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1910-1934년 조선의 사상계 변천사

이강기 2015. 8. 28. 17:58
1910-1934년 조선의 사상계 변천사    2012/02/27 11:23
 
 
잡지명 삼천리 제6권 제7호
호수 제6권 제7호
발행년월일 1934-06-01
기사제목 最近朝鮮의 轉變 25年間-(思想界) 火曜, 北風, 新幹會 等의 明滅
필자 金璟載
기사형태 논설

一. 緖言

내가 7, 8歲 때에 書堂에 다닐 때에 洞里 어른들 틈에 끼어 까닭 모를 氣分에 緊張하엿든 일이 어제 갓흔데 벌서 그 사이에 25年의 歲月이 흘넛다.
이러케 생각하니 歲月이 너무도 쉽사리 흘넛거니와 내가 이제는 이러케 자랏스며 25年이라면 한 世紀의 四半年이거니 하매 퍽으나 오란 歲月갓다. 그 사이에 朝鮮 내의 團體의 轉變을 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內容이 넘우도 復雜多端한 것도 理由의 하나이려니와 아무리 表現團體만을 中心으로 하고 體系를 세우려 할지라도 그에는 언제나 裏面에 다른 組織이 잇고 人物이 잇서 그와 서로 交互關係를 갓고 잇스며 派的 勢力의 對立은 中傷과 排斥을 나엇스며 그에 따라서 離間, 謀陷, 嫉妬가 運動에 直接 혹은 間接으로 多大만 影響을 주엇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最近 25年間의 思想團體의 轉變은 그가 우리 近世史上의 가쟝 重要한 장면으로 등장될 것이다. (?-원문) 엇지 햇든 우리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左往右往하야 彷徨하든 것도 이때와 가튼 때가 일즉이 업섯고 여러 가지 意味 及 意識밋헤 발자최를 옴겨 오든 것도 이 때인 것이다.
大體 한 개의 團體가 表面化하기까지에는 그에는 源因이 잇고 動力이 잇고 그의 結果로 顯現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는 原因도 動力도 알배기 아니고 다만 表面의 團體를 中心으로 하고 그의 轉變을 말하라는 것이며 그리고 극히 쩌른 紙面에 그의 全面이러나도록 채(充)워 주고 누구가 보든지 一讀하고 나서는 「올치」하고 25年間의 團體運動의 轉變이 그대로 머리 속에 印처지도록 要領이 잇고 아주 쉬웁게 써달나는 三千里社의 要求인 바 執筆者인 나에게 잇서서는 마치 圓形으로 된 구멍에 三角形의 鐵棒을<61> 접어너허 달라는 注文이나 다름업다. 따라서 格에 合하기는 바라지 못할 것이 執筆者인 나의 지레 근심이다.

一. 運動의 始初

(7枚로 된 一節此間?-원문) 여러 해를 두고 싸우든 世界大戰은 獨逸의 敗戰으로 終幕을 告하고 巴里에서 그의 ?和會議가 열니어젓다.
獨逸의 復興을 ?내는 佛蘭西는 이 機會에 獨逸로 하여곰 永遠히 머러를 들지 못하게 하려고 하엿스니 그는 米國의 월손의 提唱한 바의 自決主義를 바더드리어 獨逸의 手足을 잘너 내이기로 햇다. 다음의 問題는 獨逸과 露西亞와의 接近을 防止함에 잇슴으로 波蘭, 리드아니아, 라트바아 等의 새 成立을 承認케 되엇스니 이 물결이 흘너서 -에 까지 옴에 이르럿다.
그래서 그 일이 잇고 그 뒤 朝鮮에는 各地에 靑年會가 出生하엿스니 그의 目的은 智德體 三育의 發達을 圖謀한다는 것이나 그의 色彩는 1920年에 京城에서
吳祥根, 張德秀 等이 中心이 되여 가지고 朝鮮靑年會聯合會가 結成되엇다. 그와 同時에 朴重華, 朴珥圭, 尹德炳, 申伯雨 等이 中心이 되어 朝鮮勞?共濟會를 組織하엿스니 그는 그 때에 잇서서는 가장 進步的의 思想을 가진 그들로서 勞?者의 問題를 硏究하고 資本主義의 發達과 殖民地와의 關係도 若干 解得하는 部類의 사람들이엇다. 그러나 朝鮮勞?共濟會는 一種 文化團體이엿다고 보는 것이 正當한 見解일 것이다. 學生團體도 생기고 基督靑年會의 巡講 等이 盛行하엿다. 그러다가 外地의 諸 轉變하는 몰결이 波及됨에 이르럿다.

