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

잊어서는 아니 될 두 사람, 배정자와 남자현의 족적을 밟아본다

이강기 2018. 5. 2. 11:59

[박종인의 땅의 歷史] 잊어서는 아니 될 두 사람의 족적을 밟아본다


입력 : 2018.05.02 03:00

[120] '七可殺' 매국노 배정자와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일제강점기를 산 두 사람… 한 사람은 평생 친일파, 한 사람은 평생 독립군
이등박문 수양딸 배정자, 조선과 만주 누비며 밀정으로 맹활약
상해 臨政 7大 처단대상 공포 '요녀 배정자를 척살'
경북 영양 촌부 남자현, 만주로 건너가 투쟁… 총독 암살 기도… 斷指로 단결 호소…
良心이 좌우하는 인생의 품격

박종인의 땅의 歷史
상해임시정부 '七可殺(칠가살)'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기관지 가운데 하나인 '독립신문' 1920년 2월 5일 자 1면은 이렇게 시작했다. '우리의 적이 누구누구뇨. 전시의 적에게는 사형이 있을 뿐이니라. 과거 1년간 우리는 회개의 기회를 주었다. 1년이라는 기간은 그들에게 과분한 은전이었다. 이미 은전의 기간이 끝났다. 흉악한 자에게는 죽음밖에 줄 것이 없느니라.'

'짐승 같은 생명 하나로 국가가 큰 해를 당하니, 아니 죽이고 어찌할 것인가'라고 덧붙이며 임시정부는 일곱 가지 적을 나열했다. 제목은 '칠가살(七可殺)', 응당 죽여도 좋은 일곱 가지 적이다.

반드시 죽여야 할 일곱 가지 적을 공포한 독립신문 1920년 2월 5일자 1면.
반드시 죽여야 할 일곱 가지 적을 공포한 독립신문 1920년 2월 5일자 1면.
①적의 괴수 敵魁(적괴) ②나라를 팔아먹은 賣國賊(매국적) ③고등경찰과 밀고자 倀鬼(창귀) ④친일 부호 ⑤적의 관리가 된 자, 敵 官吏(적 관리) ⑥부언과 낭설로 독립운동을 해하거나 독립을 모칭해 동포 돈을 횡령하고 기밀을 누설하고 배반한 不良輩(불량배) 그리고 ⑦독립을 위해 죽음을 약속한 자로 변심한 謀反者(모반자).

다야마 데이코, 배정자

5월 8일 자 독립신문 논설에 여자 이름이 하나 등장한다. '배정자는 작년 하얼빈에서 다수의 동포를 적에게 잡아주고, 협잡을 하고 봉천으로 도망하여 와서 봉천 동포의 사정을 적 영사관에 고하야 동포의 밧는 곤난이 막심하외다. 아아 이 가살의 요녀 배정자는 '나는 만주에 잇는 백만의 조선인의 모(母)라' 함니다. 아아 언제까지나 져 妖女(요녀)의 命(생명)을 그대로 두겟슴닛가.'

배정자(裵貞子) 혹은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 동포를 적에게 잡아주었으니 밀고자다. 협잡을 하였으니 불량배다. 나라를 팔아먹었으니 매국적(賣國賊)이다. 세 번 죽어 마땅한 여자다.


남자현

그 무렵 만주에는 남자현이 살았다. 남자현은 여자다. 배정자보다 나이가 두 살 어리다. 남자현은 1872년생이고 배정자는 1870년생이다. 경상북도 영양 사람이다. 아버지 남정한은 유학자였다. 1891년 나이 열아홉에 아버지 제자 의성 김씨 김영주와 혼인해 양반집 며느리가 되었다. 글을 알고, 영민했고, 지혜로웠고, 평범했다.

5년 만인 1896년 찌는 여름날 남편이 집을 나갔다. 의병으로 나가며 "나라가 망해가니 지하에서 다시 보자"고 했다.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피 묻은 적삼이 돌아왔다. 그리고 배 속에 있던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이름은 영달이라고 지었다. 남자현은 그 적삼을 복대로 만들어 평생 차고 다녔다.

