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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진보했는가? 그렇다!

이강기 2015. 10. 23. 10:34

20세기는 진보했는가? 그렇다!

 

이승우(푸른사람들 회장) 

 시대정신 [2000 05-06월] 제10호

 

 

 

1.

새로운 천년의 입구를 통과한 지도 몇 달이 흘렀다. 새 천년은 그 출발점에 섰던 인간들이 꿈꾸었던 장밋빛 희망을 실현시켜줄 것인가. 아니면 공포로 가득한 나락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희망과 공포라는 두 가지 상반된 단어 모두가 새로운 전환에 처한 인류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20세기 인류 최대의 발명품이라고 일컬어지는 인터넷 혁명은 과거 그 어느 시대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속도로 세계를 연결해가고 있다.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한낱 미약한 존재로만 여겨졌던 인간이 과학기술의 발전을 앞세워 자연을 개척하고 수천 년에 걸친 신분적, 계급적 사회제도를 민주주의화하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추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나아가 신의 영역으로만 치부되었던 인간을 비롯한 생명의 영역에 대한 규명에 도전하고 있다. 복제양 돌리와 유전자 지도의 완성 등 생명공학의 급속한 발전은 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인류의 밝은 미래와 행복한 앞날을 보장할 지는 그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급속한 변화에 따른 속도감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고, 발전의 속도에 뒤쳐진 인간의 의식은 윤리적, 도덕적 문제와 정신적 아노미 상태를 심각하게 우려하는 또 한편의 목소리를 낳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만사를 판단할 잣대는 무엇인가. '앞날을 알고 싶으면 과거를 보라'는 말처럼 결국 항상 그렇듯이 과거 역사의 진행과정과 방향을 기준 삼아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인간에게는 가장 익숙한 방식일 터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살아온 지난 20세기를 총괄하여 종합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미루기 어려운 과제가 되어 버렸다. 물론 불과 얼마전의 일에 대해 온전히 객관적 평가를 내리는 것은 힘든 일이나 오늘날의 문제와 인류 앞에 나서는 새로운 과제들은 어차피 20세기로부터 흘러온 것이기 때문이다.


2.

지난 한 세기 동안 인류가 겪었던 비극적 경험들 중에 대표적인 것들을 열거한다면 그 앞자리에 거론 될 만한 것들은 무엇일까. 전쟁을 든다면 무엇보다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중국의 국공 내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 발칸반도의 내전 등이 손꼽힐 것이다. 르완다의 인종학살, 보스니아의 인종청소, 캄보디아 크메르루즈에 의한 대량 학살 등등 인종과 이념의 차이를 앞세운 수많은 살상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KAL기 폭파, 오클라호마의 폭탄테러를 비롯한 그 수를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테러도 20세기인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기아, 수년간 수백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북한의 참혹한 식량난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것들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반복돼서는 안될 것들이지만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반면에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 정권의 수립, 중국혁명과 거대 중국의 세계무대에의 등장, 인도를 비롯한 제3세계 나라들의 독립과 민주화로 향하는 거대한 흐름,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동구의 민주화혁명 등은 사람들의 가슴에 기대와 격정을 한껏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그 역사적, 객관적 평가를 내리기에는 주은래의 말처럼 '아직 시간이 이르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3.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는 20세기를 포괄적으로 다룬다는 것과 그 양이 방대하다는 점에서 [20세기의 역사]와 비견된다. 그러나 역사해석의 토대가 되는 관점이 이 책과 사뭇 다르다. 즉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서의 신념과 현실사회주의의 괴리와 붕괴에 괴로워하는 홉스봄의 20세기는 어두운 측면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냉전의 종식이 곧바로 평화로 이어지지 않고, 구 사회주의권과 과거 제3세계로 불리던 지역들이 인종 및 민족 갈등의 전쟁과 무정부상태를 연출하고 있는 현상들을 목도하면서 내리는 21세기에 대한 전망 역시 잿빛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홉스봄의 눈에는 세계는 외형적으로는 하나의 지구를 지향하는 듯이 보이지만 선진자본주의와 나머지 세계의 간극은 더욱 더 벌어져 가는 것으로 파악된다.

