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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죽엇슴니다 - 1924년 '개벽'지 기사

이강기 2015. 9. 5. 12:13
   
 
 
잡지명 개벽 제44호
호수 제44호
발행년월일 1924-02-01
기사제목 레닌은 죽엇슴니다
필자
기사형태 논설

그는 엇더케 평생을 지내엿스며 - 그의 사상은 엇더해스며 - 그가 죽은 후의 노농노서아는 엇지나 되며 - 또 「레닌」의 후계자는 누구이겟슴니까

〈런던 1월 22일 發電〉 「레닌」씨는 21일 오후 6시 莫斯科 교외에서 죽엇는데 葬式은 26일로 하되 국장으로 할지며 유해는 「크레물닌」 궁성 안에 무드리라더라.
〈長春 發電〉 「레닌」씨의 죽은 데 대하야 全路西亞는 5일간 服喪하기로 하얏스며 莫斯科 시중은 가장 슬픈 상태에 잇다더라.
이와가티 「레닌」은 죽엇습니다. 「정말 죽엇슬가」하는 의아를 냄길 여지도 업시 그는 죽고 마럿습니다.
생각건대 그는 이제로부터 54년전 즉 서기 1870년 4월 10일에 첫울음을 내여 50여 년의 짤지아니한 일생을 考究, 반항, 투옥, 망명, 혁명건설의 와중에 던져 힌떡 한 개를 편히 먹지 못하다가 이와가튼 오늘의 부음을 전한 것임니다. 하물며 그의 죽은 직접 원인이 반생의 망명생활에 온갖 무리를 强忍하고 1917년에 한 번 혁명을 성취한 그 후로 매일 18시간 내지 20시간의 노무를 계속하야 심신이 다가티 피로에 빠진 중 1918년 8월에 반대편의 육혈포알을 胸과 肩의 두 곳에나 마자 그것이 仍히 치명상이 되야 오늘의 최후를 지엇다 함니다. 슬프다 그의 역사를 알고 그의 죽은 소식을 들은 자로서 누구가 능히 심드러한 感念을 금할 자이겟슴니까. 동무야 대개로 아는 풀이나 이제 그의 행적이며 사상 기타를 簡記케 하야써 필자의 소회를 일게 하라.

風馳雷擊의 그의 일생
몸소 노동자의 겻해 나아가 제4계급의 혁명을 실행을 한 레닌도 그의 아버지는 귀족이오 어머니는 소지주이여섯다. 아버지의 덕이라 할가, 그는 幼時로부터 문학, 음악, 중에도 과학을 잘 배워서 스사로 진리를 사랑하고 부정을 미워하는 마음을 길너섯다. 그가 17세 되엿슬 때이다. 그의 형님되는 「이완」이 당시의 露帝 「알넥산더-」 2세를 암살한 수괴로 사형을 당할 때 그는 滿腔의 憤鬱에 스사로 혁명가가 될 것을 暗誓하엿다. 후에 「카잔」대학에 드러갓스나 학생의 혁명운동에 참가햇다는 〈22〉 이유로 퇴학이 되고 다시 聖彼得大學에 드러 법률, 경제를 전공하야 잠간 변호사까지 된 일이 잇서스나 仍히 혁명운동으로 도라서고 마랏다.
그런대 이때(1890년간)의 로서아의 혁명운동은 (1) 막스의 교시와 가튼 자본주의적 과정을 지내지 아니할지라도 로서아의 농민간에 고유한 土地共有의 풍습을 계발하야 능히 공산주의의 사회를 실현할 수 잇다는 농민본위의 「非막스」파와 (2) 순수히 「막스」주의에 의해서뿐 혁명을 실행할 수 잇다는 「막스」파가 잇섯는대 이때 「레닌」은 「막스」주의에 속한 논문을 발포한 바 그것이 당시 「막스」파의 主將이오 社會民主勞動黨(현 볼시비키당의 母黨)의 수령인 「푸레하-노푸」의 嘆賞을 어더 그는 곳 사회민주노동당의 일원이 되야 주의자의 규합, 主義書의 선전에 盡?하던 중 28세 되든 1월에는 그만 西伯利亞에 추방된 몸이 되엿나니 이로부터 1917년(48세)까지의 20년간은 순연한 그의 망명생활시대이엿다. 그는 이와가티 서백리아의 황야에 잇는 간에도 조곰도 쉬지안코 열심열심으로 독서와 저서를 속행하야 주의의 연구, 선전에 몰두하다가 流刑의 期가 滿함에 밋처는 곳 서구라파로 망명하야 각국의 경찰에 쫏기여 佛, 白, 英의 여러나라로 방랑하다가 瑞西 서울 「제네바」에 한참 잇기로 되어섯다. 이새의 그는 유명한 「火花」라는 소잡지를 간행하야 일방으로 이론적 전투를 하는 동시에 別로 「조직위원」이란 제를 設하야 로서아에 노동계급의 단체를 조직하기에 노력하엿다. 특히 여긔에(특히 공산당 조직에 잇서)는 그의 처 「코스단치노우나」의 盡力이 만핫다 함은 실로 주의할 바의 하나이라 하겟다.

