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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념은 죽었다.
오늘은 인기 없는 강연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진보주의자와 함께 있으면 졸지에 극우주의자가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보수주의자와 같이 있으면 극좌로 몰리곤 한다. 오늘 이 자리는 진보
쪽에서 마련해주었으므로, 나는 극우주의자로 몰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일부 내용이 귀에 거슬리더라도 인내해주면 대단히 고맙겠다. 그 인내의
결과까지 참을 수 없거나 형편없는 내용은 아닐 것이다.
나는 경제학자다. 소위 재야 경제학자다. 내가 추구하는 경제학은
제도권의 경제학과는 전혀 다르다. 패러다임 자체가 다르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는 오늘의 강연주제와 상관없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내가 추구하는 경제학이 기존 경제학에 비해서는 월등하다는 점은 자신 있게 밝힐 수 있다.
경제현상을 읽어내는 능력이
훨씬 뛰어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경제학의 영원한 숙제이자 소망인 경제예측 능력에 있어서 그 성능이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아주 탁월하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보겠다. 일주일 전에 한국은행은 금년 1/4분기 성장률이 전년동기대비 5.7%였다고 발표했다. 언론은 당초 예상치보다 훨씬
높은 수치라고 떠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지난해 11월에 금년 연간 성장률이 7%를 넘길 것이라고 예측해두고 있었다.
당시는 미국 테러사태가 경제현실에 반영되고 있을 때라서, 국내 경제연구소들은 물론이고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금융기관들도 우리나라 성장률 전망치를
당초의 4∼5%에서 2∼3%로 낮추고 있었다. 기존 경제학자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때부터 나는 정확하게 경기동향을 읽어냈던 것이다.
과거의 사례를 몇 가지 더 들어보겠다. 1998년 우리나라 성장률은 -6.7%였다. 경제연구소들 전망치는 6%에서 7%
사이였다. 무려 13% 내외나 틀렸다. 그러나 나는 -7%에서 -7.5% 사이를 예측했었다. 1999년의 경우도 보면, 실제 성장률은
10.9%였는데 경제연구소들 전망치는 -1.7%에서 2.1%였다. 이번에도 10% 내외나 틀렸다. 그러나 나는 10% 이상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자화자찬이 좀 심했다. 그렇지만 내가 추구하는 경제학이 기존 경제학보다 훨씬 탁월하다는 점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이해하기 바란다. 내가 추구하는 경제학을 나는 감히 '21세기경제학'이라 부른다. 21세기 어느 땐가는 경제학의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질 것을 확신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자신감을 갖고 있으며, 지난 30년 동안 많은 것을 희생해가면서 매달려 있다.
그런데 '21세기경제학'의 출발점은 이념이었다. 민족문제의 해결을 돕기 위해, 즉 민족대결과 이념대립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과학적으로 해체하려 했던 노력의 결실이 '경제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던 것이다. 오늘 강연의 화두도
바로 이것이다. 즉,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로서의 이념은 과학적으로 이미 해체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나 자본주의의 과학적
기초는 경제학이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 경제학에 과학적 기초를 두고 있으며, 자본주의는 신고전파 경제학에 과학적 기초를 두고 있다. 또한
마르크스 경제학과 신고전파 경제학의 과학적 기초는 모두 가치론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노동가치론에 과학적 기초를 두고 있으며, 신고전파 경제학은
균형가격론에 과학적 기초를 두고 있다.
