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 통해 본 중국문화
유재신 토론토대 동아시아학부 석좌교수
신동아 2004년 4월호
민중불교 기여한 김교각, 조화사상 설파한 원효
동아시아의 문화는 중국과 한국이 함께 이룩한 것이다. 특히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독창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그럼에도 한국의 학계는 동아시아 문화가 한국문화와 중국문화의 조화를 통해 발전해온 사실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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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중국문화권에 속하고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유입된 불교와 도교가 고유문화와 접목되어 한국문화를 이룩했고 또 그것이 일본으로 건너갔기에 일본문화의 원류가 되었다. 동아시아의 문화는 중국이 홀로 이룩한 것이 아니다. 중국과 한국이 협력해서 이룩한 것이다. 삼국시대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교류를 보나 만주가 중국 땅으로 편입된 다음 고구려 유민과 발해민 등이 수백년 동안 중국문화에 기여했던 점을 보더라도 그것이 중국 홀로 이룩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한국의 문화를 이해함에 있어 동아시아 문화가 중국과 한국의 조화를 통해 발전된 것이라는 점을 그간 한국 학계에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1986년 옌볜대학에 초빙교수로 있을 때 베이징에 있는 북경대학, 중앙민족대학, 창춘의 동북사범대학 등에서도 동양문화, 특히 동아시아 문화와 한국문화의 관계에 대하여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당시 각 대학의 교수들과 토의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많이 발견하고 귀중한 자료를 수집했다. 필자는 그 중에서 고구려와 발해사 자료들을 모아 고려대 김정배 교수와 ‘중국학계의 고구려 인식(1991)’ 이라는 책을 함께 출판했는데 거기에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고구려 무덤벽화에 대한 연구결과가 자세히 실려 있다. 또한 ‘발해국사(1988, 김정배·유재신 편저)’를 통해 발해문자를 소개하는 한편 발해사에 대한 논문목록도 수록했다.
이 글에선 극히 부분적이긴 하지만 한국 불교학자들이 중국에 끼친 영향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승랑 승랑은 고구려 문자왕 때에 중국 양나라에 가서 중국 삼론종 성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여 삼론종의 대가가 되었다. 중국 길장(吉藏)이 대성시켰던 삼론종은 고구려의 삼대조(三代祖)인 승랑의 사상을 기점으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를 신(新) 삼론종이라 한다. 이에 대해 라십(羅什)으로부터 승랑 이전까지의 성실론적(成實論的)인 공(空)사상(思想)을 우(右)삼론론이라 한다.
승랑은 ‘공(空)’과 ‘가(假)’를 모두 갖춘 것이 실상(實相)이며 이것을 중도(中道)라 했다. 그가 ‘공’ 사상을 근간으로 제창한 중도사상은 획기적인 것이다. 필자는 ‘한국불교개론 (Introduction of Buddhism of Korea)’에 김동화(金東華)의 고구려불교 사상을 소개했는데 이것은 중국에 끼친 한국 불교학자를 서구 사회에 처음 소개한 것이다.
중국 삼론종의 선구자
이제 중국에 영향을 끼친 신라와 고려의 불교학자들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원측 신라의 고승 원측(圓測·613∼696)은 신라의 왕손이었다. 그가 쓴 ‘해심밀경소(海深密經疏)’는 중국어뿐 아니라 당시 티베트어로도 번역되어 티베트의 사상계와 종교문화 개혁에 크게 공헌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어로 된 책의 일부가 없어졌는데 다행히도 최근 중국 간쑤성 둔황(焞惶) 유적지에서 티베트어로 쓰여진 책이 발견되어 그것이 다시 중국어로 번역되었으며 또한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해심밀경소의 전문(全文)이 남게 된 것은 불교문화연구에 크게 공헌할 것으로 생각된다.
