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美軍을 집으로 불러들이지 못하는가
【해외논단】브루스커밍스의‘이제는 한국전쟁을 끝내야 한다’
《이 글은 미국의 저명한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시사지 ‘월간 애틀랜틱’97년 2월호에 기고한 글 「이제는 한국전쟁을 끝내야 한다」를 한국어 판권소유자인 ‘창작과 비평사’의 허락을 얻어 전문 번역한 것이다.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해외의 한국학 연구자들 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중 한 사람인 커밍스 교수는 이 글에서 1993년 초 북한 핵문제가 본격화된 이후의 사태진전을 나름의 수정 주의적 시각에서 풀이하면서 미국 언론의 한반도문제 보도행태를 비판하는 한편, 결론적으로 남북의 평화체제 전환을 전제로 한 주한미군 철수론을 주장하고 있다. 국내에 일반화되어 있는 대북한 인식과는 상당 부분 대조되는 커밍스 교수의 독특한 시각은 찬반여부를 떠나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다. 커밍스 교수는 현재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국제비교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이 글을 포함한 그의 최근 저작 「한국의 몫:근대사」가 「창작과 비평사」에서 변역돼 올해 출간될 예정이다.》
1994년 6월, 또 한 차례의 한국전쟁이 거의 터질 뻔했다. 그때 만약 전쟁이 일어났다면, 남북한 모두에 대한 우리의 무지(無知)는 50년대에 일어났던 소위 「잊혀진 전쟁」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워싱턴과 평양은 맹목적으로 모호한 목표를 위해서 살육을 계속하는 전쟁에 뛰어들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세계의 평화도 위협받았을 것이다.
1994년의 문제는 평양에서 북쪽으로 60마일 정도 떨어진 영변의 원자로였다. 영변은 그 격리된 지리적 위치 때문에 15세기 초까지 군사 요새로 활용됐고, 그 후에는 양반들의 유람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오랜 세월동안 비단 생산지였던 영변은 그 후에도 대규모 합성섬유(주로 레이온) 산업으로 명성을 유지했다. 때문에 미국 정보기관의 상당수 위성관측 담당자들도 처음에는 이 곳의 핵재처리 시설을 단순히 섬유공장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의 텔레비전 뉴스 시청자들은 대부분 영변단지를 보여주는 필름을 보았겠지만, 화면에서 천장에 붙어 있는 슬로건이 무슨 뜻인지는 설명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모택동주의자들의 용어인 「자력갱생」을 말 그대로 풀이하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재건한다』는 뜻이다.
자력갱생은 북한의 국가정책이며, 영변단지 건설 초기부터 그 정당화 논리로 제시된 말이다. 즉, 북한의 핵발전은 일본과 남한이 수십 년 전부터 해온 것처럼 국내에서 생산되는 석탄과 해외에서 수입해오는 석유에 의존해온 에너지체계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한의 흑연 원자로는 북한에 매장돼 있는 우라늄을 원료로 사용할 수 있는 기종이다. 그러나 이 원자로는 플루토늄도 생산할 수 있다. 즉 약간의 정련과정만 거치면 핵무기 제조용 고순도 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변은 「칼더 홀」(Calder Hall)이라는 이름의 30MW급 50년대 영국제 흑연 원자로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아마도 1979년 전후에 건설이 시작돼 1986∼87년부터 가동됐을 것이다. 당시에는 아무도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북한은 핵분야의 국제 감시자인 국제원자력기구(IAEA) 조직원들을 초청해서 시설을 보여줬지만, 국제원자력기구는 그 때까지도 북한이 8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이런 식의 난맥상으로 그후 2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다.
1989년 미국의 스파이 위성은 영변 원자로가 연료봉을 교체하는 과정에 장기간 가동이 중단되고 있다는 사실을 탐지했다. 이 때 위성 은 50∼2백MW 급의 또 다른 원자로 시설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도 포착했는데, 이 원자로는 예정대로 공사가 진행된다면 90년대 초반부터 가동될 것으로 분석됐다.
