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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이혼 고백장'

이강기 2018. 4. 26. 08:01

[장석주의 사물극장] [43] 나혜석의 '이혼 고백장'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 조선일보

입력 : 2018.04.26 03:09

나혜석(1896~1948)은 도쿄미술학교 출신 서양화가로 '구미만유(歐美漫遊)'를 경험한 드문 신여성이다. 1930년 5월 '삼천리'의 설문에 '장차 여성 운동에 나서려 합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여권 운동자의 시조'라는 깬 의식이 뚜렷했다. 나혜석은 근대 여성 활동가로 자취를 남겼건만 가부장제의 굳은 인습에 맞서다가 날개를 꺾여 '비탄, 통곡, 초조, 번민'에 휩싸여 행려병자로 떠돌다가 죽음을 맞은 비운의 인물이다.

[장석주의 사물극장] [43] 나혜석의 '이혼 고백장'

나혜석은 시흥과 용인 군수를 지낸 나기정의 딸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1920년 변호사 김우영의 재취 자리로 들어갔다. 11년 반 결혼 생활을 하며, 딸 하나, 아들 셋을 둔 상태로 사랑에 빠졌다. 남편 친구인 최린을 파리에서 만나 식당과 극장을 돌아다니고, 뱃놀이 등을 하며 연애에 빠진 것이다. 나혜석은 "나는 공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이혼은 아니 하렵니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만삭으로 개인전을 열고, 페미니즘 소설을 내놓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던 나혜석은 최린과의 연애사로 35세 때 이혼당했다. '미증유의 불상사, 세상의 모든 공분(公憤)과 비난을 받으며, 부모 친척의 버림을 받고 옛 좋은 친구를 잃었다.' 고립된 채 뼈를 긁어내는 듯한 고통 속에 있던 나혜석은 1934년 '삼천리' 8월호와 9월호에 걸쳐 '이혼 고백장'을 내놓는다.

나혜석은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는 정조를 요구하는 남성 행태를 비판하고,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라고 외쳤다. 이 외침은 전(前)근대 사회에 울려 퍼진 남성 중심의 사 회를 향한 날 선 도발이요 절규다. 또한 여성의 성적 결정권이 여성 자신에게 있음을 알린 여성 인권 선언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서방질한 것' 혹은 '문란한 여자'라는 낙인과 집단 따돌림이었다. 당대의 주류 도덕규범을 앞질러 나가며 '어미는 선각자'라고 외친 나혜석은 형제 친척에게마저 따돌림당한 채 거리를 떠돌다가 빈사 상태로 쓰러져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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