만약 두 가치론을 과학적으로 해체할 수만 있다면, 마르크스 경제학이나 신고전파
경제학, 나아가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과학적인 존립당위성을 잃게 된다. 기둥을 뽑아버리면 건물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내가
추구하는 '21세기경제학'은 이런 작업을 통해 탄생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언급만 해두자면 이렇다. 노동가치론이나
균형가격론은 모두 절대적인 가치론이다. 노동가치론의 경우, 노동이라는 절대적 가치척도를 상정하는 것이나 스라파가 표준상품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었던 것 자체가 절대가치론이라는 증거다. 균형가격론의 경우, 소득 및 통화량과는 상관없는 균형가격을 찾았던 것도 절대가치론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절대적 가치론은 쉽게 표현해서 '시간이 없는 2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현실은 '시간이
있는 3차원의 세계'에 존재한다. 이처럼 차원이 서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은 영원히 조우할 수가 없다. 거울 속의 나와 현실의 내가 만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현실과는 영원히 조우할 수 없는 명제를 내세워 경제를 해명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가치론이나 균형가격론에 입각하여 경제현상을 읽어내려는 것은 '날아다니는 파리'를 '그림으로 그린 파리채'로 잡으려는
짓이나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여기에서 '날아다니는 파리'는 경제현상으로서 '시간이 있는 3차원의 존재'이고, '그림으로
그린 파리채'는 절대가치로서 '시간이 없는 2차원의 존재'다.
이런 절대가치론에 입각한 각각의 경제학, 그리고 이런
경제학에 과학적 기초를 두고 있는 각각의 이념은 과학적인 허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이념을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해체했다고 주장해오고
있다. 현실적으로도 이념은 이미 무너졌다.
자본주의는 시장에 대한 정부개입이 시작되면서 오래 전에 무너졌다. 이미
1930년대 세계대공황 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했고, 세계대전 후에는 복지정책이 일반화되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1960년대
후반에 시장이 허용되면서 사회주의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소련의 붕괴와 함께 더욱 확실하게 무너졌다. 중국의 변신과 번영은 확인사살에 불과하다.
사실, 이념은 인간이 창출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실은 자연의 섭리가 만들어낸 것이다. 쉽게 말해서, 불완전한 인간이
창출한 이념이 자연의 섭리가 만들어낸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나는 이념을 과학적으로 해체했다고 믿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로서의 진보는 존재의의가 사라졌으며, 자본주의로서의 보수도 존재의의가 사라졌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2.
이념이 죽었다면
현실에 존재하는 진보와 보수는 무엇인가?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념은 이미 죽었다.
그런데 현실에는 진보와 보수가 엄연히 존재한다.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보수를 고집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은 또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념으로서의 진보와 보수는 죽었지만, 현실로서의 진보와 보수는 엄연히 살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즉, 현실에 있어서 자유를 상대적으로 좀 더 강하게 요구하거나 추구하는 사람들은 보수이고, 평등을 상대적으로 좀 더 강하게
요구하거나 추구하는 사람들이 진보라는 것이다.
지금은 사유재산과 영업의 자유를 부정하거나 생산수단의 공유를 주장하는 진보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정부 개입을 부정하는 보수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절대적 기준은 오래 전부터 사라지고
있다. '여기까지가 진보이고 여기부터는 보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념이라는 잣대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제는 '상대적으로 보수인가, 아니면
상대적으로 진보인가'만을 따질 수 있게 되었다.
서구의 최근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1960년대의 보수는 지금의 진보보다
훨씬 좌경화 했었으며, 현재의 진보는 과거의 보수보다 훨씬 우경화 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현실에 있어서는 진보와 보수가 오래
전부터 이념적 기준을 무시하고 서로 넘나들어 왔었던 것이다.
60년대까지는 보수가 이념적 기준선을 넘어 진보 쪽으로
이동했었으며, 80년대 이후로는 진보가 이념적 기준선을 넘어 보수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보수가 진보 쪽으로 넘어갈 때는 진보는 더욱 좌측으로
이동했었으며, 진보가 보수 쪽으로 넘어갈 때는 보수는 더욱 우측으로 이동했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진보는 이런 역사적 현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 화석화된 도그마에만 매달려 있다.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린 이념이라는 잣대를 고수하려고만
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 진보하지 않은 진보가 어떻게 진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진보는 보다 유연해야 한다. 진보는 보다 탄력적이어야 한다.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을 때 비로소 진정한 진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 진보는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과거 불행했던 시절, 독립운동에 나서고 민주화운동에 나서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해야 했다. 생명까지도 바쳐야 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희생도 감수해야 했다. 따라서 종교적 신념이 없으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는 좀처럼 나설 수가 없었으며, 진보이념이
종교적 신념을 안겨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던 많은 분들이 좌익이념에 심취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공적을 남겼고 아무리 높은 도덕성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현실을 배척하면 시대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고,
시대에 뒤떨어지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진보를 포기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진보를 견지하되, 시대가 변하는 만큼은 뒤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는 과학이다. 그리고 현실에 입각하지 않은 과학은 없다. 현실을 떠나서는 진보란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진보는
현실에 눈을 감고 산다.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가 왜 세계적인 사조가 되었던가를 자세히
살펴보기보다는, 무조건 비판하고 배척할 따름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대두했는가를 먼저 살펴야 하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리고 진보의 진로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3.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대두했는가?
