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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로런스 부시의 <표준: 현실을 만드는 레시피>

이강기 2015. 10. 25. 08:49

박근혜 정부가 국정화라는 '표준'에 집착하는 이유

 

[서평] 로런스 부시의 <표준: 현실을 만드는 레시피>

 

 

 

15.10.12 10:20l최종 업데이트 15.10.12 10:20l

 

오마이뉴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정국의 핵이 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스템 도입을 강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12일 중으로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교과서를 '국정'으로 할 것인가 '검정'으로 할 것인가는 발행 체제의 '표준'을 둘러싼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익히 짐작할 수 있듯이 그것은 역사 서술의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말하자면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은 과거 역사를 놓고 벌이는 권력 투쟁인 셈이다.

'표준화 기획'의 결과, '표준화된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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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준 : 현실을 만드는 레시피> 책 표지
ⓒ 한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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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현실을 만드는 레시피>는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 사회표준연구센터의 로런스 부시 특훈교수가 내놓은 저작물이다. 세상을 유지시키고 변화시키는 '권력'으로서의 표준을 살폈다.

역자는 후기에서 이 책이 표준을 '표준학'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다고 평가한다. 표준을 만들어내는 현실과 표준이 만들어내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인간의 삶에서 표준이 갖는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표준은 단순한 기술적 개념이 아니다. 저자는 제1장의 제목을 '표준의 힘'으로 정해 표준이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치열한 협상과 거래의 산물인 표준이 중립적인 현상이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권력과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표준은 단일한 현상도 아니다. 규범, 관습, 전통, 법률과 구별되는 표준은 "세상의 일을 해내는 수단"(35쪽)이자 "현실을 만들어내는 레시피"(35쪽)다. 이 책에서 시종일관 강조되는 표준의 성격은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며 맥락의존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지난 300년간은 인간과 사물에 대한 고도의 표준화 작업이 성행한 시기였다. 책은 시간, 군대, 식민지 건설, 사회운동, 의료, 농업, 학교교육, 시민종교, 가정, 패션, 공장, 조직의 커뮤니케이션, 경영, 법률과 정치, 지식 등 세상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표준화가 진행돼온 역사를 하나하나 살핀다. '표준화 기획'의 결과는 '표준화한 인식'이었다.

다양한 형태로 발현된 계몽주의라는 위대한 기획은 근본적으로 광범위한 인식을 표준화하는 기획이었으며 사람들이, 아주 동일한 상황이 아니어도, 그들 자신을 유사하게 인식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기획이었다. (중략)

간단히 말해, 표준화한 세계에서 인식은 표준화한 선을 따라 유포되었다.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이 확립된 것은 20세기에 그 절정을 보였던 표준화 프로젝트의 또 다른 일부였다. 군대는 오직 국민국가에 의해 그 효용성이 더 높아졌다. 국민국가만이 형법과 민법 모두와 그 법을 집행할 실질적이고 도덕적인 수단 대부분을 갖게 되었다. (215쪽)

저자에 따르면 계몽주의의 출현에 따른 표준화 기획은 또 다른 표준을 이용한 '차별화' 대응을 불러왔다. 이 차별화 작업은 거의 모든 사물과 사람을 '증명'하고 '인증'하는 조직들의 발전과 더불어 다루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또한 특정한 상황에서는 그러한 증명과 인증이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표준에 따른 사회권력의 문제, 윤리와 정의의 문제가 부각되는 지점이다.

저자는 표준이 그것이 매개하는 가치사슬이 상품의 생산, 유통, 판매, 소비에 적용되는 것과 비슷하게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본다. "우리 각자는 살아가면서 시험과 검증으로 평가된 표준들을 따라야"(376쪽)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릴 때 우리는 행동의 정상상태, 강퍅성, 성장률, 언어습득 속도 등에 대해 다양한 표준과 비교되며 평가를 받는다. 우리의 부모, 친척, 그리고 이웃들은 우리를 사랑스러운, 영리한 아둔한, 또는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로 정의한다. 그 후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수많은 시험(일부는 다른 것들보다 더 표준화한) 결과에 따라 기대 이상의, 보통의, 또는 기대 이하의 성과를 거두는 아이로 딱지가 붙게 된다. (중략)

동일한 것이 가족, 교육기관, 병원, 대기업, 소기업, 군대, 스포츠 팀, 그리고 심지어 국가와 같은 조직화한 인간집단에도 적용된다. 외견상 끝없어 보이는 일련의 표준, 시험 및 검증은 모두 우리의 사회제도와 사회기관들을 특징짓는다. 요컨대 사물이 그것들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전 과정을 통해 시험받고 검증되듯이 인간도 개인으로서 그리고 단체의 일원으로서 같은 과정을 거친다. (376~377쪽)

후퇴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표준'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대목은 '표준과 민주주의'라는 제목이 달려 있는 제6장이다. 저자는 상호 대척적인 '전문가주의'와 '민주주의' 개념을 살핀 뒤 표준 설정 시의 유의점을 상세하게 논한다. 표준 설정에는 종종 전문성이 필요하지만 모든 것이 그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는 점, 표준은 '인간'인 우리 자신의 문제를 둘러싸고 있어서 이들 문제에 답을 구하기 위해 전문적인 지식을 통합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문제에 분명한 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는 상당한 의심과 함께 검증되어야 한다는 점 등을 강조한다.

(부정적인 의미의) 전문가주의라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저자는 직접민주주의, 심의민주주의, 또는 참여민주주의를 목표로 한 다면적인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저자는 인간 사회가, 풀어야 할 논리적인 문제나 수학방정식이 아니라고 말했다. 대신 개선시켜야 할 공유지로 보았다. 표준 설정 과정에 정의와 윤리와 민주주의가 깊이 개입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저자의 이런 시각은 "표준의 형성은 사회를 (재)구성하는 핵심이다. 예컨대 표준의 형성은 오늘날의 민주적 거버넌스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를 판가름한다"(411쪽)라는 언명에서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가 대부분의 표준설정 활동에서 전문가와 일반인 모두를 참여시킬 필요가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지식이 항상 미완성이며 세분화해 있기 때문에, 인식이란 퍼져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물건들의 설계와 이용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표준을 결정하는 데도 다양한 사람과 조직 사이에서의 숙고, 협상, 그리고 타협이 필요하다. 유일한 최선의 해결책이란 있을 수 없다. (411쪽)

저자는 "표준을 정립한 결과 누가 승자가 되고 누가 패자가 되는지 생각해보라. 표준을 통해 어떤 미덕과 악덕이 선명하게 드러나는지 생각해보라. 표준을 확립한 결과 어떤 사람의 권리가 신장되고 어떤 사람의 권리는 제한되는지 자문해보라"(440~441쪽)라고 말했다.

요컨대 표준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화'라는 표준에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바야흐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표준'은 후퇴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표준: 현실을 만드는 레시피>(로런스 부시 지음, 이종삼 옮김 / 도서출판 한울 / 2014.9.10. / 508쪽 / 4,9000원)
정은균 시민기자의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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