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0월9일 미얀마(舊 버마)의 수도 양곤(舊 랑군) 국립묘지에서 폭발물이 터져 全斗煥 前 대통령을 수행하던 공식수행원 17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사건은 분단국가라면 언제라도 있을 수 있는 불행한 일로 받아들여졌고 곧 역사 속에 묻혀
잊혀졌다. 북한의 또 다른 테러나 무력도발 등이 있을 때나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잠깐씩 등장할 뿐이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세월이라도 일단 지나고 보면 덧없이 짧게 느껴지는 것이 시간의 주술적인 힘이다.
건강하게 집을 떠난 충실한 家長(가장)이 돌아오지 않았다. 늘 자상하고 자랑스러운 배우자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유가족이 겪어야
했던 인생유전은 아픔을 넘어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닌 내가 당한 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픈 것은 바로 내
아픔이고 가장 힘든 일은 바로 내가 당한 일인 것이다. 그렇다고 어디 삶이 중단될 수 있는 것인가. 희생자들 대부분이 당시
40代 중반에서 50代 중반, 인생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장년의 나이었다. 희생당한 분들의 자녀들은 당시 어른이 되려면 창창한 세월이 필요한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미망인들 대부분은 사회경험이 많지 않았고 고위공직자의 아내로 반듯한 내조를 미덕으로 살아온 소박한 전업주부였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학업이 끝난 후 계속 직장생활을 했고 경제적으로도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살아왔던 나
자신도 남편을 잃고 어쩔 바를 모르는 여자일 뿐이었다. 서로가 절실하게 원해서 결혼을 했고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마다 않고 같이 갈 각오로
살아왔던 나도 家長으로서의 책임감은 바위보다 무거웠다. 무너지지 않고
살아 남은 이유 당시 나는 이름만 천주교 신자였지 별로 信心(신심)이 돈독하지 못했다. 그래도 절실하게
기도가 필요했던 그때에 내 머리 속은 꽉 막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단 한마디의 기도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때 왜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만드시고 가르쳐 주셨는지, 「성모경」이나 다른 성인들이 가르치신 기도문이 왜 필요한 것인지 처음으로 알게 됐다. 나는 그저 기계적으로 주기도문,
성모경, 그리고 남편이 생전에 가장 존경했던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을 외고 또 외었다. 사실상 몇 개의 기도문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간구가 함축되어 있어 다른 것을 더 요구하는 것은 사치이고 응석일 뿐이었다. 「그래, 10년만 바위처럼 살자. 그러고 나면
아이들이 자라겠지…」 아이들을 위해서, 아니 나 자신이 인간으로서 무너지지 않고 내 힘으로 서서 살아남는 것이 결국
아이들을 위하는 길이라는 다짐으로 처음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정말로 10년이라는 세월은 고맙게도 아이들을 내 앞에 어른으로 우뚝 서게
해 주었다. 10년 후 막내는 대학을 졸업하는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비로소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이후에도 계속된 아이들의 학업과 취업, 결혼 등의 고비마다 내가 혼자 겪어야 했던 기막힌 사연들이 있었지만 새 식구가 늘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이어지면서 어느덧 두 번째 10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다. 내가 40여 년간의 사회생활을 무사히 마친 것, 아이들이 適期에 자신들이 고른 배우자와
결혼한 것, 또 기다리기 전에 무사히 건강한 아이들을 낳은 것 같은, 순리대로라면 당연히 때가 되면 오는 인생사의 모든 일을 경이로운 기적같이
감사하게 될 만큼 내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어느덧 내 나이도 耳順(이순)의 중반에 들어섰다. 다소간의 개인적 차이는 있지만
이것이 「순국외교사절단」(그때 돌아가신 분들에게 공식적으로 붙인 이름이다)의 배우자들이 지내온 대개 비슷한 인생여정이었다. 물론 어떤 가정에는
더 힘든 일도 있었다. 식구들의 건강악화나 불의의 사고 등 보통 가정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겠지만 이미 무서운 일로 멍들고 부서진 가족들의
심신에는 「엎친 데 덮친 격」의 어려움이었다. 그래도 삶은 이어져 왔다. 「이렇게 살아지기는 하는구나」, 「참으로 용케도
버텨왔구나」하며 지난 20년을 살아남은 유가족, 특히 아이들을 어른으로 키워 낸 희생자들의 배우자들은 비로소 허하게나마 웃기까지 한다. 자신들이
늙은 것은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 남은 시간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벗어난 것이 참으로 대견하고 감사하다.
