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소설(小說)에 대한 명상(冥想)

이강기 2015. 10. 13. 23:15

소설(小說)에 대한 명상(冥想)


시대정신, 2013년 봄호

[남정욱 |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소설가]

序說

예전에 헤어진 여자의 죄목은 정신분석학과 정신현상학을 구별하지 못해서, 였다

하긴 나도 요새는 오즈의 마법사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헛갈린다.

대체 사자는 언제 나오는 거지.

그러나 헤어질만한 사유이기는 하였다.

 

예전에 헤어진 여자의 죄목은 TV를 너무 봐서, 였다.

TV의 플롯에 빠져 들어간다는 건

그게 그만큼 강렬하고 매력적이란 방증일 뿐이었는데(최근엔 나도 열심히 본다. 이제 그 메커니즘에 섞이고 싶다) 그때는 그리 너그럽지 못했다.

 

예전에 헤어진 여자의 죄목은 문자를 너무 해서, 였다.

그렇다고 헤어질 필요까진 없었는데.

예전에 헤어진 여자의 죄목은 말 사이에 인터발이 없어서, 였다.

시끄럽긴 했지만 여백의 미학이란 이유로 꼭 헤어질 필요까진 없었는데.

 

예전에 헤어진 여자의 죄목은 다른 놈이랑 놀아나서, 였다.

실은 핑계였다.

예전에 헤어진 여자의 죄목은 그 죄 있음을 인지하지 못해서, 였다

이건 좀 헤어질 만 해.

 

헤어진 여자의 죄목은 실은 없었다.

그냥 싫증났을 뿐인데

특별한 트집이 떠오르지 않아 짜증이 났다.

그래서 내가 미워서 헤어졌다.

 

…….나는 상처 입을 것이다. 경망스러워서.

 

- 첫째 날.

 

오랜만에 원고청탁을 받았다. 그런데 소설이다.

이 사람들은 모르나 보다. 내가 소설 안 쓴 지 벌써 십 년도 넘었다는 사실을. 휴업을 지나 폐업 작가에게 소설 청탁이라니. 아니다. 어쩌면 알고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시대에, 소설이 별로 로망이 아닌 작가에게, 소설이 크게 유의미하지 않은 지면을 배당한 것은 따지고 보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무책임의 트라이앵글.

뭐 소설 쓰는 게 어려운 건 아니다. 초창기 뭘 모를 땐 일주일이면 장편 하나를 털었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직업이 아니다. 이야기는 이미 널려있다. 지겨울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이 어서 와서 우리를 가공해 주세요,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다. 소설가가 하는 일은 그걸 엮는 일이다. 잘 엮으면 빤한 이야기도 고전문학이 된다(가난한 학생이 있다. 돈 때문에 전당포 노파를 죽인다. 그의 옆에는 마음씨 착한 창녀가 있다). 이런 이야기는 사건과 실화 수준 주간지에 지겹도록 실린다. 씨줄과 날줄 사이에 주인공을 밀어 넣은 후 핍박하고 고뇌를 강요하고 결단을 촉구하면 끝이다. 이야기 만들기의 공학적인 기술인데 전문용어로 ‘테크네’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남자는 여자를 배신하고 자식이 부모를 해치고 경쟁자는 상대의 목을 딴다. 장르의 탄생. 못 엮으면? 그냥

좆된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먼저 정해야 한다. 이것은 사랑의 이야기인가 미움의 이야기인가. 이것은 남자의 이야기인가 여자의 이야기인가. 이것은 신념의 이야기인가 위선의 이야기인가. 이것은 땅에 속한 이야기인가 중력을 넘어선 이야기인가. 이것은 화해의 이야기인가 복수의 이야기인가. 이것은 나의 이야기인가 나에 대한 남의 이야기인가. 이것은 피에 대한 이야기인가 살에 대한 이야기인가.