1903년이다. 「푸레하-노푸」의 손에 ?設되고 「레닌」의 노력으로 확장된 露西亞社會民主勞動黨은 倫敦에서 제2회의 黨會를 열엇는데 이때에 「레닌」 及 「푸레하-노푸」를 영수로 한 「火花」잡지의 2파는 자유주의로써 (조선으로 말하면 문화운동주의자라 할가) 「뿔죠아」와 同樣으로 노동계급과 양립치 못할 것이라 주장함에 대하야 당원 중의 일파는 자유파와의 제휴협동을 주장한 바 이를 채결한즉 「레닌」파가 2표가 만하섯다. 이로브터 「레닌」파는 다수파 즉 「볼시비기」라 하고 다른 일파는 소수파 즉 「멘시비기」라 부르게 되엇스니 (俗에 「볼시비기」를 과격파라 譯하니 실은 다수파란 의미에 불과) 이가 곳 과격파의 생긴 시작이며 「레닌」 그가 이 파의 수반이 되는 동시에 그의 선배인 「푸레하-노푸」는 그 후 「멘시비기」로 도라가 그만 몰락되고 마럿다. 이 다수파와 소수파의 새에는 그 후에도 분쟁이 끈히지 못햇다. 그러나 「레닌」은 다못 「최후에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 자이다. 이로브터 노동자는 과연 누구에게 쫏는가를 보새 그러」하고 자기의 소신대로 나가버리고 마럿다.

1905년이다. 로서아는 일본과 싸와서 크게 졋다. 〈23〉 국내의 인심은 전혀 帝室專橫의 결과의 그러한 것에 분하야, 제1차의 혁명을 니르켯다. 이 혁명은 주로 「멘시비기」의 손에서 시작된 것이니 사실은 「레닌」 일파의 지도에 의햇던 것이다. 즉 이때부터 노동계급의 독재를 直立하려 햇던 것이다. 그러나 이 혁명은 실패되엿다. 그는 이때에 잠간 고국에 도라왓서스나 혁명후의 반동적 박해로 다시 西瑞로 도망햇다. 이때이다. 로국은 일시 무서운 반동의 시대여서 국내의 주의자는 물론이오 외국에 망명한 사람까지 아조 희망을 힐엇스나 그는 조곰도 動念치 안코 영양불량과 과로에 못견대여 하면서도 한사람의 동지라도 더 규합하는 일 한 개의 이치라도 더 窮究해 내는 일에 집중해섯다. 「사회민주당」이란 신문과 「노동계급」이란 잡지도 다- 이때에 발행햇스며 「唯物哲學과 反動的 哲學의 批判」이란 책도 이때에 써섯다. 그의 强剛한 의지, 절륜한 정력에는 실로 누구라고 놀내지 아늘 수가 업섯다.

