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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도 하치오지시 다카오역 인근에 자리한 쇼와
천황릉에 참배하는 사람들. 거대한 봉분 등 4∼6세기에 성행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형태를 띠고 있다. 위압적인 구조와 규모는 메이지 정부가
급조해 낸 권력의 표상. ‘천황의 영혼’이 숨 쉬고 있는 신성한 곳으로 연구자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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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에 단 두 차례 5일간만 개방하는 교토의
고쇼. ‘천황은 신성하고 침해받지 않는다’는 메이지 헌법 제1조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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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릉엔 천황이 없다.” 메이지(明治)
정부가 발굴 조사 없이 고대 고분에 무작위로 이름을
붙인 행위를 비판하는 말이다.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천황(天皇)’이라는 구심점이 필요했던 당시 정권은 대일본제국헌법(메이지 헌법)이 발포된 1889년부터 그간 소재 불명이었던 모든 천황릉의
위치를 확정했다. 또 ‘천황은 신성하고
침해받지 않는다’는 메이지 헌법 제1조에 따라 금족(禁足)령을 내렸고, 지금도 학술 연구를 위한 조사가 허락되지 않는다.
메이지(1852∼1912)·다이쇼(大正·1879∼1926)·쇼와(昭和·1901∼1989)를 제외한 나머지 천황릉의 진위 여부는 사실상 ‘아무도
모른다’.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 조작 행위는 지금도 계속된다. 지난 9월 공개된 쇼와 천황 실록은 침략과 패전 등 일본
근현대사를 담고 있지만 ‘전쟁책임론’을 회피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한·일 양국 갈등의 근원. 문화일보는
2015년 한일협정 50돌을 앞두고 미래 지향적인 양국 관계를 위해 동북아역사재단과 함께 ‘‘천황국’ 일본과의 미래’라는 시리즈를
기획·연재한다. ◇‘인간 선언’을 하고도 추앙받는 쇼와 ‘천황’ = 110여 일간의 투병 끝에 히로히토(裕仁)가
사망한 1989년 1월 7일. 일본 국민은 슬픔에 잠겼고, ‘천황폐하’를 따르겠다며 자살한 사람도 있다. 한국인에겐 ‘전범’(실질적으로 그는
전범재판에서 처벌받지 않았다)으로 기억되는 쇼와 천황은 전후 ‘상징 천황제’ 속에서 ‘인격자’로서 인기를 끌었다. 일본 사회에서 천황제가 어떻게
변용돼 가는지를 추적한 바 있는 구리하라 아키라(栗原彬) 릿쿄(立敎)대 명예교수는 이를 ‘인품(人品)신화’라고 명명한다. 그는 ‘역사와 주체를
묻다’(이와나미(岩波)문고)에서 “전후 천황은 신성함을 잃었지만 다양한 사회영역 활동을 통해 생태주의자, 문화인, 과학자, 가부장 등의 상을
만들었다. 전후 새로운 국체로서의 천황은 오히려 강화됐다”며 천황제를 비판한 바 있다. 히로히토 사후 24년. 쇼와 천황 실록의
‘윤색’ 작업이 완료된 2014년, 그의 무덤 앞에서 만난 풍경은 구리하라 교수의 주장을 고스란히 뒷받침한다. 지난 11월 3일 도쿄(東京)도
하치오지(八王子)시 다카오(高尾)역 인근에 자리한 쇼와 천황릉. 거대한 봉분 앞에 일본의 한 가족이 깍듯하게 묵념을 올리고 있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마을을 가로질러 20∼30분간 이어지는 참배도(參排道)를 따라 걸으면, 반듯한 산들이 감싸고 있는 쇼와 천황릉을 만날 수 있다.
부근에는 쇼와 천황 부인의 능, 그리고 쇼와의 아버지 다이쇼(大正) 천황과 그 부인의 능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궁내청 소속 경비원이 쉬지 않고
능 주변을 정돈하며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시킨다.
화장(火葬)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 유일하게 매장되는 ‘존재’.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하는 천황릉은 그 자체로 ‘권력’이다.
◇메이지 정부의 ‘작품’, 천황 숭배 = 비록 ‘인격화’했지만 군국주의의 구심점, 쇼와 천황은 여전히 ‘신’으로 기억된다. 무덤
입구에 ‘Guide of mausoleum worshipping(참배안내)’이라고 쓰여진 영어 표지판만 봐도 알 수 있다. 허버턴 빅스 미국
빙햄튼대 교수는 ‘히로히토 평전’(삼인)에서 쇼와를 “20세기 일본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형용하기 어려운 정치적 인물”로 평했는데, 사실
쇼와 천황은 메이지 정부가 창조한 ‘천황 숭배’ 문화의 결과물이다. 밀려드는 서구 사상에 대항할 일본 전통사상을 발굴하기 위해 메이지 정부는
“진무(神武) 천황의 건국정신으로 돌아가, 국민이 일치단결해 근대국가 건설에 매진하자”는 슬로건을 내건다. 그러면서 에도(江戶)시대 260년
동안 대중 앞에 노출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천황을 시각화한다. 역대 천황의 능들을 정비하고, 천황의 전국 순행을 실시한 것.
