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記事를 읽는 재미

박정희 정권의 행정수도 이전 계획 비화

이강기 2015. 10. 28. 11:16


박정희 정권의 행정수도 이전 계획 비화

 

“조치원, 청주, 대전 삼각 지역에 首都 건설 통일 후 서울로 복귀”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수도 이전을 위한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수도권 인구 집중을
막기 위해 행정수도와 명문대학을 지방으로 이전하고 통일 후에는 다시 서울로 수도를 옮긴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1970년대 후반 주한미군 철수문제가 불거지자 일단 보류됐다가 박정희의 죽음으로 백지화됐다.
당시 프로젝트에 깊숙이 관여했던 실무자로부터 수도 이전 계획의 전말을 들어보았다(편집자).

 

 

 

1976 년 7월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과 서울시장, 그리고 몇몇 장관이 한자리에 모였다. 무임소(無任所) 장관실에서 기획한 ‘수도권 인구 재배치 기본구상’을 보고받기 위한 자리였다. 보고 내용의 핵심 중 하나는 나와 박봉환(전 동력자원부 장관) 수도권인구정책조정실장이 작성한 임시 행정수도 건설과 수도권 대학 이전 계획이었다.

두 시간에 걸쳐 보고가 진행되었으나 긴장된 분위기 탓에 숨소리 하나 흘러나오지 않았다. 대통령이 배석한 각료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침묵을 깨지 않았다. 마침내 Y 문교부 장관이 입을 뗐다.

“각하, 행정수도 이전은 국가안보와 민생 안정상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학이 서울에 집중한 것이 수도권 인구 증가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만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연구기관이 연구중에 있습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의 말이 이어졌다.

“연구는 무슨 연구! 이렇게 많은 대학생이 한 지역에 몰려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하지 않는가. 대학만 바라보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어찌 막을 건가. 나는 2∼3년 전부터 임시 행정수도 건설을 생각해왔네. 6·25 전쟁이 끝난 후에 중부 지역으로 수도를 옮겼어야 했어. 그러나 서울에 계속 머무른 탓에 이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야. 임시 행정수도 건설 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나.”

박 대통령은 단호했다. 그는 곧장 임시 행정수도 건설 구상을 승인하고 구체적인 사업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수도권 인구 분산 필요성 대두

내가 행정수도 이전 문제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으로 재직하던 1975년 12월 중순, 청와대 경제제1수석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청와대에 와서 할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다음날부터 청와대로 출근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경제제1수석실로 향했다.

당시 경제제1수석은 이경식(전 한국은행 총재)이었다. 그리고 오휘영 비서관(전 조경학회장)과 이성권 과장(전 부두관리공사 사장)이 조경관광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수석실에 들어서자 오휘영 비서관이 나를 부른 배경을 설명했다. 한마디로 “수도권 인구대책팀을 만들어 수도권 인구집중 억제대책을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어 “이는 대통령의 지시사항”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대책팀의 책임자는 오휘영 비서관이었고, 이성권 과장이 실무를 총괄했다. 대책팀은 두 체제로 나뉘었는데, 나와 유원규 건설부 도시계획계장이 한 팀을 이뤘고, 나머지 팀에는 송병락(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을 비롯한 KDI 연구위원들이 속했다. 청와대가 나를 부른 까닭은 유원규 계장이 수도권 인구대책이 서울시와 관련된 문제인 만큼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이 참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경식 수석은 수도권 인구억제책 마련의 많은 부분을 손수 관장했다. 나를 불러 추진배경과 작업방향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 수석은 “수도권 인구 집중이 경제발전을 저해하고 국토개발 불균형을 초래한다”며 “가능하면 인구를 지방으로 유도할 수 있는 행정대책을 수립하라”고 요구했다. 여기서 행정대책이란 ‘부드러운’ 접근방법을 말한다. 지방으로 내려가는 기업에 세금감면 혜택을 주거나 각종 규제를 풀어주는 것 등이다.

