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術, 敎育

英國 옥스포드 대학교 이야기

이강기 2015. 10. 13. 22:24

英國 옥스포드 대학교 이야기

 

월간 조선 2001년 10월호
 
전율과 황홀의 가정교사식 수업- 大家 교수들과의 1 對 1 교육 통해 주체적으로 사색하는 방법 터득
 
李 一 淸 옥스포드 대학교 사회정책학 박사과정

 옥스포드 가는 길
 
 
  영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하는 한국 학생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 수에 비해 극히 소수이다. 한국 또는 영국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하였어도 다시 한번 석사과정을 하여야 하는 등 입학 기준과 절차가 까다로운 옥스포드는 한국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은 영국 대학 중의 하나이다.
 
  듣기로 미국의 어느 명문 대학의 경우는 특정 전공과목 한국 학생들로 축구팀이 만들어진다는데 옥스포드의 경우 인문사회계열 학생들을 다 합쳐도 한 팀 만들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Dominus Illumina Tio Mia」(주님은 나의 빛)이라는 옥스포드 대학 紋章이 찍힌 편지지에 古風스런 문체로 입학허가를 고지받은 학생들은 이내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는 옥스포드의 일부가 되었다는 자부심에 한껏 가슴이 부푼다. 알고 있는 외국 대학이라야 두세 개가 전부인 연세 지긋한 村老에게까지도 옥스포드라는 이름은 그리 낯설지 않으니 주위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눈에 빛이 난다.
 
 
  800년 역사 자랑
 
 
  2001년 현재 영국에는 총 98개의 종합대학교와 52개의 전문대학교가 있다. 이중 대학의 71%, 전문대학의 87%가 잉글랜드 지방에 몰려 있고 나머지 대학들은 주로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에 몰려 있다. 北아일랜드에는 종합대학교 두 곳과 전문대학 두 곳이 있을 뿐이다. 약 5900만의 인구 중 잉글랜드에 4900만 명, 스코틀랜드에 510만 명, 웨일즈에 290만 명, 북아일랜드에 170만 명 정도가 살고 있으니 대학 수는 인구비례에 맞게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셈이다. 이들 대학 중에서 옥스포드는 最長(최장)의 역사와 독특한 시스템으로 우뚝 선 영국 대학의 상징이다.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확한 설립연대는 고증된 바 없으나 1167년 헨리 2세가 영국인들이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던 시점이 옥스포드 대학이 형성되기 시작한 때라는 것이 통설이다. 가난한 프란체스코派와 도미니크派의 수도사들이 교회와 수도원에 모여들어 신학, 법학, 의학 등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옥스포드는 修士(수사)들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의 집결지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옥스포드 대학은 수백년 동안 내려온 특유의 시스템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옥스포드 교육의 요체인 칼리지 시스템과 튜토리얼이라 불리는 교육방식이다.
 
 
  『도대체 옥스포드 대학은 어디에 있나』
 
 
  옥스포드를 방문하는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찾아 헤매는 것 중의 하나가 「옥스포드 대학 본관」이다. 고풍스런 철자의 University of Oxford라는 명패와 멋진 기념조형이 있는 거대한 대학 본관 앞에서의 멋진 사진을 생각하셨던 분들에게 이러한 건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도대체 옥스포드 대학은 어디에 있는 건가?』
 
  대학 도시 옥스포드 한복판에서 옥스포드 대학을 찾는 이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옥스포드 대학교를 세계의 여타 대학과 구별케 하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 칼리지(College) 시스템에 대하여 설명하여야 한다.
 
  초기의 옥스포드 대학교는 독립된 건물과 체계를 지닌 유니버시티(University), 머톤(Merton), 밸리올(Balliol)이라는 세 개 칼리지의 연합체였다. 이후 옥스포드 대학은 800여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점점 많은 수의 칼리지를 갖게 되면서 수많은 칼리지들의 연합체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체 칼리지에서 뽑힌 대표들이 모인 콩그리게이션(Congregation)은 옥스포드 대학의 의결기구에 해당한다.
 