‘일본 신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책세상)에 따르면 메이지 정부는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을 반포한 직후, 고고학적 조사도
없이 산재해 있던 고분에 천황릉의 이름을 붙였다. 저자인 김후련(글로벌문화콘텐츠학) 전 한국외대 교수는 “고고학자들이 아무리 발굴을 하자고 해도
궁내청이 절대 허락할 수 없는 이유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천황 숭배는 ‘급조’된 고전이다. 교토(京都)에 자리한 메이지 천황릉은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울창한 숲과 높은 계단 등 주변 조성물만 살펴봐도 정부의 ‘천황 신격화’의도가 엿보인다. 능 인근에는
메이지 천황을 따라 자살한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1849∼1912)를 모신 노기신사가 있다. 근대 천황제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메이지
천황의 생일은 11월 3일로, 국가지정 공휴일인 ‘문화의 날’로 기억되고 있다. ◇천황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신국(神國)’ =
지난 11월 4일에는 교토의 고쇼(御所·천황의 처소)가 특별개방(10월 30일∼11월 5일) 중이었다. 고쇼는 헤이안(平安)시대부터 메이지
2년까지 천황이 기거했던 곳으로, 고대의 건물이 잘 보존돼 있다. 시대에 따른 건축양식의 변화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유적지인데, 1년에 단 두
차례 각 5∼7일간만 일반에 공개한다.김민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접근이 쉽지 않은 존재, 신비로움 등으로 천황 이미지를
구축하는 방법이다”고 설명했다. 고쇼 내의 분위기는 마치 축제 같았다. 고쇼 개방에는 일본 내에서만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몰린다. 지역 특산품을
파는 장도 서는 등 활기차다. 고쇼 관람을 마친 관광객들은 출구 앞에서 천황 가족의 사진으로 구성된 달력이나 국화 문장(紋章)이 그려진 다양한
기념품을 구매한다. 이날은 특히 국화 모양 빵과 과자가 잘 팔리는 분위기였는데, 야스쿠니 신사 관련 뉴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본 황실의
독점적 표상인 국화 문장과 황실 깃발도 모두 메이지 초기의 발명품이다.
도쿄·교토 = 글·사진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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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협정 50년…‘天皇国’ 일본과의
미래 |
게재 일자 : 2014년 12월 15일(月) |
정치가 망언 등 현상 집착말고 일본인 ‘역사관’ 문제
삼아야 |
‘일본 神話’ 전문가 김후련 前 한국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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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련(글로벌문화콘텐츠학.사진)
전 한국외대 겸임교수는 별명이 ‘니혼진 다오시(日本人 倒し·일본인을
쓰러뜨리는 사람)’이다.25년간 일본 신화와 천황제를 연구한 일본 ‘통(通)’인 데다, 한·일 학자들이 드러내기를 꺼리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발언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 주부, 연구자 등 다양한 일본인들 앞에서 허구의 일본 신화를 바탕으로 한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폭로했다. 지난 10일 ‘일본 신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저자이기도 한 김 전 교수를 문화일보 본사에서 만났다. 그는 최근
대학
강연도 내려놓고 후속 저술에 집중하는
중이라고 했다. ―천황 숭배는 오랜 역사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본국의 정체성 그 자체로 군림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일본인들조차 역사가 오래됐다고 착각하는 천황 숭배는 근대 메이지
정부의 작품으로, 일종의 ‘창조된 고전’이다.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만든 당사자들은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천황제를 이용하려고 한 것이지,
천황 그 자체를 숭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을 겪으며 천황은 현인신으로 각인됐는데,
전전의 철저한 주입식 교육
결과다.”―이 ‘창조된 고전’이 왜 현대사에서 문제가 되는가. “‘역사는 과학이 아니다’라고 한 니시오
간지(西尾幹二)를 필두로 한 우파 지성인들의 역사재평가 운동에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과서 개정을 요구하는 차원을 넘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방향으로 그 물꼬를 텄다. 우익 정치가들이 남발한 망언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저서에서 ‘종전 조서의
자기기만’을 지적한 바 있는데, 전후 일본의 역사 왜곡은 이미 예견된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쇼와 천황이 ‘종전의 조서’에서
전쟁에 대한 책임 있는 발언이나 사죄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적다. ‘종전의 조서’는 과거사에 대한 집단 망각과 책임
회피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현재 동북아시아에서 과거사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오랫동안 일본 신화와 천황제를 연구한 학자로서 한·일 양국의 정치인이나 학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천황제 이데올로기로 인해 일본인에게 ‘건전한 애국심’이 결여돼 있는 것처럼, 한국인에게는 일본에 관한 ‘이성적 판단력’이 결핍돼
있다. 한국의 지성에 큰 책임이 있다. 정치가의 망언이나 교과서 기술
문제 등 현상에만 집착하지 말고 근원적으로 접근해 일본의 ‘역사관’을 문제 삼아야 한다.” 글 = 박동미 기자, 사진 = 정하종
기자
maloo@munhwa.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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