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術, 敎育

한국의 서원(서당), 그리고 중국, 일본 서당과의 비교

이강기 2015. 10. 13. 22:04
절제되고 검소한 자연미
한국의 美 -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도산서원 도산서당
2006년 11월 27일 교수신문 김지민 목포대 editor@kyosu.net

 

서당은 조선시대 공부방이다. 동네 아이들이 모여 ‘하늘 천 따지 …’를 외우던 서당의 분위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곳이 도산서당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소박함과 단촐한 구도는 공부하는 이들의 마음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한다. 김지민 목포대 교수가 도산서당의 역사적·건축학적 아름다움을 살펴 봤다.

단촐한 맛배지붕의 공부방

 

陶山書堂은 도산서원 내의 아래쪽 동쪽 편에 있는 작은 건물로 규모로 보나 자리로 보나 경내에서 그리 크게 눈에 들어오는 집은 아니다. 하지만 이 집은 退溪 李滉(1501~1570)의 높은 인격과 학문 세계를 엿 볼 수 있는, 그리고 도산서원의 토대가 된 의미 있는 건물이다.

현존하는 수 많은 서원 중 한국서원의 대명사로, 한국서원의 메카로 꼽을 수 있는 서원이 있다면 우리는 주저함 없이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한 陶山書院을 들 것이다. 그러한 까닭은 바로 이 서원의 중심에 퇴계선생이 있기 때문이다.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이제 강이 호수가 되고 서원으로 오르던 옛길도 사라졌지만 지금도 서원의 깊은 역사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만큼 변함이 없다.

퇴계가 70세로 생을 마감한 후 그의 제자 및 유림들이 3년상을 치르고 바로 선생의 배움터였던 서당 뒤편에 땅을 고르고 사당과 강당을 지은 것이 바로 도산서원이다. 이때가 선조 7년(1574)이고 바로 다음 해에 賜額을 받았다.

이처럼 빨리 서원이 세워진 예는 없었다. 보통 당시 주향자가 세상을 뜬 후 몇 십년 후에나 가능했던 일을 생각하면 크게 비교가 된다. 예로 남계서원의 경우는 鄭汝昌 사후 48년 후인 1552년에, 옥산서원은 李彦迪 사후 19년이 지난 1572년에, 도동서원은 金宏弼 사후 1백1년이 지난 1605년에 건립됐다. 당시 후학들의 생각에는 퇴계선생의 학풍을 잇는데 한시라도 늦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깨달았던 것 같이 보인다. 한편 선생이 생전에 서원 보급에 적극적이었던 점도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퇴계는 분명 조선이 낳은 세계적인 대 유학자다. 생활태도 면에서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는(知行竝進) 자세를 늘 지녔고, 자연을 사랑했으며, 스승으로서의 역할도 대단했다. 서애 유성룡, 한강 정구, 학봉 김성일, 고봉 기대승, 월천 조목도 퇴계 문하의 수제자였으며 이 외 수백 명의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여러 면에서 퇴계는 도학적 인격체를 갖춘 조선의 모범 선비상이라 할 수 있다.

16세기 조선의 선비들은 朱子에 대한 숭배열이 최고조에 달했다. 주자가 세운 白鹿洞書院이나 武夷精舍 같은 것이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즉 사대부들은 살림집과는 별도로 풍광이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하여 그 곳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학문도 하고 벗들과 교제를 하는 작은 집을 지었다. 퇴계 역시 그러한 주자의 학문경영모습을 따른 것 같이 보인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짓기 전 가급적 관직에서 멀리하기를 원했고 틈이나면 고향에 내려와 배움터를 마련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46세이던 1546년 11월에 완공한 養眞庵이다. 이 해는 을사사화와 함께 부인 안동권씨가 별세한 매우 슬픈 해였다. 양진암은 兎溪라는 시내의 東庵에 건립하였는데 이때 토계를 자신의 호인 퇴계로 고쳤다.