처음 한 달 동안은 각종 자료를 취합하며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었다. 이성권 팀장을 통해 정부 각 부처 공무원을 청와대로 불러 필요한 자료를 요구하는 한편 이 수석이 직접 학계 교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의견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교수들은 ‘지방 유인책이 제시된다면 지방으로 내려갈 생각이 있느냐’는 청와대의 질문에 매우 난감해했다고 한다. 총론에는 동의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거부감을 보였다는 것.

행정관료팀은 국내외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자료와 연구실적은 극히 미미해 실질적인 행정시책을 마련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인구총량 연구는 나름대로 축적되었지만, 인구의 도시집중 문제는 미개척 분야였던 것.

두 달 동안 작업이 진행됐지만, 실질적인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자료수집과 몇 가지 구상안이 나왔을 뿐이다. 결국 나는 현재의 연구방향이 부적절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수석이 지시한 ‘부드러운 행정대책’으로는 수도권 인구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1970년대 중반에 이미 서울은 대한민국 그 자체였다. 모든 분야에서 서울이 국민에게 주는 매력이란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산업시설은 서울, 인천, 경기 등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고 금융 및 중소기업 투자도 서울 인근으로만 몰려들었다. 명문대학은 말할 것도 없이 전체 대학생의 75%가 서울에 거주했다. 객관적으로 인구와 관련된 모든 지표는 서울로만 향했지, 서울 밖으로는 나가지 않았다.

 

 

“행정수도라니 무슨 소리인가”

이런 상황이라면 몇 가지 지방이전 유인책을 제시한다 해서 국민의 의식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었다. 학자들 또한 ‘행정시책으로는 인구 분산을 정밀하게 추산할 수 없으며 실제로도 인구가 조정될지 의심스럽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강력한 수도권 인구억제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대책이 바로 ‘행정수도와 명문대학 지방이전’이었다. 곧 이러한 방향으로 작업하겠다는 의견을 오휘영 비서관에게 제출했다. 조선시대 이후 줄곧 서울을 중심으로 중앙집권 해온 결과, ‘사람은 나서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서울에 가야만 부와 명예를 쥘 수 있다’는 의식이 화석처럼 굳어지지 않은가. 나는 행정수도를 옮겨 서울 중심의 의식을 해체하고 산업시설과 교육기관을 이동시켜 실질적인 인구감소 효과를 내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 의견서는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의견서를 제출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1976년 2월말 팀이 해체됐던 것이다. 수도권 인구대책 업무가 제1경제수석실에서 무임소장관실로 이관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시로 복귀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임소장관실에서 연락이 왔다. 경제수석실에서 작업한 내용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소공동에 있는 ‘남강’이라는 일식집에서 신형식(전 공화당 사무총장) 무임소 장관과 박봉환 수도권인구정책조정실장을 처음 만났다. 그들은 그동안의 연구결과를 듣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경제수석실에서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별로 해줄 말이 없었다. 그 대신 평소 생각해왔던 임시 행정수도 건설과 명문대 지방이전 문제를 꺼냈다. “이것만이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임시 행정수도라니, 무슨 소리냐는 것이다. 신 장관은 “그런 어마어마한 행정계획을 꼭 세워야 하느냐” “가능한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평소 생각해오던 것을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통일 후 다시 서울을 수도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통일 이전까지 임시로 행정수도를 이전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점, 우리 국민의 교육열을 감안할 때 명문대 이전으로 실질적인 효과와 의식의 변화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두 시간 동안 수도 이전의 필요성에서 토지 문제까지 설명하자 신 장관과 박 실장은 처음과는 달리 상당히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신 장관은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겼다.

며칠 지나자 무임소 장관실에서 연락이 왔다. 내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작업을 진행할 테니 참여해달라는 것이었다. 단 이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로 해야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나는 곧장 참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소신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무임소 장관실에서 비밀프로젝트 추진

‘수도권 인구 재배치에 관한 기본 구상’ 프로젝트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무임소 장관실 실무자들은 수도권 인구억제책에 대한 행정시책을 연구하고, 박봉환 실장은 나와 함께 임시 행정수도 건설 제안서를 만드는 체계였다. 바로 이 두 가지를 뼈대로 한 ‘수도권 인구 재배치에 관한 기본구상’을 박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예정이었다.