3·1운동이 터졌다. 남자현은 성장한 아들 영달을 남겨놓고 서울로 갔다. 남편 적삼을 배에 동여매고 올라갔다. 그리고 그해 4월 만주로 갔다. 안동에서 망명한 지사 김동삼(1878~1937)을 만났다. 남편 김영주의 조카뻘 인물이다. 훗날 아들 영달은 집안 형님 김동삼을 본받아 이름을 성삼으로 고쳤다.

그리고 그녀가 투쟁을 했다. 남편 옷을 배에 두르고서 아들과 함께 봉오동전투에서 총을 들었고, 부상병을 치료하였고, 동맹을 위해 단지(斷指)를 하였으며, 일본 요인 암살을 시도하다 체포돼 죽었다. 배정자가 만주 벌판을 들쑤시며 독립군을 뒤쫓는 사이, 남자현은 같은 공간, 동일 시간대를 반대로 살았다. '칠가살 척살'을 실천하며 살았다.

양심을 버린, 배정자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강제로 개항했다. 배정자와 남자현은 그 무렵 태어났다. 배정자가 58세이던 1927년 작성한 자서전 '배정자 실기'에 따르면 아버지 배지홍은 대원군 측근이었다. 고종 왕비 민씨 득세로 배지홍이 처형된 뒤 그녀 인생이 꼬인다. 소녀 분남(粉男)은 관기(官妓) 계향이 되었다가 비구니 우담이 되었다가 아버지 친구였던 밀양부사 정병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1925년 8월 21일 자 동아일보에는 정병하의 '수청기생'이라고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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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작은 절 안양암에는 함부로 지나칠 수 없는 비석이 하나 서 있다. 1941년 세운 이 비석에는‘裵貞子(배정자)’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비석 옆면 오른쪽 아래). 80 평생을 친일로 일관한 사람이다. 그녀와 동시대를 산 남자현은 평생을 독립투쟁으로 일관하다 죽었다. 양심 유무에 따라 삶의 품격이 달라지는 것이다. /박종인 기자


망명해 있던 김옥균이 1887년 9월 그녀를 이토 히로부미에게 소개했다. 이토는 아름답고 당찬 그녀를 밀정으로 교육시켰다. 다야마(田山) 데이코(貞子, 사다코라고도 읽는다)라고 이름도 주었다. 요절한 장녀 이름이다. 열여덟 살이었다. 데이코는 승마, 사격, 외교 그리고 일본이 조선을 합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공부를 했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와 고종과 왕비에게 접근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졌다. 이듬해 일본이 승리했다. 그해 11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으로 왔고,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1906년 이토가 초대 조선 통감으로 부임했다. 배정자 오빠 국태는 한성부 판윤이 됐다. 배정자는 수시로 덕수궁을 들락거렸다. 그녀 자서전에는 이 무렵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정자의 행차가 얼마나 위풍이 당당하고 기세가 등등한지 장안 사람들이 우러러보지 않는 이 없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를 죽였다. 놀란 배정자는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말았다.'(오사카 마이니치신문 1940년 9월 11일 자)

이듬해 나라가 사라졌다. 배정자는 조선주차군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와 손을 잡고 시베리아로 갔다. 배정자는 이토에게 배운 대로 밀정으로 일했다. 1918년 배정자는 중국 하얼빈으로 이동해 일본 영사관 밀정으로 일했다. 총독부로부터 상금 1000원을 받았다. 1921년에는 친일 무장 단체 보민회(保民會) 고문이 되었다. 보민회는 독립단체 와해와 조직원 테러가 목적이었다. 임정이 '칠가살' 사설을 낸 것이 바로 이때다. 그 무렵 남자현이 만주에 있었다.

양심을 거둔, 남자현

성장한 아들 성삼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시키고, 그녀는 아들과 함께 서로군정서 부대원으로 입대했다. 봉오동전투를 비롯한 실전에 참전했다. 1921년 간도참변이 터졌다.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이 벌인 간도 지역 학살극이다. 공식적인 조선인 희생자가 3400명이 넘었다. 독립군이 분열했다. 이듬해 3월 남자현이 동지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통합적 영도 기관이 없이 어찌 적을 물리치겠는가.' 그리고 손가락을 잘랐다.(국가보훈처 남자현 공훈록)

경상북도 영양 남자현 생가에는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사당이 있다.
경상북도 영양 남자현 생가에는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사당이 있다.