1548년 48세에는(명종 3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였으나 일부러 외직을 자청하여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풍기군수로 전임되고 1550년 2월에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명종으로부터 받아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었다. 다시 퇴직하여 향리에 돌아와 50세에는 자운봉 밑에 서실을 경영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竹洞으로 옮겼으나 협소하고 계류가 없어 다시 계상으로 옮겨 寒栖庵을 지었다. 율곡이 퇴계를 예방한 것도 이 한서암에 있을 때이다. 당시 초야에서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픈 퇴계는 다음과 같은 시 한 구절을 읊었다.

“身退安愚分 몸이 벼슬에서 물러나 분수대로 편안하나 / 學退憂暮境 학문이 퇴보하여 늙었을 때가 걱정이네. / 溪上始定居 비로소 시내 위에 자리할 곳 마련하니 / 臨流日有省 흐르는 물가에 와서 날마다 반성하네.”
이듬해인 1551년에도 한서암 가까운 계곡에 溪上書堂을 짓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곳은 계곡 가에 있어 너무 고요하고 적막하여 마음을 넓히기에 적당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과 강학하기에 공간적으로 너무 좁았다.

퇴계 나이 57세이던 1557년에 그의 마지막 거처가 된 도산서당 터가 도산 기슭 남쪽에 마련되었다. 그곳은 강과 들이 바라다 보이고 초목이 무성하여 은둔하면서 강학하기에 매우 좋은 곳이었다. 설계는 평면부터 세부 부재 치수까지 직접 퇴계가 하였고 공사는 오래전부터 교류가 있었던 인근 龍壽寺 승려 法蓮과 그의 제자 淨一이 맡았다. 아마 만년의 안식처라는 기대감과 함께 그간의 건축적 경험이 새로운 서당을 짓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퇴계가 이 집을 짓는데 얼마나 많은 건축적 식견을 가지고 있는지는 그가 조정에서 1558년 7월에 李文樑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문량은 지중추지사를 지낸 당대 명시인으로 노년을 고향인 퇴계집 근처에서 보냈다.

“… 當을 반드시 정남향으로 잡는 것은 禮를 행하는데 편리하도록 함이고, 齋는 반드시 서쪽 정원을 마주하도록 한 것은 아늑한 정취가 있기 때문이고, 그 나머지 방·부엌·곳집·대문·창호 등도 모두 뜻이 있는 것이니 이 구조가 바뀌어서는 안 될 듯싶습니다. 남쪽 변의 세 칸에 들보와 도리의 길이를 여덟 자로 하고 ….”

 

이 서당은 땅을 구하고 4년여 만인 1560년 11월에 완공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61세에도 도산서당 서쪽 편에 제자들의 숙소를 마련하였는데 그게 바로 雲精舍이다. 이 집이 퇴계가 지은 마지막 건물이며 건물형태도 ‘工’자형으로 매우 특이하다.

60세 되던 해에 완성한 도산서당은 퇴계가 말년까지 학문처로 삼은 곳으로 퇴계의 자연관, 건축관 그리고 학문적 이상이 모두 응축되어 있는 곳이다. 3칸의 기본구조에 우측으로 익첨 1칸을 덧대는 8평 남짓 정도밖에 안 되는 이 검소한 공간에서 원대한 성리학의 섭리를 밝혀낸 것이다. 3칸 8평 공간이란 일반 백성들이 살았던 민가만도 못한 규모이다.

이 건물을 짓기 전의 퇴계의 관리 경력(풍기군수·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대제학 등)과 경제력으로 본다면 상당한 규모의 서당건축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면이 바로 퇴계의 큰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한다. 퇴계는 동쪽의 대청 한 칸을 巖棲軒이라 하였고 그가 거처한 중앙의 방 한 칸을 玩樂齋라 하였다.

 

암서헌이란 “(학문에 대한)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했다가 이제 바위에 깃들여 조그만 효험이라도 바란다"라는 주희의 雲谷時(自信久未能 巖栖冀微效)에서, 완락재란 역시 주희의 名堂實記(樂而玩之 足以終吾身 而厭不)에 나오는 “좋아서 구경하는 것을 즐기니 족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라는 글에서 취해 만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서당은 자연에 최소한의 개입만으로 큰 우주를 그려낸 퇴계의 맑고 깨끗한 정신이 서려있는 곳이라 하겠다. 구체적인 서당의 건축적 모습은 다음과 같다.

