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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을 알면 이승만과 50년대가 보인다

이강기 2015. 8. 29. 19:10
 
 
김창룡을 알면 이승만과 50년대가 보인다
『한국 현대사 산책:1950년대편 3권』(인물과사상사, 2004년 7월)
 
강준만 
 

최초의 국군장으로 치러진 김창룡의 장례

1956년 1월 30일 오전 7시 30분 서울 원효로 1가 출근길에서 이승만의 총애를 누리던 육군 특무대장인 소장 김창룡이 정체불명의 사람들로부터 권총 다섯 발을 맞고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승만은 김창룡의 암살 소식을 접하자마자 적십자병원으로 직접 찾아가 유해를 살펴본 뒤 그 날짜로 김창룡을 중장으로 추서했다. 이승만은 담화를 발표해 애도?뜻을 표한 후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군은 전국에 비상경계망을 펴고 수사에 착수했으며, 전군 장병의 휴가 및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

2월 3일 김창룡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 날 하루 동안 전 육해공군 부대가 조기를 게양하였고 장병들에게는 가무음곡과 음주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승만은 그 날 조사에서 “김 중장은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것이며 충렬의 공을 세운 것이다”고 말하고 비문을 직접 써서 보낸 후 범인 체포를 거듭 독촉하였다.

김창룡의 묘비 비명(碑銘)은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인 이병도가 썼다.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아 그는 죽었으니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이병도의 비명은 “동란 중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 명”이라는 김창룡의 업적도 소개하였다. 물론 이 업적에는 수많은 민간인 학살도 포함된 것이었다.


김창룡의 ‘반공 노이로제’

김창룡이 도대체 누구이길래 이승만이 그토록 그에 대한 애도에 집착하며, 한 저명한 역사학자로 하여금 ‘호국의 신’이라는 헌사까지 바치게 한 것일까? 김창룡을 알면 이승만과 50년대가 보인다. 김창룡은 누구인가?

1916년 7월 함남 영흥에서 태어난 김창룡은 일제치하에서 일본 관동군 헌병 하사관으로 항일 중국인 조직을 파괴하는 정보수집 업무에 종사했다. 그는 해방 뒤 북한에서 전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용케 탈출해 월남했다. 그는 남한에서 군에 입대해 국내의 좌익 색출 작업을 맡았으며, 여순사건 이후 숙군 작업의 실무 책임자로 일했다.

김창룡은 6ㆍ25가 나자 50년 8월 1일 부산 방첩대(CIC, Counter Intelligence Corps) 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서울 수복 후 군ㆍ검ㆍ경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일했다. 그는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시 평양지구 특무대장으로 일하다가 1ㆍ4 후퇴로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군ㆍ검ㆍ경 합동수사본부장 일을 계속했다. 이때 김창룡은 35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이미 권력 실세였다. 그는 수사권을 독점했으며, 이승만과 직통 보고 라인을 갖고 있었다.

김창룡과 같이 숙군 작업의 실무 책임자였고, 김창룡을 이해해주는 사람 중의 하나인 김안일은 김창룡에 대해 “반공의식이 투철했고 일에 대한 집념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나 두 가지 단점이 있었다. 공(功) 앞에선 전우가 없었고, 이해가 상반되는 사람을 용공으로 모는 버릇이 있었다”고 말한다.

김혜진은 김창룡이 “복수심을 불태우며 공산당에 대해 그처럼 광적으로 집착했던 것도 해방 직후 북한에서 공산 세력에게 붙들려 일제하 행적으로 인해 호되게 고초를 당했던 앙갚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어떤 이념적 지향보다 자신의 복수심 때문에 군 내외 공산당 색출에 뛰어들었고, 정보 업무를 담당하는 군인으로서의 자기 업무에 대한 어떤 공적인 윤리의식도 없이 공사를 구분하지 않고 권력을 사용했던 것이다. 공산당 색출에 대한 김창룡의 집착은 점차 병적으로 변해갔다.”

어떤 글은 김창룡의 그런 ‘병적인 집착’을 이렇게 표현했다.

“공산당과 연관이 있다고만 하면 부모형제, 백년지기 할 것 없이 즉각 체포ㆍ구속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의 이와 같은 생활은 붉은 고추만 보아도 즉각 처넣고 싶고, 여성들의 붉은 치마만 보아도 온 신경을 곤두세워 공산당과 연관시켜 볼 정도로 되게 하였다. 붉은 빛에 대한 노이로제 기미라고나 할까.”

