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부끄러운 이야기
오태진 논설위원 tjoh@chosun.com
조서일보
입력 : 2004.11.09 18:46 21' / 수정 : 2004.11.09 19:49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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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다녀온 뒤, 뜨거운 국을 마신 뒤, 탁 트인 전망 앞에서, 머리를 깎고 나서 모두 ‘시원하다’고 하니 외국 학생들에게는 뜻이 영 ‘시원치 않은’ 말이다. ‘거시기하다’고나 할까.” 터키 유학생 아크프나르는 “한국어에선 하나의 단어가 다양한 문맥에 쓰이며 미묘하게 다른 감정을 표현해낸다”며 놀라워했다. ‘탁’ ‘착’ ‘확’ ‘휙’처럼 짤막한 의성·의태어의 맛도 안다. 택시를 타면 기사에게 “브레이크 좀 ‘콱콱‘ 밟지 마세요”라고 한다.
아크프나르는 이호철의 50~60년대 초기작 ‘탈향(脫鄕)’ ‘나상(裸像)’ ‘남녘사람 북녘사람’에 푹 빠졌다. 그녀는 작가가 체험으로 쓴 전란과 분단의 처참한 절망에 깊이 공감했다며 이호철의 작품을 번역해 터키에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이미 작년엔 ‘한국의 언어’를 번역했다. 터키에서 출간된 첫 한국어 개론서다. 그녀는 터키 최고의 한국어 교육자가 되고 싶었다.
그녀가 앙카라대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것은 한국전에 참전한 할아버지와 외삼촌으로부터 늘 한국 이야기를 들었던 덕분이다. 14군데 총상을 입고 살아난 외삼촌은 아들을‘코레’(한국)라고 불렀다. 그녀는 95년 장학생으로 서울대에 유학 와 국문학 석·박사과정을 밟았다. 한국어 책과 자료를 한 달에 많게는 400㎏씩 터키로 부쳤다. ‘형제 나라’에 대한 터키인의 폭발적 관심에 비해 교육자료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난 봄 어느 신문에 낸 기고에서 ‘외국인들이 자신과 한국의 정체성에 관해 뚜렷이 기억하게 될 곳’으로 출입국사무소를 꼽았다. 그녀는 미국인 아닌 외국인들에게 함부로 하는 그곳 직원들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한국인들이 외국인을 힘있고 부유한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로 구분하는 순간 차별은 시작된다.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사실만으로 잠재 범죄자나 불법체류자라는 선입견을 갖고 쉽게 반말하고 이류인간 취급한다.’
그녀는 설마 자기가 그 덫에 걸려 한국에서 쫓겨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훈민정음’을 연구한 박사논문을 마무리하던 그녀는 체류 연장을 거부당하고 엊그제 귀국 비행기를 탔다. 지도교수는 “다른 유학생들이 눈독을 들였지만 그녀는 한국과 한국어 사랑에 빠져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10년 동안 한국 사랑을 담아온 내 마음의 유리병이 깨져버렸다”는 말을 남겼다. 사진에 잡힌 그녀의 씁쓸한 표정에서 쉽게 가시지 않을 모멸감이 읽혔다.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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