박 실장과 나는 보고서를 만드는 데 진력했다. 프로젝트 참여를 비밀로 해야 했기 때문에 서울시 업무와 동시에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서울시청에서 근무하고, 퇴근 후에는 서린호텔, 운당연관 등을 전전하며 임시 행정수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박 실장은 재무부 이재국장 출신이었다. 당시 재무부 이재국장은 치안국장, 내무부 지방국장과 함께 ‘일등 국장’으로 불렸다. 이름에 걸맞게 박 실장은 우리나라 경제상황을 전반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토계획이란 그에게 매우 생소한 분야였다. 박 실장은 “경제 전반을 다루는 재무부 이재국에서 일하다 보니 건설교통부를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국가의 근간을 짜는 국토개발의 중요성을 절감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박 실장은 엄청난 에너지와 열정의 소유자였다. 그는 국토문제, 행정수도 문제를 원론부터 공부하기 시작해서 나와 함께 수도이전에 수반되는 전반적인 문제를 밤 새워가며 토론했다. 답을 찾기 힘든 문제는 누구든 찾아가 의견을 듣고 해결책을 구했다. 박 실장이 없었더라면 임시 행정수도 계획 자체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박 실장은 후일 신 행정수도 건설의 모든 책임을 맡게 되는데, 그의 탁월한 추진력이 낳은 결과였다.

 

박정희 정권 때 수도권 인구 분산 정책으로 기획된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백지계획.

두 달 동안 작업한 후 박 실장과 나는 임시 행정수도 건설계획을 포함한 인구대책 보고서를 완성했다. 이 같은 사실은 철저히 엠바고에 부쳐졌다. 수도권 인구 재배치 기본구상은 학자들과 공개적으로 논의한 구상이니 비밀로 할 필요가 없었지만, 행정수도 이전 문제는 파장이 대단히 큰 문제였다.

1976년 7월 하순경 대통령 보고 일정이 잡혔다. 보고 상황 전말에 대해서는 나중에 박 실장이 전해주었다. 그에게 이야기를 듣는 내내 등에서는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청와대 보고를 앞두고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가 사전에 보고 내용을 듣고 싶다고 연락해왔다. 박 실장이 총리실에 가서 보고를 진행했다. 임시 행정수도 건설 부분에 이르자 최 총리의 눈이 둥그래지면서 보고를 중단시켰다. 침착하기로 정평이 난 최 총리가 큰 목소리로 ‘이 태평한 시대에 무슨 수도를 옮긴다는 말이냐’고 호통치면서 ‘엄청난 내용에 말문이 막힌다’고 말했다. 보고를 마치고 무임소 장관실로 돌아온 박 실장은 총리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보고 내용 중 임시 행정수도 건설 부분을 삭제하라는 총리의 지시를 전했다. 박 실장은 매우 난감하고 허탈해했다.

“김 과장, 어떻게 하면 좋겠소?”

난감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임시 행정수도 건설에 대한 신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냥 보고하시죠. 행정수도 내용이 빠지면 용의 눈이 빠진 꼴이 됩니다. 국익을 위한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 알겠소. 각하께서 잘 판단해주시겠지.”

박 실장과 나는 임시 행정수도 건설이 국익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대가를 바라고 계획안을 마련한 것이 아니었다. 임시 행정수도가 국가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총리의 반대에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다.

