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니인터뷰 】히브리문자 기원설 주장하는 조철주박사
─훈민정음이 중국유태인의 히브리문자를 모방했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충격적인 가설이다. 히브리문자 기원설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지난 76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대학 성서학과에 다닐 때의 일이다. 어느날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책을 강독하는 시간인데, 문득 히브리어 문자가 우리 한글 과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두 문자의 유사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후 텔아비브의 디아스포라 박물관 등지를 다니면서 유태인의 역사에 관한 자료를 모았 다. 그 과정에서 중국유태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유태인들이 머나먼 중국에서 살게 된 경위는….
『고대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세계로 떠돌게 된 유태인 가운데 일부가 중국에 들어와 동서를 중개하는 무역업을 했다. 그들의 문헌에 「천축에서 왔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인도를 경유해 중국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 중국유태인은 양자강 중류지방 등에 정착촌을 이루고 살면서 11~16세기까지 번성했다고 한다. 인구가 많을 때 는 수만명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의 관직에 오른 사람도 많았다. 이들이 남긴 한문 석비를 자세히 보면 성자(聖字), 오행(五行), 12지간(支干) 등 우리에게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특히 그들의 기도문에 「창조서」가 언급된 것이 히브리문자 기원설의 단서가 되었다』
─「창조서」가 어떤 책이기에 훈민정음의 기원과 관련이 있나.
『유태교 신비주의 경전인 「카발라」를 성립시킨 「창조서」는 히브리어 자음 22개를 5음체계로 해석한 음운서이다. 지금까지 훈민정음의 음운체계가 중국음운학의 영향을 받아 창제되었다고 알려져 왔는데, 5음체계의 순서가 서로 다르다. 그런데 중국유태인이 보던 「창조서」와 훈민정음의 5음체계 순서가 동일하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단군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가림토문자」가 중국유태인이 사용한 히브리문자를 모방했다는 주장을 했는데….
『지난 95년 연세대에서 고대 근동(近東)문화에 대한 특강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만난 이재운씨(「소설 토정비결」의 저자)에게서 가림토문자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부터 가림토문자와 히브리문자의 연관성에 대해 파고 들었다. 가림토문자가 기록된 「단군세기」는 고려 말에 편찬된 책이다. 고려 말은 원나라의 지배 아래 민족주의가 발흥하던 시기였다.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에 관한 책을 만들면서 고유문자의 필요성을 느껴, 당시 중국유태인이 쓰던 히브리문자를 차용해 만든 가림토문자를 도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가림토문자를 모방한 훈민정음이 히브리문자와 비슷한 것이다』
─단군과 무관한 중국유태인의 히브리문자를 차용할 만한 근거가 있는가.
『중국유태인의 문화와 종교가 우리와 유사한 점이 많다. 중국유태인들은 하늘과 조상을 숭배하며, 민족의 시조를 하늘과 연결시키고 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유태교와 달 리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점 때문에 히브리문자를 받아들이는 데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발음기관을 상형해 독창적으로 창제했다는 것이 국어학계의 정설인데….
『모델이 되는 글자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발음기관 상형만으로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문자학의 견지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세종 당시 알려진 파스파문자, 범자 이외에도 가 림토정음과 히브리문자를 참조해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다고 보아야 한다. 음운체계도 중국음운학을 기본으로 히브리음운학도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설사 발음기관 상형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ㄱ, ㄴ 이외의 자음문자, 예를 들어 ㄹ이나 ㅅ 등은 조음기관을 상형했다고 보기 어렵다. 천지인(天地人)을 본떴다는 모음자도 히 브리문자의 모음부호와 매우 비슷하다. 「훈민정음 해례」에서 보이는 문자 발음의 설명은 새로 만든 문자의 음가를 고정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문자의 발음을 조음 기관으로 설명한 것은 문자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발상이다』
─하지만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문헌에 히브리어 문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
『고려 말의 문헌과 조선 초기의 실록 등을 다시 한 번 면밀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문헌은 모두 한문으로 표기됐기 때문에 무심하게 지나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위 작 여부로 논란이 되었던 일본의 아비류문자(신대문자)의 아비류도 히브리를 뜻하는 「이브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거센 반대 때 문에 히브리문자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수 있다. 「고전(古篆)」을 모방했다고 두리뭉실하게 표현했는데도 최만리 등 일부 유학자들이 강한 의혹을 제기하지 않았는 가. 차마 히브리문자를 모방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박사의 히브리문자 기원설로 국어학계와 역사학계에서 적지 않은 논란이 예상되는데….
