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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촉즉발! 한·중·일 역사교과서 전쟁 - 2005.3.20 뉴스메이커

이강기 2015. 10. 23. 10:53

일촉즉발! 한·중·일 역사교과서 전쟁

 

2005년 3월20일, <뉴스메이커>에서 퍼 옴

 

 

 

동아시아 패권을 다툰 '총칼 전쟁'이 끝난 지 100여년이 지난 지금 미래를 차지하려는 소리 없는 '역사교과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세계화 반발 따른 신국가주의 바람인가, 각국 우익세력의 반란인가




‘역사 교과서는 미래를 여는 창.’

동아시아의 역사교과서 문제를 다뤄온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역사교육연대)에서 강조하는 말이다. '미래의 창'인 역사교과서를 놓고 2005년 봄, 한-중-일 3국간에 일전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과 한국-중국은 근대사 문제로, 중국과 한국은 고대사 문제로 상대국의 역사교과서에 대해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일본에서는 우익사관을 훨씬 더 반영한 후소샤(扶桑社)의 새 역사교과서가 오는 4월 검정을 거친다. 동북공정 추진으로 한국은 중국의 역사교과서에 대해서도 고대사 서술과 관련해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1894년 청-일 전쟁, 1904년 러-일 전쟁 등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툰 과거의 전쟁이 끝난 지 100여년의 세월이 흘러 '미래'를 차지하려는 '역사교과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포성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총칼이 동원되지 않은 '소리없는 전쟁'은 벌써 시작됐다. 전문가들은 “과거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역사교육은 가까운 미래에 전쟁을 낳을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교과서에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역사교육연대 양미강 상임운영위원장은 “역사교과서는 역사인식을 재생산하고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이 투영되는 만큼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역사교육과)는 “어느 나라든 역사인식의 형성은 학교에서 이뤄지며, 그 통로는 역사교과서“라고 지적했다. 역사학 교수 출신인 강창일의원(열린우리당)은 “역사교과서 문제는 국가 구성원의 정신적 기반을 만들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가장 큰 정치“라고 말했다. 강의원은 역사교과서가 정신적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과서는 정신적 무기 될 수 있어“

일본의 우익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은 2001년 우익사관으로 기술된 새 교과서를 만들면서 “지금은 일부에서 비판이 있지만 이 교과서로 공부한 학생들이 성인이 된 몇십년 후에는 뜻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고 한다. 이들이 지원한 후소샤 교과서는 일본 시민사회의 반발과 주변국들의 항의로 일선 학교에서 채택에 어려움을 겪었다. 새역모는 4년 후를 다짐했다.

올해 '4년 후의 복수'가 시작되고 있다. 후소샤의 새 역사교과서에 대한 검정 결과가 4월 초 발표될 예정이다. 현해탄을 건너 후소샤 교과서의 역사왜곡 내용이 하나씩 들려오고 있다. 역사교육연대는 3월 11일 기자회견을 열고 후소샤 역사교과서 개정판이 '일제 식민지 통치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역사왜곡 내용을 담고 있다고 공개했다. 또한 일제의 창씨개명이 강제로 이뤄진 사실을 뺀데다 2001년 판에 기술된 '많은 조선인이 끌려갔다'라는 표현을 아예 삭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민(사회) 교과서에는 '독도가 국제법상 일본의 영토'라고 명시해 논란을 빚고 있다. 이 교과서의 화보에는 독도전경 사진이 실렸다.

여기에 더욱 기름을 끼얹은 것은 일본 당국의 반응. 일본의 나카야마 나리아키 문부과학상은 지난해 11월 “일본 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나 강제연행 같은 표현이 줄어든 것은 잘된 일“이라고 주장했다가 비판여론에 밀려 사흘 만에 공개사과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리아키 문부상은 지난 1월 “자학적인 교과서가 엄청나게 많다“고 발언, 또다시 물의를 일으켰다. 3월 6일에는 문부과학성 정무관인 시모무라 하쿠분 자민당 의원이 “근린제국조항이 생기는 바람에 자학사관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3월 4일 마치무라 노부타카 일본 외상이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은 곧 반일교육이므로 중국의 역사교육에 대한 개선을 구체적으로 요구하겠다“고 발언, 중국측을 자극했다.

중국의 역사교과서도 동북공정의 추진으로 우리에게는 최근 경계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교육부의 의뢰로 중국역사교과서 38종을 분석한 결과 18종의 교과서에서 한국 고조선과 고구려 등의 고대사 관련 조항이 전혀 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보고서에는 “이러한 양적인 축소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교과서의 지도에 보이듯이 과거 중국의 영토를 과장하여 표시하는 한편 고려 이전의 한반도를 마치 중국이 지속적으로 지배한 것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나타나 있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중국 근-현대사)는 “동북공정은 학자들의 연구가 이뤄지는 1차적인 과정이며 동북공정의 연구성과가 교과서에 반영되는 2차적인 과정을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동아시아에서 역사교과서 문제가 불거지는 것에 대해 '세계화'를 큰 요인으로 보고 있다. 1980년대 후반 동유럽의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이념 대립이 희석화되고 1990년대 들어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국가의 개념이 점차 희미해지면서 '신국가주의'를 주창할 필요가 생기게 됐다는 것이다.