전문가들은 또한 주변 건물을 검토한 결과 그것이 재처리시설이라는 심증을 굳혔다.
아직도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무관심은 걸프전쟁이 터지고, 탈냉전의 세계가 「국제사회의 악당」인 북한에 대한 새로운 카테고리를 설정할 때까지 계속됐다.
미국 관점에서 볼 때 북한은 항상 서방이 규정한 국제통제 체제의 범위 바깥에 있는 이단자였다. 구소련 붕괴로 인해 북한의 국제적 위치는 더욱 이완됐다. 한편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은 다루기 힘든 제3세계를 모니터할 필요성을 양극시대 때보다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됐고, 북한은 문제아 중에서도 두드러진 존재였다.
미국정부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영변단지를 건설한 목적이 무엇이냐는 점에 대해서 의견이 갈렸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핵폭탄을 만들지 않았고 아마 그것을 원하지도 았았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은―특히 중앙정보국(CIA) 사람들은―북한이 1∼2개의 핵폭탄을 갖고 있고 더 많이 만들려고 한다는 주장을 고수했다.
어떤 소수그룹은 북한에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기술과 노하우가 없다고 생각한 반면 다른 이들은 북한은 그런 폭탄을 만들 의도도 없었고 단지 핵발전 분야에 전념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이들은 북한 원자로가 순전히 핵폭탄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 6개월마다 원료봉을 교체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견해들은 모두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 위성사진, 스파이 비행기의 정찰활동, 그리고 북한의 과학기술 수준에 대한 광범위한 평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의심할 나위없이 북한의 강경파들은 약소국의 핵억지력(nuclear-deterrence) 논리에 매료됐다. 이는 즉 외부세계가 그럴 듯하다고 믿을 정도로 핵관련 활동을 꾸준히 하되 핵무기 보유 사실을 공개하지는 않음으로써 남한이나 일본 같은 적들이 핵무기 개발을 추진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다(남한 역시 이스라엘의 핵억지력 확보 사례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문서로 나와 있다).
이런 점은 왜 영변단지가 첩보위성에 탐지될 수 있는 지상에 건설됐는가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관측자들은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영변단지에 우려 섞인 눈길을 보내고 있었지만, 위험신호는 걸프전이 끝날 때까지 울리지 않았 다. 1991년 레슬리 겔브(Leslie Gelb)는 「뉴욕타임스」지에서 북한이 「다음 차례의 이단아」가 될 것이며, 「스커드 미사일과 1백만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사악한 독재자가 지배하는」 북한은 「향후 몇 년 안에」 핵무기를 갖게 될 것이라고 썼다.
말하자면 북한은 또 하나의 이라크라는 것이다.
「북한」이 담고 있는 함의
여기서 역사적인 관점이 유용하다고 본다. 우리는 북한이 한국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953년의 한국전 종결은 단순히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후로 미국과 북한은 기술적으로는 전쟁상태로 남아 있는 셈이라는 것이다. 평화협정이 아닌 휴전은 다만 열전(熱戰)을 종결시켰을 뿐이다. 따라서 지난 40년간 미국인들이 비무장지대를 경계삼아 대치해온 북한이라는 존재는 (미국인들의 인식세계에서 볼 때) 즉각 재구성될 수 있는 대상이다.
이제 북한을 묘사하는 수식어들은 새로워졌다. 그러나 냉전시절 북한을 악마화시켜 바라보던 논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즉 「북한」이 라는 하나의 간결한 패키지를 통해서 미국인들은 오리엔탈 반공주의자 인종주의자 무법자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시사평론가들 중에서 찰스 크로서머(Charles Krauthammer)는 그러한 논리를 전파하는 인물들 중 첫손에 꼽힌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93년 11월 「워싱턴 포스트」지에 쓴 칼럼에서 김일성에 대해서 『전보를 활용하는 시대의 칭기즈칸, 노예국가의 신이자 왕, 호전적이고 편집증적이며 단호한』 인물로 묘사했다.
