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위병’ 파문 李文烈의 4시간 격정토로
|
|
||
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 ||
(신동아 2001년 8월호) |
기사 작성 전 기자가 보내준 인터뷰 녹취록을
읽어본 이문열(53)씨는 이메일 답변을 통해 “지금은 내가 왜 이 곤혹스런 인터뷰에 응했던가 후회가 됩니다”라며 착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무엇이
이 노련한 작가를 난처하게 만들었을까. 이른바 ‘이문열 파동’의 전말은 이렇다. 6월29일 국세청이 언론사 세무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분개한’ 이씨가 7월2일자 조선일보 시론을 통해 정부의 ‘언론탄압’을 비판했다. 다음날 민주당 추미애 의원이 당4역회의에서 “일부 신문의 지면을 통해 성장한 지식인이 곡학아세를 하고 있다”고 이씨를 공격했다. 이때부터 이씨의 홈페이지 게시판은 네티즌들의 공방으로 난장판이 됐다. 7월5일 추미애 의원의 취중욕설은 논쟁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문열같이 가당치 않은 놈이….”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조선·동아일보를 비난하던 추의원이 ‘덤으로’ 이씨에 대한 감정까지 드러냈던 것. 다음날 조선일보가 이를 보도하자 대부분의 언론이 뒤를 따랐다. 그 와중에 이씨는 한차례 더 신문에 글을 써 논란을 부채질했다. 7월9일자 동아일보에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라는 제목의 시론을 올린 것이다. 이후 각 신문과 방송은 이씨 글에 대한 지식인들의 논쟁을 앞다퉈 다뤘다. 그가 왜 ‘이 시대 최고의 문화권력’으로 불리는지를 새삼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인터뷰는 7월9일 오후 경기도 이천에 있는 그의 집에서 진행됐다. 서가용 사다리까지 있을 정도로 책숲을 이루고 있는 집필실의 서재는 바깥의 더위를 한순간에 잊게 해줄 만큼 서늘했다. 며칠 전 앓던 이 2개를 뺐다는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지난 20여 년간 엄청난 분량의 소설을 쓰면서도 가욋일로 시론 독후감 등 다양한 종류의 글을 언론매체에 발표하고 각종 문학상심사위원으로 활약해온 이 왕성한 정력의 작가는 여간해선 남들의 비판에 개의치 않는 대단한 뚝심을 갖고 있다. 타고난 낙천주의자는 아닌 듯싶지만, 자신에게 비판적이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도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참 나쁜 놈들이네” 하고 껄껄 웃고 넘어간다. 이씨의 이런 여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요 몇 년 동안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부쩍 높아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대중에게 인기가 좋다. 나올 때마다 화제가 되고 예전에 쓴 작품들은 부동의 스테디셀러다. 지난해 10월 동아일보와 여론조사기관 ‘갤럽’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한국 작가로는 이씨가, 외국 작가로는 시드니 셸던이 꼽혔다. 그 이유를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인터뷰의 문을 열었다. “글쎄요, 다른 말로 하면 인기의 비결이 뭐냐는 것이겠지요? 일종의 자기 분석인데, 전에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글을 쓰되 시류를 겨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통시성을 가진 작품이라는 거지요. 그 다음, 나 자신이 독자라는 사실, 혹은 내가 독자였던 때를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독자였을 때 작가한테 원했던 것을 쓰는 것입니다.” ―예전에 마광수 교수가 이선생의 인기비결이 교양주의라고 분석한 바 있지요. “그것도 이유가 될지 모르지요. 나 스스로도 어떤 작품을 읽을 때 그것을 통한 교양의 확충을 기대하니까요. 재미라든가 쾌락적 측면이 아닌 지적 기대지요. 마교수 말고도 몇 사람이 그렇게 얘기한 것을 들었습니다.” ―이선생께서는 작품에서는 사회참여적인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 반면 사회적인 이슈가 생길 때마다 언론매체에 등장함으로써 여론형성에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인가요? “책임감이나 의무감도 없지는 않지만 상황이 나를 그렇게 몰고 가는 경우가 많아요.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어떤 시비거리가 생기면 꼭 나한테 물으러 와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언제부터인가 중대한 사회적 이슈가 생기면 내가 곧 끌려 들어가겠다 싶은 예감이 들곤 합니다. 내 지지를 바라는 사람들이 나한테 각자에 유리한 정보를 전해주며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그 시작입니다. 