김창룡의 노이로제 기미는 앞서 음미했던 고은의 시 한 대목을 떠오르게 만든다.

이 나라에서는

붉은 꽃을 노래하지 못한다

붉은 낙조를 그리지 못한다

결코 나의 피는 붉지 않다

붉은 구호물자 치마는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어라.


이승만은 이론, 김창룡은 실천

1950년대 이승만 반공체제의 히스테리, 바로 그걸 온몸으로 표현하고 실천한 인물이 김창룡이었다. 이승만이 이론이었다면, 김창룡은 실천이었다. ‘실천’이 죽었을 때, ‘이론’이 뛰어가 애도를 표하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이승만의 이론이 ‘빨갱이 사냥’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다. 그의 ‘빨갱이 사냥’은 늘 정치적이었고 정치와 연관되었다. 이승만에게는 그것까지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수하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김창룡이었다. 김창룡을 위한 육군 특무대가 창설되었을 때, 특무대에 부여된 주요 임무 중의 하나는 정치공작이었다. 그 정치공작은 당연히 군부도 대상으로 삼았다. 특무대의 고문 행위와 군내의 이간질은 악명이 높았다.

이승만은 정치권은 물론 군부에 대해서도 ‘분리ㆍ지배술’을 구사하였다. 여러 세력끼리 상호 충성 경쟁을 하게 만들어 그 어느 쪽도 절대적 권력을 갖지 못하게끔 하면서 자신만이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통치술이었다.

이승만은 출신별, 지역별로 형성된 군내 파벌이 상호 반목하도록 조장하는 동시에 그 모든 걸 감시하고 공작을 추진하기도 하는 기구로 헌병대와 특무대를 이용하였다. 김창룡의 충성 경쟁 라이벌은 헌병대의 원용덕이었던 셈이다. 헌병대는 반민특위 활동에 쫓겨 입대한 이익흥, 전봉덕, 노덕술 등 경찰 간부들까지 가세해 정치 개입 성향이 매우 강했지만, 충성 경쟁에서는 김창룡보다 한 수 아래였다.

김창룡 암살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그냥 파묻혀 버렸을지도 모를 많은 비밀들이 범인들의 재판 과정과 이후의 관련 증언들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암살범은 특무대 대령 허태영의 부하인 송용고와 신초식인 것으로 밝혀졌다.

허태영은 육군 특무대 창설과 동시에 이 부대에 전입해 54년 6월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가 김창룡 암살을 조종하고 있을 때에는 무보직 상태였다. 김창룡의 측근은 관동군ㆍ만주군 헌병 출신자, 조선군 헌병 출신자,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 등 세 부류였는데, 이들 사이의 갈등이 만만치 않았다. 조갑제에 따르면,

“조선군 헌병 출신으로는 노엽, 염희춘, 허태영, 장보형 등이 있었다. 조선군 헌병들은 관동군이나 만주군 헌병들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조선군 헌병 출신과 관동군 헌병 출신자들 사이에는 반목 관계가 있어 김창룡은 조선군 헌병 출신들을 중용하지 않았다. 허태영과 김창룡 반목의 심리적 배경에는 출신 성분의 차이에서 오는 감정도 깔려 있었다고 한다. ……

일제 헌병 출신이긴 했지만 허태영은 김창룡과 같은 질의 인간은 아니었고, 정의감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노엽은 ‘허태영은 보통학교 때 그림을 그리라고 하니까 태극기를 그릴 만큼 반일의식이 뿌리깊었고 중학교 때는 스트라이크도 주동했다. 가족들이 그를 피신시킨다면서 일본 헌병으로 집어넣었던 것이다’라고 했다.”



김창룡의 정치공작 20여 건

허태영이 군 교도소 안에서 쓴 『김창룡 저격 거사 동기』는 김창룡의 정치공작 사례들을 낱낱이 폭로하였다.

“김창룡은 일제시대 북만주에서 악질 일본 헌병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애국독립투사를 투옥했으며, 중지(中支) 방면의 연합국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할 때는 포로를 학대한 친일 전범이다.

그는 월남한 후 공산당을 쫓는 군 정보기관에서 근무하게 된 것을 기화로 하여 개인적 영달을 위해 혈안이 되어 행동하였다. 그는 옥석을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숙청을 되풀이하여 공산당원 1에 대해서 양민 10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혔다.

