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에 올라타지 못한 독일 라인강의 기적
애플 가치, 독일 30대 기업보다 많아
FT "독, 디지털경제 뒤처졌다 우려"
김은광 기자, 내일신문
2020-01-30
1997년 9월 스티브 잡스가 애플 CEO에 복귀했다. 당시 애플 시가총액은 30억달러였다. 독일 대기업 지멘스의 1/10이 채 안됐다. 지멘스는 당시나 현재나 유럽 최대의 산업그룹이다. 그로부터 약 22년이 흘렀다. 애플의 시가총액은 지멘스는 물론 독일 30대 기업이 상장한 닥스(Dax) 전체 시총보다 많다. 29일 기준 1조3540억달러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물론 기업 가치는 종종 잘못된 비교에 쓰이곤 한다. 거대 다국적기업 가치를 전 세계 국가 국내총생산(GDP)와 무차별 비교하는 데 대한 비판도 있다"면서도 "때로는 그같은 비교가 한 나라의 상황을 적절히 보여줄 수 있다"고 전했다.
FT는 "독일 30대 기업의 가치가 미국 거대 기업 1곳의 가치보다 적다는 사실은 통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며 "유럽 최대 경제국인 독일이 21세기를 관통하는 기술 흐름에 뒤처지고 있다는 징후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1974년에 설립된 세계 최대 규모의 브랜드 컨설팅 회사 '인터브랜드'의 중·동부 유럽 대표인 시몬 툰은 FT에 "지난 2년 동안 수많은 독일 기업 CEO들이 '지금 바뀌지 않으면 향후 5~10년 내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며 "독일 기업들은 멸종 위기에 놓인 차세대 공룡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고 전했다.
애플을 비롯한 거대 기술기업, 즉 '빅 테크'들은 수많은 나라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예를 들어 애플 가치는 호주 증시에 상장된 200대 기업 시가총액과 대략 비슷하다.
하지만 독일은 특별한 경우다. 유럽의 성장엔진이자 전 세계 4대 경제강국으로, 독일 브랜드는 고품질 대량생산과 정밀한 엔지니어링을 담보하는 상징이다. 미국 기술가이자 기업가인 마크 앤드리센은 "소프트웨어가 전 세계를 집어삼키기 전인 20세기, 전 세계 산업 분야에서 독일은 늘 앞서 있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1988년 설립된 '닥스30지수'엔 자동차 제조사 폭스바겐과 화학기업 BASF, 보험사 알리안츠, 소프트웨어 기업 SAP, 물류기업 DHL 등 세계 최고의 다양한 기업들이 포함돼 있다. 닥스지수는 지난 한해 22% 상승해 사상 최고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애플 가치는 그보다 2배 이상 올라 최근 1조4000억달러 고지를 넘었다.
애플과 닥스지수 간 비교는 독일 기업 경영진이 가진 2가지 두려움을 드러낸다. 하나는 독일 기업의 매출과 수출이 여전히 강하다고 해도, 소프트웨어와 데이터에 기반한 새로운 산업시대가 독일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 독일 재계와 정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우려하고 있다.
ING독일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카르슈텐 브르제스키는 "독일이 21세기를 지배할 기술열차를 놓치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며 "향후 20년은 전자상거래와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이 지배할 것이다. 이 모든 영역에서 독일은 뒤처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두려움은 미국 실리콘벨리 기술기업들이 거대한 규모를 등에 업고 독일 산업계 주요 부문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은 독일의 전후 경제기적을 이끈 핵심인 하드웨어 중심-공학 기반의 모델을 압도하고 있다. 독일이 자랑하는 음악과 미디어 부문은 이미 디지털 기술로 황폐화됐다. 이런 종류의 파괴적 혁신이 독일의 최고 경쟁력인 기계공학과 화학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폭스바겐 CEO 헤르베르트 디스는 전통적 자동차 제조업에 새로운 도전자들이 출현하면서 존폐의 위기를 느끼고 있다고 토로한다. 그는 최근 폭스바겐 간부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우리가 현재의 속도로 움직인다면, 상황은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도 전적으로 수긍하는 대목이다. 메르켈 총리는 이달 FT와의 인터뷰에서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기업과 고객 간 중개자가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생산-소비자 관계를 파고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 기업들은 이런 상황 전개를 놓치고 있다. 이제는 뒤처질 위험이 크다"며 "단지 제품을 파는 것으론 더 이상 충분치 않다. 제품에 대한 각종 데이터를 기반으로 새로운 제품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메르켈 총리의 두려움은 그같은 경험과 숙련이 없다면 독일은 고작해야 '거대한 작업대'(extended workbench), 즉 대량생산체제 내 조립라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는 미국, 따라온 중국
경쟁력 위축에 대한 불길한 전조가 있지만, 독일 경제에 재앙적 상황이 닥친 건 아니다. 독일은 수출에서 기대 이상으로 잘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독일 '이포 경제연구소'(Ifo)는 독일이 4년 연속 세계 최대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할 전망이라고 예측했다. 경상수지는 상품과 서비스, 투자 등을 측정하는 것으로 지난해 추산액은 2760억달러다. 11월 수출이 전년 대비 2.3% 하락했지만, 경상수지 흑자액은 독일이 중국에 대한 수출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보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핵심 리스크는 독일이 점차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 미국은 기술 붐을 통해 독일을 따돌리고, 중국은 제조업 가치 체인을 빠르게 따라잡으며 독일과 경쟁하는 접촉면을 늘려가고 있다.
