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시론]
DJ개혁의 본질을 말한다
◇오늘의
개혁이 어려운 것은 정부와 시장 어느 쪽도 제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양자 모두 새로운 시스템을 건설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신동아 1998년 11월호
지금의 위기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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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5년 임기 동안 대통령과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방법론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IMF의 구제금융을 받게 된 한국경제의 위기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와 관련된다. IMF위기에 대한 접근방법에 따라 그 대응방식도 다르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IMF위기로 표출된 오늘의 상황은 한국사회의 어느 한 부분, 어느 한 측면의 위기가 아니라, 사회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의 문제점들이 결합하여 빚어낸 총체적 위기의 결과라는 인식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위기상황은 김영삼정부의 경제운영방식 내지 정책의 실패나 「박정희식 발전모델」이 만들어낸 구조적 문제 어느 하나에 원인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결합돼 나타난 총체적 체제실패의 문제로 이해된다.
상황에 대한 이러한 진단이 김영삼정부의 경제행정의 실패, 이를 관장했던 경제정책 최고결정자들의 실패에 1차적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축소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총체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단순한 정책실패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 하나의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는 데 있다.
경제행정이 기반을 두고 있는 사회경제적 인프라, 이를 운영·관장하는 행정관료의 이데올로기, 국가의 경제운영 방식과 기본정책 및 정책결정의 방식, 사회의 이익을 대변하고 집합적 공공정책을 결정하고 이를 법제화하는 정당과 의회 등 넓은 의미의 정치 구조와 기능에서 오늘날의 위기를 초래한 문제점들이 오랫동안 누적돼 왔기 때문이다. 또한 구조적 문제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박정희식 발전모델」에 집착했던 것은 정부부문 또는 공적영역의 경제 테크노크라트들에게만이 아니라 사기업부문, 특히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재벌기업들도 마찬가지였고 지금까지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사회의 기득이익에 손상을 입히고 불이익을 초래하는 의제까지를 포함하는 폭넓은 정책대안들이 정치와 시민사회에서 자유롭게 논의되고 조직될 수 있는 공론과 토론의 장(場)이 허용되지 않았던 상황 또한 IMF사태로 표출된 정책실패를 초래하게 했다.
다시 말해 오늘의 위기는, 절차적·형식적 수준에서는 민주화됐지만 실질적·내용적 수준에서는 여전히 반대와 비판적 대안이 허용될 수 없는 권위주의적 구조를 온존시키고, 토론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발전을 가로막았던 「획일화 내지는 획일성의 정치」가 유지되어온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다.
금융 경제 정치 행정 모든 영역을 가리지 않고 만연된 정경유착, 부정부패, 무책임, 비리 등은 지난날의 박정희식 발전모델을 통하여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것들이다. 이것은 박정희식 발전모델이 초창기에 보여주었던 역동성이 소진된 후, 유신체제를 기점으로 정치의 권위주의화와 체제의 경직화가 배태하고 누적시켰던 부작용과 역기능들이다. 요컨대 IMF체제의 위기 이전에 이미 구(舊) 발전모델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따라서 IMF체제가 도래했을 당시의 상황은 단순히 「정부의 실패」만이 아니라 「시장의 실패」라는 양자 모두의 실패로 집약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오늘의 개혁이 어려운 것은 정부와 시장 어느 쪽도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양자 모두 새로운 시스템을 건설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는 데 있다. 또한 특정 부문의 정책실패를 바로잡는 부분적인 수준에서의 개혁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사회가 기초하고 있는 인프라 전체에 대한 대규모 수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총체적 개혁을 통하여 새로운 국가운영모델, 새로운 발전모델, 새로운 사회구성원리를 발전시키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근대화의 재조정ː개혁의 거시적 시각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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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김대중정부의 역사적 위상을 근대화라는 거대한 사회변화의 연장선 위에 위치시킴으로써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좀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이래 지난 53년 동안, 그리고 비록 분단된 상황에서라 하더라도 최초의 근대국가를 세운 이래 지난 50년 동안 우리는 세 수준에서의 근대화 프로젝트, 즉 근대국가의 건설, 산업화와 경제발전, 민주화를 위해 숨가쁘게 달려왔다. 우리보다 앞선 제1, 제2세대의 근대국가들이 길게는 2세기 짧게는 1세기 이상에 걸쳐 이룩한 세 수준에서의 근대화의 거대한 변화를, 제3세대의 근대국가에 속하는 우리는 불과 반세기만에 한꺼번에 실현하고자 숱한 난제들과 씨름해 왔다.