티베트어로도 번역된 원측사상
원측은 원래 신라의 왕손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지혜롭고 유능한 승이 되었다. 정관 초년에 중국 장안에 가 있을 때 당 태종이 그의 총명을 아껴서 도첩을 하사하여 원법사(元法寺)에 있게 하였다. 그는 당나라에 머무르면서 역경(譯經)과 저술 등에 종사하여 중국의 불교 발전에 공헌하였다. 원측은 유식(唯識)학자였으며 후에 서명사에서 대덕(大德)이 되었다. 원측 사상의 요체는 중국의 자은종(慈恩宗)과 달리 자종(自宗)을 고집하거나 타파(他派)를 배척하지 않고 융합하는 것으로서 원효의 사상과 비슷하다.
김교각 김 지장(地藏)보살이라 일컬었는데 그의 본래 이름은 교각이요, 신라 국왕 김씨의 족속이다. 그는 개원 7년(A.D. 719)에 당나라에 건너와 구화산에서 수도하고 지냈다. 그의 인격은 고상하고 매우 결백해 많은 불교도들이 그를 따르기 위해 구화산으로 왔다고 한다.
그는 중국 민중불교에 크게 기여한 승이었다. 그는 정원 10년(A.D. 794), 99세때 뭇 승려를 불러놓고 작별 인사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에 돌 구르는 소리가 요란했다고 한다. 그가 앉은 채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지났으나 그 시체가 변하지 않았으며 그 형태가 불경에서 묘사한 지장보살과 흡사하여 승려들이 그를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인정했다. 이후 김 지장보살로 높이 숭앙하고 그를 기려 신광(神光)령에 탑을 세웠으니 그것이 지금의 단신보전(丹身寶殿)이다. 그를 분향 재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수천리 밖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그 종적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태백이 쓴 ‘지장보살찬(地藏菩薩讚)’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웅(大雄)이 하늘을 덮습니다. 해와 달도 빛을 잃을 것입니다. 오직 거룩한 부처의 지혜만이 빛을 뿌릴 수 있고 또한 그 자애로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고통의 나라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디서나 영원토록 사악한 흐름을 막을 수 있는 분이 있으니 지장보살을 제외하고 그 누구를 꼽을 수 있겠습니까.
원래 김교각이 젊었을 때는 성격이 급하고 행실이 방종하여 그 재주를 믿고 왕족들과 거리낌없이 호탕하게 놀아났으나 결국 그 유흥이 지나쳐서 고통이 되었으며 그 고통에서 헤어나기 위하여 부처님께 지혜와 검을 빌리고 자기의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고 성스러운 향객(香客)이 되기 위하여 빌었는데 다행히 신력의 도움을 받아 그 고통이 말끔히 가셨습니다. 그래서 소인은 무딘 필치로나마 이 일을 찬미하려 합니다.‘마음이 빈다면 티없이 깨끗해진다네 / 살아서 지나친 것 삼가매 / 죽어서 부처가 되었네 / 채색으로 그린 성상(聖象) / 실로 허황한 소문 아니었고 / 눈을 쓸 듯 만병을 고치니 / 하늘도 맑게 개이었네 / 찬양할사 바다 같은 공덕 / 대를 이어 영원히 알려지리라’(이태백 전집 제28권에서).”
이처럼 김교각은 지장보살로 숭앙받았으며 이태백이 찬시를 쓸 정도로 중국 민중불교에 크게 공헌한 고승이었다.
