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안티조선논쟁
총정리 안티조선논쟁
시시비비
조선일보 거부운동인 안티조선운동이 지식인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 운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언론자유 침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안티조선측은 일종의 ‘소비자운동’이라고 맞선다. 안티조선운동의 전개과정과 주요 논점, 전망을 살펴본다.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안티조선. 말 그대로 조선일보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이 운동의 불길이 예사롭지 않게 번지고 있다.
이동복 전의원에게 물어봤다.
-안티조선 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극좌는 극좌대로 가는 것 아니냐. 기본적으로 언론 탄압이자 언론 자유에 대한 부정이다. 사시에 맞게 신문을 만드는 건 그 신문의 권리이자 의무다. 안티조선운동은 권위주의를 비판하면서 또다른 권위주의를 들이대는 모순을 안고 있다.”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라는 주장에 대해선.
“특정 언론에 대한 선호나 배척은 개인의 선택 문제지 집단의 문제가 아니다. 조선은 보수정론지라는 본성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독자들이 판단할 문제다.”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참여연대 손혁재 협동사무처장에게 물었다.
-언론자유를 침해한다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안티조선 운동은 일종의 소비자운동이다. 언론 소비자 입장에서 불량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이니 언론자유 침해와는 상관없다.”
-왜 하필 조선일보인가.
“‘최장집 사건’과 총선시민연대 활동과정에 드러났듯 조선일보는 가장 극우·보수적 행태를 보이는 신문이다. 그 영향력을 줄여 우리 사회가 올바른 길로 가도록 해야 한다.”
대전 유성고 3학년 한윤형군. 조선일보 주최 논술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한군은 지난 8월21일 조선일보 인터뷰를 거부해 화제가 됐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인터넷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해왔으며 평소 지식인의 조선일보 기고를 반대해왔기 때문에 인터뷰에 응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특정 언론사가 주최한 대회에서 수상자가 그 언론사의 인터뷰를 거부한 것도 드문 일인데다, 그 주인공이 고등학생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은 언론계 안팎의 시선을 모았다.
언론계 소식 전문지인 주간 미디어오늘 8월29일자에 실린 한군의 인터뷰 내용은 믿고 싶든 믿고 싶지 않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안티조선 운동이 하나의 사회적 쟁점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 준다.
“조선일보는 전시대 한국 언론의 문제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신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상의 다양성이나 인권 같은 기본적인 가치조차 잊게 만드는 냉전시대의 반공주의, 지역차별을 조장하는 반호남주의,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는 행태 등은 사실 과거에는 조선일보가 주도했다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거의 모든 언론이 갖고 있던 문제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고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다른 언론은 어느 정도 변화했는데 유독 조선일보는 과거 행태를 버전만 바꿔 반복하고 있다.”
9월15일 오후 5시 서울 동교동에 있는 민언련(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실. 안티조선 운동에 동참한 사회단체 관계자 2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이 날 안티조선 운동을 시민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공대위(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공대위는 9월20일 출범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다. 기구 이름도 정했다. ‘조선일보 반대 시민연대’, 약칭 ‘안티조선연대’다. 이들은 행사 당일 기자회견이 끝난 후 조선일보사 앞까지 피켓을 들고 거리행진을 할 예정이다.
인선도 끝났다. 오종렬 전국연합 상임의장, 문규현 신부, 김동민 교수가 상임공동대표를 맡았다. 8월7일에 있었던 ‘조선일보 거부 지식인 1차 선언’의 주역인 김교수는 집행위원장을 겸직하기로 했다. 대변인은 최민희 민언련 사무총장이 맡았다.
안티조선은 특별한 행동(?)
9월15일 현재 ‘안티조선 연대’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사회단체는 민언련을 비롯, 41개에 이른다. 그밖에 참여연대 환경연합 등 주요 시민단체를 비롯한 20여 단체가 참가 여부를 논의중이다. 참가 단체들은 조선일보의 취재를 거부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와 함께 지식인들의 ‘2차 선언’이 이어질 예정이다. ‘1차 선언’에 참가한 지식인은 154명. ‘2차 선언’ 참가자는 9월15일 현재 100명을 넘어섰다. ‘2차 선언’의 주축도 대학교수들이다. 지방대 교수들이 대다수였던 1차 때와 달리 이장희(한국외국어대) 안병욱(가톨릭대) 이철기(동국대) 홍윤기(동국대) 안철택(고려대) 교수 등 ‘중앙 쪽’ 교수들이 많이 참여한다.
‘2차 선언’에서 눈에 띄는 인사들로는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 문학평론가 임헌영씨, 김교빈 학술단체협의회 대표 등이 있다. 박원순 사무처장은 ‘1차 선언’ 직후 곧바로 합류했다. 그밖에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임수경씨, 언론인 임재경씨가 뒤늦게 참여 의사를 밝혔다.
시민연대가 계획하고 있는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시민들을 상대로 조선일보 구독거부 서명 및 모금 운동을 펼쳐 나간다 ▲지속적인 모니터 활동으로 조선일보 기사를 감시한다 ▲월 1회 ‘조선일보 거부의 날’을 정해 그 날은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시위를 한다 ▲홈페이지를 제작해 인터넷 홍보활동을 펼친다 ▲안티조선 시민강좌를 연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조선일보 왜곡보도 사례를 모아 전시회를 갖는다 ▲조선일보의 친일행위 자료집을 만든다. 그밖에 시민걷기 대회 등을 계획하고 있다.
조선일보 인터뷰 및 기고를 거부한다는 지식인 선언은 안티조선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만들었다. 지식인 선언은 그동안 네티즌을 중심으로 전개돼온 안티조선 운동을 현실공간으로 끌어낸 것으로 향후 이 운동이 사회운동 또는 시민운동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들은 왜 이런 운동을 펴는가. 지식인 154명이 발표한 조선일보 거부 선언문을 살펴보자.
“특히 우리는 반개혁적일 뿐 아니라 무력통일을 공공연히 주장하면서 기득권 수호에 연연하는 수구신문 조선일보의 행태에 주목하게 된다. 그 행태가 하도 도발적이고 기괴하여 이를 더 이상 방치해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데 우리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안티조선 운동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를 ‘특정한 소수’의 ‘특별한 행동’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렇게 무시해버리기엔 이 운동의 뿌리와 배경이 만만찮다. 이번 선언은 올초부터 두드러진 활동을 시작한 네티즌들의 반조선일보운동을 등에 업고 있다. 이들 네티즌들은 인터넷 사이트 ‘우리모두(www.urimodu.com)’와 인터넷 언론 ‘오 마이 뉴스’를 활용해 지속적으로 조선일보 반대 및 거부운동을 펼쳐왔다. 한윤형군도 ‘우리모두’의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지난 7월에 있었던 작가 황석영씨의 동인문학상 심사대상 거부 파문도 지식인 선언에 자극제로 작용했다. 황씨는 7월20일 한겨레신문 특별기고를 통해 자신의 소설 ‘오래된 정원’이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 심사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이는 곧 조선일보에 대한 거부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사건 후 문단은 안티조선 논쟁에 휩싸였다.
안티조선 운동은 총선시민연대 활동의 맥을 잇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 총선시민연대는, 비록 형식적 움직임에 그치긴 했지만, 조선일보의 ‘부당한 보도’에 대응하기 위해 ‘언론개혁특위’까지 만들었다. 지난번 1차 선언 때 상당수 시민운동권 인사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 데 이어 이번 2차 선언에 각종 사회단체가 단체 명의로 참여한 데는 이런 사정이 있다.
반조선 인터넷사이트 ‘우리모두’
조선일보에 대해 시민단체들이 처음으로 연대한 것은 1998년 11월. 이른바 ‘최장집 사건’ 직후 44개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 만든 ‘조선일보 허위왜곡보도 공동대책위원회’다. ‘안티조선 연대’의 원조 격인 이 기구는 조선일보 취재거부, 구독거부, 보도자료 안 보내기 등의 목표를 내걸었으나 변죽만 울리다 문을 닫았다.
안티조선 운동이 시민연대로 결집하게 된 데는 ‘우리모두’의 공이 크다. 반조선일보 인터넷 사이트인 ‘우리모두’가 문을 연 것은 지난 1월. ‘우리모두’는 개설 당시 ‘나를 고소하라’는 공격적 구호를 내걸고 안티조선 서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나를 고소하라’는 구호는 조선일보를 향한 것으로,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홍세화씨가 지난해 11월29일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쓰며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홍씨는 그 글에서 ‘최장집 사건’과 관련, 조선일보와 해당 기자를 맹렬히 비난하며 “나를 고소하라”고 외쳤다.
