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舊韓國의 外交와 文化 - 舊韓國佛語學校長 에밀, 마―텔

이강기 2015. 9. 5. 12:12
   
 
 
 
잡지명 삼천리 제4권 제10호
호수 제4권 제10호
발행년월일 1932-10-01
기사제목 舊韓國의 外交와 文化
필자 舊韓國佛語學校長 에밀, 마―텔
기사형태 회고·수기

氏는 1894년인 21歲에 舊한국에 渡來하야 舊韓國立佛國語學校 講師로 잇든 분이라 30년후에 氏는 옛 外交와 문화에 대하야 아래와 가치 회상하엿다.

나는 上海支那 稅關에 勤務하고 잇섯스나 朝鮮政府가 佛語學校를 개설할 當初1894년 21歲의 靑雲에 불타는 때에 渡來하얏다. 그 당시 朝鮮에 오러면 船便때문에 고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겨우 놀-워이船의 便船을 어더 長崎를 거처 仁川에 上陸하얏다. 그때를 생각하면 과거의 추억이 머리에 가득하게 얼신거린다. 지금의 학교들은 各國語들을 혼합식히여 가르치나 그 당시는 처음으로 영어학교와 불어학교뿐이엿섯다. 그러나 얼마 잇다가 支那 露西亞 日本 등 各國語의 학교가 다-各各 개설되여 잇든 것이다.

19세기의 말엽 참으로 東洋天地에는 大變動이 勃發할 때이엿다.
支那, 朝鮮, 日本사히에는 위기만만한 風雲이 바야흐로 위기을 告하는 騷亂의 秋이엿다. 불어학교는 개설되엿지만 그 당시 朝鮮는 혼란시대이니만콤 어학공부를 悠悠히 할만한 여유조차 업섯다. 내가 渡鮮하기 1年전에 朝鮮에는 親支派와 進步堂(開化黨을 말하는 것 )과의 2大대립이 잇서서 前者는 支那와 통하고 後者는 朝鮮XX을 목적하고 서로 抗爭하얏스나 一大사건이 突發되엿다. 그것은 그때의 王妃의 實兄閔씨를 進步黨의 主領
金玉均이 殺害하려고 한 朝鮮郵政局을 필두로 개설된 宴會의 밤이엿다. 金玉均은 그일에 실패하고 支那 上海로 亡命하야 朝鮮의 일을 再起하려고 하엿스나 日淸戰爭이 일어나기 1年전 1893년 閔의 手配인 刺客洪某에게 上海에서 暗殺되여 버리엿다.〈54〉
시대는 움지기고 思想은 흘느서 점점 朝鮮XX의 運勢가 그 세력을 어더 드듸여 東學의 亂이 勃發되엿다. 그래서 支那
李鴻章에 依賴하야 支那兵 派遣를 願하게 되엿다. 그러나 支那와 日本은 朝鮮을 사히에 다두고 虎視耽耽의 形狀이엿다. 支那에서 送兵하면 日本과 전쟁이 일어날 것임으로 李鴻章은 全然 不關焉의 태도를 보이면서 英國船 카우싱號를 빌니여 支那兵을 보내엿스나 그 支那兵중에는 李鴻章의 顧問 獨逸의 工兵 뽄헤넨이 타고 잇섯다.

그때 마침 支那兵이 牙山에 駐屯하고 잇는 고로 그곳에 送兵하려고 仁川(濟物浦)을 향하야 카우싱號가 진행할 때 俄然仁川으로부터 60? 相距한 곳에서 日本軍 艦浪速 吉野의 2艦에게 발견되여서 停船을 命하얏다. 支那便에서는 船이라고 停船의 필요 *다고 抗하얏스나 船長 갈우어-스는 停船하얏다. 이 船長은 上海시대의 나의 親友이다.