이러한 압축적 근대화프로젝트의 추진이 외양적으로나 양적인 수준에서 빠른 발전을 이루어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나 질적인 수준에서 볼 때 그러한 양적인 성장은 사회의 전반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더 큰 부작용을 잉태했고 그 결과 비정상, 권위주의, 혼란, 사회의 분열과 불안정을 파생시켰다. 분단된 국가건설은 여전히 민족문제를 미완으로 남겨두면서 서로에 대한 적대의식과 폐쇄적 권위주의를 남북한 각각에 안착시켰다. 속도전을 방불케 하는 고속성장으로 실현된 박정희식 개발독재모델은 권위주의적 국가와 재벌이 주도하는 시장경제의 조합을 근간으로 하는 경제운영방식을 정착시켰으며, 테그노크라트의 발전이데올로기에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전체의 제도와 의식, 관행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한국의 민주화는 절차적 수준에서 빠른 진전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 산업화가 초래했던 지역간 불균등발전과 정치적 소외의 심화로 인해 지역갈등을 축으로 한 정당체제와 정치경쟁이 구조화되는 것을 동반했다. 요컨대 압축적 근대화 추진은 동시에 그것이 배태한 부작용과 역기능에 한국사회를 속박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한국사회는 이제 압축적 근대화의 성과에 바탕하면서도 그 부작용과 역기능을 해소해야 하는 과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 다시 말해 남북한이 적대적 상호의존관계로부터 화해와 평화, 공존을 정신으로 하는 협력적 상호의존관계로 전환하는 문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조합을 독트린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와 경제운영의 원리를 실현하는 문제, 지역갈등을 축으로 분할되고 비합리적 정서가 지배하는 정치를 극복하는 문제, 실천이성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의 추진을 통해 21세기의 시대적 상황이 요구하는 새로운 국민형성(nation-rebuilding)을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개혁의제들, 즉 남북간의 평화공존, 민주적 시장경제에 의한 개발독재모델의 대체, 국민 형성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민주화는 근대화의 재조정을 위한 거대기획의 내용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반세기동안 추구해왔던 근대화 모델의 수정과 방향전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압축적 근대화가 동반한 비정상과 역기능을 해소하려 한다는 점에서 한국사회가 정상화를 실현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라고 이해될 수도 있겠다.
남북관계에서 근대화의 재조정은 더 이상 적대적 대결이 아닌 평화와 화해의 정신에 의해 새로운 남북관계로 전환하는 과제를 담고 있다. 경제운영원리에 있어서 그것은 경제성장 그 자체를 제일의 목표로 삼고 그 과정에서 사회의 모든 자원이 하나의 중심으로 집중되고, 그럼으로써 한 부문을 위해 다른 부문의 억압과 희생, 소외를 허용했던 체제로부터 균형발전과 복지와 형평, 대중의 시장참여와 시장경쟁의 공정성이 실현되는 체제로의 전환을 담고 있다.
더욱이 이제는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은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다. 지금부터 한국사회는 저성장과 고실업에 대응하는 새로운 발전모델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이른 것이다. 민주화 차원에 있어서 근대화의 재조정은 형식적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정치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민주주의의 운영내용상의 변화를 만들
어내야 할 과제를 담고 있다. 이는 지역으로 분열된 한국사회를 재통합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통하여 한국사회를 재통합해야 한다는 문제가 사회의 모든 갈등을 어떤 종류의 총화체제로 흡수, 통합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민주주의는 일정정도의 갈등을 전제로 하여 작동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한낱 어떤 종류의 전체주의나 권위주의로 떨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국민 형성은 우리사회를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보편적인 규칙과 규범을 확립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갈등이 사회적으로 표출되고 정치적으로 타협되고 해소될 수 있는 정치적 제도와 사회적 규범의 체계를 통하여 자율적인 각개의 국민·시민과 다양하고 갈등하는 이익들이 연계되고 통합되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와 사회에 있어 공정하고도 평등한 참여를 전제로 한다. 민주주의가 갖는 이러한 평등과 사회정의, 공정성의 원리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집중현상과 양립하기 어렵다.