신자유주의 원조는 대처리즘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대두하였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처리즘의
성과에 대해서 좀 더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진보 경제학자들은 대처리즘이 철저하게 실패한 것으로 국민들을 오도하고 있다.
대처리즘은 실업자를 양산했고 빈부격차만 키웠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상은 그것이 아니다.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 세계 경제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물론 1980년대 중반까지는 대처리즘에 대한 비판이 분명히 존재했었고 어느
정도 호소력을 발휘한 것도 사실이다. 당시까지는 영국경제의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영국은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영국병'에 걸려서 도저히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과 같은
성장률 차이를 보인다면, 영국과 독일의 1인당 GNP가 2000년도에는 6배의 차이를 보이게 된다. 6배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면 지금의
영국과 콜롬비아의 차이다"라는 글이 영국 경제학 교과서에 실릴 정도였다고 한다(「우리모두」 사이트에 '영국감자'님이 쓴 글).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서 산업시설이 초토화되었던 독일에 뒤떨어지게 되었으니, 영국 국민들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여기에다
1976년 말에는 IMF 구제금융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이 처참하게 전락해버렸던 것이다. 더욱이, 환란이란
경제에 치명적일 뿐만 아니라 치유하는 데에 오랜 세월이 걸리고, 그 후유증과 부작용도 심각하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다.
그런데 영국은 보기 좋게 환란을 극복했고 경제회생에도 성공을 거두었다. 1인당 GDP가 이탈리아를 다시 앞지른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며, 프랑스는 물론이고 독일까지 추월하였다. 실제로 2천년 현재 영국의 1인당 GDP는 약 2.4만 달러로서 독일보다 5.5%나 더
많다. 국내총생산에 있어서도 인구가 1.4배나 더 많은 독일을 바짝 뒤쫓고 있다.
실업률을 보더라도 80년대 초반에는 두
자리 숫자를 기록했지만, 지금은 등록실업률이 3.2%까지 떨어져 있다. 노동임금상승률도 경제성장률보다 훨씬 높다. 노동자들은 그만큼 윤택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영국경제는 1970년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국경제의
이런 눈부신 성적은 대처리즘의 세계적인 유행을 불렀다. 미국의 레이거노믹스도 대처리즘을 흉내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레이거노믹스 역시 당시에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미국경제 번영에 밑거름이 되었다. 1980년대까지 일본경제에 압도당하던 미국경제는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초장기
호황을 구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경제는 몰락을 우려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적 상황에 빠져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는 위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은 세계적인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어찌된 일인지 신자유주의가 비난의 대상, 배척의 대상일 뿐이다. 심지어 '신자유주의는 곧 악'이라는 인식마저 굳어져 있다. 이것은 우리 경제의
앞날을 위해서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진보가 과학이고 과학은 현실에 입각해야 한다면, 영국의 노동당이 어떻게
재집권할 수 있었는가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는 '제3의 길'을 주창하면서 보수당의 대처리즘에 입각한 경제정책을 거의 모두
수용했다. 심지어 토리 블레어라고 불릴 정도였었다. 보수당의 전신인 토리당을 빗대어 이런 비난이 퍼부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경제는 노동당이
집권한 뒤에도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했고 노동자의 생활이 더욱 윤택해짐으로써 그런 비난을 무색하게 해버렸다.
영국 노동당의
위와 같은 성공은 프랑스와 독일의 좌파정권들까지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을 뒤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도 대체적으로 만족스런 것이었다.
