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옛적부터 사람들은 理想的 사회를 꿈꾸어 왔다. 그중에는 武陵桃源(무릉도원)럼 전설에 그친 것도 있고, 플라톤의
「공화국」처럼 자세한 청사진을 바탕으로 제시된 것도 있다. 실제로 理想的 사회를 세우려고 시도한 사람들도 적잖다. 20세기에 나온 공산주의
실험과 국가사회주의(나치)가 그 대표적인 例이다. 근년 들어 우리 사회에서 「改革」이라는 구호는 권력을 추구하는 세력들에게
큰 정치적 자산이 되어 왔다. 특히 現 정권은 「改革」이라는 구호 아래 우리 사회의 기본 이념과 체제를 근본으로 바꾸려 시도해 왔다. 그런
시도는 공산주의나 국가사회주의의 실험처럼 급진적이지는 않지만, 그것은 같은 충동에서 나왔고 많은 특질들을 共有한다. 따라서 理想的 사회에 대한
동경을 이해하는 일은 지금 우리 사회의 현상을 이해하는 데 작지 않은 도움이 될 터이다. 그런 理想的 사회에 이름을 준
것은, 잘 알려진 것처럼, 영국의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토머스 모어였다. 1516년 출간된 「理想鄕(이상향·Utopia)」에서 그는 당시 유럽
사회와 대조적인 사회를 그렸다. 「유토피아」는 신대륙을 탐험한 포르투갈 선원이 발견한 섬 나라로 상정되었는데, 토머스 모어가
「Outopos(없는 곳)」와 「Eutopos(좋은 곳)」라는 단어로 말장난한 듯한 「Utopia」는 그 뒤로 이상적 사회를 뜻하게 되었다.
역사와 사회가 진보한다는 생각의 영향 아래, 작가들은 차츰 이곳보다 「더 나은 곳(Eutopia)」 대신 지금보다 「더
나은 시절(Euchronia)」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변화에 따라, 「理想鄕」은 현실 사회와 비교되는 가상적 사회를
뜻하는 대신 현실적으로 가능한 미래 사회의 모습들을 가리키게 되었다. 18세기 프랑스 작가 루이-세바스티앙 메르시에가 쓴 「2440년」은 이런
변화를 뚜렷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메르시에는 자연 철학과 과학적 업적을 원리로 삼은 理想的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진보에 대한 회의적 견해가 강한 사회적 조류가 되면서, 理想鄕(Utopia)에 대한 기대는
차츰 反理想鄕(Dystopia)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에 대한 반대말로 흔히 쓰이는 말인데, 이 말을 처음 쓴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J.S 밀이다. 反理想鄕的 심상들과 견해들은 19세기 말엽에 부쩍 많아졌는데, 그 중심적 특질들은 多數 시민들에 대한 少數
엘리트들의 압제와 사회 전체의 「조직화」였다. 理想鄕 설계자들은 인간을 부품으로 간주 역설적으로, 역사상 가장
참담한 反理想鄕들이었던 공산주의 체제와 국가사회주의 체제는 理想鄕을 세우려는 시도에서 나왔다. 러시아 역사를 연구한 미국 역사학자 리처드
파이프스가 자서전 「나는 살았다(Vixi)」에서 한 얘기는 理想鄕을 도입하려는 시도마다 끔찍한 反理想鄕을 불러온 까닭을 살필 수 있는 단서를
내놓는다. 『일반적으로, 나는 사람들이 전혀 예측할 수 없고, 그들이 무엇을 할지 예상할 수도 없으며, 그들이 왜 그것을
하는지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을 배웠다. 이것이 내가 사람의 행태를 심리학을 통해서 개별적으로 또는 정치학이나 사회학을 통해서 집단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들에 크게 회의적인 까닭이다. 사람들은 無作爲的으로 그리고 멋대로 행동하는데, 과학은 逸脫(일탈)하지 않고 예측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현상들을 조사한다. 내게는 원예가 (역사학과 함께) 정치를 위해서 좀더 나은 수련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원사는 식물들이 어느 정도까지 순치될 수 있고, 그 이상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만일 맞지 않는 토양이나 기후에서 자라도록
강요되면 식물들은 시들고 죽는다. 스탈린이 원예를 싫어했다고 그의 딸이 말한 것이 이상하지 않다』 사람들의 사회는 거대한
기계가 아니고, 사람들은 기계의 부품들이 아니다. 그러나 理想鄕을 설계하는 사람들은 거의 필연적으로 사회를 기계로 상정하고 사람들을 부품으로
여기게 된다. 만일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파이프스가 지적한 것처럼 예측하기 힘들다면, 사회의 청사진을 만드는 일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어리석고 해로운 작업이 된다. 바로 거기에서 理想鄕의 시도가 필연적으로 反理想鄕을 불러온다는 逆說이 나온다.
