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念.思想.思潮

박영희, 자신의 심장을 들여다 본 프로메테우스

이강기 2015. 10. 28. 08:50
박영희, 자신의 심장을 들여다 본 프로메테우스

 

기고를 하며


‘386’세대가 시대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우리는 ‘386’이 안고 있는 세대론적 함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들을 하나의 끈으로 묶는 것은 그들의 청춘을 순사했던 80년대와 맑스주의라는 신념으로서의 사상, 그리고 내면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그것으로부터의 전향이라는 문제와 분리하기 어렵다. 80년대가 ‘386’의 청춘시대의 송가로서, ‘386세대’에 대한 관심이 저널리즘적 속물 취미의 대상으로 기록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80년대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들에게 80년대 ‘이후’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더욱 중요한 세대론적 규정성으로 작용할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저항하지 않는 청춘이 어디 있으며 사상의 열병에 병들지 않은 세대가 어디 있는가. 권력에 가장 철저하게 저항했지만 권력의 달콤함에 가장 먼저 순치된 이 역설적인 욕망은 ‘386’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비판이 되고 있기도 하다. ‘386’이 ‘386’이라는 그 희안한 고유명사로서의 세대론적 차별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은 80년대가 아니라 80년대 이후, 지식 실천의 가능성이 최대한으로 열려 있는 우리 시대의 삶의 진정성에 관한 화두 가운데서이다. 최근 전향 논의의 핵심은, 비난과 인신공격성의 논의를 빼면, 바로 이 전향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화두의 무거움으로부터 왔고 이는 어떤 방식으로든 가장 늦게 80년대를 정리하는 완결점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이것의 거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보게되는,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비평가였던 그리고 당대의 인문학적 지식인이었던 박영희의 지식인으로서의 삶과 실천, 전향의 문제이다.



懷月 박영희가 맞은 1930년대의 첫 풍경은 전향과 그것을 둘러 싼 비난의 회오리 속에 있었다. 문학에 대한 순교와 투쟁으로 얼룩진 과거의 시간에 자신을 투영시켰을 때, 그는 유린당한 자신의 심장을 들여다보는 한 프로메테우스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고행의 순례는 종료되었다. 예술 전당에 도착하였으며, 창작의 사원의 종소리를 듣게 된 까닭이다. 온갖 회의와 주저를 끊어버리자. 푸로미듀스여 고난의 밤은 밝어온다”라고 썼다. 박영희는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곤경은 자신이 지금까지 이루어왔던 문학-예술의 한 계단일 뿐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문학의 다음 계단을 위한 버팀목이 될 것임을 그 순간에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고난의 밤은 그렇게 빨리 지나가지 않았다. 그는 전향과 친일이라는 주홍문자를 달고 식민지 전향자가 걸어야 하는 그 어둡고 깊은 골짜기로 빠져 들어가야 했다. 그가 평생 자신의 운명처럼, 이상주의적 열망으로 간직했던 그 ‘달’의 환영이 순식간에 깨어져버리는 꿈으로 남는 순간이었다.


박영희가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를 완전히 탈퇴한 것은 1933년이었다. 그는 1931년 <예술운동의 작금>이라는 평문에서 전향의 기미를 조금 보이다가 1932년 카프 간부직을 사퇴했다. 1933년 카프를 탈퇴하면서 그는 그 유명한 전향 선언문으로 기록될,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며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었다’라는 구절이 실린 <최근 문예운동의 신전개와 그 경향>이라는 평문을 1934년 1월 11일자 동아일보에 발표했다. 그럼으로써 어쩌면 그의 전 생애동안 그를 속박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경향문학의 한 계단을 완전히 접게 된다. 이 선언으로 그는 좌우익 문단 양쪽에서 우익 복본주의자(福本主義者)1), 배신자, 훼절자, 혹은 인텔리적, 철학적, 소부르조아적. 우익적이라 낙인찍히면서 전향, 친일, 납북이라는 역사 속에 발목 잡힌 문학자의 한 운명을 그대로 보여주게 된다. 30년대 초두부터 시작된 그의 전향의 연대기는 몇 년 사이에 급격한 정신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 사이 사이에는 많은 침묵과 고민의 시간들이 존재했음을 그는 밝혀놓았다.