1927년 2월 길림성에 안창호가 왔다. 나석주 의사 추모식을 겸한 연설회였다. 독립운동가 300여 명이 검거됐다. 남자현은 끝까지 투옥된 50여 명을 옥바라지하면서 중국 측에 석방을 요구했다. '외국 독립운동자를 감금하는 건 국가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라고 했다. 일본으로 이송되면 조직은 와해된다. 여론이 바뀌면서 이들은 모두 석방됐다.

두 달 뒤 남자현은 서울로 잠입했다.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암살을 노렸으나 실패했다. 1932년 3월 일본이 만주에 꼭두각시 국가 만주국을 세웠다. 9월 국제연맹 조사단이 하얼빈에 도착했다. 남자현은 손가락을 잘랐다. 혈서를 썼다. '朝鮮獨立願(조선독립원)'. 이 또한 조사단에 전달되지 못했다.

마침내 이듬해 3월 1일 만주국 건국기념일이 다가왔다. 남자현은 당시 만주국 일본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 암살 계획을 세웠다. 하얼빈에서 권총을 입수하고, 남편 옷으로 만든 복대를 차고 노파로 변장해 동지와 접선하던 중 조선인 밀정 이종형에게 검거됐다. 1933년 2월 27일 그녀 나이 예순한 살이었다.

남자현은 장춘교도소 6개월 수형 끝에 단식 투쟁을 했다. 단식한 지 9일 만에 인사불성이 돼 출감했다.(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26일) 그리고 그녀가 죽었다. 8월 22일이다. 부음은 조선중앙일보 8월 27일 자에 '遂別世(수별세·이미 별세)'라는 제목으로 뒤늦게 실렸다. 조소앙은 남자현을 '여협(女俠)'이라 불렀다.

은퇴한 밀정 배정자

해방이 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반민특위가 가동됐다. 서울 성북동 집에서 체포된 배정자는 재판을 받았다. '(은퇴 후) 1942년에는 남양 위문대를 조직하여 70여 명의 낭자군을 데리고 역시 밀정 행위와 일군 위문에 활약하는 등 칠십이 넘도록 친일 행위로 시종했다.'(조선일보 1949년 4월 29일 자) 배정자는 보석으로 풀려나 1952년 2월 27일 성북동 집에서 죽었다. 82세였다.

그녀에 대한 모든 흔적이 사라졌다. 그런데 서울 창신동에 있는 작은 절 안양암에서 그녀가 발견됐다. 안양암 2대 주지는 불교계 대표적 친일파 이태준이다. 일본군 무운장구를 빌었고, 파병 때는 경성역으로 나가 환송을 했다. 창씨개명 접수 사무소로 절을 내주기도 했다. 그 절 입구 비석에 그녀가 있다.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 왼쪽 면에 1941년 비석을 세운 사람들 명단이 있다. 이 절 부인회인 삼화부인회가 세웠다. 그 부인회 고문이 배정자다.

거대한 그녀, 남자현

죽기 전, 불길한 예감에 찾아온 아들 성삼과 손자 시련에게 남자현은 세 가지 유언을 했다. 첫째, 가족 가운데 하나는 나라에 바칠 것. 둘째, 수중에 있는 돈 249원 80전 가운데 200원은 독립 축하금으로, 나머지는 손자와 친정 손자 학비로 사용할 것. 셋째는 이랬다. "몸보다 정신이다. 독립은 정신이다."(둘째 손자 김시복 증언) 남자현은 주위를 물리치고 잠이 들었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1933년 8월 22일 낮 열두 시 반이었다.

만주국 경찰은 아들 성삼이 하얼빈에서 인쇄한 부고문을 '단식 사망이 아니라 병사'라고 주장하며 압수했다. 장례식은 다음 날 거행됐다. 두 달 뒤 하얼빈 외국인묘지에 그녀의 비석이 섰다.

1946년 서울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아들 성삼은 김구에게 200원을 축하금으로 내놓았다. 전쟁이 터졌다. 아들은 나이 50이 넘어서 입대해 전쟁에 참전했다. 남자현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하얼빈 외인묘지는 개발 과정에서 사라졌다. 지금 서울 국립현충원에는 남편인 의병장 김영주 유해와 아내 남자현의 유품이 합장돼 있다.

묻는다. 배정자를 아는가. 또 묻는다. 남자현을 아는가. 그들의 흔적이 다행히 남아, 우리에게 양심(良心)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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