따지고 보면 한국정치를 지배하고, 한국사회의 통합을 가로막으면서 이를 깊숙이 분열시키고 있는 지역주의적 현상은 사회 모든 수준에서의 가치의 집중현상으로부터 파생된다. 이때 정치영역은 이 가치배분체계의 최상층에, 그리고 그 아래로 경제 사회 문화 등이 위계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치권력의 향배는 사회 여러 수준에서 특정의 그룹, 특정의 지역, 특정의 학연이 가치의 수용을 위계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계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정치에서 지역주의 현상은 이러한 구조를 배경으로 재생산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조에 대한 치유방법은, 일찍이 로버트 달이 민주주의를 정의하였듯이, 가치의 배분이 다층적이고 다원적으로 병립하는 다두체제(多頭體制:polyarchy)의 발전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가치와 권력의 일원주의(一元主義)하에서 지역주의는 결코 극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근대화의 재조정을 이루는 개혁과제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수순이 추가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계로의 개방화를 말한다. 일차적으로 이는 IMF위기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부과하는 과제에 의해 그 계기를 맞게 됐다.
세계로의 개방화는 폐쇄적 한국사회를 개방적인 것으로 전환한다는 말이다. 만약 경제시장의 영역에서만 개방화의 의미를 찾는다면 오늘의 경제란 일국의 국경을 넘어서는 것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시장화 그것은 곧 세계로의 개방화를 의미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때 세계로의 개방화는 시장의 자유화나 시장의 개방화를 훨씬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무엇을 폐쇄에서 개방으로 바꾼다는 말인가? 그것은 시장의 개방을 포함하여 문화의 개방, 외국인과 외국적인 것을 국내로 수용하는 것, 그리고 우리 국민의 의식과 생활태도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자국중심의 폐쇄성을 세계적인 것을 향하여 열린 마음과 자세로 바꾸는 것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쌍방향의 개방이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밖으로 나가는 문제, 한국의 상품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는 것, 외국으로 나가 그것을 배우는 것, 또 외국의 것을 수용할 경우 외국의 문화만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익숙한 편이었다. 그러나 밖의 것이 우리 속으로 들어와 의식과 생활태도를 포함하여 우리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허용하는 개방에 관하여 우리는 아직 적극적으로 사고해보지 못했다.
따라서 현재의 김대중정부가 지향하고 있듯이 민주화, 시장화, 평화지향적 남북관계의 구축, 세계로의 개방화는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개혁의 핵심적 방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또한 바람직한 선택이자 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발전모델ː국가 시민경제 시민사회관계의 시각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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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발전모델을 특징적으로 말할 수 있는 데는 여러 가지 요소와 측면이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국가중심주의는 그 핵심에 위치한다. 지난날 대부분의 시기에 있어서 정치체제는 권위주의였다. 시장은 존재하였지만 세계시장의 규범과 규칙, 경쟁과 투명성의 원리가 실현되는 시장으로서보다는 국가의 시장개입과 국가의 일방적 지원을 받는 재벌에 의한 시장독점과 왜곡을 특징으로 한 것이다. 경제의 지속적 발전과 사회분화는 시민사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구조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정치의 권위주의화 시기에 강력한 국가에 의해 시민사회는 억압되고 위축되었다.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의 우위는 잘 발전된 행정관료조직 및 이들과 연계된 여러 행태의 관변적 조직들을 통하여 확립될 수 있었다. 또한 국가와 시민사회, 재벌이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시장구조를 시민사회와 매개시켰던 중심적 메커니즘의 하나는 언론이었다. 이러한 구조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노동이나 사회의 저변층들의 요구는 대변되지 못하고 소외되었다.
