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進步의 狂風」이 휩쓸던 20세기 초 유럽과 비슷 문학 계간지 「라쁠륨」을 6년째 출간하면서
나는 정치나 이데올로기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었다. 한도 끝도 없는 改惡(개악)이 연속되는 우리 정치현실을 보고 주위에서 누군가가 흥분해서
개탄할 때 나는 예전에 비해 담담하다 못해 냉담하기까지 하였다. 우선 내가 하는 문화사업을 잘 꾸려가는 것이 당면의 과제요,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허나 현실정치에 눈을 감고서 좋은 작품의 창작만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非지성적인
자세인가를 알기에 이따금 나는 속에서 불편한 것이 걸리적거리거나 용틀임하는 것을 느껴왔다. 요사이 여권과 신문의 피 흘리는 싸움은 관전의 여유만
즐길 입장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더 침묵을 지키느냐, 개인적인 즐거움과 당면한 나의 과업에만 신경을 쓰는 것으로 自足(자족)하면 되지 않느냐의
내밀한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직전에 月刊朝鮮에서 나의 칼럼집에 난 평론을 읽고 이 글을 청탁해 왔다. 그동안 쌓인, 하고 싶은 말도 쓸 겸
늦은 酷暑(혹서)가 막바지를 향해 치달리는 휴가철에 그 청탁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누군가가 요사이 벌어지고 있는
이념전쟁을 꼭 8·15광복 직후와 유사하다고 하였다. 북한의 「8·15 민족통일축전」에 참가한 남한측 인사들이 평양 현지와
귀로의 공항에서 벌인 광태들이 특히 그러하다. 허나 193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 시몬느 베이유와 조지 오웰에 대한 논문을 대학 강단에 있을 때
쓴 적이 있는 필자에게는 요즘 한국사회의 가치顚倒(전도) 현상이, 기존의 가치들을 모조리 부정한 진보주의 광풍에 휩쓸렸던 20세기 초반의 유럽
사회 분위기와 어딘가 유사하다고 느껴진다. 現정권이 추진하는 남북통일 정책이나, 북한 정권과 여권이 강행하는 개혁정책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발언을 가지고 냉전주의 혹은 反통일, 수구반동으로 몰고 가는 것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어 지식인들이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발표하기를 꺼리는 세태가 그러하다. 폐기처분된 사상, 제도를 신봉하는 부류가 있는 것은 아닐까
국제사회에서 점점 이데올로기가 없어져 가는데도 혹시 우리 사회는 역사적 실험에서 제도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이미
오래 전에 폐기처분된 사상과 제도를 아직도 신봉하는 부류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마치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등산객이 길을 찾아 헤매고
헤매도 번번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링덴바롱(독어)처럼 우리 사회는 제 자리에서 일보도 전진하지 못하거나, 역사적으로 퇴행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 투사와 자유의 기수로 알려진 金大中씨가 대통령으로 집권한 후에는 그 누구보다 비판 자체를 멀리하고 언론을 억압하는
가장 非민주적인 대통령이라는 평판을 받기에 이르른 것은 얼마나 아이로니컬한 일인가. 現정권에 비판적인 3大 신문을 표적으로 하는 대대적인
세무조사, 거액의 탈세 추징, 신문사 社主(사주) 사법 처리 등 일련의 조치는 비판과 표현의 知的 자유를 어느 독재국가도 무색하도록 억압한
사례로,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최대의 사건이다. 3大 신문 중에서도 朝鮮日報, 東亞日報는 군사 독재정권 시대에도 할 말을 다해 온 언론의
보루가 아닌가. 나는 한때 東亞日報가 탄압을 받을 때 「동아여 다시 깃발을 들어라」하고 東亞를 고무하는 時論을 쓴 적이
있다. 요사이 나는 나의 정치 평론이 가장 많이 나왔던 朝鮮日報가 불매운동 내지 언론 탄압의 가장 우선적인 표적이 되고 있는 것에 『조선이여,
이 고비를 잘 넘겨서 끝까지 깃발을 날려라』 말하고 싶다. 한 마디로 한국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정치권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대형 조난을 당할 때 이미 나침반조차 돌아가지 않고, 구조의 길이 전혀 막혀버린 절망적인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 몹시