미국의 거의 모든 주요 언론들은 지난 수십년동안 거의 표준화되다시피 한 북한정보나―그런 정보는 종종 서울의 정보기관이 해외 언론에 공급한 것들이다―혹은 기껏해야 절반의 진실밖에 담고 있지 않은 정보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왔다.
제임스 웨이드(James Wade)는 「한 사람만의 한국」(One Man’s Korea, 1967)에서 『엄청난 군비증강이 이뤄지고 있다는 징후가 보인다. … 북한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투입할 경우 4시간이면 서울에 올 수 있다』고 썼다. 웨이드는 이 얘기를 1960년 미 육군에서 일하는 엔 지니어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정보장교로 한국에 파견됐다가 나중에 주한미군 사령관이 된 리처드 스틸웰(Richard Stilwell) 장군은 자기 삶의 상당 부분을 비무장지대 가까이 배치된 북한군이 몇시간 혹은 며칠이면 서울에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널리 전파하는 일로 소 비했다.
1968년 북한에 의한 미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이래 미국 기자들은 북한군의 70%가 휴전선 가까이에 집중 배치돼 있다는 사실을 습관적 으로 보도하곤 했다. 그러나 90년대의 미국 기자들은 그런 케케묵은 얘기에 싫증을 내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남한군의 몇 %가 북쪽에 적대적으로 대치하고 있는지」 물어볼 호기심도 갖고 있지 못했다(1994년 6월 「타임」지에 실린 지도는 거의 90%에 달하는 미군과 한국군이 비무장지대 35마일 안쪽에 배치돼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걸프전 이후 몇 년 간 워싱턴과 평양 사이의 위기는 정기적으로 고조돼왔다. 특히 11월에 그런 예가 많았다. 미 국방부 관리들과 남한의 군관계자들이 서울에서 고위급 접촉을 갖는 게 주로 11월이었기 때문이다. 1991년 11월 리처드 체니(Richa rd Cheney) 미 국방장관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한 국방부 관리가―알려지기로는 콜린 파월 장군이―『북한이 벌써 사막폭풍작전을 잊었다면, 지금이 그것을 재방영할 좋은 기회』라고 말해서 북한에 대한 압력을 더하기도 했다.
당시 「시카고 트리뷴」지는 두 차례에 걸쳐 영변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했고, 대부분의 방송·신문기자들은 『북한이 2년 혹은 그 이내에 핵무기를 갖게 될 것』이라는 정보기관의 평가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곧 북한에 스포트라이트가 다시 집중됐다. 1992년 1월 조지 부시가 미국 대통령으로서 필수 코스인 비무장지대를 방문했고, 기자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 미국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서 『국제원자력기구는 엄중하게 보호되고 있는 북한의 군사기지를 사찰해야 할 것』이 라는 취지의 기사들을 내보냈다.
그들의 논리는, 만약 숨기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부분이 위성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걸프전 이후 이라크를 사찰해본 결과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1992년 11월에는 미국의 모든 언론이 대통령선거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 1년 뒤, 다시 한 번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언론을 휩쓸었다. 레스 애스핀 국방장관이 서울을 방문한 직후인 11월5∼7일의 주말이었다. 「시카고 트리뷴」지는 11월6일자 머리기사 제목을 「미국, 북한의 대남 공격을 우려」라고 붙였다.
통신사들은 애스핀장관과 함께 한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 동승한 한 관리의 말을 인용, 북한이 군사장비와 병력을 비무장지대에 전진배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북한이 핵폭탄을 완성할 시기가 임박한 것으로 보였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면 그것은 「죽어가는」 김일성 혹은 「김일성보다 더 과격하고 아마도 정신병적인」 김정일에 의해서 시작될 것으로 미국 관리들은 우 려하고 있다는 내용이 언론을 장식했다.