물론 고수들은 아이러니를 즐긴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이야기, 화해를 위해 칼을 꽂는 이야기, 삶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이야기 등등. 아이러니란 쉽게 말해 독자들은 다 알고 주인공들만 모르는 상황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독자들의 눈을 빨아들이고 호흡을 가쁘게 하며 소설 속으로 뛰어 들어가 등장인물들을 뜯어 말리고 싶게 만든다. 그런데

어렵다.

정말 어렵고 또 어려워 어쩌다가 한번 떠오른다. 이게 쉬우면 제가 폐업을 했겠어요. 실은 한 가지 이야기를 진득하게 밀고 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한 가지만 하자. 아니 한 가지라도 잘하자.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대략 두 종류다.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가혹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와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따뜻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이야기. 어려서는 주로 앞의 것을 썼다. 몸이 자주, 비정상적으로, 즉흥적으로 더웠다. 나이도 먹었겠다, 이번에는 후자다. 따뜻한 이야기.

왠지 오줌이 나올 것 같다.

 

- 둘째 날.

 

소설은 첫 문장이 중요하다. 아주 많이, 매우 심하게.

김훈은 ‘칼의 노래’를 쓸 때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를 놓고 몇 달을 흘려보냈다. 꽃이 피었다, 로 할 것인지 꽃은 피었다, 로 할 것인지 놓고 갈등하느라. 이 고민을 듣고 대체 뭔 소리입니까 한다면 소설 안 쓰는 게 좋다. 그건 독자에 대한 예의다. 꽃이 피었다, 는 희망의 이야기다. 꽃은 피었다, 는 죽음의 이야기고. 근데 칼의 노래가 희망의 이야기였던가?

첫 문장을 맥 빠지게 시작하는 작가들이 있다. 가령

“당신, 밥 먹었어?”

따위를 태연하게 전시하는 인간들이다. 이런 작가는 정말이지 입에 들어가는 밥이 아깝다. 작가는, 항상은 아니지만 피를 뽑아 글을 써야 한다. 당신은 읽었던 소설 중 첫 문장을 몇 개나 기억하는가. 없다고 해도 부끄러워 할 필요 없다. 그건 작가의 문제다. 그러나 첫 문장이 괄시 당한다는 것은 그 나라 문학에 스타일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건 면이 상하는 일이다. 자작(自作)의 첫 문장 대신에 경구를 활용하는 작가들도 있다. 아예 챕터마다 가져다 쓰기도 한다.

제 정신이야?

타인의 성찰에 묻어가는 것, 그건 작가가 아니라 문학 딜레땅뜨 블로거 기타 등등이나 하는 짓이다. 첫 문장이 꼭 짧을 필요는 없다.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가,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는 이렇게 시작한다.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 년 오줌 누듯 여덟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로도 모인다.

 

세어 봤더니 모두 253자다.

요약하면 ‘중들은 종종 유리에 모인다’ 인데 이걸 23배로 늘인 거다. 이건 활자 판독 미학의 영역이다. 읽는 맛이 있다. 문장 속에서 서사는 한없이 확장되고 산문이 시문의 영역으로 넓어진다. 요건 내공이 중급 쯤 되는 작가들에게 매우 매혹적인 매설(賣說)법이기도 하다, 가령,

  걷기로 마음먹으면 꼭 걷지 못할 것도 아니어서 발이 부은 것은 사실이나 애초부터 신발이 좀 컸던 탓에 무방하며 실은 걷는 것이 아니면 딱히 정하여 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는 일은 죽는 일과 너무 가까웠던 까닭에 차라리 걷기보다는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것은 사실이나 중요한 건 모두가 걷고 있어 홀로 남느니 그래도 걸어서 무리 속에 묻히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내내 후회하느니 걷는 것이었는데 앞에 걸은 자의 발자국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이 온 것도 아닌데 왜 발자국이 보일까마는 왠지 앞의 내뿜는 호흡이 마치 발걸음 소리처럼 들려서 땅에도 그런 자국이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또 한 발을 뗀 것이니.