홍씨의 이런 ‘도발적 행위’는 ‘최장집 사건’으로 조선일보 기자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 전북대 강준만 교수와 월간지 ‘말’과의 연대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홍씨의 칼럼이 나간 직후 네티즌들은 강교수와 ‘말’지를 위한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모두’의 탄생배경이다.
‘우리모두’는 개설 직후 하루 평균 1000명 이상의 네티즌이 접속할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가상공간에 머물던 이들이 ‘실력 행사’에 나선 것은 지난 3월5일. 회원 500여명은 이날 조선일보 창간 80주년을 ‘기념해’ 대학로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안티조선 서명운동을 전개한 뒤 피켓을 흔들며 조선일보 사옥이 있는 코리아나호텔까지 행진했다.
‘우리모두’는 모금한 돈으로 지난 7월7일자 한겨레신문에 전면광고를 실었다. ‘조선일보여, 나를 고소하라’라는 제목의 이 광고에서 ‘우리모두’는 안티조선 서명운동에 참가한 시민 1748명의 이름을 공개했다. ‘우리모두’의 서명운동과 모금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모두’ 회원들 중 안티조선 운동의 이론적·사상적 뿌리가 강준만 교수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김대중 죽이기’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강교수는 일찍이 ‘하이에나는 때를 기다린다-김대중 정권, 지역감정, 그리고 조선일보’ 등 일련의 언론비판 저서를 통해 언론, 특히 조선일보를 집중적으로 비난하는 한편 이 문제에 ‘둔감한’ 지식인들을 비판해왔다. ‘강준만 현상’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독특한 그의 실명비판방식은 지식인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강준만 교수와 ‘원군’들
그가 발행하는 단행본 ‘인물과 사상’ 시리즈 및 월간 ‘인물과 사상’에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으면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될 정도로 내로라 하는 각계 인사들이 그가 쏜 ‘말화살’을 맞았다. 그 비판의 주요 잣대가 바로 조선일보에 대한 시각 또는 태도였으니 그가 안티조선 운동에 끼친 영향은 미뤄 짐작할 만하다. 안티조선 운동의 구호가 된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도 그가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그 뜻은 한마디로 ‘극우신문인 조선일보가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그것을 줄여 극우신문에 어울리는 몫만 갖게 하자’는 것이다.
‘단독 플레이’에 가까웠던 강교수의 안티조선 운동이 대중 운동으로 거듭난 데는 1998년 5월 창간한 월간 ‘인물과 사상’의 공이 크다. 창간호에 ‘조선일보의 국가안보 상업주의 사례 모음’을 실은 이 잡지는 매호 조선일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한편 독자에게 전체 공간의 반 이상을 기고와 논쟁의 터로 제공함으로써 안티조선 운동의 공론화를 이끌어냈다.
강교수 주변에 강력한 원군이 나타난 것도 이때쯤이다. 시인이자 교수인 김정란, ‘극우’인사들과 조선일보에 대한 독설로 가득한 책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저자 진중권, ‘망명객’ 홍세화씨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신문·잡지 기고와 인터넷 공간에서의 논쟁, 각종 토론회 참석 등의 방법을 통해 곳곳에 안티조선의 표창을 날렸다.
안티조선 운동은 언론, 특히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으로 알려진 조선일보를 공격하는 것인만큼 만만찮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먼저 ‘황석영 파문’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문단의 상황을 살펴보자. 문단의 대표적인 두 유파인 ‘문학과 지성’과 ‘창작과 비평’의 인터넷 게시판은 작가와 평론가 독자들이 뒤엉켜 혼전 양상을 띠고 있다.
논쟁의 한가운데 서 있는 대표적인 두 문인은 평론가 정과리씨와 김명인씨. 동인문학상의 종신 심사위원 정씨는 7월26일 ‘문학과 지성’의 인터넷 게시판인 ‘문지 마당’에 황석영 파문과 관련한 글을 올렸다.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의 이 글에서 정씨는 “조선은 보수 이념지일 뿐 극우 이데올로기의 온상은 아니다. 조선이 극우라고 생각했다면 심사위원직을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조선일보 정체성에 대해 안티조선 진영과 의견 차이를 보였다.
그는 기자에게 “동인문학상과 조선일보는 별개 문제”라고 전제한 후 “조선은 동인문학상에 재정지원만 할 뿐이다. 조선일보가 정치권력은 몰라도 문화권력을 가질 이유는 없다. 조선이 동인문학상을 통해 문인들을 줄세우려 한다는 것은 지나친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조선일보와 같은 우익 이념지도 있어야 한다. 이는 조선일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국민의 일반적 성향과 관련된 문제다”며 안티조선이 ‘대세’가 아님을 강조했다.
정씨의 글은 곧바로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인 평론가 김명인씨의 반론에 부딪혔다. 김씨는 월간 ‘말’ 9월호에 실린 ‘조선일보에 줄 선 문인들의 모순과 궤변’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정씨와 작가 이문열 양귀자씨를 신랄히 비판했다. 그는 ‘신동아’ 인터뷰에서 정과리씨의 논리를 정면으로 공박했다.
“동인문학상 자체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논란이 된 심사방식도 다른 문학상과 비교하면 진일보한 면이 있다. 문제는 조선일보가 주는 상이라는 점이다. 문학관 차이에 상관없이 조선일보가 표방하는 정치·사회적 이념을 그대로 용인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다. 이는 양심적 지식인들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 이런 영역에조차 다양성이 인정돼선 안 된다.”
첨예한 대립이 아닐 수 없다. 그 탓인지 문단 내부에서야 어떻든 상당수 문인들은 이 문제에 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걸 꺼리는 분위기다. ‘문학과 지성’ 대표인 김병익씨는 “언급하지 않겠다. 전혀 할 얘기가 없다”며 인터뷰를 사절했다. ‘창작과 비평’의 대표 논객인 백낙청 서울대 교수는 “신문사는 신문사 입장이 있는 것”이라면서도 “안티조선 운동이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론 보지 않는다”며 중립적인 자세를 보이는 한편 이 논쟁이 ‘문지’와 ‘창비’ 두 진영의 대립으로 비치는 것에 우려를 나타냈다.
정과리씨와 함께 동인문학상 종신심사위원 7인 가운데 한 사람인 소설가 박완서씨는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묻자 몹시 부담스러워 했다. 안티조선 운동에 대해선 “자세히 모른다”며, 동인문학상 파문에 대해선 “언급하기 곤란하다”며 비켜갔다. 안티조선 진영으로부터 ‘극우파’로 낙인 찍힌 소설가 이인화씨도 “전혀 아는 바 없다”며 언급 자체를 꺼렸다.
한편 안티조선 진영의 ‘타도 대상’이 되다시피한 소설가 이문열씨는 1시간 넘게 계속된 통화에서 안티조선 운동의 ‘불온함’을 지적하며 탄식했다. ‘비권위에 의한 권위 해체 시도’ ‘저질한 문화권력 다툼’ 등의 표현으로 안티조선 운동과 동인문학상 파문의 성격을 규정한 그는 안티조선측 주장에 대해 “일부 인정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인정하더라도 (조선일보를) 비난할 순 없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어느 사회든 우파가 없을 수 없으며 우파가 악이 될 순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공세에 지친 탓일까. 아니면 약해진 것일까. 그도 아니면 상대를 하지 않겠다는 뜻일가. 이씨는 통화 내용을 정식 인터뷰 형식으로 꾸미자는 제의에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기사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논쟁 대열에서 빠지기를 희망했다.
