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싶은 글

'한국의 개화 여성'…'파란 눈의 명가' 원조 할머니 언더우드여사

이강기 2015. 9. 7. 22:40

'한국의 개화 여성'…'파란 눈의 명가' 원조 할머니 .

언더우드여사


'상투의 나라'(Among Top-knots, 1904)
'조선생활기'(Tommy Tomkins, 1905).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남자들이 역사에서 더 강하게 역할했다고 우 쭐대지만 인간의 내면에 들어가면 오히려 여자가 남자보다 더 강인하 다고한다. 역사의 표면에 나타난 지배자의 군상을 보면서 역사가 마치 남자들의 것인양 기록되어 있지만 어느 사건, 어느 위인의 배후에나 그 남자에 못지 않은 여인들의 역할이 있었다. 때로는 어머니일 수도 있고 때로는 아내일 수도있는 이들의 역할은 한국의 개화사에서도 마 찬가지이다. 예컨대 그 시대를 살다간 대표적 개화 여성이었던 언더우 드 여사가 그렇고 민비 또한 그렇다.

▲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 박사의 가족들. 지난 5월 미국에 있던 언더우드 박사의 유골을 서울 마포구 합정동 외국인 묘지공원으로 이장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뒷줄 오른쪽 두번째가 손자인 원일한 연세대 재단이사. 앞줄 왼쪽이 증손자인 원한광 연세대 교수.
때는 1888년 3월, 음산한 제물포항에 일본의 상선 한 척이 정박하 면서 많은 승객들이 하선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미모의 한 미국 여성 이 있었는데 처녀라고 하기에는 이미 과년한 38세의 호튼(Lillias Hor- ton)양이 바로 그였다. 미국의 명문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그리스도 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미지의땅 조선에 상륙했지만 미국 양가의 처 녀가 문명이 다르고 풍습이 다른 조선에서 겪은 생활은 무척이나 힘들 었던 것같았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콜레라 환자들과 함께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을 다하려고 했지만 다가오는 고독과 문화 충격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럴 무렵 그의 주변에 한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났다. 언더우드(H G Underwood: 1859-1916)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명문 뉴욕대학을 졸업 하고 다시 뉴 브런스위크 신학교를 졸업한 후 한·미 수교와 함께 고 종의 초빙으로 내한한 언더우드는 광혜원에서 자연과학을 가르치는 한 편 새문안교회를 창설하여 목회를 하는 젊은이었다. 광혜원이라는 동 일한 공간과 이국의 외로움,그리고 같은 사명감을 가진 두 사람은 호 튼 양이 8년의 연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호 튼이 내한한 이듬해인 1889년, 국왕이 하객으로 보낸 한규설과 민영환 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에 골인했다.

1884년의 갑신정변 당시에 개화파의 저격을 받고 목숨이 위태로왔 던 척신민영익이 미국인 의사 알렌(H N Allen)의 도움으로 살아난 후 양의에 대한 경이로움이 자자하던 차에 서양의 여자 의사가 내한했다 는 사실은 왕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특히 남자 어의에게서 치 료를 받아야 했던 민비로서는 언더우드 여사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여 그의 결혼식에 축의금으로 100만냥을 보내주었는데, 당시 웬만한 부호 의 유동 자산이 3000냥이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 액수의 크 기와 민비의 관심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언더우드 여사에 따르면 생전의 민비는 정적에게 노출되는 것을 꺼려했으며 사진을 찍으면 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해 사진 촬영을 꺼려했다는 것. 따라서 민비의 진짜 사진은 없다는 게 심복룡 교수의 주장이다.
언더우드 여사는 곧 민비의 초대를 받고 입궐하여 민비의 어의가 된다. 그가 입궐해서 보니 민비는 남자 전의로부터 '사진'을 받고 있 었다. 사진이라 함은 남자 의사가 왕비의 몸에 손을 댈 수 없기 때문 에 손목의 맥박에 실을 맨 다음 문밖에 앉아 그 실을 통하여 전해오는 박동으로 진맥을 하는 방법이었다. 혀를 살필 일이 있으면 문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혀만을 내밀고 검진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서 언더우드는 경이와 탄식을 함께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다. 언더우드가 민비로부터 지극한 신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금이나 은이 아닌 쇠붙이 로 만든 주사를 놓고 몸에 칼을 대는 일은 끝까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는 의료 활동뿐만 아니라 남편을 따라 서북 지방과 관서 지방의 선교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불비한 숙박 시설, 강도와 맹수로 인 한 생명의 위협, 그리고 처음 보는 서양 여자에 대한 한국의 호기심에 시달리면서도 그들은 전도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지방으로 여행 을 떠나면 서양 여자를 구경하기 위해 40리 밖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와 구경하는 바람에 자신의 여행이 마치 '순회동물원'과 같았다고 그는 회고하고 있다. 당시는 선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시대였기 때 문에 평안도에서 세례를 줄 때는 교인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가 세 례를 준 다음 되돌아 왔다고 한다.