성장률은 높아지고 물가는 안정되었으며, 무엇보다 실업률이 크게 떨어졌다. 신자유주의가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이런 배경은 갖고 있는
것이다.
진보는 유연해야 한다. 어떤 경제정책이 현실적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유행하고 있다면,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진보진영은 신자유주의를 무조건 저주하고 배척할 뿐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국민들의 신망만 잃을 따름이다.
4. 우리나라 진보의 실상
지금 우리 국민들은 김대중 정권이
총체적인 경제실정을 저지른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런 인식에는 진보진영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민사기극에 다름 아니다. 해외에서는 일방적으로 극찬을 늘어놓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 점은 틀림없을 것이다. 이 문제를 실체적 진실에 입각하여
자세하게 한번 따져 보자.
김대중 정권이 경제실정을 저질렀다고 비판하려면,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질문에 먼저 답변해야
한다. 환란을 우리처럼 빠르게 성공적으로 극복한 나라가 있었는가? 우리처럼 환란의 후유증과 부작용이 적었던 나라가 있었는가? 세계사를 다
뒤져봐도 이런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80년대 이후만 따져도, 외환위기를 겪은 나라들은 100개국이 훨씬 넘는다. 이 중
IMF로부터 10억 달러 이상 구제금융을 받은 나라들은 한결같이 경제위기가 세 차례 이상 반복되었으며, 대부분의 나라들은 지금도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무려 58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기로 했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지만, 불과 1년만에 환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찍이 영국이 성공하기는 했지만, 기간이 10년 가까이나 걸렸고 후유증과 부작용도 매우 심각했다.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이 수년간 두 자리 숫자를 기록했었으며, 국가기간산업이 거의 초토화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성적이었다. 다른 어떤
나라도 우리나라와는 견줄 수가 없다.
환란을 겪은 다음의 경제성적표도 아주 뛰어나다. 환란이라는 중병을 앓고 구조조정이라는
대수술을 받은 환자라고는 볼 수가 없을 정도다. 우리 경제는 1999년에 10.9%, 2000년에 9.3%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2001년에는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3.0%의 성장률을 기록하는데 그쳤지만, 이것마저 세계 5위권 안에 들어가는 빼어난 성적이다.
혹자는
1999년과 2000년의 성장률이 높은 것은 1998년 성장률이 -6.7%를 기록했기 때문이며, 이것은 숫자놀음이라는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경제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도 모르는 무지의 소치다. 경제는 수요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급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공급측면을 보면, 환란을 거치면서 30대 재벌의 절반이 무너지는 등 수만 개의 기업이 쓰러지고 백만 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해고되었었다. 이에 따라 우리 경제의 총공급능력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실정의 구체적인 사례로서 거론되었던 것들도 경제원리에 위반되거나 경제현실에 배치되기는 마찬가지다.
먼저, 빈부격차가 커졌다는 비판에 대해서 알아보자.
환란 이후 빈부격차가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결과만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빈부격차가 확대된 원인은 환란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빈부격차를 비난하려면 환란의 발발을 먼저 비난해야 한다. 더욱이, 환란을 거친
뒤에도 우리나라처럼 빈부격차가 적게 확대된 나라는 하나도 없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빈부격차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하며, 경제평등도가 OECD
국가 중에서도 중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비교적 양호하다.