階級分解의 進展

第1期

最近의 朝鮮의 思想運動을 그가 東京, 大阪의 思想 如何에 影響하는 바가 만타. 그리고 북쪽으로부터 오는 影響도 크다. 따라서
朝鮮勞?共濟會가 그 構成要素에 잇서 組織層으로 보아 가장 進步的의 思想을 把持한 이가 만엇음으로 그로부터 오는 影響이나 波動에도 가장 敏感하엿다. 上海?, 尼市?하고 海外의 運動의 ?戰이 激熱할사록 그의 波動이 드듸여는 鮮內의 思想團體에도 波及하고야 마럿다. 尹德炳, 申伯雨 等이 朝鮮勞?共濟會의 解體를 聲明하고 朝鮮勞?聯盟을 組織하얏스니 그가 1921年이엿다. 그와 對立한 意味에서<62> 全鮮勞農大會가 組織되엿으니 그는 1923年으로 金思國, 姜宅鎭 等이 그의 重要人物이고 그 해에 晋州에서 南鮮勞農同盟이 組織되엿스니 그는 全南北, 慶南北, 忠南北 等地에 散在한 各種의 勞農團體의 聯盟體이엿으며 徐廷禧, 鄭雲海, 李榮珉 等이 그의 重要한 役割을 坦任하고 잇든 바 1922年에 와서 비로서 朝鮮勞農總同盟이 組織되면서 前記의 3團體는 解體햇다. 朝鮮勞?聯盟이나 朝鮮勞農大會
는 그가 京城에 位置하고 잇는 關係上 政治的으로는 若干의 意義가 잇을지 모르나 實地에 잇서서는 何等의 力量을 다하지 못한 團體이엿음으로 오즉
南鮮勞農同盟이 잇서 실력으로 大同團結體인 朝鮮勞農總同盟을 맨드러내인 셈이다. 그에는 全鮮을 통하야 勞?團體 118個 農民團體가 114個 합하야 232個의 細胞團體를 網羅한 大組織이며 벽頭에 東亞日報의 非買決議와 示威運動으로 氣勢를 크게 떨치엿고 徐廷禧, 鄭雲海, 尹德炳, 姜宅鎭, 馬鳴 等은 朝鮮勞農總同盟 創立 당시의 有力한 役割을 하얏으며 그리하야 朝鮮勞農總同盟은 火曜系, 北風系, 서울系가 어울니어서 組織의 完成을 實現식키엿스나 그후의 運用은 火曜系와 北風系의 손에서 움지기게 되엿섯다. 그러면 火曜會, 北風會, 서울靑年會란 무엇이며 그는 언제 엇던 由來를 갓고 잇는 것인가를 말하지 안을 수 업다. 1921年에 金翰 朴一秉 等이 中心人物이 되여서 無産者同盟을 組織하고 階級運動을 標榜하엿으나-으로 動態를 取할 수 업슴으로 이에 學術硏究團體로 新思想硏究會를 組織하엇스니 그는 1922年이요 申伯雨, 尹德炳, 洪增植, 具然欽 等이 幹部級의 人物이다. 그 후 硏究會란 념우도 非活動的이요 無能하다 하야 火曜會로 組織을 變改하얏스니 그는 1923年이고 金燦, 金在鳳, 尹德炳 等이 그의 重要한 俳優이엿다.
一方에
