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목조 사원건축으로 뛰어난 것들이 많지만 전문가들은 부석사 무량수전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기품을 갖춘 건물이라고 말한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의 하나인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것이지만 그보다
앞선 시대의 기술에 기반함으로써 유사한 여타 사찰 건축물과도 비견할 수 없는 비례미를 갖추었다는 평가다.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에 대해 김동현
석좌교수가 꼼꼼히 짚어보았다. / 편집자주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에 자리한 명찰 부석사는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한국 전통 건축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며 우수 전통건축의 첫 번째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부석사 여러 건물 중에서도 최절정에 달한 건물은
무량수전이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건축 중 두 번째의 오랜 것으로 14세기보다 앞선 시대의 양식이나 전형을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건물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전체 구조를 보면 앞면 5칸(18.75m), 옆면
3칸(11.57m)으로 측면 대 전면비율이 1 대 1.62의 황금비율을 나타내고 있어 놀랍다. 건물은 가구식 석기단 위에 세워졌고 기둥 머리에는
주심포식(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은 양식) 공포를 얹어 지붕 하중을 받고 있는데 그 모습이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어 마치 꽃이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삼국시대에는 공포를 ‘花斗牙’라고 불렀던 것 같다. 지붕은 날렵한 팔작지붕 모양이다. 건물의 전면관 비례를 보면 기단
밑에서 처마까지 그리고 처마에서 용마루 윗선까지의 비례가 1 대 1로 되어 있어 입면관에서 느끼는 가장 안정된 비율이며, 지붕만을 보면
내림마루에서 귀마루로 꺾이는 변절점이 지붕 전체 높이의 2분의 1 지점이어서 이 역시 안정감을 준다. 여기에 기둥의 귀솟음, 안쏠림 기법은 다른
건축이 따를 수 없는 점이다.
텅 빈 공중에 선을 조각해 넣은 것 같은 이러한 공간적 안목 속에서
완성된 팔작지붕의 자태는 지극한 아취미를 자아내기 마련이다. 인적이 끊어지는 겨울 입구에서 이 잘생긴 이마가 新雪에 곱게 싸여있는 모습을 볼
때면 “호젓하고 스산하기” 이를 데 없다가도, 봄날 지붕 위로 날아온 풀씨가 꽃이라도 틔울 때는 곱게 나이 먹은 여인네가 외출 단장을 한 것처럼
주변의 적막이 화사해지니 이 무슨 시간의 作亂인가.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돌아보나 단정하고 날아갈 것 같은 아취는 천년
세월이 빗겨준 이 자분자분한 지붕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다.
혜곡은 무량수전을 일컬어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라며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 없다고 감탄한 바 있다. 또한 전체적인
느낌으로 봐서도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 없이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이라며 그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나 자문자답하곤 했다.
무량수전의 묘미는 내부 설계에 대한 관찰과 이해를 통해 몇 번이나
새롭게 거듭난다. 전각문을 통해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아미타부처님이 건물 중앙에 자리하지 않고 서쪽에 안치되어 동쪽을 응시하고 있다. 이 또한
무량수전 내부공간의 의미있는 발상이다. 이러한 전각은 마곡사 대광보전, 불갑사 대웅전, 고산사 대웅전 등에서도 보이지만 여백으로 남아있는
공간구성과 처리, 그리고 건물과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무량수전에 비견할 수 없다. 내부에 배열된 열주는 서쪽에 모신 아미타여래상을 한층 더
장엄하고 깊이감 있게 만들었고 열주와 열주 사이의 주칸 크기의 1.62배 크기가 건물의 내부 높이로 되어 있어 이 역시 황금분할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부의 공간은 천정을 별도로 설치하지 않고 소위 연등천정으로 구조 전체를 보이도록 처리하였는데, 이는 구조재를 그대로 의장재화 할 수
있다는 공장으로서의 당당한 자신감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법은 고려시대의 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어 당시의 대목들의
기술 수준을 가늠하기에 어렵지 않다. 현대건축에서도 의장을 위한 의장재보다 구조재이면서 의장재 역할도 겸하게 하는 기법이 최상의 기술이라고
말들을 하는데 이러한 기법이 당시에 이미 크게 주목 받았던 기법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部材의 디테일에서 보면 현존하지 않는 앞선 시대 건물의 건축양식을
추정할 수 있는 부분들이 보여 건물의 조형미도 조형미이지만 한국목조건축의 뿌리를 찾는 중요한 요소들을 이 건물이 내포하고 있어 더욱 흥미로우며,
현존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천만다행으로 여겨진다.