  콩그리게이션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는 옥스포드 대학을 구성할 새 식구 즉 새로운 칼리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하나의 연구 교육 기관이 옥스포드 대학의 정식 칼리지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중요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첫째는 옥스포드 대학의 대의기구인 콩그리게이션에서 정식 칼리지로서 받아들이겠다는 동의가 있어야 한다. 콩그리게이션에서 정식 칼리지로서 받아들이겠다는 동의를 받은 후 칼리지는 왕실 추밀원(the Privy Council)에 보고하여 국왕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현재 로열 차터라고 불리는, 왕의 인가를 받은 옥스포드의 정식 멤버는 37개의 칼리지와 2개의 홀이다. 레이디 마가레트 홀(Lady Margaret Hall)과 세인트 에드먼드 홀(St Edmund Hall)은 칼리지와 동일한 자격을 갖고 있다.
 
  옥스포드에는 학부에 47개, 대학원에 27개의 전공학과들이 존재한다. 학부, 대학원 공히 학제 간 연구와 교육의 이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학부의 경우 철학-정치-경제학과(Phiolosophy, Politics and Economics, 옥스포드에서 통칭 PPE로 불린다)가 총 정원 1만993명 중 927명의 학생을, 대학원의 경우 이공계열에서는 물리과학 학부(Physical Sciences)가, 문과에서는 사회과학 학부(Social Studies)가 총 정원 4901명 중 각각 745명과 508명의 학생을 가진 최대 학부로 그 인기가 높다.
 
 
  20세기 19명의 英 수상 중 9명이 옥스포드 출신
 
 
  수세기 동안 독자적인 재정과 행정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탓인지 칼리지들은 뚜렷한 개성과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재정이 넉넉하여 많은 장학제도와 훌륭한 시설로 우수한 학생들을 모으는 칼리지, 사립학교 출신 학생들이 많은 칼리지, 외국 학생들이 많은 칼리지, 대학원생들이 많은 칼리지 등 각양각색의 이들 칼리지를 선택하는 것은 그래서 제2의 고향을 선택하는 것처럼 중요한 선택이다.
 
  하지만 칼리지 중심의 옥스포드 생활을 경험해 보지 않은 학생들에게 이처럼 중요한 선택을 만족스럽게 해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특히 한국 유학생들의 경우 칼리지의 특성은 물론 칼리지 시스템 자체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고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정책학 박사과정에 진입한 이주하(27·박사과정·사회정책학)씨는 최근 박사과정에 진입하면서 자신이 석사시절 지내던 팸브로크 칼리지에서 세인트 크로스 칼리지로 이적하였다. 석사과정 입학時 칼리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선택을 하다 보니 팸브로크 칼리지로 선택을 하였는데, 입학하고 보니 자신이 수백명의 학부 학생들 틈에 유일무이한 사회과학 전공 대학원생이었다는 것이다.
 
  칼리지 선택의 중요성이 극명하게 드러났던 것은 기실 IMF 위기가 닥친 1997년이었다. 한국에서의 금융위기설이 대두되자 대학측은 한국 유학생들의 경제난을 돕기 위해 일종의 지원금 제도를 만들었다. 칼리지측이 半 부담한 경우 대학측이 절반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만들어진 이 제도는 칼리지의 경제 상황에 따라 수혜에 있어서 큰 차이를 나타냈다.
 
  거의 반년 생활비를 지원한 칼리지가 있었던 반면 어떤 칼리지의 경우는 한푼도 지급하지 않았던 것. 칼리지의 건전한 재정이 대한민국의 건전한 재정만큼이나 중요하게 느껴지던 한 해였다.
 