그는 개화기의 중요한 사건을 가장 근거리에서 바라본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민비 시해 사건을 지켜 본 증인으로 당시의 정황을 소상하 게 기록하고있으며, 아관파천은 남편 언더우드와 알렌 공사가 꾸민 일 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들이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모시지 않고 러 시아 공사관으로 모신 이유는 미국 공사관의 수비대가 러시아 공사관 의 수비대 만큼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이면사도 털어놓고 있 다.

언더우드 여사의 기록 중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는 민비에 관한 부분이다. 그가 민비의 어의였다는 사실과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의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맞물려 그의 기록은 독보적인 가치 를 가지고 있다. 민비의 기록으로서 먼저 살펴 보아야 할 대목은 그의 모습에 관한 부분이다.

언더우드 여사의 기록에 의하면 민비는 얼굴이 창백했으며 몸매는 가냘펐다고 한다. 눈은 날카로왔으며 어느 모로 보나 미인이라고는 할 수없지만 이목구비가 뚜렸했고 총명해 보였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민 비를 알현하고 그의 모습을 기록한 비숍(I B Bishop)의 기록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학계에서 논의가 분분한 민비 사진의 진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이 언더우드 여사에 의해 밝혀지 고 있다. 우선 우리 학계에서 민비의 사진이라고 거론되고 있는 것은 (1)번의 사진으로서 국정교과서에까지 그렇게 수록되어 있다. 이 사진 은 조선 주차 이탈리아 영사였던 로제티(Carlo Rossetti)의 "꼬레아 꼬레아니"(1905)와 언더우드의 "조선생활기"(Tommy Tomkins, 1905)와 헐버트(H B Hulbert) 목사의 "대한제국멸망사"(1906)에 수록되어 있 다. 그런데 세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헐버트와 언더우드의 사진 은 배경을 오려내고(trimming) 인물만 부각시킨 것이며 로제티의 사진 만이 원형 그대로 배경까지 살아 있다. 한국의 많은 학자들이 이 사진 을 민비의 진짜 모습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이 민비의 사진이 아닌 첫번째 이유로는 언더우드 여사가 자신 의 책에서 소개한 사진 (2)를 '정장한 한국의 여인'(A Korean Lady in Full Custume)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헐버트가 이 사진을 '정장한 궁 녀'(A Palace Woman in Full Regalia)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는 사 실이다. 로제티는 그의 근무 기간(1902년 11월∼1904년 4월)으로 볼 때 민비를 본 적이 없지만 민비의 어의로서 무시로 민비를 알현할 수 있었던 언더우드와, 대궐 출입이 빈번했고 고종이 가장 신임하던 헐버 트 목사가 이 사진을 가리켜 민비가 아니라는데 더 무슨 논의가 필요 하겠는가?.

이 사진이 민비가 아니라는 두번째의 논거는 사진 (3)이다. 이 사 진은 로제티의 책에 실려 있는데 자세히 보면 사진 (1)번과 배경이 같 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3)의 사진 설명이 '기생 의복 한 벌'이 라고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왕비가 사진을 찍었던 어좌에 기생의 옷을 걸쳐 놓고 찍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당시의 전제 군주 시 대의 풍속에 어좌에 기생의 옷을 걸어놓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생각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사진 (1)번과 사진 (3)번은 어느 동일한 세트에서 촬영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인물은 어느 궁녀가 대궐 밖 으로 출타하여 기념으로 찍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논의와 문제점이 노출되자 제3의 사진으로 사진 (4)가 등장했 다. 이 사진은 라게리(V de Laguerie)의 "조선전"(La Coree, 1898)에 수록된 것인데 그 구도를 정밀하게 살펴 보면 이는 사진 (1)번을 스케 치한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도 또한 민비의 사진이 아니다.