보고 자리에는 국무총리, 비서실장, 서울시장, 국방부장관, 건설부 장관, 국무총리, 문교부 장관, 무임소 장관 등 각료들이 대통령을 배석했다. 박 실장은 대통령에게 임시 행정수도 건설과 명문대학 지방 이전 구상에 대해 보고했다. 임시 행정수도 후보지로는 조치원, 청주, 대전을 잇는 삼각지역을 추천했다. 마침내 보고가 끝나자 참석자 모두는 갑자기 숙연해졌다. 박 실장이 잡은 지휘봉에서는 그의 손에서 난 땀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박 대통령이 박수를 치며 격찬했다. 회의 참석자 중 박 대통령만이 유일하게 반색하며 보고 내용을 세세하게 재차 확인했다. 앞서 말했듯이 문교부 장관이 ‘수도 이전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논의가 필요하고 대학 이전 문제도 쉬운 일이 아니다’며 이견을 말하자, 박 대통령은 “그 많은 대학이 서울에만 있어서 어떡하느냐”며 “수도 이전은 진작 추진했어야 하는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 계획은 나라의 보약과 같으니 계획대로 추진하되 절대 비밀로 하라”고 지시했다. 신형식 장관과 박 실장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김재규 당시 건설부 장관이 박 실장을 불렀다.

“박 실장은 어떻게 각하의 품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각하의 마음을 알아챘소. 이것 보시오. 하나는 김종필 공화당 총재에게 하명하여 몇 개 후보지를 공중 촬영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건설부를 시켜 극비 작업을 한 것이오. 둘 다 참고가 될 것이오.”

김재규 장관이 건네준 것은 행정수도 후보지 자료였다. 이 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나 또한 깜짝 놀랐다. 박 대통령은 이미 행정수도 이전을 구상하고 최측근에게 후보지를 조사하라고 비밀리에 지시해놓았던 것이다.

이후 박 대통령은 임시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백지계획 추진을 공식 선언했다. 백지계획이란 후보지를 정하지 않고 계획을 추진한다는 의미다. 이로써 수도권 인구억제책으로 나온 임시 행정수도 건설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꿀 새로운 역사적 과업으로 등장했다.

 

‘불도저’ 시장과의 만남

나는 1959년 서울대 공대 토목과 졸업 후 주임교수의 추천을 받아 서울시 건설국 토목과 포장계로 첫 출근하게 됐다. 말단 공무원 시절엔 현장에서 살다시피했다. 포장공사에서부터 하수도공사, 토관(土管) 만드는 공장 등에서 일했다. 그러나 1966년 도로계장으로 발령받았다. 때마침 ‘도로시장’이라 불리는 김현옥 시장이 취임했다.

김 시장은 재임기간 동안 도로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불과 4년 동안에 중앙청, 청와대 앞 도로와 삼일로, 불광동에서 구파발도로, 미아리 고개, 스카이웨이, 강변도로, 중랑천 도로 등 수많은 도로를 만들었다. 김 시장이 ‘불도저’라고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나도 불도저처럼 일했다. 지금 서울시 어느 곳에서든 5분내에 이 기간 동안 건설한 도로에 진입할 수 있다. 정말 대대적 역사(役事)였다.

1970년 양택식 서울시장은 취임하자마자 지하철 1호선 공사를 추진했다. 나는 지하철건설본부 공사과장으로 임명됐다. 1호선은 착공 3년 만에 완공됐는데, 일본에서 경제협력 차관을 얻어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일본 공사 관계자들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공사 재원뿐 아니라 전동차도 일본에서 제작해왔다.

그러자 일본 공사 관계자들은 토목공사도 자신들이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토목공사는 기술적으로 힘든 작업이지만, 우리 기술로도 가능한 것이었다. 지하철 1호선 공사를 통째로 일본에 넘겨줄 순 없었다. 협상이 진행되자 나는 토목공사는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우리의 기술력이 신뢰할 만한 수준임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지하철 1호선 토목공사는 우리가 맡아 진행했다.

1974년 8월15일, 드디어 개통하는 날이 왔다. 개통 기념식에서 박 대통령이 테이프를 끊고 청량리역에서 구로역까지 시승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3년 동안 흘린 땀의 성과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니 적잖이 흥분되었다. 내 손으로 지하철 공사를 완수했다는 자부심도 컸다. 그러나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이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해 박 대통령의 개통 테이프커팅 행사는 전격 취소되고 말았다.