김창룡이 취급한 사건 전부가 허위날조됐거나 침소봉대된 것이다. 그 대표적 사건으로는 관(棺) 사건, 조선방직 사건, 조병창 화재 사건, 김종평 장군 사건, 김도영 대령 사건, 삼각산 사건 등 20여 건을 꼽을 수 있다. 한편 뒤켠에선 살인, 약탈, 협박, 공갈, 항명, 군수품 부정처분, 밀수 등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20억 원의 재산을 끌어모았다.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나서부터는 그 본래의 임무인 군내 방첩업무를 등한시하고 정계ㆍ법조계를 상대로 종횡무진으로 활동, 정치적 혼란을 일층 심화시켰다. 군내에서는 참모총장ㆍ국방장관 등 고급장교들을 모함하고, 위협ㆍ이간ㆍ항명ㆍ월권을 일삼아 안하무인으로 군통수권과 지휘권을 유린하였다.”


그 20여 건의 사건 가운데 하나인 52년의 부산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김창룡의 조작 작품이란 건 앞서 지적한 바 있다. 또다른 사례로 ‘김도영 대령 사건’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는 김도영이 쿠데타를 음모했다는 것이었는데, 이 사건을 맡았던 특무처장 이진용의 증언이다.

“김창룡 부대장이 서울로 올라가 대통령에게 이 사건에 관해 보고한 직후 대구에 있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서둘러 김 대령 등 3명을 잡아넣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했다. 그 뒤 김 대령을 내가 직접 신문했다. 혐의는 민국당의 신익희를 추대하여 정권을 탈취할 목적으로 쿠데타를 계획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그런 사실이 확인되지 않고, 사건이 조작되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김창룡에게 이 정보를 제공한 신 모를 한번 조사해봐야겠다고 했다. 김 부대장은 화를 벌컥 내면서, ‘당신은 왜 피의자를 옹호하고 제보자를 의심하느냐’고 했다. 내가 완강히 사건이 애매하다고 버티니까 김창룡은, ‘나도 알겠는데 이미 대통령께 보고한 일이니 어떻게 하느냐, 당신은 지금 일이 많으니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했다.

장 모 처장이 이 사건을 만들어 기소했다. 워낙 허구가 많아 재판 과정에서 뒤집힐 것 같으니까 김 대령의 다른 비행을 조사하여 횡령죄를 덧붙여 기소했다. 김은 재판부에 압력을 넣었고, 재판정에 직접 나가서 방청,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재판부도 반란음모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는 양식을 보였다.”


김창룡이 죽기 석 달 전인 55년 10월에 발표한 국가원수 암살모의 사건도 조작이었다. 특무대는 중앙청에서 열린 개천절 기념식에서 이승만을 죽이려고 했던 9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에 크게 실망한 김재호 등 독립투사들에게 프락치를 넣어 암살 음모를 꾸미도록 유도하여 만들어낸, 제법 정교한 작품이었다.

암살을 하기로 한 청년 이종태에게 수류탄을 구해준 김재호의 아들 김동훈과 이종태를 포섭했다는 혐의를 받은 이범륜은 사형이 집행되었고 김재호 등 피고인들은 징역 10년에서 15년의 중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4ㆍ19 뒤 출감했다.

그런데 이들의 사주를 받아 수류탄을 호주머니에 넣고 식장에 들어갔다가 투척을 포기했다는 이종태는 기소도 되지 않았고, 증인으로도 나오지 않았으며, 피의자 신문조사를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종태는 김창룡의 부하였기 때문이다. 김재호의 증언이다.

“이종태는 우리를 찾아와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이 박사를 제거해야 한다고 열을 올리더니 모든 것을 자기한테 맡겨달라고 했어요. 우리는 그저 그의 주장이 옳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자가 김창룡의 부하로서 우리를 유인하는 연극을 했더군요. 우리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독립투사들을 잡아 죽이던 관동군 헌병 출신한테, 해방된 조국에서 또 고문을 당하게 되니 그것이 견딜 수 없이 분했오.”


김종평 장군 사건은 일명 ‘동해안 반란사건’으로 55년 육군본부 정보국장인 준장 김종평이 반란을 주동했다는 내용이었다. 속초에 있는 1군단에 이승만이 오면 저격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조봉암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이야기인데, 이 또한 조작 작품이었다.


군내 파벌 싸움

법정에서 허태영은 “나의 행동은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거사와 같은 것이다”고 주장했으며, 신초식은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가 백주에 명동거리를 활보하도록 허용하고 있는 이 나라의 법률이 도대체 어떻게 나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항변했다.

