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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처럼… 불꽃처럼… 최은희 '92년 드라마'

이강기 2018. 4. 17. 08:25

영화처럼… 불꽃처럼… 최은희 '92년 드라마'

송혜진 기자

안영 기자

조선일보, 2018.04.17 03:01   

[최은희 별세]

17세때 극단에서 연기 시작
6·25 전쟁통에 납북됐다 탈출… 두번의 결혼과 두번의 이혼
김지미·엄앵란과 트로이카… 김지미와 성춘향 대결서 승리도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분단과 냉전을 온몸으로 겪었다. 평생 두 번 결혼(촬영기사 김학성, 영화감독 신상옥)했고 두 번 이혼했으며, 납북당하고 극적으로 탈출했다. 망명자로 살다가 한국에 돌아와 눈을 감았다. 영화배우 최은희(92)의 삶은 영화보다 극적이었고 불꽃보다 맹렬했다.

전쟁 겪으며 강해진 여배우

1926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난 최은희는 열일곱 살이던 1943년 친구 손에 끌려 극단 '아랑'에서 연기를 시작했다. 고전적인 외모의 그는 무대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1947년 영화 '새로운 맹서'로 스크린에 데뷔했고 이때 만난 촬영감독 김학성과 결혼했다. 이후 '밤의 태양'(1948) '마음의 고향'(1949)을 찍으며 스타로 등극했다.

1954년 주한 미군 위문 공연을 온 미국 배우 메릴린 먼로와 함께(왼쪽 사진). 1961년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한 장면(오른쪽 사진).
1954년 주한 미군 위문 공연을 온 미국 배우 메릴린 먼로와 함께(왼쪽 사진). 1961년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한 장면(오른쪽 사진). /신상옥기념사업회 제공·한국영상자료원

한창 인기를 얻던 그는 6·25전쟁 때 인민군 '경비대 협주단'과 국군의 '정훈공작대'에서 차례로 일해야 했다. 2010년 본지에 기고한 글에서 최은희는 '목포에서 영화를 찍고 있을 때 인민군이 의정부까지 내려왔고, 곧 서울을 삼킬 기세라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에 있는 식구들이 걱정돼 기차를 타고 올라가 6월 27일 서울역에 도착했다'고 썼다. 최은희는 서울에 오자마자 인민군 장교에게 끌려가 북한 경비대 협주단에서 선전 연극에 동원된다. 북한군은 9·28 수복을 앞두고 최은희를 북한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평남 순천에서 최은희는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는 '전쟁을 겪으며 나는 강해졌다. 전쟁 이후엔 대담하고 강해졌다. 나를 자주 폭행하던 첫 남편과 헤어지고, 1954년 신상옥 감독과 결혼했다. 이후론 쭉 영화에만 몰두하며 살았다'고 썼다.

이혼 후 더 뜨겁게

두 번째 남편 신상옥 감독(1926~ 2006)과 만난 건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를 찍으면서였다. 자서전에서 최은희는 "짜장면을 앞에 두고 신 감독과 처음 만났고, '간통 혐의 1호'란 세간의 비난을 받으면서 1954년 3월 7일 서울 신당동 빈대투성이 여인숙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썼다. 두 사람은 이후 23년 동안 130여편 영화를 찍었다. '꿈'(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백사부인'(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등이 이때 나왔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으로 대종상의 전신인 제1회 국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납북 당시 영화 촬영 중인 최은희.
납북 당시 영화 촬영 중인 최은희. /엣나인필름
인기가 치솟으면서 '트로이카'로 불렸던 김지미·엄앵란과의 경쟁도 치열했다. 1961년 신 감독이 35세 최은희를 주인공으로 찍은 영화 '성춘향'은 홍성기 감독이 21세 아내 김지미와 함께 찍은 '춘향전'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돼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춘향 대결'이라고 불린 이 경쟁에서 '성춘향'이 서울 관객 38만명을 동원하며 승리했다.

최은희·신상옥 두 사람은 아이 둘을 입양해 함께 키웠지만 이후 신 감독이 배우 오수미와의 사이에 두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을 최은희가 알게 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자서전에서 최은희는 '(외도) 사실을 전해들었을 때는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한 것이 그렇게 한스러울 수가 없었다'면서 '그러나 지금은 모두 용서했다"고 했다. 1967년 최은희는 신 감독과 이혼했다.

2003년 앙드레김 패션쇼 모델로 나서다(왼쪽 사진). 2013년 연기 인생 70년을 맞아 본지 인터뷰 당시(오른쪽 사진).
2003년 앙드레김 패션쇼 모델로 나서다(왼쪽 사진). 2013년 연기 인생 70년을 맞아 본지 인터뷰 당시(오른쪽 사진). /연합뉴스·김연정 객원기자


마지막까지 불꽃처럼

1999년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최은희는 쉬지 않았다. 안양신필름예술센터 학장, 동아방송대 석좌교수 , 성결대 연극영화학부 명예교수로 후배를 키웠다. 최은희는 "북한에서 천주교에 입교했다"며 "종교를 부정하는 북한에서 천주교를 알게 된 것은 기적이다. 되돌아보면 삶은 이런 기적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유족은 아들 신정균(영화감독)·상균(미국 거주)씨, 딸 명희·승리씨 등 2남2녀.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19일 오전 8시. (02)2258-5940


1978년 납북→1986년 탈북·美 망명→1999년 귀국

정상혁 기자  


입력 : 2018.04.17 03:01

김정일 지시로 홍콩서 납치돼… 崔 "내 삶 자체가 한 편의 영화다"

납북 당시 김정일과 함께한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두 사람은 영화 17편을 찍으면서 김정일의 신뢰를 얻었다.
납북 당시 김정일과 함께한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두 사람은 영화 17편을 찍으면서 김정일의 신뢰를 얻었다. /엣나인필름

신상옥 감독과 이혼한 최은희는 1978년 1월 홀로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됐다. 김정일의 지시로 이뤄진 납치였다. 2007년 본지 인터뷰에서 최은희는 "북한 땅으로 납치돼 처음 대면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 선생 보기에 내가 어떻게 생겼습네까? 난쟁이 똥자루 같지 않습네까'라면서 껄껄 웃더라"고 말했다.