歐洲大戰爭(1914년)이 돌발하엿다. 「레닌」은 踊躍하엇다. 宿素의 염원을 달성할 때는 이때라 하엿다. 그러나 엇지 의외가 아니엿스리요. 제2국제사회당의 중견되는 독일의 사회민주당이 솔선하야 군사비의 예산에 협찬하며 이에 따라서 여러나라의 사회주의자의 다수는 다토아가며 國家主義로 표변하야 여태까지 세계의 자본계급에 대한 일대 위협이 되던 제2국제사회당은 명실이 꼭가티 崩解되고 마럿다. 전쟁과 제2국제사회당의 붕해- 이것은 얼마나 그에게 무서운 영향을 주엇는고, 그는 경악하기보다도 분격하여섯다. 「그는 전쟁이전 이라고 결코 有産及에 대하야 호의를 가젓던 것은 아니나 전쟁이후의 그의 有産級에 대한 증오는 몽치여 비수와 가티 무섭게 되엿다. 그래서 그의 얼골모양까지 변한 듯 하엿다」는 것은 다년 그와 일을 가티한 엇던 동지의 당시의 그에 대한 말이엿다. 그는 그러케까지 深化하엿다. 이 일은 西瑞정부에까지 눈을 힐기운 바가 되야 「西瑞에 잇슬 동안은 얌전하게 잇겟슴니다」란 증서를 밧치고서야 간신히 퇴거명령을 면하엿다는 니야기도 이때에 생긴 것이다. (西瑞정부에서는 지금은 「레닌」의 증서를 박물관에 보존하야 유일의 기념을 삼는다는 말이다.)
닭이 천마리면 鳳이 한 마리라는 격으로 그와가티 나라나라의 주의자가 국가주의자로 몰입하는 그때에도 어대까지 주의에 철저한 자도 잇섯다. 그래서 그네들은 그 전란 중에서도 몟번이나 회합(국제적) 하여섯다. 회합할 때마다 「레닌」은 「각국간의 그 전쟁을 국내의 계급투쟁전으로 〈24〉 전화할 것을 주장한 결과 그 주장은 무난히 1917년 9월의 「스톡호름」회의에서 통과되야 제2국제사회당에 代하는 제3국제공산당의 창립을 보게 되엿다.
1917년 3월 11일이다. 露西亞에는 혁명이 니러나 15일에는 「니콜나이」 2세가 退位되며 국내가 沸騰한 즉 「레닌」은 4월 4일 밤에 聖彼得堡로 도라왓다. 이로부터의 「레닌」은 그의 일생중 가장 색채가 강한 활동의 領分이다. 그는 오자마자 곳 「뽈시비기」와 「멘시비기」의 연합회의를 열고 현재의 혁명을 진실한 노동계급의 혁명으로 발전식히지 아느면 안될 것을 극력주장하엿스나 일반은 時機尙早로 이를 반대할 뿐 아니라 당시 혁명정부의 主腦인 「께렌스기」 一派는 「레닌」을 反히 위험시하야 생명이 頃刻에 在하매 그는 일시로 命을 和蘭에 피하엿스나 「나날히 뿔죠아편으로 기우러지는 이 혁명의 방향을 이제 변환치 아느면 영원히 변환할 길이 업스리라」하야 그는 최후의 각오를 하고 9월에 다시 故都로 도라와 11월 3일에 「뽈시비기」간부회를 열고 全露大會가 열니는 11월 7일에 擧事할 것을 決하야 바로 그 결정대로 20세기 오늘의 지구우에 「勞農露西亞」란 새 旗ㅅ발을 날니게 되얏다. 