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조선의 건국으로 지배층 교체는 없어, 신흥사대부란 허구…혁명이 아니었다
김영수 | 영남대 교수       
 

조선 건국은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지만, 이를 종합적으로 고찰한 연구서는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 던컨(John B. Duncan) 교수의 <조선왕조의 기원(The Origin of Choson Dynasty)>은 그 저서들 중 하나이다.

조선 건국에 관한 기존의 견해는 다소 단순하거나
기계적인 것이었다. 일제의 식민사학에서는 단순한 궁중 반란으로 보았다. 한국 역사정체성과 분열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식민사학에 반대하는 민족사학은 친명 사대주의 세력의 집권으로, 실증사학에서는 토지 소유를 둘러싼 지배 세력간 투쟁의 결과로, 마르크스사학에서는 봉건사회가 강화된 사건으로 이해했다. 보는 눈은 다르지만, 하나같이 정체나 퇴보, 일종의 해프닝으로 보았다.

    
▲ 조선왕조의 기원…존 B. 던컨 지음·김범 옮김 | 너머북스 | 488쪽 | 2만5000원

 
내재적 발전론은 이런 해석을 전면 부정하고, 조선 건국을 구세적 열정에 불타는 신흥사대부들의 혁명이라고 본다. 신흥사대부는 신분으로는 지방향리 출신이고,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이다. 이념적으로는 신흥 학문인 성리학을 수용하고, 대외정책에서는 친명파들이다. 개경을 중심으로 한 대토지 소유자들이자 불교 신봉자들이고, 친원파인 전통 귀족들과 정확히 역사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이 해석은 이후 조선 건국을 설명하는 주류로 자리 잡았다. 던컨 교수 저술의 뛰어난 독창성은 바로 이 해석에 정면 도전했다는 점에 있다. 첫 번째 반론은, 조선 전기의 중요 가문들을 살펴보았더니 압도적 다수가 고려의 저명한 중앙 양반들 후손이라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신흥사대부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길게 보면 주요 양반 가문들은 11세기 고려부터 15세기 조선까지 연속되어 있다. 두 번째 반론은, 이들이 노비와 소작농이 경작한 대토지를 계속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토지제도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셈이다. 요컨대 조선 건국은 ‘혁명’이 아니라 ‘수구’라는 것이다.

내재적 발전론에 반대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내적으로 민족주의 정서가 깔려 있고, 긍정의 역사관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던컨 교수는 이런 불편함을 감수한다. 그의 힘은 꼼꼼한 자료 읽기로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는 데서 나온다. 그만큼 반박이 쉽지 않다.

존 던컨 교수는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흥사대부들이 조선을 건국했다는 주류 학계의 해석에 반발, 이성계 세력이 고려 귀족들과 타협해 개국했다고 말한다. 사진은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국보 제317호).


문제는 그러면 한국사는 역시 정체의 역사일 뿐인가 하는 점이다. 왕조 교체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던컨 교수 역시 그것이 자신의 고민이었음을 밝힌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던컨 교수는 고려와 조선의 제도를 연구했다. 그 결과 “고려부터 조선 전기까지 한국사의 중심적 주제의 하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를 창출하려는 노력이었다”는 최종 결론에 도달했다. 이것이 조선 건국의 시대적 과제이자, 긍정적 결과라고 평가한 것이다.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만들어낸 게 그리 대단한 일인가? 던컨 교수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고려는 중앙과 지방의 느슨한 연합으로 이루어진 국가체제로 인해, 국가의 안정을 기하기 힘들었다. 권력, 부, 신분을 둘러싼 중앙과 지방, 왕과 귀족의 투쟁은 고려말 지방의 몰락, 권력과 부의 중앙귀족에의 집중을 가져오면서 전반적인 국가해체
현상이 발생했다. 조선 건국은 개혁적 양반과 이성계 세력이 연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고, 그 시스템이 중앙집권적 관료제인 것이다.

