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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출신' 경제학자 그가 살아있었다면

이강기 2015. 11. 1. 12:27
'빨치산 출신' 경제학자 그가 살아있었다면
[고 박현채 10주기] 소설가 송기숙이 말하는 그의 삶과 일화
    홍성식(poet6) 기자   

 

올해는 '민족경제론'의 틀거리를 축조했던 박현채 전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의 10주기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독특한 이력과 함께 자신만의 학문적 영역 구축과 실천적 설파에 힘써온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11월 3일은 그가 만약 생존해 있었다면 고희연이 열렸을 날. 생전 박 교수의 절친한 벗이었던 송기숙 전 전남대 교수의 회고를 통해 살아있었다면 한국경제 침체 탈출에 단단히 한몫 했을 박현채의 삶을 돌아본다. <편집자 주>

 

 

▲ 고 박현채 전 조선대 교수.
ⓒ2005 송기숙 제공
[기사 수정 : 2일 오후 4시 20분]

수차례 노벨문학상 수상 유력 후보에 오른 바 있는 고은(72)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향수란 삶의 전위성에 대한 배반"일 수도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마냥 과거만을 그리워해서야 어떤 새로운 걸 해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시인의 레토릭과는 별개로 보통 사람들인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와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안타까운 향수. 1995년 타계한 빨치산 출신 경제학자 박현채와 그의 사상적 고갱이 '민족경제론'도 그리움의 대상 중 하나다. 침체된 경제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쉬이 보이지 않는 2005년 오늘 더 그렇다.

1934년 전라남도 화순에서 면서기이자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 때부터 <자본론>을 읽기 시작했던 영민한 학생. 광주서중 3학년 때 16세의 나이로 입산, 2년간 뼈를 깎고 살을 태우는 고통 속에서 소년 빨치산 문화중대장으로 살았던 사람. 이어진 체포와 투옥 속에서 겨우겨우 살아남아 우여곡절 끝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입학.

1950년대엔 총을 든 파르티잔으로, 1960년대와 70년대엔 탁월한 이론과 의협심으로 분단과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박현채의 삶은 격랑의 한국현대사와 그 궤를 같이 했다.

'만년 야인'으로 불리던 그는 수많은 일화도 낳았다. 노고단과 무등산, 백아산지구를 지휘하던 쟁쟁한 빨치산 사령관들의 무릎을 치게 만든 탁월한 언변, 이미 10대 때 완독한 마르크스 이론으로 서울 상대 교수들을 쩔쩔매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사은회장 술상을 엎어버린 불같은 다혈질.

하지만, 그는 50대 중반을 훌쩍 넘어서야 인권변호사 이돈명(84)의 도움으로 첫 직장(조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을 잡고서 친구들 앞에 나타나 "나도 이제 의료보험증 가졌어야"라고 자랑하며 아이처럼 웃던 순수한 사람이기도 했다.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소년 빨치산 조원제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박현채가 고혈압에 이은 각종 합병증으로 세상을 뜬 지도 어느새 10년이 흘렀다. 그가 촉발시킨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과 그의 저서 <민족경제론의 기초이론> <정치경제학 강의> <4월 혁명론>(강만길 등과 공저) 등도 차츰 잊혀지고 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 김중배(71)와 함께 박현채 생전 막역지우 중 한 명이었던 <녹두장군>의 작가 송기숙(70). 그의 회고를 통해 만약 살아있었다면 11월 3일 71세 생일을 맞았을 박현채의 삶과 그가 남긴 갖가지 일화들을 만나보았다.

광주항쟁 직전 첫 만남... 한 살 차이임에도 형 대접 받으려

- 박현채를 최초로 만난 것은 언제이고, 첫인상은 어떠했나?
"대부분의 경우 어떤 사람을 어디서 처음 만났던 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박현채씨와 처음 만난 기억은 뚜렷하다. 광주항쟁 직전 학내에서만 투쟁하던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기 며칠 전이었다. 전남대 교수들과 시내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그의 후배들이 박현채씨를 그 자리로 데리고 왔다.

광주에 강연을 하러 왔다며 소개했다. '요사이 그 서울 강연꾼들 말이요. 모두가 하나마나한 소리더만. 이때가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을 때요?' 거나하게 취한 판이라 한마디 객담을 했다. 그는 별로 내색을 하지 않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내가 광주서중 자기 선배인 줄 안대다가, '교육지표 사건'으로 징역을 살고 나온 뒤라 기가 죽은 것 같았다.