  비록 칼리지들이 제공하는 현실적인 조건들이야 각양각색이지만 옥스포드 학생들 모두에게 칼리지는 제2의 고향과 같다. 숙식에서부터 수업, 세미나, 도서관 이용까지,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칼리지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칼리지에서의 3년 내지 4년의 생활은 그 자체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칼리지의 환경을 배우는 과정과 같다. 칼리지 자체가 영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인물들의 생활 현장이었고 나아가서는 지난 수세기 세계사 주인공들의 배움터였으니 칼리지와 이를 거쳐간 인물들을 배우는 과정이 감히 세계사를 인식하는 과정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로저 베이컨, 에라스무스 등 중세의 암흑을 밝혔던 지식의 등불로부터 토머스 모어, 토머스 홉스, 존 로크, 아담 스미스, 제레미 벤담, 에드워드 기본, 名재상 윌리엄 글래드스톤 등 중세에서 19세기까지 옥스포드를 거쳐 역사의 주인공으로 우뚝 선 이들은 수없이 많다.
 
  20세기 영국 정치의 주역들 역시 이곳에서 교육되었으니 역대 수상만 헤아려도 허버트 헨리 아스퀴스, 클레멘트 아틀리, 안소니 이든, 해롤드 맥밀란, 알렉 더글러스 홈, 해롤드 윌슨, 에드워드 히스에서 마거릿 대처와 토니 블레어에 이르기까지 20세기 19명의 수상 중 줄잡아 54년 동안 영국을 통치한 총 9명의 수상이 이곳에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詩人이며 극작가인 T.S. 엘리어트, 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던 아웅산 수지, 월드 와이드 웹의 창시자 팀 버너스-리, 全세계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 분야에 걸쳐 별처럼 많은 인물들의 삶의 궤적 한가운데에 서서 학생들은 역사와 대화하여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소명의식을 가진다.
 
 
  교수와 학생의 1:1 수업
 
 
  대학 시절 정치철학자 존 플라메나츠의 책 「인간과 사회(Man and Society)」 서문 서두에 나오는 힘 있는 문장에 감동받은 적이 있다.
 
  「예술가는 자신의 고랑만 일구면 된다. (하지만) 학자는 자신의 서재에서 모든 이를 위한 땅을 경작하여야 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관해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져야 하고 자신의 의도와 노력을 설명하고 정당화해야 한다」
 
  학생들이 플라메나츠가 옥스포드 대학 정치학 교수 시절 발견했을 역사의 발자취를 다시 밟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특권보다 값진 것이다.
 
  학자를 만들어 내는 옥스포드 훈련 코스의 핵심은 뭐니뭐니 해도 튜토리얼이라 불리는 수업이다. 튜토리얼은 지도교수와 학생 간의 1 對 1 수업방식을 말하는 것으로 옥스포드 대학 교육 방법 중 가장 중요한 뼈대이다. 보호자, 방어자, 안내자, 또는 관찰자라는 뜻의 라틴 어원을 가진 「튜터」, 즉 지도교수는 문자 그대로 학생들의 공부와 인격 수양에 총체적인 안내자 역할을 한다.
 
  학부 학생들은 자신 자신이 선택한 과목에 따라 1~2명의 지도교수를 갖게 된다. 학생들은 10~15시간 정도의 강의와 세미나 외에 일주일에 2회 정도의 튜토리얼을 갖게 된다. 지도교수는 한 주일 동안 읽을 책의 리스트와 간단한 논문 주제를 학생에게 내 준다. 학생은 다음 과제로 내준 책들을 읽고 논문 주제에 따라 약 3000단어 내외의 에세이를 작성한다. 에세이는 다음 튜토리얼 전에 제출되고 튜토리얼 때 지도교수와의 토론의 내용으로 쓰인다.
 
  자신의 생각을 주로 써야 하는 에세이 과제를 통해 학생들은 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연구하여 표현하는 능력을 개발하게 되고, 토론을 통해 자신의 것과 틀린 생각들을 지도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이해하고 비판할 기회를 갖는다. 옥스포드 교수 대부분이 튜토리얼의 의무를 지니고 있으니 학생들로서는 세계적인 석학과 무릎을 마주하고 1 對 1 논쟁을 벌일 기회를 얻는 셈이다. 세계적인 무대로 올라가 당대의 大家들을 상대로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벌이는 훈련을 매주 하는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갖게 되고 책임감과 소명의식을 갖게 된다.
 