하지만, 던컨 교수는 조선 건국이 새로운 사회정치적 질서를 수립한 것이 아니라, 세력상 중앙 귀족층과 신흥 이성계 집단의 타협이며, 국가체계상 관료층과 왕 사이의 권력 균형이라고 본다. 그가 제시한 여러 자료를 볼 때 균형 잡힌 해석이다.

이 저서의 또 다른 장점은 ‘비교’에 있다. 비교의 틀은 아이젠슈타트(N. Eisenstadt)의 <제국의 정치제도(The political system of Empires)>에서 원용하고 있다. 오스만 투르크, 사산조 페르시아, 전통 중국의 제도를 비교한 명저이다. 조선 건국에 따른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화를 다룬 도이힐러(M. Deuchler) 교수의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 역시 문화인류학의 틀을 통해 ‘비교’를
시도하고 있다. 그만큼 해석의 폭이 넓다. 우리 역사학 연구는 대체로 비교 없이 한국사 자체만 다루기 때문에 보편적 지평을 확보하지 못하고 좁은 지역적 관점에 머무는 단점이 있다.

저자는 또한 제도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깊은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현실 정치를 직접 체험하지 않은 학자로서는 갖기 어려운 센스이다. 하지만, 조선 건국의 정치과정과 사상적 전환에 내포된 역동성을 드러내는 데는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분석은 성공적이나, 역사를 성찰의 수준으로 고양시키는 사색의 깊이는 그만큼 성공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호이징가처럼 역사 연구에서 둘을 동시에 성취하는 것은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역사 연구의 꿈이기도 하다.
 
중앙일보
                     

[책과 지식] 새로 읽는 조선 … 고려 지배층 그대로 남아

[중앙일보] 입력 2013.03.23 00:48 / 수정 2013.03.23 00:48

조선왕조의 기원
존 B 던컨 지음
김범 옮김, 너머북스
488쪽, 2만5000원


미국 UCLA 대학의 한국사 연구자 존 던컨(68) 교수의 노작(勞作)이다. 제목만을 놓고 볼 때 고려 후기 이후의 역사를 다룬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조선왕조의 기원을 고려 건국 전후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고 있다. 조선과 고려 사이의 오랜 지속성을 강조하는 셈이다.

 제목을 조선왕조의 ‘형성’이라고 하지 않고 역사연구자들이 가능한 쓰지 않으려는 ‘기원’을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터다. 조선왕조의 건국을 왕조 교체가 아닌 신흥사대부의 등장 등 지배계층 교체로 해석해온 그간의 선행 연구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서다.

 이런 내용은 한국사의 상식적인 흐름과 큰 차이가 있다. 주요 시기마다 새로운 사회세력이 등장해 역사를 끌어가고, 또 그들이 지배세력으로 부상했다는 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한국사다. 예컨대 신라 말 진골에 대항했던 육두품 등 호족의 등장, 이어 문신귀족에 반기를 들었던 무인들의 진출, 지방 향리 출신 신흥 사대부의 출현과 조선의 건국, 나아가 조선 전기 훈구파에 맞선 중소 지주 출신 사림파의 등장과 사화, 경영형 부농의 출현과 농민 봉기 등이 그것이다. 주도 세력의 교체와 확장을 강조하는 논리는 현행 역사 교과서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고려말 무신으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초상화. 조선왕조의 건국을 신흥사대부의 등장에 의한 지배계층 교체로 본 기존 한국 역사학계의 학설을 던컨 교수는 정면으로 비판하며 고려와 조선 권력층의 오랜 지속성을 강조한다. [중앙포토]
 
 던컨 교수는 이런 도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와 그 의미를 둘러싼 종래의 시각을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그는 무엇보다 조선의 건국을 신흥 사대부의 출현과 연관 짓지 않는다. 고려 전기 이후 계속 추구해온 중앙 집권적 관료체제의 완성으로 보는 것이다. 고려의 중앙 관료 귀족이 지방 귀족인 향리를 완전히 제압하는 긴 역사적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신흥사대부의 등장과 조선의 건국이라는 통설에 익숙한 독자에게 이런 주장은 충격적일 것 같다. 던컨 교수는 이런 점을 고려해 고려의 정치제도, 중앙 관료적 귀족의 흥기, 왕조교체기의 양반, 고려후기의 제도적 위기, 개혁과 왕조 교체, 개혁 이념 등을 집중 검토한다.