우려된다. 권력이란 마약의 맛에 길들여져서 理性을 잃고 남발하는 폭언의 난무는 인터넷까지 오염시키고, 한국 사회를 분열과 광기의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시몬느 베이유가 1930년대 초에 서구 지식인 사회를 휩쓴 마르크시즘을, 언어의 가장 저속한 의미에서
일종의 종교이며 종교적인 구원의 모든 저열한 형태와 마찬가지로 민중의 아편에 불과하다고 규정하였던 것이 상기된다. 이데올로기란 또 하나 다른
형태의 권력에의 의지임이 북한의 金日成, 金正日과 소련의 스탈린이 단적으로 나타내었다. 그와 비슷한 양상이 남한에도 일어나고 있어 남한과 북한의
정체성도, 경계도 모호해진 것이 무척 불행한 사태이다. 지도자의 선택은 역사의 흐름과 줄기를 바꾸어 놓고 이처럼 우리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지금 많은 지식인과 보수층이 사회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경향에 적지 않은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자기
의견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1930년대 유럽의 赤風(적풍)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눈치를 보느라고 마지못해 그쪽에 가담을 하든가, 하다 못해
앙드레 말로까지 입을 다물었던 것과 너무나 유사하다. 공산주의 비판하면 파시즘 옹호라고 오해받던 시절
1930년대의 세대에는 無産者(무산자) 혁명을 성공시키고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했던 소련이, 세기적 위기 의식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 방황하던 서구 지식인들에게는 동경해 마지않았던 유토피아였다. 이 백일몽에 현혹되어 공산주의를, 스탈린이즘을 미화하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시몬느 베이유와 조지 오웰만은 마르크스주의와 스탈린이즘을 비판하고 소련을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억압적인 독재 국가라고 규탄하였다.
그들은 1936년 「소련 기행」에서 소련 비판을 썼던 앙드레 지드보다 앞서서 소련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예언한 것이다.
그 이후에 알려진 스탈린의 무자비한 숙청, 스페인 전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폭력과 무차별 검거 학살, 소련이 나치스 독일과의 불가침조약을 맺어
폴란드를 獨蘇(독소)가 공동 분할 점령한 배신적 행동을 계기로, 서구 지식인들의 일부가 소련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도
서구 지식인들의 잘못된 소련관이 戰後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당시까지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소련의 허구성을 동시대 지식인들보다 훨씬
앞서서 꿰뚫어 본 베이유와 오웰은 선구자적인 炯眼(형안)을 가지고 있었다. 베이유는 특히 사고의 자유에 관해서는
개인으로서의 저널리스트에게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야 하며 집단이 구성원에게 강제하는 한 가지만의 의견을 공표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시켜야 한다는
이색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우리들」이라는 말이 思惟(사유)의 표현에 전제될 경우, 개인의 지성이 속절없이 패배하고 만다는 것이다. 참다운
思惟는 힘의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집단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정신 속에서만 형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체의 이데올로기적 광신과
집단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언론의 자유를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그녀는 숱한 사설 형식을 통해서 강조하기도 하였다. 베이유는
소련 체제 아래에서는 언론, 출판의 자유가 없고 인쇄, 타이프, 수기에 의한 문서의 형태는 말할 것도 없고 언어로 자유로운 판단을 표현하는
일조차도 流刑(유형)을 각오해야 하기에 권력을 가진 공산당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소련의 스탈린이즘이고 이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북한의 金日成과 金正日이다. 다시 말해서 경제와 정치의 全권력을 장악, 행사함으로써 국민을 완전지배하는 전제적 전체주의 체제인 것이다.