독자에게 오독의 즐거움을 주기 위해 아예 쉼표까지 제거해 봤다. 좋아, 이걸로 가는 거야. 소설이라면 모름지기 이 정도는 되어야 남에게 보여줄 때 부끄럽지 않지, 하면서 드디어 소설 출발이다.

 

- 셋째 날.

 

생각을 바꿨다. 이런 식으로 쓰다가는 원고지 열 장을 넘기기도 전에 내가 먼저 피가 말라 죽을 것이다. 300자 가까이 썼으니 두 번째 문장도 100자는 넘어야 밸런스가 맞는다. 독자 역시 박상륭은 박상륭 하나로 족해, 넌더리를 칠 것이고. 긴 글이 안 먹히는 추세다. 짧게 가자. 짧은 걸로 치면 역시 우화다.

세상에 정의가 없어 정의가 화두였다.

중언부언 결론 없고 난삽한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정의는 그러나 실현되지 않았고 목격한 사람도 없는 모양이었다. 정의에 걸었던 기대가 사라지자 소통이 입에 올랐다. 그럼 대화라도 합시다. 그러나 소통은 그게 싫은 사람에게는 폭력이나 다름없어서 역시 묵묵부답으로 소통은 먹통이 되고 여물통이 되고. 정의도 없고 소통도 없으니 거덜 난 정서나 치유하자고 등장한 게 힐링이다. 사랑은 비를 타고 상업은 힐링을 등에 업고 등장했다. 힐링은 그 본질이 사기다. 나아진 것은 없으되 눈물샘을 자극하거나 웃음보를 건드려 잠시를 망각으로 끌고 간다. 힐링은 가끔 우화다. 그저 그런 이야기도 힐링의 탈을 쓰면 울림을 주는 이야기로 들린다. 우화라면 성경만한 게 없다. 성경의 주인공은, 아시다시피 예수다.

 

예수의 유머 ‘뺨’

예수는 말했다.

혹시 누가 여러분에게 겉옷을 벗어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시오. 아참 속옷을 줄 때는 깨끗이 빨아서 주어야 뒷담화를 안들을 것이오. 특히 빤쓰. 또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십리를 같이 가달라고 부탁하면 기꺼이 이십 리를 같이 가주시오. 그런데 속옷을 벗어주고 이십 리를 가주었는데도 그 사람이 갑자기 여러분의 뺨을 때리면 어떻게 하시겠소.

 

- 그런 사이코 패스는 속옷을 다시 뺐어야 해요

- 뺏고 때려요 마구 존나

- 그 자식 속옷까지 뺏어요 빤쓰까지

- 때리고 치료비는 쌩까요

 

예수는 말했다.

그럴 땐 그냥 조용히 다른 쪽을 뺨을 돌려대세요. 그리고 말하세요. 한 쪽 뺨만 때리시니 다른 쪽 뺨이 섭섭하답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머지 뺨도 때리면요?

예수가 말했다. 얘들아 가자.

실은 이거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각색해 본 것이다. 어려운가? 그렇다면.

 

예수의 유머 ‘옥합’

한 여인이 다가와 향유 한 옥합을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제자들은 분개했다. 아앗 저 비싼 것을!!! 저런 개념 없는 년은 가랭이를 찢어놔야 해.

예수는 제자들을 달랬다. 사도들아, 가난한 사람은 어디에나 항상 있잖니. 제자들은 더 분개했다. 오오, 선생님이 그런 보수적인 말씀을 하시다니요. 그걸 팔면 가난한 열 집이 여드레 동안 저녁을 굶지 않아도 된단 말입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네 뭐. 선생니임~~~!!!!! 예수는 빙그레 웃고 말했다. 나는 좀 있으면 너희와 이별이거든. 죽으러 가야 한다구. 그러니까 이 여인은 곧 닥칠 나의 장례에 쓸 향유를 조금 미리 쓴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아깝고 꼬우냐. 제자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많~이 뿌리십쇼.