 
  끝없는 思索의 숲으로 몰아넣다
 
 
  대학원 과정에서 벌어지는 튜토리얼은 보다 더 진지하다. 학생들은 논문과 관련해 끊임없이 문제제기, 해결과정을 써서 제출해야 하고 토론해야 한다. 자신의 논리를 완전하게 만들지 못하면 다음 과정으로 넘어갈 수 없으니 대강 넘어가는 부분이 있을 수 없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지도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니 한 단어 한 단어가 조심스러울 따름이다.
 
  석사과정의 경우 학위를 받거나 혹은 박사 과정에 진입하기 위해, 박사과정의 경우 1년차, 2년차 구두 시험을 위해 반드시 지도교수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제출한 논문과 그 논문에 대한 토론인 튜토리얼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능력을 증명해 보이지 못하면 지도교수의 승인을 받지 못하니 하루 하루가 바늘 방석이다.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진입한 한 한국 학생은 첫 튜토리얼이 악몽 같았다고 회고한다.
 
  『세미나야 여러 사람이 있으니 몸짓(고개를 끄덕이거나)과 표정(웃거나 자뭇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으로 넘어갈 수가 있겠지만 튜토리얼이야 어디 그런가요? 제가 말하지 않으면 그냥 정적만 흐를 뿐이니…』
 
  中世의 고딕 건물이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고풍스러운 연구실에서의 정적은 학생에게 천국이 내다보이는 창문을 가진 지옥을 경험하게 한다. 그 숨막힐 듯한 정적의 시간을 없애기 위해서는 한 시간, 길게는 두 시간 세 시간 이어지는 이 튜토리얼의 주인공으로 나서야 한다.
 
  언제 어떤 질문이 던져질지 모르고 자신의 대답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제까지의 학습성과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 튜토리얼은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다. 자신이 혹시 말 실수라도 하거나 잠시 논리가 비약되었을 때 교수가 짓는 의아한 표정은 일주일 내내 선잠을 깨게 하는 악몽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료들에게서 기말시험의 고통과 스트레스를 들은 적 있다. 시험을 준비할 때의 그 긴장과 초조, 고통과 인내, 절제 그리고 마침내 끝났을 때의 그 날아갈 듯한 해방감. 옥스포드 튜토리얼의 준비과정 역시 그러한 긴장과 초조, 고통과 인내, 절제를 요구한다. 차이가 있다면 학위 과정 내내 그러한 고통의 순간들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튜토리얼은 끝나도 해방감이 없다는 것이다.
 
  시험답안지는 다음 과제를 만들어내지 않지만, 지도교수는 쉴새없는 질문으로 학생을 끝없는 사색의 숲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박사과정 첫 해 여름 방학 全기간을 책과 씨름하면서 중요한 이론, 분석, 증명을 마치 시험 공부하듯이 이해하고 암기했던 경험을 가진 학생이 있었단다. 방학이 끝날 무렵이 되자 두 시간 정도는 쉬지 않고 복잡다단한 이론들을 설명할 자신이 생겼다. 개학 후 첫 튜토리얼, 꽤 오랜 시간 동안 막힘없이 권위 있는 학자들의 이론과 증명을 설명한 후 회심의 미소를 짓던 그에게 지도교수님이 질문을 던지셨다.
 
  『그래, 그것들은 그들의 생각이고… 자네의 생각은 무언가?』
 
 
  스포츠를 통해 紳士道와 리더십을 기른다
 
 
  옥스포드의 학문적 추구는 활발한 과외 활동으로 인해 더욱 빛이 난다. 크리켓, 축구, 테니스에서부터 조정경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칼리지가 참가한 각종 리그가 학기 중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학생들은 공정성, 승자의 관용과 아량, 패배의 깨끗한 승복을 배운다. 이를 체득하지 못한 지식은 相生(상생)의 도구가 아닌 殺生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오랜 역사의 경험을 통해 배운 탓일까, 옥스포드는 학생들의 스포츠 활동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칼리지마다 대규모의 천연잔디 球場을 갖고 있고 학생들은 최상의 조건을 갖춘 운동장에서 부딪치며 인생의 축소판에서 紳士道(신사도)를 익혀 간다. 맞수 케임브리지에게 무려 7연패를 당했지만 템스강에서 벌어지는 조정경기는 흩어져 있는 칼리지를 옥스포드의 이름 아래 모으는 가장 큰 규모의 축제마당이기도 한다.
 