 특히 고려 이후 조선 초기까지 중요 관직자들의 출신 가문과 등용 방식, 경력 등을 치밀하게 따진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 결과, 조선왕조의 건국 주체들이 고려의 지배 엘리트들 연장선상에 있었고, 또 이들의 기원이 고려 건국 전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극명히 드러내고 있다. 요컨대 이 책은 조선의 건국에 대한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역사상까지 제시하고 있다.

 이런 논의의 근간에는 귀족제와 관료제 사이의 긴장과 형평이라는 저자의 보다 큰 구도가 깔려 있다. 이는 한국학의 대부로 불렸던 제임스 팔레(1934~2006) 교수가 조선 왕조사회의 특성을 밝히려 도입한 가설인데, 던컨 교수는 이를 고려 왕조까지 확장하고 있다. 고려와 조선 사이의 지속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사학계의 ‘내재적 발전론’과 그 문제점을 거듭 비판한다. 내재적 발전론은 일반인도 꽤 친숙한 이야기일 듯하다. 일제는 한국 병합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사의 정체성을 강조했고.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계는 이를 극복하는 데 주력해왔다. 내재적 발전론은 이 과정에서 형성됐다. 시기별 주요 변동을 역사의 역동성과 발전의 징후로 해석했다. 한국사 지배 세력의 변천에 대한 논의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 가설은 서구의 역사 발전을 보편적인 모델로 간주하는 한편 자민족 중심주의도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래 전부터 비판받아왔다. 이 책 역시 학계의 주류로 굳어진 내재적 발전론과 지적 긴장을 보여주고 있으나 향후 건설적인 논의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그만큼 시각차가 큰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특장을 놓쳐선 곤란하다. 전문 연구서로서의 공력이 있을 뿐 아니라 글이 유려해 일반 독자도 저자의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다. 역사의 대중화라는 화두에도 중요 논점이나 내용은 여전히 전문가들의 세계에만 갇혀 있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풍요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역사 서술을 만나는 즐거움이 각별하다.

이훈상

 서평에서 흔히 옮긴이를 언급하지 않는 데, 이 책에선 번역의 의미를 되새겨봐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역자 김범(43·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씨는 이미 제임스 팔레 교수의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을 옮긴 적이 있는데 또 다시 이 어려운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 동안 에드워드 와그너· 마르티나 도이힐러 등 서구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도식적이거나 획일적인 역사 이해를 경계해왔다. 요즘 우리 사회는 이해·입장·해석의 다양성을 지향하고 있다. 주류 한국사 연구와는 다른 시각에서 쓰인 이들의 연구 성과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이제 던컨 교수의 논저도 추가할 수 있게 됐으니 고마운 일이다.

이훈상 동아대 교수·한국사

 
●이훈상 한국사회사·문화사·예술사 전공. 저서 『조선후기의 향리』(일조각)로 두계학술상을 받았다. 역서로 『전통 한국의 정치』(제임스 팔레지음)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선왕조사회의 성취와 귀속』 (에드워드 와그너) 등이 있다. 하버드대·듀크대·도쿄대 초빙학자를 지냈다.

chosun.com

"최초의 서울, 이성계가 아니라 고려 숙종 작품"