컬럼비아대 알렉시스 위초스키 교수는 미국의 거대 기술기업들을 '그물망국가'(net-states)로 정의한다. 근대 이후 형성된 미국 프랑스 등 국민국가(nation-states)와 다르고, ISIS나 알카에다처럼 비국가(non-state) 행위자와도 다른 개념이다. 위초스키 교수는 "거대 기술기업들은 디지털 비국가 행위자로,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어떤 경우엔 주요 국가 정부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며 "이들 그물망국가들은 소비자와의 연계성을 지속적으로 형성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이폰 사용자들은 수시로 모바일 폰을 체크한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소비자들 정보를 긁어모아 사용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수익을 가져간다.
위초스키 교수는 "일단 어떤 제품을 구매하면, 그 거래는 종료된다. 반면 그물망국가들은 매일, 아니 매시간 단위로 고객과의 관계를 지속한다. 우리가 자료를 업로드하거나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알게 모르게 그물망국가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빅 테크 기업들은 한 영역을 지배하고 나면, 다른 영역으로 곧 발을 뻗는다. 20세기 BMW의 성공신화는 자동차 제조 영역에 그친다. 반면 기술기업들은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한 탈바꿈을 이어나간다.
예를 들어 애플은 고급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만들지만, 동시에 새롭고 다양한 서비스를 내놓는다. 그리고 그 영향력을 기반으로 경쟁자를 압박한다. 애플 신용카드엔 수수료가 없다. 영화와 TV쇼를 한데 묶은 프로그램은 애플 하드웨어 신기종을 구입할 경우 1년 간 무료다. 애플 CEO 팀 쿡은 새로운 영역에 진입하는 데 강한 열정을 갖고 있다. 그는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애플이 인류에 공헌할 부문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아닌, 인류의 건강이다."
아마존은 책을 파는 것에서 시작해 물류를 지배했다가 이젠 자체적으로 영화를 제작하고 음성 인식 비서서비스를 선도하고 있다. 구글은 인터넷 검색에서 출발해 기계학습으로, 홍수 예측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생물음향학으로 고래를 추적하고 자기강화 학습으로 로봇을 가르치고 있다.
위초스키 교수는 "우린 모두 다른 종류의 기업들을 지켜보고 있다"며 "그들의 야심, 규모, 어느 영역이든 침범하는 행위를 보라. 우리는 그런 조직들이 우리 인생에서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한 탈바꿈
독일 기업들이 특히 놀라는 건 기술기업들의 향후 전망이다.
1668년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과학기술 선도 기업 '머크'의 CEO 슈테판 오슈만은 "내가 걱정하는 건 헬스케어 부문에서도 '우버화'(Uberization)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각 개인에 걸맞은 특정한 약이나 치료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는 "이는 제약업 모델 전반을 뒤바꿔놓을 것"이라며 "누가 약을 만들었느냐 누가 약을 조제했느냐가 아닌, 누가 특정 데이터를 확보했느냐가 가장 중요해질 수 있다. 앞으로는 구글이 제약업계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성공한 독일 기업들도 미국 기술기업들이 치고 들어올 것을 걱정하고 있다. 독일 국영 철도회사인 도이치반의 자회사로, 세계 3위권 물류 대기업인 'DB쉥커'의 CEO 요헨 테베즈는 "미국 기업들은 물류부문 사업모델과 전망을 완전히 뒤바꿀 정도의 자금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물류 부문의 경우 거대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은 자체적인 주문처리 서비스와 배송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아마존은 단기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DB쉥커의 핵심사업 부문을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다.
테베즈 대표는 "아마존은 현금을 다 쏟아붓는 기업이다. 타인이 범접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그들은 팔다리쯤은 잃어도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시장을 지배해 나간다"고 말했다. 그는 "아마존의 무료 배송은 '마약'이다. 소비자를 중독시킨다. 일단 무료 배송 서비스를 이용하면, 고객들은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두려움이 극대화된 부문은 자동차 산업이다. 자동차는 독일 연구개발 투자의 1/3을 차지한다. 미국 테슬라가 독일의 자동차 제조 모델 전 영역을 공격하면서 일부 경영자들은 지난 1세기 동안 내연기관 엔진에 쏟은 독일의 가치가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5년 전만 해도 그같은 우려는 터무니없게 들렸다. 하지만 지난해 연 생산대수가 5만대도 안 된 테슬라의 시가총액이 폭스바겐을 추월했다. 연간 1000만대 이상의 자동차를 전 세계에 판매하는 폭스바겐은 독일의 자부심이다. 투자자들은 이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폭스바겐의 글로벌 생산기지를 '자산'(assets)이 아닌 '부채'(liabilities)로 보기 시작했다. 애플이나 구글, 페이스북과 마찬가지로 테슬라는 자동차를 다른 서비스를 위한 플랫폼으로 전환시키면서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는 데 베팅하고 있다.
