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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혁명, 곧 폭군 옷 입는다”

이강기 2021. 1. 11. 09:46

[서소문 포럼] “성공한 혁명, 곧 폭군 옷 입는다”

 

[중앙일보] 입력 2020.12.30 00:37 |

고정애 기자

 

고정애 논설위원

 

언행일치도 어렵지만 언행을 정반대로 하기도 어렵다. 그 어려운 걸 민주화 세력 출신의 집권 엘리트가 해내고 있다. 민주화를 외친 이들이 집권했는데 오히려 민주주의가 퇴행했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민주주의로 포장한 독재 시대에 살고 있다”(서병훈 숭실대 교수), “싸가지 없는 진보는 정치에 해롭다. 아니 민주주의의 적이다”(강준만 전북대 교수) 등이다.

‘민주화’ 훈장 단 집권 엘리트인데
민주주의 몰이해로 곳곳에서 퇴행
다시 민주주의 성찰 계기 삼아야

 

그러나 매사 음영이 있는 법, 어둠이 있으면 밝음도 있다. ‘민주주의 발전은 필연’이란 근거 없는 낙관론이 깨졌고 겸손하고 용감해야만 민주주의의 역진을 막을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특히나 교과서로만 접했던 민주주의 작동 원리를 다시 탐구할 기회도 얻었다. 민주화 세력의 진정한 민주화 기여다. 2020년 세밑 이네들의 곱씹을만한 대표적 활약상을 추렸다.

①우선 3권분립이다. 민주주의가 선출한 지도자에 의해 죽는 걸 본 유럽은 견제와 균형을 위해 “유권자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기관에 개인의 권리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총체적으로 보호할 임무”(『민주주의의 시간』)를 맡겼다. 바로 법에 따라서 판단해야 하는 헌법재판소이고 대법원이다.

추·윤 갈등 와중 두 번째 행정법원의 판단이 나오자, 할 일을 한 법원을 향해 여권은 “사법의 과잉 지배”(이낙연 대표), “입법을 통해 검찰·법원이 국민에게 충성하게 만들겠다”(김용민), “일개 판사의 법적 쿠데타”(김어준)라고 공격했다. 바로 직전 문재인 대통령이 했다던 말을 들려주고 싶다. 본의였는지 애매하지만 말 자체는 맞아서다. “우리 헌법정신에 입각한 견제와 균형의 민주주의가 더 성숙하게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서소문포럼

 

사실 이네들의 성대는 “민주주의”라고 진동하지만 인식 체계는 ‘군주정’일 수 있다. 김정은이 ‘계몽 군주’(유시민)이듯, 문 대통령은 정조 반열의 ‘개혁 군주’(고민정) 말이다. 그러니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는데 이들은 “대통령을 지키는 게 민주주의”(김두관)라고 한다.

②민주적 통제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 ‘검찰개혁’과 한 덩어리로 빈번하게 나온다. 정권 초기에 ‘적폐수사’를 하는 게 검찰개혁이었는데 근래엔 현 정권 수사를 막는 게 검찰개혁이 되었듯, 한때 검경수사권 조정이나 특별검사제 도입, 검찰인사제도 개혁 등이 민주적 통제였다면 이젠 정치권력의 간섭이 민주적 통제가 됐다. 한마디로 민주(당)적 통제다.

1년여 전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3년여 소장으로 지냈다)의 ‘검찰과 민주주의’ 좌담회에서 “전문가나 국민의 참여를 확대함으로써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의 인사권을 제한하는 방향”이란 설명과 함께 지방분권적·민주적 검찰인사위원회가 제시됐다는 점을 일깨우고 싶다.

③다수결도 있다. 의회의 작동 원리는 다수제와 합의제의 혼합이다. 국회법의 160여개 조항 곳곳에 ‘합의’(15차례)와 ‘협의’(54차례)가 반복 등장하는 이유다. ‘협치’는 그러나 선전일 뿐 현실에선 다수제만 가동했다. 그 결과물이 “농담을 할 때마다 법이 되고 법을 만들 때마다 농담”(미국 사회비평가 윌리엄 로저스)이 되는 현실이다. 지금 기세대로라면 누군가의 출마를 강제하는 법도 만들 수 있을 게다.

 



이러는 사이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도 유지되던 여야 간 상호 관용과 절제의 관습은 속절없이 사라졌다. 제아무리 필리버스터가 국회법에 ‘의사진행방해’가 아닌 ‘무제한 토론’으로 성안됐다해도, 다수의 지배에 맞선 소수의 권리 존중이란 정신이 사라져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네들은 소수파의 의사진행방해를 방해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곧 그만둘 듯 6시간 30분간 말을 이어가 결국 야당 원내대표의 필리버스터를 방해한 의원(이재정)이 그 예다.

이뿐이 아니다. 법 앞에선 누구나 평등하다는 원칙이 법치인데 이것도 두렵다고 했다. 그러더니 마키아벨리의 관찰(“오직 권세 있는 자들만이 공공선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법률을 만들기 시작했다”)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또 다수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다수가 내리는 판단이 틀릴 수 있고 거기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게 민주주의인데 이네들은 자신들만 도덕적이어서 어떤 잘못을 해도 반대파보다 낫다고 믿는다. 오만이다.

“모든 성공한 혁명은 조만간 자신이 몰아냈던 폭군의 옷을 입는다”(미국 역사가 바바러 터크먼)던가. ‘민주화’란 훈장을 가슴에 단 집권 엘리트도 그렇다.

고정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