자연히 理想鄕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뜻을 따르도록 강요하게 되고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억압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의 맹목적인 복종을 얻어내기 위해서 사람들의 本性을 파괴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레닌·스탈린·毛澤東, 그리고 金日成과 같은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시도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히틀러와 같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시도가 얼마나 큰 재앙인지는 충분히
증명되었다.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한다』 近代에 나온 反理想鄕 작품들은
理想鄕의 시도가 불러오는 그런 재앙을, 특히 개인적 자유의 억압과 인간성의 파괴, 그리고 사회의 조직화를 경계했다. 그것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잘 알려진 것들은 H.G 웰스의 「달의 첫 사람들」(1901), 러시아 작가 예프게니 자미아틴의 「우리」(192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 그리고 조지 오웰의 「1984년」(1949)이다. 이 작품들은 理想鄕의 건설이라는 명분 아래 사람들의 본성을 극도로
억압하는 사회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렸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나오는 경향들을 살피는 데는 조지 오웰의 작품이 특히 도움이 될 것이다.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그린 사회는 1984년의 영국을 무대로 한 전체주의 사회였다. 그 사회에선 「大兄(대형·Big
Brother)」이라고 불리는 통치자가 잘 조직된 사상 경찰과 광범한 감시 체계를 통해서 시민들을 극도로 통제한다. 그
사회에선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시민들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통치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眞實部(진실부)」에서는 「전쟁은 평화다」,
「자유는 예종이다」, 「無知는 힘이다」라는 구호들을 끊임없이 시민들에게 주입하고 시민들은 그런 진실들을 믿는다. 그렇게
시민들을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통치자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존재들로 만들기 위해선, 사실을 조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역사적 사실들은 그런
맹목적 충성을 방해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든 전제적 정권들은 역사적 사실들을 삭제·왜곡하고 꾸며냈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과 지난 반세기 동안의 북한이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통치 권력에 의한 그런 역사 조작의 효력은 대단하다. 역사의 조작이 철저하게
시행되면, 그래서 모든 기록들이 똑같은 거짓말을 하게 되면, 거짓말이 진실로 남게 된다. 그래서 「1984년」의 사회에선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한다.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Who controls the past controls the
future. Who controls the present controls the past)』라는 구호가 통치 권력인 「黨」의 공식적인
슬로건이다. 『우리 문명은 증오에 바탕』 사람의 本性에서 가장 좋은 특질들, 즉
친절·신의·사랑·정의감과 같은 德性들은, 압제적 체제를 위협한다. 따라서 전제적 권력은 그런 덕성들을 없애려고 애쓴다. 「1984년」의 주인공
윈스턴을 고문하는 관리는 이렇게 말한다, 『옛 문명들은 자기들이 사랑과 정의에 바탕을 두었다고 주장했다. 우리 문명은
증오에 바탕을 두었다. 우리 세계에선 두려움·분노·득의, 그리고 자기비하말고는 아무런 감정도 없을 것이다. 다른 모든 것들을 우리는 없앨 것이다
- 모든 것들을』 이어 그는 『늘 존재하는 것은 「권력 중독」과 「승리의 스릴」, 無力한 敵을 짓밟는 감각』이라고 말한다.