좀 품위가 없다. 이건 어떨까.

 

‘약속’

 

어머니는 달려갔다.

아들 하나가 또 나무를 벗 삼아 달려있었다.

얘야, 네 형제가 죽었단다.

젠장, 저는 형제가 없다니까요.

그리고

아줌마

누군데 절 보고 우세요.

멀뚱멀뚱.

아, 목말라

포도주나 좀 주세요.

 

그날 유다는

나무에 매달려 밤새도록

행복한 춤을 추었다.

혀는 빼꼭 내밀어

여인아 여인아

너는 뭐가 그리도 궁금하니

묻는데 도착한 마리아는

많이 울었다.

아들들아 아들들아 너희는 다 왜

과일이 되어.

 

만찬장이었다.

예수는 답답했다.

머저리에 팔푼이에 욕심만 그득했다.

유다는 말했다.

저는 당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오신 줄 압니다.

당신은 바르벨로의 불멸의 땅에서 오셨습니다.

예수는

울었다.

한 놈은 건졌구나.

바르벨로는 외계의 지명이다.

안드로메다 뒷편 어딘가 쯤

예수는 아담의 셋째 아들인 세트의 화신이자

세트의 추종자들에게 고향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 인물이었다.

예수는

부탁했다.

세트교(敎)의 중급 신도인 유다에게

자신이 육체를 벗고

날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특별한 임무를 맡고 유다는

달렸다.

달리는 그의 머릿속에

예수의 약속이 물결친다.

너에게 길을 안내해 줄 별을 보여줄게.

아아, 빨리요

빨리요.

바리새인들은, 다행히 있었다.

그리고

넘어가 주었다.

다 이루었다.

이는 예수보다 유다가 먼저 한 말.

예수는 약속을 지켰고

별을 본 유다는

먼저 육신을 벗어 나무에 걸어놓고

하늘로

우주로 날아갔다.

최초로 고향에 간 일 인.

그리고 예수와 함께 달린 강도가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예수가

적신 포도주를 입에 물고

멀게

대기를 벗어났다.

음주 운행.

남은 자들이

피를 만지며 슬퍼했다.

혹여

그노시스

알렉산드리아의 그들이 승리했더라면

인류는

일리아드와 함께 단테의 바르벨로를 읽을 수 있었을 것을.

그 망향가를

세트의 후예는

지금 또 어디서 가냘픈 피로

흐르고 있는지

대기층이 두꺼워져

이제는 정신력만으로는 벗어나기 힘들다며 투덜대며

쇠로 무장하고

우주로 날아가는

사람들

혈족들.

 

예수 출생의 비밀과 유다와의 밀약에 대한 이야기다. 우화가 되기에는 난해한 감이 있다. 영지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더더욱. 만인이 읽을 수 없다면 우화로는 자격미달이다.

마지막 도전.

예수의 유머 ‘소통’

제자들은 글을 읽을 줄 몰랐고 집회에 온 사람들은 귀가 어려 어려운 말을 듣지 못했다

예수 : 말하건대 죄악을 저지르지 말고 부패에 물들지 말 것이며 불의에 눈감지 말고…….

대중 :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예수 : 오직 깨끗하게 남의 모범이 되게 살아야 합니다.

대중 : (침통하게) ……예

예수 : 그러니까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이죠.

대중 : 씨발 진즉에 글케 쉽게 말하지. 하하하 접수올시다

포기.

게다가 청탁은 단편이다. 우화 형식의 장편(掌篇)이 적당치 않을 수도 있겠다. 일몰을 핑계 삼아 오늘은 시마이~.

하루 쉰다. 발자크도 아니고 어떻게 매일 쓰냐.

