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예우와 더불어 헌강왕은 곧바로 그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해에 중창을 마무리하고
대숭복사(大崇福寺)라고 절 이름을 고친 원성왕의 원찰에 사적비를 세우게 하면서 그 비문을 최치원에게 짓도록 명령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헌강왕
8년(882) 12월19일에 입적한 지증(智證)대사 도헌(道憲, 824∼882년)의 탑비문 찬술도 하명하였다.
이에 최치원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29세 된 청년의 기개답게 최고의 문장력을 과시하기 위해 참고가 될 만한 기왕의 비문을
모으고 역대 사적(史籍)을 섭렵하는 등 착실한 준비작업에 들어간다. 미처 이 비문들을 짓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헌강왕은 그 12년(886)에
옥천사(玉泉寺; 쌍계사의 옛이름) 진감(眞鑑)선사 혜소(慧昭, 774∼850년)의 시호와 탑명을 내리면서 그 탑비문의 찬술을 다시 명령한다.
그리고 이해 7월5일에 돌아간다. 그러니 진감선사 혜소의 대공령탑비(大空靈塔碑)의 비문 찬술 명령은 유명(遺命)이 되고 말았다.
최치원은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는 현군 헌강왕의 권우(眷遇; 사랑하여 돌보고 대접해 줌)에 감격하여 찬란하게 물든 단풍을 한껏 더
빛나게 하려는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난 지 1년여 만에 갑자기 국왕이 돌아가니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그 아우인 정강왕도
등극한 지 1년 만에 뒤따라 돌아가고 여동생인 진성여왕(眞聖女王, 887∼896년)이 등극하여 어지러운 정치를 계속하여 신라를 망국으로
몰아감에서랴!
찬란하게 물든 단풍을 더욱 붉게 물들이려 하는 찰나에 설한풍(雪寒風; 차가운 눈바람)이 불어닥쳐 하루아침에
산천초목을 얼려 떨어지게 한 격이었다. 최치원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의욕을 상실하여 한동안 비문 짓는 일을 중단하고 팽개쳐 둔
듯한데 정강왕의 재촉 때문이었는지 곧바로 정신을 수습하여 우선 헌강왕이 유명으로 부탁하고 간 진감선사 혜소의 비문부터
완성해낸다.
그래서 정강왕이 돌아가는 해인 정강왕 2년(887) 정미 7월에 비석을 세운다. 정강왕이 7월5일에 돌아가니 이
비석을 보고 돌아갔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 비석이 지금도 하동 지리산 쌍계사 안마당 대웅전 앞에 서 있는 국보 제47호 <쌍계사
진감선사대공령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靈塔碑)>(도판 10)다.
이 비석 양식은 한 해 앞서(886) 세워진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비>(도판 4) 양식과 방불하다. 이수 정면 용트림 조각이 전액판 좌우에서 서로 머리를 들고 입을 벌린 채 대결하고 있는 것이나
귀부의 용머리 형태에서 이빨만 보인 것 등이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진감선사비의 귀갑무늬가 홑겹으로 크게 표현되었다거나 비신꽂이
주변으로 운룡문만 장식된 것 및 이수 중앙에 위로 피어난 연꽃 받침 위에 동그란 구슬이 장식된 것은 선림원지 홍각선사비와 서로 다른
양식이다.
이 비문은 글씨(도판 11)도 최치원이 직접 쓴 것인데 초당 삼대가라고 불리는 구양순(歐陽詢, 557∼641년),
우세남(虞世南, 558∼638년), 저수량(遂良, 596∼658년)의 필법을 충분히 소화하여 자기화한 독자적인 필체다. 굳이 분석해 말한다면,
구양순의 체격(體格)에, 우세남의 필의(筆意)와 저수량의 풍운(風韻)을 곁들인 필체라 하겠다. 불과 31세의 청년이 어떻게 이런 세련된 필체와
유려 경쾌한 문장을 구사해냈는지 감탄을 자아낸다. 최치원은 비문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대저 도(道)가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도 멀리 있지 않듯이 사람도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거나 서로 다름이 없다. 이로써 동쪽나라 사람의 아들들이 승려가 되기도 하고 유학자가
되기도 하여 반드시 서쪽으로 큰 바다를 떠가서 통역을 거듭하여 좇아 배우려 하였다. 목숨을 배에 맡기고 마음을 중국에 두어 빈 채로 가서 채워
돌아오며 먼저 고생하다가 뒤에 얻으니 또한 옥 캐는 사람이 곤륜산의 높은 것을 꺼리지 않고 진주 찾는 사람이 검은 용이 사는 골짜기의 깊은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하겠다(夫道不遠人, 人無異國. 是以東人之子, 爲釋爲儒, 必也西浮大洋, 重譯從學. 命寄木, 心縣寶洲, 虛往實歸,
先難後獲, 亦猶采玉者, 不憚丘之峻, 探珠者, 不辭驪壑之深).”