시민운동권에서도 이 문제는 뜨거운 감자다. 그렇지만 시민운동이 언론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정 때문인지 시민단체들은 공식 의견을 내놓지 않고 있다. 평소 정치·사회적인 이슈가 있을 때마다 성명을 발표하며 발빠르게 대응하던 것과는 자못 대조적이다. 가장 영향력이 큰 두 단체인 경실련과 참여연대는 대외적으로 침묵하는 데는 보조를 같이 하고 있지만 내부 분위기는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참여연대가 참가 여부를 두고 논의중인 반면 경실련은 안티조선측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경실련 이석연 사무총장은 “개인적으로나 경실련 차원에서나 의견을 밝힌 적이 없다”며 “일부 언론에 우리가 마치 ‘불참’ 결정을 내린 것처럼 보도됐는데 이는 원론적인 얘기를 한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총장이 말하는 ‘원론적 얘기’란 “안티조선 운동 참여 여부는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결정할 문제며, 언론의 다양성 측면에서 신중히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논의할 성질의 것도 아니며 논의할 단계도 아니다”고 말함으로써 당분간 관망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반면 참여연대는 박원순 사무총장이 개인 자격으로 ‘지식인 2차 선언’에 가담함으로써 안티조선 운동에 동참한 가운데 간부들 사이에 ‘방법론’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1차 선언’ 때 참여한 손혁재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개인 자격으로 (안티조선 운동에) 동참하는 데는 문제가 없으나 참여연대가 단체 자격으로 참가하는 문제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언론단체들도 곤혹스러워 한다. 언노련(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최문순 위원장은 “뜻이야 공감하지만 언노련에 조선일보 조합원들도 있어서 난처하다. 밖에서 때리니까 안에서 더 똘똘 뭉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며 언론운동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5개 시민단체의 연합모임인 언개련(언론개혁시민연대)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김주언 사무총장은 “비공식회의에서 논의해봤는데 의견을 하나로 모으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참여연대와 마찬가지로 안티조선 운동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방법론을 두고 단체간 이견이 있다는 것이다.
언론자유 침해 vs 소비자운동
안티조선 운동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왜 조선일보만 문제삼는가다. 평소 왕성한 신문 기고 활동을 통해 ‘보수 논객’으로 이름을 떨쳐온 송복 교수는 “조선일보와 다른 신문 간에 차이점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조선일보를 비롯한 국내 주요 일간지는 모두 보수신문으로 논조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문열씨는 “(안티조선측 잣대로라면) 동아일보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5·6공 때 국회의원과 청와대수석비서관을 지내고 법률신문 사장을 역임한 이진우 변호사는 “조선일보가 특정인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일이나 조선일보를 극우로 몰아붙이는 일이나 다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안티조선측 인사들은 “조선일보와 다른 신문들은 명백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조선과 같은 극우신문이 1등신문으로서 영향력을 누리는 것은 우리 사회 민주화에 역행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참여연대 손혁재 협동사무처장은 “극우·보수신문의 상징으로 독재정권·권위주의정권 창출에 앞장서 온 조선일보가 최근엔 남북 화해 분위기를 해치고 그와 관련해 왜곡보도까지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평론가 김명인씨는 “물론 보수신문도 많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보수가 아니라 상업적 극우주의 신문이다”며 조선일보가 갖는 차별성을 강조했다.
“80년 이후 언론의 행보를 살펴보면, 다른 언론은 기회주의적 행태로나마 최소한의 선을 지킨 반면 조선은 일관되게 극우적 이념을 펼쳐왔다. 조선일보와 벌이는 싸움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극우적이고 수구적인 세력과 싸우는 것이다.”
조선일보를 안티조선측 주장대로 극우로 보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문제는 안티조선 운동의 타당성을 따지는 데 중요한 잣대로 작용한다. 안티조선 운동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조선일보가 극우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조선일보는 보수 또는 우파 성향을 띠었을 뿐이고, 그것은 언론의 다양성 측면에서 존중돼야 하며, 그런 성향을 가진 독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자연스럽게 언론자유 침해 논쟁을 부른다. 이진우 변호사는 “조선일보가 수구든 보수든 이는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라며 “언론의 논조를 문제삼아 불매운동을 펼치고 사회운동화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비민주적 행태”라고 비판했다. 이동복 전의원은 “언론은 법이 허용하는 한 무슨 얘기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조선일보가 설사 극단적 주장을 편다 하더라도 언론자유 측면에서 보면 난리칠 일이 아니며 난리쳐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안티조선측은 언론자유 침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김동춘 교수의 반박을 들어보자.
“조선일보도 하나의 기업인 이상 기업을 없애라고 할 순 없다. 다만 문제가 있는 기업에 대해 시민단체가 감시활동을 펴듯 지식인들이 언론 소비자에게 언론 바로 알리기를 하는 것이므로 언론자유와 배치되지 않는다.”
이른바 ‘조선일보 활용론’도 이 논쟁의 한 갈래다. 문학평론가 정과리씨는 “동인문학상 수상작에 따라선 조선일보의 정치적 이념과 반대되는 이념을 조선일보를 통해 전파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진보진영 지식인으로 알려진 한양대 역사학과 임지현 교수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조선일보에 글을 쓴다는 죄(?)로 강준만 교수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은 임교수는 “글쓰기를 통해 조선일보 독자의 일부라도 전유할 수 있다면, 끼리끼리 밖에서 비판하고 돌려보며 자족하는 것보다는 그것이야말로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반박했다.
안티조선측은 이와 같은 ‘조선일보 활용론’에 대해 한마디로 ‘답답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김동춘 교수는 “전혀 현실성 없는 논리”라며 “그런 일은 최소한의 양식과 중립성을 가진 언론에서나 가능하다. 다른 목소리를 수용하지 않는 조선일보엔 어울리지 않는 얘기”라고 못박았다. 김명인씨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행위는 극우 상업주의를 다양한 양식으로 포장하고 윤색하는 조선일보 전략에 이용당해 독자들을 무장해제시키는 기능만 할 뿐”이라고 말했다.
‘퇴출’ 아닌 ‘제몫 찾아주기’(?)
안티조선 운동에 대한 조선일보 기자들의 시각은 어떨까. 8월17일자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조선일보 기자들은 이 운동에 몹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가장 보편적인 비판은 ‘대안 없는 운동’이라는 것. 기자들은 “조선일보를 없앤다면 그동안 냉전적 상업주의를 이용해온 나머지 언론이 대안이 될 수 있느냐” “조선일보가 지금과 같은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사설과 보도내용의 보수성뿐만 아니라, 신문 그 자체의 질적인 수준이 높기 때문”이라며 안티조선 운동의 취지나 방법론 모두를 비판했다.
이런 인식은 ‘안티조선=조선일보 퇴출’로 간주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티조선 진영은 이 운동의 목표가 ‘퇴출’이 아닌 ‘제 몫 찾아주기’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대안 없는 운동’이라는 비판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한편 안티조선 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도 논란이 일고 있다. 백낙청 교수는 ‘디지털 창비’ 게시판에 올린 글(7월5일)을 통해 “조선일보의 ‘퇴출’이 아닌 ‘제 몫 찾아주기’야말로 정확한 표현으로 본다”고 안티조선 운동의 취지에 공감을 나타내면서도 “그 방법은 각자의 처지와 능력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며 실천 방법에 대해선 이의를 제기했다.
계간 ‘당대비평’은 가을호에서 “조선일보에 글을 쓰거나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이들의 방법론은 존중돼야 하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그 요구에 따르지 않는 이들을 공격하는 명분은 될 수 없다”며 안티조선측의 ‘강경 노선’을 견제했다.
참여연대 김기식 정책실장도 “조선일보가 안보상업주의, 극우라는 데는 공감하지만 (조선일보에) 기고를 하느냐 안 하느냐를 기준으로 편을 가르는 건 반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안티조선 진영은 “오직 실천만이 있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안티조선 운동이 참된 언론
개혁의 횃불이 될지, 아니면 조선일보 기자들의 주장대로 “불만을 표출하는 수준”에 그칠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전망을 논할 때 한 가지
참고해야 할 것은 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운동 결과보다 실천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운동에 대한 열기가 꽤 오랫동안 식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인터뷰] ‘안티조선 지식인 선언’의 선봉장 김동민 교수
‘안티조선 연대’ 집행위원장을 맡은 김동민 교수(한일장신대·신문방송학)는 1990년대 초부터 선거감시 모니터 활동을 하며 언론민주화운동을 해왔다. 8월30일 오후 김교수를 한국언론회관에서 만났다.
─특정 신문에 대한 거부 캠페인은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렇지 않다. 하자가 있는 상품에 대해 벌이는 소비자운동 차원이다.”
-안티조선측 논리를 보면 마치 조선일보를 언론으로 인정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조선일보는 언론이라기보다는 권력이다. 다양성 존중 등 언론의 기본 요건을 갖추지 않고 있다. 부도덕한 권력에 대한 대중적 저항은 당연한 것이다.”
-언론에 대한 선택권은 독자의 몫 아닌가. 지식인들이 나서서 보라, 말라 할 성질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따진다면 소비자단체의 운동도 필요없는 것 아닌가. 소비자단체의 역할이 뭔가. 소비자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사전에 불량품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 아닌가. 조선일보는 정상적인 시장경쟁을 통해 성장하지 않았다. 조선일보의 출발과정과 성장과정, 성격을 상당수 독자들은 모르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캠페인이 필요하다.”
-안티조선 운동 비판자들은 다른 신문들과 조선일보의 차이점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린다.
