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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가? - DJ 정부시절(2001)에 나온 한 지식인의 한탄

이강기 2015. 10. 23. 10:31

[태평로 칼럼]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가?

서기원ㆍ소설가

주간조선2001.9.6 /1669호

김대중 대통령이 즐겨 쓰는 말에 일류라는 것이 있다. IT기술이 일류가 되고, 경제도 일류가 돼서 일류국가가 돼야 한다. 말하자면 이런 어법이다. 국제경쟁에서 으뜸이 돼야 하고, 또 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한데 국제경쟁에서 승리하려면 먼저 '통치집단'의 질과 수준이 으뜸이 돼야 한다. 아무리 참여민주주의다, 풀뿌리민주주의다 해도 한 나라의 나아갈 방향을 잡고, 사회적 역량을 효율적으로 기능하게끔 하는 정치적 의사와 정책의 결정은 그럴 수 있는 소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엘리트군이라고도 하고, ‘파워코어’라고도 한다.

 

그렇다고 그 집단이 어느 한 사람이나 극소수의 사람들이 마음대로 좌우하고 결정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이른바 여론형성을 이끄는 지식층과 대중의 소망을 동시에 반영하려고 하는 미디어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이를 무시하고 정치를 하거나 정책을 정하고 막무가내로 밀고 나가면,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십중팔구 실패하게 돼 있다.

 

■개혁의 내용·실천 가능성 따지면 '반개혁적' 매도

 

대관절 이 나라를 어디로, 어떻게 끌고 가려는가?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돼 있는, 좀 과장해서 분열증, 우울증, 불안공포증, 그리고 강박감 같은 정신병적 증상은 앞서의 두어 가지가 그 요인을 제공하고 있다.

 

일류가 못되는 엘리트군이 지식층과 미디어의 비판과 충고를 우습게 알고 독불장군처럼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일류국가의 실현이란 환상에 불과하다.(기실 일류국가란 말도, 개념을 정리하자면 그리 쉽지 않지만 우선은 그대로 쓰기로 한다.)

 

그럼 이 나라의 엘리트군이 일류는 고사하고 그다지 우수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여러가지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화해서 말하면 인적 자원의 동원에 실패했고, 또 별로 나아질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인재는 제법 있는데 무역정책에서 말하는 네가티브제 비슷한 걸 쓰면서 몇 가지의 기준을 정하고 있는 탓이다.

 

넓게는 이른바 기득권자들을 배제하려는 것인데 명분론적 용어로는 ‘비개혁적 인물’이 이에 해당된다. 또 개혁의 내용이나 실천 가능성을 따지면 반개혁적이라고 단정한다.

 

더 중요한 문제로는 민족 화합, 통일 추진 등 대북정책을 들 수 있다. 이번 8ㆍ15 평양행사에서도 또다시 드러났지만, 저들은 서울에 오지 않고 남쪽에서만 ‘대표단’이 가서 일종의 굿판을 벌였다. 이 경우 신대를 잡고 춤춘 건 물론 북쪽 무당인데, 남쪽에서 간 구경꾼 가운데 함께 춤추며 돌아간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다. 굿판이나 잔치마당을 벌인다고 통일이 앞당겨지지는 않는다.

 

어느 장면을 보고 말했는지는 몰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냉혈동물 혹은 반민족적, 다시 말해 반통일적이라고 욕을 먹기도 했다.

 

겉으로 대성통곡을 하는 사람도 있고, 속으로 우는 사람도 있다. 희로애락을 겉으로 내놓는 것이 한국인의 습성인데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국제적 매너’의 상식으로 보면 그다지 품위있는 것은 못되고 또 존경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사시사철 통일타령을 부르는 사람들을 보면 과연 그 사람이 진심으로 통일을 원하고 있는지, 훼방을 놓으려고 그러는지 아리송해질 때가 있다.

남북문제에 무식한 소치일지도 모르지만, 북한당국이 주장하는 연방제라는 것이 그런 식의 반어적 선전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네 집단의 현상 유지 혹은 생존을 위해 두 국가를 고착시키고, 무슨 남북 ‘인민대표자회의’ 같은 것을 만들어 남쪽이 제풀에 흐느적거리기를 노리는, ‘칼을 품은 방어적’ 자세로 느껴지는 것이다.

 

다시 화두로 돌리면 인재를 네가티브제로 배제하고, 반독재ㆍ 민주화투쟁에 나섰던 사람을 선호하다 보니까 엉뚱한 사람, 가당치 않은 사람, 무지한 사람이 중요한 자리에 앉게 되고, 정의와 개혁만 부르짖으면서 정사를 그르치기 십상이다.

 

본질적으로 정의는 말할 것도 없고, 개혁도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고 얽히고 설킨 현대국가의 운영에 있어서는 단순, 명쾌, 정의감 등등으로 개혁이 될 수는 없다.