  진청색 유니폼의 색을 따라서 블루스(Blues)라고 불리는 옥스포드 대학의 대표가 되는 것은 옥스포드를 거쳐간 이들이 평생을 두고 자랑스러워하는 것 중의 하나이기도 한다.
 
  활발한 토론 클럽의 활동 역시 옥스포드 과외활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특히 1823년에 구성된 옥스포드 유니언(the Oxford Union)은 토론의 질과 초청연사의 다양성으로 학생의 클럽활동을 벗어나 세계적인 이벤트가 되고 있다. 살아 있다면 염라대왕도 초청에 응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옥스포드 유니언은 그 공개강연 초청연사 리스트에 유엔 사무총장인 코피 아난에서부터 가수 마이클 잭슨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의 한 분야를 장식한 이라면 누구라도 포함시킨다.
 
 
  맞수 케임브리지
 
 
  하노버 왕실의 첫 번째 왕인 조지 1세가 케임브리지 도서관에 책을 기증하자 옥스포드 모들린 칼리지의 시학 교수였던 조셉 트라프(Joseph Trapp) 목사는 다음과 같은 短歌를 케임브리지에 보냈다고 한다.
 
  「왕은 그 예리한 눈으로 관찰한다/ 두 대학의 상태를/ 그는 옥스포드에 기병대를 보냈다/ 왜일까/ 그 지식인들은 충성심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 예리하게 케임브리지에는 책을 보냈다/그 충성스러운 자들의 지식이 무척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The King, observing with judicious eyes/ The state of his universities;/ To Oxford sent a troop of horse, and why?/ That learned body wanted loyalty;/ To Cambridge books, as very well discerning/ How much that loyal body wanted learning.)」
 
  다음날 당장 케임브리지의 물리학자이자 작가였던 윌리엄 브라운卿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문이 날아왔다.
 
  「왕은 옥스포드에 기병대를 보냈다./ 토리(필자 주:당시의 反왕당파였고 옥스포드의 귀족이던 로버트 할리의 리더십 아래 있었음. 이 글에서는 옥스포드를 지칭함)는 논리가 아닌 힘만 가졌기 때문에/ 그 능력으로 왕은 케임브리지에 책을 보냈다/ 위그(필자 注: 당시의 왕당파로 케임브리지를 지칭함)는 힘이 아닌 논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The King to Oxford sent a troop of horse/ For Tories own no argument but force; / With equal skill to Cambridge books he sent/ For Whigs admit no force but argument.)」
 
  옥스포드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데는 케임브리지라는 운명적 맞수가 절반의 역할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세기를 거쳐온 맞수의 역사 또한 옥스포드 대학의 한 부분이다. 케임브리지는 본시 옥스포드 학자들의 피란 장소로 발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1215년 존 왕(King John)이 대학에 자치권을 부여한 유니버시티 차터(University Charter)에 사인을 하면서 점차 법적인 권위를 부여받기 시작한 옥스포드 대학은 옥스포드의 주민들과 그리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마을사람들(Towner)과 가운을 입은 학자들(Gowner) 간에 대소의 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급기야는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학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근처에 있는 레딩(Reading)이나 멀리는 파리까지 피란을 가기 시작했다. 이때 일단의 학자들은 당시 수도원이 모여 있던 케임브리지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학교를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뿌리가 같은 이 두 대학은 그후 수백년 동안 맞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서로에게 발전의 모티브를 제공하였고 경쟁을 통하여 상호발전을 꾀하는 선의의 경쟁 문화를 낳았다.
 