“보수 언론이라는 점에선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큰 차이가 있다. 조선의 색깔은 워낙 뚜렷하다. 동아나 중앙은 보수적 합리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조선은 파시스트 논리를 펴고 있다. 사고나 주장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면서 반대 의견은 매도해버린다.”
─일부 언론관련 단체는 특정 신문 하나에 타격을 준다고 언론을 개혁할 수 없으며 참된 언론 개혁을 위해선 법제나 제도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모든 언론을 다 상대하긴 벅차다.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 전술적 측면도 있다. 안티조선은 언론개혁의 상징적 작업이다. 수구·냉전·기득권 세력의 선봉장이자 핵심인 조선일보의 영향력을 줄이지 않고는 언론 개혁은 불가능하다. 제도나 법제 개선도 중요하지만 거기에만 맡겨서 될 일이 아니다. (안티조선 운동과) 같이 가야 할 것이다.”
-안티조선 운동의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조선일보 글쓰기를 거부하는 운동방식에 대해선 동의하지 않는 지식인들이 적지 않은데.
“조선일보는 자신의 수구·냉전 색깔을 감추기 위해 진보적 지식인들을 활용한다. 그러니 일반 독자들은 현혹될 수밖에 없다. 맥루한은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말을 했다. 자신의 글이 실리는 매체의 성격을 의식하고 자기검열을 하면서 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조선의 상술과 전술을 안다면 조선 지면에 글을 써선 안 될 것이다.”
-안티조선 운동의 전망을 어떻게 보나.
“충분히 승산 있는 싸움으로 본다. ‘최장집 사건’ 때와 분위기가 또 다르다. 시민단체들도 호응하고
있다. 특히 인터넷 대중미디어에 거는 기대가 크다.” 나는 조선일보의
안티조선 운동은 이념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숨쉬기 운동이다. 나는 거짓말이 정론이라고 선전되는 이 땅의 대기를 견딜 수 없어 반조선일보 운동에 동참했다. 나는 조선일보의 몰상식을 견딜 수 없다.
김정란·시인·상지대 교수 현 대사회에서 언어의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미디어의 존재다. 복잡해질대로 복잡해진 현대사회 안에서 개인은 직접적인 방식으로는 도저히 세계를 인지할 수 없다. 정보는 무한팽창을 거듭한다. 누군가 나서서 정보를 분류하고, 가치를 매겨주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정보가 올바른 가치를 창출해 내도록 물꼬를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 역할은 현대사회에서 언론에 맡겨져 왔다. 언론에 높은 합리성과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한번도 실질적으로 수평적 권력배치, 즉 주권재민의 원칙이 확립된 시대를 살았던 적이 없다. 말로는 ‘보통사람의 시대’라면서 실제로 권력자들은 등뒤에서 보통사람들의 주머니만 털어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3공화국이 형성해 놓은 수구기득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해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권교체 이후에 어쨌든 군부는 표면에서 사라졌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정경유착으로 끈끈한 공생관계를 유지해 온 수구세력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대체 원인이 무엇일까? 무엇인가 정말 해결해야 할 것이 있다. 교체된 듯한 표면적 구조 뒤에서 ‘부조리 공장’이 계속 돌아가도록 만드는 어떤 이면 구조가 있다.
이것은 대언론사들에 의하여 재생산되고 있다. 대언론사들이 수구기득권 세력에 유리하도록 말의 방향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를 개혁하려면 반드시 언론을 개혁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많은 피를 흘렸으면서도 제대로 민주화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언론사들이 독재정권에 아부하면서 부와 권력을 누려왔다는 사실이다.
변치 않는 수구기득권 세력 근본적으로 한국 언론의 문제는 사주 중심의 소유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르러야 실질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사주가 편집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구조적인 장치를 마련해 국민의 진정한 의도가 반영되는 말의 통로를 열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언론의 문제는 조선 동아 중앙의 ‘빅3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 아닌가? 어째서 반조선일보운동 진영은 조선일보만 문제삼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반조선일보운동 진영은 ‘조선일보만’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반조선일보운동은 조선일보를 ‘특히’ 문제삼는 것이다. 전체적인 테두리에서 살펴보면 빅3 모두 문제가 있다. 그러나 동아나 중앙은 ‘사상 검증’의 칼을 들고 자신들에 불리한 인사를 낙마시키는 몰상식한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 조선일보의 매카시즘 사냥 때문에 우리 사회는 능력있는 인사들이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낙마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한완상, 김정남, 이장희, 최장집 등이 그 직접적인 희생자들이다. 또한 동아, 중앙 양사의 사설이나 중요 칼럼들을 살펴보면 그 논조가 조선일보처럼 수구 일색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개혁적인 필진들이 집필하는 합리적인 글들도 찾아볼 수 있다. 양사는 중요 칼럼 지면을 외부의 개혁적인 인사들에게 많이 개방하고 있다. 반면에 조선일보의 중요 칼럼들은 거의 내부 필자들이 독점하고 있다. 개방되는 경우에도 철저하게 자기 입맛에 맞추어 글을 써줄 필자들에게만 개방한다. 반면에 문화면에는 아주 다양한 필자들이 등장한다. 심지어 조선일보와 정치적으로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좌파 지식인들과 좌파 문인들에게마저 큰 지면을 할애해준다. 그러나 ‘문화적 접근’에 한정된다. 정치에는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한다. 또한 그들에게 고정 칼럼을 맡기는 법도 좀처럼 없다. 고정 칼럼이 제공되는 경우는 정치적인 색채가 없는 지면들 뿐이다. 조선일보는 정치적으로는 자신들의 반대자들에게 절대로 지면을 제공하지 않는다. 실제적으로 한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정치 논리이기 때문이다.
진지전과 기동전 반조선일보운동이 조선일보를 ‘특히’ 문제삼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이 신문이 동아, 중앙과는 달리 자신들이 기대고 있는 사회적 집단의 정치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매우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동아, 중앙 양사는 대체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수구적인 논조를 보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역사를 치장하기 위해서 역사를 왜곡하는 만용까지 부리지는 않는다. 조선일보가 ‘민족정론 80년’이라는 구성물까지 시청앞에 설치하는 등 요란법석을 떨며 창간 80주년 잔치를 벌인 데 반해 동아일보는 같은 연조를 기념하는 행사를 조용히 치르는 겸양을 보이기도 했다. 5·18 항쟁 20주년 기념일에도 비록 짤막하기는 하지만, 사설에 “언론도 반성할 점이 있다”는 멘트를 내보냈다. 그 날짜에 조선일보가 어떻게 했는가를 살펴보면, 어째서 반조선일보운동 진영이 조선일보를 ‘특히’ 문제 삼는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신문들이 모두 기획기사를 내보낸 데 반해 조선일보는 기획은커녕 사설에서조차 단 한 줄도 5·18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 날 조선일보는 ‘美 맥아더 기념관서 찾은 6·25 미공개 사진’을 총천연색으로 실었으며, 기획기사 ‘그러나 역사의 증언은 끝나지 않았다’에서도 6·25 관련 흑백사진을 두 면 전면에 걸쳐 깔았다. 그 저의가 무엇인지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조선일보는 6·29 항쟁의 실질적 근원인 5·18의 역사적 의미를 죽어도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조선일보의 속마음을 보다 솔직하게 드러내는 ‘월간조선’은 5·18 항쟁을 아직까지도 ‘광주사태’라고 부른다. 조선일보는 민주적 정통성 자체를 부정하는 언론사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 신문은 자신들이 숭앙하는 수구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까지 왜곡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자신들의 친일 경력을 깡그리 숨기는 것은 물론 이미 독재자로 판명난 이승만을 국부로 숭앙하고, 한국사회의 현 기득권 계층 형성의 근원인 박정희 통치를 미화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상징조작을 감행하기도 한다. 상징조작을 보다 대대적으로, 보다 노골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은 ‘월간조선’이다. ‘월간조선’은 끈질기게 진지전을 수행한다. 그러다가 사회적 여건이 갖추어졌다 싶으면 월간조선을 통해 드러낸 자신들의 일방적 논리를 조선일보가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기동전에 들어간다. 조선일보는 이런 방식의 사상검증으로 마음에 안 드는 인사들을 제거해 왔다. 그런가 하면 자기들이 밀어주기로 결정한 정치가에게는 입속의 혀처럼 군다. 이건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 전혀 아니다. 조선일보는 정말 입속의 혀 노릇을 한다. 최근에 조선일보는 이회창씨 입 속의 혀다. 조선일보 사설에 나왔던 정치 메뉴들이 다음날이면 이회창씨 입에서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나온다. 