기단은 자연석을 가공 없이 2벌대로 쌓았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고 그 위에 각주를 세워 납도리와 보를 사괴로 얹혔다. 각주 위로는 반듯하게 곧은 보를 걸고 그 위에 짧은 동자주를 놓은 다음 용마루 도리를 놓았다. 용마루 도리만큼은 장혀 받침이 있는 굴도리를 걸어 주목이 된다. 지붕구조는 본래 맞배지붕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후에 양측으로 작은 협간을 두면서 이곳에 빗대게 이어놓은 것으로 여겨진다.

퇴계는 도산서당이 완공된 후 1년쯤 후인 61세 겨울에 다음과 같은 시 한절을 읊어 인생의 노년을 자연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나타냈다.

“大舜親陶樂且安 순 임금은 친히 그릇을 구워 즐겁고도 마음이 편안했고 / 淵明躬稼亦歡顔 도연명은 몸소 농사를 지으니 얼굴 역시 기뻐 보였네. / 聖賢心事吾何得 성현의 마음을 내가 어찌 알겠냐만은 / 白首歸來試考槃 백발이 된 나이에 돌아와서 즐거움을 누려볼까 하노라.”

결론적으로 도산서당의 건축적 의미는 절제되고 검소한 자연미에 있다. 작은 부엌 하나, 방 하나, 대청 하나만을 둔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최소한의 공간만을 추구하였고, 구조 또한 흔한 익공식 마저도 배제한 채 민도리식을 고집하였다. 위엄 있는 팔작지붕 대신 단출한 맞배지붕으로 상부를 덮었다. 이 작은 3間집에 진정한 조선 선비의 참뜻이 있는 듯하다. 조선조 유교건축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도산서당이 아닌가 한다.

정신적으로도 퇴계로부터 진정한 삶의 방법, 학문적 자세를 배워야 한다. 퇴계는 비석에 글을 써넣는 묘비를 하지 말고 다만 조그마한 돌에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쓰고 뒷면에는 단지 고향과 世系 등 대강만을 쓰라고 유언을 남기고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요즘 호화분묘와 큰 비석을 세우는 자들에게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김지민 / 목포대 · 건축사


 

필자는 단국대에서 '향교건축의 조영규범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국의 유교건축', '전남의 서원·사우(공저)', '전남의 향교(공저)' 등이 있다.

 

 

 

건물과 공간의 빼어난 어울림
한국의 美 -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하회 병산서원
2006년 12월 07일, 교수신문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editor@kyosu.net

 

하회 병산서원은 뛰어난 조형미를 갖춘 건축물은 없지만 건물과 건물, 자연과 건물 사이에 빚어지는 텅 빈 공간들의 어우러짐으로 인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병산서원의 소박한 건축물들이 "뛰어난 집합적 관계를 성취했다"고 지적하면서 "명품이 없는 명작, 건물이 없는 건축"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 병산서원은 낯선 존재였다. 그저 시골 한 구석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옛 집의 하나로 여겨졌을 뿐이다. 이른바 신미존치(辛未存置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 제외되어 살아남은) 서원 가운데 하나였고, 전시 재상으로 임진란을 극복해낸 류성룡 (柳成龍 1542 ~1607)의 기념서원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그나마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문화재로 지정한 때가 1978년으로, 같은 고장의 도산서원이 1963년에 문화재로 지정된 것에 비해 한참 뒤늦은 때였다.