따라서 정치적 수준에서 권위주의국가 중심의 구조에 대한 비판과 견제세력은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개발독재모델은 박정희정부시기 동안 일정하게 효율성을 보여준 바 있었지만 이내 역기능을 드러내게 되었다.
국가중심적 발전모델이 기능할 수 있었던 데는 또한 냉전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냉전은 정치적, 군사전략적 단위로서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국가와 지역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고, 그럼으로써 이는 국경을 넘어서 세계적 수준에서 영역을 확장하는 시장의 힘을 일정하게 제어하는 반대방향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냉전은 한 나라가 정치체제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나, 자국경제 중심의 보호주의나 경제적 민족주의를 추구할 수 있는 하나의 공간을 부여했다.
따라서 냉전과 개발독재모델, 냉전과 국가중심의 폐쇄성은 병존할 수 있었다. 이른바 아시아적 성장모델, 즉 국가―기업―금융이 유착관계를 통하여 고속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발전모델은 이러한 냉전이라는 국제환경하에서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한국판으로서 「한국주식회사(Korea Inc.)」와 같은 용어 역시 이러한 정황하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냉전의 해체와 세계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그러한 모델은, 「정실(情實)자본주의(crony capitalism)」라는 말이 나타내고 있듯이, 시장실패, 부정부패, 정경유착, 투명성의 부재와 같은 시장경제의 역기능과, 아시아국가들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을 표현하는 의미로 변화됐다.
새로운 발전모델은 단순히 국가중심적 모델을 시장경제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앞의 그림에서 나타나듯이 그것은 국가와 시장경제와 시민사회간의 관계와 기능을 구조적으로 재정립하는 것을 중심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구(舊) 모델에서는 각 영역을 표현하는 그림의 크기가 상징하듯이, 국가의 영역이 가장 크고, 다음으로 시장경제 그리고 제일 적은 것이 시민사회로 각 영역의 크기는 힘, 내지는 영향력의 크기를 표현한다.
신(新) 모델에서는 세 수준 내지는 세영역을 나타내는 그림의 크기가 동일하다. 이는 세 영역이 힘의 균형을 갖는 것이고, 발전의 균형을 이룬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국가가 시장경제와 시민사회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민주화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민주주의체제하에서 국가는 시민의 평등한 참여의 권리가 실현되는 민주주의 제도와 절차에 의해 조직되고 구성되며 운영되는 공적 기구이다.
따라서 국가는 국민의 이익, 공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그 운영에 있어서 투명해야 하며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 국가가 민주주의와 공익성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조직과 운영에 있어서 「작고 효율적인 정부」라는 모토가 말하고 있듯이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의 핵심원리인 효율성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여와 평등, 공익성과 투명성은 물론이지만, 효율성 역시 민주국가의 조직과 작동원리의 중심에 놓인다.
국가가 민주적으로 개혁된다는 사실은 시장경제의 질전 전환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의 민주적 개혁은 곧 국가개입주의를 축소하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단절하는 개혁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경유착을 단절한다는 것은 곧 국가 내지는 정치의 영역과 경제 내지는 시장의 영역을 분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 모델하에서 경제와 시장은 정치와 국가에 위계적으로 종속되어 있었다. 두 영역의 분리를 상정하는 신모델하에서 국가―시장은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게 된다.
즉 국가는 시장경제로 하여금 시장의 자율성을 허용하고, 대신 민주적 시장경제의 질서를 요구하는 것을 중심내용으로 한다. 시장경제의 시각에서에서 볼 때, 특히 시장경제의 지배적 행위자인 재벌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 만큼 민주적 시장질서에 부응하는 재벌의 구조조정을 요구받는다.