집단에의 隸屬 배척한 베이유와 오웰 베이유는 소련을 노동자 국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왜곡된 엉터리 표현은 없으며, 黨과 국민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 체제의 안전과 존속을 위협하는 내외의 모든 것을 거미줄 같은 비밀경찰
조직망으로 감시하는 경찰국가라는 점에서 파시즘, 나치즘과 동질의 체제라고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녀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스탈린이즘을
답습하는 북한까지 싸잡아서 혐오하고 비판했을 것이다. 베이유와 오웰은 나치즘·파시즘의 모든 교조와 행위를 증오한 점에
있어서는 1930년대의 많은 지식인들과 같았다. 그들과 다른 것은 나치즘·파시즘의 적대세력으로 간주되었던 마르크스주의와 공산당 및 소련에 대해
환상과 동경을 가지고 그들을 좋게만 보았던 대부분의 지식인들과는 반대의 길을 선택한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소련의 공산당이 나치즘·파시즘보다
더한 전체주의적 인간 억압 체제임을 간파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그들보다 더 침투성이 크고 지배권을 장악할 가능성도 크다고 보았다.
1930년대 지식인들은 공산주의를 비방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나치즘·파시즘을 지지하고 동조하는 것이 될까봐 공산주의에 말없이 동조하거나
타의에 의해 끌려간 일면도 있다. 이것은 마치 유신과 1980년대 군사독재 시대에 사회주의 운동권이나 좌익사상 비판이 독재를 독려하는 것으로
오인될까봐 입을 다문 우리네 일부 지식인들의 경우와 유사하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사색(비판의 자유)과 집단의 관계에
대한 베이유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집권자나 지식인이 모두 귀담아 들을 명언이다. 『모든 영역에 있어서 집단의 힘은 개인의
힘을 능가한다. 그러나 하나의 예외가 있다. 그것은 사색의 영역이다. 사색에 관한 한 개인과 집단의 관계는 逆轉(역전)한다. 이 영역에 있어서는
개인이 집단을 압도적으로 능가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색은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정신 속에서만 형성되는 것이지만 집단은 그러한 사색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사색 능력은 집단을 포함한 어떤 외부의 강제력이나 물리력으로도 결코 통제할 수 없다』
베이유는 여기에서 일보 전진하여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하기도 하였다. 『피억압자들이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을 구성하려고 할 때마다 그 집단은 정당이든, 노동조합이든, 자기 내부에 그 자신들이 개혁 또는 타도하려고 공언했던 제도의
모든 결함을 그대로 再생산하게 된다. 즉 관료조직, 수단과 목적의 전도, 개인에 대한 억압, 사색과 행동의 분리, 사색의 기계적 획일화,
선전수단으로서의 우매화와 허위의 이용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핍박을 받았던 야당 정치인 金大中씨가 대통령이 되자 자신이
당한 것과 부조리한 정치적 메커니즘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과 같다. 「공식적 정통성」을 거부해야
베이유는 집단에 대한 개인의 종속에 항거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역사의 흐름에 내맡기는 것을 거부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조지 오웰도 집단이나 당파에 소속하기를 거부하여 그러한 집단 또는 당파의 전체적 의견을 「공식적
정통성」이라고 명명하였다. 그것은 한 개인이 속하고 있거나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집단, 조직, 사회, 정당 등의 「전체」로서의 사고기준을
말하는데 이런 공식적 정통성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知的 성실에 충실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오웰의
사고방식은 그가 1948년에 쓴 「작가와 리바이어던」이란 에세이 속에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리바이어던은 「권력」이란 거대한 괴물을
상징하고 있다. 『우리는 정치적 충성과 문학적 성실 사이에서 현재 우리가 그어놓은 것보다 훨씬 명확한 일선을 구획해야
한다.… 작가가 정치에 참여할 경우 어디까지나 일개 시민으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참여해야지 작가로서 참여해서는 안 된다.
