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 논설위원 인물탐구

이강기 2018. 4. 23. 21:13

老정객 JP “앞날이 어두워… 지도자는 욕먹을 각오해야 해”


동아일보
2018-04-23 03:00수정 2018-04-23 16:27


[논설위원 인물탐구/최영훈]
김종필 전 총리가 18일 충청남도 지사에 출마한 이인제 의원을 만나 북의 비핵화 등을 화제로 환담하고 있다. 10년 전 뇌중풍으로 쓰러져 거동은 불편하지만 건강한 모습이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최영훈 논설위원
18일 오전 서울 중구 청구동 자택에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를 만났다. 넓은 정원 한쪽의 키 큰 나무에서 지저귀는 새소리가 봄의 절정을 알렸다. 모처럼 하늘이 푸르고 화창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응접실에는 옅은 갈색 선글라스를 낀 JP 혼자 NHK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어두운 조명 탓에 실내는 고적했다. JP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주오대 예과를 잠시 다녔다. 영어 이니셜 호칭이 김 전 총리처럼 자연스레 들리는 사람도 드물다.

왠지 쓸쓸해 보이는 그에게 “(고 박영옥 여사) 생각이 많이 나시지 않는지…” 물었다. ‘아차,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는 순간 “세월이 많이 흘렀지, 잊어버릴 때도 됐어”라고 낮게 답했다. 말과는 달리 어두운 빛이 스쳤다. 박 여사가 2015년 2월 타계한 뒤 지인들은 몸이 불편한 JP의 건강을 걱정했다. 박 여사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 씨 딸이다. 조카사위인 JP를 박정희는 ‘임자’라고 불렀다. JP는 슬하에 딸 예리와 아들 진 씨를 뒀다. 근황을 물어보자 “딸이 자주 집에 온다”고 했다. 모친의 빈자리를 염두에 둔 것이리라.  

오랜만에 JP를 보니 그가 두 번째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보수 정객 JP는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세력인 김대중(DJ) 후보와 DJP 연합을 극적으로 성사시켜 실세 총리로 등극했다. 공동정부의 한 축이던 JP가 1999년 2월 인도와 이집트 이스라엘 등 중동지역을 순방할 때 기자는 동행한 바 있다. “나일강의 이국적인 밤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당시 JP는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이어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행정수반까지 만나 환담하며 의욕이 넘쳤다.  

바깥이 부산해졌다. 충남도지사에 출마하는 이인제 자유한국당 의원이 들어섰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반세기에 가까운 정치 역정에서 두 번, 6년 반 실세 총리를 지내고 집권당 대표만 두 번 지낸 JP는 얼마나 많은 플래시를 받았을까. 자리에서 일어나 이 의원과 악수를 하는 그의 얼굴에 금방 생기가 넘친다. 아직도 JP는 뼛속까지 정치인이다. 두 달도 남지 않은 지방선거로 청구동에는 지역 정치인의 발길이 이어질 것이다. 최소한 충청권에서는 JP가 어느 정도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후보와 함께 온 같은 당 성일종 의원이 “댓글 공작 사건을 규탄하는 의원총회를 마치고 오느라 늦어졌다”고 했다. JP가 “주범이 누구야”라고 물었다. 정국을 들끓게 만든 따끈한 현안이지만 내용을 잘 모르는 듯했다. 성 의원이 “드루킹이라는 필명을 지닌 사람이…”라며 댓글 조작 사건을 설명했으나 “모르겠는데”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충남도위원장을 맡고 있는 성 의원에게 “(이 의원이) 충남에서 인물로는 최고이니 많이 도와줘”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몸이 좋지 않아 아무것도 못 해. 잘될 거야”라고 덕담을 건넸다. 
1998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20주기 추모 특별사진전을 박 전 대통령 둘째 딸 근령 씨와 함께 관람하는 김종필 총리. 운정재단 제공

이 의원이 남북 정상회담 및 북-미 정상회담을 화제로 꺼냈다. JP는 귀를 기울이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 북의 비핵화 가능성에 대해 묻자 JP는 “김정은이 핵을 포기할 것으로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북한이 이러쿵저러쿵 떠들면서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할 것인데 여기에 넘어가선 안 된다. 김정은이 속으로 우리를 비웃고 있을 것이다.” 북한의 내부 변화 가능성에 대해서도 “어림없는 소리다. 만분의 일도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다. 