독일이 자동차를 만든 뒤 소비자에게 차를 팔 딜러들을 찾는다면 테슬라는 소비자에게 직접 차를 판매한다. 그리고 나서 무선으로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하면서 차주와 의미 있는 관계를 지속한다. 독일 베를린 인근에 제조공장을 짓고 있는 테슬라는 '섀도우 모드' 자동항법에 이용되는 센서로부터 각종 자료를 수집한다. 이는 자율주행 능력을 개선하기 위해 알고리즘에 되먹임된다.
폭스바겐 CEO 디스는 "지난 10년 동안 독일은 그같은 혁신기술에 대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며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부족한 독일로선 테슬라가 각종 기술적 수훈을 세우는 걸 앉아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FT 인터뷰에서 "우리는 독일에서 손해를 보고 있다"며 "독일엔 빅 테크 기업이 없다. 우리는 협업할 기술기업이 필요하다. 미국 실리콘밸리나 중국으로 갈 수 있다. 우리에겐 소프트웨어 기술이나 규모의 경제가 없다. 우리는 소프트웨어 산업을 못 갖고 있다"고 말했다.
벤처투자와 군산복합체의 부재
25억달러 가치의 독일 소프트웨어 제조업체인 '셀로니스'(Celonis)의 공동 CEO 알렉산더 린케는 "다임러와 바이엘, BASF, 도이체방크, 알리안츠 등이 창업한 19세기 후반엔 열정적인 창업정신이 있었다"며 "그랬던 독일이 왜 창업정신을 잃었는지 알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 때문이라고, 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답이라면 나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장과 문화는 좀체 바뀌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적자원 때문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대학을 떠올려보라. 독일은 수많은 학문 분야에서 선도적인 공헌을 하는 나라다"라고 말했다.
그가 보는 진짜 이유는 20세기 후반 창업정신을 북돋울 벤처투자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혁신의 균형추가 미국으로 넘어간 핵심 이유였다는 것. 그는 "사람들이 자본을 투자하고 배분하는 '금융인프라' 덕분에 애플과 구글, 페이스북이 미국에서 태어날 수 있었다. 독일이나 유럽엔 그런 기업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나마 독일 스타트업 환경도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독일 기반 벤처기업에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모바일 뱅크인 'N26'과 전세계 맞춤형 여행 서비스 회사인 '겟유어가이드' 등이다. 이들은 10억달러 이상의 가치를 지닌 '유니콘' 기업이다. 소프트웨어 기업인 '팀뷰어'는 지난해 유럽 사상 최고액의 기업공개(IPO)를 성사시켰다.
하지만 그같은 성공스토리는 여전히 예외적이라는 분석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CB인사이트의 '글로벌 유니콘 클럽'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유니콘 기업 중 독일 국적은 12개에 그쳤다. 미국은 217개, 중국은 106개, 영국은 24개였다.
머크 CEO 오슈만은 벤처투자 부재에 덧붙여 독일 기업들과 국방·정보기관들이 협업하는 생태계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군산복합체다. 군산복합체는 미국은 물론 중국, 이스라엘, 한국의 기술기업들을 급부상시킨 일등공신이라는 것.
그는 "플랫폼 기술과 관련해 현재의 유럽은 사실 경쟁할 입장이 안된다"며 "벤처투자는 턱없이 부족하다. 유럽이 무얼 잘하는가. 물리적인 것을 차별화시키는 것을 잘할 뿐"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거대 연기금 펀드들이 벤처캐피털을 통해 기술 스타트업들에 장기간 투자한다. 반면 독일 연기금은 지극히 안정적인 투자처만 찾는다. 투자의 대다수는 쥐꼬리만 한 수익률의 국채로 향한다. 오슈만은 이를 '멍청한'(absurd) 전술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벤처캐피털에 투자하는 게 이탈리아 국채에 투자하는 것보다 덜 위험하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 역시 변하고 있다. 다우존스 벤처소스에 따르면 독일은 지난해 70억달러에 육박하는 벤처캐피털 투자를 기록했다. 2년 전보다 2배 이상 늘었다.
폭스바겐 CEO 디스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 사례는 독일 산업이 더욱 더 긴박감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며 "자동차는 이제 '바퀴 달린 아이폰'으로 변모하고 있다. 폭스바겐은 자동차 업계의 노키아로 전락할 리스크에 놓였다. 노키아는 휴대폰 시장에서 애플에 지배력을 내준 뒤 무릎을 꿇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사 간부들에게 "노키아 사례는 자동차 산업에서도 반복되는 상황"이라며 "자동차는 더 이상 운수송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전통의 자동차 제조사들의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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