다시 청와대로 파견

지하철 1호선 공사가 마무리된 후 나는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도시계획과장으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기획원 강경식(전 경제부총리) 국장, 청와대 이진설 비서관이 나를 찾아왔다. 수도권 인구문제로 협의하고 싶다고 했다. 이후 나는 청와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또다시 임시 행정수도 건설과 연을 맺게 되었다.

1977년 2월 박 대통령은 서울시를 방문한 자리에서 행정수도 이전을 공식 발표했다. 그해 5월 수도이전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기 위해 청와대 직속으로 ‘중화학공업기획단’에 임시 행정수도 건설 관련 전담 부서가 설치됐다. 박 대통령은 박봉환 실장을 책임자로 임명하고 공무원 9명과 민간 전문가를 참여시켰다. 사업추진은 철저한 보안 속에서 이루어졌다.

중화학공업기획단 단장은 오원철 경제제2수석이 겸임했다. 중화학공업기획단은 우리나라 중화학공업에 관한 모든 계획을 추진하는 곳이었다. 중화학공업기획단은 자주국방을 위한 무기개발 계획인 ‘율곡사업’도 추진하고 있었다. 중화학공업기획단은 여러 비밀 프로젝트를 동시에 추진하는 대통령의 핵심 참모부였던 것이다.

중화학공업기획단의 부단장으로 수도이전계획 책임을 맡은 박봉환 부단장이 나를 찾았다. 그는 내게 임시 행정수도 건설사업에 참여해달라고 했다. 청와대를 통해 호출한 것이기 때문에 서울시에서도 이견이 없었다. 나는 다시 청와대로 파견되어 임시 행정수도 건설 실무팀장을 맡게 되었다. 팀원들은 건설부의 유원규를 비롯해 정부 각 부처에서 뽑혔다. 도시계획 관련 분야 석학 및 교수 50여명도 참여했다.

행정수도 건설 전담부서 설치

임시 행정수도 건설은 단순히 땅을 매입해 도시계획을 세우고 정부청사를 옮기면 완성되는 작업이 아니다. 한 나라의 수도를 옮기는 일이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나는 행정수도 이전 사업을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것을 요구했다. 첫째, 수도 이전에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즉 어떠한 국가이념으로 수도 이전을 추진할 것인가. 둘째, 도시 건설 방법과 이후 도시 발전 비전은 무엇인가. 셋째, 수도 이전시 나타날 현실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프로젝트 추진 초기에는 행정수도 건설에 역사적 의미나 이념을 부여할 이유가 있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수도를 이전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자, 국가발전의 새로운 계기가 되는 만큼 도시계획 차원으로 접근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당시는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나서 5년 정도 지난 때로 국가혁신의 계기가 필요한 시기였다(이는 아마도 박 대통령이 수도를 이전하려고 했던 핵심적 이유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국가의 중심이 이동하면 인구 배치 뿐 아니라 국토 개발의 기본 틀이 바뀌고, 여기에 따라 교통 및 행정체계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또한 수도 이전에 대한 국민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 임시 행정수도 건설을 통해 국가가 더 발전하고 국민이 더 잘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국민에 동의를 구할 수 있을 것 아닌가? 혹시 전쟁이 날 경우 서울을 포기하는 건 아닌지, 서울이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게 되는 건 아닌지 등 국민의 우려를 불식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임시 행정수도 건설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 새로운 수도를 만드는 작업은 기존의 문화를 종합하고 새로운 문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 만큼 과학기술의 발전과 정신문화 수준의 발전을 예측해 미래형 도시를 건설해야 한다. 또한 새 수도는 가장 과학적인 모델이 되어야 한다. 도시건설의 공법, 기술, 미학 모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 축적된 기술과 공법을 종합하고 새로운 기술을 시도하는 장(場)으로 삼아야 한다. 도시건설뿐 아니라 운영에서도 에너지 절약과 경제적 관리가 가능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장기적으로 인구 50만의 도시로 발전한 후에도 별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임시 행정수도 후보 지역으로는 조치원, 청주, 대전의 삼각지역을 지정했다. 따라서 임시 행정수도는 국토의 중심에 위치하는 동시에 전국을 두 시간 이내로 관할하게 된다. 동서남북으로 두 시간 생활권을 구축하면 국가 경제가 빠르고 역동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될 것으로 보았다. 행정수도가 옮겨가면 이에 맞춰 산업의 재배치, 도시의 재배치 등 국토계획의 전면 재배치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와 얼마나 가까우냐에 따라 공장부지가 결정됐다. 그러나 행정수도가 이전하면서 국가교통망이 재정비되면 산업시설도 분산, 재편될 것이 분명했다.