이 세월을 살아오면서 고비 고비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음덕을 느낄 때가 많았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私心없이 나라 일을 하다가 가신
분들을 기억하고 가족들을 도우려는 아름다운 인정이 살아 있다는 것도 큰 힘이 되었다. 원망도 회한도 다 쓸데없는 것. 인간의 의지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는 順命(순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던가. 잃은 것이 크면 조금은 배우는 것도, 때로는 깨닫는 것도 있게
마련이니까. 대한민국에서 공산당이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2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사회가 안팎으로 겪은 변화는
너무도 크기 때문에 우리가 과연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지를 의심하게 될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金正日이 최고통치자가 된 북한과 「金大中 정부」
이후의 남한과의 관계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에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정작 변화해야 하는 북한은 끄떡도 안 하고 있는데 남한의 對北정책은 너무도 앞서 가며 변화하고 있다. 아직도 國是(국시)를 반공으로
삼는 헌법이 엄연히 있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우리 사회에서 이제는 공산당이 활동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발언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튼튼하게 뿌리 내렸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것인지. 대통령이 의미하는 공산주의가 순수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를 말하는 것인지, 북한의
金正日 일당이 현재 자행하고 있는 폐쇄적인 민족주의, 개인숭배와 세습적인 독재의 주체사상을 말하는 것인지, 또는 그 두 가지를 혼돈하고 있는지
확실치 못한 것이 너무도 걱정스럽다. 국제사회에서 金正日과 북한의 평가가 어떤지를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지난 20여 년간
북한이 우리에게 수없이 저지른 테러행위나 무력도발은 누구라도 몇 가지씩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드러난 그들의 마약, 무기밀매,
위조지폐 제조, 개인이나 집단의 납치·살인 등의 끔찍하고 창피스러운 非行을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묵과할 수 있는가.
햇볕정책 이후 가진 남북교류에서 우리가 접해 본 북한 주민들이 정상적인 정신상태에서 사회생활을 해 온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었던가.
이산가족 상봉에서는 뼈에 사무친 그리움 끝에 만난 가족에게 『경애하는 지도자의 고마우신 은혜』를 들먹여야 하고, 종교의 자유도 없는 국가에서 온
사이비 종교인들은 말끝마다 정치선전을 입에 올려야 하는 딱한 처지를 우리는 불쌍히 여겨야 한다. 또 체육행사 때마다 대거
행차하는 미녀응원단(?)의 짙은 화장과 교태는 이름이 응원단이지 여성을 공공연히 性的(성적)대상물로 만들어 주의를 끌려는 의도다.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번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온 북한 응원단이 金正日 초상화가 비 맞는 것을 보고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흥분하고 울며 수거소동을 벌이는 것을 보고 너무도 그들이 가여웠다. 오죽 내부 상호감시가 심하면 저런
우스운 짓으로 점수를 따야 하는가.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언동을 바보도, 어린애도 아닌 멀쩡한 여대생들이 해야 하는 북한 사회의
非정상적인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직책이 사람의 됨됨이를
만든다지만…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은 그런 비정상적인 북한 사람들의 행태가 전혀 이상하게도, 딱하게도,
더구나 위험하게도 보이지 않는 대한민국의 정부와 일부 국민들의 정신상태이다. 「민족공조」라는 미명에 정말로 당장 핏줄이 당겨서 함께라면
지옥에라도 갈 수 있을 정도로 「코드」가 딱 맞아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아무 생각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눈앞에 벌어지는 구경이나 하자는 것인가.
생활고를 참다 못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탈출하는 인민의 수가 날로 늘어가는 나라, 일단 체포만 되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공포사회, 세계인권단체들이 그 실태를 집요하게 파헤치려는 정치범 수용소가 있는 나라, 이런 나라가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우리끼리, 민족끼리」 똘똘 뭉쳐서 굶어 죽어도 좋고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해도 좋으니 미국놈들을 다 몰아내고 살고 싶은 이상향인가.
나는 직책이 사람의 됨됨이를 만든다는 것에 믿음을 가졌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면 애국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국민의
편에서 나라를 반드시 지켜 주게 되어 있다는 것을, 국가의 고위공직자가 되면 역사의 심판을 받을 각오로 사명감을 갖고 나라만을 위해 일하다
죽기까지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왔다. 사실상 내 남편과 그 동료들이 이 나라의 고위공직자로서 그렇게 일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사회를 보고 너무도 참담한 생각이 든다.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일하다가 간 우리의
엘리트 공직자들을 조폭이나 저지를 수 있는 테러라는 방법으로 죽인 장본인 金正日과 손이 맞아 똑같이 조폭들이나 하는 방법으로 돈거래, 돈세탁을
해서 협상을 얻어 낸 우리의 전직 대통령, 남북한의 이해관계가 얽힌 국제회의에서 북한의 눈치를 보고 표결을 포기시키는 현직 대통령에게서 우리는
과연 애국심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밑에서 일하는 공직자들에게서 사명감을 바랄 수 있겠는가. 사람이 특정
개인에 대해 원한을 갖고 산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해도 자신의 인격이나 마음의 평화를 위해 할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인생의 끝자락에서 모든 일을 용서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평정하게 지니기를 노력하고 살아가야 하는 나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계속 내 눈앞에 나타나는 金正日의 얼굴과 그의 이름을 봐야 하는 것이 정말 힘들다. 더구나 그의 비위를 못 맞춰 애를 쓰는 우리 정부나
그에 동조하는 무리들이 판을 치는 우리 사회에서 노년을 마음 편히 보내기가 어려워진다는 사실이 정말로 슬프기만 하다. 그러나 내 개인의 감정이나
넋두리야 어찌되었건 대한민국이 이 지구상에서 떳떳한 국가로서 대우받으며 건재하고, 우리의 대대손손이 아름다운 이 땅에서 살 수만 있게 된다면
나는 아무런 여한을 갖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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