작가가 속하는 黨派를 위해 모든 것을 한다고 해도 그 黨派를 위하는 길이라고 해서 글을 쓰는 일만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자기가 쓰는 저작만은 黨의 입장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협력적으로 행동은 하되 공식적 이데올로기는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집단에 대한 충성심이 때론 필요할지라도 문학이 개인 산물인 한, 문학에는 해로운 것이다. 집단에
대한 충성심이 설사 다소라도 작가의 창작 활동에 어떤 영향을 끼치도록 허용한다면 그 결과는 단순히 곡필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창조적 능력까지
고갈시킬 수 있는 것이다』 정치권력에 아부하는 것이 「曲學阿世」 문학적 성실성에
대한 오웰의 사고는 이처럼 조금도 불투명한 점이 없다. 작가가 성실하려고 할 때 그의 글이 정치성 활동과 상충하고 모순하는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에 작가는 자기의 양심을 속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무조건 순종하는 따위는 작가의 문학적 자살이라고까지
단언하고 있다. 오웰은 「작가와 리바이어던」이라는 에세이 속에서 개인 양심의 자유, 知性의 자유, 사고의 자유가 문학에
필수적이고 기본적 요소라고 주장했으며, 작가가 그에게 규제를 가하려는 정치의 논리, 즉 어떤 敎條(교조)나 소위 공식적 정통성이라는 의견에
구속되어서 해야 할 말이나 진실을 글로 쓰지 않을 때 문학은 사멸하게 된다고 말한다. 문학에 필수적인 양심, 지성, 사색의 자유에 관한 오웰의
관심은 1946년 1월에 발표한 「문학을 망치는 것」이라는 에세이 속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知性의 자유란 우리들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보고하는 자유이며 가공의 사실이나 감정을 조작하도록 강요당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명쾌하고 생생한 언어를 사용해서 쓰려면
두려움없이 사고해야 하며 그럴 경우 인간은 결코 정치적으로 정통이 될 수 없다』 베이유는 프랑스에서, 오웰은 영국에서
태어난 작가이건만 이처럼 마르크시즘과 스탈린이즘에 대한 비판과 집단의 메커니즘과 知的 자유에 대한 견해는 일치하였으며 이것은 요사이 어느 작가의
글을 가지고 曲學阿世(곡학아세)를 역으로 들고 나온 어느 黨 구성원의 발언에 적용되는 구절이다. 그 작가의 知的 자유를 자신이 속한 黨의
정책이나 권력에 위배된다고 해서 극단적인 발언으로 몰고 간 것은 실로 개탄할 만하다.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세무조사로
언론을 궁지에 몰고 간 강한 정권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실로 작가의 知的 양심이지, 곡학아세는 아닌 것이다. 권력을 장악한 그들의 지나친
정치적 전략을 지지할 때 곡학아세란 말이 타당할 것이다. 공산주의는 反인간주의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이념 자체는 우리 사회의 일부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다. 뒤 늦게 북한의 주체사상 영향을
받아서일까, 아니면 공산주의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때문일까. 이 대목에서 확고한 언론관을 가졌던 베이유와 오웰의 사상을
다시 짚고 넘어가게 한다. 베이유와 오웰이 마르크시즘을 증오하고 배척한 것은 공산주의가 곧 反인간주의이기 때문이다. 오웰이 스페인 전쟁에 참전한
것도 인간성 파괴의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서였고 「인간의 인간다움」을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그는 한 마디로 인간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는 이
전쟁에서 공산당과 소련의 전체주의적 실체를 적나라하게 체험하였다. 더구나 오웰이 분격한 것은 공산주의와 소련을 무조건
좋게만 보는 당시의 서구 지식인들이 反프랑코 세력을 지원하는 소련이 非공산당 정파와 지도자들에게 자행한 무차별적 투옥, 사형, 무장해제를 믿지
않으려 했고, 또 알았으면서도 묵인하거나 외면한 사실이었다. 非공산당계의 의용군으로서 스페인 전쟁에 참여했다가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탈출했던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를 써서 그 실상을 폭로하고 고발하였다. 베이유의 스페인 전쟁 참전은 마르크스주의와 소련