두 번째로, 국가부채를 문제삼는 일은 어떠한가? 김대중 정권은 이미
98년 하반기부터 [중장기 재정계획]의 수립에 들어갔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철저하게 은폐하였다. 심지어 일부 경제학자와 언론 그리고 정치권이
이 때는 "지나친 긴축정책이 흑자기업을 도산시키고, 실업을 양산했다"는 비난하기도 했었다. 당시에는 국가부채를 늘리라고 주장했던 자들이 이제
와서는 국가부채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김대중 정권은 당초 계획보다 6년이나 앞당겨서, 이미 2000년에
통합재정수지가 흑자를 기록했고, 개선규모도 무려 27조원에 달한다. 또한 우리나라는 국가부채비율이 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나라에 속하며, 중앙정부
자산은 국가부채보다 무려 47조원이나 많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국가부채 때문에 국민경제가 무너질 것처럼 떠들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관치금융을 자행하고 있다고 비난하지만, 이것은 국가경제를 파멸로 이끌자는 주장이나 다름없다. 현실적으로,
환란은 금융위기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보사태가 터지자 그 부실채권이 금융기관의 경영수지를 악화시켰고, 결국은 금융시장 전체의 신용경색을
불러왔으며, 이것은 다른 재벌들까지 무너뜨리게 되었다. 삼미 대농 진로 한신 기아 등이 줄줄이 무너졌고, 금융기관의 경영수지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런 사정을 먼저 눈치 챈 외국인들이 자금을 회수하면서 환란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보사태는 그 폭발력이
TNT폭탄에 불과하다. 환란을 극복하는 와중에 터졌던 대우사태는 원자폭탄이라고 할 수 있고, 대우가 수습되어 갈 때 터졌던 현대사태는
수소폭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터지지 않도록 조치한 것을 관치금융이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이것은
환란보다 더 극심한 경제재앙을 불러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사람도 아프면 약을 먹고 수술을 받아야 하듯이, 경제도
마찬가지다. 자력으로 회복할 수 없는 상태라면 정책적인 관리가 필수적이다. 이것을 어찌 관치금융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네 번째로, 공적자금에 대한 비난도 무성하지만, 공적자금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만 정확히 알아도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
공적자금은 금융시스템이 붕괴위기에 처했을 때 금융기관에 투입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비용이다. 금융시스템이 붕괴되면 금융공황이 발생하고, 금융공황이
발생하면 경제공황을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금융공황이 발생하면 실업률은 30∼40%에 이르고 경기하강 기간은 수년간이나 지속된다. 이런 최악의
상황을 예방하기 이해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금융공황과 같은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공적자금을 투입한 목적은 달성되었으므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해야 한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쳐서 환자의 건강을 회복시켰는데, 수술비와 약값이 너무
많이 들었다고 의사를 비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일은행을 헐값에 매각했다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환란을 겪은 것도 아닌데, 장기신용은행을 해외자본에 매각했다. 매년 수백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 중이고 수천조 엔의 금융자산을 쌓아둔 일본이
왜 은행을 해외에 매각했겠는가? 매각하지 않으면 청산할 수밖에 없고, 이 경우에는 금융시스템이 위기에 처하게 되어 금융공황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일본도 장기신용은행을 해외에 매각한 것이다.
매각조건마저 제일은행보다 결코 유리하지 않다.
4.3조 엔의 공적자금을 투입하여 미국계 투자조합에 1,200억 엔에 매각했다. 제일은행이 24배의 공적자금을 투입했던 데에 비해, 일본
장기신용은행은 36배의 공적자금을 투입했으며, 총자산대비 인수금액은 제일은행이 1.4%였고 일본 장기신용은행은 0.5%였으므로, 그만큼
유리하다. 풋백옵션 기간의 경우 제일은행이 일반여신에 대하여 2년이고 워크아웃은 3년이지만, 일본 장기신용은행은 무조건 3년 간 보장하는
조건이다. 다만, 일본은 4년 후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는 우선주 비율이 총지분의 67%로서 우리나라보다는 유리하다.
다섯
번째, 구조조정이 부진하다거나 실패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조조정이 부진했거나 실패했다면 그 결과도 나빠야 하지만, 실제로는 성적표가
최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양호하다. 2001년 12월말 현재 금융기관 부실여신 규모는 35.1조원이다. 이것은 총여신의 5.4%로서 이제는
선진국 수준에 진입했다. 특히 은행은 3.4%에 불과하여 웬만한 선진국 수준보다 오히려 낫다.