같은 해 납북된 신 감독과는 1983년에서야 북한에서 재회했다. 2016년 미국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연인과 독재자'에는 이들의 납북 전후 과정과 북한에서의 생활이 상세히 묘사된다. 이 영화에서 김정일은 신 감독에게 "우리 거하고 합쳐가지고 영화를 만들어 서방에 보여주자는 거요. 그래서 내가 신 감독에 대한 기대가 커요"라고 했다. 최은희는 2003년 본지 인터뷰에서 "북한에 있었던 만 8년 중 2~3년간 신 감독님과 초인적으로 영화 17편을 만들 수 있도록 배려해준 점에서는 북측에 고맙게 생각한다"며 "북한에 혼자 있었을 당시 한겨울 대동강이 눈을 맞아 보석처럼 빛나는 광경을 보면서 '탈출하면 꼭 영화 장면에 넣어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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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납북됐던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1986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영화 촬영차 떠났다가 현지 미국 대사관으로 망명해 탈북에 성공한다. 사진은 그 당시 동유럽 한 국가에 머물던 두 사람의 모습. /연합뉴스

두 사람은 이후 북한에서 3년 동안 '신필름영화촬영소' 총장을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사랑 사랑 내 사랑'(1984년)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찍어야 했다. 이때 함께 만든 영화 '소금'으로 최은희는 1985년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많은 영화를 찍으면서 두 사람은 김정일의 신뢰를 얻는다. 덕분에 영화 촬영을 핑계 삼아 1986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갈 수 있었고 그곳의 미국 대사관을 통해 극적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곧바로 국내에 들어올 수 없었다. 당시 '두 사람은 애초 납북된 게 아니라 월북했었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최은희는 이에 대해 2013년 인터뷰에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면서 "북한에서 나보고 '자진 월북했다'고 말해달라고 할 때도 나는 '말 같지 않 은 말 하지 말라'고 악을 썼다"고 했다. 최은희는 미국에서 오랜 망명 생활을 해야 했고 1999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2010년 본지 기고문에서 최은희는 이렇게 썼다. '나는 분단국가의 유명 배우라는 이유로 인생의 전환기마다 타의에 의해 고난을 겪어야 했다. 다른 이의 삶을 연기하는 영화배우로 살았지만, 내가 살아온 길 자체가 한 편의 영화가 됐다.'


[만물상] 최은희

김기철 논설위원


입력 : 2018.04.18 03:16

영화계에서 1961년은 춘향전의 해였다.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명보·수도극장,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이 국제·국도극장에 걸렸다. 신 감독 아내 최은희와 홍 감독 아내 김지미가 각각 춘향으로 나선 부부 대결이 호기심을 부채질했다. 결과는 '성춘향'의 압승이었다. '전무후무할 흥행-서울서만 74일간 38만명 관람' 1961년 4월 28일 자 조선일보는 '성춘향'의 성공을 톱기사로 실었다. 그해 서울 인구가 258만명이었으니 7명 중 1명꼴로 이 영화를 본 셈이다. 당시 최은희는 서른다섯, 이몽룡 역을 맡은 김진규는 서른여덟. 춘향전 역사상 최고령 커플이었다.

▶최은희는 흰 저고리와 치마가 잘 어울리는 한국적 미인이었다. 주요섭 소설을 영화로 만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나도향 원작 '벙어리 삼룡이' 등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에서 유교적 전통과 인습에 따르면서도 강인한 여인의 내면을 탁월한 연기력으로 담아냈다. 직접 메가폰을 잡고 '민며느리' '공주님의 짝사랑'을 연출하기도 했다. 

[만물상] 최은희
▶최은희는 1978년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끌려갔다. 김정일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최은희는 '김정일은 거의 매주 금요일 나를 불러내 파티를 열었다'고 수기에 썼다. 김정일과 장성택 부부 등이 단골손님이었다. 어느 날은 김정일이 패티 김 '이별'을 불러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함께 납치된 신상옥에 따르면 '목포의 눈물' '노란 샤쓰의 사나이' '동백아가씨' '하숙생' 같은 남쪽 가요가 파티장 단골 레퍼토리였다. 최은희는 "북한에 있던 8년 동안 나는 인생에서 가장 긴 연기를 하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영국 감독 로버트 캐넌과 로스 애덤은 2016년 최은희-신상옥 부부의 납치·탈출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를 개봉했다. 두 사람은 "이 사건을 들었을 때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여전히 많은 진실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에는 최은희 부부가 북한에서 목숨 걸고 녹음한 김정일의 목소 리가 담겼다.

▶최은희가 그제 아흔두 살의 생애를 마쳤다. 사전 서약대로 두 눈까지 기증했다. 그는 생전에 입버릇처럼 "나의 애창곡은 김도향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고 했다. 혼을 담은 연기와 영화 같은 삶이었지만 그 자신에게는 '바보 같은 인생'이었을까. 우리 현대사의 격동 한가운데에 있었던 한 여배우가 그 자신이 역사가 돼 우리 곁을 떠났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17/201804170338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