재판에서 허태영에게 사형이 선고되자 그의 부인이 남편의 구명을 위한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이 탄원서는 사건의 배후로 2군사령관인 중장 강문봉과 전 헌병사령관인 준장 공국진을 지목하였다. 그 결과, 허태영의 김창룡 암살 계획을 지원한 혐의로 육군 중장 강문봉, 준장 공국진, 중령 백학규 등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57년 1월 24일 강문봉은 군사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특무대는 육군본부의 관계 국ㆍ감ㆍ실장들에게 압력을 넣어 위조 전표를 끊게 한 다음 이 전표로써 대량의 병기 부품을 횡령했다. 특무대는 이러한 부정으로 손에 넣은 자동차 타이어를 일반 상인들에게 팔았다. 이는 미군 사령부에서도 알고 있었다. 공병자재로 도입된 목재 전량을 특무대 창고에 집어넣은 사실이 미군에게도 알려져 군사원조의 중지까지 검토된 적이 있다.

많은 승용차가 정치가 및 행정부의 고관들에게 공급됐는데 이것도 특무대 루트를 통해서 나온 것이다. 김창룡이 피살된 뒤 신임 특무대장에게 나는 60장의 위조 전표를 제시, 부정의 시정을 촉구했으나 그는 되레 나를 제거하려고 했다.

김창룡은 직속상관인 참모총장이나 국방부 장관을 무시하고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따위의 월권을 자행했다. 비위사실의 보고 내용도 사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김은 정보를 군사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세력 확장에 이용했다. 그는 또 지휘관 사이를 이간시켜 장성들을 분열시켰다. 특무대는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지휘관들을 감시하는 데 열중했다. …… 특무대는 육군의 암적 존재다.”


강문봉은 최후 진술에서 특무대의 체질 개선과 정일권ㆍ백선엽ㆍ이형근 등 3 대장간의 화목을 요구하였다. 이는 당시 군내 파벌 싸움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시사해주는 발언이었다.

부산 정치파동으로부터 4ㆍ19혁명에 이르기까지 군부의 헤게모니 쟁탈전은 정일권 중심의 함경도파(동북파, 강문봉ㆍ공국진 등), 백선엽 중심의 평안도파(서북파, 백인엽ㆍ장도영 등), 이형근 중심의 이남파(중남부파, 민기식ㆍ김종오 등) 중심으로 이루어졌다.1)
1) 정일권과 이형근의 퇴역으로 진정돼 가던 파벌간 대립과 갈등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 송요찬이 59년 2월 육군참모총장이 돼 일본군 지원군 출신들이 득세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중남부파는 만주군 출신 비주류파(박정희ㆍ송석하), 일본 육사 출신파(유재흥ㆍ장창국), 일군 지원병 출신파(송요찬ㆍ최경록), 일군 학도병 출신파(최영희ㆍ김종오) 등으로 4분되는 기미를 보이다가 4ㆍ19 이후 또다시 변화하게 된다.

▲백선엽


2) 백선엽은 30대의 나이에 육군참모총장을 두 번 역임했다. 52년 7월 부산 정치파동 때 병력 파견 요청을 거부한 이종찬의 후임으로 참모총장에 임명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그는 54년 2월 제 1 야전군 사령관으로 잠시 전직되었다가 57년 5월 재차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백선엽이 60년 5월 31일 연합참모본부 의장을 끝으로 군에서 전역했을 때의 나이는 40세였다.


정해구는 이러한 파벌이 이승만의 용인술 차원에서 조장되었다고 말한다.

“이승만의 후원을 받았던 만군 출신, 특히 이북 출신의 젊은 장교들은 전쟁을 거치면서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크게 정일권이 이끄는 함경도 출신의 관북파와 백선엽이 이끄는 평안도 출신의 서북파로 나뉘어 있었고, 이승만은 이들을 경쟁시킴으로써 군의 충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백선엽과 정일권을 교대로 참모총장에 임명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였다.”2)


정일권은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는가?

김창룡 암살 사건으로 최대 위기에 처하게 된 사람은 강문봉의 배후로 의심을 받은 정일권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정일권은 제8대 육군참모총장(54년 2월 14일∼56년 6월 26일)으로 재임 중이었는데, 56년 6월 27일 참모총장이 정일권에서 이형근으로 바뀌었다.3)
3) 정일권은 제2대 합참의장으로 전보됐다가 57년 5월에 예편하고 주 터키대사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였다.

▲노덕술(1899∼?)