그러나 「시카고 트리뷴」지의 기사 끝부분은 다른 시나리오를 싣고 있었다. 즉 국무부의 한 취재원은 북한이 군대를 국경 가까이 집결시키는 이상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지도 애스핀의 말을 풀이하면서 『북한이 플루토늄을 생산하거나 재처리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고 썼다. 김정일의 정신상태에 대해서는 여러 취재원들이 침묵을 지켰다.
남한의 정보기관은 지난 25년 동안이나 정치에 깊숙이 관여해온 김정일에 대해서 불안정하고 아마도 정신병적인 인물일 것이라고 묘사해왔던 터였다.
같은 주말, 미국 언론들은 북한이 핵무기를 거의 완성했고 병력의 70%를 남한과 접한 국경에 배치하고 있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일요일, 클린턴대통령은 「언론과의 만남」(Meet the Press) 프로그램에서 『남한에 대한 어떤 공격도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동안 좌에서 우, 최악에서 최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미국의 언론이 비슷비슷한 북한 기사들을 써왔다. 그러나 그 모두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과 가정에 기초한 것들이었다. 여기서 1993년 11월의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뉴스위크」지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탈냉전의 세계가 당면한 가장 위협적인 시나리오 중 한 가지는, 경제적으로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고 그 어느 때보다 고립돼 있는 북한이 그들의 꾸준한 핵무기 개발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는 서방의 설득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 대신 북한은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 다는 경고를 보내고, 이에 즉각 반응해서 미 국방부 고위관리가 서울을 방문한다.
70%의 병력이 한걸음이면 뛰어넘을 수 있는 비무장지대에 전진 배치돼 있는 북한군은 전투경계 태세에 들어가고, 평양의 공산당 간부들은 급하게 비상회의에 참석하려고 모여든다. 지난 주 한국에서는 이런 악몽이 거의 현실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찰스 크로서머는 「워싱턴 포스트」지에 이렇게 썼다.
『텔레비전 카메라가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진짜 위기가 잉태되고 있다. 단일 사안으로서 가장 위험한 문제, 즉 북한의 핵무장은 아직 우리의 레이더 스크린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곧 나타날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호전적이고 편집증적인 정권의 손에 핵무기가 들려 있는 한 어느 누구도 편하게 잠을 잘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의 핵폭탄은 죽어가는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 아니면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경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에 의해 관리될 것이다. … 예측할 수 없는, 아마도 정신병적인 김정일이 핵무기를 손에 쥐게 되는 상황은 핵시대의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중 미친 핵전략가의 이름에서 유래된, 전면 핵전쟁 추진론자─역자주)가 나타난 격이라고 할 수 있다』
v1992년 말경 북한 핵문제 보도에 있어서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던 「뉴욕타임스」지의 데이비드 생어(David Sanger) 기자는 이렇게 썼다.
『세계에서 가장 위협적인 나라가 지금 냉전시절의 동맹을 잃어버린 채 아시아 최대의 위협요인으로 간주되는 자신의 핵무기 프로그램 을 방어하려 하고 있다. 이 곳 한국에 주둔한 4만명의 미군 사령관 로버트 리스카시(Robert W. RisCassi) 장군은 북한은 외부 폭발할 수도(explode) 있고 내부 폭발할 수도(implode) 있다고 말했다.
리스카시장군은 스탈린주의적인 김일성정권이 경제난 식량난 등 구석으로 계속 몰리는 상황에서, 이 나라가 평화적으로 바뀔지 아니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공격적으로 나올지에 대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부시행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지난 주 북한이 이미 원시적인 핵무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플루토늄을 확보했다고 말했다. … 민간 항공기를 폭파하고 남한의 정부 각료 를 살해한 나라가 생존을 위해서 최후의 일격을 가할 것인가 하는 점이 모두를 두렵게 하고 있다』
그로부터 다섯달 후 생어는 「뉴욕타임스」지에 또 이렇게 썼다.