도시를 건설할 때 제일 먼저 풀어야 할 숙제는 지가(地價) 앙등 문제다. 지가 대책을 세워야만 도시 건설을 본격화할 수 있다. 당시 나는 토지를 국가가 보유하고 개인에게는 이용할 권리만 준다면 지가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소유권은 국가가 갖고, 개인은 토지 이용권만 매매하는 방안을 집중 검토했다. 이에 대해서는 추진팀 안에서도 찬반 양론이 나타났다. 나는 초기 비용이 들기는 하지만 부동산 투기를 사전에 잠재울 수 있는 강력한 대책이 있어야만 도시를 건설, 관리하는 데 생산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수도 지가가 안정되면 다른 지역의 지가도 안정시키는 파급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다.

결국 토지대책은 박 대통령이 임시 행정수도 건설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날을 기준으로 지가를 동결, 국가가 필요한 지역만 매입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후 토지문제와 관련해 유신 긴급조치인 ‘임시 행정수도 건설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공포됐다.

우리는 국가혁신방안으로 수도 이전을 통한 행정체계 쇄신을 구상했다. 추진팀은 전국을 2시간 이내 생활권으로 좁히고 정보통신을 활용해 국가 행정체계를 대폭 간소화하는 방안을 제기했다. 지금의 행정단위인 도·시·군·면에서 도를 없애고 중앙정부가 직접 시·군과 정책을 신속하게 공조하는 행정단위 축소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는 백지계획에서는 계층의 축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권고하는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행정수도 이전에서 가장 큰 현안으로 떠오른 것이 서울에 대한 대책이었다. 두 가지 대책이 필요한데 하나는 서울 발전을 위한 새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통일 후 서울로 수도를 다시 옮기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도 이전으로 서울 시민의 불안심리가 팽배할 수 있기 때문에 서울 발전 대책이 필요했다. 서울의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서울시에만 맡길 일이 아니라 중앙정부가 공동으로 대책을 수립해야 했다. 서울에서 행정부가 빠져나가는 것인 만큼 안보문제와 공동화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군사작전은 서울 고수방어론(전쟁이 나도 후퇴하지 않고 반드시 서울을 지킨다)이었는데 수도가 이전되면 군사작전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심리가 작용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행정수도 이전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서울 및 수도권은 전체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사는 과도한 인구 밀집 지역이 됐다.

또한 서울이 쇠퇴하지 않고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청사진을 제시해야 했다. 우리는 서울시를 국제상업도시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 통일 이후를 위해 서울이 어떤 상태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했다. 통일 후 수도를 다시 옮겨온다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정부청사나 공유지로 쓸 수 있는 여유토지를 확보하고 있어야 했다. 이로 인해 현재 주한 미8군 주둔지역을 수도 복귀 후 정부청사 예정지나 공유지로 활용할 계획을 세워두었다.

백지계획 수립 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으로 돌아와 내가 가장 먼저 진행한 일은 미8군 지역을 녹지로 지정하는 것이었다. 녹지지역으로 지정되면 미8군 일대는 국공지가 된다. 따라서 허가 없이는 집을 지을 수도, 개발 사업을 진행할 수도 없다.

미8군 주둔 지역은 전체 80만∼100만평. 이 정도 면적이면 통일 후 충분히 정부청사를 수용할 만한 면적이다. 나는 도시계획국장으로 재임하면서 통일 후 서울이 수도로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반시설을 최대한 유지 관리하는 일을 했다. 미8군 지역을 공공 공지 형태로 유지 보전하려는 서울시의 정책은 지금까지 면면히 유지되고 있다.