박영희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카프의 가입보다는 카프로부터의 탈퇴, 그리고 전향이었다. 박영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문학에 대한 지고한 관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이광수의 계몽주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백조’시대를 관통해 나가는 것도, 그의 죽마고우였던 김기진과 함께 ‘백조’를 깨고 신경향파적인 문학에서 카프 문학의 이론 제공자의 역할을 했던 것도 그의 ‘문학의 계단론’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가 카프에 가담하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루나찰스키, 프리체, 트로츠키의 이론들을 인용, 소개하고는 있지만 그가 백조시대를 전후로 보들레르와 하이네, 오스카 와일드 같은 서구의 탐미주의, 상징주의 문학자들을 소개하고 수용하는 경우와 인식론적인 동기로 보자면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근대문학을 인간의 내면 발견과 개인 주체로서의 자각으로 이해했을 때 그에게는 유미적이고 상징주의적인 백조 시대가 필요했고, 문학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기능이 절대적인 우위에 서 있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카프 시대가 필요했다. 이 과정동안 박영희의 사유가 단순한 것이 아니었음은 그의 많은 저작들에서 발견되고 있고 그 과정을 그는 실제로 밝히기도 했다. 그는 적어도 맑스주의적 변증법에 대해 투철한 신념을 가지지도 않았고 그것을 절대적으로 신념화, 내면화 한 것 같지는 않다. 당시의 경향문학 혹은 리얼리즘 문학은 당대에 우리가 당연히 올라서야 할 하나의 ‘계단’이었다. 우리 문학이 하나의 황금탑(완전성의 문학)을 만들기 위해 나아가야 할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광수 문학의 계단 위에 백조 문학의 계단이 존재했고 그 위에 경향문학이 존재했다.

그의 이 같은 사고는 철저하고 논리적이며 그가 읽은 많은 지적인 독서물과 인문학적 지식의 토대 위에서 생성된 것이었다. 이 점에 관한 한 당대에서 박영희의 논리성과 지적인 면모를 따라갈 수 있는 문학자, 비평가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말하자면 박영희의 논리적 거점은 상당 부분 그의 서재인으로서의 성찰적 성격, 기질적인 것으로부터 나왔다. 이것이 임화나 김기진, 그리고 다른 카프 맹원과도 본질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이었고 이것이 오히려 박영희의 전향을 재촉한 감도 있다. 박영희의 이 같은 면모는 그가 창작을 했다는 결정적인 사실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양한 서구 이론서적과 철학서들을 접하면서 얻게된 개방적 사고와 지식, 반성적 사유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것임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가 전향을 하고 침묵하면서도 많은 저작들을 남기고 있는 것은 이 ‘금박으로 된 장서’ 앞에서 그 고난의 시간들을 견뎌 낸 때문이었다. 오직 독거생활로 전향 이후의 고독과 회의와 절망을 보상하고자 한 그의 욕망이 전향 이후의 의미있는 저작들을 낳았던 것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비평가였던 그의 내면에는 거의 동시대 문인들이 침범하지 못한 하나의 밀실이 존재했는데 그는 이것을 수사적으로 ‘월광으로 짠 병실’이라 불렀다. 그 밀실에는 회월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내면공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적과 허무와 회의를 아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당대의 용어로 말하면, 바로 그 ‘오뇌(懊惱)’의 병이었다.

그가 카프를 탈퇴하기까지 견딜 수 없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이른바 카프 지도부의 창작에 대한 억압이었다. 유동성이라고는 없는 카프 지도부의 창작 지침은 공식주의적이고 경직화한 것이어서 어떤 문학적 여백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창작의 고정화’를 낳았고 문인들의 무더기 전향과 이탈을 몰고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카프가 점차 매너리즘화 하면서 ‘초기의 카프’로부터 너무나 멀리 벗어나 버렸다는 것인데 회월은 이를 ‘회의하지 않는 지적 천박함’이라고 지적했다. 카프 집단의 한 부류들이 점차 정치화 하면서 이른바 ‘포리티시안적’ 기질을 일종의 명문의 표징으로 이해하고 내세우면서 점차 속물화되어 갈 때 그는 ‘범속한 시장의 염가물’처럼 부유하는 이 집단을 탈퇴하게 된다. 카프의 초기적 형태가 견지하고 있던 문학적인 순수 기능이 거의 소실된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된 상황에서 그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자기 회의가 없는, 이 천박한 자들이 펼치고 있는 미성년의 비애였다. 카프 문학의 계단에 이제 겨우 세워진 것은 ‘낙엽지고 등걸만 남은’ 나뭇가지였다. 무비판적 발전이 카프의 자체의 질곡을 낳았다고 그는 한탄했다. 카프의 정치적 경향이 유행처럼 부유하던 시대, 그는 창작을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10여 년을 몸담았던 조직과 사상으로부터 결별했던 것이다. 그는 단 하나의 명제로 집약해서 말했다. 지적 부족과 예술적 견해의 불충분. 이 대목에 이르면 우리는 그의 전향이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철저한 자기 검증과 한계를 자각하지 못한 회월 자신의 결함 때문임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점에 관한 한 아무도 이를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전향의 계보학’을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전향’이 지식사회학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오직 개인의 훼절이나 단순하고 직선적인 윤리성의 문제로 환원되어 버릴 때 ‘전향’은 오직 대중적이고 저널리즘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뿐이다. 특히 우리 역사상 ‘전향’과 ‘친일’이 한 묶음으로 이해되는 속성 때문에 전향 문제는 여러 번 굴절되는데, 회월 역시 그가 친일을 했다는 결정적인 사실 때문에 한 개인의 윤리성의 문제로 급격하게 비하된다. 그의 전향 선언문은 극단화 된 이데올로기적 편향성 속에서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그들 자신만을 위해 봉사해 줄 하나의 파수막처럼 포장되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전향이라는 문제가 윤리적인 문제로, 개인의 결함으로 단죄되는 순간, 박영희의 문학 예술에 대한 순수 본질의 욕망은 ‘황금탑의 환영’으로 우리 지성사에서 스러져 갔다. 적어도 우리에게 ‘전향’은 더 이상 보편 지식의 관점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에서 추적해 들어가야 할 문제, 철학적이며 인식론적 질문의 대상이기보다는 한갓 풍문이거나 박제화 된 자기 기만적 변명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돼 버린 것이다.