그 중요한 요소가 공포부재인 遮(고건축 구조의 柱頭[기둥머리] 또는
小[받침] 위에 도리[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와 평행방향으로 얹힌 짤막한 공포부재의 한 가지), 退樑머리의 조각문양에
보인다. 이 세부조각은 그 모양이 소의 혀 모양과 같다고 하여 ‘쇠서’(牛舌)라 부르는 부재인데 그 모양을 자세히 검토하면 불국사의 범영루 밑
석주에서 보이는 운문과 통하고, 시대를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의 법륭사 금당이나 5중탑에서 보이는 雲形 첨차 모양을 연상케 한다. 우리가
쇠서라 하는 문양은 그 원조가 구름문양이며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쇠서모양으로 퇴화한다. 그리고 이 문양은 수덕사 대웅전을 거쳐 조선시대의 무위사
극락전, 그리고 그 이후 익공이라는 한국건축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건축조각으로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무량수전은 구름문양이 익공식으로 전환하는
기준 위치에 있어 그 가치가 배가된다.
무량수전은 부석사 전체의 구조 속에서 살펴보면 안목의 뛰어남을 더
알게 된다. 伽藍(중이 기거하면서 불도를 닦는 곳)의 배치내용을 보면 산지가람이면서 종심형 공간구조를 이루었고, 축을 따라 입구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차차 높아지면서 공간의 분할이 이뤄지는데 제1공간에서 제4공간(일주문→사천왕문→범영로→안양로→무량수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한국사찰
배치의 기본구성 요건으로의 특징이라는 四聖諦 苦集滅道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 구성은 축을 일직선축이 아닌 소위 절선축으로 축을 꺾어 건물들의
좌향이 일정하지 않아, 다른 사찰과 비교해 볼 때 이것이 부석사의 가장 큰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일직선축으로 된 건물들의 배치에서는 앞
건물에 가려서 뒷 건물이 보이지 않으나 절선축에 따른 건물 배치는 진입으로부터도 종국에 있는 건물까지, 그리고 종국의 건물에서 진입 방향으로
비스타(Vista) 기법의 전형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 기법은 사실상 이 사찰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는 요인이다. 반대로 각 건물들의
위치에서 전망하면 시원스럽게 앞이 트여 넓고 먼 전경이 한눈에 들어와 시선장애가 없다. 이러한 건물배치의 의도가 한 공장의 힘으로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사상가에 의해 계획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하여간 그 절묘함을 필설로 담기 어려울 뿐이다.
부석사의 창건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인 676년(문무왕 16년) 2월,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이 그 당시의
모습은 아니고, 그 이후 경문왕대(861~874)에 신림(의상의 손제자)大德의 제자들인 법융, 진수, 순응, 질응 등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면서
부석사 화엄종이 크게 중흥되었고 더불어 국가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큰 규모의 사찰로 변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남아있는 대석단을
비롯한 여러 석물들이 그 당시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원융국사가 주석하였고 그의 비석이 남아있어 부석사의 변천을 알 수 있으며 고려
말에는 진각국사 원응이 이곳에 머물면서 현재의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의 부석사는 여러 차례의 화재와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제외한 건물들의 건립연대도 중수기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여러 시문들이 발견되어 당대의 부석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무량수전, 조사당이 1916년에 해체수리가 이뤄지고 1977년부터 1980년까지는 전체
寺域에 대한 정화 중창공사가 이뤄져 일주문, 천왕문, 숭당 등이 새로 세워졌다.
김동현 /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
필자는 동경대에서
‘황룡사 건축계획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원과 국립문화재연구소장 등을 거쳐 동국대 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
목조건축의 기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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