사회의 앞날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자네가 미래의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면, 사람의 얼굴을 언제까지나 짓밟는
장화를 상상해 보게』 그런 사회에서 사랑은 체제에 너무 불온한 것이다. 당연히 권력은 그것을 없애려 애쓴다. 그래서
주인공과 그의 연인은 고문을 받고 끝내 서로 미워하게 되고 배신한다. 한국은 나치즘의 등정 가능성이 높다 反理想鄕의 모습을 그린 소설 작품들은
많지만, 그런 反理想鄕이 나오는 과정을 그럴 듯하게 그린 작품들은 아주 드물다. 反理想鄕의 모습은 흥미롭고 교훈적이지만, 그런 惡夢(악몽) 같은
상황이 나오게 된 까닭과 과정은 훨씬 더 흥미롭고 중요하다. 그런 까닭과 과정을 살피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역사적 사례들은
물론 공산주의 실험과 국가사회주의(나치) 실험이다. 둘 다 20세기에 나왔고, 세계의 대부분에 영향을 미쳤고, 오래 지속되었고, 무엇보다도
실제로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었으며, 실패한 뒤에도 여전히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 두 例들 가운데
反理想鄕이 나오는 과정을 살피는 일에서 우리에게 좀더 쓸모가 큰 것은 국가사회주의의 경험이다. 공산주의는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않은 사회들에서 非合法的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1910년대의 러시아, 1940년대의 중국, 北베트남, 그리고 북한은 모두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사회들이었고,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지닌 武力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반면에, 1920년대의
이탈리아와 1930년대의 독일에서 보듯, 국가사회주의(나치)나 파시즘은 민주주의를 경험한 사회에서 합법적 절차를 통해서 권력을 장악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정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국가 수반(무솔리니는 국왕, 히틀러는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 집권했다. 따라서 이들의 집권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합법적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간단히 얘기하면, 국가사회주의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한
이념으로, 강세는 민족주의에 주어진다. 반면에 공산주의는 계급 투쟁을 본질적 현상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국가사회주의자들에겐
민족이 가장 근본적 개념이고, 공산주의자들에겐 계급이 가장 근본적 개념이다. 자연히 前者는 본질적으로 국제적 連帶(연대)에 관심이 적었고,
後者는 처음부터 국제적 連帶를 중시했다. 민주주의를 경험한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집권했고 민족주의를 통해서 理想鄕을 건설하려
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선 공산주의보다 국가사회주의식의 전체주의가 득세할 가능성이 높다. 바로 거기에 우리가 국가사회주의가 집권하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꾼 과정을 자세히 살펴야 할 까닭이 있다. 「국가사회주의의 이탈리아적 형태」라고 할 수 있는 파시즘은
1919년 3월23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창립 집회에서 공식적으로 태어났다. 당시 발표된 政綱(정강)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따랐다. 특히
두드러진 점들은 재산권에 대한 공격, 악마화된 「내부의 敵들」에 대한 폭력적 공격, 법의 지배의 외면, 사회 체제에 대한 경멸이었다.
파시즘은 「全體主義(전체주의)」라는 말을 낳았다. 원래 이 말은 이탈리아 의회에서 무솔리니에 저항했던 정치 지도자 지오반니 아멘돌라가
공직을 독점하려는 파시스트를 비난하는 1923년의 연설에서 처음 사용했다. 무솔리니는 거꾸로 그것을 자신의 이념을 가리키는 말로 삼았다.