실은 술병이 났다. 토사곽란에 난리도 아니다. 오후가 되니 배가 고프다. 허기가 진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은 건 참 오랜만이다. 보통은 추워서 먹거나 약을 먹기 위해 먹거나 심심해서 먹는다. 당혹. 냉장고에 찬밥이 많은 줄 알았는데 얼마 없을 때. 곤혹. 양을 늘리기 위해 라면에 떡을 넣었는데 불고 불어서 너무 많아졌을 때. 오전에 그 난리를 치고도 또 술 생각이 나는 걸 보면 나도 꽤 중증이다. 안주로 뭘 할까 하다가 닭으로 정한다. 노릇노릇하게 구운 닭다리에 맥주를 마시고 싶다. 동네입구에 작은 가게가 있다. E씨돌 마트라는 아주 이상한 이름이다. 멋대로 해석해보자면 매우 반대기업적인 작명이다. ‘이마트 때문에 씨발 돌아버리겠네’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 아닌가 싶다. 닭다리가 익는 것을 보니 시심이 돋는다. 제목은 당혹과 곤혹 사이의 닭이다.

 

 

당곤닭

 

그러니까

부처님께 참으로 송구하다. 마트에서 닭다리를 서른 개나 사와서.

다리 없는 닭들이 마당에서 뛰논다.

한편에선 머리 없는 오리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잘려진 목을 호스처럼 돌리며

피를 줄줄 흩뿌리며

마당에서 만난다.

서로 없는 것을 슬퍼하며.

시뻘건 음부가 등장하는 꿈을 꾸다.

꿈에서 보니 무섭다.

정말 호랑이도 쫒겠네 하며

유심히 들여다본다.

고름 같은 것이 흘러나오는데

자세히 보니 산(酸)이다.

바닥이 녹고

찔러본 손가락도 녹는다.

갑자기 야쿠자 손가락이 된 나는

자랑스럽게 마당으로 달려간다.

얘들아 나도 없다.

오리들이 좋아서 웃는다.

닭들도 더 멀리 뛰려고 몸뚱이를 연신 펄쩍거린다.

오오 정겨워라

멀리서

켄터키 옛집

스와니 강이 흘러나온다.

바닷가에선 노인 하나가 죽어있다.

문패에는 흘려 쓴 글씨로 클레멘타인.

노인은 바다에서 죽는다.

딸은 도시에서 죽는다.

시뻘건 음부를 드러낸 채

닭과 오리에 둘러싸여.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멀리 간 딸은

그러길래 아버지가 저를 건들이지만 않았어도 운운하는 유서를

쓰다가

흥분이 되어서일까

시간 계산을 잘못한 탓일까

맺지 못하고 죽는다.

딸의 냉장고 안에 가득한 닭다리들.

닭발들.

 

참 무식하게 배웠다. 짧으면 시, 길면 소설, 어정쩡하면 산문. 그래서 이건 시다.

무식하게 배운 거 또 있다. 시 안돼서 소설, 소설 안돼서 평론. 소설도 낙관이 안 되는데 시라. 이건 좀 고민을 해 볼 문제다. 하긴 우리는 모든 시인이다. 왼쪽 손바닥을 펴 보면 그 증거가 있다.

 

- 다섯 째 날

 

그러고 보니 제목을 안 정했네. 첫 문장만큼 중요한 게 제목이다. 제목을 짓고 나면 진도의 반은 나간 거다. 제목 잘 짓기로는 윤대녕이 최고다. 은어낚시통신,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등등 제목만으로도 사람을 홀린다. 나중에 들으니 주변의 광고하는 친구들이 지어준 것이란다. 재능으로 지은 것보다 더 부럽다. 둘러봐도 주변에는 죄 변변찮은 카피라이터들뿐이다. 그 실력으로 먹고 사는 게 기특한 놈들에게 기대느니 그냥 직접 짓는 게 나을 듯싶다.

‘홍어 좆은 만만치 않다’

독자들이 보다가 비웃을 것 같다. 이런 홍어 좆같은 소설을 보았나. 좀 있어 보이게 지어보자.