제조업 부채비율은 97년
396.3%에서 2000년 210.6%로 개선되었고. 차입금 의존도는 97년 54.2%에서 2000년 41.2%로 개선되었다. 이자보상비율도
98년 68.3%에서 2000년 157.2%로 개선되었다. 기업의 경영수지가 선진국에 비해서는 아직 멀었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국민소득을 4만 달러까지 지금 당장 올리지 못한다고 꾸짖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구조조정이란 기업의 퇴출과 정리해고를
수반하므로, 경기를 후퇴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즉, 무리한 구조조정은 모처럼 상승하는 경기를 퇴행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가 그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수준에서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구조조정은 최상의 성적을 기록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여섯 번째, 국부유출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국민경제를 나락으로 이끌자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지난 2000년
우리나라 주가지수는 1,028에서 504까지 추락했다. 이때 외국인 주식 순매수가 13조원에 이르렀었고, 이것이 그나마 우리나라 주식시장을
버텨주었다. 만약 이 때에 국부유출을 막는다고 외국인 주식투자를 거부하고 몰아냈더라면, 주가지수는 200도 지키지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되었으면 금융공황이 발생했을 것이다. 실제로 세계대공황은 미국 주식시장의 붕괴로 빚어졌었다.
세계적으로 국민총생산(GNP)
개념은 자취를 감추고, 국내총생산(GDP) 개념이 부상한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국부를 창출하는 것은 국내에서 이루어지는 생산활동이지, 외국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국민의 생산활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GDP 개념에 입각한 경제정책을 채택하여 자본주의 역사상 최장기의 호황을
구가하였고, 일본은 GNP 개념에 입각한 경제정책을 채택하여 역사상 최장기 불황을 겪고 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사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주체적인 개방을 봉쇄함으로써 망국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국민들은 우리 경제가 외국자본에
종속되어 가고 있다고 불안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외국자본을 부정적으로 볼 일만은 아니다. 우리 경제에 보탬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것이 세계적인 흐름이다. 실제로도 외자유치에 적극적인 나라일수록 성장률은 높고 실업률이 낮으며 물가도 안정되어 있다.
아일랜드와 핀란드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국내시장이 협소하고 자원은 부족하며 기술수준도 낮았고 자본축적도 부족했던 이
나라들은 유럽의 변방국으로서 경제발전이 가장 낙후된 곳에 속했었다. 그렇지만 적극적으로 외국기업을 유치하여 지금은 대단한 경제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국민소득은 프랑스나 독일에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높아졌다.
영국 역시 마찬가지다. 환란을 거치면서 철강, 조선,
자동차, 석탄 등의 국가기간산업이 초토화되는 등 산업기반이 거의 무너졌었는데, 외국인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지금은 유럽에서 최고수준의
경제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비약적인 발전도 외국인 투자의 적극적인 유치에서 비롯되었다. 외국자본에 대한 종속을 걱정했더라면 중국의 발전은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사실, 초우량 기업이라도 순이익은 매출액의 2∼3%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전부가 자본가의
몫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장래의 투자를 위해서 사내유보를 하기도 하고 재투자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의 기업도 부가가치 창출액은 평균적으로
40% 내외에 이른다. 즉, 외자유치는 외국자본이 얻어 가는 이익의 수십 배를 국내에 남겨주는 것이다.
일곱 번째, 고통의
집중을 문제삼기도 한다. 실제로 정리해고 등 환란의 고통을 서민층이 가장 크게 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고통이 집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30대 재벌 중 16개가 쓰러졌다. 재벌 소유자들도 절반 넘게 몰락한 것이다. 금융기관도 1/3이 쓰러졌으며, 일반 기업들도 수만 개가
쓰러졌다. 지금 명맥을 유지하는 기업도 과거의 주식이 모두 소각되면서 소유주들의 재산이 거의 모두 날아갔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환란과 같은 경제재앙을 겪고도 노동자와 서민이 우리나라처럼 고통을 적게 당한 나라가 역사상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비난하고 있다. 이처럼 거짓 선전을 일삼고도 진보가 과연 도덕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국민들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을까? 진보를 보면
답답할 뿐이다.
지금까지 자세하게 살펴보았듯이, 김대중 정권의 경제업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대부분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김대중 정권의 경제정책이 모두 성공적이었을까? 그것은 아니다. 실패한 것들도 많다.