언뜻 보기에 이러한 현상적 분석은 미래를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거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동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러나 홉스봄의 선의와는 무관하게 실제로 역사를 창조해 가는 인간(계급적 범주에서가 아니라)의 견지에서 보면 인간의 제반 행위 - 결단, 결심, 의지, 노력, 운동 등 - 를 가장 주요한 동인으로 역사를 보지 않는 한 홉스봄의 판단에는 중대한 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있을 수 있는 인류의 교만에 반성적 사유를 촉구하는 한에서는 홉스봄의 말에도 귀 기울일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어차피 창조란 모험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적극적, 진취적인 사람들의 몫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극단의 시대]에 기본적인 동의를 표할 수 없는 것이다.


4.

그렇다면 우리는 20세기 전체의 흐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즉 20세기는 잘라 말해 진보했는가 퇴보했는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우리는 단연코 진보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즉 인류를 용광로 속에 넣고 수 천도의 온도에서 가열시키는 고통을 줄 것 같던 불행했던 퇴보의 역사적 사건들조차 실은 인간 하나 하나의 변화 발전과 진보를 포함한 인류의 점진적 진보에 비한다면 너무나도 작았던 사건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20세기는 외형적 격동 속에서도 틈틈이 꾸준히 진보해 왔다는 것이 보다 더 사실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과거가 곧바로 미래일수는 없지만 그런 연장선에서 21세기도 진보는 계속될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갖는다. 그리고 이런 낙관을 실현시켜줄 열쇠는 결국 인간들 스스로가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사실들을 계속되는 실증적 자료들을 통해 담담하게 제시하고 있다. 대표적인 몇 가지만을 살펴보자.

1900년대 초반 인간의 평균수명은 45세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재는 75세에 달한다. 산모사망률, 영아사망률은 급격히 감소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페스트, 천연두 등 무시무시한 전염병으로 손써볼 틈도 없이 죽어갔던 지난 시기의 아픈 과거를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일정하게 극복할 수 있었다. AIDS라는 신종의 질병이 인류에게 걱정거리이기는 하나 현재 의학발전의 속도를 놓고 볼 때, 이 역시 곧 완치 가능한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볼 수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는 마치 과거의 페스트와 마찬가지로 신이 내린 재앙으로 인류가 극복할 수 없는 질병이었던 데 비하면 그 해결의 속도는 무척 빠른 셈이다.

질병의 급속한 퇴치에 힘입어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20세기의 커다란 변화였다. 그러나 농업혁명은 아직까지 근절되지 않는 곳곳의 기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인류를 먹여 살리고 있다. 이러한 의학적, 물질적 발전은 그 어떤 기준으로도 인류사 전체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경이로운 것이고 비단 진보는 여기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1900년 초 영화는 걸음마 단계이고 라디오와 TV는 개발 중이었다. 비행기로 대륙을 여행한다는 것은 꿈에나 꾸어볼 수 있는 것이었다. 오늘과 비교해 보라. 더 부연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면에서 [21세기의 역사]는 각 부분의 집필을 맡은 26명의 필자 모두가 동일한 역사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20세기의 진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21세기 인류의 미래에 훨씬 낙관적이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다시 말해 인류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자신 앞에 주어진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또한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온 창조력을 보여줬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점이다.


5.