  이러한 문화는 양교의 한국 유학생들에게도 계승되었다. 비슷한 수로 구성된 옥스포드 韓人(한인) 학생회와 케임브리지 韓人 학생회는 매년 양교를 번갈아 방문하여 축구 정기전을 가지고 상견례를 하는 시간을 가진다.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의 축구 경기는 현재 옥스포드가 12연승, 옥스포드 韓人 학생회와 케임브리지 韓人 학생회 간의 경기는 케임브리지가 3연승으로 압도적이다. 조만간 현명한 여왕께서 옥스포드 韓人 학생회에는 축구공을, 케임브리지 韓人 학생회에는 책을 보내 줄 것임이 틀림없다.
 
 
  누가 옥소니안이 되는가?
 
 
  옥스포드를 졸업한 이들은 옥소니안(Oxonian)이라고 불린다. 옥스포드의 라틴식 지명 옥소니아(Oxonia)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과연 누가 옥소니안이 되는가? 옥소니안이 되는 이들은 누구인가를 알아보기 전에 영국의 교육체계와 과정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중등과정 5년을 마치게 되는 만 16세의 영국 학생들은 통칭 중등교육 학력 시험인 GCSE를 치른 후 대학입학 학력고사에 해당하는 A레벨 시험에 대비하는 학교 혹은 직업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상급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상급학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14세기 수도사들이 귀족의 자제들을 위해 설립한 이튼, 해로우, 럭비, 윈체스터와 같은 사립학교이다.
 
  초기에 라틴 문법을 중심으로 한 교과과정으로 인해 그래머(Grammer) 스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가 현재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이라고 불리는 이 학교들은 재정을 학생들로부터 충당하고 국가의 보조를 받지 않아 인디펜던트 스쿨(자율학교)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둘째는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보통교육이 중요해지면서 생겨나기 시작한 컴프리헨시브 스쿨(Comprehensive School)이라고 불리는 공립학교가 있다. 이들 학교들은 재정을 국가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해서 스테이트 스쿨(State School)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공립학교의 경우 수업료가 거의 없는 반면 사립학교의 경우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공부하는 보딩스쿨의 경우 연평균 5000파운드(약 1000만원), 기숙하지 않는 경우 약 1700파운드(약 320만원) 정도의 수업료가 든다.
 
  물론 이튼과 같은 전통의 명문은 수업료 및 각종 부대비용이 2만 파운드(3800만원)에 가깝다고 하니 보통 사람으로서는 엄두도 내기 힘들다. 비싼 수업료 때문에 사립학교의 경우 학생의 성적보다는 부모의 소득수준과 사회적 지위가 입학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된다. 비용 외에도 사립학교와 공립학교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우선 사립학교의 경우 소수의 학생을 대상으로 보다 나은 교육 시설과 환경, 좋은 교사진으로 엘리트 교육을 지향한다.
 
  워털루 전투의 승리 주역인 웰링턴 장군이 전투의 승패는 이튼의 운동장에서 이미 결정되었다고 할 만큼 사립학교의 체계적인 엘리트 교육은 정평이 나 있다. 학생들의 엘리트 의식은 수년 간의 교육과 交友관계를 통해 공고해지고 이들은 자신이 미래의 주역임을 굳게 확신하게 된다. 정치학, 라틴어와 같은 보다 전문적인 과목의 교육이 가능한 사립학교 학생들은 자신이 대학에서 전공할 분야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갖출 수 있다는 점에서 대학 입학에 유리한 점을 갖게 된다.
 
 
  옥스포드 입학 위한 면접시험 대비 학원도
 
 
  특히 옥스포드 대학과 같이 면접시험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경우, 소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우수한 교사진의 튜토리얼 방식 교육이 가능한 사립학교가 입시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공립학교의 경우 대개의 경우 남녀 공학으로, 성적보다는 거주지를 중심으로 학생을 선발한다. 교과목 역시 사립학교와는 달리 전문적인 과목보다는 영어, 수학, 과학, 역사, 지리, 외국어 등 인문사회 교양을 폭넓게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두고 정한다.
 
  학생 對 교사의 비율은 사립학교가 10對 1인 반면 공립학교의 경우 18 對 1이어서 두 배에 가깝다.
 
