 양면공격을 제안했다. 唐은 對고구려 전략상 그 背後에 근거지를 확보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 마침내 대대적인 백제 침략전쟁을 결행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 羅·唐 연합군에 의해서 백제가 멸망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무열왕은 661년 6월 그 위대한 生을 마감했다. 그리하여 태자이던 金法敏(文武王)이 왕위에 올라 삼국통일의 大業을 물려받았다. 문무왕은 즉위하자마자 군대를 동원하여 唐과 함께 고구려 정복에 나섰다.
 
  이윽고 연개소문이 665년 죽고, 그 세 아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져 고구려는 自滅의 길을 걷게 된다. 즉 부친의 자리를 계승한 장남 淵男生이 두 아우의 박해를 받은 끝에 적국인 唐으로 망명하여 唐 침략군의 嚮導(향도)가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결국 고구려는 唐의 침략군에 가세한 신라군에 의해서 평양성이 함락되어 668년 9월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唐은 고구려의 故地(고지)에 9개의 도독부와 42개의 州, 100개의 縣을 설치하고, 평양성에 安東都護府를 두어 이를 통제하게 했다. 이보다 앞서 백제 부흥운동군의 진압으로 한창 분망했던 663년 4월 唐은 신라 영역을 鷄林州로 하고 문무왕에게 신라 왕의 官號 외에 추가적으로 계림주대도독이라는 일종의 ♥的(기미적) 관호를 준 일이 있다. 이는 고구려·백제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백제의 토지는 신라의 것으로 한다는 648년의 비밀협정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행위인 만큼 신라로서는 首肯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라는 고구려 멸망 직후부터 공공연히 백제 故地로 진격하여 이를 접수하는 한편 고구려 부흥운동군을 포섭하여 對唐항전에 이용했다. 670년 신라군은 고구려 부흥운동군과 합세하여 압록강을 건너 唐軍의 前哨인 말갈 기병부대를 격파했다. 이렇게 內燃化된 양국 간의 갈등은 671년부터 본격적인 전쟁상태로 돌입했고, 몇 차례에 걸친 격전 끝에 신라의 승리로 끝나 676년 2월 唐은 안동도호부를 遼東故城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해 11월 薛仁貴가 지휘한 唐軍은 최후로 錦江 河口로 쳐들어 왔으나, 施得이 지휘한 신라의 船兵은 크고 작은 22회의 전투 끝에 승리하여 大團圓의 幕을 내렸다. 
  
  
  中天의 태양이 기울기를 기다렸다면…
 
  7세기 東아시아 세계에서 主軸을 이루고 있던 나라는 隋·唐제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唐태종이 유목민족의 제국이던 서북방의 돌궐을 정복한 630년부터 마침내 670년 서쪽 티베트 민족의 吐蕃과 싸워 참패를 맛볼 때까지 40년간은 중국의 對外 팽창이 역사상 절정에 달한, 진실로 漢族 光榮의 시대였다. 태종이 「天可汗」이란 칭호를 갖고 사방에 군림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중국 황제는 동시에 四夷 공동의 大君長이기도 했다. 동시대 唐의 고위 관료들이 중국을 태양, 주변의 「夷狄」을 列星에 비유한 것도 이 같은 자부심의 발로였다고 생각된다.
 
  중국대륙에 형성된 새로운 정세의 변화는 당시 고조되어 가고 있던 삼국 간의 항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쳐 전쟁은 激化一路에 있었으며, 이와 병행하여 국가 간의 외교전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세기 초 독일의 군사전략가인 클라우제비츠(Karl Von Clausewitz)는 『전쟁은 다른 수단을 갖고 행하는 정치의 계속일 뿐』이라고 정의했는데, 실제로 고구려의 경우를 보더라도 對隋·對唐전쟁의 全기간을 통해서 외교전이 그 대부분을 차지했다. 隋양제가 대군을 몰고 쳐들어 왔을 때 고구려의 主將 乙支文德은 외교적 수완을 한껏 발휘하여 隋를 마음대로 조종했고, 唐의 대군에 맞서 안시성 방어전을 벌일 때 연개소문은 唐에 복종하고 있던 북방의 薛延陀(설연타)로 하여금 離叛하도록 策動했다. 이처럼 세계 역사상 유수한 戰士국가였던 고구려조차 결코 전쟁 一邊倒로 맞선 것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외교의 힘을 중시했다.
 
  그런데도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唐이 한창 中天에 높이 뜬 태양인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 660년대의 激流에서 잠시 발을 뺄 적절한 계기를 포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실 唐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2년 뒤 토번과의 싸움에서 참패를 당한 이래 678년까지 참패를 거듭하여 바야흐로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게 되었다. 唐이 신라와의 전쟁을 계속하지 못한 채 물러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뒤 武后 집정시의 名宰相인 狄仁傑(적인걸)이 692년 安西의 4鎭을 포기할 것을 상소하는 가운데, 하늘이 낳은 四夷는 모두 先王이 封한 「域外」라고 강조한 데서 알 수 있듯이 地大物博한 중국도 일단 전성기가 지나자 현상유지에 급급하는 형편이었다. 中天에 뜬 태양은 어느덧 기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좀더 유연한 자세를 취하여 武后 집권 초기의 신경질적인 고구려 침략 야욕을 조금만이라도 완화시켰더라면 머지않아 對外 위기가 사라져서 그 뒤 오랫동안 안녕을 謳歌했을 터이다.
  
  
  신라의「앙큼한 동맹외교」
 
  일찍이 朴殷植은 연개소문이 독립자주정신과 對外경쟁의 膽略(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제1인자라고 예찬한 바 있다. 文一平 또한 연개소문이 철두철미 「힘의 외교」로 일관하면서 고구려의 우렁찬 氣魂을 구현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唐의 힘을 이용해서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김춘추에 의해서 대표되는 신라의 「앙큼한 사상」을 깎아 내리지도 않았다. 그는 唐의 세력을 이용한 뒤 그것을 다시 몰아낸 신라외교에서 「活殺自在한 妙諦」를 볼 수 있다고까지 신라인의 투철한 국제적 慧眼과 외교적 역량을 찬양했다.
 
  확실히 김춘추와 文武王 父子는 당시 東아시아 세계의 도도한 흐름을 逆流시킬 만한 힘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시대의 潮流를 自國에 유리하게 이용하여 분열된 민족의 힘을 신라의 깃발 아래 결속시키고, 나아가 장기간 和平世界를 누리게 한 功業은 찬양할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는다.●
월간조선 2000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