『북한을 모니터하고 있는 전문가들은 이 나라가 지금 대형 원자로의 원료로 사용하고 있는 50t의 우라늄을 핵무기용으로 사용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 50t이면 2∼3개의 핵폭탄 생산에 충분한 양이다. … 리스카시장군은 북한이 총체적인 절망감 혹은 내부적 인 불안정으로 인해 통제불가능한 상태에 빠지면서 대남 공격을 개시할 가능성을 우려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1993년 11월 생어는 다시 「뉴욕타임스」지에 이렇게 썼다. 『고위급 군사 관계자는 오늘밤 평양이 계속 국제 핵사찰을 거부하 고 있는 것은 여러 면에서 보스니아보다 훨씬 어렵고 위험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 북한이 근년에 핵 폐기물로부터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는 증거가 있으며, 아마도 그것은 한 개 이상의 원시적 핵무기를 만들기에 충분한 양일 것이다』
북한이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은 1946년 이래 당연시돼왔다. 김일성은 그 해 2월 권력을 장악했고, 그 이후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경고가 계속 나왔다. 또 북한이 한 바구니밖에 안되는 경제규모로 붕괴에 임박해 있다는 사실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래 기초적인 사실처럼 돼왔다.
언론인들은 일상적으로 북한이 핵사찰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집중 보도해왔다.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생어기자의 세 번째 기사(「평양, 국제사찰 계속 거부」)가 나왔을 무렵, 북한은 1992년 5월부터 93년 2월 사이에 국제원자력기구의 영변지역 사찰을 여섯 차례나 허용 하고 있었다. 북한은 아마도 탈식민 국가들 중에서 국가주권에 가장 예민한 나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 하에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받아들였고, 국제원자력기구는 미국이 북한 영토에 대한 위성정찰로 얻은 정보를 통상적으로 받아서 활용하는 기구이다.
생어기자가 위에서 인용한 세 번째 기사를 쓰기 하루 전, 그는 레스 애스핀의 보좌관이 『우리는 북한이 플루토늄을 추출하거나 재처 리했다는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고 썼다. 생어는 여기에 『과거 CIA는 북한이 이미 최소한 한 개의 원시적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갖고 있다고 의심했다』고 덧붙였다.
즉 생어는 과거 CIA가 품고 있던 의심을 나중에 「증거가 있다」고 바꿔버린 셈이다.
여기서 핵심은 북한이 괜찮은 나라라거나, 북한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거나, 북한이 존경할 만한 언론정책을 갖고 있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북한은 지난 반 세기 동안 과장에 과장을 더해왔고, 심지어 진실이 더 유용했을 경우에조차 거짓말에 거짓말을 보태왔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우리가 공산정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미국처럼 목청 큰 민주주의의 나라에서 이렇게 장님처럼 남의 흉 내만 내고, 근본적으로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언론보도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으로 변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보도행태는 통상적으로 뉴스 앵커들과 대표급 기자들의 스타성, 흐르듯 스쳐지나가는 매일매일의 텔레비전 뉴스 등 미국의 언론 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설명되고, 이 때문에 미국의 언론인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사실에의 접근 뿐 아니라 그와 함께 오는 권력과 명예를 추구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자들의 글은 비양심적일 정도로 짧게 쪼그라들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간단히 말해서, 한국과 미국의 비대칭성이다. 즉 지난 50년 동안 미국은 한국에 모든 것을 의미했지만, 한국 은 지금도 미국에 아주 작은 부분으로밖에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언론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미국 기자들이 한국의 상황을 위기라고 보지 않는 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북한의 진짜 목적이 핵무기 개발이었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북한은 거기에 대한 나름의 정당화 논리를 분명하게 내세울 수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북한은 핵억지력을 가지려고 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91년부터 94년까지 그 많은 언론 보도를 접하 면서, 나는 평양측이 끊임없이 주장하곤 했던 내용을 정면으로 다룬 기사나 방송보도를 하나도 본 기억이 없다.