당나라 유학에 대한 자부심을 피력하여 진감선사와 자신의 위상을
극명하게 밝히면서 불교와 유교가 추구하는 도에 차등이 있을 수 없고 신라 사람과 중국 사람의 인성(人性)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자존 의식을
분명히 표출하고 있다.
진감선사 혜소(774∼850년)는 이미 최치원(857∼?)이 탄생하기 7년 전인 문성왕 12년(850)
1월9일에 77세로 돌아간 분이다. 그 유계(遺戒; 돌아가면서 남긴 경계하는 말)에 따라 부도와 탑비를 세우지 않았다 하는데 이제 36년이 지난
뒤에 헌강왕이 그 모법제자(慕法弟子; 법을 사모하는 제자)들인 내공봉(內供奉) 일길간 양진방(楊晋方)과 숭문대(崇文臺) 정순일(鄭詢一)의 청으로
진감(眞鑑)이라는 시호와 대공령탑(大空靈塔)이라는 탑명을 내려 부도와 부도비를 세우게 했다고 한다.
유계라고 했지만 사실 진감선사가
전주 금마 출신의 한미한 하급 귀족이었기 때문에 시호와 탑호가 내려지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감선사가 세공사(歲貢使)의 노꾼이 되기를
자원하여 겨우 중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던 것이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문명을 떨치고 돌아와
최씨들의 위상이 높아지자 헌강왕이 뒤늦게 이와 같은 배려를 하지 않았나 한다.
진감선사의 속성이 최씨이고 금마인이라 한 것과
최치원이 옥구(沃構) 사람이라는 전설이 따라다니는 것과도 어떤 관련이 있을 듯하다. 왕도에 살던 최씨 중 일부가 일찍이 통일 과정에 옥구와 금마
일대에 자리잡아 살게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치원은 비석의 첫머리에 “도불원인(道不遠人)이요
인무이국(人無異國)”이라는 함축적인 표현을 써서 도법(道法)의 종류와 출신지의 상이가 차등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혀 진감선사가
시호와 탑명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피력했던 듯하다. 최치원이 귀국하자마자 처음으로 짓기를 명령받았던 봉암사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의 비문이나 숭복사비문을 뒤로 미뤄두고 한 해 뒤에 명령받은 진감선사 혜소의 탑비문을 서둘러 먼저 지은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을
듯도 하다.
<쌍계사 진감선사대공령탑>(도판 8)은 현재 쌍계사 산내 암자인 국사암(國師庵) 동쪽 봉우리 중턱 명당자리에
터잡고 있다. 이런 복잡하고 황급한 건립 배경 때문인지 부도 양식은 매우 단순하다.
바로 한 해 앞서 정강왕 원년(886)에
조성한 <선림원지 홍각선사부도>(도판 3)가 처음으로 기단 하대에 복련대(覆蓮臺)를 중복해 기단을 한 송이 연꽃으로 상징하던 초기
의도를 파괴하는 실마리를 열었다는 얘기는 이미 홍각선사부도에서 밝혔다. 그 다음 해에 만들어지는 이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령탑>에서도
바로 그런 양식이 계승되어 하대에 복련 표현이 더해져 있다. 그러나 중대석은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 모양으로 팔면에 각각 안상만
새겨놓았는데 북통 모양의 배흘림 표현은 하지 않았다. 아울러 <선림원지 홍각선사부도>의 운룡문 돋을새김이나 상촉하관의 원통 모양도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 앙련으로 장식된 연화상대 위에 바로 탑신석을 올려놓지 않고 씨방 모양의 받침돌을 하나 더 얹었는데
그 표면이 권운문(卷雲文; 뭉게구름 무늬)으로 장식되어 있다. 수미좌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868년경에 조성된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제26회 도판 9)에서는 맨 하단 지대석 바로 위에 표현되던 구름무늬가 874년경에 만들어진 <쌍봉사
철감선사탑>(제25회 도판 9)에서는 기단부 하대까지 올라가고 그것이 다시 886년에 조성된 <선림원지 홍각선사부도>에서는 기단
중대석으로 올라오더니 이제는 마침내 상대 앙련 연화대석 위로 올라가 탑신석을 직접 받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때는 이미 기단부에 대한 의미가
망각된 상태였다고 보아야 한다. 맹목적인 부재의 이동 배치가 의미없이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이런 현상이 빚어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단 중대석의 팔각기둥 크기와 탑신석의 팔각기둥 크기가 비슷해졌고, 장차 이 양식은 남포 <성주사지 낭혜화상
백월보광탑>이나 충주 <월광사지 원랑선사 대보광선탑>으로 이어졌던 듯하다. 옥개석 상부에 상륜부를 얹으면서 노반(露盤) 부위에
구름 장식을 더한 것도 의미없는 장식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