『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지는 건 학문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그동안 실제 언어재료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학계에서 가림토문자의 존재를 너무 무시해왔다고 생각한 다. 조만간 히브리문자 기원설을 좀더 보완해 국내외 학술지에 논문을 기고할 예정이다』 조철수 박사(47)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문헌을 남긴 수메르어를 전공한 아시리아학자.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한 뒤 이스라엘의 히브리대학 아시리아학과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종교학과에서 「고대근동 종교」를 강의하고, 「서울 고전고대문헌연구소」에서 수메르어·히브리어를 가르치는 조박사는 80년대 초반부터 방 대한 규모의 「수메르어 사전」을 편찬하는 작업을 15년째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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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히브리문자 기원설을 계기로 본 훈민정음
『훈민정음이 본떴다는 옛글자(古篆)는 「단군세기」에 기록된 가림토문자다. 그리고 이 가림토문자는 11~15세기에 중국유태인들이 쓰던 히브리문자를 모방한 것이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가림토문자를 바탕으로 중국음운학과 히브리어 문자·히브리어 음운학을 참조해 창제했을 가능성이 높다』 曺喆銖박사(50·히브리대학 아시리아학과 객원교수)는 『훈민정음이 가림토문자를 매개로 히브리문자를 모방해 창제됐다』는 요지의 글을 「신동아」 5월호에 발표했다. 조박사의 「히브리문자 기원설」은 여러 측면에서 충격적이다. 우선 한글과는 인연이 전혀 없어 보이는 히브리문자를 훈민정음의 모델로 상정했다는 점이다. 히브리문자는 페니키아문자에 기원을 둔 문자로 현재 이스라엘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자다. 조박사의 주장대로라면 훈민정음 창제 당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히브리문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둘째, 『단군세기』에 기록된 가림토문자의 실체를 인정한 점이다. 47대 단군의 역사를 기록한 『단군세기』는 역사학계에서 위작 여부로 논란을 빚은 책이다. 가림토문자 역시 국어학계에서는 훈민정음 후대에 만들어진 한글의 변체(變體)로 보고 있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에 의하면 가림토문자는 3대 단군시대(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에 만들 어진 문자로 훈민정음의 기원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조박사는 『가림토문자가 훈민정음의 모델이 된 것은 인정하지만, 가림토문자의 창제연대는 고려시대로 보아야 한다』 고 주장한다. 당시 원나라 지배하에 있던 고려 말, 민족의식의 발흥으로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중국유태인의 히브리문자를 모방한 가림토문자를 만들어 넣은 것이라는 이야기다. 셋째, 훈민정음의 음운체계와 히브리 음운학의 관계를 설정한 점이다. 조박사는 중국유태인의 음운서였던 『창조서』와 훈민정음의 5음체계 순서가 같은 점을 들어 히브리 음운학의 영향을 주장했다. 그간 국어학계에서는 훈민정음의 음운체계는 전적으로 중국 성운학을 원용한 것으로 보아왔다. 조박사의 히브리문자 기원설은 세종대왕의 친제설을 정설(定說)로 받아들이는 국어학계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만약 조박사의 주장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국어사를 다시 써야 될지도 모른다. 조박사의 글을 미리 읽은 일부 국어학자는 팩시밀리로 자신의 논평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러나 국어학자 대부분은 조박사의 글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중에는 『논리적으로 비약이 심하다』는 지적이 가장 많았다. 『히브리문자 기원설의 논거로 제시한 사항들이 잘못되었거나 불확실하다』거나 심지어 『논문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혹평도 있었다. 조박사의 주장이 국어학계의 정설과 상치(相馳)하는 것이니만큼 어느 정도 예상됐던 반응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히브리문자와 한글의 유사성에 주목한 평도 나오고, 중국유태인의 음운서로 알려진 『창조서』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등 부분적으로 긍정적인 반응도 있었다.