金種範建設社를 組織하얏는 바 그가 1921年이고 그 翌年에 東京에서 北星會를 組織하고 思想運動을 하고 잇든 金若水의 一?가 도라와서 前記의 建設社의 組織을 變改하야 北風會라 하니 金若水, 鄭雲海, 宋琫禹, 辛鐵 等이 그때 中心人物이엿으며 서울靑年會는 1920年에 一般靑年團體로 張德秀, 崔八鏞, 金思國, 申伯雨 等等이 그를 組織하엿든 것이나 例의 泥市?, 上海派 等의 싸움에 張德秀, 崔八鏞 等은 XX費 構領하엿다는 것으로 自然陶汰가 되고 申伯雨 一派의 所謂 泥市派도 밀니여 나오고 金思國 一派의 陣營이 되는 同時에 그는 1個의 地域的의 靑年團體가 아니라 全體運動을 意味하는 思想團體的 役割을 하야온 것이다. 金思國, 鄭栢, 李廷允, 朴衡秉 等은 그의 重要人物이엿든 것이다.
朴憲永, 金X冶, 曹奉岩, 林元根 等이 核心이 되여서<63> 新興靑年同盟을 組織하얏스니 그가 1923年이고 新興靑年同盟을 그가 組織되야 年이 淺하나 朝鮮의 靑年運動 及 思想運動에 잇서 巨大한 賦役을 實踐하엿다는 點에 잇서 그의 存在가 빗낫다. 朝鮮靑年會聯合會朝鮮靑年總同盟으로 組織의 變改를 斷行하든 同時에 從來의 主義 綱領은-그리고 社會主義 靑年이 運用의 機樞에 當하엿으나 그때는 임이 派的 對立이 鮮明한 후이엿음으로 朝鮮 靑總은 언제나 서울靑年會系의 손에서 領導되여 잇섯다. 이때에 新興靑年同盟火曜會系의 靑年前衛團體로 火曜會系의 運動의 實權은 언제나 新興靑年同盟의 손에서 左右되고 잇섯든 것이며 全朝鮮民衆運動者大會도 火曜會의 提唱이엿으나, 그에는 新興靑年同盟의 活動이 컷든 것이다. 新興靑年同盟은 第1代의 委員長이 朴憲永이엿고 第2代에 林元根, 第3代에 金璟載이엿든 바 第3代 時代에 와서 第1 第2次의 共産黨事件으로 前記의 人物이 投獄되니 그후의 新興靑年同盟은 自然히 失勢를 免치 못햇다. 共黨이니, 共靑이니 하는 것이 正式으로 國際關係가 매저즈기는 第1 第2次黨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의 組織은 全朝鮮民衆運動者大會와 共히 誕生된 것이고 그리고 그이 核心勢力은 新興靑年同盟의 核心分子이엿다는 點에 잇서 新興靑年同盟은 그가 組織되야서 日淺한 比例로는 役割이 컷스며 서울系의 손에서 運用되든 靑總과 對立的 役割을 하고 잇든 漢陽靑年聯盟은 그가 京城市內와 漢江沿岸의 19個 團體에 1,020名의 會員을 包容하고 이섯으나 그의 主要勢力이 新興靑年同盟이엿든 것이다.
火曜會에서 發起한 全朝鮮民衆運動者大會는 서울靑年會에서 反對運動이 또한 猛烈한 바이 이섯으나
北風會와 朝鮮勞農總同盟이 그를 積極的으로 支援하야 警察의 集合禁止로 會合에는 이르지 못 하얏으나 그 後에 朝鮮의 思想運動에는 비로소 色彩가 鮮明하야 왓으니 지금까지의 地方團體의 大槪는 智德體三育의 發達이란 그런 漠然한 綱領下에서 一種의 文化運動을 하든 것으로 滿足하고 이섯으나 갓흔 線의 우리는 火曜會니 北風會니 할 것이 아니고 하로라도 속히 統一을 圖할 것이라 하야 北風會, 火曜會, 朝鮮勞?黨, 朝鮮無産者同盟이 四個團體는 合同總會를 열고 그의 具體的<64> 實現을 꾀하엿으나 未遂하고 齊洞의

