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 冊, 讀書

『소용돌이의 한국정치』후기

이강기 2015. 9. 1. 23:35

『소용돌이의 한국정치』후기



직장생활 말년, 남들보다 하 두 시간쯤 일찍 출근해 밤새 해외에서 들어 온 정보들을 대강 챙긴 후, 둘이서 25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불도 켜지 않은 어두컴컴한 오리엔테이션 룸 객석 한 구석에서 가지는 커피타임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오늘 아침의 화두는 무엇일까? 어제 아침엔 샤르르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였고, 그저께는 이븐 할둔의『이슬람 사상』과 나만갑의『병자남한일기』였다. 남들이 봤으면 좀 한심해 뵈는 구석이 없지 않았겠지만, 우리 둘은 이렇게 매일 아침 가지는 ‘지성의 산책’을 통해 아직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던, 먼 옛날에 놓쳐버린 학문에의 열정을 되살리며 위안을 삼곤 했다. 1980년대 초 암울했던 시절, 우연히 해외에서 만나 국내의 여러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서 곧 의기가 상통했고, 어쩌다가 직장생활 마지막 몇 해를 같은 곳에서 보내게 된 터여서 이렇게 죽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그레고리 헨더슨의『소용돌이의 한국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도 이런 우리들의 아침 ‘식탁’에 자주 올랐다. 그 무렵 우리는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과 안목을 우리 학자들의 ‘정통적인 주장’에만 의존하기엔 균형감각을 가지기에 뭔가 좀 미흡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문명사와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쓴 책들을 부지런히 읽고 서로 토론하곤 했다. 그러다가 헨더슨의 이 책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소문은 무성한데 실체는 보이지 않고, 잊을 만하면 신문이나 잡지에서 찬사가 실리곤 해서 더욱 호기심만 부채질하던 책이었다. 처음엔 당연히 번역 출판된 줄 알고 대형서점을 찾았다가 나중엔 고서점과 몇몇 도서관까지 뒤지고 다녔으나 도무지 오리무중이었다. 참으로 긴 시간을 허비한 끝에 한국 외국어대학 용인 캠퍼스 도서관에서 마분지로 책갈피를 입힌 초라한 몰골을 한 이 책의 원서를 찾았을 때는 마치 희귀한 금서라도 손에 넣은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우리 둘 중 누군가가 “우리가 한번 해 봅시다. 이런 책이 지금까지 푸대접을 받고 있다니” 했고 상대방에서 “그럽시다” 했다. 일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사실 우리가 나서게 된 동기의 절반쯤은 오기였다. 책의 내용이 딱 마음에 든 데다 한국에 관해 쓴 책이 나온 지 30년이 지나도록 당사국인 한국에서 번역서는커녕 원서마저 찾아보기가 힘들었던 데서 울컥 오기가 발동했던 것이다. 군사독재시절엔 그렇다 치더라도 1988년 이후에는 문화외적인 요인으로 이 책이 계속 그늘에 있어야 할 이유를 우리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중략.......



 원서는 1968년 하버드대학 출판부에서 간행한 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를 사용했고, 1987년에서 1988년6월까지 저자가 수정 보완한 상당량의 별도 원고를 원서의 해당부분에 짜깁기 한 후(결국 제2판, 증보판이 된 셈이다) 번역했다. 1968년 이후의 사건들, 이를테면 10월 유신, 유신정권의 붕괴, 신 군부 쿠데타, 제5공화국 등에 관한 내용들은 모두 저자의 수정.보완 원고에서 나온 것이며, 특히 제6장 후반부의 ‘아직 얼버무리고 있는 민주주의’와 ‘1980년대 한국정치무대에 출현한 주요 기관 및 세력’은 통째로 새 원고에서 나온 것이다.

....중략.....

역사학이나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면서 이런 전문연구서를 번역하겠다고 뛰어들긴 했지만, 원작에 누가 되지 않았는지 두렵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도 크게 마음의 부담이 된 것은 이 책의 독자들이 이 나라 최고의 지성인일 거라는 점이었다. 속된 말로 “공자님 앞에서 문자 쓰는 일”이 얼마나 조심스럽겠는가. 그래서 보고 또 보고 고치고 또 고치고 했지만,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고 나서도 이렇게 미진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마땅히 훌륭한 번역가나 학자들이 진작에 우리말로 옮겨놨어야 할 일이었다.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부디 넓은 이해를 바란다. 끝으로 이 역서의 출판에 직.간접으로 도움을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  드린다.

                                 2000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