사실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한 논란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한글학회 허웅 이사장은 『1940년 「훈민정음 해례」가 발견되기 전까지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해 무려 28가지 의 설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설이 구구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1940년 전까지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에 나오는 「자방고전(字倣古篆:글자는 고전 을 본떴다)」 한 구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고전」을 글자 그대로 옛날 한자(전서체)로 보는 「고전기원설」이 등장했다.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과 최만리의 반대상소문에서 언급되는 「고전」을 근거로 하고 있다. 『국조보감』과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도 고전기원설이 나타난다. 하지만 현재 이 설을 전적으로 신봉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유창균 교수는 1966년에 쓴 논문을 통해 「자방고전」을 글자의 형태에 국한시켜 「전서체의 각이 진 모양(角形)」을 본떴다는 견해를 폈다. 그 다음으로 등장한 것이 「범자(梵字)기원설」이다. 여기서 범자는 인도의 산스크리트 문자를 가리킨다. 조선 성종 때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초종성 8자, 초성 8자, 중 성 12자의 글자 모양은 범자에 기대어 만들었다』며 「범자기원설」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후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도 『우리나라 언문글자의 모양은 모두 범자를 본받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다음은 파스파문자 기원설. 파스파문자는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때 제정된 문자로 훈민정음보다 약 1백70년 앞섰다. 미국의 역사학자 레드야드는 「고전(古篆)」을 「蒙古篆字(몽고전자)」의 약자로 보아, 훈민정음이 파스파문자를 본뜬 것으로 간주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파스파문자 기원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원의 파스파문자는 소리로 된 글자이요, 중국의 글자는 모양을 주로 한 글자이니 우리의 언문과 가까운 글은 몽고글자이지 한자는 아니다. 세종께서 한글을 처음 만드실 제 명나라의 학사 황찬이 귀양살이를 하는지라, 성삼문 등을 보내 질문하게 하였는데 13번이나 왕래했다. 이때가 원이 망한 지 겨우 79년이 된 즉, 황찬이 우리에게 전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몽고글자에 대한 지식일 것이다』 유희의 『언문지』에서도 보이는 파스파문자 기원설은 최근까지 일부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는 유력한 학설 중 하나다. 세종 당시 잘 알려진 창제문자라는 점, 자형이 방형(方形) 으로 유사하고 특히 「ㄱ ㄷ ㅂ ㅅ」 등의 글자가 비슷한 점, 문자의 구성원리와 운용이 유사한 점 등이 파스파문자 기원설의 강점이다. 이외에도 서장(西藏)문자 기원설, 고대문자 기원설, 창호상형(窓戶象形) 기원설, 태극사상 기원설, 거란·여진문자 기원설, 일본 신대문자 기원설, 팔리문자 기원설 등 갖가지 훈민정음 기원설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이후에는 각종 기원설이 세력을 잃고, 세종의 친제설이 득세했다. 『해례본』의 「제자해」에서 『초성글자의 기본자는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고, 초성글자의 기본자는 천·지·인의 3재(三才)를 본떠 만들었다』고 훈민정음의 제자원리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이후 「발음 기관 상형설」이 정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 이후에도 각종 기원설이 간간이 나왔다. 그중 일반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가림토(또는 가림다)문자설」이다. 가림토문자설은 조박사의 히 브리문자설과도 연관이 있으므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가림토문자설은 1983년 10월에 열린 제2회 한국사 학술회의에서 제기되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안호상 박사가 『단군시대에 한글이 창제되었다는 기사가 「한단고기」에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후 송호수 박사(개천학회 회장)가 「광장」지 1984년 1월호에 「한글은 세종 이전에도 있었다」라는 글을 발표해 본격적인 가림다문자 기원설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홍익대 국어교육과 李覲洙(이근수) 교수가 「광장」 2월호에 「한글은 세종 때 창제되었다」라는 제목의 글로 송박사의 주장을 반박하자, 송박사가 「광장」 3월호에 재반론을 펴는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가림토문자 기원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고려 말기의 학자 이암이 쓴 「단군세기」에 의하면 3세단군 가륵이 재위 2년(서기전 2181년)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해 정음 38자의 가림토문자를 만들었다. 