후보지 놓고 논란 일기도

추진팀은 마지막으로 임시 행정수도의 도시형태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연구했다. 그리고 이전할 정부 각 부처의 순서, 도시의 성장과정, 필요한 재원, 행정수도 주변권역 등에 대한 대책을 수립했다. 우리는 제기될 수 있는 모든 사안에 대한 계획을 사전에 세워두어야 한다고 여겼다.

오원철 수석이 공주시 장기면을 행정수도 후보지로 강력히 추천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백지계획에서는 공주시 장기면이 후보지로 확정되지 않았다. 당시 행정수도 문제는 박봉환 부단장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한 것이 아니라, 오 수석을 통해 청와대로 보고하는 체계였다. 따라서 오 수석은 행정수도 이전에 관해 여러 지침을 내렸다. 추진팀은 오 수석의 지침을 대부분 받아들였지만 후보지로 공주시 장기면을 지명한 것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도 오 수석이 왜 공주시 장기면을 후보지로 주장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순 없다. 그러나 오 수석은 서울을 모델로 새 수도를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장기면이 형태상 서울과 유사하다는 논리를 폈다. 장기면 앞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뒤쪽으로는 산이 있어서 한강과 북한산이 있는 서울과 흡사하고 전국과 사통팔달(四通八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추진팀과 자문 교수단은 이에 크게 반발했다. 백지계획의 취지는 후보지를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련한 계획으로 어떤 장소에서라도 현장에서 몇 가지 사안을 조정하면서 바로 적용시킬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후보지를 확정하여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원래의 취지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장기는 후보지로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몇 차례 논의를 통해 일단 후보지를 확정하지 않고 장기를 모델로 행정수도 후보지의 밑그림을 그려보자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문제가 속출했다. 적절한 그림을 그린 후 후보지를 물색하는 것과후보지를 가정하고 밑그림을 그리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도시의 크기 문제, 중심축을 남북으로 할 것인지 동서로 할 것인지 등은 지형에 달린 문제인데 장기를 기준으로 삼으면 수도의 밑그림에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추진팀은 장기뿐 아니라 다른 후보지도 비교, 검토해 오 수석에 보고하기로 했다. 장기 이외에 논산, 공주, 천원 등을 조사하고 추가로 금산, 옥천, 진천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추진팀은 마무리 작업으로서 도심부 중심 설계문제에 총력을 기울였다. 도시 중심부를 종축이나 횡축으로 할 것인지, 어떤 공법으로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등을 심층적으로 논의했다.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한 끝에 다음과 같은 건설계획이 수립됐다.

북쪽에 행정부처를 배치하고 그 앞에 ‘역사의 광장’을 건설한다. 동쪽에는 입법부를 설치하고 그 앞에 ‘자유의 광장’을 건설한다. 서쪽에는 사법부를 배치하고 그 앞에 ‘정의의 광장’을 건설한다. 남쪽에는 행정수도 시청사를 건설하고 그 앞에 ‘번영의 광장’을 배치한다. 또 이를 십자도로로 연결해 중앙에 ‘민족의 광장’을 설치, 중심부가 수도로서의 상징성을 갖고 민족의 미래와 번영을 나타내도록 하기로 했다. 추진팀은 도심부 중심 설계를 통해 새 행정수도의 정신과 상징을 나타낼 수 있도록 마지막 정력을 쏟아부었다.

 

 

백지계획의 백지화

당시 우리가 작성한 임시 행정수도 건설의 원칙과 방법은 초고로 만들어져 1977년 12월 인쇄에 들어갔다. 여기에는 신 행정수도 건설의 역사적 의의, 수도 도시계획, 중심지구 계획, 행정수도 영향의 긍정성과 부정성, 광역권 및 서울에 대한 대책, 토지제도 개선방향, 국가 및 지역 기본 행정체계 변경, 그리고 단계별 추진계획 등이 담겨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각 부문별 세부계획이 수립됐다. 1978년부터는 분야별로 용역을 맡겨 연구소와 학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작업이 진행됐다. 1977년 12월 초고가 완성된 후 나는 서울시로 돌아왔다.