1999년에
지나친 경기부양책을 채택하여 경기과열을 불러왔고, 그래서 2000년의 경기조정을 불러옴으로써 장기팽창국면으로 이끌지 못한 것, Y2K 대책을
세운다면서 1999년 말에 통화량을 급팽창시켰다가 2000년 연초에 급히 환수했고 이에 따라 금융시장의 신용경색을 불러온 것, 1999년 말에
주가지수가 1,028에 이를 정도로 주식시장이 과열되었던 것을 예방치 못함으로써 2000년도의 주가추락을 초래했고, 주가지수 폭락을 방치함으로써
연말에는 504까지 추락하게 한 것 등등은 매우 중대한 정책적 실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실책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중대한 실책은 뛰어난 경제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엄청난 경제실정을 저지른 것처럼 국민들이 인식하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실책은 국가경제의 장래를 위해서 심각하게 우려해야 할 문제다. 국민들의 잘못된 인식은 장차 올바른 경제정책을 팽개치고 틀린 경제정책을 채택하게
함으로써 언젠가는 또 다른 경제재앙을 불러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심각하게 우려 할 일이다.
세상에 올바른 길은 찾기도
어렵고 매우 좁다. 그러나 틀린 길은 사방에 널려 있고 넓다. 경제정책도 마찬가지다. 성공에 이르는 경제정책은 단 하나이고 실패에 이르는
경제정책은 무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환란을 성공적으로 극복시킨 경제정책도 유일한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그 경제정책을 후손에게
길이 전해야 한다. 혹시 경제재앙이 다시 닥칠 경우에는 이미 성공한 정책을 채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은 공기업
민영화 문제로도 국민을 속였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공기업 민영화는 엄밀한 의미의 민영화가 아니고, '공영체제 유지'의 성격이 강하다.
철도의 경우, 선로의 건설 및 유지 관리는 공사화하고, 선로운영권과 역사운영권만 민영화 대상으로서, 절대적인 비중은 공영체제를 유지한다. 전력
역시 화력발전소와 배전만 민영화 대상이고, 송전과 전력거래소 그리고 원자력과 수력 발전소는 공영체제를 유지한다. 캘리포니아에서와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체제를 갖춘 것이다.
싱가폴 공기업의 성공사례나 영국 철도의 민영화 실패사례 등은 특수한 경우에 해당한다.
민영화의 성공사례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감옥이나 조달청을 민영화하여 성공한 사례도 있을 정도다. 특히 영국은 거의 모든 국영 및 공영
기업들을 민영화하여,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80년대이래 유럽에서는 최고수준의 경제성적표를 기록 중이다.
특히
90년대에는 연평균 2.3%의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장기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01년 등록실업률은 전후 최저인 3.2%에 불과하다.
또한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4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
캘리포니아 전력난 사태는 국민을 오도한 대표적
사례이다. 노동계와 진보적 학자들은 이것이 민영화에 따른 필연적인 사건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미국의 전력산업은 애초부터 민영이었다. 더욱이
캘리포니아 전력난의 원인은 민영화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경우 지나친 환경규제로 발전소를 새로 짓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인근의 주에서 전력을 사오고 있었다. 그런데 가뭄이 들면서 수력발전량이 급격히 줄자 다른 주들도 전력이 부족해지자 공급을
중단했고, 이에 따라 전력난 사태가 빚어졌다. 다만, 이 사태를 기화로 전력회사들이 여러 가지 이익을 챙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원인은
어디까지나 전력시설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데에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5. 가짜 보수가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
내가 진보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가혹하게 비판하는 것은 진보가 이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영국의 노동당이나 프랑스의 사회당 그리고 독일의 사민당과 같은 유연함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에 부응하는 정책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가 있다.
지금과 같은 자세로는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혹시 억세게 운이 좋아서 집권한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자세라면 엉터리 경제정책을 채택하여 우리
경제를 나락으로 이끌고 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면 진보는 이 땅에서 영원히 설자리를 잃지 않을까 걱정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과거 일제와 독재에 부역했던 자들, 그리고 이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쌓아놓은 물적 인적 토대를
바탕으로 성장한 부류들이다. 이들이 지금 보수라는 위장막을 둘러쓰고 있다. 이들은 보수가 아니라 가짜 보수고 반동이다. 보수를 참칭하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보수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보수할 능력이 있고, 보수할 자격이 있다. 또한 국민의
역량과 국가의 장래를 확신하는 자가 진짜 보수다. 이것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인종주의나 극우주의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가짜 보수들은
우리나라가 내일 곧 무너질 것처럼 설쳐 왔었다. 환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는 우리 경제가 내일 곧 무너질 것처럼 국민들을 겁주는데 앞장섰었다.