박영희의 전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 그에게 문학, 예술이란 무엇인가. 보들레르와 하이네, 포에 심취했고 뛰어난 독서광에다 장서 취미를 가졌던 시인으로서 그는 왜 카프라는 맑스주의 문학 단체에 들어가서 좌장이 되는가. 그의 냉철하고 지적인 사유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의 전향 선언의 내, 외적 동기는 무엇인가. 그가 평생 고민했던 문제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들을 뛰어넘어 막바로 그의 전향을 말할 수는 결단코 없는 것이다. 박영희에 관한 한 우리는 지나치게 카프 초기 단계에 김기진과 함께 카프 문학의 이론 제공자 역할을 했다는 것으로, 이 단체의 중심인물로 이해하는 측면이 강하다. 「산양개」, 「지옥순례」 등 생경하고 맹목적인 신경향파소설을 썼던 작가로 이해하면서 그의 전향과 탈퇴가 그가 이 소설들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서투름과 지나침’이 하나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곧, 이른바 현실인식의 미숙함이라든가 결코 버리지 못했던 문학 소아병 같은 것 때문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향 이후 친일로 나아가게 되는 동기도 아주 볼썽사납고 저속한 생존의 욕망처럼 이해되었다.

박영희에 대한 평가에서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가 그토록 치밀하고 논리적인 지성적 문사였다는 사실이다. 박종화나 김기진이 본 박영희의 두드러진 병은 바로 이 논리적 사고와 지성적 사유의 문제였다. 이 부분은 당시 30년대 문인 탐방기나 문인 인상기 등에서 새삼 확인되는 것일 뿐 아니라 그가 썼던 많은 논리적 저작물과 회고록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1920년대 초반의 이른바 ‘퇴폐적 상징주의’ 문학의 수용과 관련해서 많은 문인들이 그 시대를 청산해야 할 것으로, 부끄러움의 원천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에 반해 박영희가 그 시대를 아주 객관적으로 논리적으로 회고하고 있는 대목은 박영희라는 인물이 평생 안고 갔던 이 보편지식의 문제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해방과 분단을 전후로 우리 문인들이 겪어야 했던 가장 곤혹스러웠던 문제는 문학의 이데올로기성이었다. 카프 문학과 민족문학이라는 양 극단적인 이념의 폭풍 속에서 문학의 기능주의적인 면모가 문학성 혹은 문학적 가치 규정의 가장 보편적 규준이 되어 버린다. 당연히 상징주의가 갖는 그 미묘하고 몽롱하면서 관능적인 사랑을 읊은 시들은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할 문학적 허풍선이나 청춘의 자기감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민족’의 이름으로 살지 않은 문학은 청춘의 열정에 몸둘 바를 몰랐던 치기 어린 청년들의 말장난 비슷한 것으로 이해되었고 문학 연구자들의 문학사 이해에 이 논리는 결정적인 것으로 굳어지게 된다. 박영희로서는 그는 ‘민족’이 아니라 근대적 내면이 문제가 되었고 그것은 근대 예술이라는 인문학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의 개념 위에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박영희의 계몽주의는 ‘주의자적’ 관점이 아니라 인식론적 관점에서 생겨난 것이어서 문학의 각 단계가 갖는 상대주의적인 관점을 폭넓게 공유할 수 있었다. 그가 본 동인지 시대 문학의 단계는 바로 근대적 내면과 개인 주체의 발견이라는 문학 단계였고 그것은 그가 부정하면서도 한 때 그를 매혹시켰던 이광수식 계몽주의의 다음 단계기도 했다. 그에게 맑스주의적인 변증법의 사고는 그다지 본질적이지 않았고 그가 몸담았던 카프 문학의 이념도 어쩌면 이 단계론의 한 계단을 형성하는 것뿐이었다. 그 계단을 딛고 그가 생각했던 것은 유미적인 문학이나 카프 문학의 완전한 부정이기보다는 이것의 종합 혹은 지양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계몽적이고 인식론적인 사유의 산물이었다. 그가 카프의 다음 단계를 유심히 고민했던 흔적은 많이 보이는데, 다음 계단의 실체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을 때 그의 친일이라는 운명을 재촉하게 된다. 그가 전향 이후 다음으로 펼쳐 들어가야 할 지식의 장은 그로써 마감이었던 탓이다.