김한종교수는 “이념의 대치되는 개념으로 국가의 이익을 강조하게 됨으로써 역사교과서에 대한 국가주의자들의 개입이 문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창일의원도 “글로벌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각국의 우익 세력이 국가와 민족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며 최근의 역사적 기류를 설명했다.

세계에서도 특히 동아시아라는 특정 지역에서 역사교과서 논쟁이 일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 몰락 이후 근대화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식민지(한국)와 반식민지(중국), 제국주의(일본)를 경험한 세 국가가 1945년 종전 이후 동-서 냉전이라는 새로운 틀로 대립구도를 형성, 제국주의의 폐해를 제대로 체험할 틈을 갖지 못한 것이 중요한 원인이 됐다. 승전국인 미국이 일본에서 제국주의 청산보다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반공 전초기지 건설에 더 큰 비중을 둠에 따라 가해국인 일본에서부터 제대로 된 과거청산이 이뤄지지 않았다.



중국 동북공정 성과 반영 주시해야

역사교과서 문제는 영토문제로 인해 더욱 예민한 사안이 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독도, 일본과 중국 사이에는 센카쿠열도(조어도),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간도문제가 서로 얽혀 있다. 영토분쟁의 교과서 반영 여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인 셈이다.

이런 역사교과서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시민단체가 앞장서고 있다. 2001년 4월 '일본교과서바로잡기 운동본부'로 시작된 역사교육연대가 좋은 사례. 한-중-일 시민단체와 역사학계가 중심이 된 이 단체는 3국간의 공동적인 역사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5월에는 3국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하는 한-중-일 공동 역사부교재를 발간한다. 양미강 상임위원장은 “3국의 시민단체와 학계 사이에 신뢰를 구축해 평화를 추구하는 역사의식을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역사교과서 문제를 일본과 한국-중국의 대립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전쟁세력과 반전평화세력의 대립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경우 양심적인 시민단체가 참여하고 있지만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우익화로 점차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 4년 전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 때보다 지금 더 여건이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강의원은 “일본에서는 역사교과서 문제에 정치인들이 개입하고 있는 만큼 역사학계에서뿐만 아니라 정치권도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양위원장은 “일본에서는 4년마다 교과서가 개정되는데 매번 비난만 퍼붓는 것에서 끝나면 되지 않는다“며 “국가적 차원에서 특정기구를 통해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위원장은 또 “국가가 할 수 없는 영역도 있는 만큼 3국의 시민단체는 시민단체 나름대로 역사인식의 공유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호우기자
hou@kyunghyang.com]



역사의 ‘한 장면 다른 시각’

한-중-일 역사교과서 엄연히 존재하는 ‘해석의 차이’


중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 문제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과 중국, 일본의 국사교과서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교육인적자원부가 펴낸 ‘국사‘, 중국 인민교육출판사가 출간한 ‘중국역사‘(연변교육출판사 번역), 일본 도쿄서적의 ‘새로운 사회역사‘ 등 한-중-일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중학교 국사교과서를 통해 차이점을 알아봤다. 일본의 경우 2001년 역사왜곡으로 문제가 된 후소샤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도 포함했다.



한반도에 관한 첫 논의 한국 국사교과서는 한반도 최초의 국가를 고조선으로 본다.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면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등장한 부족을 단군이 통합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이다. 건국 시기는 명시돼 있지 않지만 기원전 5세기 지도에 고조선이 표시돼 있다.

중국과 일본측 교과서에는 고조선에 대한 내용이 없다. 중국 교과서의 지도는 한의 영토를 현재의 휴전선 부근까지 표시했으며 진시황이 건설한 만리장성을 현재 함경남도 부근까지 그렸다. 일본측 지도에는 한나라의 영토가 현재의 충청북도 지역까지 표시돼 있다. 이는 한이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설치한 한사군을 감안한 것이다. 일본 교과서 연표에는 한국 역사의 시작을 낙랑군과 고구려로 보고 있다. 고조선에 대한 설명 없이 멸망 이후의 상황을 전한 까닭에 한반도가 처음부터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한국측에는 한사군에 대한 내용이 없다. 고조선이 사라질 무렵 부여와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이 세력을 키웠다고 적혀 있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 일본 도쿄서적의 교과서는 가라(임나) 지역을 일본이 지배했다고 설명한다. “일본은 백제, 가라 지방의 나라와 연대해 고구려, 신라와 싸웠다. 일본왕은 5세기에 조선 남부를 군사적으로 지휘하는 권리를 중국 황제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몇번이나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다. 교과서는 편지 내용까지 소개하며 6세기쯤 한반도에서 백제와 신라가 세력을 강화했고, 일본은 한반도내 세력을 잃었다고 설명한다.