第二期

北風會?에 前記 4個 團體의 看板을 한곳에 모아 걸고 內面에 잇서서는 事務的으로 統一을 실현식키고저 하야 한 團體에서 두명式의 常務委員을 選出하야 그들로 하야곰
四個體合同委員會의 幹部에 任케 하얏스니
北風會 金若水 李奎宋
火曜會 金燦 金璟載
朝鮮勞?黨 李忠模 李極光
無産者同盟 朴一秉
7人의 常務委員이 잇서 實際 事務에 當햇다. 여기에서 從來의 朝鮮思想運動에 多角的의 現象이 淸帳되고 서울 對 四合의 兩大對立이 出現햇든 것이다. 그러나 四團體合同委員會란 그의 組織이 畸形的이엿든니만큼 그가 統制에 잇서 圓滑을 하기 어려웟고 다음에는 地X組織의 破裂이 直接으로 表面團體에 影響하얏으니 그리하야 四團體合同委員會는 再分裂의 조짐이 뵈이기 시작햇다. 1925年 겨울에 新義州에서 비밀의 일부가 루설되야서 드듸여 第1次黨의 檢擧가 잇고 그 後의 團體의 運用은 從來의 派的 싸움의 經歷이 淺한 比較的 新進分子의 손에서 支配되면서 統一은 다시 一般의 갈망하는 바가 되엿다. 그리고 地X組織의 權威가 날로 墜落하고 잇으며 따라서 그가 밋치는 바의 表面團體의 影響도 아주 薄弱하게 되니 表面線의 統一의 氣分은 날로 濃厚하고 이섯다. 1926年 봄에도 明月?에서 四合 對
前進會와의 合同懇談會까지 하게 되엿고 그 前進會의 唱導인 朝鮮社會團體中央協議會에도 四合側은 그에 參加하기를 決議하는 둥 X線統一의 소래는 하로하로 놉하 가고 잇섯다. 이에 四團體合同會는 正式으로 解體하고 正友會는 創立케 되엿으니 그의 發起人에 北風會側에서 李奎宋 裴德秀 白基浩 等이고 火曜會側에서 金璟載 李鳳洙 吳義善 等이고 朝鮮勞動黨에서 李忠模 金演義 朝鮮無産者同盟에서 朴一秉 等이엿으며 그 外의 無所屬으로 金世淵 金京泰 等이 그에 參加하야서 幾多의 難關도 X線統一이라는 口號 下에서 統一工作은 一步一步 進?되야서 正友會가 創立을 告하고 四合의 解體式까지 畢하니 朝鮮日報와 時代日報는 『正友會의 成立』이란 題의 社說을 載하야 그의 有意義함을 비럿다.
그보다 先하야 서울靑年會側에서 前進會를 組織하얏으니 그는 서울靑年會란 靑年團體로 一般的의 思想運動까지 하게 되는 것은 그 組織上에 잇서 또는 그의 機構運用上에 잇서 缺陷이 잇다는 것이엿으나 그러한 表面의 理由 以外에 內面的의 事情도 그에는 잠재하야 잇섯나니 서울靑年會의 「멘버」 가운데에는 他工作을 否定하는<65> 一派와 그를 是認하는 一派가 잇서 서로 對立的 氣勢를 갓고 이섯다. 前進會는 地X工作을 是認하는 一群이엿으니 그는
李廷允 朴衡秉 鄭栢 金越星 等이엿다.