  옥스포드를 지원한 학생들은 평균 75만 명 정도의 수험생이 응시하는 대학 입학 시험격인 A레벨에서 자신이 선택한 세 과목에서 최소한 두 개 이상의 A와 한 개의 B를 얻어야 합격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公私立(공사립)을 막론하고 합격의 안정권으로 생각하는 점수는 세 과목 모두 A. 따라서 세 과목 모두 A를 받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는 학생들의 경우 지원서 작성時 한국에서처럼 담당 교사와 밀고 당기는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통상 지원은 A레벨 시험을 보기 전에 예상 점수를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고 옥스포드 대학측의 서류 심사를 통과한 학생들은 옥스포드 대학에서 면접시험을 치르게 된다. 면접시험은 대부분 12월경에 자신이 선택한 칼리지에 3~4일 간 숙식하면서 진행된다. 대개 2~3회 동안 자신이 선택한 학과 교수와의 인터뷰 그리고 칼리지의 다른 학과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학생들은 자신이 선택한 전공에 대한 지식보다는 창의적 사고와 추리 능력, 역사관과 세계관 등 폭넓은 분야에 걸친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자신의 학문적 가능성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교수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 이 학생이 얼마나 그동안 많은 것을 암기하였나가 아니라, 이 학생이 문제를 만들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나를 발견하려 하기 때문이다. 질문의 내용과 형식은 워낙 다양하여 꾸준히 면접에 대비한 훈련을 받지 않으면 좋은 성적을 내기가 힘들다. 영국에도 옥스포드에 지원하는 학생들을 위한 면접시험 대비 학원이 존재하고 면접시험 대비 수험서가 발간되고 있다.
 
  면접시험 결과에 따라 학생들은 A레벨시험에서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두어야만 입학이 가능하다는 조건을 통보받게 된다. 대부분이 세 과목 모두 A, 면접시험에서 뛰어난 발표력과 사고력을 발휘한 학생의 경우 A 두 개와 B 한 개 정도의 관대한 점수 조건을 요구받는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약 75만 명의 수험생 중 약 3000명의 옥소니안이 골라지는 것이다.
 
 
  한국인 학부생 20여 명, 대학원생 45명
 
 
  비록 학생 신분은 아니었으나 옥스포드 땅에 첫발을 디딘 기록상 최초의 한국인은 海公 신익희 선생인 듯하다. 최근 발견된 海公 신익희 선생의 여행기에서 海公 선생은 자신이 1953년 現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식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윈스턴 처칠의 生家인 옥스포드의 블렌하임 궁전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 참석하였다는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최초의 코리언 옥소니안은 3공화국 시절 최연소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던 李東元 前 장관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前 KDI 원장을 역임한 李基俊(이기준)씨가 그 다음해에 유학을 와서 韓人 유학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1960년대, 70년대 유학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55년 李東元 前 장관이 최초의 유학생으로 등록한 이후 약 50여 년간 옥스포드를 졸업한 이는 105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대다수가 1980년 이후에 온 이들이니 1960, 70년대 옥스포드로 유학 온 이는 손을 꼽는다.
 
  특히 1960년대의 경우 1963년에 丁一權(정일권) 前 총리가 駐美대사를 그만두고 옥스포드에 잠시 적을 두고 있었던 사실을 제외하고 이렇다 할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의 김광억 교수 등이 공부하였으나 옥스포드에 한국 유학생이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해외 여행이 자율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를 전후해서이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국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를 역임했고 현재 예일대학 법학대학원 석좌교수인 고홍주 교수, 런던 정경대학교 재정학 교수인 경제학자 신현송 교수, 중진 정치인 한나라당 손학규 의원 등이 국내외 각 분야에서 리더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1980년대 유학생들 중 일부이다.
 
  주로 인문사회과학 분야로 편중되어 있던 1980년대 한국 유학생 사회와는 달리 1990년 이후 옥스포드는 인문사회과학 분야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이공계열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한국 유학생을 갖게 되었다. 주로 석박사 과정의 유학생 중심에서 학부생들이 대폭 늘어난 것도 큰 특징이다.
 