그러나 1990년경부터 일군의 건축가들은 병산서원을 가장 뛰어난 한국의 건축유산으로 꼽기 시작하여 지금은 일반인들에게도 꽤 알려진 서원건축이 되었다. 현재 사적 260호로 지정된 병산서원에는 뛰어난 문화재도, 명품이라 부를 건축물도 없다. 서원의 핵심건물이라 할 수 있는 강당(입교당) 건물은 1930년대 다시 지어져 연대기적 가치도 낮고, 배흘림 기둥을 가진 부석사 무량수전 같이 특별한 조형미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건축으로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 620여 개소에 달했던 서원은 1864년 서원철폐령으로 전국에 47개만이 남게 되었고, 그 중에는 제사만 지냈던 사우들이 포함되어 정통 서원은 불과 27개소였다. 그나마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원형이 훼손되어, 조선시대의 온전한 모습이 보존된 곳은 10여개 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현존 서원들은 예학에 근거한 건축적 규범을 따르면서도 서로 다른 개성들을 가진 창조적 건축들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할까? 230여개 소에 이르는 관학인 현존 향교들은 4~5개 건축형식으로 환원될 정도로 획일화된 양상을 보이지만, 10여개 현존 서원건축들은 다양하면서도 뛰어난 건축적 가치들을 전하고 있다.

병산서원은 교육부분과 제사부분, 여타의 작업부분으로 이루어졌다. 교육부분은 강의동인 강당,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도서관이라 할 장서각으로 구성된다. 제사부분에는 사당과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전사청이 있다. 서원 유생들의 음식과 잡일을 수발하는 서원노들의 작업건물이 동편에 부속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병산서원을 병산서원답게 만들고 있는 누각인 만대루가 서원의 입구에 자리 잡았다. 건물의 종류와 기능들은 여타 서원들과 다를 바 없는 건축적 규범을 따르고 있다.

집합적 건축의 아름다움

이들 건물들은 규모가 크지도 않고 정교하거나 화려하지 않으며, 다른 서원의 건물들과 비교해도 결코 우수하다고 할 수 없다. 병산서원의 어떤 건물도 그 흔한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다는 사실만 봐도 그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산서원은 현존 서원건축을 대표할 뿐 아니라, 모든 건축을 통 틀어도 조선시대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곤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뛰어난 건축이란 곧 뛰어난 건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옥시모론적 언술을 이해해야만 병산서원, 나아가 한국건축의 본질과 가치에 접근할 수 있다.

병산서원의 가치는 그 여러 동의 건물들이 얽혀지면서 만들어 내는 관계에 있다. 강당과 동서재가 만들어 내는 텅 빈 마당, 강당마당과 사당 앞마당의 절묘한 이어짐, 누각 밑을 통과하면서 나타나는 신선한 광경 등이 그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건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건물과 건물 사이에 형성된 비어있는 외부공간들에 참된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마치 사군자 그림의 진면목이 유려한 선으로 그려진 난초의 잎 모양보다, 그 선들로 분할되는 흰 여백에 주목할 때 문인화의 참된 가치를 읽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건축은 건물이 아니라 건물들이 형성하는 관계이며, 그러한 건축을 집합적 건축이라 부르기로 하자.

물론 개개 건물의 형태적 우수함도 중요하지만, 특정 건물이 지나치게 두드러진다면 오히려 다른 건물과의 관계성을 약화시킬 수가 있다. 병산서원의 소박한 건물들은 뛰어난 집합적 관계를 이루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집합적 건축의 성취는 비단 병산서원만의 자산은 아니다. 도산서원이나 옥산서원, 통도사나 해인사, 창덕궁이나 종묘 등 한국의 명작들이 모두 도달한 보편적 성취이다.

안동지방의 동쪽에 자리 잡은 이황의 기념서원인 도산서원은 여러모로 병산서원와 비교된다. 류성룡은 이황의 수제자이며 정치적 계승자이기도 하다. 두 서원건축은 일단 형식적 유사점이 많다. 서원의 두 중심인 강당과 사당의 관계는 서원건축의 형식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대부분의 서원들은 사당이 강당의 바로 뒤편에 자리 잡아 매우 엄격한 중심축을 형성한다.