백지계획은 세부계획이 나오는 대로 후보지를 선정해 공사에 착수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한미군 철수문제가 터져나오면서 박 대통령은 임시 행정수도 건설을 잠시 미루겠다는 뜻을 밝혔다. 임시 행정수도 건설을 위해 당시 추산으로 5조원의 예산이 계획됐었는데, 이 예산을 자주국방을 강화하는데 써야겠다는 것이 박 대통령의 뜻이었던 것이다.

요즘 언론에서는 박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 계획을 백지화한 이유에 대해 여러 설(說)이 난무하지만, 확인한 바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앞세우면서 임시 행정수도 건설을 잠시 미룬 것일 뿐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박 대통령이 사망하고 신군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공사는 착수되지도 못한 채 백지화된 것이다. 추진팀은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해체되고말았다. 나 또한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끝으로 공직을 떠났다.

그러나 행정수도 이전문제가 완전히 묻혀버린 것은 아니었다. 신군부는 집권 초기에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계획을 면밀하게 검토한 적이 있다. 공직을 떠나 민간기업에 근무하던 1982년, 청와대 김재익 경제수석이 나를 급하게 찾았다. 내가 작업했던 행정수도 후보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김재익 경제수석과 함께 헬기를 타고 백지계획 수립 당시 후보지를 둘러보았고 후보지 입지 선정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헬기를 타고 현지를 몇 번 돌아보던 중 김 수석이 계룡산 일대에 행정수도를 건설할 수는 없느냐고 물어왔다. 동행한 김종구 비서관도 자꾸 풍수지리를 언급하며 계룡산 일대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 나는 계룡산 일대는 구릉지대인 데다 너무 좁기 때문에 행정수도 부지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의견을 밝혔다.

김 수석이 말한 계룡산 일대는 원래 군사지역으로 계획했던 곳으로 백지계획에서는 공개적으로 기록할 수 없었다. 계룡산 일대는 육해공군의 본부설치 장소로 예정해두었던 곳이었다. 이후 임시 행정수도 건설 계획은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지만 계룡산 일대에는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비전 제시해 국민 지지 얻어야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후 ‘신 행정수도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수도 이전을 위한 준비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2004년에 후보지를 선정하고 2005년부터 수도 이전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30년 전 신 행정수도 건설에 참여했으나 공사 직전 좌절을 맛본 사람으로서 만감이 교차한다. 당시 임시 행정수도 건설이 예정대로 진행되었더라면 지금쯤 서울을 비롯한 국가 전반이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 서울은 기형적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인구는 줄지 않고 규제만 작동해버린 결과이다.

지금의 행정수도 이전계획도 일단 결정된 일인 만큼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계획을 제대로 세우고 온전하게 추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제 나름의 당리당략에 따라 흔들린다면 소중한 예산만 낭비한 채 부작용만 남게 될 것이다.

金秉麟
●1936년 전남 나주 출생
●서울대 토목공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도시계획 석사
●서울시청 지하철본부공사과장, 도시계획과장, 도시정비담당관, 하수국장, 도시계획국장 및 삼익주택 사장, 미라보건설 사장
●현 행정수도포럼(NCCF) 회장

현재 추진되는 행정수도 이전사업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이 적지 않다. 그러나 정부와 수도이전 실무자들이 오직 국익의 편에 서서 흔들리지 않는다면 행정수도 이전 사업은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 행정수도 이전이 차질 없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해 국민의 지지를 받고 정치적 힘을 한데로 모으는 과정이 필요하다. 행정수도 이전을 성공리에 마무리해 국운 융성의 계기를 마련하길 기대한다.

   (끝)

 

구술: 김병린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정리: 신주현 asinamu7@hanmail.net
발행일: 2004 년 04 월 01 일 (통권 535 호)
쪽수: 406 ~ 419 쪽

신동아 2004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