그의 전향을 두고 사람들은 말한다. 일본 전향 문학인 구라하라 고레히토(藏原惟人)나 나가노 시게하루(中野重治) 등은 그들이 돌아 갈 조국이 있었고 천황제라는 지식의 문제로 접근해 갈 인식의 장과 지식 실천의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지식인이었던 박영희에게는 ‘조국(父)’이 없었고 그것이 그의 불행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박영희의 친일이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바퀴 아래 존재하고 있음을 다소 회의적으로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박영희의 전향 이후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문인보국대의 일원으로 당대의 김동인, 임학수 등과 북만주 등지의 황군을 위문하는 여행길에 오르고 그 뒤 이들 문인들의 대표격으로 「戰線紀行」이라는 기행문을 남긴다. 그 기행문은 박영희가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유치한 문장들과 모순된 사유들로 가득 차 있다. 여기쯤 이르면 그 동안의 많은 글들에서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균형 감각과 인문학적인 지성은 완전히 소멸되어 버린다. 누구는 이 대목에 이르러 인간 박영희의 서투른 현실 인식이 전향에 이어 또 한번 굴절되고, 급기야는 파탄의 지경에 이른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묻게 된다. 허무의 심연을 겪어 보지 않은 지식 혹은 지성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고. 전향, 친일을 ‘좋다 / 나쁘다’와 같은 극단으로 평가하는 방식은 ‘암흑가의 담론’이지 지식의 담론은 아니다고 말이다. 우리가 「戰線紀行」에서 보는 것은 이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의 권력에 좌절하고 무너진 한 나약한 인간의 내면의 기록이 아닌가고 말이다. 이 파탄 상태에 이른 문체는 그의 지성의 파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파탄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욕망의 꿈틀거림이자 지성의 힘이 뿜어내는 놀라운 인식의 에너지라고 말이다. 이 힘이 그의 문장을 형편없는 것으로 만들고, 그로테스크하고 기묘한 논리 속에서 기행의 장면들을 그려내게 했던 것이다. 그의 친일문학론인 신체제문학론, 국민문학론은 논리적 모순과 결함으로 가득 차 있어 죽음의 공포로부터의 생존보존이라는 절박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서 뚜렷해진다. 최재서나 이광수에 비해 친일에 대한 자기 합리화의 고백록을 한편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문학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그는 한갓 꼭두각시노릇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박종화가 그 이후 박영희의 이 같은 친일을 두고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대목은 그래서 오히려 사족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자연인 박영희나 정치인 박영희가 아니라 문인 예술가였고 논리적 지식인이었으며 보편 지식으로 무장된 인문학적 비평가 박영희인 것이다.

박영희의 불행은 그가 펼칠 지식의 장을 전향 이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는, 많은 부분 시대적인 제약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의 삶의 행적에서 그 무거운 역사로부터 결코 비켜나갈 수 없었던 인식의 증량감과 권력에 저항 할 수 없었던 생존의 서글픔을 느낀다. 그것은 이광수도, 김동인도, 채만식도 결코 빠져나올 수 없었던 역사의 수렁이기도 했다. 채만식이 절규했다. 일제시대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지사에서 근무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이 된다면, 일본인들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친일이 되지 않느냐, 나는 살아야했다고 주장하는 대목에 이르면 우리가 전향이나 친일 이런 문제를 쉽고 간단하게 처리할 수 없다는 엄정한 사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친일의 항변을 합리화하는데 동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박영희가 친일을 했다는 단순한 사실에 무게가 실려있지 않고 박영희의 고민하는 지성과 삶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생각해본다는 의미이다.