체제에 대해 종전부터 가지고 있던 현실적이며 철학적인 분석을 사실로 확인하는 것이 되었다. 베이유는 인간 사회의 미래에 대해 그 당시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현대 인류는 세계 도처에서 사회조직이 전체주의적 형태, 즉 모든 영역 특히 사색의 영역까지도 국가권력이
결정권을 갖는 불행한 제도를 향하여 걸어가는 증후가 보인다』 베이유의 이 말은 오늘 우리 세태의 향방과 관련해 지식인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한때 소련이 그러했고 북한이 진행형이며 지금은 남한이 뒤늦게 비슷한 양태를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는 한 마디로 말해서 마르크스주의가 西歐의 지적 풍토를 지배한 10년이었는데 이 두 사람만이 그 폐해를 알고 경고한 것이다. 모든
가치체계에 불신을 느낀 서구 지식인들이 자유, 평등, 평화를 보장하는 새로운 가치를 갈망하고 모색하고 있을 때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소련 혁명이
그것을 제창하고 그 당시 성공하는 듯 하였을 때다. 나치즘과의 투쟁을 선언한 신생 無産者 대중의 국가인 소련의 공산주의가 「이상향」으로 보였기에
공산주의에 많은 지식인들이 傾斜(경사)하던 것이 赤風이 휩쓸었던 1930년대의 시대적 상황이었다. 루이 아라공, 앙드레 지드, 앙드레 말로,
로망 롤랑 등이 그런 지식인들이다. 스페인 공화정부는, 공산주의와는 사상적 입장이 다른 자유주의자, 가톨릭 작가까지
공산주의자와 연대한 통일전선이 형성된 후 이것을 바탕으로 선거를 거쳐 인민전선 정부로 탄생된 것이다. 이것이 실은 공산주의의 국제적 전파를 노린
소련의 전략임을 서구 지식인들은 그 당시 깨닫지 못하였다. 히틀러의 지원을 받아서 이 스페인 공화정부를 전복하려는 프랑코 장군의 반란이
일어나고, 1936년의 스페인 전쟁은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려는 지식인들의 참전으로 마치 세계대전을 방불케 하였다. 앙드레
말로, 헤밍웨이, 시몬느 베이유, 조지 오웰 등 非공산계 지식인들까지 의용군으로 참전한 것이다. 한 마디로 공산주의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그들의 비위를 지적하거나 규탄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無謬性(무류성)에 도전하는 반동이며 히틀러와 파시즘을 지지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다. 자유, 평등, 평화를 약속한 공산주의는 마침내 하나의 종교적 신앙이 된 것이다. 그로 인해 비판 대신 침묵이 강요되거나 오히려
그들의 잘못이 정당화되었다. 이것은 1980년대 우리의 군사독재 시절에 좌경화되었던 反정부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이
내건 민주화운동을 부정하고 군사독재를 지지하는 것이 되어 일부 지식인들이 침묵을 지켰던 것과 유사하다. 현재 소위 진보적 민족주의의 북한 지지나
퍼주기를 비판하면 反통일이나 수구세력으로 몰릴까 보아서 말을 못 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더구나 現정권의 언론 탄압은 知性의 집단적 행사가
불가능한 지성인의 약점을 십분 이용한 것이기에 여론의 지탄을 받을 만하다. 공산주의에 종속되면 객관적 판단 마비
知性의 양심을 대변하던 앙드레 지드는 스페인 전쟁 와중에 오웰이 분격했던 非공산계 포움(Poum) 간부에 대한
공산당의 체포, 재판 없는 처형 사실을 유감시하고 이들에 대한 공정한 재판을 요구했는데, 파시스트의 새로운 盟友(맹우)란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지드는 소련을 다녀와서 「소련기행」(1936년)을 통해 그들의 문제점을 낱낱이 폭로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지식인 사회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공산당 특권층과 노동자와의 불평등, 개성과 자유의 말살, 반대자에 대한 反인간적인 강제노동, 시베리아 유형 등 현지에서 보고 들은 사실을
바탕으로 유토피아 아닌 소련사회의 데스토피아를 사실대로 써서 폭로한 것이다. 지드가 작가적 양심에서 썼던 소련의 진실은
소련을 중상하고 혁명의 적들을 고무하려는 반동분자의 글로 치부되었고, 마르크스주의자가 지배한 지식인 사회에 의해 규탄과 묵살의 대상이 되었다.