인류의 역사는 여긔에서 한 개의 새 사실을 엇엇다. 「우리덜은 一週間만 뒤젓더면 뎌 광폭한 뿔죠아의 독재를 볼번 하엿다. 「레닌」은 정확히도 이 순간을 결정하엿다」.는 그의 동지「지노에푸」의 말은 사실 그러해섯다.
일로브터의 「레닌」의 행적의 대개야 누구가 모르리오.
혁명성취후의 그는 곳 종래의 持論이던 (1)쏘베트式 정치를 행하야 全然 노동자계급으로 국가의 주권자가 되게 하는 동시에 보통 뿔조아式 국가의 대의제를 폐지해스며 (2)「각 사람은 자기의 재능에 쪼차서 일하고 자기의 필요에 쪼차서 분배를 밧는다」는 원칙에 의한 공산주의의 정책을 실행하야 사회주의의 그 尨大 복잡한 이론을 온저히 조직에 의해서 실현하기에 全力햇다. 큰일을 하는 자는 반다시 만흔 동지를 가지는 한편으로 또 만흔 怨敵을 가지는 것이다. 「레닌」에게는 물론 怨敵이 만햇다. 漸進社會主義者 멘시비기의 或者 社會革命黨, 帝政復活主義者-그들은 언제던지 「레닌」의 적인 동시에 언제던지 그의 암살을 계획하엿다. 1918년 8월이다. 「레닌」이 엇던 공장에서 노동자에게 연설을 하고 나오는 길에 엇던 처녀 두 사람이 나타나며 六穴砲로 그를 쏘아서 凡3發의 탄환에 2發이 적중하엿다. 그는 이로해서 약 3주간을 생사의 문에서 방황하다가 간신히〈25〉命扶持는 햇스나 원래 치명상이엿는지라 그로브터 다시는 전과 가티 정권에 직접하지 못하고 오늘의 訃音을 전한 것이다.
말하는 것이 도로혀 슴겁지만 그의 열심과 정력은 실로 非常햇던 것이다. 勞農政府(內閣議長) 사무를 집행할 때 그는 매일 평균 18시간이나 집무햇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일상 생활은 극히 質素하야 일반 노동자와 병졸과 꼭가튼 賃俸으로 꼭가튼 생활을 계속하엿다. 그가 저격되야 위독에 빠젓슬 때이다. 의사나 자기 親友들은 보통때와 다른 영양물의 섭취를 懇勸햇스나 그는 보통으로 배당되는 식료 이외에는 족음도 밧지를 안엇다. 민중에게 빵이 부족한 때에는 그 亦 빵을 배불니 먹지 아니하엿스며 민중에게 새옷이 업는 때 그 亦 새옷을 입지 못햇다. 그는 언제이나 민중 이상의 소비를 아니햇다. 말하면 민중은 언제던지 그와 同量의 빵을 먹엇스며 同額의 俸給을 밧은 셈이엿다. 그가 죽은 오늘에 莫斯科의 市中은 매우 비통하는 상태에 잇다고 한다. 생각건대 이 電文이 보통으로 報하는 例套의 소식은 아닌 듯 십다.

