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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국민과 함께 생각해 봐야 할 대통령의 동맹觀 - 2005.3.22 조선일보

이강기 2015. 10. 23. 10:52

[사설] 국민과 함께 생각해 봐야 할 대통령의 동맹觀

 


 

 

 

 

조선일보

 

입력 : 2005.03.22 22:38 38' / 수정 : 2005.03.22 22:39 13'


노무현 대통령은 22일 육군 3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이제 우리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균형자 역할을 해 나갈 것”이라며 “앞으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동북아의 세력 판도는 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대통령 발언의 배경에 대해 “한국이 한·미·일 남방(南方) 3각 동맹의 한 축을 담당했던 동북아 질서는 냉전시대에 만들어졌던 것”이라며 “우리가 언제까지 그 틀에 갇혀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냐”고 설명했다.

 


 

 

노 대통령 발언이 실제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이 발언의 파장은 최근 청와대가 ‘노무현 독트린’이라고 이름 붙였던 ‘주한미군의 동북아 투입 반대 선언’보다 훨씬 클 것이다. ‘동북아의 균형자 역할을 한다’와 ‘우리의 선택에 따라 동북아 세력 판도가 변화할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을 동북아 국제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면 한국은 한편엔 미국과 일본, 반대편엔 북한, 중국, 러시아가 대립하고 있는 구도 어느 쪽에도 갇혀 있지 않을 것이며 사안별로 협력할 진영을 선택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는 지난 50년간 한국이 생존기반으로 삼아온 한·미·일 3각 안보체제로부터 사실상 이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민감한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 있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일본, 그리고 실질적인 세계 2위 강국인 중국 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력들은 우리 실력만으로 상대하기엔 너무 버거운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이 상황에서 ‘그동안 크게 성장한 한국의 국력’을 내세워 이 지정학적 화산대(火山帶) 속에서 마치 한국이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용감한 발상이긴 하나 국가 존립(存立)의 면에선 위험천만한 시도다. “누구 편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한국의 선언은 “한국은 믿을 만한 동맹이 아무도 없다”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외로운 한국 처지를 고백하는 것으로 들릴 뿐이다.

 

“우리 선택에 따라 동북아의 세력판도는 변화할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은 얼핏 잘못 들으면 한없이 뿌듯한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냉정하게 헤아리면 그것은 한국을 둘러싼 강대국들에 ‘한국이 장차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를 일이니 한국을 잠재적 적(敵)으로 생각하고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일러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안보적 정체성이 심각하게 혼란을 겪고 있으며, 주변국들이 한국의 안보적 방황을 위험스럽게 주시(注視)하게 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최근 일련의 발언은 대한민국의 존립방식과 4800만 국민의 안위에 결정적 영향을 줄 중대 내용을 담고 있다. 2002년 대선에서 50년 동안 대한민국의 생존조건의 가장 중대요소였던 동맹 문제를 이렇게 가볍게 변경하는 일까지, 새 대통령에게 위임하게 될 줄 내다보고 투표장으로 향했던 유권자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대한민국의 안위(安危)와 4800만 국민의 사생(死生)에 직결되는 기존 동맹의 파기나 이탈 여부는 대통령 한 사람의 판단에 맡기기에는 너무나 중대한 문제다. 정부는 하루빨리 냉철한 이성을 되찾아야 하고 국민들은 그것을 독려하고 감독할 책무를 다해야 할 위중(危重)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