로망 롤랑, 피에르 에브라트, 조르주 프리드망, 폴 니장 등이 지드에 대한 비판에 가담한 사실은 당시 지식인 사회가 마르크시즘에 얼마나 깊이
중독되었는가를 말하고 있다. 지드를 반박한 게노는 『모스크바가 우리들의 동지에게 세계의 중심인 이상 그들을 실망시키거나
결과적으로 비방하는 것이 되는 어떤 것도 써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일단 공산주의로 改宗하면 공산주의의 목적에 종속되어 자유로운 사색과
객관적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진실을 부정하고 비판정신을 정지하는 일이 숭고한 목적에 대한 봉사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소련과 공산당에의 비판이 파시스트 고무로 통한다는 당시의 분위기로 인해 대부분의 左傾 지식인들은 공산당과 소련의 非違
사실을 알았어도 전향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켰고 또 공개적 비난을 삼갔다. 앙드레 말로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베이유는 동창인 시몬느
패트르망과의 대화 속에서 밝히고 있다. 1938년께 말로와 만났을 때 베이유는 스탈린 체제가 파시즘 체제와 동일한 억압 체제임을 지적했더니
말로는 수긍하면서도 소련 체제를 공공연히 비난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허나 1939년에 스탈린이
히틀러와 손을 잡고 獨蘇 불가침조약을 맺자 말로, 폴 니장, 오든, 스펜더 등 지식인들이 속속 공산당을 이탈하게 된다. 左傾지식인들의 정신적
갈등은 1930년대로 끝나지 않고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과 소련의 헝가리 침공 및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로 공산 신화가 허구임이
드러날 때까지 계속된다. 강제수용소에서 인간성을 말살 내지 착취하는 소련과 이 사실을 묵인해 온 프랑스 공산당을 둘러싸고 벌인 카뮈와 사르트르의
논쟁이 그 대표적 예다. 자본주의의 부패에 대한 反動으로서 오웰은 그 당시
작가들이 공산주의에 傾倒된 원인에 대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파시즘과의 대결, 말기 증상을 보인 자유방임의 자본주의를 대체할 체제의
모색(헤밍웨이가 말한 잃어버린 세대)이라는 두 가지 흡인력에 끌린 것 말고도 중산층 지식인이 할 만한 일은 과학연구, 예술, 좌익운동을
제외하고는 없었고, 극에 달한 서구문명의 퇴폐로 인한 환멸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웰은 또 하나의
원인을 영국의 1930년대 주도적 작가들은 인권이 잘 보장되고 폭력, 불법이 별로 없는 영국에서 자유롭게 자라난 중산층 계급 출신인 관계로
독재정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상상할 길이 없었다는 사실에 돌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1990년대에 군사 독재를
벗어나 민주화의 물결이 서서히 밀려들자, 지하에 있었던 좌익 세력이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과 같다. 金正日
반대하면 「反통일」인가 무엇보다 유감스런 것은 21세기에 와서도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나 비판을 反통일로 몰고
가는 것인데, 그렇다면 통일 지지는 공산주의 지지란 등식이 성립된단 말인가. 소위 진보주의를 신봉하는 통일지상주의자들이 민주화운동을 하였기에
이래저래 그들의 통일지상주의에 대한 비판도 삼가고 침묵하게 되는 이런 우리의 현실이 실로 위기로 느껴진다. 오웰은 목에
총상까지 입으면서 자유라는 大義(대의)를 위해 싸웠지만 공산당의 탄압을 간신히 벗어나 돌아온 영국에서 신문, 잡지 등 모든 언론이 스페인의
진실과 소련 공산당의 실체를 왜곡 보도한 것에 그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공산당에 불리한 사실은 일체 인정하려 하지 않고 사실을 날조까지 하고
있는 知的 불성실을 체험한 것이다. 스페인 전쟁이 오웰에게 중요한 사상적 전환점이 된 것은 1947년에 출판된 우크라이나語판 「동물 농장」에