국가―시장경제의 관계의 구조변화는 곧 기업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동안 정경유착이 가능하게 했던 폐쇄적이고 족벌적인 소유 및 경영구조가 세계적 규범에 일치하는 시장원리에 기초하도록 하고,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전환하기 위한 재벌기업의 구조조정이 안팎으로부터 매우 강력하게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시장경제간의 관계가 두 원리, 즉 시장 자율성과 민주적 시장경제로 규정될 때 경쟁과 효율성은 시장경제 고유의 상표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쟁의 공정성, 공공재의 창출, 거시경제 운용을 위한 자원의 배분뿐만 아니라, 시장경쟁에 진입하기 이전 시점에서의(ex ante) 교육,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후 시점에서(ex post) 사회적 약자나 열패자들을 보호하는 복지와 사회보장의 확대 등의 영역들은 시장경쟁 자체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민주적 시장경제의 영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민사회가 국가의 지배와 침투로부터 벗어나 자율성을 획득하고 활성화되는 것은 시장경제와 국가의 관계나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잘 발달하고 강건한 시민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민주주의를 생각할 수 없다. 시민사회가 활성화될 때만이 국가 내지는 정치영역의 민주화는 가능하다.
때문에 시민사회는 시장경제가 뿌리내리는 하부기반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더 민주주의의 하부기반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국가의 조직과 운영원리를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국가와 시민사회간의 관계의 형태, 즉 국가와 시민사회가 매개되는 정당, 자율적 사회단체, 기능이익집단 등이 빚어내는 정치의 여러 형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민사회의 정치적 표출이라고 할 수 있는 정당과 자율적 사회단체나 이익집단의 강건한 발전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하부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사회의 측면에서 참여의 요구는 그 성장의 필연적 표현인 것이다. 요구가 있기 때문에 정치체제로서의 국가는 참여를 수용하는 채널들을 제도화하고 확대함으로써 대표의 체계를 발전시키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민사회는 국가를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만들고, 시민적인 것으로 만들어 시민국가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구 모델하에서 시민사회는 강력한 국가에 의해 위축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재벌연합이 중심이 된 독점적 시장지배의 힘에 의해 공익이 형성될 수 있는 공적 영역을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분절화되었다.
결과는 시민의식과 공익정신의 발전이 억제됨으로써 사회는 사익(私益)이 제어됨이 없이 아노미 양상을 띠고 분출하는 각축장으로 변모되는 것이었다. 시민사회가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로질러 공익이 표출되고 형성되는 장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공익과 연결된 공동체정신과 공생주의(共生主義)를 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기본원리를 전통사회에서 원형을 발견하는 작은 공동체적 정신에서만 찾는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의 폐쇄적 소공동체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는 오늘의 현대사회와 세계화시대에 걸맞지 않는 과거 지향적이고 전통사회 지향적인 그 어떤 것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근래 일본의 사카모토 요시카즈(坂本義和) 교수가 즐겨 쓰는 「초국적(超國的)시민사회」라는 말을 듣는다. 여기에서는 그것이 공생주의적 내용을 담으면서도 보편주의를 포함하여 일국사회를 넘어 세계로 확대해 나가는 공간적 개방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시민사회는 소규모의 국지성(局地性)과 세계성, 공생성과 보편주의를 동시에 안는 대단히 유연하고 열린 개념이다.
신 모델에서의 시민사회는 정치의 영역에서 민주주의의 하부기반으로서 기능할 뿐만 아니라, 시장경제가 뿌리내릴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두 영역에서 모두 실천적 의미를 갖는다.
먼저 민주주의와의 관련에 있어서 시민사회는 참여민주주의를 확대함으로써 지역주의적 분할을 극복할 수 있는 영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게는 사적 이익의 연계망으로서 그들의 공동이익을 도모하는 소규모 공동체의 형성, 즉 기능적 이익집단들의 출현이다. 이들은 바로 시민사회의 기본단위가 된다. 넓게는 한 나라의 시민사회와 다른 나라의 시민사회가 연계하는 초국적 시민사회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미 수많은 NGO(비정부기구)의 출현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시민사회가 활성화되고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가 넓어질 때 한국사회의 시민들이, 권위주의적 산업화시기에 형성되고 민주화 이후 정치엘리트들이 동원하기를 좋아하는 지역감정의 포로로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국가와 시장경제의 양자 사이에서 지역과 지역을 가로지르는 시민사회가 성장하고 활성화될 때, 기능이익의 조직에 의한 것이든 실천이성을 갖는 자각된 시민들의 연합에 의한 것이든 한 나라의 정치공동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이 점에서 시민사회는 국민통합, 국민형성의 원리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영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시민사회는 시장경제와 관계를 가지며 상호 영향을 미친다. 이론적으로 시장은 정치와 사회의 기능과 같은 다른 영역의 개입이 통제된 조건하에서 자율성과 자기조정력 그리고 최적의 효율성을 실현할 수 있는 추상적 개념영역으로 접근되어 왔다.
