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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수입된 것

이강기 2015. 8. 29. 18:10
'민족'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수입된 것    2012/05/08 00:07
 
 
'민족'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수입된 것
'민족'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며, 1919년 최남선 선생이 지은 3ㆍ1 독립선언서에 많이 쓰이면서 세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인가 싶다.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관리자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된 뒤 남한 사람으로서 백두산 천지에 올라간 최초의 사람은 1987년경인가 당시 명지대학교에 재직 중인 진태하 교수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중국어 전공인 진 교수는 아직 국교가 수립되기 이전의 중국에 학술회의차 들렀다가 백두산행을 결행하였다.

백두산 천지에 올라 그는 가슴에 몰래 품고간 태극기를 꺼내어 펄펄 휘날렸다. 그렇게 감격해 마지 않은 진 교수의 사진이 천지의 배경과 함께 도하 신문의 1면 톱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무엇이 진 교수로 하여금 그토록 들뜨게 만들었던가. 백두산은 민족의 혼백이 깃든 신령한 산이라는 한국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집단기억 때문이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 대한 집단기억의 허실●

그런데 1930년대로만 올라가도 그러한 집단기억을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예컨대 30년대에 나온 홍명희의 『임꺽정』소설을 보면, 임꺽정이 백두산 원시림에서 장차 그의 아내가 될 처녀를 만나 그 집에서 놀다가 하루는 백두산 꼭대기에 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꼭대기에 올라 임꺽정이 한 행동거지는 그저 “용왕못을 구경하고 내려왔다”는 단 몇 구절 뿐이었다. 그러니까 30년대까지만 해도 천지라는 말이 일반적이지도 않았거니와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이라는 오늘날 한국인이 공유하는 집단기억도 생소한 것일 수가 있었다.

훨씬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날과 전혀 딴판의 백두산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 얼마 전에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서 나는 1776년에 백두산에 오른 서명응(徐明膺)의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고급관료이자 당대 최고 지식인의 한 사람인 그는 백두산을 가리켜 여기는 조선땅도 아니고 중국땅도 아니어서 천년이 지나도 한두 사람이 올까말까 한 곳인데, 마침 내가 올랐으니 산 위의 이름 없는 큰 연못에 이름을 짓겠다며 태일택(太一澤)이라 하였다.

●인간들의 집단기억●

이 같은 백두산 이야기는 인간들의 집단기억이란 것이 흔히들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져 온 것이라 하지만 실제론 불과 몇 세대 이전의 가까운 과거에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과거에 대한 인간들의 집단기억을 가리켜 역사라고 한다. 그러니까 거창하게 역사라고 하지만 멀지 않은 과거에 만들어진 것일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예를 소개하자면 한도 없다. 예컨대 오늘날 한국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국사교실에서 일제가 식민지기에 토지의 4할을 빼앗고 식량의 5할을 실어나르고 태평양전쟁기에는 650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강제연행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선생도 울고 학생도 우는 경험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시대의 경제사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무지막지한 일들은 없었다. 해방 이후의 교과서를 정밀히 추적해 보니 그러한 서술이 등장하는 것은 1967년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그러한 교과서 서술이 없었다. 그러니까 몇몇 역사가들이 불과 40년 전에 지어낸 이야기가 교과서의 서술로까지 발전하여 역사라는 권위를 부여받고 있는 셈이다.

●현대 한국의 사회문제와 민족의식●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나는 민족이라는 것도 다분히 얼마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무슨 불경스런 말이냐고 화를 내실 분도 있겠지만, 관련 자료를 오랫동안 검토해 온 필자로서는 물러설 생각이 별로 없다.

만약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오늘날 다시 살아나 ‘민족’이란 말을 접하면 “그 참 이상한 말도 다 있다”고 혀를 찰 것이다. 조선시대의 관념으로 민(民)이란 초(草)에 불과한 것이지 족(族)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족이라 함은 왕족(王族)이니 사족(士族)이니 삼한(三韓)의 거족(巨族)이니 등등, 지배신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이상하게 생긴 민족이란 말을 조선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20세기부터이다. 그 말은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며, 1919년 최남선 선생이 지은 3ㆍ1독립선언서에 많이 쓰이면서 세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인가 싶다.

민족이란 말에 담겨 있는, 한국 사람은 역사와 문화와 운명의 공동체라는 집단의식도 조선 사람들에겐 생소한 것이었다. 17세기만 해도 인구의 절반은 노비(奴婢)신분이며, 그들은 주인의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그 노비제가 해체된 이후 양반(兩班)과 상민(常民)이라는 두 신분제가 발달하는데, 양반과 상민은 한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한 마을에서 일년에 한두 번 온 마을사람들이 모이는 동계(洞契)의 날에 양반은 마루에 앉고 상민은 마당에 섰다. 그렇게 사회적 처지가 같지 않은 사람들끼리 역사와 문화와 운명의 공동체라는 의식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날 한국 사람을 하나로 결속하고 있는 민족이란 감정도 20세기에 들어와서 생긴 것이다. 백두산이 한국 사람의 영산이 된 것도 바로 그 과정에서였다.

●민족의 실체는 애매모호한 것●

민족에 담긴 이 같은 역사성을 명확히 의식하게 되면 오늘날 대한민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수준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현상에 일정 정도의 비판적 시선을 던질 수 있다. 민족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위험하니까 해체해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갖춘 역사가는 없다. 다만 역사가는 민족이란 것이 원래 그렇게 저렇게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생각되어 왔던 것만큼 그 실체가 확고부동하지 않을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그 형태가 매우 가변적일 수도 있음이 민족이라는 사실을 대중과 정치가에게 성찰의 화두로서 속삭일 뿐이다.

민족의 실체가 애매모호한 것일 수 있다는 성찰은 지난 김대중 정권 이후 부쩍 잦아진 ‘우리 민족끼리’라는 무조건적인 통일논의의 위험성을 일깨우는 데 도움이 된다. 통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조건적이 아니며 여러 중요한 것 가운데 한 가지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우리 민족끼리’가 허상일 수도 있음은 6년 전의 6ㆍ15남북정상회담 이후 지금까지 북한의 대남 관계에 있어서 본질적인 변화가 없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도데체 이 지구 상에서 진짜 피가 통하는 가족ㆍ친족 간에 자유 왕래는커녕 편지도 직접 통하지 않은 두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도 명색이 같은 민족이면서.

●민족보다 소중한 자유와 인권●

민족보다 훨씬 보편적이면서 인간의 정신과 물질 생활을 살찌우는 것이 있다. 자유와 인권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들은 빈말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사유재산제도와 자유시장제도를 통해서 달성된다. 나는 북한이 하루 빨리 이러한 인류 보편의 문명요소를 국가체제의 기초로 정착시키는 개혁을 단행해 줄 것을 고대해 마지 않는다. 그렇게 변하기 시작만 하면 북한이 남한과 비등한 경제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리라.

그 때가 언제쯤일까, 대략 30년 뒤일까, 그 때가 되어 두 나라가 FTA를 체결하여 자유시장으로 통합되면 그것이 바로 통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길 이외에는 평화통일을 달성할 길이 없을 듯하다.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출처 : 한국선진화포럼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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