그러나 유독 이 두 서원만은 사당이 강당의 동쪽 뒤편으로 치우쳐 앉아있다. 피상적으로 본다면 비대칭적이고 예학적인 서원의 형식으로 어색할 것 같지만, 사당 앞의 독립된 제사마당이 강당 앞 교육용 마당과 유기적으로 연속되는 자연스러운 구성이다. 초기 성리학자들의 융통성이랄까, 또는 실용적인 여유랄까 하는 것이 두 서원에 스며있다.

그러나 도산서원의 건물들은 강당과 사당이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정교하고 견고하게 지어졌다. 투박할 정도로 질박한 병산서원의 건물들과는 다른 격식이며, 아마도 퇴계에 대한 범국가적 차원의 지원의 결과가 아닐까? 또한 경관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다. 두 서원 모두 강변 경승지에 자리 잡았지만, 도산서원의 내부에서는 강변 풍경이나 멀리 전개되는 들과 산의 모습이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오붓하게 감싸여진 지형 속에서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는 퇴계와 제자들의 면학 분위기가 돋보인다.

자연을 수평 분할하는 누각기둥

그러나 병산서원은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집합적 관계를 이룬다. 강당의 대청에 앉아 밖을 내다보자. 양 옆의 동재와 서재는 안마당을 감싸면서 마당의 공간적 방향성을 앞으로 몰아간다. 그 앞에는 기둥과 지붕만 있는 이상한 건물 -만대루라는 기다란 누각이 걸쳐진다. 만대루는 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풍경을 상하 3단으로 분할한다. 지붕 위로는 멀리 앞산의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그래서 앞산의 이름이 병산이다- 누각 아래층으로는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입구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사이, 누각 마루와 지붕 사이로는 조용히 흐르는 낙동강이 가득히 담겨진다. 누각은 7칸의 긴 건물이다. 누각의 기둥들은 다시 낙동강을 수평적으로 분할하여 7폭의 병풍이 된다.

이 광경은 우연히 얻어진 장면이 아니다. 강당 대청 가운데는 서원의 최고 어른인 원장이 앉는 자리이다. 원장과 교수진들은 이 자리에 앉아 학생들을 바라본다. 자연스레 교수진의 시선은 만대루를 향하게 되고, 텅 빈 누각을 통해 낙동강과 앞 병산의 풍경을 보게 된다. 반면 학생들은 이런 경치를 대할 각도가 없다. 늘 학생들은 원장이 계시는 입교당을 쳐다봐야지 바깥의 경치를 보게 되면 한 눈 파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성리학적 세계는 군자-소인, 스승-제자, 장-유의 수직적 위계로 이루어진 종법(從法)적 질서의 세계이다. 제자들을 스승을 바라보며, 스승들은 그들보다 더 우위에 있는 자연을 바라본다. 늘 자신들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존재들을 향하는 시각 구조이다.

만대루는 건물 자체로서는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 누각은 감상용 건물이 아니다. 그러나 만대루는 건물과 자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대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맺어주는 매개체이다. 작품의 액자와 같은 건물 -액자는 단순하고 간단할수록 좋다. 액자가 크고 화려하면 그 안에 담기는 작품이 죽는다. 카메라의 파인더와 같은 건물. 인간을 둘러싼 자연 환경은 무한하지만, 만대루를 통해 선택된 자연은 의미가 부여된 특별한 풍경이 된다.

건축은 공간을 연출하는 예술이라 한다. 공간은 눈에 보이는 실체가 아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 기둥과 기둥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과 같은 존재다. 그 비어있는 공간 속에서 인간의 생활이 가능하고, 그 공간을 통해 다른 풍경을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작고 초라한 정자이지만, 그 위에 오르면 비어있는 벽을 통해 온 우주가 담겨진다.” 소식이 쓴 함허정기(涵虛亭記)와 같이 비어있기 때문에 채울 수 있다는 역설을 병산서원은 더없이 친절하게 이해시켜 준다. 이런 점에서 병산서원은 건축가들의 눈과 글로써 다시 태어난 작품이 명품이 없는 명작, 건물이 없는 건축이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건축과


필자는 서울대에서 논문 ‘조선시대 사찰건축의 전각구성과 배치형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한국의 건축’, ‘서원건축’,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 ‘불교건축’, ‘김봉렬의 한국건축이야기 1, 2, 3’ 등이 있다. 문화재청과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위원이자, 나눔문화연구소 이사장이다.