붙인 저자 서문을 통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는 소련 신화의 허구성을 널리 세계에 폭로키로 결심했으며 그때부터 10년
동안 소련 신화의 파괴가 절대 필요하다는 확신 아래 누구에게도 이해되기 쉽고 외국어로 쉽게 번역될 수 있는 스토리를 쓸 것을 구상해 왔다고
한다. 1930년대는 지식인들이 자기가 신봉한 「이상」, 「이데올로기」, 「주의」에의 충성 또는 자기가 속한 당파,
조직에의 집단 윤리나 규율의 속박으로 인해 가장 중요한 知的 자유와 知的 성실의 포기가 정당화되던 비극의 연대라 할 수 있다. 오웰은 『역사는
1936년에서 멈추었다』고 말하였다.「스페인 전쟁의 회고」라는 에세이 속에서 한 말이다. 1930년대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 서방세계에는 지식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인까지도 마르크시즘과 공산당 체제에 환상을 갖거나 동경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에 우리의 현실이 더욱
불행하게 느껴진다. 공산권의 비참한 진실이 샅샅이 알려지면서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필두로 동구권과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몰락한 것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다. 마르크시즘이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새로운 전체주의임을 喝破(갈파)한 베이유와 그 성향이 가져올
인간의 노예화에 경종을 울렸던 오웰의 先見性(선견성)은 이데올로기나 집단에 앞서서 갖추어야 할 인간으로서의 인간다움을 기조로 한 따뜻한
휴머니즘에서 나온 것이었다. 광신과 도그마에 맹종하는 열띤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한 마디로 양심의 증인들이었다.
1차적 개혁 대상은 방송 베이유와 오웰의 사상적 혜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이 외쳤던 진실이 더욱 더 빛을
발하고 있는 점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들은 다 같이 강렬한 조국애를 가졌고 조국의 전통과 역사를 존중했다. 베이유와 오웰의 사상과 행동이
현대인들에게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知的 자유와 知的 성실 없이는 인간과 진실의 復權(복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영원한 진리이다.
우리에게 지금 이런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독재성을 띨수록 비판을 싫어하는 것이 독재의
생리이다. 이로 인해 신문매체도 두 派로 갈라져서 같은 언론끼리, 신문과 방송이 신문을 매도 공격하고 일부 시민 단체의 불매운동에다 인터넷까지
동원하여 비판적 신문을 계속 공격하는 이 광기의 열풍은 東亞日報 社主 부인의 투신 자살과 신문사 社主들의 구속까지 아울러서 국제사회가 그 귀추를
주목하고 있다. 거기에다 하필이면 현충일날에 6·25 전쟁을 일으킨 북한 金正日의 답방을 DJ가 애걸하다시피 촉구하여 많은
국민들의 분노를 샀는데, 여기에도 국민감정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집권자의 자세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과 정치 상황은 언제나 해소될
것인가. 정부 정책의 홍보 나팔수 노릇을 하는 방송매체가 비판적인 세 신문의 세금 포탈과 社主 구속을 법적으로 합리화시키는 방송을 되풀이하는
것은 가뜩이나 햇볕정책으로 뜨거운 열기가 폭발될 것 같은 이 무더위를 피해 소음 공해가 없는 외국으로 달아나고 싶게 한다.
언론개혁의 대상은 정부에 할 말을 하는 비판적인 신문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정부의 홍보 나팔수로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는 방송매체가 되어야 한다.