4) 친일경찰의 대표격으로 악명을 떨치다가 헌병 중령으로 변신했던 노덕술은 김창룡의 라이벌인 헌병사령부에서 근무했던 관계로 김창룡의 견제를 받아 이승만에 대한 충성 경쟁에서 밀려났다. 노덕술은 부산 CID(육군범죄수사단) 대장을 거쳐 55년엔 서울의 15CID 대장으로 있었다. 노덕술은 1년가량 징역살이를 하다가 김창룡이 암살된 뒤 석방되었으나 역사의 무대에선 완전히 사라졌다.


정일권은 그간 자신의 참모인 노덕술을 활용해 김창룡을 견제하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창룡은 오히려 대규모 절도단이 미군 수송선으로부터 16만 달러어치의 군수품을 훔쳐 팔아먹는 것을 노덕술이 비호한 사실을 밝혀내고 노덕술을 구속해버렸다.4)

당시 군법회의는 강문봉의 배후에 4성 장군이 있다는 설을 수사하기 위해 이승만에게 품신(稟申)했지만, 이승만은 “대장을 조사하면 국제적인 물의가 빚어진다”며 배후 수사를 중단시켰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김영삼의 주장은 다르다. 이승만은 정일권도 잡아넣으려고 했지만 자신을 비롯한 국회조사단이 심증만으로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강하게 반발해 정일권이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파벌주의와 부패는 쌍둥이

김창룡은 암살당하기 직전 고급 장교들의 신원조사로 원성을 샀고 55년의 군대 내 후생 차량 단속과 원면 사건으로 군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암살은 원면 사건 수사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이, 원면 사건에는 이승만도 관련돼 있었다. 설사 그 소문이 타당하다 하더라도, 이는 이승만 정권에서 ‘파벌주의와 부패는 쌍둥이’였다고 말하는 그레고리 핸더슨의 다음과 같은 해설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그(이승만)의 전략은 어떤 단일 파벌이나 단일 지도자의 권력 확대를 방지하는 것이다. 그의 전술은 주요 군 파벌 간부들이 참모총장과 다른 주요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도록 조장해 상호 견제토록 함으로써 어부지리를 얻는 것이다. 또한 그는 부패를 이용하는 상투적인 수법을 사용했다. 즉 부패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행하고 정기적인 개혁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수사기관들이 그의 도구가 되었다.”

허태영을 비롯한 3인에게는 사형이 집행되었고 강문봉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형을 살다가 4ㆍ19 혁명 후 석방, 복권되었다. 정말 김영삼 덕분에 정일권이 무사했던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정일권이 김영삼에 대해 매우 고맙게 생각했던 건 분명한 것 같다. 정일권은 그로부터 36년 후인 92년 대통령 선거 때 하와이에서 암으로 투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여 김영삼을 지지하는 찬조연설을 해주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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Ω백선엽, 『군과 나: 백선엽 회고록』(대륙연구소 출판부, 1989), 314쪽.

Ω서중석, 『조봉암과 1950穗?(상): 조봉암의 사회민주주의와 평화통일론』(역사비평사,   1999), 79∼80쪽.

Ω정지환,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독립기자 정지환의 역사추적기』(인물과사상사, 2004), 31∼   33쪽.

Ω정해구, <백선엽: 빨치산 토벌 지휘한 월남 반공 장교>, 반민족문제연구소, 『청산하지 못한   역사 1: 한국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청년사, 1994), 209쪽.

Ω조갑제,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고문에 의한 인간파멸과정의 실증적 연구』(한길사,   1987), 67∼68, 72∼78쪽.

Ω조현연, <정일권: 탁사(濁史)로 얼룩진 ‘한국의 부도옹’>, 반민족문제연구소, 『청산하지 못한   역사 1: 한국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청년사, 1994), 150쪽.

Ω채명신, 『사선을 넘고 넘어: 채명신 회고록』(매일경제신문사, 1994), 358쪽.

Ω한길사 편집실, <사료: 1950년대의 정치적 중요사건>,진덕규 외,『1950년대의 인식』(한길사,   1990), 437∼438쪽.

Ω한용원, <군부의 제도적 성장과 정치적 행동주의>, 한배호 편, 『한국현대정치론 I: 제1공화국   의 국가형성, 정치과정, 정책』(나남, 1990), 267∼268쪽.

Ω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대왕사, 1993), 171∼173쪽.

Ω그레고리 핸더슨, 박행웅ㆍ이종삼 옮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한울아카데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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