그때 日本兵隊는 成歡平澤에 駐屯하야 잇슬 때 支那兵이 牙山에 다다러서 日本兵과 충돌되여 여기서 최초의 충돌이 되고 따라서 成歡 大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이 날이 明治27년 7월 28일 29일이다.
그러고 얼마 아니되여서 8월 1일 日本은 支那에게 선전포고를 發하얏다. 그래서 8월 6일에는 日本으로부터 廣島兵이 *만5천이 도착되여 嚴嚴한 開戰은 시작되엿다. 8월 16일에는 朝鮮과 支那의 條約은 廢棄되엿다. 그리고 各國 公使?에는 各國외 海軍들이 駐屯되엿다. 이때의 日本公使는 井上男爵이다. 9월중순 日本으로 西園寺公이 使節로 朝鮮에 오고 朝鮮으로는
李堈殿下가 答禮使로써 日本에 派遣되엿다.
日淸전쟁후 朝鮮은 완전히 독립되엿다. 10년간이라는 것은 XX을 保持할 수 잇섯스나 그사히 벌노 XX이라 할 수 업는 간섭들이 잇섯다. 다만 겨우 독립 俱樂部라는 것이 잇서 진실한 朝鮮의 XX을 확립하려고 하얏다. 그 중심인물은 尹致昊이다.
때마츰
徐載弼이가 米國으로부터 朝鮮이 XX되엿다는 말을 듯자 한숨에 뛰여 왓다. 그 사람은 極모던이다. 10년 계약으로 朝鮮政府의 顧問이 되엿다. 이 사람의 손으로 처음으로 西洋式의 신문이 나오게까지 되엿다. 米國에 잇슬 때는 후립프 제이슨이라고 歸化하고 잇섯다. 그때 신문은(인데펜덴트) 독립신문이라고 하야 漢字는 쓰지안코 純諺文과 英語 두가지로 된 신문이엿다. 徐는 本職이 多忙함으로 尹致昊가 徐를 代身하야 신문을 경영하얏다. 지금도 아직까지 米國에 생존되여 잇다. 무엇을 하는지 不明하다. 그리고 신문은 1896년으로부터 1899년까지 계속되고 廢刊되엿다.
그 신문이 시작되기 1年전 그 유명한 閔妃사건이 일어낫다. 市中은 騷亂하고 신문은 號外들을 내엿다. XX朝鮮에는 1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넛스나 그다지 볼만 것도 업고 가장 자유스럽게 발전의 經路를 밟을 사히가 無爲하게 지내 갓다.
1896년 2월 11일 紀元節날 皇太子는 慶福宮에서 버서나 러시아公使?에 가실 때는 日本兵의 무관심으로 통과된 여자의 가마로써 하얏다.
그 前夜 러시아公使?에는 러시아水兵 2百人이 派遣되여 以前부터 駐在하고 잇던 百人와 합하야 3百人 朝鮮兵隊도 모혀 잇섯다. 貞洞은 그로 말미아마 통행금지가 되여 西大門은 初夜閉門되엿다.
그리하야 그날 오전중 日本公使를 제하고는 各國公使를 立會하야 朝鮮의 大臣全部를 辭職식히엿다.
그럼으로 京城의 人民은 任官이 막된 總理大臣
金弘集을 殺害하고 農務大臣 鄭秉夏와 또 시골서는 大藏大臣 魚允中을 殺害하기까지에 되엿다. 그리하야 朝鮮으로써 大韓의 일홈을 부치게 된 것은 實로 1897년이엿다.
王은 러시아公使?에 게실 때부터 慶福宮에는 도라가기가 실이세서 새로히 王城을 築하시기를 결심하고 지금 大漢門 그 宮殿이다. 왜 이곳을 택하얏나 하면 이곳에는 各國公使?이 모혀 잇는 때문이다. 뒤에는 英國公使? *米國 그다음은 러시아公使?이 잇고 그곳으로 통하는 조고만 길을 특별 맨들엇다. 그것은 무슨 일을〈55〉 豫備할여고 한 것이다.
晝夜를 물론하고 朝鮮의 兵際가 番을 보고 잇섯스나 신변의 보호를 위하야 특별히 西洋人의 衛兵채용의 議가 낫다. 그때 外務顧問 米人 구레-트하우스는 1898년에 衛兵 募集次로 上海에 와서 英米獨伊갓흔 各國人의 혼합인 30人을 모집하얏다. 그 사람들은 上海에서는 아무 소용업는 退字마진 巡査 쪼겨난 船夫 무엇무엇 그다지 조치못한 것들 뿐이엿다.
그 衛兵一行을 탠 배는 上海芝?를 經由하야 仁川에 도착하얏스니 나도 그때 그 배로 왓섯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자미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얏다. 참으로 우슬 수 업는 넌센스의 連鎖劇이엿다.