혜초 신라의 명승 혜초는 어려서 당나라에 유학을 했는데 개원 7년(A.D. 719)에 금강지가 서역으로부터 오니 금강지를 스승으로 모셨다. 후에 해로를 따라 인도에 도착하여 오천축(五天竺)이라 불리는 불교 성지를 방문했다. 그는 서북인도와 중앙아시아를 다녀서 돌아왔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혜초의 노정(路程)을 현재 남아있는 책의 기록에 의거해 더듬어 보면 남해(南海)로부터 중인도(中印度)로 들어가서 석가가 열반한 구시나국(拘尸那國 Kusinagara)을 지나 피라비기국(彼羅?期國 Varanasi), 즉 지금의 인도 북부 베나레스를 거쳐 마갈타국(摩?陀國 Maradha)에 이르러 록야원(鹿野苑), 구시나(拘尸那), 사성(舍城), 마가보제(摩訶菩提) 등 사대영탑(四大靈塔)을 순례하고 또 중천축(中天竺)의 사대탑(四大塔)을 보고 남인도로 들어갔다.
천축(天竺)이란 인도를 칭하는 것이고 오천축(五天竺)은 오인도(五印度)라고도 하는데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 다섯 방향으로 나뉜 인도 전체를 일컫는다. 그는 인도를 여행했을 뿐만 아니라 이란, 아라비아, 시리아 등 중(中)아시아 제국들을 방문하였으며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727년 11월에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다.
혜초는 범문(梵文·범자로 된 글)과 한문(漢文)에 정통해 법문불경(法問佛經)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불교에 관한 저술을 많이 남겼다. 특히 54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밀교(그 시대에 인도에서 유행하던 불교의 한 파)의 전파에 공헌했다. 그가 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73권은 그가 지나온 인도 및 서아시아 여러 나라의 정치 종교 풍속 등에 관한 기록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크다.
이외에도 인도에 다녀온 중국의 고승들이 쓴 인도 기행문, 즉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國記), 현장(玄裝)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등이 있었으나 중국의 고승들은 주로 인도의 상류사회와 접촉했다. 그들이 불타가 탄생한 성지 인도를 추상적으로 미화하려 한 데 반해 혜초는 주로 평민들과 접촉하면서, 철학적인 면에 치중하여 비현실적이며 역사의식이 부족했던 그 시대의 인도 사회를 본 그대로 기록했다. 때문에 ‘왕오천축국전’은 그 시대의 인도와 서역(西域)과 인도의 정세, 역사, 문화를 바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평민들과 접촉한 혜초
그는 또 서북인도(西北印度), 아프가니스탄, 러시아령 투르케스탄 및 중국령 투르케스탄에 관해서도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진기한 기록을 남겼다. 후대 사람들은 혜초의 기록을 통하여 소륵(疎勒)지방에 원주민을 위한 불사(佛寺) 이외에 한족(漢族) 신자를 위하여 건립된 사원이 여러 개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제국의 명칭을 중국식과 원지방 명칭 두 가지로 기록했기 때문에 원명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원효 원효(元曉)는 화엄경과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중심으로 독특한 사상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는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중간파와 유가파의 교리적 대립을 극복하였다.
원효의 사상은 한마디로 조화사상, 즉 화쟁론이다. 중국의 천태나 화엄에도 ‘일다다일(一多多一)’ 조화사상이 있었으나 천태, 화엄, 정토, 선 등 여러 불교 학파가 각각 자파의 우월성을 내세웠다. 원효의 화엄사상은 당나라 때 중국으로 수출되어 화엄의 대가인 법장이나 이통현(李通玄) 등에게 크게 영향을 주어서 화엄 성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중국에 전래된 뒤 ‘효공소(曉公疏)’ 혹은 ‘해동소(海東疏)’라는 이름으로 널리 전파되었는데 그 평판이 대단히 좋았다고 한다.
의상 의상(義湘)은 신라인으로서 나이 23세에 황복사에서 삭발을 하였다. 그는 당 고종 영징(永徵 650∼655) 초에 당나라 배를 타고 양주(楊洲)에 갔었다. 양주 태수 유지인은 그를 후하게 대접했다. 그가 어느날 지상사의 지엄(智儼)을 찾아가 만났는데 지엄이 전날밤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꿈에 큰 나무가 해동으로부터 뻗쳐 그 가지와 잎이 퍼져서 신주(神州)를 덮었다. 나무 위에는 봉황의 둥지가 있어 올라가 본즉 마니보주(摩尼?珠)가 있어 환하게 빛이 났다는 것이다. 그가 놀라 깨어 집을 깨끗이 하고 기다리는 중 의상이 온 것이었다.