허윤희 기자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입력 : 2013.03.22 23:52

都城 원점 경복궁은 고려 행궁터 재활용… 서울 입지 다지는데 길잡이 역할 해
詩人 이상, 윤동주도 서촌의 역사 만들어

오래된 서울

최종현·김창희 지음|동하|364쪽|2만원

"서울의 나이는 600년인가, 2000년인가"라는 질문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오래된 논쟁이다. ①'서울 600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긴 시점이 기준. ②'서울 2000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백제 건국 시점인 기원전 18년을 서울의 시작으로 본다. 팽팽히 맞서는 양쪽 입장에 대해 이 책의 저자들은 "둘 다 틀렸다"고 말한다. "서울의 시공간적 원점은 900년 전인 서기 1104년 8월, 고려 숙종이 지금의 경복궁 서북쪽 한 귀퉁이를 지정, 남경(南京) 행궁(行宮)을 완공한 시점이다." 즉, 고려의 남경에서 서울이 탄생했다는 주장이다.

"서울의 나이는 900년"

왜 하필 고려 남경인가? 이들이 내미는 역사적·지리적 근거가 설득력 있다. 조선시대의 사대문 안에 해당하는 서울 도성 지역의 원점은 경복궁. 그런데 경복궁은 다름 아닌 고려 행궁 터를 재활용한 것이니 남경이 서울의 터를 잡는 길잡이가 됐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경복궁 안 남경 행궁 터에서 남쪽을 내려다본 전경 사진을 싣고 이렇게 상상한다. "고려 숙종은 이곳 연흥전에 앉아 서울 시내를 내려다봤을 것이다. 그 시선이야말로 우리 서울 탐사의 출발점이다."

세종, 왕궁 아닌 서촌에서 태어나

이제 책은 본격적으로 속도를 낸다.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자리잡은 '서촌'의 땅과 물길과 하늘길을 시작으로,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을 시간순으로 훑으며 역사를 길어올린다. 서촌은 초기에는 왕족들의 터전이었다가 중기부터는 사대부들의 주거지이자 서인(西人) 학문과 예술의 발상지였으며 후기에는 중인들의 문예운동이 꽃핀 곳이다.

겸재 정선이 만년에 그린‘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 /동하 제공
서촌의 첫 주인은 왕족. 세종(재위 1418~1450)도 (궁이 아니라) 서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왕이 되기 전에 태어난 데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결혼해서 왕궁 밖에서 살 운명이었던 것. '세종실록'은 "태조 6년 4월 임진일에 한양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탄생했다"고 전한다. 잠저란 왕이 즉위 전에 살던 사가(私家). 저자들은 준수방의 현재 위치도 어렵지 않게 찾아낸다. "경복궁역에서 자하문로를 따라 북쪽으로 250m쯤 가면 우리은행 효자동지점이 있다. 뒤로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큰 길과 만나 삼각형 땅을 이룬다. 그 삼각형 지형과 주변이 모두 준수방이었다."(99쪽)

광해군(재위 1608~1623)은 인왕산 기슭의 면모를 완전히 바꿨다. 둘째 아들에 서자 출신이란 자격지심에 시달린 그는 인왕산 아래에 왕기(王氣)가 서려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자신의 궁궐을 지으라고 명한다. '광해군일기' 1617년 6월 기록을 보자. "한꺼번에 공사를 시작해 제조와 낭청이 수백 명이었으며 헐어버린 민가가 수천 채나 되었다." 왕위 계승의 정당화를 꿈꾸며 궁궐을 세 곳이나 지었지만, 인조반정으로 정작 광해군 자신은 하루도 들어가 살지 못했다.

발로 쓴 서촌의 역사

이후 경화사족(京華士族·한양에 거주하던 문사권력층)에서 중인, 모던보이를 거쳐 현대사의 격랑에 휘말린 사회주의자들까지 다양한 꿈의 주체들이 서촌을 거쳐갔다. 이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아픈 우리 역사의 축도다. 친일파 윤덕영의 옥인동 집이 1917년 1만6628평에 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양 아방궁'이라 불렸을 정도. 1927년에는 옥인동 전체 면적의 54%가 윤덕영 소유였다. 천재 시인 이상과 화가 구본웅, 민족시인 윤동주와 국문학자 정병욱 등 동행의 여정도 뒤쫓는다.