조선일보는 이미 차기대통령 만들기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꼼수 부리지 말고 투명하게 말하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남북화해 무드가 정착되기 시작하면서 조선일보는 그동안 조심하던 태도를 버리고 마구잡이로 남북화해무드에 재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친미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 미 공화당이 북한에 대해 민주당보다 더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부시 후보가 당선됐으면 하는 소망을 노골적으로 피력하고 있다. ‘월간조선’은 9월호 부록으로 부시의 대통령후보 수락 연설 테이프를 끼워주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이러한 행태를 통해 자신들이 민족의 안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으며, 민족이야 고통스러워 하건 말건 기득권을 누릴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라도 냉전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반민주·반민족·반통일·친외세 세력이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반조선일보운동은 언론학 연구가 목표가 아니다. 언론학 연구가 목적이라면 언론 문제 일반을 다루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반조선일보운동은 문자 그대로 ‘운동’이다. 즉, 우리 사회에 실질적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구체적 노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술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 전체를 상대해 싸우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최악의 상대를 분명하게 지정하고 움직여야 한다. 가장 타락한 언론을 개혁할 수 있다면, 그보다 문제가 덜한 신문들의 개혁을 유도하기는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인정한다 치더라도 조선일보는 조선일보가 원하는대로 말할 자유가 있는 것 아니냐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선일보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언론자유 침해가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조선일보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말할 자유가 있다. 반조선일보운동 진영은 조선일보가 마음대로 말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마음대로 말하되 꼼수 부리지 말고 투명하게 말하라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그 때문에 억울하게 다치는 사람이 없고, 그 자유가 공익에 부응할 때만 비로소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타인이 말할 자유를 존중할 때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사상검증의 칼을 들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신문이 어떻게 언론의 자유를 논할 수 있는가. 조선일보는 툭하면 자유민주주의 얘기를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조선일보 맘대로 하기 주의’인가.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왜 타인의 입은 틀어막는가. 조선일보가 마음대로 말할 자유가 있다면 조선일보 반대자들에게도 마음대로 말할 권리가 있다. 조선일보에 언론의 자유가 있다면 조선일보 비판자들에게는 비판의 자유가 있다. 조선일보 지면에 조선일보의 문제점을 말할 수 있어야 비로소 언론의 자유를 운위할 수 있다. 자기들에게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위장 전술을 수행하면서 그것을 밝히려는 시민을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세력으로 모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동인문학상의 의도 게다가 조선일보는 조선일보의 비판자들과 절대로 대화를 하지 않는다. 자신들에게 정말 문제가 없다면 어째서 논쟁의 테이블로 나오지 않는가. 한 예로 MBC TV에서 박정희 기념관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서 50여 명에 이르는 조선일보 인사들과 친조선일보 인사들을 섭외했지만 아무도 토론에 응하는 사람이 없어 결국 프로그램을 포기했다고 한다. 자신들의 지면을 통해서는 그토록 박정희를 신격화한 사람들이 무엇이 무서워서 논쟁의 테이블에 나오지 못하는가. 공적인 장소에 나와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검증받아야 하지 않는가. 언론의 자유를 말하려면 자신들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자유만 누리고 책임은 지지 않겠다? 그런 무책임한 태도가 어디에 있는가. 언론의 자유는 언론의 책임과 함께 가는 것이다. 책임지지 않으려거든 언론의 자유를 말하지 말라. 조선일보가 자신의 수구적 정치색을 가리는 방법은 문화면을 통해 이뤄진다. 조선일보 문화면은 다채롭고 화려하다. 문화면의 유사 진보성(왜냐하면 조선일보 문화면에는 극우성 또한 뚜렷하므로)과 정치면의 수구성, 그것이 조선일보의 정체다. 조선일보는 문화면에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배치한다. 좌파 문인들마저 융슝한 대접을 받는다. 그렇게 다양한 필자들을 동원, 문화면을 화려하게 꾸며서 독자들을 끌어들인 후 정치면에서는 수구적 견해를 유포하는 것이다. 최근에 조선일보는 ‘동인문학상’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문학을 이용해 조선일보의 정치색을 가리겠다는 의도를 좀더 적극적으로 표방한 셈이다. 한국 최고의 상금을 걸고 한국 최초로 종신 심사위원 제도를 도입했다.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인 ‘문학과 지성사’의 정과리는 동인문학상과 조선일보는 별개라는 논리를 펴면서 동인문학상이 조선일보의 정치색을 가리는 데 악용될 것이라는 네티즌들의 우려를 일축했다. 정과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생각이지 조선일보의 생각은 아니다. 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무책임하거나 지나치게 순진한 사람이다. 이미 강준만 교수를 위시한 많은 언론학자들이 조선일보가 문화면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색을 숨겨온 사실을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동인문학상이 조선일보와 별개라는 주장을 하려면 언론학자들의 주장을 뒤엎을 만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막연히 ‘희망’만을 가지고 동인문학상이 조선일보에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다. 그렇게 믿고 내버려두기에는 조선일보 때문에 국민이 부담해야 될 비용이 너무 크다. 또 정과리는 몰리에르가 보편적으로 사유했기 때문에 그의 절대왕권에 대한 복종이 오히려 절대왕권 해체에 도움을 주었다는 예를 들면서 동인문학상도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몰리에르의 활동 무대는 19세기 프랑스다. 그 맥락이 현대 한국사회에서도 작동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보장할 수 있는가.
조선일보 변화시키기(?) 한국사회는 아주 사소한 아노미적 요소만 가지고도 사회 전체가 균형을 잃을 수 있는 대단히 불안정한 사회다. 그것은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정과리가 다른 시대 다른 사회의 매우 예외적인 경우를 일반화해서 실험하는 것을 허용하고, 그 불확실한 결과를 기다릴 만큼 한국사회는 한가하지 않다. 수구 기득권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해체하지 못하면 한국 사회의 합리성 정착은 또 몇 십 년 뒷걸음질칠지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정과리가 ‘외곽 때리기 수법’이라고 명명한, 문학을 이용한 조선일보 변화시키기란 전혀 새로운 방책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도 문인들은 조선일보에 열심히 기고해 왔다. 문학이 조선일보를 외곽에서 때려서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동안 조선일보 내에 어떤 변화가 있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조선일보를 ‘면피’하게 하고 조선일보의 영항력을 증대시키는 데 종사했을 뿐이지 않은가. 따라서 정과리의 전략은 미래형 전략이 아니라 이미 효능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 과거형 전략에 불과하다. 정과리는 조선일보가 문제 있는 신문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는 ‘괴물의 손에 들린 꽃’의 비유를 사용하면서 꽃이 괴물을 감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매우 신화적인 믿음을 피력했다. 좋다. 정과리의 믿음대로 추악한 괴물인 조선일보가 순진한 문학에 감동해 변화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보도록 하자.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조선일보 독자들을 상대로 ‘조선일보는 문제가 있는 신문이지만 문학을 통한 변화 가능성을 믿는다’는 메시지를 꾸준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꽃을 바라보는 독자들이 괴물과 꽃의 관계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들은 꼼짝없이 괴물을 왕자라고 착각할테니까 말이다. 만일 정과리가 동인문학상 심사독회에 나갈 때마다 조선일보의 문제점을 조선일보 독자들을 상대로 설파할 수만 있다면 나도 정과리의 믿음에 동참할 수 있다. 한겨레신문 독자들을 상대로 그 얘기를 아무리 해보아야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런데 과연 조선일보가 그것을 용납할까. 또 정과리는 조선일보는 앞으로 변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만일 조선일보가 변한다면 그것은 정과리처럼 편안하게 조선일보 품에 안겨 명성과 돈을 얻은 사람들이 아니라 조선일보 밖에서 온갖 험담을 들어가며 힘들게 싸운 사람들 덕택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정과리가 조선일보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막을 생각은 없다. 정과리에게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대로 행동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 점만은 분명히 해두고 지나가도록 하자.
