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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는 것의 역사』후기

이강기 2015. 9. 1. 23:34
『읽는다는 것의 역사』후기   
 
읽는다는 것의 역사
굴리엘모 카발로, 로제 샤르티에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6년 4월



 『읽는다는 것의 역사』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간

“정말 대단한 책이다!” 진도가 나갈수록 책에 푹 빠져 들었다. 원문을 대충 훑어 볼 때와는 전혀 다른 감흥이었다. 이 책이 아직 생성단계에 있는 독서역사학의 효시로서 서구 독서사의 첫 통사(通史)라는 신기축을 이루는 책이어서만이 아니다. 그런 것에 관한 의미는 관계 학자나 연구자들이 이 책에서 얻을 또 다른 가치가 될 수 있겠지만, 내가 감동한 것은 이 책의 주제인 텍스트와 독자의 관계를 풀어내기 위해 파노라마처럼 펼쳐놓는 역사적 사실들의 거대한 재현이었다. 그리스.로마에서 중세, 르네상스, 18,9세기의 계몽주의 시대와 독서혁명을 거쳐 현대의 탈정전화(脫正典化)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별로 책과 독서에 얽힌 갖가지 에피소드들이 계속 지적 감수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2500년 전 그리스에서 상영된 칼리아스의 희극『알파벳의 정경(情景)』을 현대 의 어느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교실에서 한글이나  알파벳을 가르치기 위해 그대로 재현한다 해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인다든지, 아직 문자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고대 로마의 벼락부자나 벼락출세자들이 저택에 고급 장서들을 가득 쌓아 놓고, 웬만한 지식이 없고는 읽기 어렵다는 에우리피데스의『박커스 신도』를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면서 거들먹거린다든지, 프랑스 독자들은 책을 읽기위해서가 아니라 읽었다고 말하기 위해 새 책만을 골라 읽는다며 루소가 빈정거리고 있는 모습이라든지, 마치 현대의 부유한 젊은이들이 자동차에 몸체 값보다도 더 비싼 내부치장을 하는 것처럼 책 ‘미용’에 거금을 들이고 있는 르네상스시대 지식인들의 허영심이라든지.... 이런 숨은 이야기들이 끝없이 눈에 선하게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독서의 역사가 이렇게 방대하고 흥미진진한 분야인 줄은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는 미처 몰랐다. 아니 몰랐던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던 것 같다. 독서역사학이란 학문이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이고 이 책이 최초의 종합 독서사라는 것을 보면 학자들도 지금껏 모르고 있었거나 아니면 그 중요성을 알면서도 등한시해 왔던 것 같다. 이 책의 일문판 역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한 도쿄대학 쯔끼무라 타츠오(月村辰雄) 교수에 따르면 지금까지 독서사 분야는 문화사나 문헌사 혹은 서지사 등에서 오다가다 약간씩 언급되었을 뿐이었고,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것은 1980년대 들어 역시 이 책의 원전 편저자 중의 한 사람인 로저 사르티에 교수(파리 사회고등과학원) 그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하고부터였다고 한다.

   사르티에의 독서역사학에 대한 이론은 이 책 머리말 시작부분에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프랑스 학자 특유의 매우 난해한 이론이 펼쳐지고 있어 처음 읽는 사람은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감동을 받은 것은 그의 이 ‘철학적’인 이론 때문이 아니라 그 이론을 풀어내기 위해 머리말의 나머지 부분(<그리스와 헬레니즘세계>항목 이하부분)을 포함한 제1장에서 13장까지 펼쳐 논 독서역사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그래서 나는 독자들이 이 머리말 시작부분만은 맨 나중에 읽어주기를 권하고 싶다. 그 몇 쪽을 보고는 몹시 읽기 어려운 책이라는 인상을 가질까봐서다. 이 부분만 제외하면 이 책은 절대로 읽기 어려운 책이 아니다

   이 책은 글자 그대로 다국적 작품이다. 총 13명에 이르는 저자들의 국적이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미국 등 8개국에 이르고 사용된 언어도 불어, 영어, 독어, 이탈리아어의 4개 국어였다. 예컨대 머리말과 1장, 4장, 8장, 9장, 10장은 불어로, 3장, 5장, 7장, 12장은 영어로, 2장과 6장은 이탈리아어로, 그리고 11장은 독일어로 씌었다. 이 개개의 논문을 앞서 소개한 로져 사르티에 교수와 굴리엘모 카발로 교수(로마 사피엔사 학원)가 편자가 되어 1997년에 프랑스의 스유(Seuil) 출판사에서 Histoire de la lecture dans le monde occidental이란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이어서 1998년에는 이탈리아의 라테르자(Laterza)사에서 Storia della lettura라는 이름의 이탈리아어판이 나왔고 1999년에는 미국의 플리티 프레스(Plity Press)사가 A History of Reading in the West란 이름의 영문판을 내게 된다. 그러나 각국에서 출간할 때 각 필자들이 원고를 다시 손 본 듯, 간혹 단락을 추가한 흔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맨 나중에 낸 판이 완성도가 더 높다는 말이 되겠다. 이 책은 영문판과 일문판을 저본으로 하여 번역되었다.

   특기할 것으로 이 책은 이처럼 각 시대별로 해당분야 전문 학자들이 각각 독자적으로 쓴 논문들을 유기적으로 집대성한 것이기 때문에 각 장(章)의 내용이 웬만한 책 한 권의 무게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는 점이다. 개인적인 느낌이긴 하지만, 예컨대 <제7장 인문주의자들의 독서>를 읽으면 부르크하르트의『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제6장 중세 서유럽 유대인들의 독서>는 이시도르 에프스타인의 『쥬디이즘』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