그런 명칭이나 분류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의 이론적 내용은 아주 빈약해서 구체적 정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무솔리니는
그 점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20세기 全體主義 사상을 연구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무솔리니에 대해 『아마 공식적 프로그램을 의식적으로
배척하고 그것을 고양된 지도력과 행동만으로 대치한 첫 정당 지도자』라고 평했다. 『파시즘은 보통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자라날 수 없어』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무솔리니가 일반 시민들의 지지를 통해서 집권하고 통치했다는 사실이다. 「파시즘의 해부」에서 미국
역사학자 로버트 팩스턴은 그 점을 살펴야 국가사회주의를 이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파시즘 운동들은 보통 사람들의,
심지어 전통적으로 좋은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결코 자라날 수 없었다. 파시스트들은 국가 수반, 정당 지도자들, 고위 정부
관리들과 같은 전통적 정예들의 순응 또는 심지어 적극적 동의 없이는 결코 권력을 얻을 수 없었는데,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전투적 파시스트들의
야비함에 대해 불쾌감을 느꼈다. 권력을 쥔 파시즘의 난폭한 행위들도 또한 판사들, 경찰 간부들, 군대 장교들, 기업가들과
같은 기성 체제의 구성원들 사이에 널리 퍼진 共謀(공모)를 필요로 했다. 파시스트 정권이 움직인 방식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우리는 보통 사람들의
수준까지 파 내려가서 그들이 일상적 행위들에서 한 진부한 선택들을 살펴야 한다. 그런 선택들은 일견 작아보이는 惡을 받아들이거나 단기적으로는
너무 해롭지 않은 것처럼 심지어 개별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엄청난 결과들로 쌓인 어떤 난폭한 짓들을 외면하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무솔리니는 교사였고, 히틀러는 실패한 화가였고, 요제프
괴벨스(나치의 선전장관)는 직업을 갖지 못한 문학청년이었고, 헤르만 괴링(나치 정권의 2인자·공군 총사령관)은 떠도는 퇴역 전투기 조종사였고,
하인리히 히믈러(나치 친위대 사령관)는 농사에 실패한 농장주였다. 군중들을 조종하고 선동하는 재주를 빼놓으면, 그들은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
바로 거기에 그들의 놀랄 만한 성공의 비밀이 있다.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군중을 조종하고 그들의 울분과 증오를 선동하는
능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선 보통 선거제도가 자리잡았고 대중은 선거권을 얻었다. 그래서
갑자기 늘어난 대중의 정치적 힘을 잘 이용하는 세력이 권력을 쥐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국가사회주의자들은 그 점에서 뛰어났다. 그들은 정치 집회와
선전 수단을 통해서 군중을 동원하고 현란한 「무대연출」을 통해서 군중을 열광시키고 準군사조직과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통해서 군중을 통제하고
훈련했다. 그리고 군중을 동원한 찬반 국민투표를 통해서 선거의 위험을 피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을 경계해야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젊은이들의 동원에 특히 능란했다. 그들은 갖가지 청년 조직들을 통해서 젊은이들을 끌어들여 조직했다. 제복을 입고 행진하는
국가사회주의 단체들에 속하는 것은 젊은이들에겐 부모의 간섭에 대한 반항의 길이었다. 그래서 국가사회주의는 다른 어떤 정치적 운동보다 「젊은이들의
반항의 선언」의 특질이 짙었다. 이런 「群衆(군중) 정치」가 국가사회주의와 「古典的 專制主義(고전적 전제주의)」를 나누는
특질이다. 「고전적 전제주의」가 시민들에게 침묵을 강요했던 것과는 달리, 국가사회주의는 대중을 거리로 끌어내서 군중의 狂的 에너지를
자유민주주의의 기구들과 적법적 절차를 파괴하는 데 이용했다. 「군중 정치」를 권력의 장악과 유지의 핵심으로 삼았으므로,
국가사회주의자들은 대중 매체의 장악과 이용에 힘을 쏟았다. 선전장관 괴벨스가 나치 독일에서 차지한 위상이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자연히 그들은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대중 매체를 철저하게 짓밟았다. 파시즘이 공식적으로 탄생한 뒤, 무솔리니가 처음 한 일은 사회주의 일간신문 「아반티」의
밀라노 支局을 파괴한 것이었다. 「法의 지배」를 부정한 이 폭거에서 네 사람이 죽었다. 어떤 세력이 일방적으로 강요한
理想鄕은 개인적 자유의 억압과 사회의 조직화를 통해서 反理想鄕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필연적 과정이다. 反理想鄕의 모습은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이미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경험이 많이 쌓인 우리 사회에선, 20세기 초엽의 러시아처럼 공산주의 政變이
일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大衆선동과 群衆의 狂氣에 기초를 두고, 합법성을 가장해 집권했던 국가사회주의와 같은 독재체제가
들어설 위험은 점점 커지고 있다. 찬찬히 살펴보면, 이미 우리가 그 길로 접어들었다는 징후들이 많이 눈에 들어온다. 보통선거가 자리잡은 사회에서
나치와 같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한 독재체제」가 들어서기는 쉽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국가사회주의의 위험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한 가지는 분명하다. 국가사회주의는 보통 사람들이 그것에 순응하거나 지지한 뒤에야 자라날 수 있다. 사람은 자신들에
맞는 지옥을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