일반사와 도시사, 지리학을 넘나들며 서촌에 숨겨진 역사의 굴곡을 되살려냈다. 저자들은 겸재 정선이 만년에 그린 걸작 '인왕제색도', 그로부터 꼭 40년 뒤 인왕산 기슭에서 벌어진 일을 담은 이인문과 김홍도의 그림 속 장소를 직접 찾아 앵글을 확인한다. 자료를 뒤지고 발이 부르트도록 골목 골목을 누빈 결과물이다. 사진과 고지도, 민정기 화백의 그림까지 시각적 재미도 풍성하다.

"서울 역사의 다양한 층위가 확인될수록 오늘 우리 삶의 다양성 역시 해명될 가능성이 커진다. '오래된 서울'은 과거 이야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서울'이기도 하고 우리가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내일의 서울'이기도 하다."

저자들의 공력이 돋보인다. 서촌을 답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길잡이 답사책으로, 옛 그림에 흥미있는 이들에겐 미술사 책으로도 읽히겠다. 동대문과 광희문(남소문) 주변을 다룬 둘째 권, 정동과 남산자락, 종로·청계천 등을 다룬 셋째 권이 기다려진다.

서울신문

날짜 :: end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4> 지역색 (상)

서울은 ‘이중도시’ 뚜렷한 지역색 예전부터 있었죠 조선 500년 내내 남·북이 양립

●조선시대 한양은 ‘경조 5부’ 행정구역으로 구분

오늘의 서울에도 강·남북이라는 지역 차가 실재하지만, 전통적으로 서울은 지독한 지역색이 작용하던 도시였다. 대개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양태를 보였다. 조선 500년 내내 개천(청계천)을 경계로 북쪽과 남쪽 두 개 구역으로 양분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종로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 거주지역과 남산아래 본정통(충무로) 중심의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진화했다. 광복 이후 갈라진 좌우 이데올로기는 결국 국토의
허리를 남과 북으로 끊어놓았고,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 전개된 남·북한의 체제 안보경쟁이 강남개발을 촉발했다. 이때 서울은 한강을 경계로 강북과 강남 두 개의 도시로 양분됐다고 할 수 있다.


 

    
▲ 고산자 김정호가 1846~1849년 사이에 제작한 한양지도 ‘수선전도’ 위에 조선개국 이후 500년 동안 이어진 한양의 행정구역이자 거주지역인 5촌, 양대, 자내, 오강을 한양도성을 이루는 내사산(백악·인왕산·낙타산·목멱산) 사진과 함께 배치해 보았다.
           

서울은 두 개의 도시로 이뤄졌다. 서구개념으로 치면 강북은 구도심(Old Town)이요, 강남은 신도심(New Town)이다. 한강은 나루터와 나룻배가 사라진 대신 다리로 촘촘하게 이어졌지만 두 도시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격차도 심화된 느낌이다. ‘한강의 기적’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한강 이남의 초고속 성장사였다. 양극화는 한강을 사이에 둔 남과 북 양극에서 빚어진 현상일 수도 있다.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할 만큼 문화적 이질성도 고착화하고 있다. 몇 년 전 조사에서 강남과 강북 아파트의 평균매매가 차이가 3.3㎡당 무려 1337만원이었다. 강남이란 ‘나’와 ‘남’이 다름을 보여주는 주거의 ‘차별 짓기’를 통해 몸값을 부풀린 아파트 왕국이다.