한 10여 년 된 현상입니다.” “내가 마음속으로 지지하는 쪽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이상하게 몰리면 나도 모르게 튀어나가게 된다”는 말에서 그의 타고난 ‘전투성’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 정권 들어와서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지난해 (중앙일보에) 홍위병 얘기를 한 번 썼죠.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을 거론하며. 이 정권 들어 그때까지 신문에 쓴 칼럼은 그것 하나뿐이에요. 내 기억으로는 (정권 출범 후) 만 2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나는 그 만 2년을 이 정권에 대한 예우기간으로 삼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정부가 성립하는 데 정말 도움이 안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다수가 원해 이 정부를 만든 것이니 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처음부터 비판하고 나서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
노동조합에 지배되는 신문 | ||
―이선생께서는 작가 또는 지식인으로서 정국에 대해 일정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습니까? |
||
문제의 본질은 소수정권의 한계 | ||
이씨의 주장 중 압권은 역시 홍위병론이다. 시민단체 등 이른바 개혁세력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이 이론에 대해 그는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
||
책값 환불 논쟁 | ||
그가 홈페이지를 개설한 것은 지난해 가을. 한 달에 한 번 꼴로 게시판을 들여다보고 대화방에
들어가 독자들과 채팅을 한다. 처음엔 “괜히 했다 싶을 정도로” 실망스러웠으나 차츰 대화의 질이 나아져 다행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혼자
힘으로는 이메일을 이용하지 못하는 컴맹이다. 인터넷 이용도 “애들을 불러야” 가능하다. 그는 며칠 전 ‘애들’의 도움을 받아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를 처음 들여다봤다. 추미애 의원 관련기사를 보기 위해서였다. 홍위병에 대한 본능적인 후각은 인터넷 공간에서도 발동된
모양이다. |
||
“추미애가 최대 피해자” | ||
―현 정부에 비판적인 메이저 신문들이 표적이 됐다는
거죠? |
||
세무조사라는 ‘희한한 사건’ | ||
―언론사 세무조사에 찬성하는 언론학자들이나 시민단체 주장은 어떻게
보세요? |
||
“유태인학살 비유, 지나쳤다” | ||
―정권의 의도에 대한 얘기는 이쯤 하죠. 그런데 조선일보 기고에서 방송사가 세무조사발표를
생방송한 것을 두고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한 나치의 선전·선동에 비유하셨죠? |
||
원칙의 악용이 싫다 | ||
―안티조선운동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
||
이 정권 지지세력은 ‘불만세력’ | ||
서재로 들어가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그에 따르면 이 정권의 지지기반은 “80년대에 구체적이고
대량으로 분출된 불만세력”이다. |
||
보수주의가 왜 나쁜가 | ||
이씨의 ‘보수적인’ 대북관과 관련해 일부 비판론자는 ‘빨갱이 콤플렉스’를 거론하기도 한다.
6·25 때 월북한 아버지를 둔 이씨가 공산주의에 대한 피해의식에 젖어 있다는 추론이다. 2년 전 언론은 그의 아버지의 생사여부를 확인하느라
부산을 떨기도 했다. 이씨는 이와 관련된 질문을 대수롭잖게 받았다. |
||
“시민운동에 진정성이 있나?” | ||
그는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낙천·낙선운동의 문제점과 폐해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대상자
선정기준이 한나라당과 같은 구 정치세력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이었으며 운동의 실효도 없었다는 것이 그 요지. 그에 따르면 오히려 ‘초원복집
효과’를 내는 바람에 한나라당이 대구·경북 지역을 싹쓸이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당시 총선시민연대의 운영비와 활동비 출처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
'學術, 敎育'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죠븍숀(거북선)’, ‘아이숑가이 (이성계)’로 쓸 수는 없다 (0) | 2015.10.13 |
---|---|
베로나, 오페라 하나로 이탈리아에서 제일 잘사는 도시가 된 사연 (0) | 2015.10.13 |
英國 옥스포드 대학교 이야기 (0) | 2015.10.13 |
공산주의를 비판했던 조지 오웰과 시몬느 베이유 (0) | 2015.10.13 |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0) | 2015.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