그는 엇더한 特徵을 가젓던가
「레닌」은 엇더한 사상을 가젓는가. 이것은 보통으로 말하자면 누구나 다 짐작하는 것이오. 구체적으로 소개하자면 불편한 점이 잇다. 「레닌」은 정말 엇더한 사람이엇는가. 여긔에 대해서 몃 마듸를 더 하겟다. (이것은 물론 필자의 獨見이 아니요. 여러 방문가 밋 평가의 기록에 의함이다.)
本誌의 어느 號엔가도 暫間 소개하엿거니와 그는 풍채는 됴치 못한 사람이다. 키는 적고 머리는 둥글고 크며 훌덕 버서졋고 눈은 몹시 적은대 누구와 말을 할 때에는 한쪽는 늘 감는 버릇이 잇다고 한다. 그는 역사상에 比類업는 驚異와 愛憎을 밧을 만한 특색잇는 풍채도 업고 오즉 深遠한 사상을 단순한 말로써 표출하고 복잡한 事端을 무서운 慧眼으로써 分析해 나아가는 智力上의 대담과 明敏을 겸비한 것이다.〈26〉
그는 성격상 엇던 특징을 가젓는가. 어대까지던지 의지적이오 이지적이여서 무엇이나 쉽게 긍정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理智의 힘에 의해서 한 번 긍정한 이상은 즉 그것이 진리라고 밋는 이상은 그대로 돌진하는 것이 그의 특색인 듯 십다. 「어대까지 명령적이요 독단적이요 침착하야서 족음도 공포기가 업고 이기심이 이상하게도 적은 一種主義의 화신이라 할 만한 자는 「레닌」이다한 「럿셀」의 評과 「세상에 흔히 잇는 보통의 共産主義者와는 딴판으로 共産主義의 계획이 광대 복잡한 것을 솔직히 시인하면서 오히려 그것의 실현에 향하야 一意努力하는 그 놀낼 만한 따백이 레닌을 보고 나는 매우 유쾌하엿다. 그는 정녕코 새로히 설계, 건설된 세계의 자태를 심중에 배포하고 잇스리라」한 「웰스」의 評은 이 방면의 소식을 말한 것인 듯 십다.
그는 죽는 그때까지 露西亞共産黨의 유일한 首領이엿다. (露共産黨은 즉 뽈시비기黨의 變身이니 1918년 3월 8일 莫斯科에 열닌 第7回의 「뽈시비기」黨大會에서 元막스 시대에 잇던 共産黨同盟을 기념키 위하야 黨名을 露西亞共産黨으로 개칭함에서 始함이다」 60萬人이나 되는 당원의 頭領이 되야 一言의 異議가 업게까지 그들을 지배해온 그의 手腕은 무엇이엿는가. 이에 대하야 英國 엇던 잡지사의 主筆의 말을 비러오면 「그의 위대한 지배력은 다른 곳에 잇다. 즉 그의 초월한 이성력은 별문제이오. 黨의 두목으로 엇더한 일에나 狐疑치 안는 용기와 자기의 판단에 대한 강한, 거의 광적이라 할만 자신에서 오는 것이다. 共産黨員 중에 「레닌」 이상의 자신이나 견식을 가진 사람이 업는 이상, 「레닌」은 영원한 共産黨의 지배자 되기에 足하리라」운운하엿다. 共産黨은 그만두고 전세계를 노코 본다 할지라도 저프건대 「레닌」이상의 자신과 見識을 가진 사람은 업겟지.
그는 사상상에 잇서 또 엇던 체계를 가젓는가. 말할 것도 업시 「막스」의 사상을 祖述, 아니 演繹한 것이다. 엇던 비평가의 말에 「레닌」은 「막스」를 노예적으로 모방하엿다. 그는 「막스」의 「유령이다」 또 가로되 그가 만약 「막스」說을 버리고 자기의 학설을 주장헷더면 그는 그만한 큰 세력을 못 가젓슬 것이다. 웨그러냐 하면 새 학설은 단기간에 대다수의 사람을 모흐지 못하는 故이다. 그러나 다시 이를 뒤처 말하면 「레닌」은 「막스」를 모방한 것보다 새로운 「막스」를 제조하엿다. 즉 「레닌」이가 「막스」의 일홈으로 나타난 것은 「막스」의 眞思想을 일종의 漫畵(但 取其特徵)로서 現出한대서 지내지 못한다고〈27〉 하엿다. 사실 그랫다고 하는 것이 올을 것이다.