JP는 현 정부의 대북 정책에도 불신을 드러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척은 해도 결코 포기할 리 없다. 정부가 북한의 이런 의도를 알면서도 미국을 끌어들이고 평화협정과 미군철수로 이어지는 과정에 들러리나 서지 않을지 걱정이다.” JP의 북한에 대한 불신은 뿌리 깊다. 6·25전쟁이 일어난 날 JP는 육군본부 당직 장교였다. 육본 정보국 북한반장으로 근무하며 전쟁을 맞은 이력과 5·16군사정변 직후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국무총리를 비롯해 보수정당 대표를 오래 지낸 탓일 터이다. 김대중 정부 때 내각제 합의 파기에 이어 햇볕정책에 대한 이견으로 ‘안보 코드’가 다른 두 사람은 결정적으로 갈라섰다. 이때부터 충청 맹주였던 JP의 권력가도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JP는 “경제가 걱정”이라고 이 의원이 말하자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해서 (지구의 최빈국에서 경제대국인) 여기까지 왔는데 앞날이 어두워. 이 상태가 오래갈 것 같다”고 걱정했다. 그러면서 JP는 현 정부의 인기영합 정책을 염두에 둔 듯 “지도자는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해”라고 뼈 있는 말을 했다. “총리님도 누구보다 욕을 많이 먹었죠”라고 이 의원이 화답하자 “내가 제일 욕을 많이 먹은 정치인 중 하나지. 욕을 주먹으로 (맞듯이) 먹었지”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 의원 등이 6·13지방선거 결과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하며 “충청권에서라도 이겨야 정권의 일방 독주를 막을 수 있다”며 JP의 도움을 요청한 뒤 자리를 떴다. 그때도 JP는 나서서 도울 수는 없다는 뜻을 거듭 밝히며 “마음으로, 전폭적으로 밀 테니 빛나는 충청도를 만들라”고 덕담만 건넸다.  

정치인들이 떠난 실내에 다시 적막감이 돌았다. “(5·16 직전 JP가 만난) 역술가 백운학에 얽힌 일화가 사실이냐”고 물어봤다. “그때 점을 보러 간 친구가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있는데 자꾸 나를 쳐다보더니 ‘됩니다’라고 해서 ‘뭐가 되느냐’고 물어봤지. ‘아니, 그 계획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서 물끄러미 바라봤지. 그러니 ‘혁명하려는 것 아니냐’고 해서 정색을 하고 “누구 사람 잡을 일 있느냐”고 말했지.” 격동의 세월을 보낸 노정객의 얼굴은 의외로 담담했다.

‘조국 근대화’를 기치로 내걸고 박정희 소장과 함께 거사한 JP는 5·16의 성격에 대해 “쿠데타건 레볼루션(혁명)이건 나라를 근원적으로 변혁하고 발전시켰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을 피력한 바 있다. 5·16의 핵심이 누구냐는 물음에도 “핵심은 박정희 대통령이다. 나는 도왔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중앙 일과 서울은 네가 맡아라. 나머지 외곽은 내가 하마, 이미 손 써 놨다”는 박정희의 언급을 짚어보면 JP의 주도적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2008년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졌던 JP는 재활치료로 건강이 좋아졌지만 거동은 불편하다. 여전히 수발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3년 전, 꽃이 피면 같이 웃었을 금실 좋던 반려를 잃었다. “93세이시죠”라고 묻자 ‘왜, 한 살 올리느냐’고 나무라듯 바로 “92세”라고 수정했다. 그렇게 말하던 JP 얼굴에 미묘한 빛이 감돌았다. 1926년 1월생인 그는 만 92세가 몇 달 지났다. 

‘100세 시대’를 화두로 한마디를 청했다. JP는 자신의 남은 삶과 나라의 앞날에 생각이 미쳤던지 “지정학적 견지에서 보면 참 우리 국민들이 이런저런 어려움을 많이 당했다. 그런 시련과 고난을 소화하고 극복할 능력을 우리 국민들이 갖고 있다. 앞으로 어떤 도전이 닥치더라도 이겨내고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JP는 20대 청년 장교로 전쟁을 겪고 30대에 5·16 거사로 박정희 장군을 대통령으로 만든 데 이어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까지 세 명의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과정에서 역할을 한 불세출의 킹 메이커였다. 현대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세 대통령은 나이 순서에 따라 세상을 떠나 역사의 일부가 됐다.

반세기에 가까운 정치역정에서 JP는 대통령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것을 다 해봤다. 권력 가까이서 ‘2인자’로 있다 보니 영욕과 부침을 겪기도 했다. 박정희 18년 집권 중 세 차례 ‘자의 반 타의 반’ 외유와 감시를 받아야 했고 YS, DJ와도 집권 초반의 밀월이 끝난 뒤 정치적 결별의 시련을 맛봐야 했다. 그러나 권력 집착이 덜한 로맨티시스트였기 때문에 거꾸로 JP의 정치생명은 길었다.


한 시간쯤 지났다. 그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이 읽혔다. “오래 사시라”고 덕담을 건네자 “종종 와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전해 달라”고 했다. 그는 70세가 넘어서 “해는 지지만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싶다” “인생의 행복은 미운 놈 죽는 것 보고 그 다음에 죽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흐르는 세월을 이길 사람은 없다. 한 시대를 풍미한 JP 역시 대중의 호오(好惡)나 평가와 상관없이 언젠가는 역사로 남을 것이다. ‘3김 시대’가 끝난 뒤 정치의 왜소화 단계를 넘어 큰 정치는 실종 상태다. 대한민국 정치사는 JP를 산업화·민주화 시대를 관통한 최장수 정치인이자 정치 거목(巨木)으로 기록할 것이다.  
  
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Main/3/all/20180423/89743238/1#csidx25e955f84944d3e9d0513e9f0cf45c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