  현재 옥스포드에 있는 한국 유학생은 학부생이 약 20여 명, 대학원생이 인문사회계열 약 30여명, 이공계열이 약 15명 정도이다.
 
 
  영어로 스트레스 받아
 
 
  영국인들은 상대방 영어의 억양과 어휘의 사용 등을 통해 그의 교육정도, 생활 정도, 문화의 정도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한다. 영국에서 몇 년을 보내본 외국인들 역시 상대방의 영어가 어떤 종류의 영어라는 것에 대해 어렴풋하게 감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어떻게 말하는가?』가 어떤 차를 타고 어떤 옷을 입었는가보다 중요한 이 사회에서 영어를 잘 하는가 못하는가의 문제는 무척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높은 수준의 영어는 옥스포드에 다니는 외국인을 포함한 모든 학생들에게 요구된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대학을 마친 대학원생들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영어이다. 영국 대학 입학에 필요한 영국 어학 능력 시험인 IELTS는 어휘, 독해, 문법 등을 중심으로 한 TOFLE과는 달리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를 시험과목으로 하고 있다. 책을 읽고, 논문을 쓰고, 세미나나 튜토리얼에서 듣고 평가하고 발표할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영어가 자연스럽지 않은 나이 먹은 유학생들에게 영어권 학생들과 같이 생활하는 칼리지라는 공간은 훌륭한 어학원 역할을 하기도 한다. 金泳三 前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대통령의 국제적 입과 귀 역할을 하였던 박진 교수의 어학 실력도 이러한 옥스포드의 토양에서 키워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990년 중반까지 한국 학생들의 졸업 후 진로는 고국에서의 교직이 주종을 이루었다. 하지만 1990년 중반 이후 유학생들의 진로 모색은 이전 세대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옥스포드 대학교의 코리아 소사이어티(Korea Society) 회장인 황순일(34·동양학 박사과정)씨는 『최근에 유학 오는 학생들의 가장 큰 특징은 졸업 후 진로의 다양성』이라고 말한다. 『이전의 유학생들이 고국에서의 교수직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최근에 유학 오는 학생들의 경우 국제기구, 금융계, 다국적 회사 등 해외에서의 직장 구하기에 더욱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옥스포드에서 기른 신사도와 리더십의 세계적 적용을 모색하는 한국인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돌아가는 사람들
 
 
  옥스포드 졸업식은 셀도니언 극장(Sheldonian Theatre)이라는 중세 원형 극장에서 라틴어로 진행된다. 받는 학위별로, 칼리지별로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은 총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에게 자신이 옥스포드가 정한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자격을 갖추었다는 보고를 하고 총장은 이를 인정하고 학위를 수여한다.
 
  약 3~4시간 동안 이어지는 이 졸업식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박사학위를 수여받는 학생들이다. 자신이 입학할 때 입었던 가운으로 졸업식에 참석한 이들 예비박사들은 졸업식에서 박사학위 가운으로 갈아입고 총장에게 자신이 옥스포드의 정식 멤버가 되었다는 것을 신고하고 총장은 이를 수락한다. 학위를 받은 후에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학생들은 학생들이 앉던 자리에서 교수들이 앉는 자리로 옮겨 앉게 된다.
 
  이제 그들은 명실상부한 한 사람의 연구자요,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는 상징인 셈이다. 한국 유학생이 박사학위를 받게 되는 날이면 조촐한 술자리로 떠나는 이들과 남은 이들이 아쉬운 이별을 나눈다. 축하와 격려의 떠들썩함이 잦아들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지면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옥스포드에 대한 많은 오해와 편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떠나는 이들에게 이들 오해와 편견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칼리지의 높은 담, 꽉 닫힌 문 속에 존재하는 미지의 세계를 경험한 이들은 자신이 발견한 옥스포드, 교육기회 균등이라는 사회적 압력에 직면한 엘리트 교육의 위기, 첨단과학 분야에 대한 시대적 요구에 위협받는 기초학문의 육성에 고민하는 옥스포드, 무엇보다 시대의 변화를 추동하는 상아탑의 진정한 역할에 대한 자신만의 대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