 

 

 

[전문가 조사] 한국의 서원 건축
위엄과 효율 중시
2006년 12월 07일, 교수신문 교수신문 editor@kyosu.net

 

한국최고의 서원 예술품으로 도산서원, 병산서원을 가장 많이 꼽았지만,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서울의 문묘와 강릉향교의 대성전도 빼놓을 수 없는 건축물이라 칭찬하다.

서울 문묘는 태조 7년 (1398년)창건되었다가 화재로 인한 소실과 재건의 반복을 거쳐 1602년 완성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고 화려하지 않은 단청은 ‘절제를 통해 인공적 꾸밈을 경계’(임석재)했던 유교를 상징화한다.

강릉 향교는 고려말 창건되어 현재의 모습이 갖추어진 것은 조선 중기 이후.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이며 ‘전체적으로 보아 견실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라는 평(장경호)을 받는다.

기능과 역할이 동일했던 두 건물의 확연한 차이라면 명륜당과 대성전의 위치이다. 서울문묘는 남북으로 축을 이루어 남쪽에 대성전 북쪽에 명륜당이 위치(前廟後學)하는 반면 강릉 향교는 향교의 일반적인 배치인 前學後廟 형식을 따르고 있다.

유교사상이 깃든 건축적 조형개념을 ‘어울림과 형식미’(임석재)라고 볼 때 두 건축은 그 목적에 맞게 위엄과 효율을 중시하며 공간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 건축들에서 찾아지는 형식미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규범, 그리고 지배 계층의 이상과 피지배계층의 현실 사이에서 균형잡기에 성공한 결과’(임석재)물인 것이다.


추천해주신 분들 : 김동현 한국전통문화학교,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 김봉렬 한예종, 김지민 목포대, 기강근 경주대, 장경호 기전문화재연구소, 정영호 단국대박물관, 주남철 고려대, 천득염 전남대 이상 총 9명. 가나다순.

 

 

 

[中·日서원과의 비교] 中, 주변과의 경계 강조...日, 비발달
2006년 12월 07일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editor@kyosu.net

 

한-중-일 세 나라에 모두 서원이 있었다. 그러나 서원의 역할과 기능은 세 나라가 제각각 너무나 달랐다.

중국의 서원은 관에서 설치한 장서기능을 갖춘 도서관 따위를 일컫는 말이었다. 중세를 지나면서 서원은 통치 관료들을 배출하기 위한 관학으로 육성된다. 976년 후난성 쟝샤시에 설립된 악록서원(岳麓書院)은 19세기에는 서양식 근대교육을 실시하는 고등학당이 되었다가 현재의 후난대학교가 되었다. 사설 교육기관으로 시종하며 300여년의 짧은 역사를 가졌던 한국의 서원과는 판이한 역사를 가졌다.

일본에서 서원이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쓰인다. 19세기 이후 각 번(蕃)의 번주들이 지방민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치한 번교나 향교를 서원이라 불렀고, 심지어 글자나 산술을 가르치는 초등교육기관인 사자실(寺子室)이나 마쓰시다 정경의숙과 같이 특정한 분야의 전문교육기관인 사숙(私塾)이나 가숙(家塾)을 가리키기도 했다. 근대 이전 일본에서 서원이란 건축형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서원조(書院造)라는 건축형식이 등장했는데, 이는 궁궐형식을 모방한 고대의 대저택들인 침전조(寢殿造) 건축에 대해, 좀더 작고 자유스러워진 중세 무사들의 주택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따라서 정통적인 의미의 유학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이란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본격적인 유교건축의 발달도 찾아보기 어렵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중국의 서원 가운데 가장 유서가 깊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꼽을 수 있다. 쟝시(江西)성 루샨(廬山) 지방에 남아있는 이 서원은 주희(朱熹)가 옛 서원의 터를 찾아 1179년 재건하여 본격적인 서원교육을 시작한 곳으로 유명하다. 현존 규모는 대단히 커서 50여동의 건물들이 군을 이루고 있다. 이 곳은 주희 뿐 아니라 공자, 맹자, 주돈이, 정이 등 수많은 중국 유학의 선현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공자의 사당인 문묘(文廟)와 다를 바가 없다.