진짜 보수란 민족과 국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따라서 국민의 주권이 독재자에게 탈취 당했다면 맞서 싸우는 것이
진짜 보수의 참모습이다. 그리고 국권이 이민족에게 침탈 당했다면 당연히 독립투쟁에 나서는 것이 진짜 보수의 참모습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주류라고 자부하는 자들은 대부분 민주화투쟁이나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멀다.
보수를 참칭하는 자들은 복지정책을 좌경으로 몰기도
한다. 그러나 진짜 보수는 소외되고 가난한 국민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실제로 복지정책은 보수주의자의 원조나 다름없는 비스마르크가 역사상
최초로 정착시켰다.
진짜 보수는 노블레스 오블리쥐(Noblesse Oblige)에도 결코 소홀함이 없다. 병역의무를
솔선수범하고, 세금도 자진하여 납부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쥐에는 관심도 없는 자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보수를 참칭하고 있다. 사회에
봉사하기는커녕 국민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마저 망각한 채, 병역을 기피하고 탈세를 일삼는 자들이 보수를 참칭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가짜 보수들이 활개치는 것을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것인가? 가짜 보수들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진보가 하루빨리 제 자리를
잡아야 한다.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진보가 좀 더 현실적으로 변신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에 입각하여
정신무장을 새롭게 해야 한다.
6. 진보가 나아갈 길 : 신진보주의를 제안한다
우리나라 진보는 지나치게
정치적이다. 노동자들 눈치만 살피고 있다.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광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보여야 한다. 아니,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자본가에 비해서
열악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 진보라면, 노동자에 비해서 더 열악한 위치에 서 있는 실업자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진정한 진보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실업률을 어떻게 해야 낮출 수 있는가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보가 신자유주의를 무조건 추종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진보적 관점에서 신자유주의를 재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신진보주의'를 주창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관점에서는 '성장 없는 분배는 없다'는 명제가 주어지지만,
내가 주창하는 신진보주의 관점에서는 '분배 없는 성장은 유지될 수 없다'는 명제를 도출한다.
실제로, 빈부격차가 커지면
경제성장을 오래 지속할 수가 없다. 소득 상위계층의 소비성향은 낮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소비성향이 낮은 소득상위계층에 국민소득이 몰리게 되면
유효수요가 줄어들 수밖에 없고, 유효수요가 줄어서 총공급에 비해 부족해지면 경제는 후퇴할 수밖에 없다. 심할 경우에는 이미 역사적으로 경험했듯이
공황을 유발하기도 한다. 진보진영은 이런 점을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그래서 사회복지제도와 소득재분배정책의 확충이 국민적
저항감 없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만, 안정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꾸준히 유지할 때에 빈부격차가 완화된다는
사실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사실, 어떤 인위적인 경제정책보다도 이것이 훨씬 더 효과적으로 빈부격차를 완화하는 것이 현실이다. 높은 성장률이
안정적으로 오래 유지된다면 실업률이 감소하고 임금도 빠르게 상승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것이 빈부격차를 완화시켜주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높은
성장률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경제원리 덕분이다. 바꿔 말해서, 우리나라는 소득격차가 지속적으로 낮아짐으로써 높은 성장률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이 전통적인 진보주의와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주창하는 '신진보주의'는
안정적이고 높은 성장률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빈부격차가 확대되면 지속적인 경제성장은 기대할 수 없고, 높은
성장률이 안정적으로 오래 유지되어야 빈부격차는 확대되지 않을 수 있다" 는 것이다.
* 최용식(21세기 경제학연구소 소장)
* 이 글은 시대정신 [2002 05-06월호] 제20호에 수록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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