‘주말에는 자본주의’

그럼 주중에는 사회주의냐. 운동권 잡담 같은 느낌이다. 소설가 지망생이 원고를 들고 스승을 찾아갔다. 선생님, 죽이는 제목이요. 선생은 원고도 읽지 않고 물었다. 네 소설에 총이나 장미가 나오느냐. 아니요 했더니 바로 즉답하여 가로되, 그럼 총과 장미로 하거라. 총과 장미라...나쁘지 않다. 총은 성기 장미는 여성. 왜 이렇게 익숙하지 했더니 록그룹 건즈 앤 로지즈가 있다. 러시아 유학 시절 좋아했던 음식이 아스픽이다. 육즙으로 만든 투명한 젤리에 닭고기를 넣어 차갑게 먹는다. 러시아에서는 전통적인 날에 빠지지 않고 올린다. 상에 빠지면 안 된다는 차원에서 홍어랑 닮았다.

 

홍어와 아스픽.

 

먹다 남긴 닭다리를 뜯으며 이번에는 보드카를 마신다. 냉동실에 넣어둔 거라 첫 잔은 젤처럼 끈적하게 흐른다. 하긴 그 맛에 마시기는 하지만. 문득 주종과 안주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반성해본다. 하루키는 카페에서 땅콩에 맥주 마시는 걸로 소설 한 권을 끝낸다. 닭다리와 보드카라. 소설과는 어딘지 궁합이 안 맞는다. 그보다, 보드카에는 농어가 제격이다. 참치도 나쁘지 않겠다. 나중에 참치횟집을 하게 되면 옥호를 노인과 바다라고 지어야지.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제목은 무제(無題)다. 시나 회화는 무제가 많은데 왜 소설은 무제가 없거나 적을까. 이유는 별거 아니다. 시나 회화는 감상의 시간이 짧다. 일견一見으로 끝난다. 소설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시간을 투자하기에 그 분량이 많다. 상당히 독자 오리엔티드 된 장르가 그래서 소설이다. 덕분에 지금 이러고 있는 것 아닌가. 익숙한 인명이나 지명을 넣어 짓는 방법을 고민해본다. 사례로는 ‘모차르트가 살아있다면’ 이나 ‘우리는 호텔 캘리포니아로 간다’ 를 꼽을 수 있겠다. 호텔 캘리포니아는 너무 남성적이라 매력이 떨어진다. 아무래도 모차르트가. 아, 말난 김에 모차르트 이야기를 써 볼까.

모차르트, 침대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제자이자 콘스탄체의 정부였던 쥐스마이어가 그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선생님의 아내는 달았습니다. 달았다고? 진정 달았다고? 마른 입술을 핥던 모차르트의 마지막 기억은 전날 맛본 매춘부의 달콤한 분뇨를 떠올리고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모차르트의 별거 이 년 동안 온천을 따라다니며 스승의 아내를 달게 맛 본 쥐스마이어는 진정으로 슬프게 울었다(엉엉).

다음 날 빈 최고재판소의 서기관이었던 프란츠 호프데멜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면도칼로 아내의 얼굴을 난자하고 스스로 목을 땄다. 선혈이 방 안에 뿌려지기 전 호프데멜은 울부짖었다. 당신을 놓아줄 수 없어. 그 놈에게 빼앗길 수 없어(혹은 그 놈을 죽여 버리겠어). 그러니 우리 같이 가자. 그러나 호프데멜 과다출혈로 혼자 떠나고 아내인 막달레나는 살아 남편과 정부의 죽음을 통곡하던 중 (뱃속의 아이는 어떻게 해요. 친부와 호적부 아빠 둘이 동시에 가버렸으니 아앙). 문득 거울을 보다가 생선구이판이 된 자신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아잇, 씨발 그런다고 얼굴을 긁어놓으면 어떻게 해.