「일절의 物은 누구의 것도 아니오. 일반의 것이다」 이 것은 그의 유일한 표어이다. 이 한 마듸로써 그의 全心情 全思想을 엿볼 수 잇는 것이다. 一言으로 蔽하면 그는 萬人間에 공통하는 오즉 한 개의 진리를 가지고 어느때는 자기가 눌니엿스며 어느때(1917년 이후)는 자기가 눌운 것이다. 명백한 진리를 가지고서 오히려 눌니우지 안흘 수 업고 눌우지 안흘 수 업는 곳에, 다시 말하면 그러한 환경을 가진 곳에 그의 고통이라면 苦痛光輝라면 光輝가 잇섯고 또는 그에 대한 世間의 논평도 苟苟햇던 것이다. 그런대 그에 대한 「금」은 여하간 정해졋섯다. (진리의 價金과 꼭가튼 정도에서)그가 일층 위대한 무엇으로 공인되기는 이제 브터이겟지. 古來의 선구자중 누구나 다 그러한 모양으로

以後의 勞農露西亞?
「레닌」의 죽음과 가티 문득 생각되는 문제는 「레닌」의 죽음으로해서 勞農政府의 존재상에 엇던 영향을 밋츨가 또는 존재에 까지는 별영향이 업다 할지라도 施政의 主義方針에 변화가 업슬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勞農政府의 존립에는 하등의 영향이 업슬 것이다. 웨그러냐 하면 勞農政府는 今日이나 昨日에 성립된 것이 아니요. 벌서 7년전에 성립되야 밧을 시련을 다 밧아온 그 정치이오. 또 그 정치는 多大數의 民人을 기초로 하야 유명한 「레닌」式의 計算 算理 規律의 3者로써 편성한 조직에 섯슬 뿐 아니라 그의 배후에는 60萬人의 共産黨員과 120萬의 赤衛軍이 陣을 버리고 잇는 것인즉 누구의 힘으로도 그를 엇졀 수 업는 것이며 다못 문제는 「레닌」을 일흔 今日에 그를 統御善用할 인물이 누구이겟느냐 하는 것이나 실은 「레닌」은 병석에 누어 사실로 政務를 親執하지 못한 지가 벌서 오랫고 그 이하의 3, 4인이 일즉부터 그만큼 하여오든 것인즉 이제 새삼스럽게 황망해 낭패하거나 龜裂을 생기게 할 리도 업슬 것이다. 而?親經濟政策이 실시된 후로 國勢는 일층 활기를 띄고 국제적 지위는 나날이 향상되는 今日이리요.

「레닌」의 後繼者는 누구?
최후로 한 말 더 할 것은 금후의 露勞農政府의 인민위원회의장의 의자에 나아갈 사람은 누구일가 함이다. 「레닌」의장의 次席으로 부의장이 된 사람은 「카메네푸」, 「뤼코푸」외 3인이엇섯는대 「레닌」 臥病 이후로 그의〈28〉 대리를 본 사람은 「뤼코푸」이엿다. 이밧게 또 문제의 「뚜로쯔기」와 「캴닌」이 잇다. 「레닌」후계자로 아마 이 네 사람 중에서 버서나지는 못할 것이다.

「뤼코푸」는 「레닌」과 가티 학자는 아니다. 그는 동료 이상의 見識이나 능력을 가졋달 것은 업다. 더육히 연설에는 「재로」라 한다. 그러나 「레닌」은 그를 누구보다 신임하야 지방에 도라단일 때는 반다시 그를 동반하얏다. 그는 理性의 사람이라 하기보다 신앙의 사람이다. 共産主義의 이상사회를 깁히깁히 신앙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엇던 까닭인지 모르나 좌우간 사람을 끄으는 힘이 잇다. 그리고 그는 노동자 출신이다. 다못 문제는 암만해도 그가 실제 정치에는 그러케 수완이 업다는 것이다.

「카메네푸」는 莫斯科의 「쏘베트」 회장이오. 露獨單獨講和의 調印의 一人이만큼 이론가라 하기보다 실제 정치가이다. 1918년에 暫間 레닌의 대리를 본일도 잇다. 그리고 「뚜로쯔기」의 妹夫이오 또 猶太人이다. 猶太人이라는 것이 露西亞民人에게는 족음 滋味가 업시 뵈는 것이다.

「뚜르쯔기」의 弱点도 猶太人인데 잇다. 이론가요 웅변家요 문장가요 열정가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도 역량이 풍부하다. 그러나 독특한 무슨 자신이나 見識이 잇너냐 하면 그것은 문제이다. 오즉 「레닌」가튼 밝고 억세인 지도자를 만나서뿐 그의 능률은 발휘될 형편에 잇다. 그런데 그는 黨內의 문제로 稱病引退하엿다 한다. 內閣議長이 될 희망은 업다 함이 올켓지.
그 다음 뤼코푸」와 짝해서 제일 유력한 후보가 될 사람은 「칼닌이다. 그는 본래 귀족출신이나 노동자에게 가장 호감을 가진 사람으로 두뇌가 明?하고 事理에 밝고 독서에 브즈런하고 선동에도 능한 깟듯한 사람이라 한다. 「리코푸」는 누구에게라도 모나게 하는 일이 업는 代에 「칼닌」은 獨自의 견해를 가저서 용이히 사람에게 굴하지 안는 性이 잇다고 한다. 이만큼 해두고 보기로 하자(一記者)〈29〉
〈2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