즉 북한은 지난 수십년 동안 주기적으로 미국의 핵위협 혹은 핵 억제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점이다.
미국은 한국에 핵무기를 도입한 장본인이며, 이는 일차적으로 쉽사리 끓어오르곤 하는 남북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50년대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북한에 대해서 항상 경계하는 동시에 남한의 이승만대통령이 먼저 전쟁을 개시할지 모른다는 점도 걱정했다.
당시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핵무기를 수단으로 양쪽 모두를 견제하려고 했다. 그는 이승만이나 김일성같이 성마른 사람들도 한반도에서 핵무기가 터진다면 전쟁놀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1958년 1월 미국은 핵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280mm 포와 어네스트 존 핵장착 미사일을 남한에 배치했고, 1년 뒤에는 매터도 크루즈 미 사일이 배치됐다. 이에 따라 한미 방위전략은 어떤 전쟁이든 개전 초기에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전제 하에 수립됐다.
즉 「H+1」이란, 한 전직 주한미군 사령관의 말에 따르면, 대규모 북한군이 비무장지대 남쪽에 대한 공격에 성공할 경우 개전 한 시간 이내에(더 가능성이 높기로는 몇 시간 이내에)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연례적인 팀스피리트 훈련에는 핵전쟁이 터질 경우의 리허설이 포함돼 있었다.
북한은 이에 대해서 병력·군수물자 집결지에서 탄약공장, 전투기 격납고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군사시설을 지하나 산 위의 요새에 건설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는 북한군이 핵폭탄의 파괴력을 피할 공간을 넓혀간다는 점에서 미국에는 곤란한 점이었다.
1968년 미국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된 사건 이래로 한반도에서 일어난 소동들은 거의 예외없이 핵전쟁 위기를 고조시켰다. 심지어 1976년의 우스꽝스러운 「나무치기사건」(도끼만행사건)도 거의 전쟁 일보 전까지 치달았다(비무장지대 안에서 포플러 두 그루의 가지 를 제거하던 미군 두 명을 북한군이 살해한 것이 사건의 개요다). 당시 미군과 한국군은 1953년 이래 처음으로 고도의 경계태세에 들 어갔고, 대치기간 한반도 전역은 미 군사력으로 뒤덮였다. 항공모함이 한반도 해역에 들어왔고, 괌에서 발진한 B-52기 편대가(B-52는 핵무장이 가능하다) 비무장지대를 향해 비행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방향을 돌리곤 했다.
그것은 미친 듯이 군사화돼 있는 비무장지대의 긴장 상태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예였다.
빌 클린턴 대통령 취임 이후 1994년 가을까지 2년간 워싱턴과 평양 사이에는 마치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날 것같은 위기가 계속됐다. 미국 언론은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를 선언한 1993년 3월12일부터 위기가 시작됐다고 보았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은 서울과 워싱턴이 팀스피리트 전쟁게임을 계속하겠다고 발표한 1월25일부터 위기가 시작됐다고 본다.
그보다 1년 전 조지 부시는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는데, 그것이 93년 초에 번복된 것이다.
그로부터 몇주일 후 신임 CIA 국장 제임스 울시(R. James Woolsey)는 핵무기 확산문제와 관련해서 『현재로서 우리의 가장 심각한 걱정거리는 북한』이라고 증언했고, 미 전략사령부 사령관인 리 버틀러(Lee Butler) 장군은 과거 소련으로 향했던 전략 핵무기의 방 향을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그 일부를 북한을 목표로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발표했다.
3월 중순에 시작된 대규모 「전쟁게임」에는 수만명의 미군병사가 남한측 병사들과 함께 참가했다. 여기에는 B-1B 폭격기, 괌에서부터 날아온 B-52, 그밖에 크루즈 미사일을 적재한 많은 해군 함정들도 동원됐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 했던 것이다. (신동아 1997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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