나는 그 기세로 안하무인으로 말패를 잡았는데 박현채씨는 다소곳이 술만 마셨다. 그런데 나중에 내가 자기 선배도 아니고, 나이도 한 아래라는 말을 듣고 송아무개 이 작자를 가만 두지 않겠다고 벼르더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 뒤부터 그는 나이 한 살을 일등병 계급장보다 더 내세우며, 큰소리를 치는 바람에 나는 항상 떡치듯 당하며 지내야 했다(웃음)."

▲ 함께 등산에 나선 박현채(왼쪽 첫번째)와 선후배들. 옆으로 소설가 조정래와 송기숙 등이 보인다.
ⓒ2005 송기숙 제공
- 박현채의 평소 성품은 어떠했는지. 또,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형과 가장 신뢰하는 인간형은?
"무슨 문제든지 단순명료하게 일도양단을 하는 성격이었다. 특히 누구든지 말을 잘잘 째고 있으면 뭐라 하기 전에 얼굴에 나타났다. 그런 사람들을 다그칠 때는 곁에서 보기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그와 유일하게 맞먹는 분은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한겨레신문 사장을 지낸 광주서중 동기 김중배씨였다."

- 박현채와 관련된 일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사사로운 부분과 공적인 부분 하나씩만 말해준다면.
"그는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광주 조선대학교에 교수로 취임했다. 당연히 그의 강의실은 만원이었다. 강의내용이 항상 새로운 이론이고 그만큼 신선했던 것 같았다. 강의안은 그대로 저서여서 한 학기가 끝나면 그 강의안을 손봐서 책으로 냈다. 그러면서도 술은 술대로 마셨다.

그가 논문을 쓸 때면 구상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지만, 구상을 하면 그대로 써내려가기만 하는 것 같았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머리에서 모두 구상해가지고 쓰기 시작하면 그대로 주욱 써내려가는 사람이 있고, 쓰면서 구상을 여러 번 고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머릿속에서 모두 구상해서 쓰는 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쓴 글이 거의 고칠 데가 없었다.

그가 조선대학교에 부임한 뒤에는 1주일에 거의 한번씩 술을 마시거나 등산을 했는데, 내가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 빨치산 생활이었다. 하얗게 말라죽은 싸리나무를 보면, 저게 빨치산들한테는 얼마나 귀한 것인 줄 아느냐고 발걸음을 멈췄다. 잘라서 말린 싸리나무와는 달리 제절로 하얗게 말라 죽은 싸리나무는 태워도 연기가 나지 않기 때문에 빨치산들이 밥 짓는 데는 그만큼 소중한 연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내용은 함께 들었던 조정래씨가 <태백산맥>에 쓰지 않았을까 싶다."

"강의안 자체가 저서였던 사람"... 함께 등산하며 빨치산 시절 체험 들어

- 박현채는 전직 대통령들을 어떻게 평가했나?
"박정희씨는 그의 변절 행적 때문에 인간적으로 멸시했다. 민족을 배반하고 관동군에 입대한 변절부터 그는 박정희씨 변절 행적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와 비슷하게 박정희씨의 변절 행적을 잘 알고 있는 고씨 성을 가진 목사가 있는데, 그에 따르면 박정희씨는 1년에 큰 변절 한번씩, 한 달에 작은 한번씩 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변절을 설교 시간마다 폭로하는 바람에 교도소를 자기 집처럼 들락거렸는데, 박현채씨는 그런 변절이 우리 역사를 어떻게 왜곡시켰는가를 여러 각도에서 설명했다. 전두환씨나 노태우씨는 별로 화제에 오른 것 같지도 않고, 김영삼씨에 대한 평가도 기억에 없다."

- 당신의 표현대로 박현채가 '야인 체질'이었다면, 다소 권위적이고 경직된 직업이라 생각되는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을 듯한데.
"그런 것은 특별히 기억에 없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병석에 누워서도 늘 강의 걱정을 하는 모습이었다. 병 걱정보다는 강의 걱정이었고, 병을 나으려는 것도 강의를 하기 위한 노력 같았다. 자기 집에 갔을 때는 목발을 짚고 마당을 돌면서도, 이 정도면 강의를 할 수 있겠지 하며 웃던, 어린애 같은 모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성실한 교수였다."