“반조선일보운동은 이념논쟁 아니다” 어떤 이들은 반조선일보운동을 이념 논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문열은 주간지 ‘한겨레21’ 인터뷰에서 “반조선일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현정권과 유착되어 있으며, 문화적 위장을 통해 현정권 대신 조선일보에 정치적 보복을 하는 테러리스트들”이라는 극언을 했다. 또 정과리는 같은 지면에 실린 고종석과의 대담에서 반조선일보 운동은 이데올로기의 종언 때문에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구좌파들이 찾아낸 옹색한 ‘공략 거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문열과 정과리의 논리는(그들이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조선일보 논지를 매우 충실하게 대변하고 있다.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은 사설을 통해 조선일보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친북세력이라는 암시를 한 바 있다. 이문열과 정과리의 발언은 용어만 다르다 뿐이지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모든 사람들을 ‘빨갱이’로 모는 조선일보의 논리를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나는 두 사람에게 묻고 싶다. 그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 두 사람은 사실관계를 파악했는가. 사실 확인은 중요한 정치적 발언을 하기 전에 거쳐야 할 최소한의 절차가 아닌가. 반조선일보 운동은 이념논쟁이 아니다. 이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8월7일 발표된 조선일보 기고·인터뷰 거부 운동에 서명한 지식인 가운데 ‘구좌파’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오히려 지금 좌파들은 반조선일보운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조선일보 지면 활용론을 주장하는 실정이다. 반조선일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이념적 분포는 너무나 다양하다. 나만 해도 이념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나는 이념 곁에 가본 적도 없다. 이것은 ‘좌파’라는 이름이 나에게 덧붙여질까봐 두려워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실제로 이념을 신봉하지 않는다. 내가 조선일보와 싸우고 있는 것은 이념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념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반공이라는 이념으로 늘상 국민을 협박해 왔던 조선일보가 더이상 이념을 가지고 장난치면서 우리 사회 개혁을 막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반조선일보 운동은 지식인 운동이 아니다. 파리 8대학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박재우는 정과리에게 보낸 공개질의서에서 “반조선일보 지식인 서명이 ‘최소한의 이념논쟁’도 동반하지 않고 있다”고 불평을 터뜨리고 있지만, 그것은 80년대의 연장선에서 이 운동을 바라보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이념논쟁은 이 운동의 본질이 아니다.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념의 푯대가 없으면 삶의 기준을 정할 줄 모르는 담론강박증 환자들이 아니다. 지식인 서명은 운동의 테이프를 끊기 위한 형식적 요건에 불과했다. 이미 ‘반조선일보 시민단체 공동대책위’가 꾸려져 있다. 지금 반조선일보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정치적 입장이 전경화되는 단계가 되면 모두 뿔뿔이 헤어져야 할 사람들이다. 헤어지더라도 서로의 사상을 존중하겠지만 말이다. 우파에서 좌파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 극좌와 극우만 없다. 80년대의 주사파들인 극좌 중 일부는 지금 극우 조선일보와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시대정신’ 진영은 지금 조선일보와 한 배를 타고 북한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더니.
“몰상식과의 싸움” 반조선일보 운동은 이념논쟁이 아니라 몰상식과의 싸움이다. 반조선일보 운동은 시대가 어느 때인지도 모르고 냉전의 유령을 끌고 들어와 국민을 계속 전근대의 몽매에 묶어두려고 하는 몰상식한 집단과의 싸움이며, 나의 개인적인 입장을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것은 나에게는 ‘숨쉬기 운동’이다. 나는 거짓말이 정론이라고 선전되는 이 땅의 대기를 견딜 수가 없어서 반조선일보 운동 대열에 동참했다. 나는 조선일보가 장사를 하든 말든 아무 관심도 없다, 돈 벌고 싶으면 벌라는 것이다. 다만 언론인 체 하지 말고 정치세력인 것을 분명히 밝히고 솔직하게 장사하라는 말이다. 제품의 카테고리와 품질을 분명히 해달라는 말이다. 일부에서는 반조선일보 운동이 ‘안티운동’이라는 점을 들어서 그것이 네거티브한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일보 자체가 네거티브한 집단이기 때문에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것은 네거티브한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포지티브한 태도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매사에 딴지를 걸고,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사람을 빨갱이로 매도하고, 국민의 염원인 통일조차도 못마땅해서 남북화해 무드에 재를 뿌리는, 한국에서 가장 네거티브한 집단에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어째서 네거티브한 태도인가. 반조선일보 운동은 부정적인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의 비전을 찾기 위한 포지티브한 운동이다. 증오와 불신만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국민이 서로 물어뜯도록 만드는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것, 그것은 오히려 긍정적인 세계관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나는 조선일보의 몰상식을 견딜 수 없다. 반조선일보 운동은 아주 단순 명쾌하며 어쩌면 뻔하기까지 한 운동이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 것조차 ‘불순한’ 것으로 매도당하는 아주 이상한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나는 그 현실이 너무나 슬프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걸어나간다. 나처럼 힘없고 별볼일없는 시민들이 조선일보라는 ‘말의 바스티유’를 향하여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안티조선일보 운동은
“신문이 사시에 맞게 자기 몫을 수행하는데, ‘영향력을 줄여라’ ‘당신 몫을 줄여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몫은 누가 줄여주는 겁니까. 독자가 하는 겁니다.”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연 세대 사회학과 송복(63) 교수는 보수 또는 우파 진영의 대표적 논객으로 통한다. 8월28일 그에게 전화를 걸어 안티조선운동과 관련한 기고를 부탁했다. 송교수는 글을 쓸 여유가 없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글 쓰기에 비해 시간을 덜 뺏기는 인터뷰에는 응할 수 있다며 이 논쟁에 참여할 뜻을 비췄다. 그는 통화에서 안티조선운동에 참여하는 지식인들을 ‘좌파 성향’으로 규정했다. 인터뷰는 다음날 오전 그의 연구실에서 진행됐다. 차를 끓여 내오는 모습과 세월의 풍파가 녹아 있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에서 경륜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는 대체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의 논리를 폈는데 몇 가지 질문에 대해선 목에 굵은 힘줄이 설 정도로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8월7일 학계·문화계·종교계·시민운동권 인사 154명이 ‘조선일보 기고와 인터뷰를 거부하는 지식인 1차 선언’을 함으로써 이른바 안티조선 논쟁이 지식인사회에서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먼저 조선일보의 정체성 문제부터 따져보지요. 안티조선 진영에선 조선일보를 극우로 규정합니다. 수구·보수 이상의 반통일·냉전세력으로 보는 거죠. “그들은 우리 사회 지식인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5∼6% 될까요. 그런데 다수의 지식인은 이런 첨예한 이슈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조선일보 정체성에 시비를 거는 지식인들은 목소리가 높으니 두드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일부 지식인의 행위를 두고 전 지식인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면 잘못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일부 지식인은 기존 세력에 대해 시비를 걸고 나오게 돼 있습니다. 조선일보에 대해 시비를 건다면 똑같이 동아일보나 중앙일보 또는 한국일보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어야 합니다. 