그는 자신의 호 ‘회월’에 대해 이렇게 썼다. ‘달’은 냉각된 우주의 상징이다. ‘고적의 향로에서 타고 있는 불가견의 연기는 사람의 가슴 깊이 스며들어갈 때는 情愛와 고민에서 질식하게 하는 것’이다. 그가 품은 이 ‘고적한 향로’는 서재인이었고 늘 지식과 삶에 회의했으며 자신의 사상과 인식에 주저없는 허무와 절망과 반성을 되풀이했던, 이 사상의 병을 앓는 자에게만 부여된 프로메테우스의 고난과 같은 것이었다. 완전한 인생이나 예술에 대한 동경은 이상주의적인 것일 수도 있고 낭만주의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박영희의 경우에 그것은 치밀한 인식론적 산물이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지식은 항상 이 달빛이 던져주는 파리함, 곧 내면적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으며 자기 검증을 거쳐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때로 그에게 자기 지식에 대한 회의를, 사고의 엄밀함을 요구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지식을 문학적으로 실천하는 행위에 투사하게 만들었다. 박영희의 문학을 이광수와는 다른 계몽주의적 맥락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회의하지 않는 지성, 고민하지 않는 실천, 자기 검증하지 않는 지식은 흔히 말하는 대로 모방되고 이식된 관념의 산물이거나 서투른 관념주의의 미망일 뿐이다. 달을 가슴에 품고 우리 문학의 근대적 여명기를 헤쳐 나갔던 박영희를 보면서 우리가 떠올리는 질문은 보편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내면의 진정성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시인이면서 비평가였던 임화의 무게와도 다르고, 전향, 친일, 신비평으로 나갔던 백철의 입장이나, 대한민국의 품안에서 숙면한 열혈 청년 김기진의 전향과도 다른 그 무엇을 우리에게 남긴다. 박영희를 다르게 만드는 맥락은 그가 납북될 때까지 견지해 갔던 인문학적이고 보편 지식적인 사유의 끈이다. 그것은 그를 희유의 지식인적 전향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게 했지만 바로 이 희유성은 그를 납북과 미해결된 죽음의 장의 기록으로 남기게 한 결정적인 대목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시점에서 물어야 할 것은 전향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서 윤리적인 문제가 아닌 인간주의적인 문제, 지성사적인 문제, 지식인의 삶의 실천의 문제로 문제의 핵심을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전향의 윤리성에 관한 문제는 그 스스로가 자신의 내부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그는 시대의 건달이 아니라 보편 지식인이며 작가였던 까닭이다. 우리가 일제시대 전향자들의 선택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윤리적 단죄는 매우 적다. 그것은 당대를 살았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문제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박영희를 생각하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가 현실 정치가도, 혁명가도, 노련한 전략가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좁혀서 말하면 그는 시인 예술가였고 또한 인문학적 사유에 깊었던 보편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선택과 불행에 대해 우리가 눈물을 흘려야 한다면, 한 지성이 펼칠 수 있는 지식 실천의 장을 완전히 봉쇄당한 일제시대를 그가 살았다는 것이다. 박영희에 관한 한, 문제는 인텔리적이고 사변적인 박영희의 기질적 특성에 있다기보다는 논리적이고 지성적인 그의 사유를 자유롭게 펼칠 수 없었다는 데 있지 않을까. 전향이 문제가 아니라 전향 이후의 삶이 더 문제가 되는 까닭은 전향 이후 이루어 낼 수 있는 지성적 삶의 실천 때문이다. 박영희는 더 이상의 가능성이 존재할 수 없는 시대에 살았다. 그것이 그의 불행이자 운명이었다. .

서구 지성사에서 앙드레 지드나 앙드레 부르똥, 그리고 메를로뽕띠 같은 이른바 프랑스 68세대에 대해서, 이들의 전향에 대해, 우리가 윤리적 단죄가 아니라 보편 지식의 관점으로 그들의 지적 편력을 논의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어쩌면 이들이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인간적인 어떤 것’에 대한 지고한 관념들, 그 고민의 순수 동기와 지적 실천에 대해 후대가 최소한의 예의를 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삶보다 지성이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진정성을 담보해 주는 마지막 보루가 인간의 지적 편력 가운데 존재한다는 인류의 저 거대한 이념 때문인지도 모른다.


* 조영복(문학평론가, 서울대 강사)
* 이 글은 시대정신 [1999 11-12월호] 제7호에 수록되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