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싶은 글

서세동점기의 교두보 `서해5도'...영 지리학자 탐사기 남겨

이강기 2015. 9. 7. 22:42

서세동점기의 교두보 `서해5도'...영 지리학자 탐사기 남겨 .

---------------------------
배질 홀(Basil Hall)
'조선서해탐사기' (London, 1818)
---------------------------
때는 1817년 초, 아프리카 서남 해안, 육지로부터 2000㎞ 떨어진 대서양에 한 척의 범선이 미풍을 타고 조용히 북상하고 있었다. 선 장의 이름은 배질 홀로, 영국의 동인도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 는 길이었다. 그때 항해사가 항로 앞에 섬이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 배질 홀 일행이 그린 조선의 관리와 수행원.
즉시 해도를 살펴보니 그 섬의 이름은 센트 헬레나(Saint Helena) 였다. 선장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홀은 즉시 배를 그 섬에 정박하도록 했다. 넓이라고 해야 200㎢도 안되는 이 작은 섬에 선장이 그토록 감회에 젖은 것은 바로 그 섬에 희대의 영웅 나폴레 옹(Napoleon) 황제가 유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단순히 구라파 역사의 한 인물로서가 아니라 홀에게는 남다른 인연이 있었 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파리의 브리엔느 유년 사관학교에 다닐 적에 나폴레옹은 그가 가장 아끼던 후배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지금은 유폐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희대의 영웅 앞에 홀 선 장은 정중한 예의로 알현했다. 나폴레옹은 그때까지 살아 있었던 선 장의 아버지에 대한 안부며 항로를 물었다. 홀 선장은 자신이 지금 조선이라는 나라를 탐사하고 오는 길이라며 장죽과 큰 갓을 보여 주 면서 조선의 풍물을 소개했다. 기이한 조선의 토산품을 바라보며 나 폴레옹이 조선이라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인정과 풍속은 어떻더냐 고 묻자 홀은 대답하기를, '이 나라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어서 이제까지의 유서 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남의 나라를 침략해 본 적 이 없는 선량한 민족'이라고 설명했다. 이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빙 긋이 웃으며, '이 세상에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 보지 않은 민족도 있다더냐? 내가 다시 천하를 통일한 다음에는 반드시 그 조선이라는 나라를 찾아보리라'고 말했다.

▲ 아세스트호의 서해 탐사로 Yellow Sea(황해). Sir James Hall Group(백령도) 표기 등이 눈에 뜬다.
'지리는 역사가 그려지는 화판'이라는 경구가 있듯이, 요즘 한국 에서 첨예한 관심이 되고 있는 서해 5도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나는 이것이 단순히 남북한의 현재적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뿌리 가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사에 들어와서 한국전쟁 당시에 이곳이 피차간의 공방의 요소였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고 예로부터 이곳은 조선으로 상륙하는 교두보였다.

1800년대 초엽부터 시작된 서세동점기에 서방 국가들이 한국을 기웃거리면서 주목한 요충지는 서해 5도로 둘러싸인 옹진반도, 강화 도로 둘러싸인 인천항, 그리고 아산만 등의 세 곳이었다. 그런데 미 국이 인천만을 중시했고 독일이 아산만을 중시한 것과는 달리 유독 영국은 이 옹진반도 일대를 중시했으며 그 결과로 조선을 탐사하기 위해 최초로 한국에 온 사람이 곧 배질 홀 선장이었다.

홀 선장이 백령도에 상륙한 것은 정확히 1816년(순조 16년) 9월 1일이었다. 그는 이곳이 향후 조선과의 개항 문제에서 후두부에 해 당되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정확한 해도를 그린 다음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이곳을 써제임스 홀 군도(Sir James Hall Group)라고 명명했고 이 명칭은 서구에서통칭으로 알려져 있었다. 섬에 올라 보 니 인가는 약 40호가 되었으며 대단히 평화로와 보였으나 사람들의 얼굴은 검게 탔으며 매우 거칠어 보였다고 한다. 홀의 일행이 백령 도에 상륙하자 주민들이 다가오더니 제일 먼저 표시한 의사는 손으 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신들의 상륙으로 인 하여 주민들의 목이 달아난다는 뜻인지 아니면 침입자의 목이 달아 난다는 뜻인지를 알 수 없으나 빨리 떠나라는 뜻임에는 틀림이 없었 다.