서울 강남·북을 뺨치는 지역색이 조선시대 한양에 존재했다. 도시학자들은 서울을 전통도시와 근대도시가 공존하는 ‘이중 도시’(Dual City)로 분석한다. 도시사학적 시각에서 서울의 공간적 특성을 근대 이전과 이후로 나눠 본다면 근대 이전 서울은 남촌과 북촌으로, 근대 이후는 강남과 강북으로 양립하고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서울시청)는 ‘경조 5부’(京兆 5部)라고 하여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 등 5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눠 다스렸다. 오늘날 서울의 25개 자치구 중 경기도 시흥·과천·용인·광주였다가 서울로 편입된 한강 이남 10개 구를 제외한 한강 이북 15개 구 가운데 사대문 안에 해당하는 종로·중구·서대문·동대문 등 4개 구가 옛 경조 5부의 대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경복궁과 사대문을 축으로 나눠보면 북부는 경복궁~창덕궁 사이, 동부는 창덕궁~흥인지문 사이, 서부는 돈의문~숭례문 사이, 남부는 숭례문~흥인지문 사이쯤이다. 5부(部)가 곧 5촌(村)이다.

●사색당파, 제사·옷고름·갓끈 등으로 차별화

경조 5부 가운데 북부(가회동·계동·안국동·재동·경운동)와 동부(이화동·동숭동·혜화동·충신동)를 북촌체제로, 서부(정동·새문안)와 남부(필동, 묵동, 남산동·주자동, 인현동)를 남촌 체제로 구분할 수 있다. 개천을 경계선으로 긋는다면 북쪽은 권문세가와 현역 벼슬아치 그리고 그들을 돕는 아전(衙前) 및 겸인(?人)들의 주거지구였다. 개천부터 목멱산(남산)까지 남쪽에는 지체 낮은 관리나, 퇴락한 양반, 별 볼 일 없는 무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서울연구가 전우용은 ‘서울은 깊다’에서 “남촌 사람들은 술을 빚어 마시는 것을 즐겼고, 북촌 사람들은 떡을 자주 만들어 먹었다는 ‘남주북병’(南酒北餠)이란 속담은 두 구역 사람들의 기질이나 처지가 그만큼 달랐음을 일러준다”고 분석했다.

 

동·서·남·북촌이 양반이나 관료 그리고 그들을 떠받치는 아전들의 거주구역이라면 중촌(中村)은 중인(中人)들의 터전이었다. 의관, 역관, 율사, 화원, 도사 등 중인에다 상인, 군속들이 중부(다동·무교동·수표동, 입정동, 주교동, 관수동) 일대에 둥지를 틀었다. 오늘의 을지로와 청계천변이라고 보면 된다. 중인이란 용어도 중부 혹은 중촌에 사는 사람에서 생겼다.

케케묵은 조선의 행정구역인 경조 5부를 들먹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중인이 사는 중촌을 제외한 4개의 양반 촌을 중심으로 조선 중기 사색당파(四色黨派)가 발원했기 때문이다. 동인의 거두 김효원(1532~1590)이 낙산 아래 동촌에 산다고 하여 그 일파가 동인(東人)이 되었으며, 이에
맞선 심의겸(1535~1587)이 인왕산 아래 서촌에 살았다고 하여 서인(西人)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동인 중 남산 아래 진고개에 사는 일파가 남인(南人)이 되었고,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거주하는 몇몇이 북인(北人)을 형성했다.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리됐다가 노론이 영조와 정조를 거쳐 고종에 이르기까지 150년 이상 득세했다. 노론의 거주지가 이른바 북촌이었다.

풍수에서 한양의 최고 명당은 백악 아래 경복궁이었다. 다음이 응봉 아래 창덕궁과 종묘, 성균관 자리다. 백악과 인왕산 사이 장동·청류계·백운동·옥류동·인왕산동도 빠지지 않았고, 백악과 응봉 사이 지금의 율곡로 일대도 최고 길지의 하나였다. 남산을 바라보는 풍광이 좋고 터가 넓어 권문세가들이 큰 집을 짓고 교류했다. 이에 비해 남산골은 음지였으나 배수가 잘되고 지하수가 풍부해 하급관리들이 살 만한 곳으로 쳤다.