[21세기 역사]의 큰 주제의 하나는 세계화와 내셔널리즘이다. 그것은 책의 편성에서도 드러나는 바 적어도 유럽, 미국, 러시아 등 20세기 세계사를 주름잡았던 나라나 지역만이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여러 나라와 지역에도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세계사는 유럽만의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전 지구를 포괄하는 세계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화는 미국과 유럽만의 세계화가 아니라 전 인류의 세계화이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세계화라는 말 자체에 부정을 표현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인정한다해도 썩 달갑지 않은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또 어떤 특정한 국가, 세력, 문화가 결국에는 세계를 단일적으로 지배해 가는 과정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세계화란 인류의 자기 인식 범위와 능력범위가 넓어져 가는 데서 오는 진보의 소산이다. 단지 아직 강대국의 영향력과 주도력이 높은 관계로 생기는 부정적 현상이 없을 수 없겠으나 이는 어차피 과도기일 따름이다. 20세기 전반기와 오늘날을 비교해 보라. 또 모든 나라가 똑 같은 수준으로 동시에 발전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민족주의로 자신을 방어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일 뿐이다.


6.  

이 책은 일부 내용 중 우리 나라와 연관하여 주목해야할 두 가지를 써놓고 있는데, 이 부분을 살펴보자.

그 하나는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한국의 성공을 거론한 후 그 미래의 역할에 관한 의미 있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333쪽)

"양국은 사실상 무(無)에서 출발하였지만, 이제는 전 세계 소득의 15%, 전세계 무역의 10%를 차지하게 되었다. 양국의 인구를 합해봐야 기껏 전세계 인구의 3%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결코 보잘것없는 업적이 아니다.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부와 영향력을 행사할 것인지는 그들이 다음 세기에 물려줄 과제이다."

여기서 어떤 이들은 왜 하필 일본과 묶어서 이런 평을 해놨는지 못마땅해 할 사람들도 있으리라 여겨지지만 과거의 역사에 매이지만 않는다면 동아시아의 미래는 양국간의 관계가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임에 틀림없고 또 더욱 먼 미래 - 그러나 그렇게 먼 미래는 아닐 것이다 - 에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의 개념이 온전히 그대로 있을 리 없다. 보라! 오늘날 유럽은 하나의 나라로 간다. 이 속도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일의 내일 모습은? 다만 사족을 하나 단다면 경제적 발전만으로 세계의 중심적 역할을 하기란 더 이상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의 다른 과제가 새롭게 제기 된다고 하겠다.

다른 하나는 북한의 기아에 대한 언급이다.(500쪽)

"비록 기아는 전국적인 규모에서 일어난 참사였지만 악착스럽게 살아남으려는 북한 농민들의 비상한 노력으로 완화되었다. 기아가 자연재해 탓인지, 또는 식량부족이나 정책결정과정과 상관이 없는 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직접적인 원인은 김일성 정권에 있었다... 어쨌든 장기적인 기아는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닌 것 같다."

물론 그렇다. 그야 말로 살아남으려는 악귀 같은 노력이 대량 참사를 더 이상 저지하고 있다. 즉 초기에 배급경제에 익숙한 사람들이 대비책 없이 급격히 죽었지만 경험은 그들이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다만 그 형태가 서서히 죽어 가는 것으로 형태로 바뀌었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해결책은 이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즉각적인 체제 개혁과 개방이 단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다.


7.

사회발전 속도에 비해 사람의 의식의 변화발전은 못마땅할 정도로 느린 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의식에 비추어 보는 사회의 변화 속도에 불안해한다. 그 결과 자신의 의식과 비교하여 사회의 발전속도가 빠르지 않았던 과거가 더 좋았다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 현실은 부정적이다. 이는 역사를 보는 데도 투영된다. 그래서 역사는 진보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갖게 된다. 지금 자신의 삶은 역사의 진보에 따른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오늘날의 물질적, 사회정치적 삶이 얼마나 많은 선대의 시행착오와 좌절, 희생 속에서 이루어 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 발전된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20시기는 진보의 시대였다. 그것도 인류의 역사에서 결코 볼 수 엄청난 변화발전의 시대였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우리들 과거를 찬찬히 돌아보고 미래를 예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 것으로 새 천년에 다가올 문제가 모두 저절로 풀리는 것은 아니다. 그 간격을 메우는 일은 결국 인간들의 몫이다. 21세기가 인류사에서 또 얼마만큼의 진보를 이루어 낼 것인가는 21세기를 살아갈 사람들의 몫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