후소샤의 교과서는 더 구체적이다.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백제는 일본에 구원을 요청했다. 4세기 후반 일본은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출병했다. 일본은 한반도 남부의 임나 지역에 거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은 백제를 도와 고구려와 격렬하게 싸웠다. 6세기가 되자 고구려가 쇠퇴하고 신라와 백제의 국력이 커졌다. 562년 임나는 멸망해 신라의 영토가 됐다.‘ 교과서에서 임나로 칭한 국가는 가야다. 후소샤 교과서는 또한 ‘고구려가 야마토 조정에 접근했고 신라와 백제가 일본에 조공했다. 삼국이 견제한 결과였다‘고 소개한다.

중국과 한반도의 전쟁 한국 국사책은 살수대첩을 소개하며 수와 고구려 간의 전쟁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하지만 중국 교과서는 ‘수양제는 100만에 달하는 병사를 뽑아 고구려에 대한 전쟁을 계속 도발했다‘고 간략하게 설명한다. 전쟁 결과에 대한 설명은 없다. 중국 교과서는 수양제가 폭군임을 드러내고 실정으로 인해 수왕조가 멸망했음을 설명하며 전쟁도발을 예로 들었을 뿐이다.
한국 국사책은 이후에도 계속된 중국 왕조의 한반도 침입을 상세히 적었지만 중국 교과서는 이런 내용을 담지 않았다.

발해는 중국 역사? 중국은 발해를 중국 역사로 본다. 7세기말 말갈족의 수령 대조영이 여러 종족을 통일하고 정권을 세웠다. 뒤에 당현종은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했으며, 이때부터 국호를 발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국은 발해를 한국사로 본다. 교과서는 ‘발해의 주민은 주로 고구려인(지배층)과 말갈인(피지배층)이며 발해는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에 고구려와 고구려왕으로 칭해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했다‘고 적었다. 일본측 교과서에는 발해에 대한 설명이 없다. 지도에 발해 명칭이 등장하긴 하지만 제3국으로 표시돼 있다.

왜구 14세기말 고려는 왜구의 피해를 입었다. 왜구는 쓰시마섬에 근거를 둔 해적으로 일찍부터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했다. 이성계나 최영 등 무인세력은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며 성장했다. 조선 초기에는 수군을 강화해서 왜구의 노략질을 막고 세종 때에는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섬을 토벌했다. 그 뒤 일본이 평화적인 무역관계를 요구해 부산포 등 3포를 개항했다.

중국도 피해를 본 것은 마찬가지다. 교과서에는 ‘원말명초에 일본의 사무라이, 상인과 해적이 중국의 간상배와 결탁해 중국 연안을 침략했는데 주민들은 이들을 왜구라고 불렀다. 명조 중기에 왜구의 피해가 심해 명정부는 척계광이라는 인물을 파견해 왜구를 치게 했다. 그가 훈련한 척가군은 왜구와 싸웠다“고 기술되어 있다.
일본측 시각은 다르다. 도쿄서적판 교과서는 ‘명나라는 건국 초기 왜구의 단속을 일본에 요청했다. 이에 일본 장군은 왜구를 금지하는 한편 명과 무역을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왜구에는 일본인이 아닌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후소샤판 교과서는 왜구에 조선인도 다수 포함돼 있으며 조선도 명과 마찬가지로 왜구의 금지와 통교를 요청했고 막부가 이에 응해 무역이 시작됐다고 적었다.

임진왜란 뒤 국교재개 한일 교과서는 임진왜란을 대체로 비슷하게 서술했다. 그러나 국교 재개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르다. 한국 교과서는 일본이 조선에 사신을 보내 조선인 포로를 데려온 뒤 다시 국교를 맺었다고 적었다. 일본의 요청을 받고 건너간 통신사는 극진한 대우를 받았고 그들이 다녀간 뒤에는 조선의 문화와 풍속이 퍼졌다고 한다.

도쿄서적 교과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 강화가 체결돼 장군 교체 시기마다 400~500명의 사절(통신사)가 오게 됐다고 적었다. 이어 일본에 복종하던 류큐(현재 오키나와)도 국왕이나 장군이 바뀔 때마다 막부에 사절을 파견했다는 점을 적어, 조선을 낮추는 듯한 인상을 줬다. 한편 중국 교과서에는 임진왜란에 대한 내용이 없다.