그러나 현실사회에 있어서 시장은 다른 사회영역에서의 보완적 장치와 기능이 요구되는 결정과 교환의 메커니즘인 것이다. 만약 시장이 완벽하게 자족적이라면 국가의 경제적 역할이나, 경제정책, 산업정책과 같은 다른 영역에 의해서 가능한 정책이나 제도의 네트워크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자기조정적 시장메커니즘에 내재되어있는 여러 가지 위험에 대해 정치와 사회는 시장의 부정적인 효과를 제어하고 사회를 보호하는 여러 가지 정책과 장치들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때 시민사회는 시장경제가 개인의 이익추구를 극대화하는 가운데서 초래하게 되는 사회적 분절화와 갈등을 아우르는 사회적 응집의 원리를 핵심으로 한다. 시장 역시 사회체제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이는 잘 통합된 사회속에서 안착하고 뿌리를 내릴 수 있으며, 이때 비로소 시장은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사회가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이익추구 행위에 규범적 강제나 사회적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시민사회가 사적 이익을 뛰어넘는 장, 또는 충돌하고 갈등하는 사적 이익들이 공존할 수 있는 공동체정신과 공익정신을 발전시키는 장(場)으로서 기능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위로부터 부과되는 국가의 정책이나 사적 이익이 경쟁하는 시장경제를 통해서는 이러한 사회적 신뢰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창출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시민사회는 한편으로는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다양한 매개장치와 채널을 발달시킴으로써 참여민주주의의 확대에 기여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서 시민사회는 시민권의 확대로 실현되는 공생주의 내지는 공동체정신을 통해 시장경제가 안착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강화함으로써 시장을 인간화할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시민사회는 세계시장화가 가속화되는 세계화 시대에 있어서 그 중요성이 더욱 증대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의 세계화가 선도하는 시장의 세계화가 일국의 정치단위를 넘어 전지구적 차원에서 그 활동영역을 넓히는 것만큼이나 국가들간의 정치적 연대, 시민사회들간의 초국적 연대는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투기적인 단기자본의 유입에 대한 규제와 감시체제를 발전시키고 아시아지역에 있어서의 통화기금을 설치하는 등의 문제는 시장의 세계화에 대응하는 지역적, 또는 세계적 수준에서의 초국적 연대와 대응조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민주국가와 시민사회가 두 지주(支柱)를 이루는 민주적 시장경제를 통해, 우리는 세계시장화가 가져오는 긍정적인 발전의 동력뿐만 아니라 그것이 수반하는 부정적인 효과에도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이론적이고도 실천적인 근거를 마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더욱이 지금 아시아지역에서 과도한 투기성 단기자본의 과도한 이익추구행위가 몰고 온 위기가 전지구적 수준으로 확산되면서, 급기야는 글로벌금융체제와 세계경제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위기로 발전하고 있다. 클린턴에서부터 마하티르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여론은 이러한 금융위기에 대한 글로벌한 대응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데로 모아지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정황하에서 김대중대통령이 제시한 정치철학 가운데서 「민주적 시장경제」 라는 개념은 가공을 기다리는 보석과 같은 어떤 것이다. 이미 명시적으로 천명되고 정책으로서 구체화되고 있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개념은 국정운영의 기본철학을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영역에서의 민주주의 따로, 경제의 영역에서 시장경제가 따로 발전하는 것이 주는 효과보다도, 이 두 영역에서의 발전이 유기적으로 융합할 때 빚어지는 화학반응은 더 깊은 색조의 비전과 발전잠재력을 표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동아 199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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