▲ 박현채와 송기숙 등이 함께 동학농민전쟁 유적지를 둘러보고 있다.
ⓒ2005 송기숙 제공
- 박현채의 빨치산 시절 일화 중 인상적으로 들었던 것은.
"경찰의 백아산 토벌작전이 막바지에 이르러 포위망이 바짝 좁혀올 때였다고 한다. 그때 여자 빨치산은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았는데 한겨울이라 모두 몸을 바짝 맞대고 잤고, 그 처녀는 나이가 가장 어린 박현채씨 옆자리에 누웠다. 당연히 색정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어 박현채씨도 눈을 망똥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한참 동안 잠이 들지 않아 몸뚱이만 뒤채고 있는데, 처녀 입에서 '아아~' 하는 한숨소리가 길게 꼬리를 끌더라는 것이다. 그 처녀는 다음날 전투에서 죽었다는데, 그 긴 한숨소리가 오래오래 남아 있더라고 기억했다. 그 무쇠 같은 박현채씨도 그 말을 할 때는 얄궂은 표정이었다. 그 말을 듣던 우리들도 그 긴 한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것 같아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거인이자 야인"... 나빠진 경제상황 볼 땐 임재경씨 탄식 떠올라

- 박현채를 상징할 수 있는 건 무얼까? 자유분방한 옷차림과 상아 파이프 외에는 없을까? 물건이 아니면 정신적인 것이라도.
"지금 우리 시대는 야인도 없고 거인도 없는 소인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야인이나 거인은 당대의 정치나 사회의 커다란 이슈를 들고 앞장섰던 사람이다. 박현채는 어두웠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았던 마지막 야인다운 야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박현채의 막역지우였던 송기숙.
ⓒ2005 노순택
- 만약 박현채가 살아 있었다면 2005년 오늘, 어떤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박현채씨가 작고한 다음해던가 광주에서 여러 지인과 제자들이 모여 추모집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때는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초상집 꼴이 되었을 때다.

그 자리에서 왕년에 경제부 기자로 이름을 날렸고, 한겨레신문사 초창기에 부사장을 역임했던 임재경씨가 '이럴 때 박현채가 있었더라면…'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박현채씨의 업적을 말하는 공식 자리에서도 하고, 뒤풀이 자리에서도 몇 번이나 그 말을 반복했다.

그때는 <민족경제론>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평가를 받고 있을 때이기도 했다. 임재경씨가 했던 그런 탄식을 다른 글에도 썼지만, 경제문제의 이슈가 크게 부각될 때마다 임재경씨가 아쉬워하던 간절한 표정이 떠오른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민족적·민중적 관점 총괄한 독창적 경제이론

ⓒ한길사
아래는 충남대학교 경제학과 류동민 교수가 민족경제론의 개념과 의미를 요약해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이다. 류 교수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다....<편집자 주>

'민족경제론'은 1978년에 출간된 책의 제목일 뿐만 아니라, 1980년대 후반까지 일련의 형성된 박현채의 경제학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에서는 지역적 개념인 '국민경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박현채는 그 안에 민족적 생존권을 뒷받침하는 경제영역(민족경제)과 민족적 생존권을 제약하고 축소·소멸시키는 경제영역이 존재하며, 양자는 상호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자본도 민족경제 내부에서 자기재생산의 기반을 갖는 민족자본과 그렇지 못한 외국자본 및 매판자본으로 구분된다. 민족경제영역의 충실한 발전은 궁극적으로는 전 국민경제가 민족경제화하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이는 민족경제론이 지향하는 중요한 목표가 기초산업과 중소기업의 발전에 기초하여 여러 산업들간의 긴밀한 분업관련 속에 자립경제를 달성하는 데에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생존기반이 민족경제의 부차적 영역에 있는 민중들은 자신의 계급적 이해와 민족적 이해가 일치하게 되면서 민족주의적 성향을 더욱 강하게 띠는 민족경제 통합의 주체가 된다고 한다. 이로써 좌우파를 막론하고 이론경제학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던 민족주의라는 개념도 민족경제론 내부에서는 이론적으로 설명된다.

민족경제론은 해방 이전부터 60∼7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져오던 민족주의적·민중적 관점을 총괄한 경제이론이라 위치 지울 수 있을 것이며, 박현채 자신이 시동을 건 80년대의 사회구성체 논쟁이라든가 심지어는 중소기업육성을 강조하는 '대중경제론'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스스로 인정했듯이 민족경제론은 그 자체로 완성된 체계를 추구하지는 않았으며, 그러한 점에서 지속적인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해결해야할 문제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먼저,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박현채는 한국이 국가독점자본주의단계에 있다는 지극히 일반이론적인 주장을 함으로써 그것이 일종의 특수이론인 민족경제론과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다음으로 오늘날과 같이 외국자본과 국내자본의 구분조차 모호해진 지구화 시대에 자급자족형의 재생산기반을 강조하는 민족경제론적 관점이 이론적·실천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민족경제론의 치열한 문제의식을 계승하는 동시에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 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