가림토문자 38자 속에 28자가 거의 다 원형 그대로 들어 있다. 다만 가림토문자 38자에서 10자를 제거한 것이 곧 28자인 훈민정음이다. 한자문화의 팽창으로 가림토문자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진 반면, 상대적으로 안전지대였던 일본에서는 가림토문자를 모방한 아히루문자(신대문자의 일종)가 남아 있다』 하지만 가림토문자설은 국어학계에서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다. 우선 문자 발달사의 원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것. 문자는 일반적으로 그림문자와 상형문자의 단계를 거쳐 표의문자나 표음문자로 발전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서기전 2181년이면 수메르상형문자와 이집트상형문자나 존재할 정도이고, 중국 갑골문자도 아직 나타나기 전이다. 그런 시대에 음소문자인 가림토문자가 있었다는 것은 문자학의 상식과 맞지 않는다. 두번째로 가림토문자의 출전인 『단군세기』가 1911년 계연수가 편찬한 『한단고기』에 들어 있다는 점이다. 즉 『한단고기』에 들어있는 『단군세기』가 고려시대의 원본 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지적. 『단군세기』의 저자 이암도 「고기(古記)」에 의지해 쓴 것으로 돼 있다. 이근수 교수는 『원래 이암이 쓴 「단군세기」에는 가림토문자가 없었 는데, 후대에 한글의 자형을 가필첨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교수는 그외에도 단군시대에 창제되었다는 가림토문자가 무려 3천2백년이 지난 고려초까지 단 한 조각의 언어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조철수 박사도 『가림토문자가 단군시대에 창제되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중국유태인이 쓰던 히브리문자의 영향을 받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이야기를 조박사의 히브리기원설에 대한 학계의 반응으로 돌려보자. 다음은 『훈민정음 신연구』를 쓴 홍익대 이근수교수의 논평. 이교수는 조박사의 가설에 비교적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15세기에는 주변국에서 이미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학문적·사회적 배경으로 보아 훈민정음이 다른 문자와 음운이론 등을 원용했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점에서 중국유태인이 사용한 히브리문자의 자형이 훈민정음의 자형과 몇개 유사한 것이 있다는 건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훈민정음 이 히브리어문자를 모방했다고 하는 것은 속단이다. 표음·표의문자의 유형에 따라 글자의 모양이 서로 비슷한 것이 다수 발견된다. 실제로 중국 갑골문자와 몽고 파스파문 자에도 훈민정음의 글자와 비슷한 것이 보인다』 다음은 한글학회 허웅 이사장의 이야기. 『그동안 나왔던 군소학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실 독창적인 창제설은 세종을 극단적으로 추어 올리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훈민정음은 주변의 문자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영향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 게 문제다. 다만 「자방고전」의 구절로 미루어 보아 뭔가 있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최만리의 반대상소문을 보면 서하·일본·몽고문자 등이 언급되고 있다. 조박사 주장의 가장 큰 약점은 실은 음운학 문제에 있다. 중국 음운학은 이미 당나라 때 체계를 세워 고도로 발전한 상태였다. 중국 음운학에는 5음체계와 청탁 4분법 등 산스크리트 음운학의 영향이 일부 엿보인다. 조박사는 훈민정음이 히브리음운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려면 히브리음운학이 중국음운학에 영향을 끼친 흔적이 있어 야 조박사의 논리가 성립한다. 하지만 유태인이 중국에 들어온 시기로 볼 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권재선교수는 조박사의 히브리문자 기원설이 최초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지적했다. 『1928년 창호상형(窓戶象形) 기원설을 주장한 에카르트가 히브리문자설을 비판한 적이 있다. 에카르트는 히브리문자와 훈민정음 글자의 닮음이 완벽하지 못함을 비판한 뒤, 한글의 글자꼴과 완전히 일치하는 조선 창호의 문살 상형기원설을 주장했다. 한글은 그 글자꼴이 극도로 간단하므로 세계 모든 글자 가운데 일부 간단한 획의 글자는 한글과 유사하게 마련이다. 한글의 본질적인 특색은 발음작용을 상형한 점이다. 하지만 이집트상형문자가 변해서 만들어진 히브리문자는 발음작용의 상형과는 거리가 멀다』