끝으로 사진 (5)번은 이승만 대통령이 쓴 저 유명한 "독립졍신" (1910)에 수록된 사진인데 이 박사는 이 사진이 명성황후라고 표제를 달았고 그의 명성에 힘입어 민비의 사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러 나 이것도 민비의 사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사진을 민비로 보기에 는 두가지의 의문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이 사진의 복식을 주목 해야 한다. 이 사진의 윗저고리는 여염에서도 하층민이나 입는 적삼이 다. 이 사진이 쪽을 찐 모습임을 미루어 볼 때 만약 이것이 민비의 사 진이라면 이는 왕비가 된 이후에 찍은 사진임이 분명한데 당시의 왕실 법도로 일국의 왕비가 적삼바람에 사진을 찍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둘째로 이승만 대통령은 1910년에 이 책을 낸 다음 해방 이 되어 귀국한 다음에 이 책의 개정판을 냈는데 초판(1910)에 실린 민비의 사진과 개정판(1954)의 사진이 자세만 같을 뿐 얼굴 모습이 많 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독립졍신"에 수록된 민비의 사진은 민비가 아닌 상상의 초상화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느 사진이 민비의 진영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비의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민비와 그토록 가깝던 언더우드 여사도, 비 숍 여사도, 그리고 헐버트 목사도 민비의 사진을 찍지 못했다. 그들이 수많은 사진 작품을 남긴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찍은 민비의 사진이 없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민비의 사진을 찍을 수 없 었기때문이었다. 그럴 만한 이유라 함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민비는 수많은 정적들에 둘러싸여 늘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 문에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실제로 그는 처 녀시절에 권력 다툼의 와중에서 아버지(민승호)와 어머니 한씨 그리고 남동생 셋이 폭사당하는 비극을 겪었고 이때로부터 늘 얼굴을 숨기며 살아왔다. 따라서 민비 시해 사건 당시에 일본의 낭인들이 민비의 얼 굴을 아는 사람이 없어 마구잡이로 죽이는 바람에 인명 피해가 더 컸 다.

민비의 사진이 없는 두번째 이유는 당시 한국 사람들은 사진을 찍 으면 혼이 빠져 나가 곧 죽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사진 촬영을 기피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서 조선의 사대부들 은 초상화를 그리기는 했어도 사진을 찍지 않았으며, 그들이 카메라 앞에 서기 시작한 것은 개화가 한창 진행된 이후의 일이었다. 실제로 민비는 자신의 불우한 가정 환경 탓에 어느 누구보다도 미신에 경도되 어 많은 비용을 지출했음을 알 수가 있다. 비숍 여사와 언더우드 여사 는 한국인의 이러한 사진 기피 심리로 인하여 더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없었음을 고백하고 있다.한 장의 사진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반문 할 수도 있지만 역사에서 정확은 미덕이기 이전에 신성한 의무이기 때 문에, 민비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호-불호를 떠나서 이 문제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민비의 역할에 대한 재평 가가 머리를 들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더욱 그렇다. (신복룡 건국대 정외과 교수).



● 언더우드 여사 (Lillias Horton Underwood: 1851-1921).

-뉴욕주 알바니(Albany)에서 태어남

-결혼 전의 이름은 릴리아스 S 호튼(Lillias Sterling Horton).

-시카고여자의과대학(Chicago Woman's Medical College: 지금의 노스 웨스턴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을 졸업

-졸업과 함께 1888년에 미국 장로교 선교국에 의해 한국에 파견 됨.

-1889년에 한국에서 활약하고 있던 초기 선교사인 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 1859-1916)와 결혼<

-광혜원의 의사로 활약.

-민비의 총애를 받아 을미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어의로서 활약 하면서 궁중의 많은 이면사를 목격할 수 있었음

-한국에서 33년을 보낸 후 타계하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힘.


주간조선1999.07.29 /1563호