閔妃의 盛葬
閔妃의 逝去는 1895년 9월 8일이엿스나 2년후 11월에 葬儀는 擧行되엿다. 葬儀에는 各國公使가 參列하얏스나 나도 朝鮮政府에 관계도 잇고 또 朝鮮政府의 佛語學校校長임으로 갓치 參列하야 淸凉里에서 1泊2日 滯在하얏스나 그날 밤에 자미스러운 일이 잇섯다.
儀式이 세 번 잇슴으로 모다들 徹夜를 하고 잇는대 獨逸 公使에게 使喚이 電報를 가저왓다. 公使는 喜色滿滿하야 그 電報를 우리들에게 보이엿다. 그것은 宣敎師 虐殺사건으로 導火線이 되여 「靑島를 먹엇다」는 것으로 各國이 한 대 모이여서 徹夜하는 것으로써는 悲喜가 한 대 얼크러저 異國情緖가 百퍼센트이엿다.

電車의 創始

꼴뿌란의 사회는 지금 京城電氣회사의 前身으로 仁川 京城間의 鐵道도 이 사회의 사업으로 된 것이다. 1879년에 이 회사가 창립되여 電車, 傳燈, 水道 등 계약한 일을 시작한 것은 1898년 9월이다. 1899년 5월에 처음으로 電車 東大門쪽으로부터 움지이엿다. 조선교통상에 크나큰 轉換시기가 온 것이다. 마츰 그때 東大門부근은 장이 스는 것으로 싀골사람이 마니 온다. 그럼으로 電線이 적지안는 문제거리엿다. 더구나 얼마 아니잇다가 처음으로 電車에 아이가 치엿다. 이 慘事는 群衆에게 큰노염을 삿다. 그리하야 電車는 고만 石油를 뿌리여 태여버리엿다. 그때 생각을 하면 문화정도도 대강 알 수 잇섯다.

獨立門
朝鮮名物 獨立門에 대하야 이야기하는 것도 자미스러운 에피소-트가 된다. 지금 獨立門의 바로 엽헤 支那式의 문이 잇다. 지금도 아직 그 石門이 남어 잇다. 이것은 녯날 支那의 天子로부터 使者가 올 때 朝鮮의 王이 이 門까지 마지려 오는 것이다. 日淸전쟁후 朝鮮이 완전히 XX된 것을 기념으로 건설한 이것이 유명한 獨立門이다. 西洋式으로 로시아의 셀레덴 사빠진이 설계한 것으로 여기에 쓴 돌은 여러 가지의 돌노 寄附를 바든 것이다. 金이 잇스면 金을 업스면 돌을 眞心을 다하야 모아 온 것이다. 이것이 寄進의 문이라는 것이다.
竣功때에 祭가 잇섯다. 全生徒 全大臣들이 列席하얏다. 그때 外務大臣
李完用도 參列하야 기다란 祝辭연설을 하얏다. 때박키여 日韓합병때의 朝鮮의 최후의 總理大臣으로써 합병의 條約文을 작성한 사람이 누구냐 즉 그 李完用 前外務大臣으로써 獨立門의 祝辭를 하든 그가 또다시 朝鮮政府의 최후의 역할을 하얏다는 것도 이상하다면 이상하다 할 수 잇슬만한 因綠이 잇다고 우리들은 생각이 든다.

各國 公使의 外交戰
朝鮮이 XX한 사이에 各國 公使는 自國을 위하야 활동을 하얏다. 그래서 朝鮮政府에 여러 가지를 依賴하얏다. 한 公使가 무엇을 하나 밧게 되면 그 다음은 나도나도하고 덤벼 들엇다. 佛國公使가 최초 「레베루트」라는 舊式銃을 팔엇다. 러시아公使는 그것을 口實로 「벨단」이라는 銃을 팔엇다. 그례서 점점 자미스럽게 되여 日本도 그대로 잇슬 수 업다고 「村田銃」을 팔어버럿다. 日本公使는 朝鮮政府에게 無線電信을 설치할 것을 請願하얏스나 許可되지안코 朝鮮政府 獨單으로 할 것을 言明하얏다. 얼마아니되여 러시아는 北鮮에 捕鯨회사 설립의 許可를 어덧다. 日本도 許可되여 사업을 시작하고〈56〉 더욱 러시아는 繼繼하야 馬山에 특별 거류지의 許可를 請하얏다. 당시는 仁川에 各國 居留地가 잇섯다. 러시아가 특히 馬山에 특 별거류지를 구한 이유는 시베리아鐵道를 馬山까지 連長식힐 작정이다. 그것은 우라지오스독이 冬期結氷되여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요구는 취소되엿다. 그것은 러시아가 支那로부터 旅順과 大運을 빌녓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활약은 實로 굉장하야 진출에 진출을 거듭하야 鴨綠江上流에 벌재회사를 설립하얏다. 그러고 이것은 兵隊를 駐屯식힐 것 가치 상상되엿섯다. 그러케 되자 日本政府는 이 문제에 대하야 嚴重히 抗議를 하게 되엿다. 그러나 벌서 러시아人은 鴨綠江입구 龍岩浦에 砲臺을 築하고 얼마간에 砲門을 多少 設備하얏섯다. 그것이 원인으도 日本, 朝鮮 리시아는 3角이 되여 激烈한 外交戰이 되여 나종에는 그 무서운 日露전쟁까지 일어나게 되엿다. 러시아는 朝鮮政府와 더욱더욱 親密하야지어 强國的 威力을 발휘하야 그때 英人稅關長 뿌라운을 追出하고 러시아人 「알레기 쉬프」를 그 代身식히려고 한발 더 나가면 될 때에 英國軍艦 8隻이 1897년 12월 31일 威風堂堂하게 仁川에 入港하야 一週間 滯留한 것과 英國公使가 嚴談한 끗에 稅關長 交迭문제는 살어저 버리엿다.

