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
"당쟁은 게임의 법칙 지닌 정치투쟁... 자기모멸은 곤란"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의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 1907)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역사란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예측할 수 없는 어떤 우발성이 역사를 지 배하기 때문에 인간은 역사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에 대하여 회의에 빠질 때가 많다. 역사주의자들은 거기에 반드시 어떤 법칙이 있고 따라서 그 교훈에 따라 살 때 인간이 행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가 하면, 예정조화설을 믿는 운명론자들이나 신앙인들은 인 간으로서는 그 흐름을 도저히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기도하 고 그 다음의 일은 절대자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체념한다. 역 사의 우연과 필연을 따지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지만, 굳이 이 문제에 대한 나의 경험을 말하자면, 역사의 우발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며 그 위력도 또한 크다는 입장이다.
이 약탈은 10월 26일까지 10일간 계속되었다. 양민이 학살되고 강 화도는 폐허나 다름없이 유린되었다. 이제 프랑스 군대는 더 이상 거 칠 것이 없이 강화도를 싸다니며 '소풍'(picnic)을 즐기게 되었다. 그날도 프랑스 군대는 조랑말에 점심을 싣고 정적만이 감도는 강화도 의 논길을 거닐며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점심을 실은 조랑말이 건너편 논두렁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프랑스 병사들 이 기를 쓰고 달려갔지만 허사였다. 사실을 알고 보니 그들의 점심을 실은 조랑말이 수놈이었는데 건너편에서 암말이 암내를 내며 수컷을 유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점심도 굶어 배도 고픈 데다가 강화도 라는 곳이 소문으로 듣던 대로 금은 보화가 쌓여 있는 곳도 아님을 알게 된 프랑스 군대는 퇴각을 결정했다.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Adm. P G Roze)은 당초 조선 정부 가 프랑스 신부를 살해하고 교도를 탄압한 것을 문책하고 이를 빌미 로 조선과 수교를 하려는 목적으로 내항했으나 이곳의 책임자(강화 유수)와 이 문제를 담판할 계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약탈할 물건도 없음을 알았다. 이들이 퇴각하자 대원군은 자 체의 방어력으로 서양 오랑캐들을 무찔렀다는 자부심으로 더욱 쇄국 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먹(묵) 제조업자들에 게 척화의 문구를 먹에 새겨 넣도록 하고 천주교들을 더욱 엄혹하게 처형했다. 이 일련의 사건이 한국사에서 이른바 병인양요의 실상이다. 이런 일이 있은 지 5년이 지난 1871년 5월에는 다시 미국의 아세 아 함대 소속 로저스 제독(J Rodgers)이 제너럴 셔만호 소각 사건을 문책하고 이를 빌미로 조선과 수교하기 위해 함선 5척을 이끌고 다시 강화도를 찾아왔다. 당초 이들은 무력으로 조선을 위협하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섬에 올라 주민들과 술도 나누며 수화로 친교를 나누었고 주민들은 함께 술을 마신 후에 남은 맥주병을 신기 하게 바라본 다음 소중하게 싸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등 분위기는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행 중에 북경 공사 로(F F Low)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이름 그대로 천박한(low) 사람이었다. 그 는 당시에 승선했던 650명 정도의 병력이면 조선을 정복할 수 있으리 라고 로저스 사령관을 꼬드기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적대 행위가 시작 되었다.
이상의 기록은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 중에서 병인양요 편과 신미양요 편에 나오는 기록인데 필자는 이런 정황 설명을 통하 여 역사란 때로는 어이없는 사건으로 인하여 엉뚱하게 그 물길을 바 꿔 놓는 일이 허다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역사에서 가설이란 무의미 한 것이지만, 만약 그러한 우발적 사건이 없었더라면, 한국 개화사는 비극이 아닌 좀더 평화로운 방법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다. 이 책은 전 3부 53장으로 되어 있는데 제1부(1-22장)는 고대·중 세사를, 제2부(23-38장)는 문화사를, 제3부(39-53장)는 천주교의 전 래로부터 을사조약의 체결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 글이 한국에 소개 되었을 때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찬반의 이론이 많았다. 특히 문일평 선생 같은 분은 이 글에 수록된 그림들, 이를테면 식탁이나 두발의 모습이 한국의 것이 아니며, 그는 한국에 와 본 적도 없이 일본에서 썼기 때문에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도외시했다. 문일평의 주장이 일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피스의 저술을 둘러싼 논쟁이 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지 않고 여전히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중요 사료로 회자되는 것은 바로 제3부의 서술이 어느 자료보다도 정확하 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글은 헐버트(H B Hulbert)의 "대한 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1906)가 출판되기 이전까지는 미 국의 독자들이 한국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교재가 되었다. 그리피스는 본시 역사 학자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한국에 대한 관 심을 가진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화학자로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 직 후에 신식 교사로 초빙되어 머무는 동안 일본의 문화에 매혹되어 일 본의 문화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의 문화와 역사를 연 구하면 할수록 그는 한국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일본의 진정한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고 그래서 다시 한국의 역사와 문화사를 공부하여 나온 노작이 바로 이 "은자의 나라 한국"과 "일본 에 미친 한국의 영향" 및 "한국에 대한 일본의 부채"라는 책이었다. 그는 대한제국의 멸망을 하나의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이러한 시 각이 보는 이에 따라서는 그를 친일 사학자로 규정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지만 그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대 한제국의 멸망을 연민의 눈길로 바라본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정치학을 공부하는 나로서 이 책을 통하여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대목은 소위 당쟁에 대한 그의 인식이다. 우리의 역사학에서 당쟁은 악이었다. 당쟁이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전혀 갖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오늘날 당쟁이 이토록 비하된 것은 식민지 사학의 결 과였다. 일제는 조선 병합의 논거를 우리의 역사에서 유추하려고 시 도했고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한국사를 끝없이 왜곡했는데 그 대표적인 희생물이 곧 당쟁이었다. 그들은 당쟁의 시 한과 그 참상을 과장했고 그것이 곧 망국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것이야말로 한국인의 민족성에 자리잡은 사악함 때문이라고 확대 해석했다. 심지어 일제의 시학관이었던 호소이 하지메와 같은 인물은 한국인들은 피의 색깔도 문명인과 달라 거무튀튀하여(유혈) 천성적으 로 싸우고 남을 헐뜯기 때문에 독립 국가로서의 자격이 없어 한일 합 방을 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자기모멸적 인식에 대해 그리피스가 설명한 한국 당쟁사는 많은 시사를 준다. 그는 결코 당쟁을 미화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쟁을 우리만이 가진 정치적 해악이라고 표현하지도 않았다.당 쟁에 나쁜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원초적으로 정치라는 행태에서 빚어 지는 악이지 한국의 당쟁에서만 유별나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따라서 당쟁은 서구의 초기 민주주의 과정에서 흔히 있었던 정치적 투쟁이요 권력을 잡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며 이런 점에서 서구의 정당 정치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시역과 패륜이 난무하는 서구의 정치사에 비하면 조선조의 당쟁은 어 느 정도의 도덕성과 나름의 게임의 법칙이 있었다고 그는 결론짓고 있다. 이런 점에서 맹자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교훈 을 준다.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가 스스로를 멸시한 연후에 남들도 나를 멸시한다.' (신복룡 건국대 교수· 정치학 )
◇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 1843-1928) -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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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1999.09.09 /156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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