그 어느 쪽이든 간에 홀은 주민들이 막무가내로 막아서는 것을 뿌리치고 마을로 들어섰다. 주민들은 종이로 배를 만들어 바람이 부 는 방향을 가리키며 연신 바다로 떠나 보내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보아 홀의 상륙을 반대하고 있음이 여전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들 의 기호품과 조선의 토산품을 몇가지 바꾸었다. 주민들은 특히 시계 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며 바닥에 글을 써서 의사를 표현하려 했으나 끝내 소통되지 않자 손짓으로 의사를 소통했다. 그들이 백령도를 떠 날 때 아이들만이 천진하게 뒤를 좇아오며 파란 눈과 긴 코를 신기 한 듯이 바라보았다.

▲ 소청도 주민들.
서해 5도를 떠난 홀의 일행은 덕적군도와 격렬비도를 거쳐 9월4 일에 장항만에 정박했다. 그들이 상륙하자 현감과 방위 책임자가 직 접 찾아와 퇴거를 정중히 요구했다. 당일자 "조선왕조실록"(순조실 록 16년 7월 병인조)에 따르면 이때 홀을 방문한 관리는 비인 현감 이승렬과 마량진 첨사 조대복으로 되어 있다. 홀의 눈에는 그들의 큰 갓과 장죽이 기이하게만 보였다. 여느 곳과는 달리 관리의 일행 은 배에 올라 장비며 구조를 살펴보았다. 그들은 장만해 온 붓과 먹 으로 뭔가를 물어 보았으나 알 턱이 없었다. 훗날 홀 선장이 중국으 로 돌아가 한문을 아는 사람에게 물어 보니 그것은 '당신들은 어느 나라에서 무슨 일로 왔는가?'를 묻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 제 수화로 의견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관리들에게는 두려움 과 경계의 빛이 역력했다.

이럴 경우 인간사가 다 그렇듯이 그 서먹함을 씻어 주는 것은 술 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선장은 생각했다. 관리의 일행은 흔쾌히 술대접을 받았다.

현감의 일행은 모든 사람의 잔이 찰 때까지 기다리는 예의를 잊 지 않는 것을 보면서 홀은 그 관리가 매우 정중한 사람이라는 인상 을 받았다. 이 '마법의 물'은 결국 두 무리의 가슴을 열게 했고 술 이 거나한 그들은 손짓 발짓으로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해가 지자 일행이 돌아가는데 뱃전에 내린 현감은 느닷없이 바닷가에 형 틀을 차렸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의아해 하는 홀의 면전에서 현감은 어느 한 하급 관리를 엎어놓고 심하게 곤장을 치는 것이었다. 영문 을 알아보니, 사람 사는 데에는 늘 촐싹대고 버릇없이 나대는 사람 이 있게 마련인데, 현감은 홀 일행과 술을 나누고 배를 돌아보는 동 안 무례함을 저질렀던 한 사람을 치죄하는 것이었다.

이 당시 현감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그들의 복식과 문자가 소상하게 소개되어 있고 일행 중에는 여자도 있었다고 한다. 일행이 몇명이냐고 물어 보니 선장은 두 손가락을 여덟 번 펴 보였다. 그들 은 영국 범선에 실린 문명의 이기를 경이로운 느낌으로 기술하고 있 으며, 전혀 적의 같은 것을 나타내고 있지 않다. 그의 보고서는 당 시의 서양관을 지배하고 있던 오랑캐(양이)에 대한 비하는 전혀 보 이지 않는다. 현감의 일행은 특히 서양 책에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대영백과사전"을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것은 항해의 참고 도서 였기 때문에 줄 수가 없어서 홀의 일행 중에 누군가가 다른 책 세권 을 빼어 선물했는데 아마도 그것은 성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의 처신과 관심사로 미루어 볼 때 이승렬은 꽤 개명되었거나 사려 깊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홀 일행의 상륙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비인 현감 이승렬.
이튿날이 되자 현감은 전날처럼 여전히 '방석 담당자'를 대동하 고 일찌거니 다시 찾아 왔다. 그는 이번에는 맥스웰 대령이 지휘하 는 또 다른 함선인 알세스트호를 보고 싶어했다. 맥스웰 선장은 이 를 흔쾌히 받아들여 술자리를 베풀었다. 그런데 이때 현감의 일행 중에 급한 환자가 발생했다. 급히군의관이 호출되어 혀를 검사하고 맥박을 재고 응급 처치를 하여 깨끗이 나았다. 그 병명이 무엇인지 에 대해 홀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현감의 일행은 서양 의학의 경 이로움을 경탄하며 감사했다. 다시 술이 한 순배 돈 다음 알세스트 호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현감이 단도에 깊은 관심을 보이자 선장은 이를 선사했다. 현감의 도포 소매가 여러 가지 선물로 묵직했다. 선 상에 올라간 현감은 대포의 시범 발사를 요구했다. 18파운드의 함포 를 낮게 조준하여 발사하자 일행은 놀라며 즐거워했다.