고종 대인 1864년부터 1887년까지의 기록인 ‘매천야록’에서 황현은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이 섞여서 살았다”라고 썼다. 조선 말기 북촌에는 노론이 살았고, 소론과 남인, 북인은 주로 남촌에 어울려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붕당(朋黨)은 제사 모시는 법, 옷고름이나 갓끈 매는 법을 서로 달리 하면서 차별 짓기를 했다. 사화(士禍)가 이 같은 지역색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금의 강·남북 구별 짓기가 무색할 지경이다.

●서촌은 새문안·정동, 상촌이나 윗대로 불러야

서울의 지역색과 구역분화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1924년 발행된 개벽 6월호 ‘경성중심세력의 유동’에서 소춘은 “경성은 오촌(五村), 양대, 자내(字內), 오강(五江)으로 나뉜다”라고 주장했다. 조선후기 들어 신분과 계층이 세분화되고 신분에 따라 거주지역이 정해진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오촌은 경조 5부의 지역공간과 겹친다. 양대는 윗대(웃대)와 아랫대로 나뉜다. 윗대는 상촌(上村)이라고도 했는데 경복궁 주변의 육조 관아가 있던 사직동·내자동·당주동·도렴동·체부동·순화동·통의동에 살던 아전이나 겸인, 내시의 거주지를 일렀다. 아전이란 ‘관아 앞에 사는 사람’이라는 조어였고, 겸인은 권문세가의 경호원 또는 비서격이었다. 이들은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을 통해 궁을 드나들었다. 인사동을 중심으로 중촌에 살던 중인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였다.

정교는 ‘대한계년사’에서 “상촌인은 평민 중에서 각 부의 서리 및 공경가의 겸인이 되는 자인데, 그들은 평민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자라고 칭한다”라고 했고, 정래교는 ‘임준원전’에서 “경성의 민속은 남과 북이 다르다. 백련봉 서쪽에서 필운대까지가 북부인데 주로 가난한 집들로 얻어먹는 사람들이 산다. 그러나 때때로 의협 있는 무리가 의기로 서로 사귀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며, 약속을 중히 여긴다. 또 시인 문사들이 시를 다투었다. 풍속이 그러했던 것이다”라고 윗대의 풍속을 평했다. 또 이가환은 ‘옥계청유첩서’에서 “경복궁의 남쪽은 육조이다. 그 서쪽은 좁은 땅이다. 때문에 서리들이 많이 살며 일에 익숙하고 질박한 이 적다”라고 윗대의 지역을 구분했다.

요즘 서촌이라고 부르는 경복궁 서쪽지역이 바로 윗대이다. 일제강점기 옛 옥류동과 인왕산동을 강제로 합쳐 만든 새로운 동
이름인 옥인동 쪽으로 흐르는 옥계천의 상류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북촌에 빗대 서촌이라고 불렀지만 애당초 잘못된 지명이다. 서촌이란 조선시대 경조 5부 중 돈의문 부근을 지칭하던 지명임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경복궁의 서쪽이라 하여 서촌이라고 한다는 논리대로라면 북촌은 동촌이 돼야 할 판이다. 구태여 새로운 지명이 필요하다면 지금이라도 윗대 혹은 상촌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아랫대(下村)는 중촌과 남촌 중간지대를 지칭하는데 지금의 오간수문~광희문 사이쯤이다. 이 일대에 자리 잡았던 어영청이나 훈련원 소속 군병들이 주민을 이뤘다. ‘개벽’(1924년 6월)에서 “우대(웃대)는 육조 이하 각사에 소속된 이배, 고직 족속이 살되 특히 다방, 상사동 등지에 상고 통칭 시정배가 살았고…아래대(아랫대)는 각종 군속이 살았으며 특히 궁가를 중심으로 하여 경복궁 서편 누하동 근처는 대전별간파들이 살고…”라고 구역특징을 설명했다. 황성신문(1900년 10월 9일자)은 “사대부의 말투는 극히 화미절이하며, 북촌 사람들의 말투는 매우 부드럽고 조심스러우며, 남촌 사람들의 말투는 빠르며, 상촌사람들의 말투는 공경스러우며, 중촌사람들의 말투는 기민하며, 하촌사람들의 말투는 상스러우며…”라면서 조선말 오촌, 양대사람의 인적특성을 총정리했다.