청일전쟁 한국측은 청일전쟁을 일본이 일으켰다고 본다. 동학농민운동으로 다급해진 정부가 청에 원군을 요청했는데 이 틈을 이용해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보냈으며 농민군은 외세의 개입을 막기 위해 해산했다. 정부는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군은 궁궐을 침범하고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중국 교과서는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일본 해군이 조선 황해에서 청의 수송선을 습격하자 청 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이다. 중국 교과서는 자보귀 등 많은 청군이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나 핍박을 받아 시모노세키조약에 조인했다고 적었다. 조약에서 요동반도 등을 일본에 건네고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 등을 인정했으나 조선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항목은 싣지 않았다.

일본 교과서는 발발 이유는 없이 단지 청일전쟁이 시작됐다고만 적고 있다. 조선에 진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도쿄서적판은 ‘구미열강의 아시아 침략이 강화되는 가운데 조선에 진출하지 않으면 일본의 장래가 위험하다‘고, 후소샤판은 ‘일본을 향해 대륙에서 하나의 팔처럼 돌출한 조선이 적대적인 대국의 지배에 들어간다면 일본의 자국방위가 곤란해진다고 생각했다‘고 합리화했다.

한일합병 한국 교과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고종황제의 거부에도 을사조약을 발표했다고 적었다. 뒤이어 한국측의 저항을 6페이지에 걸쳐 설명한다. 일본의 도쿄서적판은 1905년 외교권을 빼앗기고 1907년 고종황제가 퇴위되고 1910년 한국을 병합한 것을 서술한 뒤 한국내 민족적 저항운동이 퍼졌다는 점도 적었다. 병합 뒤에는 토지를 빼앗기는 등 다양한 경제-사회적인 차별을 받았다고 적었다. 하지만 후소샤판에 따르면 조선이 외국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는 근대국가가 되는 것이 일본의 안전에도 중요했기 때문에 일본은 조선의 개국 뒤 근대화를 도와주려 했다. 하지만 청의 반대로 실패했고, 결국 한국을 병합하는 것이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어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합병 뒤 일본은 조선에서 철도-관개시설을 정비하는 등 개발을 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피해가 발생했다고 적었다. 일본 교과서에는 3-1운동에 대한 내용은 실려 있지만 독립군의 무장독립전쟁 등은 없었다.

일제의 만행 일제하의 피해에 대해서 한국과 중국측은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한국측은 광산이나 공장, 전쟁터에 끌려간 남성 뿐 아니라 근로보국대, 여자근로정신대, 군대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에 대해 설명하는 등 일제의 수탈을 설명했다.

중국측은 피해 상황을 상세히 적었다. 대표적인 것이 난징대학살이다. 난징 주민은 사격연습이나 창격의 대상이 됐고, 생매장 당하는 등 30만명 이상이 학살당했다고 적었다. 이와 함께 생매장 당하는 사진을 실었다. 마루타로 유명한 세균전 부대의 활동도 사진과 함께 싣는 등 일제의 잔인한 행동을 구체적으로 전했다.

일본 교과서는 이런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도쿄서적판은 창씨개명과 지원병 제도를 사진과 함께 설명했지만 다른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난징대학살을 일본군의 난징점령과정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건으로 보며 ‘대량‘ 혹은 ‘다수‘라는 표현을 썼다. 후소샤판은 태평양전쟁을 대동아전쟁으로 미화하고 있다. 아시아를 구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한다는 전쟁 초기, 일본의 승리는 동남아시아인에게도 독립의 꿈과 용기를 북돋았다는 것이다.

한·중·일의 8·15 한국 교과서는 광복을 ‘연합국의 승리가 가져다준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우리 민족이 희생을 무릅쓰고 일제에 항거, 전개해왔던 독립운동의 결실‘이라고 적었다. 국내 독립운동, 중국 등지에서의 항일무장투쟁 등이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측의 평가도 비슷하다. 1945년 8월 미국은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파견했을 때, 모택동이 대규모 공격을 펼친 결과라는 것이다. 8년간의 항일전쟁을 거쳐 중국인민은 마침내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일본측은 전황의 악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참전이 항복의 계기인 것으로 적고 있다.

한국전쟁 한국 교과서와 일본 교과서는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으며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다가 휴전회담이 성립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중국 교과서는 발발 이유 없이 전쟁이 시작됐다고 적었다. 전쟁 시작 뒤 미국이 유엔군을 지휘해 조선을 침략했으며 38선을 넘어 중국 변경에 쳐들어와 중국 안전을 위협했다. 북한은 중국에 군대원조를 요청했다. 북한군과 중국군은 한반도 북부 영토를 수복했으며 이들의 완강한 반격으로 미국 침략자는 부득이 ‘정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정재용기자 jj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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