지엄은 의상을 맞아들이면서 ‘어젯밤 꿈은 그대가 나를 찾아올 징조였다’면서 지극히 환대하였다. 의상은 종남산의 현수(賢首)대사와 같이 지엄의 아래에서 지도를 받던 중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한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그 후 의상은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대승(大乘) 학설을 널리 펼쳐 해동화엄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밑에는 3000여명이 제자가 있었고 그 중 10여명이 유명한 승이 되었다. 원효는 702년(신라 성덕왕 원년)에 78세로 타계하였는데 그의 저서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 와 ‘백화도장발원문(百花道場發願文)’이 전해지고 있다.
의상은 중국에서 신라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 당나라의 정책을 신라에 보고하기 위해 화엄종 제3조의 지위를 동문인 법장에게 양보하고 귀국하였다. 의상이 화엄학자로서 식견이 높았던 것은 중국의 화엄학을 집대성한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사신의 내용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체관 승려 체관(諦觀)은 고려 광종왕(961년)때 여러 가지 불교서적을 중국의 오월에 가져갔다. 그는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1권을 썼다. 이것은 천태종 교리를 요약한 입문서로 중국 천태종에 크게 기여했다.
의천 의천(義天)은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열한 살에 출가하여 영흥사에서 화엄 교관을 배우고 후에는 승통으로 봉해졌다. 송(宋) 원풍 8년(1085)에 제자인 수개(壽介) 등을 거느리고 중국에 유학하였는데 경전과 불상을 가져와 송나라 철종에게 선사하였다. 그는 철종의 접대를 받고 계성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무렵 중국에는 현수(賢首)의 장소(藏疏)가 분실되었는데 다행히도 그 때 의천이 이를 가져왔기 때문에 후대에 다시 전해질 수 있었다.
의천은 천축사(天竺寺) 자변(慈辨)에 서 천대교관을 배웠다. 원우 원년(1086) 에 그는 중국에서 얻은 경서 1000여권을 가지고 고려에 돌아가 현수 천대의 교법을 널리 전했다. 그는 왕에게 청원서를 올려 자기가 가지고 온 경서를 모두 간행하였다. 그리고 금서(金書)로 화엄경 180권도 다시 번역하여 전당(錢塘) 혜인사(慧因寺)에 보내주었다. 혜인사에서는 유각을 지어 이를 보관하였는데 민간에서는 혜인사를 고려사라고도 불렸다. 원우 2년(1088) 정원(淨源)이 혜인사에서 원적하니 의천은 수개를 송나라에 파견하여 정원의 탑 앞에서 공양하게 하였다.
의천의 저서로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원종문류(圓宗文類)’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등이 있다. 이들 저서는 송(宋) 나라에 전해져서 널리 읽혔다. 의천은 불교사상의 통일과 그 지도를 위해 속장경(續藏經)을 간행하였는데 안으로는 원효사상을 중심으로 한 신라불교의 전통을 재확인하고 밖으로는 각국의, 특히 중국의 불교학설을 국제적인 규모로 만들었다. 속장경은 팔만대장경의 뿌리로서 불교의 가장 큰 경전집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불교 경전을 보관, 발전시켜 왔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중국 원나라에서는 고려 고승들이 금자(金字)경전을 잘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신을 고려에 보내어 사경승(寫經僧)을 모집하였다. 고려 승통(僧統) 혜영(惠永)은 사경승 100명을 거느리고 원나라 수도에 있는 경수사에 머무르면서 금가루로 대장경을 썼다. 또 만안사에서는 인왕경(仁王經)을 가르쳤다. 이듬해 금자대장경을 다 쓴 후 원 황제는 서경 승려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고국으로 돌려 보냈다
의천은 천태종의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을 받아들여서 당시의 여러 종파를 융합하고 선교상의(禪敎相儀)를 하면서 천태일종을 창립하였다. 그는 교(敎)를 우위에 두고 선(禪)과 종합하였다. 즉 교관병수(敎觀?修)를 가르치는 것이다.