제목 짓다말고 뭐 하는 짓이냐. 게다가 보드카를 너무 마셨다.

 

 

- 여섯째 날

 

슬슬 위기감이 느껴진다. 제목도 못 정하고 첫 문장도 못 썼으며 무엇보다 어떤 이야기를 풀어갈지 고르지 못했다. 아, 따듯한 이야기를 쓰기로 했지. 마음이 따듯한 거 말고 몸이 따뜻한 걸 한번 해 볼까. 예전에 부자는 음부에 떨어진다기에 기꺼이 부자가 되고 싶었던 적 도 있었으니. 가령 첫 문장은 이렇다.

나무가 잎을 보고 말했다. 여보, 가지마.

땅이 비에게 말했다. 안에다 해도 돼요.

풀린다. 두 번째 문장은 쉽다. 여자의 첫 신음 소리는 짧았다. 아. 나는 몸이 작아서 깊지 않아요. 남자는 말한다. 그 끝을 조금 더 빨아 줘. 마실 때는 오렌지 주스처럼 쭉쭉. 진도 막 나가는데 소설 쓰는 후배에게서 전화가 온다. 받을까 말까. 원래는 원고 쓸 때 전화 안 받는다. 택배도 안 받는다. 가스 검침도 안 받는다. 리듬이 깨지면 그날 하루는 날아간다. 다음 날까지 여파가 가는 경우도 있다. 심한 놈은 한 달도 간다. 그래도 소설 쓰는 놈인지라 일말의 기대를 품어본다. 혹시 죽이는 이야기 거리라도 던져줄 줄 누가 알아. 쓰다 만 거라든지 쓰려고 했다가 포기한 거 없니 묻는데 대뜸 구상중인 작품의 반전은 뭐냐고 묻는다.

반전?

그건 생각도 안 해 봤는데. 그런데 요새도 반전 같은 거 소설에 쓰고 그러나. 쌍팔년도 소설도 아니고. 코맥 멕카시 소설 보면 반전은커녕 결말도 안 나온다. 그냥 흐지부지 끝난다. 그래도 필요하다는 후배와 젊은 놈이 어째 나보다 둔해 옥신각신.

…시간만 낭비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자꾸만 기침이 나고 다리에 힘이 없다. 먹는 게 부실해서 그렇다. 다 먹자고 하는 일이라면서 항상 먹는 일은 뒷전이다. 음식이 영양의 공급이라는 제 용도 대신 항상 술안주로만 기능하는 것도 문제다. 당장 지난주만 해도 그렇다. 출발은 해장국이었던 것 같다.

 

월요일.

해장국을 산다. 양과 선지만 건져 술안주로 먹는다.

(건진 안주에는 고추기름과 청량고추 다진 것을 잔뜩 쳐 먹는다. 소주가 물처럼 들어간다)

화요일.

남은 국물에 라면을 삶아 해장으로 먹는다.

(국물에 콩나물이 소량 투입된다. 오일리한 라면 맛이 중화된다)

수요일.

남은 국물에 오징어를 데쳐 술안주로 먹는다.

(이때는 무와 파가 잔뜩 들어간다. 오징어는 양념장을 만들어 찍어 먹는데 다 먹고 난 뒤 남은 양념은 국물에 붓고 다시 끓인다. 형체만 봐서는 원판이 무엇이었는지 절대 알 수 없다)

목요일.

남은 국물에 된장찌개를 섞어 두부를 넣고 끓여먹는다

(슬슬 맛이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전에 끓였다가 다 건지지 못한 라면발이 시체처럼 퉁퉁 불어 시각적으로도 불편하다. 가끔은 역시 덜 건진 양이 한 조각 나오기도 하는데 요건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

금요일.

남은 국물에 돼지고기 앞다리 살과 청국장을 넣고 술안주로 먹는다.