朝鮮政府의 內政
이야기를 朝鮮政府의 內政으로 돌니자 와싱톤의 萬國郵便大會에 처음으로 가입한 것은 1897년이다. 그라나 外國郵便이 시작된 것은 1900년 1월부터로써 顧問 「그레만세-」씨가 佛國으로부터 왓다. 그레만세氏가 渡鮮전에 나의 학교에서는 生徒28人을 특별히 郵便事務를 가르치엿다. 그리고 그 뒤를 우리 학교의 生徒採用하얏다. 支那가 萬國郵便大會에 가입한 것은 朝鮮보다도 뒤띄러지기가 3년으로 문화의 선진국 支那가 朝鮮보다도 뒤젓다는 것은 감간 자미잇는 것이다.

京城의 밤거리
京城의 거리는 밤 여덜시 아홉시가 되면 모다 문을 다처 버린다. 商人도 노동자도 낫에 街上에서 보든 사나히들이란 그람자도 보히지안코 다만 婦人뿐이 가마를 타고 友人訪問이나 할 뿐이다. 所謂 兩班의 婦人은 낫에는 통이 통행이 업섯다. 京城의 밤은 전혀 寂寞 그것으로 異境에 꿈을 맨는 외국인들은 더 한층 적적하얏다. 물론 劇이나 영화는 업다. 그러타고 또 놀만한 곳도 업다. 通譯은 업서도 다닐 수는 잇스나 너무나 밤거리는 적적하얏다.

日本公使?
내가 渡鮮할 때는 道路가 대단히 좁앗다. 크다는 대로는 南大門, 鐘路, 東大門, 西大門, 黃金町, 光熙門까지로 벌노 넓다고는 할 수 업섯스나 馬車갓흔 것은 다니엿다. 日本의 領事?과 郵便局은 倭城台公使? 근처에 잇섯다, 그곳에 公使?을 건축할 때는 朝鮮政府가 돈도 내고 건축에 힘도 써주엿다. 그 이유로 獨立門에서 日本人을 죽이고 그때의 花房公使도 도망하얏다. 公使?은 獨立門 못엿근처에 잇섯다. 그것은 1882년 7월에 日本公使?에 불을 놋코 日本人 7人을 殺害하얏다. 花房公使는 仁川에 도망하야 곳 日本으로 도라가 朝鮮政府의 책임을 물엇다. 그러나 종시 회답이 업슴으로 1개월만에 日本으로부터 도라왓다. 그때에야 朝鮮政府는 회답을 보냇는 것이다. 그 결과로써 2년후에 朝鮮政府의 費用으로 新築한 곳으로 移轉하얏다. 獨立門부근에 日本公使?이 업슬 때는 日本의 護衛兵이 업섯는대 倭城臺로 옴기고서는 日本兵이 駐屯하게 되엿다.

日露의 風雲
露國의 馬山特別寄留地要求 鴨綠江地帶에 伐林會社設立 及 軍備의 시설의 계획는 日本측을 刺激식힌 것이 대단하다.
兩國의 神經은 심히 첨예화하야 日露의 風雲은 점점 급하게 되여 세계의 視線은 모다 이 重大問題에 集注되엿다.
그때 露國公使 빠뿌로프氏는 비상한 威力으로 本國政府에 電報와 편지를 보내나 조곰도 答狀이 업섯다. (下略-원문)〈57〉
〈5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