더 확대하면 경향 문화에 대해서도요. 그런데 왜 유독 조선에 대해서만 그러느냐. 내가 신문들을 다 읽는데 논조가 똑같아요. 조선이 반통일이면 동아는 반통일 아닙니까. 조선이 극우면 동아는 극우 아닙니까. 중앙은 아니고 한국은 아닙니까.” ―차이가 없단 말이죠? “하나도 없지요. 내가 읽어보니 그래요. 내가 신문기자 출신이고, 그 신문들을 수십 년 읽어왔고 그 신문들에 수십 년 글을 써왔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조선에 쓸 때와 다른 신문들에 쓸 때 논조가 다르냐. 똑같습니다. 다른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기자들은 다릅니까. 조선 기자와 다른 신문 기자들, 성향이 다릅니까. 같잖아요? 그런데 왜 안티조선을 하느냐. 공격 포커스를 맞추기 위해 으레 하는 짓이란 말이죠. 전술이든 전략이든 공격할 때는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시켜야 하니까. 그 대상이 조선이 됐을 뿐입니다.” 송교수는 안티조선 진영의 운동방식을 ‘공산주의자들이 쓰는 수법’이라고 했다. 이어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에 대한 자신의 지론을 전개한 뒤 이를 안티조선 논쟁에 적용했다. “조선 동아 중앙은 무엇을 지지하냐,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지지하지 않습니까,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지 않습니까. 뭔 차이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한 신문에만 초점을 맞춰 너만 극우다, 보수반동이다, 이렇게 말하는 건 어디까지나 전략이고 전술입니다. 서구사회의 역사에 비춰볼 때 이런 방식은 공산주의 세력이 쓰던 것입니다. 강한 쪽에 포커스를 두고 그걸 공격해 무너뜨리고 나선 그 다음으로 나아가는 방식, 100년 전 공산주의자들이 쓰던 방식을 우리 지식인들이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구태의연한 짓입니까. 얼마나 비 지적이고 비 진보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짓입니까. 왜 신문들을 똑같이 공격하지 않느냐.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똑같이 공격하면 다 들고 일어나기 때문에 이쪽이 당하거든요. 그런데 조선 하나만 공격하면 동아나 중앙 한국쪽에서 강한 라이벌 하나 넘어뜨렸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은근히 공격하는 사람들을 지지도 하면서.” ―전혀 차별성이 없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안티조선 쪽에선 이른바 매카시즘 관점에서 조선일보만이 해왔던 작업이 분명히 있다고 보거든요. 몇몇 정부 인사들에 대한 일련의 사상검증 작업만 해도 지식인사회나 학계 시민운동권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언론계 내부에서도 논란이 됐던 게 사실입니다. 예컨대 문민정부 시절 한완상 통일부총리나 현 정부의 최장집 교수가 물러난 데는 조선일보의 공격이 주효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점에서 조선이 뭔가 다르다고 보지 않습니까. “동아 중앙은 한완상 최장집을 지지했지요.” ―지지라기보다는, 글쎄요. 일정 거리를 둔 것 아닐까요. “나는 지지라고 봤어요. 내가 볼 때 조선은 용기가 있었고 동아나 중앙은 시세 영합적인 면이 보였습니다. 최장집 교수 사건을 예로 듭시다. 최교수가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이 됐습니다. 그거 아주 중요한 자리입니다. 대통령의 주요 정책을 자문하는 자리니까요. 최장집교수 개인으로 보면 아주 훌륭한 학자입니다. 그가 어떤 연구를 하든 국가가 간섭하면 안 됩니다. 신문도 공격하면 안 됩니다. 왜? 우리 헌법이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니까요. 그럼 왜 조선이 그렇게 나왔냐. 그때 나도 조선일보 지면에 같은 논조의 글을 썼습니다. 제목은 ‘공인은 검증돼야 한다’였습니다. 최장집 개인적으로 어떤 연구를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북한을 지지하든 공산주의를 지지하든, 현정부를 비판하든 안 하든 그건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보장돼야 합니다. 단 공인이 됐을 땐 문제가 다르다는 겁니다. 공인이라면 그 사회의 체제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체제인데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이 정부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특히 대통령의 주요 정책을 자문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왜 조선만 공격하나 ―최교수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닌 걸로 아는데요. “최장집 교수 글을 보면 6·25에 대해 수정주의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 관점, 좋은 겁니다. 학자는 여러 관점을 가져야 하니까요. 그런데 6·25는 민족해방전쟁이다, 6·25를 일으킨 북쪽은 민족통일을 위한 세력이므로 나름대로 정당성을 갖고 있다, 이런 점을 글에 은연중 비추고 있어요. 꼭 끄집어낼 순 없지만 그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런 사람이 대통령에게 어떤 자문을 할지,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바라는 일반 국민은 불안하기 한량없고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 의혹을 누가 풀어주느냐. 신문이 나서서 풀어줘야 하는 것 아니요. 언론이 왜 있는 겁니까. 나도 그런 얘기를 썼는데, 마녀사냥식으로 정치학회부터 나서서 몰아붙이고 다른 신문들은 은근히 그걸 지지하고. 그건 시세 영합적인 행동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난 조선이 굉장히 용기 있는 신문이라고 생각해요. 투명성 선명성을 갖춘 신문으로 봅니다.” 송교수는 조선일보 외 나머지 신문들의 ‘비겁함’을 서슴없이 ‘단죄’했다. “분명히 이렇게 써주세요”라고 강조했다. 이어 최교수 비판에 적용한 자유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한완상 전부총리에게는 약간 누그러진 형태로 들이댔다. “한완상씨는 개인적으로도 잘 아는데, 글도 그렇고, 이 분은 자유민주주의자입니다. 이 분이 당시 지식인들과 다른 점은 냉전체제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북한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측면도 있었다고 볼 수 있어요.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지식인이라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이런 사람을 통일부장관에 기용하면 사람들이 의심을 가질 만도 하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냉전체제에서 살아왔고, 북한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테러리즘이 강한 공산주의국가입니다. 그런데 저런 유화정책을 쓰는 사람, 저런 자유주의자를―공산주의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폭넓은 자유주의자지요―장관에 앉히니까 국민이 불안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런 건 신문이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이 아니라 당시를 생각하면 백번 표현하고도 남을 일이지요.”
독자가 판단할 일 ―바로 그런 부분이 기존 체제나 주류 세력과의 충돌이라고 보는데요. 문민정부 출범 초기만 해도 그간의 양극화된 냉전구도에서 벗어나 진보적인 대북정책을 시도하지 않았습니까. 기존 대결구도로는 통일이 요원해 보였으니까요. 자유민주주의체제, 공산주의 체제 딱 둘로 나눠서만 보면 불안해 보이고 위험해보이겠지만 조금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그럼요. 좋은 시각입니다. 한완상씨가 가진 북에 대한 수용적 태도나 진보적 자세를 한 걸음 앞선 통일정책으로 볼 수도 있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그걸 우려하는 사람들의 공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문을 게이트 키퍼라고 하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문지기 노릇입니다. 문지기가 뭡니까. 누구는 들여보내고 누구는 막는 게 문지기 아닙니까. 조선과 달리 다른 신문들은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지요. 그런데 조선처럼 용감하게 나서서 ‘문지기’ 입장에서 당신은 넣어줄 수 없소, 이런 주장하는 신문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신문을 가리켜 극우다, 반동적이다, 냉전체제 지지자다, 이렇게 말하는 건 편협한 일이지요. ‘당신은 당신대로 임무를 수행하라’고 말해야지, 그걸 보고 ‘왜 우리는 가만 있는데 당신만 유독 다르게 행동하냐’고 말하는 건 잘못이죠.” ―안티조선 진영의 구호가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입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언론의 자유나 기능 차원에서 충분히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지만, 조선의 경우엔 문제가 다르다는 겁니다. 극우 신문이 최대 발행부수를 바탕으로 지나친 영향력, 언론권력을 누리기 때문에 그걸 축소시켜야 한다는 거죠. 극우신문답게 그만큼의 몫만, 그에 걸맞은 영향력만 갖게 하자, 그게 이 운동의 목표라는 거지요.