第三期

正友會, 前進會의 創立은 그는 朝鮮社會運動線에 잇서 劃期的의 일인 同時에 X線의 整理와 共히 一大收穫이 아닐 수 업섯다. 그리하야 意識的 統一의 徵候가 濃厚하야 왓으니 그는 初期運動에 잇서 過去의 封建的 이데올으기를 多分히 갓고 잇는 그들이 運動을 領導하고 잇든 關係上 피하지 못할 運命이엿다면 第1次黨의 檢擧의 結果로 內部의 事情도 만이 變햇거니와 客觀的의 情勢는 派爭의 淸算을 促進하는 바가 이섯다. 그 후 1926年에 第2次黨의 大檢擧가 開始되면서 全鮮에서 百餘名이 가게 되고 其他의 多數는 海外로 닷게 되니 情勢는 再轉하야 組織에 잇서 一大變化를 招致케 되엿다. 東京의
一月會安光泉 河弼源 朴洛鍾 等에 의하야 正友會는 解體되고 運動方略을 從來의 經濟X爭에서 全線的 運動으로 방향을 전환하지 안으면 아니 된다고 외첫다. 종래의 朝鮮의 社會運動은 국한된 經濟X爭으로 본다는 것은 事實把握에 잇서 정당한 인식이 아니요. 다만 東京 大阪의 理論을 그대로 직수입하려는 데에서 그러한 폐해가 잇섯다 할시나 地下組織의 완성을 따라서 思想團體가 해체되여야 할 것은 당연한 노정이엿고 線의 統一이 이루워지면서 全線的의 政治運動을 소래 놉히 부르지즌 것도 필연의 도정이엿다. 前進會에서 召集한 朝鮮社會團體中央協議會에서 그에 대한 논쟁이 잇고 常設과 非常設의 對立的 現象에서 그의 發起 당시의 精神과 宣言 綱領에 基準한 規約을 否定하며 非常設의 理論이 優勢를 得하얏슴도 그가 지극히 당연한 일이요. 그리하야 朝鮮의 社會運動은 再一步한 것이엿다. 朝鮮社會團體中央協議會가 前進會에서 發起되엿고 1926年 正初에 明月? 本店에서 四合對 前進會의 合同懇談會가 열니엿을 때에 四合委員會側에서는 그에 參加는 하되 멧 가지의 주장을 聲明하얏든 바 그에는 常設機關을 두자는 데에 反對를 表明햇든 것이다. 東京의 一月會에서도 그 주장을 갓고 잇섯스니 朝鮮社會團體中央協議會는 1927年 5月에 大會가 열니여서 그 問題로 討議가 深刻化하는<66> 中에 集合의 禁止를 當하고 마럿다. (이때부터 朝鮮運動의 領導權이 俗稱 엠, 엘派의 손에서 左右되엿고 그와 對立的 地位에 서울派가 잇게 되엿다.)

社·民協同에서 再分野

『從來에 국한된 經濟X爭에서 全線的 政治運動으로의 방향전환이란 이러한 슬로-간은 그는 필연적으로 社會主義者와 民族主義者와의 協同線의 必要를 나(生)혓다. 그에서 나온 것이
新幹會이엿다. 申錫雨, 安在鴻, 洪命熹, 李鍾麟, 李灌鎔 等이 그 發起當時의 中心人物이엿으며 그보다 先하야 서울系의 宋乃浩 權泰錫 等이 汎民族主義團體로 民興會를 組織하엿다가 新幹會에 合倂되엿다. 光州에 학생사건이 잇고 게속하야 민중대회사건으로 許憲, 李灌鎔, 洪命熹, 趙炳玉 等의 新幹會의 幹部級의 人物이 가고 新幹會의 解消運動이 起하야 1931年에 新幹會大會에서 解消 可決되엿다. 그 이유는 新幹會의 領導權이 인테리의 小市民層이 갓고 잇스니 그는 鬪X力을 발휘하지 못하고 勞?者와 農民은 新幹會 運動으로 하야 自己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따라서 階級的의 의식까지도 점차로 희박하여 진다는 것이다. 全線的의 政治運動을 표방하고, 방향의 전환을 부르지즌 그들로 新幹會란 媒介組織으로는 역량을 발휘할 수도 업거니와 勞動者, 農民의 階級的 -이 아주 不足햇다. 『從來의 局限된 經濟X爭에서 全線的의 政治運動에로 轉換이란』 看板은 華麗햇으나 그의 結果로의 所産物인 新幹會運動은 넘우도 無爲無能이엇다. 그리하야 從來의 經濟X爭까지도 勞動者와 農民의 머리에서 빼아서 버렷다. 新幹會의 解消는 社會主義者와 民族主義者와의 再分解를 표시한 것이다.
新幹會가 해소하야 벌서 3個年 이래에 아무런 表現團體의 출현도 업다. 그럿타 해서 新幹會의 解消로써 朝鮮의 社, 民의 協同은 永遠히 否認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업다.
한가지의 事實은 반듯이 그와 反對의 새 事實을 낫는다. 그리하야 그 다음의 段階에 와서는 前記 두 가지의 事實이 綜合的 結果를 낫는 것이다.
組織上 缺陷이 만어서 何等의 力量을 發揮할 수 업게 된
新幹會가 解消되여야 함은 그는 當然한 일이요 반가운 일의 하나이엿다. 그러나 一定의 目的意識을 세우고 그 共通한 要求를 향하야 協同이 再組織되고야 말 것을 굿게 밋는 우리다. (完-원문)
(1934. 5. 6) <67>
<6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