 

경제정책은 원체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니까 도리없이 기성층의 관료집단을 동원하고 있지만, 정책의 기본과 방향은 그들이 정할 수 없게 돼 있다. 언제나 정치 우선이기 때문에 옳은 정책도 왜곡되거나 과장되어 실효성을 상실한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하면 정치적 의도를 맞추면서도 정책의 기대치를 뽑아내느냐가 양심있는 경제관료의 고민거리가 된다.

 

여담이지만 진념 부총리(나는 다소간 그의 인품과 식견을 알고 있다)의 해명성 설명을 볼 때마다 동정이 간다. 아무리 우수한 인재도 통치자 혹은 파워코어에 따라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죽을 쑤기도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엔 절대란 없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순사를 했으니 안돼, ‘군사독재’ 때 한 자리 한 것도 안돼…. 농을 하자면 일제시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안하고 식민지에서 밥먹고 산 자도 수상하다, 또 군사독재시대에 민주화투쟁 안한 것도 정의감이 없는 자들이다…, 이런 식이 된다.

 

김정일집단은 '인민'을 핵심분자, 동요분자, 적대분자 등으로 분류하여 여러가지 차등을 둔다고 한다. 이런 논리를 확대하면 적대분자들은 굶어죽어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통치하기 쉽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많은 ‘인민’을 굶어죽게 내버려뒀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조선왕조 시대에도 기근이 나면 국왕이 음식을 감하고 기우제를 지내며, 구황의 노력을 했다. 여기엔 최소한 도덕적 책임과 인의 측은함이 담겨져 있다. 김정일집단은 이것마저 없어보인다.

 

그렇다. 대북정책은 진정 인간적인 동포애가 기저가 돼야 한다. 거기에다 도덕적 감각이 충만해 있어야 한다. 이른바 대다수 북한동포를 외면한 채 ‘퍼주기’식 원조엔 동포애와 도덕관념이 빠져 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말을 거꾸로 하느냐고 펄쩍 뛸지도 모르지만, 나도 역설로 대답할 수 있다. 북한 인구가 전부 굶지 않을 만치의 식량을 보낸다면 무조건 동의할 것이다. 저들 지배집단이 하루에 네끼, 다섯끼를 먹지는 않을 것이니까. 조금 보내면 백성들한테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전기 역시 마찬가지. 군수공장 등에 우선적으로 갈 것이 뻔하다. 결국 김정일집단의 연명에 도움이 될 뿐일 것이다.

 

사회주의적이니 자본주의적이니 해서 이른바 색깔 논쟁, 이념갈등이 한창이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대결이 이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가.

 

친북세력은 이른바 사회주의적인 꿈을 김정일집단을 통해 실현시킬 망상에 사로잡혀 있으나 이 집단은 사회주의적도 아닌 무이념집단에 불과하다. 중국이 사회주의를 하고 한국이 자본주의를 하는 것이 아시아의 불가사의라는 농담이 있다. 이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쟁론은 무의미하다. 남는 것은 인간다운 삶, 도덕적 수준, 문화적 성숙, 환경 복지의 균형 같은 것의 비교가 있을 뿐이다.

 

 

■집권층들도 잘 모르는 '통일'과 '개혁'

 

일류국가도 경제적, 군사적 우위만으로 따질 수 없는 '세계화'가 진행 중이다. 가령 스칸디나비아 3국을 사회주의적이니 뭐니 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국제 사회에서 자리를 굳히고 존경을 받는 만만치 않은 국가가 되기 위해선 인격의 경우와 같이 돈만 많다고, 힘만 세다고 휼륭하게 되지 않는다. 그밖의 여러 정신적 가치를 갖추어야 인격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이 나라의 엘리트집단은 개혁과 통일의 기치를 앞세우면서 무작정 따라오기를 바라고 있다. 어떤 개혁이며 어떤 통일을 지향하는 것인지 당사자들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속으로 한자락을 접어두고 ‘적대계층’의 기를 죽이는 데 골몰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현안인 언론문제도 크게 보면 이러한 대목과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탄압이다, 법 정의의 실천이다 하는 따위의 말싸움은 부질없는 일이다. 형식논리를 무기로 삼으면 탈세 비리에 대한 법의 집행이다 하면 그저 그만이다. 발행인을 구속하느니 마느니하는 것은 사태의 핵심이 아닌 것이다.

 

왕조 때도 인이 빠진 법 집행은 될수록 피하려고 했고, 또 그래야만 민심을 얻었다. 은감불원이란 말이 있다.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귀감(본보기)를 먼데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정치가 왕조시대만도 못한대서야 되겠는가? 파워코어에 끼지도 못하면서 ‘적대분자’ 공격에 신명이 난 듯한 미디어들과 자칭 개혁적 지식인들의 모습처럼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없다. 또 이미 기득권층에 속하면서도 자기는 빼고, 기득권자 비난에 핏대를 올리는 장면처럼 나를 웃기는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