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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 그늘 아래서… 최초의 여성작곡가 김순애를 그리워하네

이강기 2018. 6. 2. 09:56

목련꽃 그늘 아래서… 최초의 여성작곡가 김순애를 그리워하네

조선일보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06.02 03:03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28>김순애(1920~2007)

여성작곡가 김순애
일러스트=이철원

방송국은 서울에 KBS 하나밖에 없던 옛날 일이다. 음악 감상 시간이 일주일에 한 번 있었다. 유명한 서양 작곡가의 교향곡과 그 명곡을 해설하는 여성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음악에 대한 지식이 풍부할 뿐 아니라 음성 또한 청취자를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작곡가 김순애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어느 유명 작가가 잡지에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여성'이란 글을 올렸는데 한 사람은 주증녀라는 영화배우이고 또 한 사람은 김순애를 지목했다. 그는 얼굴 좌우 균형이 잡힌 전형적 미인으로, 누가 봐도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그는 1920년 황해도 안악에서 가난한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 등에 업혀 교회에 가서 아버지 설교를 듣고 돌아오면서 설교 내용을 달달 외우곤 하였다고 그의 어머니가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런 재능이 몇 살 때까지 이어졌는지는 모른다. 서울에 와서 여학교에 다녔는데 1학년 때부터 줄곧 우등생이었고 이화여전 음악과에 다닐 때에도 그랬다. 이화여전에서 작곡가 김세형의 영향을 받아 작곡을 전공하기로 결심하였다.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그는 대구와 서울에서 음악 교사로 일한 적도 있다.

김순애는 1955년 이화여대 음대 교수로 취임하였다. 매우 순탄하게 흘러간 것 같지만 그의 인생 행로는 고달프기 짝이 없는 가시밭길이었다. 학생 시절에 연희전문에 다니던 어떤 문학청년과 깊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다지만 그 문학청년은 곧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다. 그것이 김순애의 생애에 있었던 첫 시련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서 유명한 바리톤 김형로와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게 되었다.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불행하게도 6·25사변 때 납북되어 그 뒤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다. 김순애는 홀로 딸 셋을 키우면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성격이 불같아서 쾌활하게 강의하다가도 어떤 학생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면 화를 내고 야단치며 그 학생을 향해 백묵을 던지기도 하였다고 들었다. 그런 성격 때문인지 남자건 여자건 가까운 친구가 없었고 언제나 고독하기 짝이 없는 김순애였다.

그는 이스트먼음악학교 전액 장학생으로 가 유명한 작곡가 호바네스의 지도를 받았는데 호바네스는 김순애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하고 이스트먼음악학교의 작곡상을 그에게 수여하였다. 상이란 상은 그가 다 받은 셈이다. 서울시 문화상을 비롯하여 제1회 한국 작곡상, 동요 작곡상, 대한민국 작곡상을 모두 휩쓸었고 그런 경력 때문에 1993년에는 삼일문화상도 받았으며 예술원 회원으로도 추대되었다. 작곡 발표회도 여러 번 가졌고 '파랑새'를 비롯하여 '진달래' '황혼이 짙어질 때' '해당화' '어머니의 자장가' '한강은 흐른다' 같은 작품을 남겼다. 김남조가 시를 쓰고 김순애가 곡을 붙인 '그대 있음에'는 널리 애창되는 가곡이다.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고요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그대 있음에/ 내 마음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김순애의 노래가 있어 김남조의 '그대 있음에'는 더욱 유명한 시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4월의 노래'를 모르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그 시는 박목월 작품이다.

김순애를 잊지 못하는 까닭이 하나 있다. 4·19가 터지고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진 가운데 대학도 크게 흔들렸고 전국적으로 비상사태가 벌어졌다. 연세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수들의 농성 사태에 항의하여 학교에 사표를 던진 '7교수'가 있었다. 최현배, 최재서, 김하태를 필두로 일곱 교수가 들고일어나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던 어느 날, 누군가가 김순애를 만나서 연세대에 분규가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때 김순애는 이렇게 한마디 물었다고 한다. "김동길 교수는 어느 편이랍니까?"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7교수편이랍니다." "그렇다면 나는 '7교수'가 옳다고 믿습니다"라고 김순애는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 이상 연세대 분규에 대해 캐묻지 않더라고 했다.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교수가 정치적으로 변모해 농성 사태를 벌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김순애는 이화여대에서 정년퇴직한 후 딸들이 있는 미국으로 가 살다가 워싱턴주 타코마의 한 병원에서 87세를 일기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는 고국 땅에 묻히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그가 다니던 영락교회에서 영결 예배가 거행되었는데 둘째 딸 초영이의 부탁을 받고 그 예배에서 내가 짧게 한마디 추모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매슈 아널드의 '애도의 시'를 한 줄 읊었다. "(죽음을 상징하는) 주목나무 잎사귀를 뜯어서 뿌리지 말고 그녀 위에 장미꽃잎을 뿌리세요, 장미꽃잎을(Strew on her roses, roses, and never a spray of yew)." 고독하였기에 더욱 아름답던 김순애,순수하였기에 더욱 고독했던 김순애, 그는 오늘도 하늘나라의 꽃밭을 거느리고 있을 것이다. 그가 그리던 '그대'를 이미 만났는지, 그 '그대'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김순애의 '그대'가 누군지를 나는 잘 모르기 때문에! 김순애는 하늘나라에서도 우리를 다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타고난 DNA가 우리와는 사뭇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은 사람 김순애.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01/201806010176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