선상에서 아침 식사 시간이 되자 현감은 서양 식사를 대접받았다.

그는 젓가락을 구해 주겠다는 선장의 제의를 거절한 채 서양식으로 식사를 하는데 그 품위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것을 보며 선장은 그의 매너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식사를 마친 홀 선장의 일행은 육 지에 상륙하고 싶다는 의지를 간곡하게 표현했다. 그에 대해 현감은 연신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몹시 난감해 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홀의 일행이 막무가내로 상륙하자 현감은 눈물을 흘리며 앞 장을 섰다. 그는 심지어 시중을 드는 사람의 어깨에 기대어 큰 소리 로 울기도 했다. 그는 말끝마다 손으로 목을 쳤으며,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는 동작을 두번 하면서 잠자는 몸짓과 함께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보아 외국인을 이틀씩이나 재워 줌으 로써 이제 자신은 죽은 목숨임을 강조했다. 그러한 경황 중에도 현 감은 물과 조개 요리를 가져오도록 하여 바닷가에서 나그네를 접대 하는 후의를 잊지 않았다.

이틀을 묵고 떠나면서 홀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이곳 장항만을 배질만(Basil's Bay)이라고 명명했다. 떠나면서 홀 선장은 현감에게 성경을 선물했다. 현감은 부두에 나가 떠나가는 홀 일행을 진심으로 전별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다가올 자신의 운명에 대한 걱정 때 문인지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홀 일행은 장항만을 떠나 고군산 군도와 신안해협과 제주도를 지나면서 주민들을 만나 몇가지의 한국 어 어휘를 수집하고 풍어제를 감상했다. 주민들은 같은 마을 사람처 럼 다정하게 대해주었으며 함께 술을 마시며 즐겁게 보냈다고 홀은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9월 10일에 10일 동안의 여정을 마치고 귀국 길에 올랐다.

이상과 같은 홀의 기록은 몇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로 홀 의 일행을 맞는 주민들의 태도가 한결같이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이 다. 우리는 서세동점기의 한국인들이 서구인들을 기피했다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서구인과의 갈등은 지배 계급의 오판이 빚은 실수일 뿐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는 아니었 다. 집권자들의 그와 같은 주자학적 세계관에 의한 배외 의식은 그 후 대한제국의 멸망이라는 비극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둘째로, 그들은 육지나 섬에 상륙할 때마다 매우 진지하게 지질 조사를 했으며 끝없이 금을 찾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항해사였음에 도 불구하고 전문가의 수준에 이르는 지질학의 지식을 갖추고 있었 는데 이는 영국의 대한 접근의 동기를 이해하는 하나의 준거가 될 수 있다.

셋째로, 그들이 조선의 서해를 탐사하고 그린 지도의 정교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에 제작된 것임 에도 불구하고 인공 위성으로 촬영된 지금의 위도와 거의 다름이 없 으며,이는 당시 해상 강국으로서의 영국의 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 이 된다.

<배질 홀 연표>
▷1788년, 제임스 홀 경(Sir James Hall)의 차남으로 출생. 그 의 아버지는 케임브리지대학의 크라이스트 칼리지(Christ's College, Cambridge)의 지질학자 겸 화학 교수로서 명문의 후예였음.

▷1802년, 에딘버러대학을 졸업하고 해군에 입대, 초급 장교 시 절에는 주로 북미주에서 근무함.

▷1812년부터는 프리깃함 볼테이지(Voltage)호의 장교로 동인도 회사에 근무. 이때 범선 리라호(Lyra)를 타고 중국 광동성을 방문.

▷1816년 알세스트호(Alceste)의 선장 맥스웰(Murrey Maxwell)과 함께 한국의 서해안에 머물며 해안의 지질과 풍속을 탐사함.

▷1817년에 영국으로 돌아온 홀은 선장으로 승진하여 주로 북미 와 남미에 근무함.

▷1825년에는 스페인 총독 헌터(John Hunter)의 딸과 결혼 ▷1831년 이후 영국 런던에 정착하여 여생을 마침.

▷왕립천문학회(Royal Astronomical Society), 왕립지리학회(Royal Geographical Society), 왕립지질학회(Royal Geological Society) 정회원.

(신복룡/ 건국대 정외과 교수).

.


주간조선1999.07.08 /156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