강준만이 누구냐 “제 몫을 찾아준다는 건 뭘 뜻하는 겁니까.” ―마땅히 누려야 할 몫보다 지나친 몫을 누리고 있으니 줄여주자는 거겠지요. “조선일보의 제 몫이란 건 지금까지 이 신문이 지향해온 자유민주주의적인, 시장경제적인, 자본주의적인, 보수주의적인 논조 아니겠습니까. 신문이 사시에 맞게 자기 몫을 수행하는데 ‘영향력이 커졌으니 줄여라’ ‘당신 몫을 줄여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몫은 누가 줄여주는 겁니까. 독자가 하는 겁니다. 154명의 지식인도 독자입니다. 주장은 좋아요. 그렇지만 독자가 원하니까 신문이 많이 팔리는 것 아닙니까. 신문 보고 어떻게 많이 발행하지 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공산주의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지요. 그건 부당한 간섭 아닙니까. 그리고 개인에 대한 권리 침해 아닙니까. 조선일보는 사기업입니다. 사기업에 대해 당신 몫을 줄여라 말라,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경제논리로 보면 사기업이 맞지만 언론이 갖는 공적인 기능을 생각하면 단순히 사기업으로 볼 순 없겠죠. “그렇죠. 국가가 관여할 수 없는 게 개인 기업이고 언론 아닙니까. 그걸 누가 하냐. 시장이 할 수밖에요. 시장을 향해 ‘조선일보 사보지 마쇼. 우리가 보니 조선일보, 나쁩니다’,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조선일보를 향해 ‘당신 영향력 줄여라’, 이렇게 말할 순 없는 겁니다. 독자에게 그 신문 보지 말라고 할 순 있죠. 그러나 그것도 법에 저촉되겠지요. 개인 영역을 침해하는 거니까. 이걸 두고 제 몫 찾아주기 한다, 영향력을 줄인다, 세상에 이런 건방진 말이 어딨어요. 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지식인의 말이 아닙니다. 무지입니다, 무지.” ―‘제 몫 찾아주기’라는 말은 강준만 교수가 처음 쓴 표현인데, 그게 안티조선 진영의 구호가 됐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무지한 겁니까. 난 누군지 잘 모르지만, 아마도 언론학자 아니겠어요. 언론학자가 언론의 ABC도 모른다는 소리 아니요.” 강준만 교수는 월간 ‘인물과 사상’ 2000년 3월호를 통해 송교수를 ‘극우 코미디’라며 혹독히 비판한 바 있다. ―안티조선 쪽에선 조선일보를 특수한 언론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특수하다는 건 그 신문에 대한 질투고 시기지. 지식인이 질투와 시기를 갖고 특정 신문을 비판한다면 더 이상 지식인이 아니죠. 무지죠.” ―시장에서 독자들에게 맡기고 판단할 문제라고 하셨는데, 안티조선 쪽에서도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를 일종의 소비자운동이라고 주장합니다. 불량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펴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이 운동엔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것입니다. “불량품이라 합시다. 그 판단은 누가 합니까. 독자가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안티조선운동에 나선 지식인들이 일종의 계몽주의적 시각을 가진 듯합니다. “계몽주의운동을 하려면 자격을 갖춰야지요. 그 사람들이 계몽주의자입니까. 무지몽매한 자들일 뿐입니다. 불량품 규정은 소비자가 하지요. 신문의 경우엔 독자가 하지요. 독자가 판단해 불량 신문이라면 안 사보면 됩니다. 소비자가 불량품 안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독자들이 불량품으로 안 받아들이면 어떡할 겁니까. 그 신문, 두드려 부술 겁니까. 오히려 부수가 더 늘고 더 영향력이 커지면 어떡할 겁니까. 계몽주의적 시각에서 목탁 노릇을 하겠다는, 그런 오만함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들은 목탁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 목탁을 따라야 하는 무지몽매한 백성입니까. 그건 그들 자신이 무지몽매하다는 말밖에 안 돼요.” ―안티조선 쪽에선 통일정책이나 국가보안법, 공안사건, 시국사건 등에 대한 조선일보의 논조나 보도태도가 통일에 걸림돌이 되고 우리 사회의 개혁과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공적으로 규정하는 것이죠. 무지몽매라는 말을 강조하시는데, 가치판단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무지몽매한 자들 “가치판단의 문제죠. 그런데 왜 무지몽매라는 말을 쓰냐 하면, 그 사람들이 내 가치와 다른 가치는 몰가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몰가치란―사회학에서는 이 말을 가치 중립이라는 뜻으로 쓰니 구별해야 합니다―당신 가치는 왜곡된 것이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 가치가 중요하면 남의 가치도 중요한 줄 알아야 합니다. 가치란 신념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신념을 갖고 있어요. 내 신념은 옳고 당신 신념은 잘못됐다고 하는 것만큼 잘못된 게 어디 있습니까. 바로 그런 점에서 무지몽매라는 것이죠.” 송교수는 통일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기자가 제시한, 현 정부의 통일정책에 대한 모 일간지의 여론조사 결과에 의문을 나타냈다. 여론조사에서 지지응답이 많이 나온 것과 우리 사회의 사상적 주류가 이를 지지하는 것은 별개 문제라는 것이다. “절대 다수 국민은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민주주의 실현이 통일이나 민족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지요. 통일은 됐는데 자유민주주의가 실현 안 된다, 민족이 하나가 됐는데 자유민주주의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그 통일과 민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조선일보가 지향하는 것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동아나 중앙은 안 그렇습니까. 자유민주주의를 우위에 놓는 것, 이게 왜 반통일입니까. 말도 아닌 소리들을 하면서….”
‘NO’라고 외치는 신문 햇볕정책도 비판의 도마에 오른다. “햇볕정책 성공은 김일성 사후 체제수호가 어려워지고 경제적 궁핍 상태에 빠진 북한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입니다. 그런데 현 정부는 북한에 대해 노(No)라고 할 수 없는 상태예요. 김정일 비위 맞추기에 급급합니다. 분단 1세대는 현 정부의 이런 태도에 얼마든지 반대하고 강경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요. 그런 목소리를 대변하는 신문도 있어야지요. 모든 신문이 똑같은 목소리를 낸다면, 하나만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모두들 햇볕정책으로 나갈 때 강한 상호주의를 부르짖는 언론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자유민주주의체제로의 흡수통일을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현 정부의 통일정책은 정치적 목적을 띠고 있는 것으로 그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용기있는 신문이라는 건 일관성을 가졌다는 뜻도 됩니까. “그 철학, 그 논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건 굉장한 용기지요. 154명의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얘기하면 또 욕 먹겠지만.” ―안보상업주의라는 비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말하자면 안보를 상품화한다는 것인데, 객관적 자료에 비춰봐도 그동안 조선일보가 공안사건이나 시국사건과 관련해 과장보도를 하거나 오보로 정정보도를 한 적도 몇 차례 있습니다. “의사는 오진을 하지 말아야 하고 언론은 오보를 내서는 안 됩니다. 의사는 과잉진료를 하지 말아야 하고 언론은 과잉보도를 하면 안 됩니다. 외국 신문들은 부수가 적게 나가도 좋다, 선정주의를 피하고 정확한 보도만 하겠다는 자세가 돼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언론은 그렇지 못합니다. 조선일보도 예외가 아닙니다. 돈 벌기 위해 가장 중요한 안보를 상품화한다는 건 분명 잘못입니다. 그렇지만 조선의 경우 오로지 상업주의만으로 보긴 어렵지 않을까요. 조선 나름의 이념적 지향을 너무 고집하다 보니 안보 문제와 관련해 왜곡보도도 했겠지요. 그러나 그걸 갖고 조선일보 자체를 매도할 순 없다고 봅니다. 어쩌다 한 번씩 있는 일이니까.” ―안티조선 쪽의 논리에 따르면 그렇게 넘어가기엔 조선일보가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너무 크다는 것이죠. “비판 받아 마땅하지만 조선일보엔 그런 비판을 상쇄하고도 남을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조선의 용기지요. 비전향장기수들이 이북으로 가는데 대학생 2000명이 연세대에 모여 환송대회를 열었습니다. 비전향장기수는 간첩입니다. 얼마 전 국군 포로 출신의 탈북자 몇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김영삼 정권 때만 해도 수천 명이 모여 엄청나게 환영했는데, 지금 정부는 다릅니다. 보도가 관제된다는 얘기도 있어요. 이런 문제에 대해 신문이 나서서 강력히 대항해야 합니다. 그런데 조선만 적극적입니다. 바로 조선의 이런 용기가 안보 상품화를 상쇄하는 것입니다. 굳이 공과를 따지자면 공이 과에 비해 훨씬 크지요.”
난 자유민주주의자 화제를 지역주의 문제로 돌렸다. ―안티조선 쪽에선 조선일보가 지역분열주의를 조장하는 데 앞장선다고 비판합니다. “그 얘기는 조선이 다른 신문에 비해 현 정부의 잘못된 인사정책을 많이 공격했다는 뜻 아닙니까. 누구나 피부로 느끼는 문제지요. 조선이 더 많이 보도했다고 해서 그걸 지역분열주의로 보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시민운동권이나 언론계 안팎에서 줄기차게 제기된 비판입니다. 특히 이 문제에 관한 한 김대중 대통령이 누구 못지 않게 조선일보에 피해의식을 갖고 있을 법한데요. “조선일보가 반DJ 성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죠. 지역주의와도 관련되지만, 그보다는 조선이 지향하는 사상과 DJ의 사상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 점이 안티조선 논쟁의 한 축인 듯싶습니다. 안티조선 쪽이 절대 가치를 강요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은 조선일보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 가치는 상대적인 겁니다. 공자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무적야(無適也) 무막야(無莫也)라고. 어느 한쪽이 절대 옳다고 고집해서도 안 되고, 절대 나쁘다고 반대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죠. 자신의 가치만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한다면 그건 공산주의지요. “ 그에게 자유민주주의체제는 안티조선 진영을 공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아울러 이념 논쟁의 유일한 잣대다. 그는 끊임없이 확인한다. 자유민주주의자냐, 아니냐. 그러면 공산주의냐. ―교수님은 우파입니까. “난 자유민주주의자입니다.” ―안티조선 쪽도 자유민주주의자임을 내세우는데요. “자유민주주의자는 자유민주주의자를 보고 우파다, 좌파다 절대 얘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늘 자유민주주의가 통일이나 민족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해온 사람입니다. 만일 이것을 우파라 한다면 우파고 극우라면 극우겠지요. 보수라면 보수고.” ―안티조선 쪽을 좌파로 보십니까. “그건 모릅니다. 다만 특정 신문(조선일보)을, 우파니 보수파니 극우반동이니 하고 말한다면 그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님은 명명백백한 일입니다.” ―안티조선 쪽에선 지식인들이 조선일보에 글 쓰는 것을 비판하는데요. “그건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정적 판단입니다. 글 쓰는 거야 자유죠. 바로 그런 걸 문제삼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신동아 2000년 10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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