자내란 한양도성을 쌓거나 보수, 경비하고자 한성부가 담당구역을 정한 구역을 말한다. 천자문의 ‘천(天)자’이면 이 글자가 적힌 구간에 거주하는 사람을 뜻했다. 성안을 돌아다니며 계란이나 채소, 장작을 팔았고 분뇨를 퍼다가 가축을 키웠다. 오강은 한강과 용산, 서강 등 3강에 마포삼개와 망원을 합해 오강이라고 이름 붙였다. 오강주민들은 나루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이었다. 나루터에서 잔뼈가 굵은 사공, 짐꾼이거나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떼다 파는 기가 센 사람들이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2014-04-21 18면



조선시대사(정두희 교수)
http://www.jung818.com/joseonsidae/joseonsidae.html


chosun.com

조용헌 살롱
이 카테고리의 다른 기사보기

[987] 임실 上耳庵 이야기

 

조용헌
원광대학교동양학대학원 교수
    입력 : 2015.04.26 23:21
    조용헌
    조용헌
    이성계가 고려 말 전국구 인물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1380년 9월 전북 남원 근처의 황산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이성계는 소년 장수로서 유명했던 일본 장수 '아지발도'를 죽인다. 당시 고려의 마지막 카드였던 이성계까지 아지발도에게 패했더라면 수도 개성도 왜구에게 공격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황산대첩은 이성계 일생에서 가장 힘들고 아슬아슬했던 전투였던 것이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인간은 하늘에 기도를 드린다. 이 전투 무렵에 이성계는 임실군에 있는 상이암(上耳庵)이라는 암자에서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황산대첩의 현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상이암은 주변 산세가 구룡쟁주(九龍爭珠)의 형국이다. 아홉마리 용이 여의주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형국인데, 그 여의주는 상이암의 법당 앞에 조그만 바위 봉우리 형태로 솟아 있다. 이 바위 봉우리를 여의봉(如意峰)이라고 부른다. 이 여의봉이 있어서 기도발이 잘 받는다. 이성계는 상이암에서 기도를 하다가 하늘로부터 '앞으로 네가 왕이 된다'는 소리를 귀로 들었다. 그래서 암자 이름도 '상이암'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불교가 탄압받을 때에도 이 상이암은 유생들로부터 보호받았다. 태조 이성계가 계시받은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말 도선국사(道詵國師) 이래로 영검한 기도터라고 소문나 있었기 때문이다.

    육사를 나와 육군 중령이었던 40대 중반의 김성회는 그렇게 소망했던 대령진급이 안 되자 실의에 빠진 상태였다. 우연히 '무장에게 특히 영검하다'는 소문을 듣고 상이암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주지스님(東曉)으로부터 법문을 들었다. '모든 인간은 잘났거나 못났거나 평등하다. 차별하면 안 된다' '계곡의 골짜기가 깊어야 물을 많이 담을 수 있다' '인생은 시소게임과 같아서, 내가 올라가려면 상대는 무거워야 한다'는 세 가지 내용이었다. 상대를 무겁게 하려면 상대방을 배려하고, 칭찬하고, 물심양면으로 공을 들여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박혔다고 한다. 이후로 60주(週)를 한 주도 안 빠지고 상이암에 가서 기도를 하였다. 김성회(60)는 현재 공기업체 대표로 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