신문사들도 차제에 개혁할 것은 개혁해야 할 것이다. 신문도 세무조사에서 성역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허나 징·과세란 형평에 맞아야 하고,
세액의 부담을 과중하게 함으로써 기업의 활동을 중단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세법의 기본정신이다. 비판적 신문에 대한 이번의 세금 과세는 이런
원칙에 어긋난 정략적인 것이 명백하기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현재의 언론탄압은 1980년대 언론
통폐합이 있을 때 침묵을 지켰던 언론사들의 연대 의식 不在가 지금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라고. 또한 언론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민주화
투쟁 대통령 DJ가 언론 탄압을 하는 속셈은 통일 대통령이 되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국민투표로 이어질 개헌에 목적이 있는 것이냐고.
DJ를 생각할 때 연상되는 것은 朝鮮日報의 名社說이다. 1973년 여름 東京 한복판의 팔레스 호텔에서 야당 정치인 金大中씨가 납치되어
생명의 안전이 위협받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시 엄격한 정부의 검열 아래 단순보도만 허용될 뿐 모든 신문이 일체의 논평과 비판을 하지 못하게
통제받고 있었다. 살벌하던 1973년, 金大中 납치 비판 社說을 썼던 신문은 어디인가
그런 속에서 당시 朝鮮日報의 주필이었던 鮮于煇 선생은 중앙정보부의 감시가 없는 심야에 기습적으로 사설을 바꿔치기 해 가며 이
수치스러운 납치 범행에 대해 법에 의한 투명한 처리를 朴正熙 대통령에게 용기 있게 촉구했던 것이다. 법적 처리는 한국 국민 자신의 인간적인
권위의 회복과 도덕적 긍지의 고양을 위해서도 귀중한 작업이라고 강조했던 이 사설은 야당 정치인 金大中을 납치한 독재권력에 대한 국민적 공분과
앞으로 金大中씨를 살해하려는 것과 같은 불행한 사건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을 대변했던 것으로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무리 정치란 배반 그 자체라지만 DJ는 그때를 되돌아보고 언론의 자유를 해치는 결정적인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 누구도 통일이 눈앞에 다가올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 누구도 6·25 전쟁이란 과거에 얽매여서 같은 민족과의 통일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북한의 세습제 내지 모든 것을 통제하는 북한식 공산주의와의 낮은 단계 연방제의 통합을 원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소위 진보적 민족주의자라는 사람들이 남한과 자본주의 결함엔 날카로운 비판과 분석을 하면서도 북한 사회에
대해서는 金日成, 金正日로 이어지는 세습 수령독재 그리고 많은 인민들의 기아 상태를 가져온 실패한 농업정책, 정부시책 비판자에 대한 강제수용소
보내기의 인권 유린 등 非민주 체제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점이다. 1930년대 지식인들의 불행했던 과오를 비판했던 베이유와
오웰의 知的 선견성을, 그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반추한 것은 우리들의 사회상이, 현실이 하도 수상하고 괴이쩍어서다. 뭐니뭐니 해도 말 없는 다수의
속마음이 무엇인가를 헤아릴 줄 아는 것이 참된 정치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요, 과제라고 생각한다. 국회에서 통일부
장관 해임안 표결이 있었을 때 밖에 나와서도 TV뉴스에 귀를 기울일 만큼 가결을 바라는 국민들의 지대한 관심이 바로 말 없는 다수의 속마음이다.
그것은 곧 DJ의 햇볕정책에 대한 거부인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그리고 햇볕정책이 남한을 무장해제시킨 것에 국민들은 위기를 느껴왔다.
DJ정권은 「회담재개합의」 이행 호소에도 묵묵부답이었던 북한이 갑작스럽게 남북 당국자 회담을 제의해 온 것에 두 당이 가결이라는 방침을 더
일사불란하게 결집시킨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정략적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부는 北風에는 역풍이 불게 마련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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