건축적 형식도 샨뚱(山東)의 공묘(孔廟)를 횡으로 펼쳐 놓은 것 같이, 기하학적이고 규칙적인 중국 고래의 예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건물 한동 한동의 규모가 대단히 커서 병산서원 강당의 4배가 될 정도이고, 건물 내부 공간이 행위의 중심공간이 된다. 따라서 건물과 건물 간의 집합적 관계나 내부와 외부공간의 관계도 병산서원과는 비교할 수 없이 소원하다.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로 산을 기대고 있어 병산서원과도 유사한 입지라고 할 수 있지만, 서원 내부 어느 곳에서도 바깥의 경치를 감상할 만한 곳은 없다. 주변 환경과는 무관하게, 높은 담벽을 쌓아 경계를 이루고 그 속에 마당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여러 건물군들을 배열하고 있다. 자연과 건축의 교류는 고사하고, 옆 건물군과의 교류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독자적이다. 심지어 서원 안에는 백초원(百草園)이라는 인공정원까지 마련했다. 주변 자연을 정원으로 삼는 한국의 서원과는 사뭇 다른 개념이다.

김봉렬 / 한국예술종합학교 · 건축과

 

 

 

중국의 武夷精舍와 일본의 寺子屋
중국, 일본의 서당의 비교
2006년 11월 28일  김지민 목포대 editor@kyosu.net

 

중국은 송나라에 접어들면서 과거 전통유학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갖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이때 남송의 朱子(1130-1200)에 의하여 신유교가 완성됐는데 그것이 바로 宋學, 일명 朱子學이다. 이 학문은 조선 선비들에게도 유입되어 주자와 함께 그의 학문세계를 흠모하였다.

주자는 福建省에 위치한 명산인 武夷山에 精舍를 짓고 그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즉 서당을 세운 것이다. 그의 영향으로 율곡 이이는 해주 석담에 무이산 隱屛峯에서 이름을 빌려 隱屛精舍를 건립했고 우암 송시열은 청주 화양계곡에 은거하며 武夷九曲을 본따 華陽九曲이라 하였다.

무이정사는 무이산 최고의 절경인 천유봉 가는 길에 있다. 1183년에 주자가 지어 그곳에서 10년 동안 말년을 보낸 집이다. 퇴계가 말년의 안식을 위해 지은 도산서당과 비슷하다. 그곳에는 仁智堂, 隱求室, 止宿齎, 觀善齋, 寒棲館, 晩對亭 등의 많은 건물이 있으나 관리가 안 돼 제대로 남아있는 건물이 거의 없다. 도산서당이 도산서원으로 크게 번창된 것과 대조가 된다.

일본에는 우리나라의 書堂과 같은 寺子屋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데라고야’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에도(江戶)시대에 특히 번성하였다. 일본에서는 17c초부터 승려의 전유물이었던 교사가 학식이 있는 속인들도 선생이 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선생이 게이얀 겐쥬(桂菴玄樹)인데 그는 중국 명나라에 가서 주자학을 배우고 왔다. 차츰 이 시대의 학문은 속인의 학자에 의해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무사들뿐만 아니라 서민의 자녀도 교육에 동참할 수 있었다. 寺子屋은 바로 속인교사에 의해 운영된 일종의 사설학원으로서 정부나 지방 관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생적으로 번성하였다.

寺子屋은 절에서 아이들(子)을 가르친다는 의미로 붙여진 명칭인데 일본에서 조차 寺小屋으로 잘못 쓰이는 경우도 있다.

김지민 / 목포대 · 건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