(역시 무가 들어간다. 가끔은 양파를 넣기도 한다. 어차피 취하자고 마시는 술이지만 자꾸만 목에서 걸린다. 매운 맛으로 누르기 위해 청량 고추를 왕창 넣는다)

토요일.

남은 국물에 신김치를 넣고 끓여 먹는다.

(색깔이 정말 이상하다. 울긋불긋하고 기름이 동동 뜬 게 북한 사람도 안 먹을 것 같다)

일요일.

남은 국물에 닭 가슴살을 넣고 술안주로 먹는다.

(닭 가슴살 대신 동태 전 먹던 것을 넣기도 하는데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다. 닭을 넣을 때는 무는 삼간다. 대신 파를 많이 넣는다. 국물이 졸아서 밥 비벼먹기에 딱 좋다. 돼지고기, 닭고기, 라면, 양, 선지 조각, 무, 오징어 다리, 두부 조각, 무 조각이 고루 섞인 아주 맛난 비빔밥 아니, 한국식 존슨탕이다)

월요일.

잠시 망설이다가 또 해장국을 산다. 지난주에는 순서가 나빴다는 생각에 라면을 뒤로 미루고 대신 닭을 먼저 넣는 것을 고려한다.

 

적어놓고 보니 무슨 지하생활자의 레시피 같다.

 

오늘도 축구 한 날.

공찬 날.

공 친 날.

 

인간 이하의 식생활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외식을 감행한다. 추어탕이냐 보신탕이냐. 뭔가 건더기가 있는 음식이었으면 좋겠다. 나오는데 국물이 비릿한 것이 제대로 끓이는 집이다. 우적우적 씹으며 나는 중얼거린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렇게 개의 육신은 고달프다. 떠나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살들이 업보라는 이빨 사이에서 무참히 갈린다.

 

 

- 일곱 째 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다. 마지막에 인간을 지으셨으니 엿새까지 지은 모든 것들과 갈등하고 불화하여 세상이 긴장 상태에 놓이게 함이시라. 아담을 보며 야훼 잠깐 상념에 드셨으니 겨우 이런 것들을 사랑하는 나의 아들과 바꿔야 한단 말인가. 하와는 아담의 갈비로 만들었다. 매우 상징적이다. 갈비뼈의 일은 내장을 보호하는 것이다. 인간 남자를 보호하기 위해 인간 여자를 지으셨음이라.

…야훼는 다 지었는데 나는 하나도 짓지 못했다.

25세기 전 히포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며

기회는 달아나고

실험은 위험하며

무엇보다

논증은 어렵다

정말이지 인생은 짧고 시간은 고속으로 가며 예술을 길고 먼 곳에 있는데다 기회는 한번 뿐이고 보시다시피 실험은 위험했으며(정말 실감난다) 다행히도 논증은 나의 몫이 아니다.

어느 소설인가 후기에서 김훈은 이렇게 썼다.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정말, 아름답다.

작자 중에 이렇게 명료하게 쓰는 일에 대하여 말한 경우도 드물다. 옮겨 쓰는 일은 배우는 것 중 최고. 당장 써보자.

‘주제나 서사로 소설을 만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이야기의 허망함과 소설과 비소설 사이의 간극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써나가려는 인간에 대해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 밖에 쓰지 못할 것이다’

일주일 내내 매달려 봤지만 결국 끝을 못 봤다. 아니 시작도 못했다.

그런데.

소설과 읽을거리의 경계는 무엇일까. 안 읽히는 소설과 읽히는 읽을거리 중 어떤 것이 나을까. 소설의 입장에서는 탄생 이후 지켜온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일까. 피네건스 웨이크는 출간 당시 소설이었을까. 그저 소설가가 썼으니 소설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포크너는 울프는. 현대 미술은 캔버스를 현대 음악은 오선지를 탈출한 게 반세기 전인데.

출판사에서 돈이 남아돌아 편집자에게 월급을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이 글을 받을까. 그것이 정말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