천우화상 조선인 출신인 천우화상은 청나라의 황실과 관계있는 광제사(廣濟寺)의 주지로 불교의 진흥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쓴 광제사지(廣濟寺誌)는 사원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글과 그림으로 묘사됐다. 그가 직접 관여하여 만들었다는 광제사의 계단은 아름답고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어 중국 청나라 불교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재료다. 광제사는 청나라 황제가 다녀가면서 천우화상과 깊은 인연을 맺은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는 외부인에겐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이 책을 사정해서 복사할 수가 있었고 그것을 한국으로 가져왔다. 대단한 행운이었다.
동아시아 문화의 뿌리는?
이처럼 불교학만 보더라도 동아시아 문화의 뿌리는 중국이 홀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중국과 한국이 더불어 이룩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고구려가 만주를 지배했고 발해도 고구려 상류층의 지도하에 형성되었으며 그후 고려에 속한 고구려와 발해 유민들 이외에는 모두 중국에 편입되어 천수백 년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들이 바로 고구려, 백제, 신라 및 발해인들이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정치, 종교, 문화, 경제면에 기여해온 바가 크다고 본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는 40여년 동안 불교에 관한 연구를 했고 그 분야 학위도 받아 대학 강단에서 강의도 했다. 특히 영문판으로 한국종교문화 총서 ‘한국의 무속종교’‘한국불교 4권’ ‘한국의 천주교’ ‘한국의 기독교’ 등을 편저했다. 지금은 ‘한국 유교(영문판)’에 대한 편저를 거의 끝내고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불교 4권’은 버클리대(U.C.Berkeley)의 저명한 불교학자 랭커스터교수와 함께 펴냈다. 그 저서에 김동화 교수의 고구려 불교사상을 실어서 고구려 고승인 승랑이 중국 불교의 대표적 교파인 삼론종에 영향을 끼쳤음을 학계에 알렸다. 이는 동아시아 문화는 중국과 한국이 더불어 이루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일본 불교 학자들의 논문 두 편도 실어서 일본 불교의 원류가 백제임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필자가 중국에서 가져온 자료들 중에는 중국에 공헌한 800명 정도의 한국 인 명단이 있다. 이 자료가 이 분야를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도움이 되어 더 많은 연구가 진행, 발전되었으면 한다. 이러한 연구는 동아시아 학자들과 함께 공동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남북한 학자들이 연구센터를 만들어서 공동연구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남북한 공동연구 필요
필자는 이 분야 연구의 극히 일부를 1990년 6월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 발표한 적이 있다. 역사는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를 같이 다룰 때에 중국과 맞설 수 있으며, 신라와 발해를 남북조 시대로 보아서 공동연구를 해야한다. 그리하여 한국은 4000여년 동안 독창적인 사상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감정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입증하여야 한다.
劉 在 信
●1932년 함경남도 이원 출생
●1973년 맥마스터대 철학박사
●1975년 캐나다 한국문화연구소장
●1977년 토론토대 한국학 과정 설립 초대교수
●1986년 중국 옌볜대 초빙교수
●2003년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이런 의미에서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의 비교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이 분야의 연구는 21세기의 중요 과제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된 이후 동양종교를 아편으로 생각하여 말살할 때 유일하게 동양종교의 뿌리를 보전 발전시킨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끝)
글: 유재신 토론토대 동아시아학부 석좌교수
발행일: 2004 년 04 월 01 일 (통권 535 호)
쪽수: 628 ~ 635 쪽
신동아 200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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