권교수는 히브리문자 기원설의 논리적 비약도 언급했다. 『조박사가 가림토문자로 추정한 「고전」은 한자이며, 가림토문자는 조선 말 당시의 중국말을 표기하도록 고안된 한글의 변체문자다. 그리고 집현전학사 신숙주, 성삼문이 중국을 왕래한 것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의 일이다. 그들은 「홍무정운」을 번역하기 위해 중국말 소리를 배우러 간 것이었다』 한양대 국문과 김정수 부교수는 히브리문자와 훈민정음의 변형 폭이 너무 크다고 지적했다. 『중국유태인에 대한 언급은 새로운 연구지만, 히브리문자를 억지로 훈민정음에 갖다붙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문자사에서 비약은 없다. 히브리문자도 이집트글자에서 여러 단계를 거쳐온 것이지만 그 변형과정을 보면 조금씩 바뀐다. 위구르문자에서 몽고·만주문자로의 변형도 마찬가지다. 히브리문자에서 훈민정음으로의 변형은 비약이 너무 심하다. 부분적인 유사성을 전면적으로 확대한 조박사의 글은 논리적인 논문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히브리음운서로 알려진 「창조서」는 검토할 가치가 있는 듯하다』
이근수 교수 역시 두 문자의 유사성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훈민정음의 자음 가운데 「ㅁ, ㄱ」 등 몇개의 자형만 히브리문자와 유사하다. 근본적으로 기원을 같이 한 것이라면 음소체계나 제자원리와 자형에 대응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찾기 힘들다. 모음의 「· ㅡㅣ」나 자·모음을 합해서 쓰는 합자법이 훈민정음과 같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 ㅡ ㅣ」가 훈민정음과 같은 것은 중국유태인이 중국학문과 운서에 접하면서 역리사상을 이용해 그들의 운서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치를 가져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히브리어가 음소문자이면서도 음절단위로 쓴 것은 훈민정음이 중국 성운학의 이론을 따라 음소문자이면서도 초·중·종성을 합자해서 쓴 것과 같은 이유일 것으 로 추정된다』 한편 이교수는 훈민정음의 오음체계 순서가 『창조서』와 일치하는 데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견이었다. 중국에 온 유태인들이 중국 음운서에 접하여 그 이론을 원용했고, 우리도 중국성운학 이론을 원용했기 때문에 히브리문자와 훈민정음의 음운체계가 유사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 『조박사의 글은 훈민정음의 오음체계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가 히브리운서에 준(準)하고, 역리로 설명하고 있어 훈민정음이 히브리문자를 모방했다는 논리이다. 훈민정음의 5음은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원리에 의해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로 배열한 것이다. 이는 자연의 기(氣)가 운행하는 순서이다. 한편 훈민정음해례에서는 5음과 5행을 후아설치 순(수목화금토)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히브리 운서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해례에서 설명하고 있는 오음의 순서는 자연의 질(質)이 생기는 순서이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일치는 중국유태인이 중국성운학을 원용했을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한다』 한편 가림다문자설을 주장한 송호수씨는 조박사의 글에 대해 『한마디로 한단고기의 역사성을 부정한 글』이라며 『서기전 2181년에 창제된 가림다의 기원을 부인한다면 논평의 여지가 없다』고 혹평했다. 『가림다의 창제시기를 객관적 증거도 없이 고려시대로 끌어내리는 것은 견강부회다. 3천년이나 먼저 만들어진 가림토가 후대의 히브리문자를 모방했다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는다』 결국 히브리기원설은 국어학계와 재야사학계 양쪽으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셈이다. 하지만 조박사의 히브리문자 기원설은 최소한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논의의 장을 펼쳤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히브리음운서와 중국음운학의 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져야 히브리기원설이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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